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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완 목사님, 안녕하세요? 여기서 송창식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토함산'은 어법에 관한 설명으로 적절한 예라고 생각합니다.ㅎㅎ 경주도 석굴암이 있는 도시인데 하필 왜 거기 이야기를 쓰느냐, 이럴 필요는 없겠지요.^^ 말씀하신 목사님의 좋은 시는 언제 한번 직접 소개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4-26 00:40:01 | 김재욱
재미있네요.^^ 좋은 분석과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저런 걸 말하는 분들도 매우 똑똑합니다. 이런 국어의 어법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 워낙 근거 구절이 없기 때문에............. 직접 성경을 만들어도 저 도표의 오른쪽에 있는 식으로 번역하진 않겠죠. 과거형이 다 표현되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도 창조를 오래 전 과거의 일로 이해하진 않는데 왜 우리말 흠정역을 문제 삼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흠정역 때문에 진리가 가려진 것처럼 주장하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흠정역이 널리 퍼진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4-26 00:35:59 | 김재욱
영어성경을 우리 나라말로 번역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흠정역이 엄청난 수고의 결과가 그대로 반영됩니다. 흠정역의 좋은 부분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쎄시봉 팀중에 한 장로님이 열심히 전도해도 믿지 않고 있는 송창식 씨의 노래 가사로 흠정역의 번역이 좋다고 설명한다는 것이 오히려 흠정역을 안좋게 만드는것 같네요. 차라리 신실하게 믿고 있는 시인이나 가수의 노래가사로 적용하심이 더 좋았을듯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이 있습니다. 별세 하셨지만 월간 현대시조(새시대시조)에 오랫동안 편집장으로 수고하셨고 많은 수상까지 하신분입니다. 고 선정주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의 시는 주로 고난에 대한 시인데 시적 표현이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장로교 목사이었고, 개역성경을 보신분입니다. 과거 제가 흠정역 성경도 알려드렸었습니다.) 참고하시면 우리 나라말의 의미를 더 이해하기가 쉬울것 같아서 글을 남깁니다.
2015-04-26 00:07:39 | 김경완
우리말이 어떻게 영어와 틀린지를 잘 설명해 주셨네요. 기계적 시제의 일치는 우리말 특성상 문장구성이 잘 안된다는 것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번역이 얼마나 어려운지 약간이나마 느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에 맞추어 완전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습니다.
2015-04-25 23:21:33 | 홍승대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멋지지 않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라는 표현은 과거의 어떤 한 때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위와 같이 ‘하시니라’로 표현하면 시간의 경계를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저는 ‘하시니라’가 ‘하셨느니라’보다 훨씬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들에서 사용된 과거형 시제로도 충분히 확인이 됩니다. 저는 이와 같이 현재형과 과거형을 교차 사용한 훌륭한 문체가 “흠정역 성경 문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위의 기행문 (2) 다음에 인용한 송창식의 노래 ‘토함산’의 가사에서도 “해를 안고 앉았어라”,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라고 특유의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송창식 특유의 문체로 토함산 가요의 맛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1) 흠정역 번역 (2) 과거형 준수 번역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2) 땅은 형태가 없었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느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빛이 있으라, 하셨으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셨더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셨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셨으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었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셨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셨고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셨으니 그대로 되었느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었더라.   자, (2) 번처럼 고쳐 놓고 읽어 보니까 어떠십니까? (1) 번처럼 번역한 것을 읽으시고 시제가 과거로 생각이 안 되어서 불편하십니까? 앞서 마태복음 3장과 똑 같은 원리로 실제로는 과거이지만 현재형을 사용하여 창조의 장엄함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1) 번 번역이 더 자연스럽고 수준 높은 번역이 아닙니까? 마태복음과 같은 신약 성경 기록이나 다른 구약 성경 기록에서 이처럼 시제를 섞어 쓴 것을 가지고는 문제삼지 않고 유독 창세기 1장 첫 부분에서 시제를 문제삼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과거 사실을 기술하거나 번역할 때, 과거 사실인 것이 자명한 문맥에서 모든 동사들을 과거형으로 고집함으로써 글의 질을 저하시키고 읽음성을 훼손시키기 보다는 필요한 경우에는 현재형 동사를 쓰더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고 봅니다. 과거형 동사로 충실하게 번역하면 마치 배우는 학생이 작문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준 높은 글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러한 성경 기록을 학생 수준의 번역으로 읽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학생 수준의 번역 성경을 그래도 원하신다면 별도로 그렇게 번역하셔서 원하시는 분들은 그것을 보셔야겠지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신세계역 성경을 만들고, 가톨릭이 가톨릭 성경을 만들듯이 교리가 달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번역이라고 한다면 말릴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교리에 맞는 성경으로 번역하는 수밖에요.   그러나, 성경 번역에 임하는 사람이 명확한 교리적 주관이 없이 단지 영어 실력과 한국어 실력만 있으면 성경 번역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의 딸이 자신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처녀로 죽음을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면 ‘오역’ 또는 ‘흐지부지역’이 될 수 밖에 없는 사태가 생기니까요. 따라서, 교리가 달라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하고 공연한 번역 시비를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번역이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는 최상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무랄 데 별로 없이 아주 잘 된 번역이며,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이 지금으로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보다 더 잘 가꾸고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도 주셨다는 생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흠정역 성경을 받아 들이고 아끼게 되기를 바라고, 아울러 한국 교회에서도 기존의 개역(개정) 성경을 버리고 흠정역 성경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면 합니다.   바른 성경 불모지에서 수십 년 동안 바른 말씀이 없어 목말라 하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제대로 된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2015-04-25 23:06:30 | 최상만
