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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 천국에서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 믿음의 성도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조회수 : 1161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6년 10월 11일 19시 37분 47초
  • 천국에서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 믿음의 성도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성도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이것이다. 


    “천국에 가면 먼저 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이 질문 뒤에는 거의 언제나 한 구절이 따라붙는다. 예수님께서 부활 때에는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않는다고 하셨으니, 부부 관계가 끝난다면 서로를 알아보기나 하겠느냐는 염려이다.


    이 글은 이 질문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차례대로 살펴본다. 먼저 성경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얼마나 보여 주는지 확인한다. 그다음 부부, 부모와 자식, 친구와 성도들의 순서로 살펴보고, 믿음의 선배 J. C. 라일의 증언을 들은 뒤, 마지막으로 부활의 몸이 지금의 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정리한다.


    성경이 보여 주는 죽음 이후의 세계


    먼저 한계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바울은 셋째 하늘로 올라간 사람에 관해 말하면서 이렇게 기록한다.


    “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 12:4).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낙원을 보게 하셨지만 그 내용은 말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천국의 일상이 어떠한지, 거기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에 관해 성경은 많은 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호기심으로 그 이상을 캐려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죽은 자들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많지는 않지만 몇 곳이 있고, 그 장면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첫째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이다. 이것은 바로 뒤에서 따로 다룬다.


    둘째는 이사야서 14장이다. 이사야는 바빌론 왕이 지옥에 내려가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밑에서 나온 지옥이 네가 올 때에 너를 맞이하려고 너로 인해 움직였으며 지옥이 너로 인해 죽은 자들 곧 땅의 모든 우두머리들을 일으켜 세우고 민족들의 모든 왕들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처럼 약하게 되었느냐? 네가 우리같이 되었느냐? 하리라”(사 14:9-10).


    먼저 죽은 왕들이 새로 내려온 왕을 알아보고, 그가 생전에 누리던 영화를 기억하며 그에게 말을 건넨다.


    셋째는 에스겔서 32장이다.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강력한 자들 가운데 강한 자들이 이집트와 그를 돕는 자들에게 말한다(겔 32:21). 그리고 거기에 앗수르와 엘람, 메섹과 두발, 에돔과 북쪽의 통치자들과 모든 시돈 사람들이 각기 자기 무리와 함께 누워 있다(겔 32:22-30).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이름 없는 덩어리가 아니라 각자의 민족과 역사와 이름을 지닌 채 남아 있다.


    넷째는 요한계시록 6장이다.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의 혼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증언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큰 음성으로 외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아직 땅에 남아 있다는 말을 듣는다(계 6:9-11). 죽은 뒤에도 그들은 자기가 누구였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땅에 누가 남아 있는지 안다.


    다섯째는 변화산 사건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베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두 사람을 곧바로 알아본다. 그래서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겠다고 말한다(마 17:1-4). 이 사건은 땅 위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사무엘이 올라온 사건(삼상 28장)처럼 사후 세계 자체를 묘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은 지 약 1,400년이 지난 모세와 약 900년이 지난 엘리야가 자기 정체성을 그대로 지닌 채 나타났다는 점에서, 죽음이 사람의 인격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 다섯 장면을 모아 놓고 보면 공통점이 하나 드러난다. 성경이 죽음 저편을 보여 줄 때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고, 자기 과거를 기억하고, 땅에 남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서로를 잊어버리거나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은 단 한 곳도 없다.


    부자와 나사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지옥의 실상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고 실제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신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더라. 또 나사로라 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 투성이로 그 부자의 대문에 눕혀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였으나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더라”(눅 16:19-21).

    예수님의 비유에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씨 뿌리는 자, 탕자,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나사로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고, 아브라함이라는 실제 인물이 나오며, 모세와 대언자들이 언급된다(눅 16:29-31). 


