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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 하루의 길이가 정말로 중요합니까? 조회수 : 11913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7일 13시 44분 37초
  • 하루의 길이가 정말로 중요합니까?
    다음은 헨리 모리스 박사의 "Bible has the answer"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대답 : 성경을 펴고 창세기 1장을 읽은 뒤에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 우주와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엿새 동안의 평범한 날(24 시간)에 창조하셨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교회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관점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날들"(days)이 수천 년, 수백만 년, 심지어는 수십억 년의 기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날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기간이었는지를 안다는 것이 실로 중요한 것일까요? 이 날들이 평범한 날(하루)인지 혹은 긴 시간의 주기였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하루"는 무엇을 말하는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욤"(yom)입니다. "욤"은 보통 24시간의 하루나 24시간의 하루 가운데 낮(즉, 밤과 구별되는 개념으로서의 낮)을 의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때때로 "재판관들의 시대에"(In the time of the Judges) 혹은 "주의 날에"(In the day of the Lord) 등에서와 같이 정해지지 않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히브리말로 기록된 구약성경에서는 "욤"이라는 단어가 단 한번도 "주기"(period) 즉, 특정한 시작점과 끝점을 갖는 유한한 길이의 시간 간격을 의미한 적이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긴 시간의 주기를 의미하는 단어는 "올람"(olam)입니다. 더욱이 "욤"이라는 단어가 무한한 시간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문맥 자체가 명확하여 그것이 "하루"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창세기에 기록된 "하루"라는 단어가 상징적으로 쓰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중요한 점은 성경에서 한 단어가 처음으로 쓰일 때는 결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실 어떤 단어든지 처음에 문자적 의미로 쓰인 뒤에야 비로소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문"(door)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문"이라는 단어가 입구를 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의미로서 이 단어를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실제로 문이라는 것도 이해하게 됩니다. 처음에 "문"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른 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 한, 상징적 의미로는 사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루"라는 단어도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을 때 결코 상징적인 의미로는 쓰일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루"라는 단어를 설명하시며 이 단어를 처음 쓰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원하시는 뜻대로 정의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오래 전에 죽은 창세기의 저자는 "하루"라는 단어가 처음 쓰일 때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정의해 놓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리시니라."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성경에 사용된 용어들은 매우 신중하게 정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루"(day)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밤"(night)이라고도 하는 "어두움"(the darkness)과 구별되어 "빛"(the light)으로 정의되어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창세기 1장 5절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니라." 이 구절은 이 외의 다른 닷새 동안의 하루하루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 때에 낮들과 밤들 즉 밝은 때와 어두운 때가 명확하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낮과 태양
    그러면 태양이 없었는데 어떻게 낮과 밤이 있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태양이 넷째 날에 이르러서야 창조되었음을 창세기 1장이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다고 창세기 1장 3절은 가르쳐주고 있으며, "저녁과 아침"이라는 구절은 빛과 어두움의 반복적인 주기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빛은 실제로 존재했고 그 빛은 한 방향으로부터 와서 자전하는 지구 위에 빛을 비추었으며 그로 인해 낮과 밤의 일정한 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빛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창세기 1장 14∼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넷째 날에 태양의 창조가 있었습니다.
    태양은 태양이 생기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낮을 주관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 이후의 낮은 이전의 낮과 똑같았습니다. 단지 지구는 새로운 광체 혹은 광원(光源)을 갖게 된 것입니다.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낮, 즉 창조의 처음 사흘 동안의 낮은, 태양이 창조된 이후의 낮과 같은 낮이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세대를 통해서 세계 도처의 많은 사람들이 태양을 생명의 근원으로 숭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아셨고 그래서 일부러 넷째 날까지 태양의 창조를 연기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자들도 태양이 지구보다 먼저 탄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구와 빛을 먼저 만드셨고, 넷째 날에 태양을 만드셨으며 그날 이후로는 그것이 빛을 내는 도구로서 낮을 주관케 하셨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창세기의 "날들"을 평범한 날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구가 수십억 년이 되었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말을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지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알아 낼 수 있는 절대적 연대 측정법은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약 6,000년 전에 지구가 생성되었음을 믿게 해 주는 확실한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하루 - 영어로는 'day'이며 사실 'day'라는 단어는 '날'도 되고 '낮'도 됨 - 가 수백만 년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과연 밤(the night)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필이면 왜 엿새 동안에?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십니다. 이 말은 곧 그분께서 무한한 힘, 무한한 지식, 무한한 지혜를 가지셨음을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시작하시며 단번에 원하시던 모든 것을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온 우주와 지구와 그 속에 속한 모든 것을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은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엿새 동안이나 일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엿새라는 기간이 모든 것을 만드실 수 있는 무한한 하나님께 매우 특별한 기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출애굽기 20장 1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손가락"으로 이 명령들을 돌판에 기록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다음의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와 대화하는 것을 마치시고 증거판 두 개를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 판이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더라."(출 31:18)
    출애굽기 20장 9절에 있는 네 번 째 계명은 우리가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어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 명령에 대한 정당성은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 즉 한 주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창조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가 됩니다. 창세기 1장의 "하루"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계속해서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여기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져야만 합니다. 만일 창세기에 기록 된 "하루"라는 단어가 긴 시간을 뜻한다고 주장하려면 출애굽기에 쓰여있는 "하루"라는 단어 역시 유한한 길이의 시간이 아니라 무한하거나 혹은 정의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출애굽기 20장 9∼11절을 다시 해석해 본다면, "여섯 번의 무한한 시간 동안에 일하고, 일곱 번 째 무한한 시간 동안에 안식하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의 하루하루를 평상시의 하루하루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평범한 24시간의 하루하루를 통해 엿새동안 일하시고 하루를 안식하신 것이야말로 우리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 즉 우리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지키고 있는 바 "7일 = 1주(週)"의 형태를 보여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결코 한 시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창세기에 적혀있는 날들(days)을 오랜 시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많은 모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26절∼28절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여섯째 날에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창조된 뒤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에 계속해서 살았으며, 창세기 5장 5절은 아담이 930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아직도 일곱 번째 날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 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그 창조하시는 일로부터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하신다"라는 현재형이 아니고 "안식하셨다"라는 과거형으로 기록된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루하루가 백만년씩이라면 이 구절의 해석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참으로 그 하루하루가 단지 천년씩이라 하더라도 아담의 수명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루는 천년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베드로후서 3장 8절을 언급하며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무지하지 말라." 창세기에 기록된 "날들"(days)이 천년씩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추론의 근거로서 이 구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상당히 잘못된 것입니다. 시편 90편 4절로 돌아가면 그와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음이니이다."
