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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약2481개
안녕하세요? 아마도 이것은 의 2부에 나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M. R. 디한 박사님이 지은 것(피의 화학적 성질)입니다. 디한 박사님의 글에 따르면 선지 해장국 등은 신약시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 중에도 그런 이유로 선지 해장국을 들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즐겨 먹지는 않지만 일 년에 한두 차례 선지 해장국을 먹을 기회가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먹습니다. 음식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해석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판단의 자유에 따라 잘 생각하시고 먹든지 먹지 않든지 정해서 실행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곰, 사슴 등에서 산 피를 빼서 먹는 것은 저는 반대합니다. 그것은 음식 차원의 일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믿음대로 잘 행하고 실족하지 않는 지혜를 주시기 원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 말이 다 옳은 것이 아니니 영혼의 자유에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22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너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허용하는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행복하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를 받나니 이는 그가 믿음을 따라 먹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롬14:22-23). 샬롬 패스터
2015-05-05 14:39:31 | 관리자
지금이 얼마나 위급한 시대인가 다시금 돌아보고 영적 옷깃을 여밀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바르게 인식하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하며 할 수 있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길 소원합니다.
2015-05-05 00:07:30 | 김대용
안녕하세요? 이미 다른 회원들을 통해 답변이 다 됐는데 처음부터 알 레이시의 책 등 궁금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고 세 번의 단계를 거쳐 글을 올리시는 이유가 바로 이 질문을 꺼내기 위한 과정이었나요? 결국 뭔가 정동수 목사님 설교가 출판사의 책과 안 맞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알 레이시가 우리에게 생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금해야 할 규율이라고 한 것입니까? 음식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덕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요. 안식일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7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그조차 우리에게 율법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능하면 지키는 것이 좋은 것과 안 지키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자꾸 따져서 무엇하겠습니까? 또한 알 레이시는 생피를 먹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문명화가 덜 된 사람들이 주로 행하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그런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알 레이시가 다소 강경하게 말했지만 그의 이야기가 성경의 규례가 될 수 없고, 그가 반드시 금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므로 큰 줄기에서 결국 같은 것이지만 어떤 측면을 강조한 정도의 이야기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서니까 번역은 그대로 하지만, 평소 정동수 목사님이 밝히신 것처럼 레이시도 낙스, 로이드 존스, 웨이트 등등 누구도 100% 맞는 말만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은 정동수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보되 성경에 비추어 가장 큰 개념과 줄기를 먼저 이해한 후에 나머지는 거기에 맞추어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약 성도의 규례는 바울 서신을 통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고전 10:23)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적절하지는 아니하며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세워 주지는 아니하나니 이 말씀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각자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되고 그것을 율법주의적으로 남을 정죄하거나 또 다른 법을 만드는 일에 쓸 필요는 없습니다. 레이시는 자기 견해와 자기 양심을 밝힌 것으로 봅니다. 다만 책에 기록하니 마치 법처럼 보는 이들에게 짐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의 말이 법은 아닙니다. ------------------------- 또 다른 관리자 형제가 알아보니 다른 사람의 정보로 가입하셨더군요. 이 사이트에는 게시판 정책이 있습니다. 본인 실명으로 가입하고 오직 가입한 사람만이 자신의 아이디로 글을 올리는 것은 사이트의 운영 원칙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자신을 숨긴 상태에서 올린 글로 어떻게 진솔한 믿음의 교제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또한, 이 곳은 질문용 게시판도 아닙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이 있어 이 글을 삭제하지는 않지만 자기 이름과 정보로 가입하시기 전까지는 더 이상 글을 쓰실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교제를 위해 사이트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예의와 품격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2015-05-04 23:27:15 | 김재욱
제가 의문이 생기는 부분은 저도 성도님 말씀대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예수안에 에서 출판한 예수님의 피 바로알기(알 레이시지음- 정동수 역) 235p 에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아래 있으며 그 명령은 율법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대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 있지 않았던 노아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 천년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보다 더욱 의미가 있는 사실은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은혜의 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법칙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하셨다는 점 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유효합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중략 236P 비록 우리 크리스챤들이 율법 아래 있지는 않으나 아직 까지도 피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규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리스챤들이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생명인 피가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있기 천년전에 즉 은혜시대에 벌써 노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는 율법시대에도 효과를 발생했고 율법시대가 지난 지금의 은혜시대에도 계속해서 효력을 내고 있습니다"   237p  "...피와 함께 그 육체를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왜냐면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피를 먹는 것이 믿음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정동수목사님께서 적극 추천하고 있는 책으로 그 내용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내용과 동일한데 단지 이부분은 전혀 다른 주장이네요... 맞는 주장인가요? 아니면 번역이 잘못 된 것인가요? 아니면 알 레이시의 주장이 잘못된 것인가요?