    성경은 이것을 비유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 특히 지옥의 실상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한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부자도 죽어 묻혔다(눅 16:22). 그다음 장면은 이렇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나사로를 보내사 그가 자기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매 아브라함이 이르되, 아들아, 너는 네 생전에 너의 좋은 것들을 받았고 같은 식으로 나사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눅 16:23-25).


    여기서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확인된다. 먼저 죽은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알아보았고,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을 나사로까지 알아보고 그 이름을 불렀다. 그다음으로 죽은 사람들은 생전의 일을 기억한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기억하라’고 말했고, 부자는 실제로 기억했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들은 땅에 남은 가족을 기억한다. 부자는 자기 아버지 집에 다섯 형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들이 이 고통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눅 16:27-28).


    주목할 것은 이 장면의 배경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거두어진 곳에서조차 사람은 자기 정체성과 기억과 관계를 잃지 않는다. 지옥에서도 이러하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곳에서(계 21:4) 성도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부부는 어떻게 되는가


    이제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본문을 보자.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이 한 여자와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들고 와서 이렇게 물었다. 


    “부활 때에는 그녀가 그 일곱 사람 중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마 22:28)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성경기록들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을 범하고 있느니라. 부활 때에는 그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29-30).


    이 말씀을 바르게 읽으려면 몇 가지를 차례로 짚어야 한다.


    첫째, 사두개인들의 질문 자체가 서로 알아본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 여자가 일곱 사람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은 부활 때에 일곱 형제가 모두 그 여자를 알아보고 그 여자도 일곱 형제를 알아본다는 것을 당연하게 깔고 있다. 부활 때에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 질문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으실 때 가장 간단한 길은 부활 때에는 서로 알아보지 못하므로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바로잡으신 것은 ‘알아본다’는 전제가 아니라 ‘누구의 아내라는 관계’가 부활 뒤에도 이어진다는 전제였다.


    둘째, 결혼이 없는 이유를 누가복음이 보충해 준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대답을 이렇게 전한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을 얻고 또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질 자들은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더 이상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고 부활의 아이들로서 하나님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라”(눅 20:34-36).


    논리는 단순하다. 죽음이 없으면 출생이 필요 없고, 출생이 필요 없으면 결혼도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며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셨다(창 1:28). 말라기 대언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드신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씨를 구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말 2:15). 다시는 죽음이 없는 곳에서는 대를 이을 필요가 없고, 그 목적을 위해 세워진 제도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셋째, 땅의 결혼은 더 큰 실체를 가리키는 모형이다. 바울은 결혼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런 까닭으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것은 큰 신비니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이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다고 선포하며(계 19:7), 천사는 요한에게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준다(계 21:9).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제 역할을 마친다. 그러나 그림자가 물러난다고 해서 그 그림자를 함께 바라보며 살던 두 사람이 서로를 잊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이제 자기들의 결혼이 가리키던 그 실체 안에서 함께 있게 된다.


    넷째, ‘천사들과 같다’는 말은 각 사람의 개별성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천사들에게도 이름이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가브리엘이 있고(눅 1:19), 우두머리 통치자들 중 하나인 미가엘이 있다(단 10:13). 천사들은 서로 구별되고, 서로 돕고, 서로 이야기한다.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고 죽지 않지만 각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성도들을 천사들에 비기신 것은 바로 결혼하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다.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부활 때에는 개인이 쇠하지 않으므로 먹고 마실 필요가 없고 종족이 쇠하지 않으므로 결혼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죽음이 없으니 더 이상 출생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상태의 기쁨은 성도들 모두가 어린양과 혼인한 데서 오는 것이지 그들끼리 서로 결혼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도들이 천사들처럼 순결하고, 천사들처럼 알고 사랑하며,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천사같이 된다는 것은 지식과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해지는 것이다.