    베드로후서 3장과 시편 90편의 전체 문맥은 하나님이 우주 전체의 자연적인 진행 과정과 시간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도 창조하셨으므로 시간의 영역 밖에 계시며, 이런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시간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을 이용하여 창세기에 기록된 바 창조 때의 하루하루가 천년씩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하루가 단지 천년과 같고 천년이 단지 하루 같다는 사실이며, 그 앞 뒤 문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영역 밖에 계시므로 이 구절은 창세기에서의 창조 기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더욱이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하루"는 "천년"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의 "하루"라는 단어는 "천년"이라는 단어와 확연히 구별될 수 있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라는 단어가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코 "천년"과 대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를 통해 주신 메시지의 요지는 사람이나 "자연"이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성취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은 아주 짧은 순간에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이 사람을 탄생시키기 위해 수백만 년을 필요로 하는 무작위적인 "자연 과정"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처럼 진화론에 근거한 수백만 년의 역사를 믿고 있으며, 이런 믿음에다 성경을 첨가시키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수백만 년을 필요로 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화론이 매우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반하여, 베드로후서 3장 8절은 하나님께서 결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짧은 시간에도 자신의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날과 해
    창세기 1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계절과 낮과 해를 표시하는 표적이 되게 하라." 여기서 쓰인 "날들"(days)이라는 단어가 실제의 평범한 하루가 아니라면, 같은 구절에 쓰여있는 "해들"(years)이라는 단어는 아무 뜻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하루와 계약
    이제 눈을 돌려 예레미야 33장 25∼26절 말씀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낮과 밤과 더불어 맺은 나의 계약이 서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진대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 된 자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이 말씀을 통해 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께서 낮과 밤과 더불어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을 맺으셨으며, 그 계약은 왕좌에 앉기로 약속된 분(그리스도)을 포함하는 다윗의 후손들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낮과 밤과 더불어 맺은 계약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낮과 밤이 존재하도록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정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창세기 1장보다 명확하게 낮과 밤의 기원을 말해주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은 낮과 밤과 맺으신 그 계약이 시작된 곳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명령하셨을 때 낮과 밤과 맺으신 그 계약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즉, 당신이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루하루를 문자 그대로 평범한 엿새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레미야를 통해 내려주신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무런 근거도 없게 되며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되고 맙니다.

    하루의 길이가 정말 중요한가?
    결론적으로, 이제 우리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루하루를 평범한 하루하루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혹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 대답은 "매우 중요하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으로 다가가는 일에서 기초가 됩니다. 예를 들어, 이것을 평상시 하루하루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날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하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마땅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창세기의 다른 부분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셨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만일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완전한 사실로 믿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문자 그대로 믿으라'는 말은 사람의 사적 해석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상징적으로 해석하거나 둘 중 하나를 취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앞귀 문맥으로 보아 본문 자체가 분명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면 문자적 의미 그대로 믿어야만 합니다. 만일 본문이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을 때는 앞 뒤 문맥이 그 부분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거나 다른 참고 서적으로부터 그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누가 다가 와서 "창세기에 나오는 날 즉 그 때의 하루하루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날들을 실제의 평범한 날들로 믿는 사람을 비난해야 한단 말인가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날들을 평상시의 하루하루로 믿는 사람이야말로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들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누가 잘못되었다고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믿는 지질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매우 오래 된 우주 역사'를 증명하려 하기 때문에 "하루"라는 평범한 단어를 자꾸 다른 의미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시대는, 진화론이 보여주고자 하는 시대 즉 화석들이 죽음과 투쟁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시대와 같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주 오래되었으나 답변을 할 수 없는 문제 즉 '아담 이전에도 죽음과 투쟁이 있었다'는 문제에 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창세기에서 가르쳐주는 진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기록된 날들을 평범한 날들로 받아들인다면, 창세기에 기록된 나머지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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