2015-05-04 21:53:45 | 송성규
원격의료, 베리칩, 킹스맨(月刊 건강과 생명 2015년 5월호 건생時論)   차 한   사상 처음으로 내과 전공의 지원자가 미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한병원협회가 공개한 ‘2015년도 전공의 모집현황 자료’를 보면 성형외과, 피부과 등 비급여 과목 선호도는 여전히 높은 반면 내과와 가정의학과는 정원 미달 사태를 보였다. 그 주된 이유는 원격의료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경우 만성질환자를 주로 보게 되는 내과, 가정의학과의 위상이 하락하게 되리라 예측되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삼십여 년 의사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접하는 이러한 현상은 마치 쓰나미가 오기 전 발생하는 전조증상 중의 하나와 같다고 여겨진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겠지만 내과 전공의 지원자 미달 사태가 발생한 두 달 뒤 보건복지부는 현재 의료취약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원격의료 사업 대상을 2015년 말까지 140곳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농어촌 병원, 원양어선 선원, 거동이 불편한 고혈압·당뇨병 환자의 가정, 군 경계초소(GP), 교도소, 구치소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가 시행하고자 하는 원격의료의 명분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아무리 의료계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외치며 원격의료를 결사반대 하더라도 원격의료는 (시기가 언제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지만) 시행되고야 말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IT 최강국이기 때문에 여론조성만 잘 되면 ‘미래 먹거리’라는 미명하에 놀라운 속도로 원격의료가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원격의료 시스템’이란 인터넷 망과 최첨단의 IT 기술을 이용한 획기적인 진료 시스템이다. 원격의료 시스템이 정착이 되면 지금 정부에서 시범적으로 하고 있는 원격의료 곧 환자의 건강을 실시간으로 체크하여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수준을 넘어 해외에 있는 환자들을 직접 수술하는 것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원격의료 시스템 구축에 핵심이 되는 기술이 ‘베리칩’(verichip)이다. 이것은 ‘확인용 칩’(verification chip)의 약어로 미국의 어플라이드 디지털 솔루션사에서 지난 2001년에 공개한 상품명이다. ‘무선 송수신 식별장치’(RFID)를 내장한 쌀알 크기의 이 칩은 애완용 동물이나 가축들의 관리를 위한 전자 인식표로 사용되었는데 200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인간의 몸속에도 심을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그리고 2010년 3월 소위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미국의 ‘건강보험개혁법’이 통과됨으로써 (건강보험제도를 강하게 추진하기 위한 방편으로) 모든 미국시민에게 베리칩을 이식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이 되었다. 2013년까지 준비기간을 갖고 2016년까지 유예기간을 거쳐 2017년부터 강제로 실시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지각 있는 이들은 세계 정부가 일반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오바마케어’를 통해 베리칩의 확산을 도모한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베리칩이 인간의 몸속에 들어올 때 어떠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요즈음 장안의 화제인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가 그 답을 잘 제시해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었듯이 사람의 호르몬 또는 신경전달물질을 자극해 폭력적으로 만들어 서로 살육하게 하는 등 사람의 생각과 육체를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베리칩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가 아니다. 킹스맨의 주요한 두 장면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고 하였지만 그 뜻은 영화의 결말과 달리 현실에서는 베리칩을 통해 온 인류가 통제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애완견에 베리칩을 주입하고 있다. 베리칩의 전신일 수밖에 없는 스마트 워치도 어느 덧 우리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언젠가는 미국에서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원격의료 정착’과 ‘IoT(사물인터넷) 산업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베리칩 이식이 강행될 것이다. 아마도 송도 신도시가 세계적인 시범 지역이 될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 베리칩을 심어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신세계질서(NWO; New World Order)는 바야흐로 우리의 목전에 와 있다. 그야말로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말세지말(末世之末)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계13:16-18).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 여기에 지혜가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볼지니라. 그것은 어떤 사람의 수요,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계13:16-18)
2015-05-04 10:40:47 | 관리자
몸통의 글을 이해하고 있으면 논란의 소지가 있는 꼬리의 글들의 오해가 풀립니다. 꼬리의 글들로 몸통을 흔들려고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관점에서 글을 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건전한 나의 논리를 정립해 나갔으면 합니다. 뒷풀이 글도 기대가 됩니다.
