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인가, 사자인가?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지금처럼 뉴에이지 사상이 득세할 때에는 특별히 천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천사는 성경에 295회 나오는데 개역성경은 이 중 177회를 천사로, 67회를 사자(使者)로 번역했다. 천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인데 개역성경은 이것을 다 사자로 번역했다.
구약의 ‘주의 천사’는 다른 천사와 달리 특별한 경우에만 나타나는 중요한 인물이며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런 중요한 개념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으면 교리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개역성경은 마귀의 천사들 역시 사자들로 번역하여 마치 마귀에게는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이 없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소위 ‘배교의 결정판’이라 하는 NIV 등도 주의 천사와 마귀의 천사들을 제대로 번역했다.
개역: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마25:41)
흠정역: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
뉴에이지는 아기 천사, 여자 천사 등을 가르치지만 성경의 천사는 모두 남자이며 아기 천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천사를 다루는 부분의 ‘man’ 혹은 ‘men’은 반드시 남자로 번역해야만 한다.
개역: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19:5)
흠정역: 네게 온 남자들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그들을 알리라.
여기 나오는 ‘남자들’은 바로 천사들이며 소돔 사람들은 바로 이 남자들(천사들)과 성적 접촉을 갖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유다서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흠정역: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와 그것들의 주변 도시들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들을 음행에 내주고 낯선 육체(strange flesh)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로 보복을 당하여 본보기가 된 것과 같으니라(유7).
소돔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낯선 육체’를 추구했다(물론 그들은 다 남성으로 나타났음).
그러나 개역성경은 여기서도 이상하게 번역을 하여 이런 것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개역: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과연 이런 번역을 가지고 천사들과의 성적 접촉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래서 영어에서는 동성연애를 ‘sodomy’, 동성연애자를 ‘sodomite’라 부르는 것이다.
끝으로 성경의 천사는 항상 젊은 남자로 나타나므로 사람이 알아보지 못한다.
흠정역: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어떤 자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천사들을 대접하였느니라(히13:2).
2009-05-13 13:45:54 | 관리자
루시퍼인가, 계명성인가?
21세기 뉴에이지 시대에 하나님을 내버리고 인본주의를 삶의 모토로 삼은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신 마귀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다고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흠정역: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렸으니 곧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너희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신들, 새로이 일어난 새로운 신들에게 드렸도다(신32:17).
사탄은 이 세대 속으로 침투하여 많은 영혼들을 제물로 삼기 위해 온갖 힘을 쏟으면서 이제는 노래를 통해 ‘메탈 음악 시장’으로부터 평범한 ‘중류 음악 시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었고 심지어 CCM이라는 신복음성가 장르를 만들어 마귀를 찬양하는 리듬과 가사를 유행시키고 있다. 이제 반(反) 문화의 창시자들이 최근에 나온 새 역본들 안에까지 신비주의 지하 조직의 철학들을 집어넣음으로써 반(反) 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 눈앞에서 기독교회의 전체적인 배교가 일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 영향은 우레와 같이 엄청난 것이다.
흠정역: 12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만든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으로 떨어졌는가! 13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 15 그러나 너는 끌려가 지옥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들로 내려가리로다. 16 너를 보는 자들이 너를 자세히 살펴보고 너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이르기를, 이 자는 땅을 떨게 하고 왕국들을 흔들며 17 세상을 광야같이 만들고 거기의 도시들을 멸망시키며 자기 죄수들의 집을 열지 아니한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사14:12-17).
루시퍼의 자만에 찬 외침 즉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는 외침 속에는 단어 단어마다 그의 불만이 무겁게 깔려 있다. ‘기름 부음 받은 그룹’(Cherub)인 루시퍼는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변경하기를 원했다. 그는 모든 창조물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 아니라 자기에게 경배를 드리기를 갈망했다. 마태복음 4장 9절에 기록된 대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 “네가 내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그의 욕망이 경배 받는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계시록 13장 4절이 사람들이 용에게 경배했다고 기록하듯이 불행하게도 그의 야망은 곧 성취될 것이며 바로 그 환난기가 뉴에이지의 절정기가 될 것이다.
계시록 12장 9절은 ‘큰 용이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라고 분명히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그의 정체를 밝히 보여 주고 있다. 21세기의 일반 대중이 사탄에 대해 느끼는 나쁜 이미지를 바꾸어 경배 받기에 합당한 좋은 이미지로 바꾸기 위해 대중 매체는 그럴듯한 선전을 동원하고 있다. 그 내용은 가히 놀랄 만한데 그 핵심은 그의 정체를 바꾸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사야서 14장은 성경에 기록된 루시퍼에 대한 유일한 일대기로서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불법의 신비’(살후2:7)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우리는 12절에서 루시퍼가 하늘에 있음을 알 수 있고 15절에서 그가 지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늘에서 지옥으로 가는 동안 그는 무려 다섯 번이나 “내가…하리니”(I will…)라고 외치면서 하나님과 같게 되려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외침 하나 하나는 루시퍼를 하늘에서 지옥으로 이끌고 가는 계단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 구절을 통해 마귀의 자만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바르게 볼 수 있다.
위의 성경 구절은 사탄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보여 주므로 지금까지 사탄의 증오의 대상이자 저항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구절들은 그의 오만(13-14절), 세상의 불행에 대한 그의 책임(17절), 그리고 그의 파멸(15-16절)을 한 점 의혹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마귀의 일대기는 에스겔서 28장에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거기에서 그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고 그는 다만 ‘기름 부음을 받은 그룹’이라고 언급되어 있다(겔28:14).
루시퍼의 야망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는 것’인데 이 구절은 그의 정체를 훤히 드러내 줌으로써 그의 꿈을 산산조각 내고 있다. 사탄에게 아부하지 않는 정결한 말씀으로부터 ‘루시퍼’라는 단어가 확실히 제거되어 그를 ‘지극히 높은 자’로 만드는 말씀 속으로 삽입될 때까지 그가 자신의 이름 ‘루시퍼’에 대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다. 사실상 이 묘한 속임수는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에서 이미 완성되었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부패되지 않은 채 말씀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루시퍼의 일대기를 보여 주고 있다.
개역: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14:12)
NIV: How you have fallen from heaven, O morning star, son of the dawn! You have been cast down to the earth, you who once laid low the nations!
현대 역본들은 한결같이 ‘루시퍼’란 이름을 제거했고 이로써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타락 전 사탄의 이름을 보여 주는 부분은 본문에서 삭제되어 성도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결과 ‘루시퍼’라는 단어는 이제 시인들과 신화 작가들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고 그는 더 이상 성경에서 유래되어 확인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성경을 변개시킴으로써 루시퍼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가리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경이 변개되었으므로 사탄은 자신이 원하는 어떠한 특성도 스스로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에 나타난 이 같은 변화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고찰해 보면 ‘루시퍼’란 단어 대신 ‘계명성’ 혹은 ‘새벽별’(morning star)을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누구나 쉽게 깨달아 알 수 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halel, ben, shachar’로서 이것을 정확히 번역하면 개역성경처럼 ‘계명성’이 아니라 킹제임스 성경처럼 ‘아침의 아들 루시퍼’가 된다. 그런데 NIV와 NASB 등의 새 역본들과 개역성경은 마치 이 구절이 히브리 원본에 ‘shachar, kokab, ben, shachar’ 즉 ‘아침의 아들, 새벽별’이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번역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별’(kokab)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으며 또 ‘아침’ 혹은 ‘새벽’이란 단어도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에 있듯이 두 번 나오지 않고 킹제임스 성경에 있듯이 한 번만 나온다.
개역성경이나 NIV의 역자들은 ‘kokab’(스트롱 번호 3556)이라는 히브리어를 다른 곳에서는 수십 번씩이나 ‘별’로 번역했으며(창1:16부터 나3:16까지 약 40번) ‘아침’ 혹은 ‘새벽’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또한 개역성경의 편집자들은 ‘새벽별’(boger kokab)이 욥기 38장 7절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흠정역: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욥38:7)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루시퍼’라는 단어를 ‘새벽별’ 혹은 ‘계명성’으로 전달하고자 하셨다면 욥기에 나오는 동일한 단어를 이사야서에서도 반복해서 사용하셨을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이곳을 제외하고는 ‘루시퍼’란 단어가 나오지 않듯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halel’이란 단어 즉 ‘루시퍼’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도 이곳 말고는 히브리어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진정한 새벽별은 누구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역성경 번역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과 역본을 따라 이사야서 14장에 등장하는 ‘루시퍼’ 대신 ‘새벽별’ 혹은 ‘계명성’을 삽입함으로써 예수님께 대한 가장 결정적인 신성모독을 범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후서 1장 19절, 계시록 22장 16절 등에서 ‘새벽별’이라 불린다.
흠정역: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안에서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요 빛나는 새벽별이라, 하시더라(계22:16).
그러나 사탄은 서기관들을 이용해서 조용히 자리를 떠나 교활하게 무대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서 1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의 대상 혹은 타락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고소하는 자’(계12:10)라는 호칭에 걸맞게 행동하고 있다. 참고로 NASB 같은 현대 역본은 이사야서 14장 12절 옆에 “벧후1:19를 보라.”는 관주를 붙임으로써 이 구절이 ‘루시퍼의 타락’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타락’을 지칭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현세대 신학자들의 변절과 배교가 있기 전에는 믿는 성도들 모두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새벽별’이요, ‘계명성’이요, ‘샛별’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미 오래 전에 재미슨(Robert Jamieson)은 그의 저서 ‘주석: 구약 비평과 설명’에서 뉴에이지 시대에 그리스도에 대한 이름 놀이가 있을 것을 예고했다.
샛별: 진실로 그리스도께 속한 칭호로서 장차 적그리스도가 이 명칭을 사칭할 것으로 사료됨.
1913년도에 발행된 저 유명한 스펜스(H.D. M. Spence)의 ‘풀핏 주석’ 이사야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샛별(새벽별)이란 칭호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칭호이지만 후에 적그리스도가 이것을 찬탈할 것이다. 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빌론의 실체이며 신약성경의 신비 바빌론의 선두주자이다. 후에 사탄은 이 칭호를 마치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것인데…. 그는 이방 세상 권세 바빌론에게 활기를 주고 있으며 현재는 배교의 길을 걷고 있는 교회를 부추기고 있고 결국에는 세속적인 적그리스도와 … 그리고 그의 챔피언인 거짓 선지자를 선동하게 될 영이다.
