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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성령님께 온전히 내어드림/사랑 2 조회수 : 12001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26분 43초
  • 성령의 열매: 성령님께 온전히 내어드림/사랑 2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열매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재생산해 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라고 간단히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 성품들과 속성들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달성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렌지 나무를 심은 후 물을 주고 비료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오렌지를 생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수도 있고 기도를 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며 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의 열매를 생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그 칭호 그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생산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을 보면,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님대신 육신에게 자신의 삶의 통제권을 넘긴 사람이 외적으로 드러내는 모습들입니다. 반면 22절 말씀을 보면 이것들과는 대조적인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4절, 25절을 잘 주목하십시오. 사실 대다수의 구원받은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질 않습니다. 이들은 구세주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실 것을 부탁하였으며, 지금 현재 구원의 보장 속에서 하늘의 소망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문제는 이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주님을 부른 그 시점부터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인도될 그 사이 동안(즉 이 세상의 삶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9절에서 21절까지에 열거된 죄들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서조차 여전히 발견된다는 사실로 보아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간음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는 음행에 연루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화의 창시자가 아니시며, 다툼과 이단 파당의 창시자도 아니십니다. 위에 언급된 모든 것들은 육신의 일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자들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이런 육신의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눈에 띈다는 것을 우리 각자도 때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성령님의 통제하에서 걷기보다는 육신의 명령에 따라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말씀드릴 것은 여러분의 구원이 다름 아닌 죄에 대한 확신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됨과 구원을 얻기 위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이 단지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신자들의 매일의 삶에서 매순간 일어나야 하는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매일 매일의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육신의 죄들에 대해 인정하고 나로서는 그것들을 이겨낼 수 없음을 확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고자 그분께 겸손하게 다가갔던 것과 똑같이 그분께서는 내가 육신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나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님께 나아왔고 그분께서 구원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까? 나로서는 안 됩니다. 나는 구세주께 나아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님께 나아와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여 내 자신을 내어드릴 때 그분께서 내 안에 그분의 열매를 생산해 내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놓치지 마십시오. 잠시 후 그 구절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29절을 보십시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약 여러분 가운데 지난번 이 구절을 표시해 두지 않으셨다면 지금 표시해 두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구원받은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여러분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늘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언젠가 휴거되어 다가오는 진노만을 피하라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얻게 될 유익 중 하나이기는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목적은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내 안에서 자신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재생산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저와 상호반응을 보이기를 원하시며, 그분께서는 저로 하여금 그 상호반응 시 올바로 반응해서 사랑이 생산되기를 원하십니다. 잠깐 주목하십시오. 만약 사랑이 성령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간단하고 가벼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사랑은 육신에 의해 생산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쁨은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런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화평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고통을 수반하는 그런 인내를 말하고 있으며, 또한 성질을 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유지되는 절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이 좋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선을 이루게 됩니다.
    잘 보십시오. 우리는 일이 잘 되어 가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일이 잘 안 되면 그것은 마귀의 방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바대로 나를 대해 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람들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마귀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잘 되든 못 되든 비록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시지는 않았을지라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발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게 됩니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저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갈망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로마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언급되어 있고, 요한복음 14장에는 하나님의 화평이, 느헤미야 8장에는 주님의 기쁨이, 시편 18편에는 하나님의 부드러움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열매가 나오는데 우리, 즉 우리 육신은 무엇을 원합니까? 육신은 자기가 다룰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도록 그렇게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끄셔서 우리 육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닫도록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구원을 받게 되며 또한 우리의 인생을 성령님께서 통제해 주시도록 내어 맡기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친절할 때, 내 육신은 즉시로 맞받아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친절한지 아니한지가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그 사람에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통제하에서 친절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에 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이 말씀에 따르면 내가 구원받았을 때, 나는 단지 영생만 받은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순간부터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생명에 속한 것 뿐 아니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디도서 역시 동일한 취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2장 11절, 12절 말씀입니다.