2015-05-04 09:09:16 | 조양교
부족하지만 제가 깨달은 것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를 먹는 것을 엄중하게 금지한것은 바로 속죄제사에 담긴 의미 때문입니다. 속죄제사를 할 때 제물의 피를 보면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제물을 통한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회개해야 하는데 평소에 피를 음식처럼 먹는 습관이 있다면 대속을 통한 회개와 은혜보다는 피로 만든 음식의 맛을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피에 대한 용도는 딱 하나 대속인 것입니다, 아울러 더 중요한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하고 그 속에 담긴 영생을 깨닫고 믿게끔 하기위해 피를 속죄의 용도외에 다른 것으로의 용도는 엄중히 금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성취하신 후에는 피에 관련된 율법의 조항들은 더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성취하셨기 때문이지요. 사도행전 예루살렘 회의에서 멀리하라고 한 이유는 바로 15장 21절에 있습니다. 각성에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전하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놓고 피를 먹고 하면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될수 있기에 삼가라고 한것입니다. 율법처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끊어지는 게 아니고, 또 절대 먹지 마라 한것도 아니고 다만 멀리하라 한것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지금 가장 민감한 시기에 유대인들과 충돌하면 결코 좋을것이 없기 때문에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멀리하자고 의견을 제시한 것일 뿐이죠 사실, 현재 우리 주변에 유대인 회당도 없거니와 우리나라는 선지해장국과 순대 등등 피가 섞인 음식 문화가 많으니 위에 사항은 문제될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지내면서 어떻게 피로 만든 음식을 먹고 그리스도인일수 있냐고 항변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뿐이였습니다. 이 때문에 수혈도 거부하는 그들의 교리가 있지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오히려 지금 우리가 피에 대한 계명 때문에 먹는 것이 꺼림직하거나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에 생명이 있으니 먹지 말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제대로 깨닫게 해주려고 만드신 율법인데 그 보혈을 믿고 깨달은 우리가 본질을 못보고 자꾸 먹지 마라는 계명에 얽매이게 되는 부작용이 생길수 있기 때문이죠..뭐 비본질적으로 다른 것들이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한다면 우리의 자유를 스스로 절제하며 그사람들을 잘 섬겨줘야 하지만 적어도 피에 관련된것은 이 속에 담긴 바른 의미를 전달해 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원에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공로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더이상 피에 대한 계명을 꺼림직하게 받아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증거하기 위한 그림자이자 이정표였을 뿐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선지 해장국이랑 순대국 참 좋아합니다! 무지 맛있어요 괜히 꺼림직하게 생각않하셔도 됩니다 맘껏 드세요~ 아주 맛있어요 ㅎㅎ
2015-05-02 21:37:50 | 이성일
그러면, 각 전치사가 사용된 문맥을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36절)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신 아버지 입다를 만나자마자, 딸은 참담한 마음으로 탄식하시는 아버지를 봅니다. -       35절과 36절 사이에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즉, 탄식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딸은 영문을 몰라 그 이유를 묻습니다. 입다는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해 줍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서원하고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왔는데 그만 네가 나왔구나. 아버지는 너를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       비로소 영문을 알게 된 딸은 먼저 ‘내 아버지여’라고 아버지를 부르고는 말을 잇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서원을 들으시고 암몬 족속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셨으니까 서원을 제게 행하셔요라고 동의하고 권해 드립니다. 이때 딸이 아버지에게 즉답으로 한 말은 단순히 내게(to me)입니다. -         (37절)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       입다는 이제 자기에게 생긴 커다란 운명의 변화를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위해 ‘{주}를 위하여 드린 자’가 되는구나. 내가 원해서 택하는 삶은 아니지만 ‘{주}를 위하여 드린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나도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지. 다만, 처녀로 평생을 살면서 여자로 태어나 메시야를 수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너무 애통한 일이구나.” -       -그래서, 딸은 아버지에게 그 애통함을 풀기 위해 아버지에게 두 달간의 말미를 구합니다. “내게(for me) 이 일을 행하시되”라고.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쓰심으로써 우리는 입다의 딸의 마음이 어떠함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for me)’라는 것이 딸의 마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       이때까지는 입다의 마음이 자기 실수로 인한 비참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39절)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       두 달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딸은 친구들과 함께 산에서 실컷 애곡하고 마음의 정리와 준비를 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헌신의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 왔습니다. -       입다도 처음에는 예기치 못하게 딸을 하나님께 드려 헌신하게 될 줄 몰라서 참담한 심정이었으나, 두 달의 기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겠습니다. -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전쟁을 이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내 딸을 거룩히 구별해서 받으시겠다고 딸이 그때 집 문에서 나를 맞이하게 하셨겠지.