성경의 문체   (1) 천년의 한이 서린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다 (경주 고적 답사기)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짬을 내어 경주를 찾았다. 가는 차편에 무르익은 산야도 구경할 겸 부산 해운대역에서 동해남부선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출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타는 사람들이 있는지 기차가 가지를 않는다. 나처럼 관광하러 나선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서민들이 여기 저기 몸에 지고 이고 타서는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철커덕, 철커덕, 쿵, 쿵, 철커덕 , 철커덕, 쿵, 쿵 어릴 적 수학여행 갈 때 탔던 완행열차 기억이 난다. ………………………………….. ………………………   (2) 드디어 토함산 정상에 오르다   버스가 석굴암까지만 운행하고 토함산 정상까지는 도보로 가야 한다고 해서 석굴암을 둘러본 뒤 짐을 가볍게 하려고 이것 저것 요긴하지 않은 무거운 것들은 배낭에서 꺼내어 버렸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돋아난다. 앞서 가던 사람들 중에서도 연세가 드신 분들은 길 옆에 자리를 펴고 쉬고 있는 분들도 있다. 나는 그래도 아직 초로에 접어들기 시작한 나이라 내친 김에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쉬지 않고 계속 걸어 올라갔다. 이제 막 피로가 쌓여 지치나 보다 하는데 눈 앞에 토함산 산봉우리가 보인다. 여기서 쉴 수가 없어 마지막 힘을 내어 힘들게 정상까지 올라가니, 오! 눈 앞에 탁 트인 하늘과 그 하늘 아래 저 멀리까지 울창한 숲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수려한 그림이 따로 없다.   토함산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가슴속에 품었어라 세월도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 터져 부서질 듯 미소짓는 님의 얼굴에는 천년의 풍파세월 담겼어라 바람속에 실렸어라 흙이 되어 남았어라님들의 하신 양 가슴속에 사무쳐서 좋았어라 아 아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흘려 올라라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받쳐라산산이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힘차게 뻗었어라 하늘향해 뻗었어라팔을 든 채 이대로 또다시 천년을 더하겠어라세월이 흐른뒤 다시 찾는 님 하나 있어천년 더한 이가슴을 잊고 서게 아 아   (3) 해외 조기 교육 일화   우리 집이 호주로 이민 온 것은 큰 딸이 5학년 때였습니다. 아이들 영어 습득을 생각해서는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좋았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큰 딸이 철이 일찍 들어서인지 부모들 말을 잘 따라서 학교 다녀 와서도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고, 정확한 발음이 잘 안 되는 단어는 혼자서 짬나는 대로 몇백 번씩 중얼거리며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큰 딸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교 수업도 잘 따라가고 공부도 곧잘 하게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제 웬만큼 원어민 발음 가까이 영어를 하게 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오후에 바깥에 나가서 있던 딸아이가 자기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는 바깥에서 엄마랑 저녁 식사를 하자고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메뉴니 시간이니 장소니 이야기를 하고서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해서는, “엄마, 오실 때 아빠 가지고 와요.” 합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지 그만 깔깔깔깔 웃습니다. 저는 휴대폰 소리가 커서 다 들렸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아내가 멋적은 듯이 “얘가 영어가 웬만큼 되니까 한국말을 잊어먹나 봐요.” 합니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이 “혀가 꼬인다”고들 하죠. 두 가지 언어의 개념이 섞이는 때가 있는가 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Come together with Dad.”라고 할 건데, ‘with’ 다음에 사물이 나오면 ‘가지고’라고, 사람이 나오면 ‘함께’라든지 ‘데리고’라고 해야 하는 걸 혼동해서 말이 헛나왔나 봐요. 다행히, 그런 고비를 지나고서 지금은 우리말도 영어도 막힘없이 잘 하고 있습니다.     위의 세 편의 짧은 이야기 중 두 편은 기행문 형식이고, 마지막 한 편은 수필 형식입니다.   기행문 형식의 두 글은 제목을 “~하다” 형식으로 적었는데, 글의 제목으로 흔히들 이렇게 동사 원형을 쓰죠.   글의 내용을 보면, 모두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기술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중간 중간에 현재형 표현이 섞여서 나옵니다. (1) 기차가 가지를 않는다,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완행열차 기억이 난다 – 처음에는 과거형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아예 현재형으로 가버렸습니다. (2)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돋아난다, 쉬고 있는 분들도 있다, 눈 앞에 토함산 산봉우리가 보인다, 울창한 숲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수려한 그림이 따로 없다 – 과거형으로 했다가 현재형, 또 과거형으로 갔다가 현재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글들을 읽으실 때 부자연스럽다거나, 문법(시제)이 틀렸네 하면서 읽으신 분 있으십니까?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제를 일치시켜야 올바른 글이라고 한다면 모르겠으나, 초등학생들이 글을 배우는 단계가 아니라면 글의 성격에 따라, 또 글의 전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과거의 사실 속에 현재형 시제를 섞어서 쓸 수가 있으며, 이것이 오히려 글의 재미나 몰입도를 높여 줍니다. 그래서, 어법상으로 이런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수사 기법 또는 표현 기법이라고합니다. 과거의 사실을 마치 현재 사실처럼 묘사 또는 표현함으로써 그 글을 읽는 독자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고, 독자로 하여금 글 속에 몰입하게 하는 기법이지요. “기행문을 쓸 때는 현재형으로 써라.” 작문 교사의 작문 지침입니다.   마지막 글은 기행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과거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느라 글을 쓰다보니 저도 모르게 현재형으로 써진 부분이 있습니다.   [“엄마, 오실 때 아빠 가지고 와요.” 합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지 그만 깔깔깔깔 웃습니다, “~ 한국말을 잊어먹나 봐요.” 합니다]처럼 저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글이 써지고, 읽으시는 분들도 했습니다, 웃었습니다, 했습니다로 쓴 것보다 더 현장감있게 읽게 됩니다. 마치 옆에 함께 있어서 보는 것처럼요.   이렇게 과거 사실인데 현재형으로 썼다고 해서 그 글을 읽는 독자가 현재 사실인가 보다 하고 읽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집에서 TV로 영화를 볼 때, 큰 것일수록 더 실감나게 보며, 비싼 돈을 내고 영화관에 가서 대형 TV를 보면서 웅장한 사운드를 들으려고 하는 이유도 모두 현장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눈 앞에서 펼쳐지는 영화 화면의 스토리를 현재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록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생생하게 눈 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현실처럼 느낄 지언정, 그 장면들이 과거에 영화 촬영장에서 찍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이치를 모르고 “과거 사실을 현재 사실로 기술했으니 잘못한 거다 고쳐라” 이러면 정말 갑갑한 노릇이죠.   이러한 원리로 성경 번역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고어체를 사용하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보다 생생한 현장감과 경우에 따라서는 장엄함을 전달하려고 수사 기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래 성경 말씀 마 3:13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은 과거 사실이지만 시제를 과거로 해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셨거늘”로 하면 잘못된 우리말 표현입니다. 14절도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가 올바른 우리말이지 “요한이 그분을 말렸으며 일렀으되,”로 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살펴 보겠습니다.   (1) 흠정역 번역 (2) 과거형 준수 번역   (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 (14)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매 (15)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시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더라. (16)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17)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셨거늘 (14) 요한이 그분을 말렸으며 일렀으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였으매 (1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어 그에게 이르셨으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셨으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였더라. (16)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셨을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왔었어 자기 위에 내려앉았는 것을 그분께서 보셨더라. (17)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었어 이르셨으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위의 두 가지 번역을 각각 차분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럽고 보다 실감나는 번역입니까? 제가 읽어 보니 (2) 번 번역은 너무 부자연스럽고 지나간 과거 이야기가 되어서 현실감도 안 나고 우리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1) 번 번역을 읽으시면서 그 내용이 현재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셨습니까 아니면 과거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셨습니까? 현재 사실이라고 생각하신 분은 아무도 안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를 교차 사용(시제 교체 기법)하고 있기 때문이죠. 문장은 원활하게 하면서도 뜻은 손상을 주지 않는 뛰어난 표현 기법입니다.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양치는 하지 않고 대신 가글만 하고 세수는 간단하게 하고서는 버터 바른 빵 한 조각만 먹고 전철 타지 않고 택시 타고 사무실로 갔습니다.   영어로 바꾸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  Because I got up late this morning, I did not brush my teeth, but just gargled with water instead of it and washed my face quickly, and ate only a piece of bread and butter, and went to my office not by subway but by taxi.   이 영어를 다시 시제를 정확히 살려 우리말로 직역 형식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  나는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양치를 안 했고 그 대신 물로 가글만 했고 빨리 세수했고 버터빵 한 조각만 먹었고 전철을 탔지 않고 택시 탔고서 사무실에 갔다.   번역도 잘 되지 않네요. 아무튼 영어가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 과거로 바꾸어 번역하면 우스꽝스런 우리말이 됩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우리말의 특성을 살려서 시제를 융통성있게 사용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방금 든 예는 하나의 문장에서는 마지막 말만 시제를 살려 주고 이전의 동사나 형용사는 현재형으로 사용해야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시제를 언급하는 말이 한 마디만 있어도 그 문장 안에 사용된 말들이 그것과 동일한 시제이라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문장에서 이런 식으로 시제를 언급하듯이, 한 문단이나 일정한 범위의 글 안에서도 시제를 파악할 수 있는 언급이 있으면 독자는 그것으로 다른 말들의 시제도 손쉽게 파악하고 글을 이해하기 때문에 영어처럼 낱낱이 시제를 맞추어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은 우리말의 ‘시제 생략 기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말 사전에서 ‘공부했다’라는 단어를 표제어에서 찾으면 그런 말이 나올까요? 안 나옵니다. 대신 ‘공부하다’만 나옵니다. 영어 사전에서도’studied’를 표제어로 찾으면 안 나옵니다. 대신 ‘study’만 나옵니다. 이른 바 ‘동사 원형’만 나오지 현재형이나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표제어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동사 원형으로 말을 하면 잘못된 표현이 됩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나는 어제 열아홉 시간 공부하다.”라고 하면 그 친구가 이상하다고 볼 것입니다. 일상 언어에서는 동사 원형에 시제를 나타내는 어미를 붙여서 쓰지요. 과거 시제로는 “나는 어제 열아홉 시간 공부하였다.”처럼 쓰고, 현재 시제로는 “나는 지금 밥을 먹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지금 밥을 먹는다.”라고 씁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에는 동사 원형을 쓰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밥을 먹다 말다 하니?”처럼 쓸 때도 있고, 이 글의 첫 번째 기행문 (1)의 제목처럼 “천년의 한이 서린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다”라고 쓸 때도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을 “~ 경주를 찾다”라고 동사 원형을 썼다고 해서, 미래형인가 아니면 현재형인가 하면서 고민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당연히 과거를 이렇게 멋스럽게 혹은 뭔가 그럴듯하게 썼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다.”가 현대 문학 작품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가 고어체를 채택한 동일한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의 문체 계속되는 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4026 
2015-04-25 23:01:25 | 최상만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하나니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행하느니라. 사 45:7 I form the light, and create darkness: I make peace, and create evil: I the LORD do all these things. 약 1:13 아무도 자기가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 1:13 Let no man say when he is tempted, I am tempted of God: for God cannot be tempted with evil, neither tempteth he any man: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And we know that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to them that love God, to them who are th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선하신 하나님께서 create evil 하신분이네요 그런데 with evil 하지 않으시네요 그러하신 분께서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하신다고 하십니다. 글을 읽고 성경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를들면 빵5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5천명을 먹게하고 12 바구니나 남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논리적인 부분도 있겠지요
2015-04-25 20:32:13 | 김경완
성경이 들려주는 기원의 연대 : 한국창조과학회가 젊은 지구 연대를 주장하는 성경적 이유 김홍석한국창조과학회 교육목사 군선교 및 성경위원회 위원장 구약학 박사 I. 서론      한국창조과학회는 공식적으로 우주와 지구의 연대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긴 연대가 아니라 매우 짧은 연대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 짧은 연대가 과학적으로 몇 년인지는 현재의 과학수준에서는 알 수 없다. 빅뱅이 아닌, 하나님의 초월적 창조에 의해 우주가 탄생한 후 우주의 연대가 얼마나 지났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국창조과학회회는 우주의 연대 자체에 대하여 과학적으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지만, 빅뱅에 의한 우주탄생은 과학적 허구가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매우 젊다는 주장에 대하여, 100억 광년 크기의 우주를 보고 있는 지금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빅뱅에 의해 100억 광년 크기의 우주가 되었다는 주장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며,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여러 가정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관찰되는 우주는 빅뱅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질서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은하도 이미 성숙한 완벽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우주의 빅뱅이론도 계속 변해서 최근에는 가속 팽창하는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모르는 물질(dark matter)과 모르는 에너지(dark energy)로 96%를 설명해야 한다.      