사탄 마귀는 계시록12장에서 그 정체가 용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성경에는 용이 35회 등장하는데 개역성경은 용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여러 구절을 뱀(신32:33), 이리(욥30:29), 시랑(시44:19) 등으로 처리해 버렸다.
흠정역: 그들의 포도주는 용들의 독이요, 독사들의 지독한 독이라(신32:33).
개역: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
사탄 마귀를 나타내는 ‘리워야단’(Leviathan, 스트롱 번호 3882)은 성경에 다섯 차례 나온다(욥41:1; 시74:14; 104:26; 사27:1에 두 차례).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사야서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그를 악어로 번역해서 그 뜻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흠정역: 네가 낚시 바늘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혹은 늘어뜨리는 줄로 그의 혀를 끌어낼 수 있겠느냐?(욥41:1)
개역: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참고로 성경의 용(dragon)은 중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 상상하는 용과 다르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 29장 3절의 용은 강 한 가운데 누워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고 계시록 12장의 용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성경의 용은 보통 우리가 ‘공룡’이라 하는 짐승과 비슷하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영어에서 용의 용례를 찾아봐야 한다. 영어에서 용은 공룡과 같은 큰 괴물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dragon: a mythical monster, represented as a huge and terrible reptile, usually combining ophidian and crocodilian structure, with strong claws, like a beast or bird of prey, and a scaly skin; it is generally represented with wings, and sometimes as breathing out fire. The heraldic dragon combines reptilian and mammalian form with the addition of wings(옥스퍼드영어사전).
우리가 공룡을 지칭할 때 쓰는 ‘dinosaur’라는 단어는 1841년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오며 그 전에는 그런 괴물을 모두 ‘용’으로 불렀다.
dinosaur: A member of an extinct race of Mesozoic Saurian reptiles (group Dinosauria, typical genus Dinosaurus), some of which were of gigantic size; the remains point to an organism resembling in some respects that of birds, in others that of mammals(옥스퍼드영어사전).
그래서 영국의 전래 동화 등에서 나오는 용은 대개 모습이 ‘공룡’ 혹은 ‘공룡의 새끼’처럼 생긴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성경에 나오는 ‘용’을 우리가 알고 있는 ‘공룡’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2009-05-13 13:43:50 | 관리자
주인가, 여호와인가?
한국 성도들에게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매우 친숙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4자음문자’(Tetragrammaton)라고 널리 알려진 히브리어 ‘JHVH’에서 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처음으로 이 이름을 계시해 주셨다(출3:13-16; 6:2-8). 또한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엄중히 명령하셨다(출20:7).
흠정역: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명령을 매우 두렵게 생각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서 그분의 두려운 이름 ‘JHVH’를 대할 때마다 눈으로 그 이름을 확인하고 정작 읽을 때는 주(主)를 의미하는 ‘아도나이’(Adonai)로 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영어의 ‘Jehovah’는 히브리어 4자음문자 ‘JHVH’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넣어 만든 ‘YaHoVaH’를 음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현대주의자들은 ‘여호와’가 아니라 ‘야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전통 마소라 본문은 모음 부호를 통해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임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한편 개역성경의 ‘여호와’는 영어의 ‘Jehovah’를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 사실 대한성서공회 역시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구약의 마소라 본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네 글자를 ‘주’(아도나이)라 표기했고 신약의 사도들이 신약을 기록할 때도 그 이름을 ‘주’(큐리오스)라고 기록했으며 루터의 독일어 성경도 이 이름을 ‘주’(헤르)로,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이 이름을 ‘주’(로드)라 번역했고 개역성경 신약도 이 거룩한 이름 네 글자를 ‘주’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대한성서공회가 개역성경의 구약을 번역함에 있어 신약을 번역할 때와는 달리 주님의 거룩한 이름 ‘여호와’를 그대로 음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무려 6,400회 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취하게 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이 마땅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아무 때나 아무 의미 없이 취함으로써 그 이름의 위엄과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기도할 때 심각하게 나타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주요 원인은 개역성경의 구약이 영어 성경 중 유일하게 ‘JHVH’를 ‘주’(LORD, 전체 대문자)로 표기하지 않고 ‘여호와’로 표기한 미국표준역(ASV, 1901)에 근거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이 미국표준역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세계역과 마찬가지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로마 카톨릭 소수본문에서 나온 것으로 20세기 초반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자기들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해 가장 선호하고 애용한 성경이다. 참고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자 그 이후에 나온 신미국표준역(NASB, 1971)은 급히 이것을 수정하고 다시 원래의 성경 전통으로 돌아가 ‘여호와’ 대신 ‘주’(LORD)를 쓰고 있다. 참고로 NIV, NKJV, RSV 등 대부분의 영어 성경과 주요 유럽어 성경이 모두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은 구체적인 예를 보여 준다.
흠정역: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창2: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KJV: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ASV: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Jehovah God made earth and heaven.
개역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에서 ‘LORD’로 번역한 단어(스트롱 번호 3068)를 다 여호와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어의 변형인 ‘여호비’(스트롱 번호 3069)도 대개 여호와로 번역했는데 이것 역시 미국표준역(ASV)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이 단어는 특히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등에 많이 나오며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다 대문자 ‘GOD’로 표현해서 사람이 무의식중에라도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흠정역: 그들은 뻔뻔하고 마음이 뻣뻣한 자손들이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하라(겔2:4).
개역: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KJV: For they are impudent children and stiffhearted. I do send thee unto them; and thou shalt say unto them, Thus saith the Lord GOD.
ASV: And the children are impudent and stiffhearted: I do sent thee unto them; and thou shalt say unto them, Thus saith the Lord Jehovah(ASV).
유대인들은 이런 경우에 ‘여호비’를 ‘엘로힘’으로 읽었는데 그 이유는 ‘여호비’ 앞에 대개 ‘주’를 의미하는 ‘아도나이’가 오므로 ‘여호비’를 다시 ‘아도나이’로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의 전통대로 ‘여호비’를 피하기 위하여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조심스레 이것을 대문자 ‘GOD’로 표현했는데 이렇게 표현된 ‘GOD’은 성경에 309번 나온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래서 유대인들의 구약성경이 주는 의미와 맛을 표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가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라는 것은 다음의 용례를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주’(그리스어 큐리오스)라고 번역해야 함을 친히 보여 주신다.
흠정역: 주(LORD, 그리스어 큐리오스)께서 내 주(Lord, 그리스어 큐리오스)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마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이 구절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한 것이다.
흠정역: 주(LORD, 히브리어 여호와)께서 내 주(Lord, 히브리어 아도나이)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개역: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말로 신약성경을 주시면서 구약성경의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라고 이런 용례를 남기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여호와’를 ‘큐리오스’ 즉 ‘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여호와’라는 자신의 신성한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 구절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오는 중요한 구절로서 우리 주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구절인데 개역성경은 여기서 ‘여호와’를 ‘주’라 번역하지 않아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게 했다. 또한 마태복음과 시편 구절을 동일하게 번역하지 않았고 또 ‘발받침’(footstool)을 그냥 ‘발’로 바꾸었으며 ‘원수들’이라는 복수를 ‘단수’로 바꾸었다. 이렇게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성경의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문제는 또한 교리적으로도 중요한 차이를 가져온다. 구약의 ‘주’(LORD)를 ‘여호와’로 표현하면 성경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주의 날’ 즉 재림에 관한 개념이 변하게 된다. 다시 말해 동일한 날을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날’로 하고 신약에서는 ‘주의 날’로 하면 그것들이 동일한 날을 가리키고 있음을 독자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예로 사도행전 2장 20절을 살펴볼 수 있다.
흠정역: 저 크고 주목할 만한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것은 성도 누가가 요엘서 2장 31절을 인용한 것이다.
흠정역: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개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개역성경을 본문으로 한 관주 성경을 보면 사도행전 2장 20절의 관주가 분명히 요엘서 2장 31절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가서 보면 ‘주의 날’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로 되어 있으므로 독자는 이런 구절을 잘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영어 성경에는 모두 ‘주의 날’로 되어 있으므로 관주가 제대로 관주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한국 성도들에게는 대언자 이사야의 글로부터 줄기차게 언급되고 있는 ‘크고 두려운 주의 날’ 즉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기 위한 ‘야곱의 고난의 때’(렘30:7)에 대한 개념이 없으며 따라서 교회의 환난 전 휴거와 우리 주님의 전천년 재림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다. 이런 개념이 제대로 있으면 행2:20, 살전5:2, 벧후3:10 등에 나오는 ‘주의 날’이 유대인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구약의 ‘주의 날’ 즉 다니엘의 70 이레의 마지막 한 이레인 7년 환난기를 가리킴을 금방 알 수 있고 따라서 교회가 환난을 통과한다는 자기 학대의 믿음과 행위 중시 믿음에서 떠나 복된 소망인 환난 전 휴거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그가 언급한 주는 분명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구약의 대언자 요엘이 기록한 말씀과 같다.
흠정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니(욜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를 통해 바울 사도는 신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구약의 주 하나님임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엘서의 ‘주의 이름’을 개역성경처럼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하면 성경의 일관성이 깨지면서 성령님께서 요엘과 바울 두 사람의 기록을 통해 주의 깊게 의도하셨던 바를 독자들이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최근에 출간된 표준새번역은 개역성경과는 달리 전 세계 대부분의 성경처럼 바른 전통을 따라 구약에서 ‘JHVH’를 ‘주’로 옮겼는데 이는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009-05-13 13:39:56 | 관리자
대언인가, 예언인가?