    11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12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구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과 함께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침, 즉 지침도 주셨다고 합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따르면 그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우리를 영광과 덕에 이르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단지 하늘나라에 이른다고 하지 않은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영생을 주시고, 하늘에 저택도 주시고, 영광스러운 몸과 황금으로 된 거리가 있는 새 예루살렘도 주시고,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는 축복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받았고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분의 덕(virtue)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후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을 원할 수 있는 그런 성품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담의 죄악된 성품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신성한 성품을 우리에게 매일 나누어 주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만을 구원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곳에 이르기 전에 자신의 성품과 마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성품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4절에서 이 세상은 부패한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패한 세상에서 부패되지 않고 승리할 방도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 안에 있는 부패는 육신의 욕망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이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 자신을 부인함으로 육신을 동결시키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시게 되면 정욕(욕심)으로 인해 세상에 있는 썩을 것(부패)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승리의 길을 가는 대신 세상에 대해 불평하면서 이 세상을 깨끗케 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깨끗케 하시면 이 세상이 아무리 더럽다손 치더라도 결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을 보십시오.
    이것과 더불어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것과 더불어”라는 말은 3절과 4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외에”라는 뜻입니다. 8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이것들이 너희 안에 있어 풍성하면 그것들이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빈약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여기서 주목할 말은 MAKE(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열매 맺게 “할 수(MAKE) 없고” 5절, 6절, 7절에 나와 있는 것들이(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우리를 열매 맺게 “한다”(MAKE)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모든 예언을 꿰뚫고 세대주의에 정통하여 환난, 휴거, 그리스도의 심판석, 천년왕국 등에 대한 온갖 지식을 다 습득하였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을 내어드려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지식은 당신의 삶에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각 성경의 개요를 다 알고 주제를 다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다한들 그것이 당신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이 있음을 입증해 줄 수는 없습니다. 지식이 있다고 해서 당신 안에 절제(temperance)가 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비록 그 지식이 주님에 관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지식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구령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에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에 나오는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엄청난 “영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육신적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설교도 많이 듣고 신학교를 나왔다 할지라도 자아를 부인하고 육신의 욕심을 성령의 통제하에 내려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도 받았고 성경에도 능통한 사람이 자기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지식이 아무리 풍성할지라도 지식이 열매를 맺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났지만 남편에게 전혀 축복이 되지 못하는 자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자매는 이웃을 주님께 인도도 하고 성경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지식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진 마십시오. 우리의 영적 성장은 점진적인 과정이지 단 한 순간에 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을 보시면 “열심을 다하여”가 첫 단계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가 거듭난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아는 것부터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원함(열심)을 보시면 첫 단계에서 둘째 단계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열심(Diligence)을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거룩하게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다윗의 간음과 살인은 육신의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윗은 또한 거짓말도 하고 속임수도 썼습니다. 이 모두 다 육신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다윗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자”라고 합니다. 비록 온갖 육신적 죄를 지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언젠가는 나도 거룩하게 될 날이 있으리라.”고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보십시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주님의 마음을 따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 우두머리를 사용하심은 그가 첫 출발로부터 부지런히 더 나아가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1장 5절로 가겠습니다.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당신은 성경공부가 만족스럽고 즐거우신가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덕을 갖춘 남자, 혹은 덕스러운 여인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덕스러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성경을 펴서 인용할 줄 아는 아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덕을 갖춘 아내를 원합니다. 내 아이들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을 성경에서 모두 인용할 수 있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방법대로 아이들을 키우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지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형제보다 실제로 형제를 사랑하는 형제들이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덕(virtue)입니다. 즉 하나님의 덕스러운 성품이 우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보니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무엇 때문에 지식이 필요합니까? 여호와의 증인을 이기기 위해선가요? 아니면 은사주의가 틀린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물론 성경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거리설교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기록은 대부분이 여러분과 저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 다음 6절에 보시면 “지식에 절제(temperance)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성서들은 이 단어를 “자기통제”(self-control)라고 고쳤습니다만, 자기가 자기를 통제하면 즉시로 실패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절제란 우리가 아닌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절제가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인내가, 그 다음에는 경건이 나와 있고, 17절에는 형제우애(brotherly kindness)가 나와 있습니다. 순서에 주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기 전, 즉 우리가 경건(godly)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우리는 형제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사랑(charity)입니다. 이 단어는 형제를 향한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을 보이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먼저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기록된 순서가 중요한 이유는 이 구절들이 점진적 성장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은 완성품이 아닐지라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낙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즉 구원받은 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 단계를 하나둘 씩 밟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첫 단계부터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열심(diligence)을 품는 것입니다. 원하는 마음(willing mind)입니다. 그때부터 주님의 인도가 시작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으로 가서 지식에 관한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결혼하기 전 아내도 아이도 없었던 젊은 청년 시절,  목사도 되기 전에 거리에서 열심히 전도하던 시절, 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영적인 어린 아이로 여겼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세대를 올바르게 구분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실로 갓난아이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정말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하였노라