우주에 대한 연구가 증대되면서 우주는 기존의 우주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 등이 발견되고 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관찰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우주가 팽창한다고 해서 과거 한 번의 대폭발로 시간, 공간, 물질, 생명, 질서가 나왔다는 주장은 참으로 수긍이 가지 않는 단지 가설에 불가하다. 우주는 신비하다. 우주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아직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신비 앞에서 다만 하나님의 창조의 놀라우신 능력과 지혜를 만나게 될 뿐이다.      사실, 젊은 연대를 주장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다. 그리고 과학적인 발견들 가운데서도 젊은 연대를 지지하는 많은 연구결과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연대를 지지하는 과학적인 연구결과들 역시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가정(assumptions)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 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지구와 우주의 기원연대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들은 실제 나이를 알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세계의 시작상태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적 연구는 이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동일과정설에 입각한 가정들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과학적 연구결과들은 가정 하에 겉보기 나이(apparent age)를 측정해낼 수 있는데 이는 사용하는 시계와 가정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여 수십억 년~수천 년까지 매우 다양한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 세계의 시작은 자연과학연구가 설정하는 가정들과는 매우 다르다. 창1:14-19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광명체(마오르, lights)들을 ‘하늘’에 두셨다고 하시지 않고 ‘하늘의 궁창’에 두셨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늘’보다 더 구체적인 공간적 위치를 알려주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심을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궁창’은 땅과 인접하고 있는 공간으로서 공기가 있어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대기권에 해당하는 특별한 공간이며(창1:7,8,), 이는 하늘에 속해 있으면서 땅과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땅위 하늘의 궁창’(창1:20)이라고 부르는 공간이다.      창1:14-19에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으며,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를 의미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창조된 천체의 빛들이 모두 하늘의 궁창에 위치하여, 창조된 넷째 날 그 즉시로 그 빛들은 땅을 비추었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의 시간해석 차원에서 보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별빛이라 하더라도 그 빛은 창조된 그 날 즉시 땅을 비추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만약 실제로 수억 광년 멀리 떨어져서 창조된 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별로부터 나오는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억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계, 우주의 천체들이 존재하기 시작한 처음부터 그 빛은 지구의 땅을 비추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수억 광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별빛이 관찰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수억 년 전부터 그 별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아담에게 태아기, 유아기, 소년기가 없이 청년 또는 성년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태양계와 우주의 모든 천체들도 성숙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갑자기 생겨나서 완벽하게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시작은 과학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 창세기 1장의 내용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창조신학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초과학적으로 시작된 세계의 기원에 대한 연대는 과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측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      또한 연대측정을 위하여 다양한 시계(방사성동위원소,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등)를 사용하는데, 시간측정을 위해서는 이 시계들이 일정한 속도로 가야한다. 그런데 이 시계들이 일정하게 가기 위해서는 대기 중의 방사성탄소의 비율 등 대기의 조성 비율이나 온도, 지구자기장의 세기 등의 변인들이 안정된 상태로 지속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잘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지층과 화석 그리고 지구자기장의 세기에 대한 관찰들에 의하면 과거 지구의 환경조건들이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는 수많은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자연과학이라는 도구는 지구와 우주의 실제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으며, 다만 일정한 가정 하에 값을 구하는 것이며, 그것이 과학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실제 세계(real world)는 그러한 가정들과는 달리 선악과사건, 노아홍수, 바벨탑사건을 거치면서 환경은 범지구적인 범위를 넘어 우주적으로 격변이 있어왔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지구와 우주의 실제나이에 대하여는 하나님만 알고 계시며 자연과학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동일한 성경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다양한 주석, 해석, 주장들을 할 수 있으며, 특히 성경에 기록된 시간에 대하여는 다양한 주석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성경연대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까? 성경은 기원의 연대를 충분히 구체적으로 알려주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기록에 의한 기원의 연대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오직 성경을 통해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II. 성경은 기원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려고 의도하고 있을까? 2.1.성경기록상의 시간의 연속성      창세기 시작 절(창 1:1)에도, 창세기의 마지막 절(창 50:26)에도 공히 시간이 기록되어있다. 특히, 창세기 1장은 시간기록으로 편만해 있다. 첫 단어는 ”태초에”(베레쉬트)라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 단어는 동시에 성경의 첫 단어이기도 하며, 창세기의 히브리어 제목이기도 하다.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1장에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태초’, ‘낮’, ‘밤’, ‘저녁’, ‘아침’, ‘첫째 날’(또는 하루), ‘둘째 날’, ‘셋째 날’, ‘사계절’, ‘1년’,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이라는 ‘시간 단위’들로 구성된 자세한 시간의 얼개 위에 순서대로 기록한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기록자는 극소수의 특정한 사람들과 관련하여서만 시간을 명시한다. 예를 들면, 아담이 130세에 셋을 낳았다고 기록한다(창 5:3). 하지만 셋을 낳은 후 800년 동안이나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하면서도 셋 이후에 태어난 수많은 자녀들에 대하여는 단 한 사람도 이름이나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창 5:4). 셋도 105세에 에노스를 낳은 후에 807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하지만 에노스 이외에는 이름이나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창 5: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는 한 세대에 한 사람씩을 선택하여 해당 아들의 이름과 그를 낳은 나이를 통해 시간들을 빠짐없이 연속적으로 기록함으로써 ‘태초’로부터(창 1:1) 요셉이 죽은 시간까지(창 50:26) 이어지도록 기록한다. 