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딸에게 선하게 해 주심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자. 딸에게도 이것이 더 나은 일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       그래서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with her)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쓰심으로써, 우리는 입다가 딸과 함께(with her) 마음을 합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딸은 자신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드리는 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 다른 전치사가 동일한 문맥에서 사용된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중의법을 사용하여 입다의 딸의 마음과 입다의 마음을 각각 37절과 39절에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중의법이라는 수사법이 황진이도 알고 춘향전 작가도 알고 또 저까지도 알고 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수천 년동안 말씀해오신 하나님께서 그런 걸 모르고 그냥 아니면 어휘 자랑하시려고 그렇게 다른 전치사들을 동원하셨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기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짐짓 그렇게 다른 단어로 우리에게 성경 기록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여 보았고,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뒷풀이)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입다를 포함한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하려면 자기에게 시간이 부족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할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그런데, 과연 우리는 입다에 대해 믿음의 본이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개역(개정) 성경을 쓰는 한국 교계에서는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죽었다고 버젓이 죽은 사실을 추가해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게 믿고, 따라서 ‘입다’와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를 연결시켜 생각하기에 심히 곤란을 느낍니다. 단지 서원해서 전쟁 승리하고 돌아온 것 하나죠. 거기다 잘못된 서원으로 딸을 번제 헌물로 바친 비운의 사나이 정도. 인터넷에서 입다란 검색어로 찾아보면, 내용 소개는 나와 있어도 어느 한 사람 제대로 입다를 본받을 믿음의 사람으로 실질적인 내용을 소상하게 거론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 분은 솔직히 입다가 믿음의 본으로 히브리서에 올라 있지만 자기는 별로 찾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작고하신 박윤선 목사의 주석에는 입다의 딸이 죽지 않고 처녀로 살아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나실인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입다가 동생들에 의해 집을 쫒겨나서 돕 지방에 거하는 동안 허영심 많은 자들이 찾아와서 나다녔다는 기록을 통해 입다의 마음 속에 이복 동생들에 대한 미움의 골이 깊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쫒겨나기 전까지는 길르앗 지방의 머리인 아버지 길르앗의 슬하에서 교육도 잘 받고,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장남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지만, 아마도 아버지 별세 후에 집을 쫒겨나서 바깥으로 나다니면서 자신의 믿음과는 반하는 방황하는 세월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입다가 장남이라고 쓴 것은 단지 저의 추정이며, 몇째 아들인지는 성경 기록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딸을 사랑하였고 집안에서는 바깥에서처럼 행동하지 않았나 봅니다. 입다의 딸이 한 말을 볼 때, 1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그 나이에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잘 교육된 순종하는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을 고려하여 자신의 운명을 주저하지 않고 바꾸겠다고 작정하었습니다. 39절을 읽으면서 저는 산에서 애곡하고 돌아온 딸과 함께 서원 의식을 행하는 입다의 모습을 그려 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애달프고 또 한편으로는 어쩌면 저렇게 딸을 훌륭하게 믿음으로 키웠을까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입다가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 중에 한 사람으로 등재된 것은,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승리하게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미움의 골이 패인 동생들에 대해서 자기가 길르앗의 머리가 된 후에도 아무런 복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처럼 자신만 믿음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외동딸까지 믿음의 선한 교육을 시켰다는 점에서 좋은 평판을 후세에서까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가 승리하고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입다의 딸이 나오게 하심으로써, 이전에 이방신들을 섬기다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간구하는 이스라엘을 돌아보셔서, 입다가 비천한 삶을 살다가 전쟁 승리로 일약 길르앗의 머리가 됨으로써 교만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사사로서 올바로 행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이런 일들이 생기도록 하셨을 것으로도 저는 생각합니다.     (또 뒷풀이 예고) 이 글을 읽으시고 전혀 감흥이 없으시거나, 아직도 딸이 번제 헌물로 불태워졌다고 믿으시기 때문에 마음이 열리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해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에 대한 문법적 설명을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선하신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생활을 해 나가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5-05-02 21:17:29 | 최상만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히 1: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은 정말 다양합니다. 처음에는 말(말씀)으로만 하셨습니다. (“……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네가 어디 있느냐?”) 환상으로도 꿈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는 입에서 입으로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천둥소리, 비, 우박,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와 고멜을 사용하여 시청각 교육을 통한 말씀으로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신 후에는 하늘로부터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더 놀라운 방식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기록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성경 기록은 또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해 주십니까? 율법서로, 역사서로, 잠언, 시가, 서신, 예언서로……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을 구사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다양한 방식 중 제가 착안하게 된 또 하나의 방식을 소개드립니다. 다만, 하나님을 선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믿으시는 분들은 동의하실 수 있으나, 하나님을 악하다고 믿으시는 분들은 결코 이해되지 않을 또 하나의 방식입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황진이의 시입니다.   이 시의 내용 자체로는 “숲이 우거진 아무도 없는 산 위에 높이 떠 온통 산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과, 그 아래 계곡을 따라 맑고 푸른 물이 거침없이 흘러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쉬임없이 흘러 가는 우리 인생은 다시금 되돌이켜 살 수 없음을 알고 여유를 내어 잠시 인생을 즐겨 보라.”는 뜻을 담은 시이며, 수학학에서는 “중의법”의 예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 시에서 벽계수는 계곡을 타고 흘러 내리는 맑고 푸른 물이지만, 이 시를 듣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또 명월은 밝은 달이지만 이 시(시조)를 지어서 들려주는 기생의 이름(기명)이기도 합니다. 한 단어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맑고 푸른 시냇물과 밝은 달로 시의 내용을 이어가는 것이지만, 속으로 정작 나타내고자 하는 말은 벽계수와 명월이란 사람 이름들입니다.   제가 보기로, 하나님께서도 이런 중의법을 사용했다고 생각되는 성경 기록이 있습니다. 사사기 11장입니다.   (11:30)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암몬 자손을 틀림없이 내 손에 넘겨주시면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 (11:34)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이로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딸이 없었더라. (11:35) 그가 그녀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네가 나를 심히 참담하게 하였으며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도다.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매 (11:36) 그녀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11:37)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11: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11:39)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위의 글을 읽어 보시면, 어디에 그런 것이 있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번역의 특성상 우리말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해당 구절들을 뽑아 보았습니다.   (11:36) And she said unto him, My father, if thou hast opened thy mouth unto the LORD, do to me according to that which hath proceeded out of thy mouth; ………………… 내게 행하소서 (11:37) And she said unto her father, Let this thing be done for me: ……………… 내게 행하시되 (11:39) And it came to pass at the end of two months, that she returned unto her father, who did with her according to his vow which he had vowed: and she knew no man. 그녀에게 행하니   우리말로는 모두 ‘내게’, ’내게’, ’그녀에게’로 번역된 말들이 영어로는 ’to me’, ’for me’, ’with me’로 각각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to’, ’for’, ’with’ 모두 ‘~에게’란 의미가 있으며, 우리말 번역처럼 ‘~에게’로 읽어서 자연스럽게 의미가 통합니다.   다만, 왜 동사가 동일한 ‘do’인데, 하나님께서는 세 개의 다른 전치사들을 사용하셨느냐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의법을 사용하셔서 숨은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 전치사의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to 전치사 1. (이동 방향을 나타내어) …로[에], …쪽으로 8. 어떤 행동의 영향을 받는 대상을 나타냄    What have you done to your hair? for 전치사 2. (…을 돕기) 위해    What can I do for you? 3. …에 대해    They are anxious for her safety. with 전치사 1. …와 함께 3. …로, …을 써서[이용하여]    Cut it with a knife. 6. …에 대해, …에(게)    With these students it's pronunciation that's the problem. 이들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발음이    문제이다.    위에서 보듯이 세 가지 다른 전치사가 모두 우리말로 ‘~에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for와 with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중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for는 ‘~을 위하여’, with는 ‘~와 함께’라는 뜻도 가지고 있죠.  