성도들이 성경을 성경으로 풀려면 성경 번역시 중요 용어를 반드시 일관성 있게 번역해서 용어색인(concordance) 기능이 되게 해야 한다. 미국의 성도들이 성경대로 믿으며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에게 스트롱(Strong)이나 영(Young)이 만든 용어색인이 있어 누구라도 제대로 성경을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어떤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살펴보려면 용어색인을 이용하여 그 단어의 용례를 처음부터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불행히 개역성경은 이러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예로 ‘prophecy’ 혹은 ‘prophet’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성경에 500회 이상 나오며 성경 기록 그 자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대 영어사전을 살펴보면 이 단어의 주된 의미가 ‘예언하다’이므로 개역성경의 번역자들은 이것들을 앞날을 예견하는 ‘예언’, ‘선지자’ 등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남의 말을 대신 전한다’는 ‘대언’(代言)이며 성경의 용례 역시 전적으로 이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심지어 개역성경도 출애굽기 7장 1절, 에스겔 37장 4절, 계시록 19장 10절 등 10 구절에서는 부득이 대언으로 바르게 번역했다.
개역: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출7:1-2)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37:4)
개역: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19:10)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흠정역: 이로써 창세로부터 흘린 모든 대언자들의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니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라(눅11:50-51).
예수님께서는 아벨을 가리켜 최초의 대언자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초로 대언한 자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가 누구에게 대언했는가? 그는 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고 그 결과 박해를 받아 죽게 되었다. 이런 구절에서 개역성경처럼 아벨을 ‘선지자’라고 하면 말이 되겠는가?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20장에는 처음으로 ‘대언자’라는 단어가 나온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런 말씀을 주신다.
흠정역: 그러므로 이제 그 남자(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가 대언자이므로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만일 네가 그녀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이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20:7).
여기에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앞날을 예견한다는 의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구약시대의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할 때에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라는 선언과 함께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들이 이런 선언을 할 때에는 평상시 입에 올리기 어려운 ‘여호와’(영어의 LORD)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자기들의 메시지가 주님의 말씀임을 확증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LORD)의 이름으로 대언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대언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흠정역: 만일 대언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 일이 뒤따라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성취되지도 아니하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지 아니하신 것이요, 오직 그 대언자가 자기 뜻대로 그것을 말하였나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18:22).
이와 같이 대언자의 책무는 엄청났으며 특히 구약시대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의 패망에는 거짓 대언자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한편 성경 기록 자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언자들이 받은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 말씀처럼 성경 기록은 대언인 것이다.
흠정역: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벧후1:20-21).
이처럼 성경은 분명히 성경 기록 그 자체가 대언임을 보여 주지만 개역성경으로는 도저히 이것을 알 길이 없다.
개역: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여기서 개역성경이 ‘예언’으로 번역한 단어 역시 앞날을 예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대언으로 주신 말씀을 뜻한다. 앞 뒤 문맥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처럼 중요한 단어를 ‘선지자’나 ‘예언’ 등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 내에서도 고린도 교회의 은사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여 많은 교인들이 입시, 입사, 이사 때마다 예언기도 받으러 기도원의 점쟁이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신약시대에도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것은 대언의 말씀이지 결코 예언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고전12-14장의 대언, 대언자를 다 예언, 선지자로 번역하여 기복무속신앙을 부추기고 있다. 구약의 대언자들의 말씀 중 여러 부분이 미래를 다루므로 대언에 예언의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언이라는 말은 이미 그 의미도 다 포함하고 있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이런 문제가 있어서 처음에는 ‘선견자’(seer)라는 호칭이 있었으나 후에는 ‘대언자’로 바뀌었다.
흠정역: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여쭈려 할 때에 이같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선견자(seer)에게로 가자, 하였더니 지금 대언자(prophet)라 부르는 사람을 예전에는 선견자라 불렀더라)(삼상9:9).
여기 나오는 선견자야말로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으로 ‘선지자’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에서 대언자를 ‘선지자’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된다.
2009-05-13 13:31:27 | 관리자
살아 있는 혼인가, 살아 있는 영인가?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역시 영, 혼, 몸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이다.
흠정역: 평강의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5:23).
사람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음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구절이 바로 창세기 2장 7절인데 개역성경은 여기에서도 전 세계 모든 성경과 달리 특이하게 번역을 하여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흠정역: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성경이 보여 주고자 하는 바는 사람이 몸(흙)과 영(생명의 숨)이 합쳐진 혼이라는 것인데 개역성경은 이것을 부인하며 그 결과 영이 없는 사람(창세기 1장)이 있고 영이 있는 사람(창세기 2장)이 있다는 한 이단의 ‘이중 아담론’을 확립해 주고 말았다. 사람이 ‘산 영’(living spirit)이면 죽지 않는데 그러면 도대체 무슨 부활이 필요하며 ‘살려 주는 영’(quickening spirit)이 필요하단 말인가?
개역: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흠정역: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성경에는 혼이라는 단어가 535회 나오는데 혼을 믿지 않는 개역성경의 번역자들은 히브리서 4장 12절 같이 꼭 혼이 나와야만 말이 되는 구절에서만 혼을 혼으로 번역했다.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그리고 개역성경은 이런 곳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혼을 영혼이나 자(者) 등으로 바꾸어버렸다.
개역: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출12:15)
흠정역: 누구든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개역: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욥7:11)
흠정역: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이 번민 중에 말하며 내 혼이 고통 중에 불평하리이다.
위의 욥기를 보면 영과 혼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지만 개역성경은 이것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영혼’으로 처리해 버렸다. 이렇게 정확성이 떨어지므로 개역성경으로는 바른 교리를 정립하기가 어려우며 영어로 쓰인 기독교 관련 서적을 번역할 때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자기 교회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을 전도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미국 사람들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전도로 생각한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진짜 전도이다. 이 경우에 그들은 ‘혼을 구원한다’는 뜻을 가진 ‘soul winning’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나가서 사람의 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은 사도행전에서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에 하나님께서 많은 혼을 구원한 사실을 잘 보여 주지만 개역성경은 전혀 이런 것을 반영하지 못한다.
흠정역: 그때에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매 바로 그 날에 삼천 혼 가량이 그들에게 더해지니라(행2:41).
개역: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009-05-13 13:28:46 | 관리자
짐승의 영인가, 혼인가?
과연 성경은 짐승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는가? 성도들의 믿음과 실행의 표준이요, 최종 권위인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개역: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흠정역: 누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느냐?
개역성경은 본문에 ‘짐승의 혼’이라고 적었으나 밑의 난외주를 보면 “여기의 혼은 원래 히브리어로 영임.”이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히브리어가 ‘영’이면 본문에 있는 그대로 ‘영’으로 해야지 왜 ‘혼’이라 했을까? 그 이유는 번역자들의 토착 샤머니즘 사상 때문이었다. 그들은 도저히 짐승에게도 영이 있음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자기들의 사상대로 ‘영’을 ‘혼’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구절의 영은 히브리어 ‘루아흐’를 번역한 것으로 ‘루아흐’는 영, 바람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사람, 짐승과 관계가 있으므로 마땅히 영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전도서 3장 19절에 있듯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같이 숨을 가졌고 영을 가졌음을 분명히 보여 주며 노아의 대홍수 때에도 사람과 짐승 등 코에 생명의 숨을 가진 육체만 죽임을 당했다(창2:7; 6:17; 7:15; 7:22).
흠정역: 보라, 나 곧 내가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일으켜 속에 생명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를 하늘 아래에서부터 멸하리니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죽으리라(창6:17).
한편 하나님께서는 짐승도 영을 가졌으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말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민수기 22장에서 단 한 번 나귀가 말하는 기사를 영감으로 기록하셨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자 영을 가진 나귀는 곧바로 천사를 알아보고 말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절을 통해 짐승도 영이 있으므로 구원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전도서 3장 21절이 의미하듯이 짐승의 영은 죽어서 소멸되고 만다. 그러므로 짐승은 영을 가졌으나 천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는 상관없이 죽으면 그 영이 땅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지금 ‘루아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전도서의 번역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러면서 전도자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흠정역: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노니,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1:14).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것이 헛되어 영을 괴롭게 한다.”(vexation of spirit)고 전도서에서 무려 10번이나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것을 전혀 달리 표현하고 있다.
개역: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영을 괴롭게 하는 것’과 ‘바람을 잡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루아흐’는 ‘바람’으로도 번역이 되고 ‘영’으로도 번역이 된다. 원어가 동일하므로 이 같은 차이가 생긴데 대해 원어를 탓할 수는 없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자가 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어떻게 번역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자, 그러면 전도서의 문맥상 어느 번역이 맞을까? 우리는 전도서 기자가 말하려는 요점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번역한 대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어 우리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결국 전도서 기자는 마무리를 하면서 12장 13절에서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즉, 이 모든 것이 영의 문제지 결코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바람을 붙잡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번역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주는 번역이라고 믿으며 이런 의미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우리의 최종 권위라고 담대히 말하는 것이다.
2009-05-13 13:26:06 | 관리자
마귀인가, 귀신인가?
개역성경의 귀신은 어떤 존재인가? 소위 원한을 품고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할아버지 귀신, 할머니 귀신, 처녀 귀신인가?
개역: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고전10:20)
귀신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보면 무릎을 치지 않겠는가? 믿지 않은 사람들이 기일이 되면 상을 차려 놓고 조상귀신들을 불러오는 것이 참으로 이 구절과 잘 맞지 않는가! 과연 성경이 조상귀신을 가르친단 말인가?
흠정역: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들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리나니
개역성경이 ‘제사하는 것’이라 번역한 단어는 ‘sacrifice’인데 이 단어는 우리 조상들이 조상귀신을 부르는 제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용어로 ‘희생물을 드림’을 뜻한다. 그래서 구약의 소제, 화목제 등도 제사가 아니라 ‘음식 헌물’, ‘화평 헌물’을 드린다고 해야 맞으며 모든 영어 성경이 ‘번제 헌물’(burnt offering) 혹은 ‘번제 희생물’(burnt sacrifice)이라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조상들이 무지할 때에 조상신을 섬기려고 드린 제사는 성경에서의 희생 헌물을 드린다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이 천국 아니면 지옥이고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천이니 음부니 하는 허구의 장소는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누가복음 9, 16장 참조). 즉 죽은 사람의 넋인 귀신은 성경에 없다는 말이다.