    이 네 가지를 종합하면 마태복음 22장 30절의 뜻은 분명하다. 부활 때에는 결혼 제도가 없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삼는 배타적 결합은 그 목적을 다하고 끝난다. 그러나 이 말씀 어디에도 부부가 서로를 모르게 된다거나 땅에서 함께한 세월이 지워진다는 암시는 없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서로 알아본다는 것을 전제했고, 주님께서는 그 전제를 그대로 두셨다. 그러므로 먼저 간 배우자를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이다. 다만 더 이상 그를 ‘내 아내’나 ‘내 남편’으로 두지는 않을 것이며, 그와 나는 둘 다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어떠한가


    부부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22장 30절이라는 어려운 본문이 있지만, 부모와 자식에 관해서는 그런 본문조차 없다. 오히려 성경은 죽은 가족과 다시 만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가 죽었을 때 금식을 그치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하여 내가 금식하겠느냐? 내가 그를 다시 데려올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 가겠지만 그는 나에게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3).


    다윗의 위로는 아이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가 아이에게 간다는 사실에서 왔다. 거기서 아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에게 가겠다’는 말은 아무 위로도 되지 못한다.


    창세기는 족장들의 죽음을 기록할 때 독특한 표현을 쓴다. 아브라함은 숨을 거두고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졌다(창 25:8). 이삭도 그러했고(창 35:29), 야곱도 그러했다(창 49:33). 이 표현은 장례와 구별된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가 묻힌 하란에서 멀리 떨어진 가나안 땅의 막벨라 굴에 묻혔지만, 성경은 그가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졌다고 기록한다.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 알았을 때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애곡하며 무덤 속으로 내려가 내 아들에게 가리라”(창 37:35). 족장들은 죽음을 먼저 간 가족에게로 가는 일로 이해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전제 위에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서로부터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의 왕국에서 앉을 것이라고 하셨다(마 8:11).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 삼대가 각자의 이름으로 구별된 채 한자리에 앉아 있다. 하늘의 왕국은 가족 관계가 지워진 곳이 아니라 그 관계가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된 곳이다.


    친구와 성도들은 어떠한가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


    땅에서 함께 먹고 마시던 바로 그 제자들과 아버지의 왕국에서 다시 함께 마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땅에서 불리던 그 이름으로 불리고 알려질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같이 슬퍼하지 말라고 하면서(살전 4:13), 그 근거를 이렇게 제시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이 말씀이 위로가 되는 까닭은 ‘그들과 함께’라는 말에 있다. 공중 강림 때에 먼저 간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만나는데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이것은 위로가 될 수 없다.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환희의 왕관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 있을 바로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그들이 자기의 ‘기쁨이요 왕관’이라고 하였고(빌 4:1),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같이 우리도 너희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이 모든 말은 그날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한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들도 바울을 알아본다는 전제 위에서만 뜻이 통한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 끝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불의의 맘몬으로 너희를 위해 친구들을 사귀라. 그러면 너희가 숨이 멎을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존하는 거처로 받아들이리라”(눅 16:9).


    이것은 땅에서 사귄 친구들이 먼저 영원한 거처에 가 있다가 나중에 오는 사람을 맞아들인다는 말씀이다. 이것 역시 먼저 간 사람이 나중에 오는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을 전제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한 뒤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한다(히 12:1). 그리고 우리가 다다른 곳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요,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총회와 교회요,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히 12:22-23). 


    요한이 본 왕좌 앞의 큰 무리도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 속한 무리였다(계 7:9). 천국은 이름 없는 군중이 모인 곳이 아니라 총회이며 교회이다. 교회는 서로를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믿음의 선배 J. C. 라일의 증언


    이 질문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붙들었던 사람이 있다. 19세기 영국의 존 찰스 라일(John Charles Ryle, 1816-1900)이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복음주의 목회자로서 리버풀의 초대 주교(감독)를 지냈다. 그가 지은 『거룩함』(Holiness), 『사복음서 강해』(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 『18세기 영국의 영적 거장들』(Christian Leaders of the Eighteenth Century) 같은 책은 지금도 널리 읽힌다. 그는 부유한 은행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1841년 아버지의 은행이 파산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뒤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 시골 교구에서 거의 40년을 섬겼다.