    “육신에 속한”(carnal)이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 단어의 의미는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육신적이란 것은 성경을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육신적이란 당신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받기 전처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육신 안에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의 내 모습은 육신 안에서 하늘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한 한 나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제대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면 휴거 시 변화받을 것은 단지 우리 몸이 유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4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육신적일 경우, 우리는 톰(Tom)과는 친하게 지내지만 빌(Bill)과는 친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톰은 나와 의견이 같지만 빌은 나와 의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윗(David)은 나와 동일한 취미를 갖고 있으므로 친하지만 요한(John)은 취미도 틀리고 이웃도 아니어서 친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제 문제의 핵심을 아시겠습니까? 즉 자기 육신이 어울리기에 알맞은 사람들과만 교제할 때 바로 그 사람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그 단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로 가겠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혹시 여러분이 세대주의에 입각해서 이 시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을 올바르게 대하지 않으려 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입니다.
    그들이 말한 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것은 사람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내게 해준 대로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만을 위해 나는 기도하겠다, 그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그를 사랑하겠다, 그야말로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살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 없이도 가능합니다. 계속해서 39절에서 42절을 보겠습니다.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악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40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고 41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 리를 가며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이 구절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구절들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뺨을 맞고 고소를 당하고 옷을 빼앗겼을 경우, 과연 나는 예수님께서 뺨을 맞으시고, 예수님께서 고소당하시고, 예수님께서 옷을 빼앗긴 것으로 간주하고...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한 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어주신 것처럼 주님께서 나를 통해 그렇게 행하시도록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저지른 일만을 보지만 영적인 사람은 비록 이들이 내게 한 짓은 잘못됐지만 하나님께서 그로 인해 내 생애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한 바,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한 것을 들었으나
    끝부분에 “들었으나”에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 “배웠다고” 안 하시고 “들었다고” 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많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배우지는 못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말씀을 실행에 옮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제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 말씀들을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그 중 제 행실을 바꾼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듣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아마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응수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오, 노(No)! 불가능해!”,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니… 오, 노(No)!”,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니, 말도 안 돼! 불가능하다니까!” 아마 누구나 다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사랑하고 저를 좋아하며 좋은 교제를 갖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이 설교하는 데는 아무런 힘도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도움도 필요 없고 매주 늘 하던 대로 그냥 즐기면서 즐겁게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이 끝난 후 은혜로운 설교였어, 참 좋았다고 하면서 응수하실 것입니다. 서로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나의 원수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 나를 괴롭히기로 마음먹은 사람, 내게 못된 짓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이루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과 또한 환경을 이용해서 나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시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축복하라고 하시지만 저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잘 해 주라고 하시지만 저는 못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를 잘못 대하는 자들에 대해 점점 더 큰 앙심을 품게 되고 미움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배우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44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44절 전체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서 “위하여”(for)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에 대해(at), 그들에 대하여(about)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존(John)이 나에게 못되게 굴었다고 합시다. 속으로는 못마땅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가서 “반갑습니다. 존” 이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안 보고 있는데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존 형제를 축복하시고 그에게 좋은 날을 주시며 그의 가족과 가정을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진정으로 기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바라바를 우리에게 내달라.”고 외치는 군중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신 주님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으로 하여금 이번에는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못되게 행동하는 그들을 용서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 제가 용서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확실히 저는 그들을 용서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순간 내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다시 꿈틀거립니다. 아직도 내 안에는 그들이 내게 저지른 그대로 그들도 당하기를 바라는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용서가 안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든, 무슨 말을 했든, 어떻게 우리를 대했든지 간에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4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이 말씀은 로마서 8장 29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아들이라면 당연히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당신은 “그렇습니다. 저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답변하겠지요. 그때 상대방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와 많이 닮았으니까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 훌륭한 성경교사를 여럿 보았습니다. 