웹스터 영어사전은 ‘마귀’와 ‘귀신’이라는 두 단어를 예리하게 구별하고 있다.
귀신(demon): 고대 이교도들의 신과 사람 사이의 중간 존재. 고대 사람들은 악한 귀신과 착한 귀신이 있어서 이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고 그래서 귀신들을 숭배했으며 또한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이 귀신이 된다고 믿음(A spirit, or immaterial being, holding a middle place between men and the celestial deities of the Pagans. The ancients believed that there were good and evil demons, which had influence over the minds of men,…Hence demons became the objects of worship. It was supposed also that human spirits, after their departure from the body, became demons, and that the souls of virtuous men, if highly purified, were exalted from demons into gods).
마귀(devil): 1. 기독교 신학에서 악한 영 혹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난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키며 또 이런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를 가리킴(In Christian theology, an evil spirit or being; a fallen angel, expelled from heaven for rebellion against God; the chief of the apostate angels).
사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준 어떤 영적 존재인 ‘귀신’(demon)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그리스 사람들은 ‘귀신’이 ‘반신반인’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적인 기독교와 유대교를 제외한 전 세계의 모든 종교는 성경이 ‘악한 영들’(evil spirits)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존경과 위로를 받기에 합당한 ‘반신반인’ 혹은 ‘귀신’이라고 믿는다.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그리스어 ‘디아볼로스’(diabolos)와 ‘다이모니움’(daemonium)이 서로 다르며 전자는 사탄을 후자는 마귀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같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리스어를 하나의 영어 단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원본주의자들은 큰 낭패를 보게 된다. 그 이유는 NASB 같은 현대 역본들이 두 개의 서로 다른 히브리어 ‘shed’(스트롱 번호 7700)와 ‘sair’(스트롱 번호 8163)를 다 ‘귀신’(demon)으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레17:7; 신32:17 등). 깨지기 쉬운 유리 집에 살고 있는 학자들은 “원어는 원래 이런 뜻이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에게 원어의 돌을 집어던지는 행위를 삼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원어를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학자인체 하며 이중 잣대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도대체 다음과 같은 표현을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개역: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시106:37)
여기의 ‘사신’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무 쉬운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으므로 개역성경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킹제임스 성경은 얼마나 단순하고 정확한가?
흠정역: 참으로 그들이 자기 아들딸들을 마귀들에게 희생물로 바쳤으며
한편 개역성경은 시편 106편 37절에서 ‘사신’으로 번역된 동일한 히브리어(스트롱 번호 7700)를 신명기에서는 ‘마귀’라고 멋있게 번역하였다.
개역: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신32:17)
다만 아쉬운 것은 여기 나오는 마귀, 신 등이 모두 복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흠정역: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렸으니 곧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너희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신들, 새로이 일어난 새로운 신들에게 드렸도다.
많은 신(gods)이 있고 유일한 하나님(God)이 있으며 많은 아들(sons)이 있고 유일한 아들(the Son)이 있으며 많은 마귀(devils)가 있고 유일한 마귀(the devil)가 있다는 것이 바른 성경의 가르침이다.
2009-05-13 13:23:55 | 관리자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족한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에 충분한가, 아니면 부족하므로 우리가 공을 들여 채워야 하는가?
개역: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어느 면에서 부족하기에 그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워야 한단 말인가? NIV는 아예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부족한 것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흠정역: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해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해 내 육체 안에 채우노라.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은 뒤에 이제 성도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서 고난 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는 남은 고난이 하나도 없다.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창에 찔리고 육체가 완전히 부서져서 그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는데 도대체 무슨 고난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흠정역: 그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더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너를 보고 놀랐느니라(사52:14).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을 무시하는 개역성경은 다음의 구절에서도 중요한 단어를 삭제했다. 예수님의 몸이 우리를 위해 찢긴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개역: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11:24)
흠정역: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broken)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2009-05-13 13:21:31 | 관리자
여자 감독과 집사
초대 교회부터 성경에는 이름 없이 주님을 섬긴 많은 여인들이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는 여자들의 활동이 아주 왕성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 보기에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창조의 질서가 지켜지길 원하신다.
흠정역: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조용히 배울지니라.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딤전2:11-12).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영감을 주사 교회의 두 직분인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셨다.
흠정역: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딤전3:2)
흠정역: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딤전3:11-12).
여기서 말하는 감독은 교단의 감독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교단이 나오지 않으며 성경의 교회는 모두 독립/자치 교회이다. 여기서 감독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bishop’인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것을 주교로 부르고 있다. 현대 교단들의 감독 체제는 바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교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감독은 한 지역 교회의 감독을 말한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될 것이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뿐이 없으며 이들은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즉 여자는 이런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창조 질서를 위배하기 때문이다. 개역성경도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12절은 잘 번역했으나 11절에서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
개역: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11)
개역성경은 이곳을 ‘여자들도’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여자들도 집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번역했다. 그러나 심지어 NIV 같은 현대 번역본들도 킹제임스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그들의 아내들도’ 즉 ‘집사들의 아내들도’라고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여자 집사를 인정하기 위해 이런 번역을 한 것으로 사료된다.
흠정역: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2009-05-13 13:19:27 | 관리자
그리스도 안과 밖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논리적으로 교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 그런데 개역성경에서는 자꾸 오류가 발견된다.
개역: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갈6:15)
흠정역: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운 창조물만 있느니라.
그리스도 밖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로마서 3장). 할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복은 무할례자들이 결코 뺏을 수 없는 복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교회 안에서는 이런 것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천주교 성향의 서기관들이 천주교의 이스라엘 대체 신학 즉 교회가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거짓말을 지지하기 위해 이것을 삭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친 자손들이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자기들의 땅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여 천년왕국을 소유하려 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무조건적으로 허락하신 저 팔레스타인 땅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영원토록 유대인들의 땅이다(창세기 12, 15장).
2009-05-13 13:17:31 | 관리자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가?(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 금식 제거)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서 마귀를 내쫓지 못했는가, 아니면 믿음이 적어서 내쫓지 못했는가?
개역: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흠정역: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로다…
우리 주님의 요점은 그들의 믿음이 겨자씨보다 작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문맥을 보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마귀를 내쫓는지 친히 말씀해 주신다.
흠정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그러나 개역성경은 여기서도 예수님의 충고를 들으려 하지 않고 몸을 피한다.
개역: 없음.
참으로 개역성경은 NIV 등의 다른 현대 역본들과 마찬가지로 기도와 금식의 능력을 부인한다.
개역: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막13:33)
흠정역: 너희는 주의하라. 깨어 기도하라. 그때가 언제인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개역: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행10:30)
흠정역: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에 이 시간까지 금식하고 아홉시에 내 집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보라, 한 남자가 빛나는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개역: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고전7:5)
흠정역: 너희는 서로를 속여 권리를 빼앗지 말라. 너희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그리하는 것은 예외이나 다시 함께하라.
개역: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고후6:5)
흠정역: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소동과 수고와 깨어 있음과 금식 가운데서 그리하고
마지막 예에서 먹지 못하는 것과 금식은 다르다. 금식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자기의 욕망을 누르는 것이다. 따라서 먹지 못해 배고픈 것이 반드시 금식은 아니다. 물론 금식하면 배가 고프다. 개역성경은 다른 현대 역본들과 마찬가지로 금식의 능력을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
2009-05-11 18:08:35 | 관리자
종교를 강조함
개역성경과 현대 역본들은 “너는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을 직접적으로 거역하면서 우상숭배를 지지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우상숭배는 사람들이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때 곧 7년 환난기에 온 땅을 가득 채울 것이다(계13:15).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이 추구하는 거꾸로 된 세상 속에서는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엄한 책망도 따뜻한 칭찬으로 바뀌게 된다.
개역: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religious)(행17:22)
흠정역: 그때에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 한가운데 서서 이르되, 너희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것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superstitious).
킹제임스 성경이 ‘미신’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의 어근은 마귀와 상관이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서 ‘종교심’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드레쉐이스’(thresheis) 혹은 ‘세보마이’(sebomai)인데 이런 단어는 그 구절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개역성경은 이렇게 아테네 사람들처럼 자기들의 열심에 도취되어 헛된 것에게 경배하는 것을 ‘종교심’이 많은 것으로 이해하는 교인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한국 교회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2009-05-11 18:05:41 | 관리자
성경에 오류가 있는가, 없는가?
성경은 사람의 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으로 기록하신 책이므로 모순이 없다. 만일 그 안에 모순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위태롭게 된다.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막1:2-3)
이 구절은 말라기서 3장 1절과 이사야서 40장 3절에 있는 말씀을 마가가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앞부분 즉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는 절은 대언자 이사야의 글이 아니고 말라기의 글이며 따라서 이것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하면 성경에 오류가 생기게 된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정확하게 ‘대언자들의 글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2009-05-11 18:03:58 | 관리자
우리말의 어려움
성경을 번역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우리말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비슷한 것 같은데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히브리서 12장 29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역: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니라.
흠정역: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니라.
개역성경에도 소멸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표현법이 맞느냐, 틀리냐에 상관 없이 하나님은 심판하셔서 '태워 없애는' 분을 뜻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소멸하다와 소멸시키다는 완전히 다르다. 소멸하다는 소멸되어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역성경대로 하면 하나님이 소멸되어 없어지신다는 뜻이 된다. 이런 부분이 성경에 상당히 많이 나온다.
틈이 나는대로 우리말을 바르게 쓰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들을 읽지만 정말로 어려움을많이 느낀다. 혹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읽다가 틀린 부분을 발견하면 알려주기 바란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그 소설을 바로 잡기 위해 20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글 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리니 부족한 부분을 보면 알려주기 바란다.
2009-05-11 18:02:12 | 관리자
비유가 아니면, 비유가 없이는?
여러 해 전에 미국에서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친절한 기장(부기장?)을 만났다. 성경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는 목사냐고 묻고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분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 소개하였다. 친절한 분으로 알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분의 성경 해석 방법이 기묘했다. 그분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마태복음 13장 34-35절을 인용하였다.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개역: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그분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모두 비유이며 심지어 창세기 이후의 모든 것이 다 비유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런 비유를 바르게 깨달은 사람에게 성경을 배워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분은 신천지 신도였다.