    라일은 아내 셋을 모두 먼저 떠나보냈다. 첫 아내 마틸다는 결혼한 지 3년이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내 제시는 오랜 병환 끝에 1860년에 세상을 떠났고, 라일은 그동안 아내를 간호하며 어린 다섯 자녀를 돌보았다. 셋째 아내 헨리에타는 거의 30년을 함께 산 뒤 188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서로 알아보느냐는 질문은 라일에게 신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나온 물음이었다.


    라일은 1870년에 바로 이 질문을 제목으로 삼은 글 『천국에서 우리가 서로 알아볼까?』(Shall We Know One Another in Heaven?)를 썼다.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과 4장 13-14절을 근거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순간 곧바로 서로를 알아볼 것이라고 말한다. 천국은 낯선 곳이 아니며, 우리는 거기서 서먹하지 않고 집에 온 듯 편안할 것이라고 한다. 또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잠시뿐이며, 다시 만나는 기쁨이 헤어질 때의 슬픔보다 크다고 말한다.


    라일은 『다락방』(The Upper Room)이라는 책에서도 마태복음 8장 11절을 다룬 “많은 사람들”(Many)이라는 장을 썼다. 그는 이 장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 그들이 어디서 오는가, 그들이 받을 몫을 차례로 다룬다. 그리고 넷째 대지에서 그들이 영원히 누릴 교제를 다룬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천국에서 족장들과 대언자들, 사도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휫필드와 웨슬리 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기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며, 거기서는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장에서 라일은 누구의 구원도 포기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한 일화를 소개한다. 18세기 영국 요크셔의 하워스에서 목회하며 ‘요크셔의 사도’라 불린 윌리엄 그림쇼 목사는 회심하지 않은 외아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은 경솔하고 생각 없이 신앙에 무관심하게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은 뒤 아들의 마음이 바뀌어 아버지가 걸어간 길을 따르게 되었고, 그는 임종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늙은 아버지가 천국에서 나를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라일이 이 일화를 소개한 목적은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를 위로하는 데 있다.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자녀의 회심을 보지 못해도 그 기도는 헛되지 않다. 그리고 이 일화는 천국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알아본다는 것을 당연하게 전제한다. 그림쇼의 아들은 천국에서 아버지가 자기를 알아보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변화 속의 연속성: 부활의 몸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부활의 몸이 지금의 몸과 다르다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길은 예수님의 부활한 몸을 보는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주님의 부활한 몸이 우리의 부활한 몸의 본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분명히 변화되었다. 제자들이 문들을 닫고 모여 있는 곳에 오셔서 한가운데 서셨고(요 20:19),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처음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요 20:14, 눅 24:16). 그러나 그 몸은 여전히 알아볼 수 있는 몸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한 마디에 그분을 알아보고 ‘랍보니여’라고 대답했다(요 20:16). 엠마오의 두 제자는 그분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다(눅 24:30-31). 도마는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고 만질 수 있었다(요 20:27). 주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손과 내 발을 보고 바로 나인 줄 알라. 나를 만지고 또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변화되었으나 여전히 ‘바로 나’였다.


    바울은 부활의 몸을 씨와 그 씨에서 나는 몸에 비긴다. 사람이 뿌리는 것은 벌거벗은 알갱이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씨에게 그것 자체의 몸을 주신다(고전 15:37-38). 밀알과 밀 줄기는 모양이 전혀 다르지만, 밀알을 뿌리면 다른 곡식이 아니라 밀이 난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그것은 썩는 것 가운데서 뿌려지고 썩지 않는 것 가운데서 일으켜지며 수치 가운데서 뿌려지고 영광 가운데서 일으켜지며 연약함 가운데서 뿌려지고 권능 가운데서 일으켜지며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뿌려진 것과 일으켜진 것은 같은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게 만드실 것이다(빌 3:21). 이것은 변화이지 교체가 아니다.