2015-05-02 21:15:25 | 최상만
네~ 그렇습니다. 3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 4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나니 5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느니라.(딤전4:3~5) 디모데전서 4장에 하나님의 창조물로 만들어진 음식 중에 감사함으로 받아서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피를 유독 특별하게 생각하시는데 여러 나라에서 피 또한 하나의 음식이 된 지 오래입니다. 우리도 선지와 순대 등을 먹습니다. 다음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 영상을 시청해 보세요. *기독교의 권리장전 (행 15:1~31)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330 설교 영상이 시작되고 33분 정도 지난 후에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참조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5-05-02 20:55:02 | 김대용
답변 갑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음식에 관하여는 이견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따르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피는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피에 대한 것도 음식과 똑같이 적용해도 될까요?
2015-05-02 19:08:34 | 송성규
송성규 형제님 안녕하세요^^ 문의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신약 시대 음식에 관한 바른 기준은 무엇입니까?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om&write_id=4592 지혜가 부족한 사람의 답변이나마 도움을 얻으시기 원하며 진리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5-02 18:59:50 | 김대용
안녕하세요 성경공부를 하다가 의문이 생겨서 물어보려고 합니다. 창(9:7), 레(7:26-27) 등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피든지 먹는 것이 죄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은혜 아래있고 이런 명령은 율법아래있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 입니다. 그런데 행(15:28-29) 에 보면 우상에게 바친 음식, 피와 목매어 죽인것 등을 금하고 있는데 비록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않지만, 아직 까지도 피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규제를 받고 있다는 말이 맞는 것일까요? 답변을 하실 수 있는 성도님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5-05-02 18:15:10 | 송성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마태복음 5장 10에 보면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란 말씀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음으로 인하여 또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성경에서는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용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제가 이전에 장로교회에 어떤 여 집사님을 알고 있는데 그는 자주 교회에 와서 자신이 가족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고 있는 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고 울면서 기도를 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한번은 눈 덩이가 시커멓게 멍이 들어가지고 교회에 와서 남편에게 맞았다면서 기도 부탁을 하면서 우는 것을 보았다. 그 여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집사님의 가정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인데 봄에 모를 심는 시기라서 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바쁘게 보내는 때였었다. 그런데 그 시골 장로교회에서 하필이면 그 바쁜 모심는 계절에 일주일 동안 부흥집회를 하고 있는데 그 여 집사님이 가족들이 모를 심는데도 함께 도와주지 않고 밥도 제대로 안 해주고 교회당에만 가서 있으니 남편이 하도 화가 나서 참다못해 아내를 나무람 했는데 아내는 자신의 잘 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남편에게 대들다가 그날 맞은 것이다. 내가 그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맞을 짓을 했고 오히려 하나님이 남편을 통해 그를 징계를 한다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여 집사님은 자신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잘 못을 인정하고 회개를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나는 요 며칠 전 우연히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에서 [구원파]라고 하는 (기쁜소식선교회)라고 하는 곳의 박옥수 목사가 주식 사기를 쳐서 252억원을 챙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제2 심판이 5월 달에 열린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면서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더욱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것은 그 교회에 교인들이 우리 목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있다면서 기도모임을 하고 금식을 하고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박옥수 목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금식하면서 회개를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물론 나는 박옥수 목사가 정말 주식 사기를 쳐서 그 많은 돈을 챙겨 먹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그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박옥수 목사가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바른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옳은데 지금 박옥수 목사의 죄명은 주식 사기요 252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챙긴 혐의이다. 그것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신고를 한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교파의 사람들이 신고를 한 것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집사로 일하던 사람들이 또한 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 신고를 해서 법적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라는 사람이 얼마나 돈에 대해서 명확한 선이 없었으면 돈을 뜯어먹고 사기를 쳤다는 그런 일로 법정 나들이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한탄하고 통탄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 하고 목회를 할 자격이 없는 목회를 그만 두고 교인들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성경에 어떤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식 사기를 치먹고 돈을 뜯어 먹어서 법정 놀음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사도 바울이 그랬는가? 사도 베드로가 그랬는가? 아니면 디모데가 그랬는가? ........ 있다면 헌금 통에 있는 돈을 몰래 훔쳐 먹는 가룟 유다밖에 없다.   그런데 박옥수 목사는 자신이 죄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교회에 많은 교인들은 우리 목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성경에 대하여 무식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린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써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과 이익을 꺾어 버리고 순종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회개하라.