그분의 주장에도 분명히 일리가 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그분의 말씀은 모두 비유가 아닌가?
이것은 성경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계룡산 도사들과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바른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흠정역: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 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창세로부터 은밀히 간직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요점을 이야기할 때마다 쉬운 비유를 들어 핵심을 말씀해 주셨다. 영어로는 without a parable인데 이것이 개역성경처럼 잘못 번역되면 수천 명의 사람들을 무지 속에 빠뜨린다. 교주에게 속아 넘어가서 궁극적으로 생명을 잃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들(words, 단어들)을 바르게 번역해야 한다.
우리말이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상당히 멋있기도 한다. 조심스럽게 이 도구를 사용해야 함을 느낀다.
2009-05-11 17:59:20 | 관리자
임마누엘을 부인함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 중 하나이다. 이사야서에서 처음 언급된 이 말(사7:14; 8:8)은 성경에 단 세 번 나오며 마태복음에서 성도 마태가 이것을 인용하고 있다(마1:23).
개역: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개역성경을 따르면 임마누엘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으며 단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평범한 약속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도로 이 구절을 주지 아니하셨다.
흠정역: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비슷하게 보이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하는 말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것을 전혀 달리 번역했으므로 이런 구절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기 어렵다.
2009-05-11 17:54:04 | 관리자
먼저와 처음, 나중과 마지막
며칠 전에 우리말의 어려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특히 개역성경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성경을 대충 읽고 거기서 자의적인 뜻을 찾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에서 먼저와 나중은 비교 대상이 있을 때 쓸 수 있다. 표준국어 대사전은 먼저와 나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먼저: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앞서서. 예: 나 먼저 나갈게./씻기 전에 밥 먼저 먹어라
나중: 다른 일을 먼저 한 뒤의 차례. 예: 맨 나중/이 일은 다른 일 다 하고 나중에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First와 Last의 표현이 특히 복음서와 계시록에 자주 나온다. 이것은 여러 개 중의 첫 번째 것과 마지막 것을 뜻하므로 결코 먼저와 나중으로 번역될 수 없다.
마태복음 19장 30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흠정역: 그러나 처음인 자로서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인 자로서 처음이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지금 비교급의 먼저와 나중이 아니라 첫째와 꼴찌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주님은 바로 그 다음에 20장 1-16절에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이 이른 아침에, 세시에, 여섯시에, 아홉시에, 그리고 열한시에 나가서 사람을 모으고 그들에게 일하게 했다. 그런데 첫 번째 온 사람들과 마지막에 온 사람들이 모두 일 데나리온씩을 받게 됨으로 분쟁이 생겼다. 개역 성경은 8절에 "나중 온 자로부터 먼저 온 자에게 품삯을 주었다"고 기록하는데 이것 역시 "마지막에 온 자로부터 처음에 온 자에게 품삯을 주었다"고 해야 맞는다. 물론 그것이 16절의 결론이다.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흠정역: 이와 같이 마지막인 자가 처음이 되고 처음인 자가 마지막이 되리니
즉 11시에 맨 마지막에 온 사람이 이른 아침에 즉 처음 개시할 때에 온 사람이 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의 요점이다. 이것이 먼저와 나중으로 바뀌면 9시에 온 사람이 6시에 온 사람이 되어도 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장 18절도 개역성경처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라고 하면 큰 오역이 된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해야 맞는다. 계2:8도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자.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흠정역: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도 먼저가 영어로는 first로 되어 있다. 우리말에서는 먼저가 쓰이면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 즉 무엇보다 먼저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어나 원어는 그런 것이 아니고 첫 번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말한다.
이런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실제로 많은 차이를 가져온다.
하나님께 대한 것은 상대적인 우위가 아니라 절대적인 우위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해야 한다.
주님 제일주의를 좋아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주님께서 하늘의 위로를 주실 줄 믿는다.
2009-05-11 17:47:45 | 관리자
성서침례교회들과 성경에 관하여
- 미국 뉴저지 중앙침례교회 이황로 목사
성서침례교회들과 성경에 관하여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우리가 적어도 성서침례교회라는 이름을 사랑한다면 무엇이 "성서"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해석도 나올 것이고 적용도 나올 것이고 선포와 전도도 나올 것입니다. 원문비평학이란 학부보다도 대학원에서 신구약총론에서 조금 다루어지는 것으로 대개의 목회자들은 그냥 지나갈 정도이며 특히 "말씀의 보존(Preservation)"에 관한 것은 웬만한 조직신학 책에서도 별로 많이 깊게 다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비평학에 관하여는 대개 유명 박사들이나 교수들이 말한 것을 거의 수용하는 편이지 감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못되기에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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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 성경에서 세 명이 구원받는 놀랍고 아름다운 사례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타이틀이 훼손되어 있거나 삭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번역 문제가 아니라 사본의 문제이다. 눅23:42의 강도의 구원(주여 삭제), 행8:37의 내시의 구원(신앙고백하는 전체 절이 삭제), 행16:31의 빌립보 간수의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가 삭제) 등에서 보듯이 이런 경솔하고 불경한 삭제를 해도 된다는 말인가? 성서침례교회 사람들이 구령상담을 그렇게 잘한다고 하면서 롬10:9, 13을 잘 외우고 있다. 예수님을 주(=하나님)로 믿어 시인하는 것은 절대적인 조건이다. 물론 반대자들은 원래는 없었는데 누군가가 필사를 하면서 추가했다고 할 것이다.
결국 TR과 비TR과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신약에서 이렇게 삭제된 양을 계산해보면 7%에 육박하는데도(4500곳 이상 변개/삭제) either A or B(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7%의 양이면 요한계시록과 비슷하다. 나의 질문은 이렇다.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라고 묻지 말고 우선 신약만을 두고 말할 때 요한계시록이 빠져도 신약전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요3:16, 로마서의 길 말씀, 옥중서신들, 혹은 목회서신들이 빠져도 신약전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조금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에 평범한 목회자들은 어리둥절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이용하여 말씀보존학회 사람들이 성서침례교회들 목회자들을 혼잡스럽게 할 수 있지만 (일부 혹은 상당수 오류 내지는 극단적인 주장을 실제로 하고 있다), 동시에 (신)복음주의자들과 소위 일부 근본주의자들도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학설을 받아들여 친교회 목회자들을 오도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을 내어서 연구하여 보면 그렇게 어려운 주제만은 아니다.
결국 자유주의자들, 신정통주의자들(바르트)들의 주장은 축자 영감을 부인하며 이 문제를 접근하기 때문에 1) 가장 오래된 사본이 원본에 가깝다, 2) 짧은 원문이 원본에 가깝다는 주장으로 자연적인 결론을 내린다. 초자연적인 접근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본을 오류 없이 성경기자들에게 주셨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그들의 주장은 차라리 진화론적인 접근이요, 누군가 초기에라도 성경을 변개하였다면 그렇게 변개 되고 삭제된 필사본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축자 영감은 적어도 축자 보존을 논리적으로 요구하며, 축자 보존은 축자 번역을 요구한다. 설령 보존과 번역에 있어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정확한 보존과 정확한 번역을 요구한다. 그러한 반면에 개념영감(Dynamic Inspiration)은 개념보존, 개념번역으로 갈 수밖에 없다. 성서침례교회 목회자들과 신학교수들, 신학생들 중에 개념영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이단학설. 잘 모르면 조직신학 책을 참조). 믿는다면 그는 근본주의자도, 복음주의자도 아니고 마태4:4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말씀(every word)"과 딤후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개역 이 구절의 "감동"이란 말은 중대한 오역이다. 벧후1:21에는 기자가 "감동"을 받았고, 딤후에서는 기록이 오류 없이 "영감"을 받았다). 어쨌든 역동적 일치의 번역 기법은 축자 영감을 믿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모순과 위선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개념이 영감을 받지 않았기에 개념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개념(Dynamic Equivalency)이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다른 문화권과 언어권에서 제한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은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다. 지상명령(마28:19-20)에서 우리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기 위해서는 구령과 더불어서 성경번역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예수님께서 각 언어와 문화를 모르시고 그 명령을 주지 않으셨다.