그렇다면 기록자는 시간 기록을 통하여 그 사건이 발생했던 시간을 후대의 독자들 즉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의도했던 것일까? 웬함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역사적인 문제들에 빠지게 된다. 많은 고대인들은 태고에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장수했다고 생각했다. 창세기 5장은 그러한 개념들을 반영하며, 인류 역사가 아주 먼 과거 속으로 소급하고 있음을 반영한다.”라고 한다.  영(E. J. Young)은 ”땅의 연대는 얼마나 될까? 인간의 연대는 얼마나 될까? 오늘날 거의 보편적으로 가르쳐지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연대는 수백만 년이고 땅의 연대도 수백만 년이다. 성경은 솔직히 인간의 태고성의 주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연대를 제공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창세기 기록자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일어났던 순서만을 알려주려고 의도했던 것일까? 하지만 성경은 단순히 순서만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지나치게 자세하게 시간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 누군가가 사건을 말할 때 시간을 말하는 것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다. 만약 단지 족보만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만 있었다면 창세기 10장이나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 같이 이름만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 계보, 셈 계보에는 특별하게도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아들을 낳은 나이를 통해 자세하고 정확한 시간을 기록하며, 이삭과 야곱의 출생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시간을 기록한다. 그리고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시간과 애굽에 체류한 시간,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시간을 출애굽기를 거쳐 열왕기의 솔로몬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시간을 전한다. 이러한 실제로부터 성경은 창1:1의 ‘태초’로부터 끊임없이 연속적인 시간을 전하고자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2.2.연대에 관련된 기록들에 위치한 문학적 장치들 2.2.1. 창세기 1장 1절과 5절 사이의 시간      첫째, 본문의 내부적 관계를 살펴보면, 히브리성서 맛소라 텍스트 최종편집자가 보여주는 본문의 구조에서 분명하고 질서정연한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성서 맛소라 텍스트(BHS)에 따르면, ”~째 날이니라” 뒤에는 항상 문단나누기 표기(페투하)가 배치되어 있다(창1:5,8,13,19,23,31). 그러므로 맛소라 텍스트의 최종편집자의 의도는 하루 단위로 문단을 나눈 것으로 보이고, 이는 곧 창세기 기자의 의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분명하고 통일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통일된 형식은 기록자의 의도적인 구성으로 보인다. 문단구분 표식 페투하의 배치에 의하면, 창세기 1장 1-5절이 하나의 문단을 이루는 구조로서 하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절은 창세기 1장 1-5절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문단 내에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맛소라 본문 창세기 최종편집자의 의도적인 구문론적 구상이라면, 그리고 그것은 최초 창세기 기록자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고 잘 전달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창세기 1장 2절은 창조 주간의 맨 첫날에 대한 서술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긴 시간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 1절이 창조 주간의 처음 하루에 포함되는 활동이며 동시에 이는 태초에 있었던 창조 사역의 시작이므로 태초의 창조사역에 대한 선포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전체 서술에 있어서,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공허’라는 서술이 의미하는 위치적인 기능과 범주는 창세기 1장 1절에 창조된 '천지' 가운데 '지'(그 땅)의 상태에 대한 설명으로서 창세기 1장 1절에 언급한 그 땅에 대하여 묘사에 해당한다. ‘그 땅’ 즉 첫 날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던 것은 이틀 후에 물 밖으로 나와야 할 땅이 아직도 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혼돈'했다고 묘사한 것이며, 앞으로 식물들과 생명체들로 가득 채워져야 할 땅이 아직은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허'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둘째,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2-3장을 통하여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며 그 이전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기록한다. 아울러 이 기록은 창세기 2장 17절과 로마서 5장 17절과 6장 23절을 상호 대조함으로써 죽음이 죄의 대가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즉 죽음과 고통은 선악과 사건 이후에 생겨난 ‘죄의 대가’이다. 그런데 간격이론은 아담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생물들의 죽음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셋째,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1장에 창조의 과정을 낮, 밤, 저녁, 아침, 날 등 시간과 함께 세세하게 기록하였고, 아담 계보와 셈 계보에서는 아들을 낳은 나이와 수명까지 시간에 대하여 면밀하게 기록하였다. 창세기 전반에 걸쳐 창세기 기록자는 이렇게 상세하게 시간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세기 기록자가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심판과 재창조 사이의 장구한 시간을 감추어 놓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창세기 전체적으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시간의 상세도에 비추어 볼 때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2.2.2.창세기 1장의 하루      창세기 1장의 ‘엿새’는 은유적 의미의 시간인지, 아니면 문자적 의미의 24시간 하루의 연속으로서의 엿새를 의미하는 것인지와 관련하여 본문의 내부적 관계를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창세기 1장의 모든 ”~째 날이니라” 앞에 배치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는 창세기 기록자가 창세기 1장의 하루가 24시간 하루임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한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둘째, 창세기 기록자는 ‘첫째 날’을 수식하면서 의미를 한정해 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바로 앞에 저녁과 아침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낮과 밤의 정의(definition)를 배치하였다. 이로써 낮과 밤은 일몰과 일출에 의한 문자적 의미의 저녁과 아침임을 한정해 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셋째,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1장 5절의 ‘첫째 날’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원어 단어를 서수 ‘첫째’(리숀)가 아닌 기수 ‘하나’(에하드) 즉 ‘하루’(one day)라고 기록함으로써 여기서 ‘하루’라는 시간단위가 창조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되고 정의된 하루가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음을 보도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구조 속에 나타나 있는 기록자의 의도를 반영한 장치들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 창세기 1장 '~째 날”에 대한 문학적 장치들>      넷째, 창세기 1장 14-19절의 하나의 문단 내에는 낮, 밤, 저녁, 아침, 넷째 날, 계절, 날, 해, 넷째 날 등 여러 시간단위들을 공존하도록 배치함으로써 기록자는 ‘넷째 날’이 24시간 하루임을 분명히 한다.      다섯째, 창세기 기록자는 천체들이 창조된 바로 그 날부터 천체의 빛들은 지구의 이 땅을 비추면서 우주의 천체들과 지구의 공존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함으로써 수억 년 이상 멀리 떨어져 보이는 별빛 문제에 대하여 창조신학에 따른 시공간적 이해를 제공한다.      여섯째, 창세기 기록자는 태양이 만들어진 넷째 날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하루를 여전히 동일하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로 묘사함으로써 창세기 1장의 엿새가 모두 각각 동일한 24시간 하루임을 강조한다.      