훌륭한 전도자, 사역자들도 많이 보았습니다만 하나님 아버지 같은 아들은 사실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경건한(godly)사람은 보기가 드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 같은(like) 아들이 드문 것입니까?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자나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 여기서 “자신의 해”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악한 자에게도 비추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잘해 주는 사람, 우리에게 호감가는 사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을 보이며 선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한 자라도 선하게 대해 주십니다. 이분이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이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 안에서 살기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억누르고 슬프게 합니다. 성령님께서 어떤 것을 말씀하시려면 “내버려두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하면서 묵살해 버립니다. 오늘 집에 가서 마리화나 봉지를 꺼내 쓰레기통에 내던져 보십시오. 그렇게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시면 다음 날 또 찾게 됩니다. 육신은 그대로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집에 가서 술병을 내던져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시면 다음 날 또 술을 찾습니다. 수백 번을 회개하고 자백기도를 할지라도 개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듯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바꾸셔서 우리로 더 이상 이 세상의 행로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의 인생을 통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은 “만약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한다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리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를 선대하는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 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47절, 48절 말씀입니다.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여기서 완전이라는 말은 “죄 없다”(sinless)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그런 뜻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완전(perfect)이란 말은 성경에서 '완성된', '끝이 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영접할 때, 그분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어 깨끗게 된다는 진리는 이 세상에서나 또 영원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완성품이 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가 이미 완성되었다면 어째서 신약성경은 내가 구원받은 후 해야 할 것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일이 더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서 무언가를 하시고자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숨을 쉬는 그 순간부터 그리고 첫 번째 죄를 지은 그 순간부터 구원하실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저에겐 이 진리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이미 먼 길까지 나가 있었습니다. 탕자를 안아 주려고 말입니다.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준비하셨을 때가 아니고 당신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구원하시라고 허락하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준비되신 때가 아니고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의 육신의 죄들을 내버리고 돌이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그분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제하시도록 허락하는 그 순간이란 말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저 성경 지식만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은 모습에서 열매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더 이상 변명을 하거나 둘러대는 짓을 그만두고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내어드리는 것 말입니다.
    구원을 받았을 때도 우리가 주님께 구원하시도록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셨듯이 성령의 열매 맺는 일 역시 우리가 주님께 그렇게 주시도록 요청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돈의 부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육신 안에 사는 것을 몹시 만족해 하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이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수백 번 노력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회개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백이 진실된 것인지 아닌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진정 담배를 끊고 싶은 그 순간 담배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정말 원하는 순간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의 연약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수준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계십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오늘 말씀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오늘 목사님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지식으로는 열매를 못 맺는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간단 말씀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으실 때 어떻게 기도해야 구원받는 줄 알고 계셨습니까? 그저 하나님께 나아갔더니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저 그분께로 가서 “하나님의 성령이시여 저를 붙드소서.”라고 하면 됩니다. 26절 말씀에 여러분과 저는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살피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진실된 마음으로 “주여, 저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오래 참고 싶습니다. 저는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시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진짜라고 판단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보시고 그제서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마음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성령님께서는 그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로마서 8장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
    여러분과 제가 이 말씀을 듣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성장할 때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이 없다고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에서부터 가인을 비롯해 그 누구도 사랑을 지닌 채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방식 그대로 사람들을 사랑하게 도와주십시오.” 이 기도가 진정이라면 성령께서 아바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 기도가 진정인 것 같습니다. 내일 그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할 사람을 세 명 보내주시지요.” 이건 정말입니다. 다음 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육신 안에서 “하나님, 어제 제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렇게 기도할 것이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거야. 너에게 잘해 주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나에게 기도한 건 아닐 테지. 그거야 기도 안 해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기도응답으로 네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냈다. 자! 내가 도울 테니 사랑하거라.”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저는 우리가 마음먹는 만큼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시도록 우리가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 그대로 남게 됩니다. 한 가지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간에 육신 안에 살고 있기에 우리를 언젠가는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그날, 모두가 우리를 잘 대해 주는 그날을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맛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들을 바꾸시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으로서 사셨듯이 저와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식은 열매를 맺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지식은 육신만을 강화시킵니다. 최악의 경우가 있다면 육신적인 사람이 성경구절을 척척 들이대면서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에 대해 공부해 가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셔서 단지 설교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설교가 우리 마음에 자리 잡아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도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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