또 하나 역동적 일치로 번역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축자 영감을 믿는다면 문자적 해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세대주의에서 문자적 해석을 매우 강조한다. 문법적-역사적 해석, 수사법적 해석, 성경자체의 해석을 세 가지 중요원리로 삼고 이것을 일관성 있게 사용한다. 역동적일치 기법은 영유니 상징이니 하면서 단어가 주는 액면상의 뜻을 배제한다. 이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축자 영감을 믿는다면 문자적 영감, 문자적 보존, 문자적 번역, 문자적 해석이라는 일관성 있는 입장이 된다. 반면에 개념적(=역동적)영감은, 역동적 보존, 역동적 번역, 역동적 해석으로 귀착된다. 한번 심사숙고 해볼 일이다. 복음주의자들의 고민과 모순은 영감에서 있어서는 축자 영감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번역에 있어서는 역동적(=개념적) 일치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가능한 한 문자적 번역을 해야 한다. 킹제임스 성경이 바로 그렇다. Textus Receptus(=Received Text)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과 예수님이시다. 요17:8을 묵상 해 보라. 이 말씀이 계속 사도행전에 반복된다. (이 정도만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성서침례친교회들은 도대체 무슨 성경을 쓰는가 하는 문제이다. 미국에도 한글 개역에 해당하는 NASV/NIV가 존재하는데 주일날 예배 때 설교 때 어떤 성경을 쓰는가? 미국 친교회 안에서도 이 문제가 계속 대두되고 있고 많은 독립침례교회들도 이슈가 되고 있다. 목회자 서재에서는 여러 번역본들과 히브리/헬라어 성경을 보겠지만 강단에서 어떤 성경을 쓰고 있나? 진실로 킹제임스 성경이 자유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자들, 상당수의 복음주의자들이 생각하고 믿고 주장하는 대로 열등하고, 원본과 원문에서 변개 된 것이라면 그들은 강단에서 위선을 떨고 있는 셈이다. 미국 친교회의 소수의 목회자들이 자신의 양심과 정직을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이 열등하다고 믿는 나머지 다른 성경을 최고로 정확하게 번역된 성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서침례교회 교회 목사라는 말이 무섭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친교회 교회들 중 어떤 교회들은 교회 이름에서 "침례"라는 말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2년 전에는 전에 빅 박사님께서 시무 하시던 교회도 템플 침례교회에서 노쓰릿지 교회로 개명했다. 어쩌면 그 교회가 변질되면서 솔직하게 안팎을 투명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서침례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도 "성서"와 "침례"라는 말을 삭제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무엇이 성경인지도 모르고, 부정적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침례라는 말도 빼는 것이 좋을 것이니까...... 세상은 십자가, 보혈, 천국, 지옥이라는 말도 싫어한다..........).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쉽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정확하고 탁월한 보존된 사본을 원문으로 채택됨
2) 당시 가장 건전한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번역자로 채택됨
3) 지금까지도 가장 탁월한 히브리/헬라어를 잘 아는 번역자들이 채택됨
4) 가능한 한 최대로 역동적 일치가 아니라 문자적 일치 기법으로 번역
우리 친교회 목사님들이 우선 연구를 많이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통치 않은 글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제언
한국 친교회가 침례교회로서의 근본주의를 버리고 점점 (신)복음주의로 가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 없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슈들 중의 하나는 성경문제입니다. 우리는 오래 동안 한글 개역 성경을 사용하여 왔었고, 그 성경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현저한 차이가 있었지만, 친교회 교회들 목사님들은 그래도 킹제임스 성경이 더 좋다는 정도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실상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나도 처음에 1981년에 이 문제를 만났을 때, 그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단지 개역 성경에서 다소 미흡하거나 틀린 부분 또는 빠진 구절이나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들어가면 갈수록 그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개역이 아닌 다른 성경이 반드시 나와야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상적인 연구조사로는 개역성경을 계속 사용하고 복을 누리며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미국에도 NASV/NIV를 쓰면서 큰 교회 목회하고, 훌륭한 사역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자유주의 노선으로 가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논조로만 본다면 굳이 성서침례교회를 목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성경을 쓰셨고 우리에게 보존해주셨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런 성경을 현재 가지고 있으며 사용하고 있는가? 그런 칼을 주셨는가? 아니면 장난감 칼을 가지고 마귀에게 휘두르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시간과 노력이 매우 요구되고 머리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조금씩 접근해 가면 좋은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킹제임스 성경 문제를 접근할 때, 허수아비를 치면 안 됩니다. 지금 미국에도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러 입장들이 있고 보편적인 입장, 극단적인 입장, 이단적인 입장 등이 있습니다. 침례교회 역사를 공부할 때도 아나 뱁티스트 중에는 성경적인 재 침례교도, 극단적인 재 침례교도, 이단적인 재 침례교도 등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구분이 없이는 쓸 데 없는 시간 낭비만 합니다. 성서침례교회들이나 독립침례교회들은 성경적인 재 침례교도들에 그 역사적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결국 초대교회까지 교리적인 추적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침례교회의 기원에 대하여도 여러 견해가 있는데, 성서침례대학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음).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고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 종류만 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친교회 안에도 적지 않습니다.
저명한 신학자들도 허수아비를 치는 오류를 종종 봅니다. 10여 년 전에 미국에서 “주재권 구원”을 가지고 달라스신학교 라이리 박사와 그레이스 코뮤니티교회의 죤 맥아더 사이에 복잡한 말들이 오갔습니다. 라이리 박사는 신학적 입장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받는 성경적인 입장을 주장했고, 맥아더 목사는 목회자적 입장에서 볼 때,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믿는 사람들이 다 구원 받았는가?라는 입장에서 각각 출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주장하지 않는 말을 가지고 공격하고 피가 터지는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주장할 때 신학적 용어의 “정의: definition"을 (조금) 다르게 내리고 말을 하니 결국 서로 허수아비만 치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이 결코 주장한 적이 없는 내용을 가지고 공격을 한다는 말입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라이리 박사의 성경적 입장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맥아더 목사는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틀렸지만 그의 주장도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킹제임스 성경 논쟁에서도 찬반 입장이 그러한 허수아비 때리기에 휘말려 있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신학 접근과 논쟁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기에 본인이 주장하는 그 단어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서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친교회의 목사님들 중에는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플로리다의 피터 럭크맨이나 한국의 이송오 박사와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오해이며 무정보 탓입니다. 나는 목사님들의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킹제임스 성경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위에서 말한 대로 보편적이고 성경적인 입장, 극단적 입장, 이단적인 입장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도매금으로 물건을 넘기는 식으로 처리하여 이단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 몰아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곳 미국에서도 계속 연구를 하면서 입장들이 정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킹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우선 절대화해서 말을 하면 안됩니다. 어떤 분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면 럭크맨파, 이송오 말보회라고 함부로 말합니다.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책이나 자료들을 보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각자 활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피터 럭크맨이 저술한 책의 내용 중에는 어떤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말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용들이 엄청나게 들어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볼 때 틀렸다고 믿는 것들이 있지만 성경론만 보더라도 어떤 조직 신학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탁월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말씀보존학회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그런 서적들을 번역하기 때문에 그 학회에서 나온 책들을 모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안됩니다. 아쉬운 것은 현재 킹제임스 성경을 변호하는 책과 자료들은 80% 이상이 그 학회에서 번역했기 때문에 친교회 목사님들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 사람들의 독점이나 전매가 아닙니다. 하지만 보편적이고 성경적인 입장에서 씌여진 좋은 책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다만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이나 미국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강하게 지지하고 심지어 그 성경만이 보존된 성경이고 가장 정확하게 번역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럭크맨 파 사람이라고 밀어붙이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성경론”을 다시 읽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킹제임스 성경을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는 “영감(Inspiration)"에 대한 정의를 전통적인 의미로 정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조직신학은 원래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성경과 이성(논리)를 가지고 세워져 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조심해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신학이 “조직화”되면 그 체제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침례교 신학교 개신교 신학이 다를 때가 있음을 보여 주는 이유입니다. 보수적인 개신교 신학과 성경적인 침례교 신학은 “교회론”과 “종말론”이 다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허수아비 치기를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침례교회들의 현황은 어떠한가?
나도 성서침례교회(행당동)에서 구원받고 자랐고 헌신, 결혼, 안수까지 받은 사람으로서 그 영적인 자산과 경험들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미국에서는 국제성서침례친교회가 대다수가 아님을 한국 목사님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넓게 근본적인 독립침례교회라고 보통 말하며 그 중에 BBFI가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친교권의 교회들, 신학교들이 있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미국의 근본주의 독립침례교회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해왔습니다. 신학부에서는 물론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해왔는데, 신학대학원 과정에서는 헬라어 원문 선택에 있어서는 NASV/NIV의 원문인 소수사본을 채택한 것이 사실입니다. 모순적인 입장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구령과 선교와 교회를 세우는데 열심이었기에 별로 사람들이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침례대학(미주리 스프링필드)은 처음에 3년 과정이었고, 후에야 대학원과정이 개설되었습니다. 다른 신학원과 마찬가지로 대학원 과정에서 모순되게 킹제임스 성경 원문(히/헬)이 아닌 다른 원문(히/헬)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밥죤스 대학(원)이나 다른 신학교에서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미국 근본주의 침례교회 목사들은 자신이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해 들고 있는 성경이 “완전한” 성경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육을 조금 더 받은 목회자들은 그렇게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피터 럭크맨과 D.A. Waite(웨이트) 같은 사람들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럭크맨에 관한 경력과 결혼에 대하여는 조금 알려진 편인데, 웨이트 박사는 달라스 신학원에서 졸업할 때 수석으로 졸업한 분(ThD)이고 퍼듀(Purdue) 대학교에서도 PhD(Greek)를 딴 대단한 학자입니다. (www.biblefortoday.org) 이런 사람들이 연구한 것을 말할 때 유식한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어쨌든 웨이트 박사는 보편적이고 성경적인 입장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1984년에는 인디애나 해몬드의 제일침례교회 잭 하일스 목사님이 이 문제에 접근하고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학생을 크게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그 후 1995년도 후반에 플로리다의 펜사콜라 대학(www.pcci.edu)(공교롭게도 피터 럭크맨과 같은 도시)의 총장 호르튼 박사가 이 문제를 오래 동안 연구하다가 프로 킹제임스 성경 입장으로 굳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BBFI에서도 문제가 되어 결국 몇 년 전에는, 친교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샘 데이비슨 박사가 주장이 되어 하트랜드침례신학대학이 세워지게 됩니다(400명 정도). (한국 친교회 교회들은 더 하지만 현재 미국 BBFI도 남침례교회 목사, 초교파 목사를 친교회 강사로 세우느니, 못하느니 하고 있음. 점점 개방적으로 가고 있음). 미주리의 BBC가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독립침례교회들 목회자들이 학생들을 보낼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학교가 킹제임스 성경을 어떻게 생각하나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모두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했지만 전에는 숫자적으로 소수만이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지금은 과반수를 넘는 학교와 학생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하게 믿는 학교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밥죤스 대학교(철저히 침례교적이지는 않음), 테네시템플 대학교 같은 학교들은 학생 수 감소에 대하여 위기를 느끼고 나름대로 대처를 하고 있습니다. 하일즈앤더슨 대학,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만 보더라도 각각 3000명, 5000명이나 되는 학생 수가 있으니 밥죤스 5000명, 테네시템플 1200명... 위축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진리가 수에 좌우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적어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간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지금 이 학교와 학생들은 피터 럭크맨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펜사콜라 대학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좋은 서적과 비디오들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영어에 조금 익숙하신 분들은 구입하여 연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고 강력하게 그 성경만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피터 럭크맨 추종자가 아니며, 지극히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스트라우스 박사가 성경론과 킹제임스 성경에 대하여 특강에서 이 분은 보편적이며 성경적인 입장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믿고 가르치는 분입니다. 비록 밥죤스대학교에서 PhD를 받았지만 킹제임스 성경, 침례교 교리, 근본주의에 대하여 가장 건전한 분 중의 한 분입니다. 물론 통역이 있을 것입니다. 가서 들어보시고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www.inchristjesus.net (전국친교회와 중복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가끔 킹제임스 성경에 관하여 거시적인 접근에서 미시적인 접근으로 가면서 기고를 하겠습니다.