일곱째, 기록자는 히브리성서 맛소라 텍스트(BHS)의 문단 구분을 통해서도 창세기 1장의 엿새가 모두 각각 동일한 하루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여덟째, 하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출 20:8~11에서 7일째 안식일로 지켜야 하는 날이 ‘우리의 하루’ 이므로 동일 문단 내 서술된 6일 또한 ‘문자적 24시간이 하루인 6일’이다. 만약 이스라엘사람들이 24시간 하루 동안으로 지킨 이 안식일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안식일을 범한 데 대한 엄중한 벌을 내리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벌은 엄중해서 죽이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출 31:15). 그러므로 안식일인 일곱째 날은 24시간 하루임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동일한 문장 내에 위치하고 있는 엿새 또한 24시간 하루의 연속된 엿새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울러, 출애굽기 31장 15-17절에서도 동일하게 안식일 규례를 주시면서 31장 17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일을 지켰으며 그것은 24시간 하루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엿새 동안이란 24시간 하루의 연속된 엿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홉째, 창세기 1장의 그 날들은 헤아려졌으며, 성경에서 이렇게 헤아려진 경우에는 24시간 하루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는 150회에 걸쳐 이러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다.      열째, 만일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어떤 다른 긴 시간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의미하는 분명한 단어들로 다른 문장을 만들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단계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엿새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기록자가 창조주간의 엿새를 긴 시간에 걸친 여섯 단계로 이해하고서도 엿새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그는 창세기 1장에서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20장 11절과 31장 17절에서도 엿새 동안 이라고 기록하였다. 모세는 창세기 1장에서만 하루라는 단어를 다른 곳과 달리 어떤 긴 기간의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째 날”은 문자적인 의미의 24시간 하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2.3.창세기 5장과 11장의 긴 수명들      창세기 5장의 아담계보 기록 구조는  ”A가 x세에 B를 낳았고, A가 B를 낳은 후 y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가 x+y세를 살고 죽었다.”라는 일정한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에노스는 게난을 90세에 낳았다(창 5:9). 게난을 낳은 나이를 10의 1로 줄이면 9세가 되고, 1개월을 1살로 계산하면 만 7.5세에 낳은 것이 된다. 게난은 마할랄렐을 70세에 낳았다(창 5:12). 이것은 7세가 되어서도 안 되고 5.8세가 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마할랄렐은 65세에 야렛을 낳았다(창 5:15). 짧은 한 문단 내에 65세에 자식을 낳은 사실과 895세를 살았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기록자의 전략이다. 즉 95세가 믿기지 않아서 10분의 1로 줄이거나, 1개월을 한 살로 해석을 시도해보면 65세에 자식을 낳은 것과 조화될 수 없어 다른 어떤 해석도 불가하도록 장치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야렛은 에녹을 162세에 낳았다(창 5:18). 에녹은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다(창 5:21). 므두셀라는 라멕을 187세에 낳았다(창 5:25). 라멕은 노아를 182세에 낳았다(창 5:28). 그리고 노아는 500세가 되어서야 야벳과 셈과 함을 낳았다(창 5:32). 아들을 낳은 나이를 모두 나열해 놓아도 아무런 수열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야 말로 들쭉날쭉 할 뿐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들을 낳은 나이들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구조는 나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도록 배치한 엄격한 장치로서 기능한다. 창세기 기록자가 아담 계보의 모든 족보를 이러한 구조로 족보를 기록한 것은 의도적인 문학적 장치로서, 시간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에 의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담 계보의 시간, 나이와 수명은 구문론적 관점에서 본문의 내부적인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게 된다.       아울러, 노아홍수 사건에 대한 기록은 사건 발생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연월일을 세심하게 기록하였다. 그것은 노아 600세 되는 해 2월 17일이었다고 기록했다(창7:11). 방주에 타기 시작(2월 10일)한지 일주일이 지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2월 17일), 40일 동안 줄곧 비가 내렸고(3월 27일까지), 150일 동안 물이 땅에 넘쳤으며, 150일 후에 물이 줄어들었고(2월 17일에 시작하여 5개월 동안),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 10월 1일에 산봉우리가 보였고, 40일 후에(11월 11일) 까마귀를 내보냈고 비둘기도 내보냈으나 있을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으며, 7일 후에(11월 18일) 비둘기를 보냈더니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왔고, 또 7일 후에(11월 25일) 비둘기를 보냈더니 돌아오지 않았고, 노아 601세 1월 1일에 땅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하였고, 2월 27일에 땅이 말랐다. 이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에서 내렸다.      기록자는 이 사건의 시간에 대하여 매우 높은 관심을 가지고 정확히 전달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만약 실제로 그 시간들이 아니라고 가정해본다면 시간들을 기록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기록해서도 안 된다. 만약 정확한 시간이 아니라면 시간적인 모호성을 그대로 남겨둔 채로 얼마든지 충분히 사건을 보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세하게 시간을 기록한 데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보는 타당하다. 그것은 시간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기록된 그대로의 사실성 즉 실제로 그대로 일어났다는 문자적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자세한 노아 계보의 이 숫자들은 노아가 600세 되던 해라는 시간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나이는 아담 계보에서 노아가 500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과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노아 계보의 자세한 시간기록이 보도의 사실성을 강변하고 있는 것은 아담 계보의 나이 역시 문자적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셈 계보에서도 본문의 구성을 살펴보면, 자식을 낳은 나이와 함께 이후 몇 년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는지를 일정한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그것은 수명이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되도록 지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즉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고 벨렉을 낳은 후에 43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창 11:16-17)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464세를 산 수명을 다른 의미로 줄여서 해석해보려 한다면 34세에 아들을 낳을 나이를 함께 줄여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문자적인 의미의 나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형식을 문학적 장치로 볼 때, 이는 시간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기록자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노아홍수를 기점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사람의 수명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900대의 나이로부터 점진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대 아담부터 10대 노아까지는 900수를 누렸고, 노아(10대)의 아들 셈은 600세를 살았다(창 5:3-31, 11:10-11). 