2015-05-02 17:39:19 | 시님사람
성경에 단 한번도 기록되지 않은 단어 recreate를 얄팍한 사람의 지식으로 비틀고 꼬아서 억지로 꿰어 맞춥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거론되지 않은 단어 Recreate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엔 그것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참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6일 창조 이전 곧 아담 이전에 대해 계시하신 내용이 극히 제한적이므로 사람의 영역과 관련된 창조말고 하나님 영역의 다른 창조(천사 등)는 결코 논쟁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없는 내용을 가지고 지체들을 분열시키며 혼란스럽게 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정상적인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상만 형제님의 간곡한 부탁의 말씀에 공감을 하며 바쁘신 가운데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5-05-01 09:38:53 | 김영익
    (내용 추가 2015년 5월 1일)   재창조론에서 주장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막 10:6의 ‘창조의 시작부터’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은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시작부터(from the beginning)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6). 창세기 1:1절부터가 아니라 창세기 1:27절에서 사람을 만드신 날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스스로 이 구절이 하늘과 땅의 창조가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그 대상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 ……………………….. 수정. 2015년 4월20일(내용 보충) 쉽고 단순한 진리!   그러나, 제 글에서 기술한 바처럼 이 주장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땅의 흙으로 아담만 지으셨지 처음부터 아담과 이브를 흙으로 만들어 두시고 남자와 여자로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쉽고도 단순하고 바른 진리입니다.      이처럼 명백한 오류를 인터넷 웹사이트 첫 페이지의 상단에 커다랗게 올려서 광고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추가 글을 게재하는 것을 염려하시는 성도님들도 계실 것입니다만, 더 이상 비진리가 판치고 진리를 혼탁하게 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추가 글을 게재합니다.   목회자도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닌 작은 한 사람인 제가 부탁드립니다. 비록 목회자라 할지라도 정확하게 성경 말씀을 해석하여 바르게 성도들을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며, 진리의 말씀을 수호하는 일에는 목회자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협력하고, 또 누구든지 진리의 목소리가 들리면 자신을 돌아보고 겸허히 그것을 수용하여 하루속히 시정조치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진리를 쉽고 단순한 진리로 포장하는 것은 그냥 보고만 있기가 대단히 민망스럽습니다. 제 글이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찌 되었든 사람은 모두 많든 적든 실수가 있고, 일시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는 고치고 나면 되고, 그때부터는 모두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모자라는 한 사람의 진심에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2015-05-01 04:07:48 | 최상만
the1 검색결과  (정관사) 1. (1) (이미 나온 명사를 다시 언급할 때) 그, 저 I saw a dog. The dog had a piece of meat in his mouth. (2) (이미 나온 사람·사물에 관련된 것, 또는 그 부분을 언급할 때) 그 There was a large tree there. The leaves were also large. 거기에는 큰 나무가 있었다. 그 잎도 역시 컸다. (3) (이미 나온 것이 아닐지라도 그 장소의 상황·일상 생활에서 지시 대상이 이야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알 수 있는 명사에 붙여서) (※「그」 등으로 해석하면 부적당한 경우가 많음) I've just been to the post office. 우체국에 갔다가 오는 참이다 (4) (한정어구를 수반하는 명사에 붙여서) the book you gave me 당신으로부터 받은 책 2. (1) (고유 명사나 그에 준하는 것에 붙여서) the Atlantic대서양   ‘the’는 학교에서 영어 배울 때 거의 처음에 알게 되는 단어이니까 다들 알고 계실 텐데, 어쨌든 문제를 풀자니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사전의 정의를 보면, 재창조론 입장에서 쓴 위의 초록색 문장에서 ‘the creation’의 ‘the’는 (1) (이미 나온 명사를 다시 언급할 때) 사용하는 ‘그’란 뜻입니다.   But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즉, 사람들)의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창조론 입장에서는 부사구가 앞에 있는 그대로 파란색 문장인데, 그 때의 ‘the’의 뜻은 사전의 의미 중 (3) (이미 나온 것이 아닐지라도 그 장소의 상황•일상 생활에서 지시 대상이 이야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알 수 있는 명사에 붙여서) (※「그」 등으로 해석하면 부적당한 경우가 많음) 사용하는 ‘the’로서 ‘그’를 붙이면 부적당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이 문장에서는 ‘the’가 사전의 의미 (1) (이미 나온 명사를 다시 언급할 때) 사용하는 ‘그’란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창조하실 때의 남자와 여자가 위의 예수님 말씀에서 ‘이미 나온 명사로서 다시 언급하는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나온 게 아니라 뒤에 나오죠.   그러니까, 부사구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가 뒤로 가면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로 되면서 위치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the’의 사전적 의미가 다른 것이 적용되게 되는군요.