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강해: 의는 결코 율법에 의해 오지 않는다
배경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처음에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먹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어떤 사람들이 오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가 자신을 분리하였다(갈 2:12). 다른 유대인들도 그를 따라 했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르게 걷지 아니함”이라고 했다(갈 2:14). 베드로의 행동은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인정받는 것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15–21절은 이 일을 두고 바울이 한 말이다. 문제는 식탁이 아니라 복음이었다.
1. 유대인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15–16절)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인에 속한 죄인이 아니지만”(갈 2:15).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을 죄인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그 말을 받아서 시작한다. 그러나 율법을 가진 유대인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인정받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갈 2:16).
바울과 베드로는 유대인이었지만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리스도를 믿었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faith of Jesus Christ)의 of는 목적격이다. 세 가지로 본다.
첫째, 행위(works)는 ‘행하다’의 명사이고, 믿음(faith)은 ‘믿다’의 명사이다. 행하다와 믿다는 대상이 필요한 말이므로, 그 명사형과 함께 쓰인 of는 대상을 나타낸다. 다음 예들이 같다.
fear of the LORD: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나”(잠 1:7). 주께서 두려워하는 분이 아니라, 주를 두려워함이다. vexation of spirit: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니라”(전 1:14). 영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영을 괴롭게 함이다. love of money: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딤전 6:10). 돈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는 율법을 행함이고, 그리스도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둘째, 방향은 문맥이 정한다. 같은 절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라고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말이, 앞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보여 준다.
셋째, 갈 3:2에도 같은 짝이 나온다.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 영어로는 works of the law와 hearing of faith이다. hear(듣다)도 대상이 필요한 말이므로, hearing of faith를 ‘믿음의 들음’이라고 옮기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이 들음의 대상이라는 뜻으로 ‘믿음에 관하여 들음’이라고 옮긴 것이다. 3:5에도 같은 짝이 다시 나온다(“율법의 행위로 하시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하시느냐?”). 모두 같은 of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 of는 소유가 아니라 목적격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가. 이것이 갈라디아서 전체의 논쟁이다. 바울의 대답은 분명하다.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느니라.”(갈 2:16). 자세한 문법은 뒤에서 다시 다룬다.
2. 그리스도께서 죄의 사역자가 되시는가(17절)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으려 하다가 우리 자신 또한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런 까닭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의 사역자가 되시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 2:17).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고 정결 규례를 의롭게 되는 조건으로 삼지 않으면, 규례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도 이방인과 같은 죄인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런 반론이 나온다. 그리스도를 믿었더니 죄인이 되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단호히 답한다. 율법의 행위를 의롭게 되는 조건으로 삼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다. 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법을 조건으로 세우는 일이다.
3. 율법을 다시 세우면 내가 범법자가 된다(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들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 자신을 범법자로 만드느니라.”(갈 2:18).
헐었던 것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던 체계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그 체계를 허물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두려워하여 물러나 이방인들과 선을 그었다. 이것은 허문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베드로의 실제 잘못은 이방인과 함께 먹은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여 물러난 것이다.
그 기준을 다시 세우면 어떻게 되는가? 이방인과 함께 먹지 말라는 기준이 서면, 그전에 이방인과 함께 먹은 베드로 자신이 그 기준으로 범법자가 된다. 이 문맥에서는 이렇게 읽는다. 자기가 허문 것을 다시 세우는 순간, 그것이 자기를 정죄하는 기준이 된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규례를 그대로 가져와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조건으로 요구하는 경우이다. 안식일을 주일 성수로 바꾸어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거나, 성전과 레위인 제도에 속한 십일조를 구원이나 복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 그렇다. 반면 자원하여 예배하고, 드리고, 감사하는 것은 정죄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의롭게 되는 조건이 되는 데 있다.
4. 율법을 통하여 율법을 향해 죽었다(19절)
“내가 율법을 통하여 율법을 향해 죽었나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향해 살고자 함이라.”(갈 2:19).
첫째, 율법을 향해 죽었다. 율법의 모든 체계가 나를 얽어매던 관계에 대해 죽었다는 뜻이다. 율법에는 잘못이 없다.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롬 7:12). 죽은 것은 율법이 아니라 나이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게 되었나니”(롬 7:4). 그래서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길은 나에게 이미 끝났다.
둘째, 율법을 통하여 죽었다. 율법의 판결은 이러하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갈 3:10). 율법은 죄인에게 저주를 선고하고, 그 선고는 죽음으로 집행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는 그분을 믿을 때 그분과 함께 못 박힌 자가 되었다(갈 2:20).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이 형을 집행받으면 그 판결은 다 이루어진 것이다. 더는 요구할 것이 없다. 우리는 율법의 판결을 피해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 판결의 죽음을 통과하였다. 율법이 요구한 값은 십자가에서 이미 치러졌다. 이것이 ‘율법을 통하여 죽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에게 율법은 더 요구할 것이 없다.
그러나 율법을 향해 죽은 것은 마음대로 살기 위함이 아니다. 목적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함이다.
5.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 2:20).
19절의 죽음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죽음이다. 과거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살아 있다. 이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중심이 되신다.
그렇다면 이 삶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라고 한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도 1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같은 표현이므로 같은 방향으로 읽는다.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다. 믿는 대상은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힘으로 의를 이루려는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을 믿는 삶이다. 처음 구원받을 때에도 그분을 믿었고, 그 뒤에도 그분을 믿으며 살아간다.
6.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가 율법에 의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바울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린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었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기에 완전하고 충분하다.
여기에 할례나 규례 같은 인간의 행위를 더해야 구원받는다고 하면,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아직 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일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선한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맺는 열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