이후 438, 433, 464세를 살았으며 바벨탑사건이 있었던 때인 벨렉(15대)은 239세, 이후 239, 230, 148세, 19대 데라는 205세를 살았다(창 11:12-32). 이렇게 나이의 점진적인 축소가 이어지면서 기록되어 있는 구조는 아담 계보와 셈 계보에 기록된 수명을 어떤 비율로도 축소할 수 없으며 다만 문자적인 해석만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III. 성경기록에 의한 기원의 연대 찾아가기 3.1. 아담-야곱까지 아담연대기 산출      창5:3-32, 7:11, 11:10, 9:28, 11:10-26, 11:32-12:4, 21:5, 25:26을 근거로 아담에서 야곱의 출생까지를 산출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0)+130(셋)+105(에노스)+90(게난)+70(마할랄레)+65(야렛)+162(에녹)+65(므두셀라)+187(라멕)+182(노아)+502(셈)+100(아르박삿)+35(셀라)+30(에벨)+34(벨렉)+30(르우)+32(스룩)+30(나홀)+29(데라)+130(아브람)+100(이삭)+60(야곱)=2168년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130세 때(창:47:9)이며, 그로부터 실제로 애굽에 체류한 기간은 430년(출 12:40)이며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출 12:41) 출애굽하였는데, 그 때는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이 되는 해였다(왕상6:1).   3.2. 기원의 시간에 대한 B.C. 연대기 산출      솔로몬은 BC 970년에 왕위에 즉위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기원의 연대가 산출된다.           BC 4174 년경으로 산출된 시간에는 공식적인 오차 범위가 내재하고 있다. 즉 누가 몇 세에 낳았다고 했기 때문에 몇 세 몇 개월 되었을 때인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1) 1대 아담에서 22대 야곱까지 21곳의 간격마다 최대 오차범위 1년(몇 세 몇 개월에 낳았는지 알 수 없음).      2) 노아가 셈을 낳은 나이가 502세인지 503세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여기에 1년의 오차범위.      3) 애굽으로 내려간 연도에 1년의 오차범위(몇 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년의 오차를 넘을 수는 없음).      4) 출애굽 연도에 1년의 오차범위.      5) 솔로몬 왕 제4년에 1년의 오차범위. 이를 모두 합하면, 1+1+1+1+21=25년.      그러므로 아무리 오차가 크더라도 +, - 25년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IV. 결론          성경은 많은 문학적 장치들을 사용하여 자세하고 끊임없는 시간을 기록함으로써 창1:1의 ‘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Footnotes 1) 이는 노아홍수를 겪으면서 달라졌기 때문에 지금의 지구환경과는 다르다. 따라서 궁창을 지금의 대기권이라고 할 수는 없다.2) 참조, Wenham, Genesis 1-15, 6. 창세기 1장에는 승인 관용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7회(4, 10, 12, 18, 21, 25, 31절) 사용되었다. 이는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3) Eugine H. Merril, 「구약의 역사적 개요」, 김인환 역(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7), 56을 참조할 것. 4) Gordon J. Wenham, Genesis 1-15 vol. 1,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TX: Word Books, 1987), 134.  5) E. J.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 서세일 역(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8), 48. 영은 창세기 1장의 엿새는 사건이 발생한 연대기적 순서를 의미하고 있지만 그 시간의 길이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6) 창세기의 내용이 창세기라는 이름으로 최종적인 편집을 거치기 전에 기록한 최초의 창세기 기록자와 지금 우리에게 전달된 창세기의 최종편집자는 다르겠지만, 그 의도와 의미의 전달에 왜곡이 없으며 성경 전체를 공시적 관점에서 상호보완적으로 바라보고 최종편집자를 창세기 기록자와 동일시한다.7) 김두석. ”창세기 1장 1절과 2, 3절과의 관계 연구”, 「칼빈논단」, (2002): 133-158, 136-137, 150-151, 153과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 23-27, 31-33, 43을 참조할 것.8) 왕대일은 창세기 2:3과 2:4의 구분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의 독법과 정경상의 형태를 따르는데, 이때 ‘페투하’의 단락 표기를 근거로 삼는다. 왕대일, 「구약신학」(서울: 도서출판 성경학연구소, 2003), 343.  9)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33.10) 참조, Archer, 「성경 난제 백과사전」, 황영철 역(서울 : 생명의말씀사, 1993), 87-89 및 Keil & Delitzsch, 「구약해석 창세기」, 고영민 역(서울; 기독교문화사, 1987), 48-50.11) Rad, 「창세기」, 50-51.12) Keil & Delitzsch, 「구약해석 창세기」, 48-50. 13) Boice, 「창세기강해I」, 문동학 역(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78-79.14)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로마서 5장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15)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Literal ‘Days’ or Figurative ‘Periods/Epochs’ of Time”, 5-38.16) 참조, Schmidt, Die Schouml der Priesterschrift. 2d Ed.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67), 5, 68. ”Considerations Based on Pentateuchal Sabbath Passages.”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Literal ‘Days’ or Figurative ‘Periods/Epochs’ of Time”, 5-38.17)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Literal ‘Days’ or Figurative ‘Periods/Epochs’ of Time”, 5-38. Geisler, 「성경의 난해한 문제들」, 42.18) Geisler, 「성경의 난해한 문제들」, 51-52.19) Ibid. 아담 계보와 셈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수명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현상을 기록해놓았다. 따라서 아담의 나이를 93세로 10분의 1로 하게 되면 아브라함의 할아버지 나홀의 수명은 15세(14.8세)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줄여서 해석할 수 없게 된다.20) 노아가 셈을 낳은 나이는, 창7:11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창11: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아하르 함마뿔)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9:28 ”홍수 후에(아하르 함마뿔)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에서 ‘홍수 후’는 홍수 시작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홍수 후'를 '홍수 시작으로부터'로 보면 노아 502세에 셈을 낳은 것이 된다. 그런데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내린 시간을 기준으로 ‘홍수 후’라고 했다면 503세가 될 가능성도 있다. 노아가 502세에 셈을 낳았다면(또는 503세에 낳았다고 하더라도) 창 5:32, 창 9:24, 창 11:10을 살펴보면 노아의 아들들은 그 나이대로 야벳, 셈, 함 순이 된다. 히브리성서 맛소라텍스트는 '형인 야벳의 형제 셈'이라고 해석된다. 영어역본 KJV, NKJV, NIV 등은 '형인 야벳의 형제(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라고 번역하고 있다. [KJV]창 10:21 Unto Shem also,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 even to him were [children] born. [NKJV]창 10:21 And children were born also to Shem,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 [NIV]창 10:21 Sons were also born to Shem, whose older brother was Japheth; Shem was the ancestor of all the sons of Eber. 데라가 아브람을 낳은 나이는, 창 11: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보여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에서 데라는 아브라함을 130세 낳았음을 알 수 있다.21) 에드윈 R. 딜레(Edwin R. Thiele), 「히브리왕들의 연대기」, 한정건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viii.