미국 뉴져지 중앙침례교회 이황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여러 입장들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고 변호하는 사람들이 피터 럭크맨이나 이송오 박사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번에 잠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다르게 여러 입장과 믿음이 있음을 잠간 소개하였습니다. 다음 주제에 대하여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보고 답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글을 읽는 분에게 숙제와 과제를 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 여러 입장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1.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완전한 성경이 있어야 하고 현재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가? 신약을 두고 말할 때, 다수사본(“넓게 말해서” 비잔틴 사본 또는 전통사본 Textus Receptus[약자로 TR, 영어로는 Received Text])이나 소수사본(비평사본, 웨스트코트와 홀트 사본, 네슬사본 등)에 보존되어 있는가?
(다수사본[Majority Text]과 [소수사본]에 대하여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들은 신약개론이나 신약총론의 설명을 참조하여 보라).
완전한 성경이 필요한가?
그것이 다수사본도 아니고 소수사본도 아니라면 번역본으로 가야할 것이다. 더욱이 원본(Original Manuscripts)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문제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보존에 대하여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성경이 어떤 형태로 보존될 것인지 생각해 보라. (마태5:18; 계22:18-19...19절도 개역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과 다르다. “생명의 책”인지, 아니면 “생명나무”인지 확인 해 보라. 주님은 구약에서도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신4:2; 잠30:5-6). 그런데 복음주의자들과 일부 근본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는 신약에 있어서 7%나 되고 8413 군데에서 다르거나, 빠지거나, 변개된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본교리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무지와 불경함을 말하고 다. Everett W. Fowler, Evaluating Versions of the New Testament (Watertown: Maranatha Baptist Press, 1981), p.66. 구약까지 본다면 사본(원문) 선택과 번역기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에 2만 군데가 넘는 곳에 차이가 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본뿐 만 아니라 결국 어떤 번역본도 오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원본에는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다고 믿는 것이 근본주의자들 전체와 거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의 믿음과 신학이다. 나도 100%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사본이나 역본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존중한다. 하지만 신구약 말씀의 저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신의 말씀이 완전하시며,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며 완전하게 보존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지금도 어딘가에 완전한 말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설교자도 성경을 들고 말할 때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말씀이 있고, 우리가 믿고, 선포하고 묵상하고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복음주의 목사들과 근본주의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하는 것을 지금까지 보아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성경을 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기만이요 회중 모욕이요, 불경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이나 개역 성경이나 혹은 NIV/NASV/NKJV 등 가운데 어딘가에 완전한 성경이 존재하고 그것을 “짜집기”한 것이 완전한 성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도 한다. 나는 “글쎄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전한 말씀을 원본을 통해 주셨다면 그 말씀이 사본 등을 통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어야 하고, 적어도 이 시대에도 그러한 완전한 말씀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과 논리의 정당한 가르침과 결론이다. 그러한 성경이 없다면 아마 지금 그러한 성경을 만들든지,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떠했는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방문하셨을 때, 이사야서를 찾으셨는데 그 성경은 원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사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구약 이사야서를 “성경”이라고 인정하셨고 부르셨으며, 그 말씀이 자신에게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셨다. 나는 예수님께서 구약사본을 보실 때 공인하셨음을 믿는다. 그것은 원본도 아니었고 더욱이 칠십인역도 아니었다. (칠십인역은 상당수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예수님 오시기 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학설 뿐이다). 나는 축자영감을 믿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말씀보존을 믿으며, 그리고 번역된 성경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되어 보존된 말씀이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은 어떤 성경이라고 믿는가? 원본? 다수사본? 소수사본? 킹제임스 성경? 개역? 공동 번역? 새 번역? 새 표준번역, 개정 개역? NIV? NASV? NKJV? Reader's Digest Bible?.....당신이 답변하면 나도 답변해주겠다고 약속한다.
2. 어떤 사람들은 꼭 그렇게 정확한 성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 사고방식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축자 영감을 조소하면서 마음으로도 믿지 않고, 입술로도 비웃는 사람이다. 한국의 한신대가 대표적인 신학교요, 기장측이 해당되며 미국에서는 유니온 신학교가 해당된다. 그리고 신 정통주의는 한국의 장신대가 대표적인 신학교요, 통합측이 해당되며, 미국에서는 프린스톤 신학교가 해당된다. 그리고 키에르케골이나 칼 바르트가 대표적인 신학자들이다. 신 정통주의자들은 소위 신약에서 빨간 글자로 된 부분(어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빨간 폰트로 인쇄) 정도는 아마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생각되나 나머지는 소위 “실존”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아주 악한 사람들이다. 실존주의 신학이 바로 신 정통주의 신학이요, 그들은 마음으로 축자 영감을 부인하나,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모두가 말하기를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복음주의자들(장로교 중 합동측과 남침례교단)은 그러면서도 신 정통주의자들과 초교파적으로 같이 어울리고 집회와 강단교류를 잘 하고 있다. 그런데, 근본주의자들 중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복음주의 노선으로 가고 있는데 필연적으로 자신들이 복음주의자로 될 것을 알고 있다. 역사의 교훈에 의하면 근본주의(Fundamental)에서 복음주의(Evangelical)로 가고, 복음주의에서 에큐메니칼(Ecumenical)로 가기가 쉽다. 한국 성서침례교회도 지금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자, 그런데 성경 이슈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들의 현격한 차이가 무엇인가? 복음주의 신학교들과 목회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주의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지 않고 쓸 수도 없다. 극단적인 예외가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그 말은 정확한 말이다. 복음주의 신학교(달라스, 리버티, 남침례 신학교들, 탈봇, 트리니티 등)에서는 원본의 축자 영감은 믿지만, 사본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보존을 분명히 믿지 않는다. 예를 들면 단지 성경말살정책과 핍박 밑에서 성도들이 말씀을 감추거나 생명을 걸고 카피했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위의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구약총론에서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학설을 신봉하는 나머지 킹제임스 성경의 저본인 다수사본이나 비잔틴사본이 열등하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이 NIV나 NASV보다 나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열등하다고 가르친다. 적어도 한국 친교회의 순수한 목사님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대부분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에 관하여 말할 때 “킹제임스 성경이 좋은 것은 나도 알고 인정한다. 하지만.”이란 말은 거짓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학교에서 배울 때 결코 그렇게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의 BBFI 선교사들이 초창기에 킹제임스 성경이 탁월하다, 최고로 잘 번역되었다고 한국 목회자들에게 말해 주었고, 순수하게 믿고 있고 아직도 미국에 있는 BBFI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거의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기에 그러한 정서나 분위기를 훼손할 수 없기에 대강 좋게 좋게 말하는 것뿐이다.
겉으로는 근본주의 노선을 지향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안은 복음주의 사람들은 결코 킹제임스 성경이 탁월하다고 믿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교육받은 복음주의 신학교의 입장을 거부한다면 그렇게 않겠지만... 나의 질문은 그들이 만일 미국에서 목회 한다면 킹제임스 성경을 쓸 것인가라는 것인데 분명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서침례교회들 목회자들과 성도들이여, 근본주의자라고 자처하면서 복음주의 노선을 가는데, 자신은 킹제임스 성경이 좋다, 탁월하다, 우수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공부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든지 아니면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을 무마시키기 위한 부드러운 표현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복음주의자들과, 겉은 근본주의자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복음주의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성경이라고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번역본보다 탁월한 성경이라고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운 내용이 그렇지 않고, 자신도 그 배운 내용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코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순수해야 하지만 순진할 필요는 없다.
3. 킹제임스 성경이 아닌 성경들과 소수사본의 문제는 “뉴 에이지 사상”과 천주교 성경이라는 데 있다.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는 입장이다. 자유주의자들과 신 정통주의자들은 성경원본의 축자 영감을 부인하고 잘 해야 부분영감이나 개념 영감을 믿으며 하나님과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않는다. (고후2:17; 4:2 개역만 말고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나 한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도 참조).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은 사본과 역본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그렇게 강하게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금 삭제되었다든지, 혹은 추가되었다든지, 변개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기본교리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라고 변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말씀선포와 순종과 사역에 있어서 대강 한다는 뜻을 결코 아니다. 다만 신학교에서 그 문제에 대하여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에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뉴에이지 사상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반대하고 경계한다. 아니 당연히 대적해야할 사상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들도 반대한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 외에 다른 역본들과 사본들이 뉴 에이지 영향을 받았다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과 반박을 할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러한 것을 연구조사해서 그러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영적인 눈이 밝게 뜨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영어 성경에 있어서 킹제임스 성경만을 사용해야 한다(소위 KJB Only)는 사람들은 다른 성경이나 사본이 바로 뉴에이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기에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무엇인지 믿고 있다. 그러니까, 킹제임스 성경 문제는 어떤 성경이 뉴에이지 영향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뉴에이지 사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요,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이요, 반성경적인 문화인데 그것을 추적해보면 바벨론 종교와 마귀에게까지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목회자나 신학생, 성경에 관심이 있는 성도라면 킹제임스 성경 이슈와 별도로 이 문제를 연구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사상과 이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인 것을 믿지 않고 상대적인 것을 믿으며, 객관적인 것보다는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것을 추구하고, 범신론과 윤회설 등을 추구한다. David L. Smith, A Handbook of Contemporary Theology (Wheaton: Victor Books, 1992), p.277. 그리고 이것은 현대와 와서 모든 분야, 즉 철학, 과학, 정치, 음악, 의학, 신학, 크리스천 신학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나는 이것에 대하여 상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 훌륭한 책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은 G. A.립링거 박사가 저술한 것으로 “그런 구절들이 빠져 있거나 변개 되어 있어도 기본교리에는 상관이 없다”는 불경한 사람들의 잘못을 책망할 것이다. Riplinger, G. A. New Age Bible Versions. Munroe Falls: AV Publications, 1993. 립링거 여사는 유명 대학교수로 있으면 학생들을 영적으로 성경적으로도 도왔는데, 캠퍼스의 학생들이 많은 종류의 성경이 왜 그렇게 존재하는지 그 이유에 관한 질문을 받고 도전 받아 6년 동안 꼬박 연구조사하고 분류하여 쓴 책이다. (피터 럭크맨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립링거 박사가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개역이나 다른 성경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도 복음주의자들은 나름대로의 설명과 변명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할 것이다. 위의 책은 말씀보존학회에서 번역했고 정동수 교수가 상권을 번역했다. 도움이 될 것이다.