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신 성경 기록이 문장의 일부가 기록된 순서를 바꾸면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앞에 기록된 단어들을 뒤로 돌리는 것은 성경 변개가 되겠네요. 뜻을 변경시키게 되니까요.   그러면, 뒤로 돌리지 말고 앞에 있는 그대로가 옳은 것이죠. 변개되지 않은 그대로가 말입니다. 원래의 위치대로 둔 상태에서의 뜻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가 아니라 그냥 창조입니다. 사전의 의미 (3)을 보면 이 경우 ‘그’라고 해석하면 부적당한 경우가 많답니다. 우리말의 ‘그’도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 있어야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니까 앞에 언급하지 않은 창조를 ‘그’라고 붙여서 해석하면 안 되겠죠. 흠정역 성경에서는 ‘그’를 붙이지 않고 잘 번역하였네요. (창조의 시작부터)라고요.   여기서 일단, '창조의 시작부터'라고 번역된 것은 올바른 번역이다. 사람 창조의 시작부터라고 하는 것은 성경 변개에 해당된다.'는 결론을 내겠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시작부터라고 말씀하시려고 했다면 과연 어떻게 영작문을 하셨을까요?   저는 이렇게 하셨을 것 같습니다.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man(또는 me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또는 But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rom the beginning of their creation.   이렇게 표현된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영어이겠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사구를 뒤로 배치하지도 않으셨고, creation 뒤에 ‘man(또는 men)’을 쓰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고 이의를 달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기록된 대로 ‘창조의 시작부터’입니다. 부사구를 뒤로 옮긴다든지 없는 수식어를 마음 속으로 creation 뒤에 붙여서 읽는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2015-04-30 20:54:52 | 최상만
  이제 [문제]로 돌아 갑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문제] 위의 창조의 시작부터가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아십니까? 다음 셋 중에서 하나 고르시요.   (1)   6일 창조의 시작부터 (2)   사람 창조의 시작부터 (3)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부터   [틀린 답]  (2)번   그러면, 정답은 (1), (3) 중에 있습니다. 재창조론의 답은 틀렸네요.   (1)   6일 창조의 시작부터가 답일까요?   일단 그렇다고 치고, 검토해 봅시다.   6일 창조의 시작은 언제죠? - 첫째 날이요.   아담과 이브는 몇째 날에 창조되었다고요? - 여섯째 날이요.   그러면 (1)번은? - 틀렸어요.   네, (1)번도 정답이 아니네요.   그럼 정답은? - (3)번이요.   네. 학생들이 (3)번이 정답이랍니다. 왜 (3)번이 정답인지는 홍승대 형제의 게시판 글 698번 (창조의 시작부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계 3:14)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And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of the Laodiceans write; These things saith the Amen, the faithful and true witness,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of God;   바리새인들이 이혼해도 되는지 질문한 것이 대해, 막 10:6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은,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구별해서 만드셨기 때문에 이혼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기 때문에 이혼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암수로 구별해서 지으셨지만 사람처럼 짝지어 주신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들끼리 짝짓는 것이라는 뜻도 알게 되고요. 아담과 이브만 그렇게 짝지어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잠이 깨어 자기 눈으로 보고 맘에 들어서 OK 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고, 또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남자에게 여자를 짝으로 데려다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행하신 짝지어주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남편된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데려다 주신 여자, 자기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면서 백년해로할진저!     [뒷풀이]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But from the beginni (1)hngt e creation (2) m(5)  th(3)m male (4) female.   딤후 3:16에 의해 요소별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창조의 시작부터: 부사구(시간적 언급) (2) [하나님]께서는: 주어 (3) 그들을: 목적어 (사람들) (4) 남성과 여성으로: 목적보어 (5) 만드셨으니: 동사   재창조론자들의 주장: 강조를 하기 위해 부사구 “(1) 창조의 시작부터”가 문두에 있지만, 마지막으로 보내서 비강조 문장으로 고쳐 써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But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But (2) m(5)  th(3)m male (4) female. from the beginni (1)hngt e creation 해석: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즉, 사람들)의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재창조론자들이 고쳐 쓴 성경 기록에서 ‘the’를 주목합니다.   But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먼저 영어 단어 ‘the’를 사전에서 찾아 보겠습니다.  
2015-04-30 20:50:59 | 최상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