    그리고 바울은 천국에서 우리의 앎이 어떻게 되는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알리라”(고전 13:12).


    천국에서 우리의 앎은 줄어들지 않고 온전해진다. 지금 희미하게 아는 것을 그때에는 온전히 안다. 지금 아는 사람을 그때에는 모르게 된다면 이 말씀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결론


    성경이 죽음 저편을 보여 줄 때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고 자기 과거를 기억한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지옥의 부자는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알아보았고, 지옥의 왕들은 바빌론 왕을 알아보았으며, 제단 아래의 순교자들은 자기들이 겪은 일과 땅에 남은 형제들을 기억했다. 변화산의 모세와 엘리야는 수백, 수천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모세와 엘리야였다.


    다윗은 죽은 아들에게 가기를 기대했고, 족장들은 죽음을 자기 백성에게로 거두어지는 일로 알았으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늘의 왕국에서 함께 앉을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아버지의 왕국에서 다시 함께 마시기로 약속하셨고,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한 사람들을 그날 자기의 기쁨과 왕관으로 알아볼 것을 기대했다. 아내 셋을 먼저 보낸 라일도, 아버지를 먼저 보낸 그림쇼의 아들도 이 소망을 붙들었다.


    마태복음 22장 30절은 이 모든 증언과 충돌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결혼 제도가 그 목적을 다하고 끝난다는 뜻이지 부부가 서로를 모르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서로 알아본다는 것을 전제했고, 주님께서는 그 전제를 바로잡지 않으셨다.


    천국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 것이며, 땅에서 희미하게 알던 것을 그때에는 온전히 알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린양의 신부로서 그분과 함께, 또 서로와 함께 항상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성도들에게


    남편을 먼저 보낸 아내가 있다. 아내를 먼저 보낸 남편이 있다. 부모를 먼저 보낸 자녀가 있고,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가 있다. 이들은 빈자리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식탁의 빈 의자를 볼 때, 익숙한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함께 다니던 길을 혼자 걸을 때 그리움은 문득문득 찾아온다.


    먼저 기억할 것은 그리움과 슬픔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표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요 11:35). 바울은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같이 슬퍼하지 말라고 하였다(살전 4:13). 그리스도인도 슬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소망이 있는 슬픔이다.


    그 소망의 근거는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라비를 잃고 슬퍼하던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주 안에서 먼저 간 사람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주님과 함께 있다.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고(고후 5:8), 그것이 훨씬 더 좋다고 하였다(빌 1:23). 우리가 그를 그리워하는 동안 그는 주님 앞에서 안식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우리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이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을 귀중히 여기셨다. 우리가 붙잡지 못한 그 손을 주님께서 붙잡고 계신다.


    그리고 이 이별은 영원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먼저 간 사람은 그 아버지 집에 먼저 들어가 있을 뿐이다. 우리도 머지않아 그곳에 갈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거기서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다윗이 죽은 아이에게 가겠다고 한 것처럼, 그림쇼의 아들이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날 날을 바라본 것처럼, 우리도 그날을 바라볼 수 있다.


    그날에는 다시는 이별이 없다.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들려온 음성을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계 21:4).


    지금 흘리는 눈물을 그날 하나님께서 친히 닦아 주실 것이다. 우리를 갈라놓은 사망은 그날 완전히 패배한다. 바울은 그날을 내다보며 이렇게 외쳤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고 기록된 말씀이 성취되리라.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고전 15:54-55).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성도는 그리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남은 날 동안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다가 그분께서 부르시는 날 기쁨으로 가면 된다. 거기서 먼저 간 이들을 다시 만날 것이며, 그들과 함께 주님 앞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바울은 공중 강림과 성도들의 재회를 말한 뒤 이 한마디로 끝맺었다. 이 글도 그 말씀으로 맺는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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