말씀구절들이나 단어가 빠진 성경에서 조금 틀리게 가르쳐도 상관이 없다는 사람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목회자나 영적 지도자로서 물론 말씀을 따라 100% 순종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4:2)”는 명령을 총사령관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으며, 지상명령에서도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마지막 당부도 있으셨고, 사도 바울도 행20:27에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개역과 킹제임스 성경 다 참조)”을 주저함 없이 3년 동안 에베소 교회에서 가르쳤다. 마5:19도 참조해 보라. 우리가 성경을 다 알지 못해서, 우리가 아는 만큼 다 순종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약만 보더라도 7%의 분량, 8413 군데의 말씀들이 삭제되었거나 변개 되었는데도 “기본교리에는 상관이 없다”고 운운하는데,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모든 부분들이 관련이 있고 성경을 부인하는 프린스톤 대학의 메츠거 박사도 상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물론 킹제임스 성경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성경들이 기본교리 면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데, 어차피 그 사람은 성경의 기본교리를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이고 솔직한 표현을 했을 뿐이다. 그에게는 기본교리가 상관이 있든 없든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인데, 근본주의자들이 믿는 교리와 자유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시인한 것뿐이다.
4.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여러 입장들
1)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좋은 성경이 아니다. 다만 여러 번역성경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당신의 취향에 맞는 성경을 선택하라. 이것은 자유주의자나 신 정통주의들, 그리고 상당수의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이다.
2) “나는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좋다.” 이 사람들은 순수한 입장에서 다른 역본들보다 더 선호하고 어휘나 역사적인 의미, 고전적인 문체와 간결체 등을 좋아한다. 반드시 복음주의자나 근본주의가 아니라도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지 않는 목회자도 여기에 속한다.
3) “신구약사본들이 탁월하기 때문에 킹제임스 성경이 탁월하다.” 구약의 사본이 마소라 사본(예를 들면 킷텔이 처음에 편집한 사본으로서 후에 한 것과 구별)인 점, 신약의 다수사본인 점을 들어서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다. 하지만 이 사본들을 저본으로 하여 더 킹제임스 성경보다 더 좋은 성경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 Wilbur Pickering과 “Defender's Study Bible"을 만든 Henry M. Morris 박사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Morris 박사는 미국 창조과학회를 창설한 사람이다. 그가 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주석은 매우 우수하다. 그는 NKJV의 모세5경을 번역하는 데 감독자로 요청되었지만 거절했다. 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 www.icr.org에 가서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그 팜플렛을 요청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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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침례친교회 안의 목사님들은 구령과 교회를 강건케 하는 일에 바쁘실 줄 압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틈을 내어서 킹제임스 성경에 관한 책이나 자료들을 조금씩 연구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도 15년이나 걸려 지금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09-05-11 17:43:58 | 관리자
우리말 성경 번역의 어려움 2
요즘 몇 사람이 성경 번역의 문제들을 지적해서 이것저것 다시 살펴보고 있습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교정을 봤다고 하면서 여러 개를 알려주셨습니다. 힘들여 수고한 것에 대해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자기가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호통을 치고 사람을 얕잡아 보는 것을 보며 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래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깊은 근심이 생깁니다. 무엇을 찾았으면 그대로 제시하고 살펴보라고 하면 되는데 "이 따위로 번역했느냐", "초등학교 번역이다", "중학교 번역이다" 라고 말할 때에는 참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항상 자신이 다 안다고 주장할 때 발생합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항상 더 좋은 방안이 생기며 형제를 세월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나 직장에서 다 통하는 원리입니다.
왕상18:21을 보기 바랍니다.
And Elijah came unto all the people, and said, How long halt ye between two opinions? if the LORD be God, follow him: but if Baal, then follow him. And the people answered him not a word.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려니와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그에게 한 말도 응답하지 아니하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는 하나님이면이라는 말이 첨가되었고 이를 표시하기 위해 이탤릭 체를 썼씁니다. 그분은 왜 성경에 이렇게 첨가를 해서 가증한 일을 했느냐고 야단입니다. 그러면서 간단하게 영어처럼 하면 된다고 제안했습니다.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 만일 주께서 하나님이면 그분을 따르려니와 만일 바알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그에게 한 말도 응답하지 아니하매
영어와 대조해서 얼핏 보면 이분이 지적한 것이 옳게 보입니다. 참으로 이분은 의로움으로 가득한 백기사로 보입니다. 우리 같이 무엇을 첨가하면 완전히 말씀 변개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한 번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여기를 그냥 바알이면으로 하면 '주께서 바일이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의 '주'는 여호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와가 바알이 됩니까? 그게 아니라 '바알이 하나님이면'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됩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미국 달라스 신학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Kendall 박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I have one question in red. Is it if Baal be God like blue?
¶ And Elijah came unto all the people, and said, How long halt ye between two opinions? if the LORD be God, follow him: but if Baal, then follow him. And the people answered him not a word.
그랬더니 그분께서 곧장 다음과 같이 답을 보내 왔습니다.
Yes! You are a good exegete. In English it is called an “ellipsis” and needs to be provided.
그러므로 우리가 번역한 것이 맞습니다. 개역성경, 현대인의 성경, 공동 번역, 표준 새번역 할 것 없이 모두 '바알이 하나님이면'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이탤릭 처리를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누구로 인해 이분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항상 문제는 말씀보존학회라는 유명한 단체에 의해 생깁니다. 그들의 번역은 이분의 주장대로 '바일이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성경 번역에서 단어를 더하는 일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 번역해도 더하는 일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러나 영어를 혹은 번역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말씀보존학회 방식으로 번역하고 그것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틀린 데가 있다고 생각되면 통보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협조가 성경 본문을 고정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읽어 봐야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낼 때 인격적인 글로 보내기 바라며 제안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 노력은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05-11 17:39:52 | 관리자
우리말 성경 번역의 어려움 1
요즘 몇 사람이 성경 번역의 문제들을 지적해서 이것저것 다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번역 문제를 오픈해서 지적한 사항들이 사실이면 다음 번 인쇄 때에 교정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에도 그렇게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1611년 영어 성경처럼 왜 단번에 고정된 우리말 역본이 나오지 않느냐고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영어 성경도 1380년경의 위클리프 성경부터 시작해서 1611년 킹제임스 성경까지 무려 230년 동안의 번역/재번역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되었습니다. 번역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이 수십차례 교정되었다는 증언도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앞으로 혹시 교정할 곳이 발견되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어떤 목사님이 엄청나게 큰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이따위로 성경을 번역하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정말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15년을 이 일을 했는데 이런 질책을 통해 마치 큰 죄를 지은 것 같이 몰아붙이면 어떤 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분이 지적한 것은 여호수아기 1장 내용입니다. 이 구절은 너무 유명해서 여러분과 내가 잘 아는 것입니다.
1. 그분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책무를 주시며 이르시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을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데려가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시니라.
2. 네 평생 동안 능히 아무도 네 앞에 서지 못하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하던 것 같이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이 백성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네가 그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리라.
3.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매우 담대히 하여 내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모든 율법대로 지켜 행하고 그것을 떠나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이분의 요지는 왜 마음을이라는 단어를 내 마음대로 첨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켰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 표현대로라면 울화통이 터지고 짜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영어로 "be strong and of good courage"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번역하겠습니까? 한 번 해 보십시오.
이분의 주장은 '강하고 담대하라'로 간결하게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말씀에 첨가를 해서 성경을 훼손시켰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고 야단입니다. 얼핏 들으면 참으로 지당한 말이라 너무 큰 죄를 져서 죽을 것 같은 심정이 됩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국립국어 연구원에 e-mail을 보내어 상담을 합니다. 2006년도에 성경을 낼 때까지 수백번 이상 이렇게 상담을 해서 우리말 용례를 하나하나 물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가 생기면 그 이후에도 수백번 이상 물어 보았습니다.
질문을 보낸 뒤 다른 성경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말씀보존학회에서 나온 킹제임스 성경과 이번에 새로 나온 개역개정판이 그분의 지적대로 '강하고 담대하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것들을 참조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답이 왔습니다.
담대하다’는 형용사이므로 명령형 어미와 결합하여 활용하지 않으며, ‘하다’나 '하다'가 붙는 동사 어간 뒤에 붙는 직접 명령의 어미 형태는 ‘-라’가 아니라 ‘-여라’ 입니다. 따라서 문의하신 문장 1, 2에는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여라.’ 또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라.’와 같이 쓰고, 3에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매우 담대히 하여’와 같이 써야 합니다.
즉 결론은 강하다, 담대하다는 형용사이므로 '강하고 담대하라'로는 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말 답게 표현하려면 어쩔 수 없이 지금처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나 '강한 자가 되고 담대한 자가 되라'로 해야 합니다. 이 경우 둘 다 무언가를 첨가해야만 합니다. 전자에는 '마음을'이 후자에는 '자가'가 2번 첨가되어야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읽기에 전자가 훨씬 부드러우면서 우리말답지요. 다만 '마음을'이 원래 없었기에 그것을 이탤릭 처리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개역성경도 동일합니다. 다만 거기서는 '마음을'이 이탤릭 처리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들은 그것이 원래 있는 줄로 알 뿐입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고 엉터리 번역이 좋은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런 것을 일일이 이야기할 수 없어서 오늘은 제 심경을 간단히 밝힙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틀린 데가 있다고 생각되면 통보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협조가 성경을 고정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읽어 봐야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낼 때 인격적인 글로 보내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05-11 17:37:2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