2015-04-25 16:22:28 | 허광무
입다가 암몬과 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어셔연대기를 참고하면, AM2852년이고, 엘리가 제사장을 맡은 것이 AM2842년입니다. 엘리가 사망한 것이 AM2882년 엘리가 98세일때입니다.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을때,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사무엘이 사망한 시기가 AM2944년이고요. 사무엘이 엘리 한테 간 나이가 젖을 떼고 갔으니 대략 3세정도로 추정합니다. 사무엘이 몇살에 죽었는지가 나오지 않지만 엘리와 같은 나이를 살았다고 추정하면, 2846년에 태어 났고,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였을때 6살이 됩니다. 만약, 입다가 인신제사를 드렸다면, 엘리와 사무엘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상하기도 싫으시죠!
2015-04-25 15:47:16 | 홍승대
창세기의 사건이 왜곡되면, 죄의 기원이 바뀌고, 죄의 기원이 무엇인지 모르면 죄에 대한 태도가 틀려지고 그런면 회개가 바뀌고 회개가 바뀌면 구원이 바뀌네요. 제가 너무 비약했나요? 요즘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가 벌써 거의 20년 전에 쓰였네요.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4-25 09:52:13 | 홍승대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이 서로 충돌될 수는 없죠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섬기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히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일 때문에 창조주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비천한 땅에 오셨음을 믿습니다. 창조물에게 조롱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죄덩어리가 되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위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심판을 행하시지만 겸허히 회개하고 나오는 영혼을 멸시치 않으시는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입다의 믿음을 옳다고 판단해주셨는데 하나님의 판단을 수용하는 것이 바른 관점이요 성경적 믿음이라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2015-04-24 23:56:45 | 조양교
올려주신 글의 논리처럼 성경의 단순한 진리를 맑은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다지도 사람을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는데 하물며 입다의 딸 문제도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잊지 말고 바라보아야 하겠지요. 더불어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귀히 여기시듯이 우리도 몇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 안에 한 지체요, 영원히 함께할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다시금 깊이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왠지 어두운 하늘처럼 마음이 어두워지는 밤입니다.
2015-04-24 23:40:05 | 김대용
최상만 형제님, 명쾌한 논리적 분석에 감탄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지혜로 하나님의 성품과 기록된 바 말씀에 따라서 충분한 정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성경 연구를 해주신데 대해 성도들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샬롬!
2015-04-24 23:38:34 | 한원규
형제님, 멀리 호주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어 주시니 은혜가 됩니다. 단순히 보나 상식으로 보나 세밀하게 분석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관된 법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순리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자주 좋은 글로 뵙기를 바랍니다~. 항상 평안하세요. 감사합니다.
2015-04-24 23:34:30 | 김재욱
좁은 길 (The narrow road) :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론이 걸어가는 길 Ken HamPresident of AiG    현대의 복음주의가 6일 창조에 관하여 타협을 하는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창세기에서 비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견해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이간시키지” 말라고 항변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자기 교회 사람들을 우리 세미나에 보내서 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듣게 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와 젊은 지구 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우리의 세미나를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외쳤다! ”단지 본질적인 요소만 의견이 일치한다면 이러한 분열 없이 함께 일할 수는 없을까요?” ”본질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거듭났다면, 그는 창세기의 내용을 당신이 믿듯이 믿고 있지 않은 경우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세요?”  나는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내가 창세기에 대해 믿는 바와 똑같이 그들이 믿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당신이 창세기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입니다. 믿어야 할 본질적인 내용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때 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요?””우리의 죄들을 위해서요”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죄’ 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십시요. 그녀의 대답은, ”음,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내가 계속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반항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예, 물론이지요. 창세기에 기록된 바대로 문자 그대로의 사람과 뱀, 선악과 등이 있었던 실제의 동산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죄에 대한 기원은 없다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했다. ”사람들이 거듭나서 천국에 가게 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원죄‘를 믿는 것이 본질적인 요소 인가요, 아닌가요?” ”요즈음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점점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일치되는 모든 영역을 묻어버리고 같이 일할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요청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단지 사소한 교리상의 차이를 치워놓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역에 있어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심하게 멀어지고 있음을 항의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에 입각한 몇 가지 교리를 살펴보더라도,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사소한 논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 (고전 15:21-22)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전적인 이유는 (문자 그대로의)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罪性)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심으로, 성경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26절)라고 말한 (육체적) 죽음을 정복하셨다. 오래된-연대 이론이 옳다면, 하나님은 수십억 년 동안의 죽음과 고통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를 ‘심히 좋았더라‘ (창 1:31)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는가? 결혼. (막 10:6-9) 예수님은 (수백만 년 이후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문자 그대로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인용하고 계신다. 회복. (행 3:21; 계 21:4, 22:3) 오래된 연대의 지질 시대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고통이 오랜 세월 동안에 계속 있어왔다. 최초의 장소에 죄가 없었고 죽음이 없었던 세상이 결코 없었다면, 모든 사물은 그런 세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성경의 신뢰성. 최고의 히브리 학자들은, 창세기가 정확히 우리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데에 만장일치 이다.[1]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수천 년 간 잘못 인도했었다고 거부했던 자들이 아닌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조과학운동,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음(따라서 지구는 젊다) 등의 견해에 반대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적인 논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창조과학자들을 편협하고 쓸 데 없이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슬프게도, 이런 공격 중의 몇 가지는 스스로 ‘진화론을 반대하는 창조주의자‘ 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예를 들어, 휴 로스(Hugh Ross) 박사는 점진주의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로서, ‘빅뱅(Big Bang)‘을 믿고, 노아 시대의 홍수가 국지적인(a local Flood) 것이었으며, 죄가 들어오기 전에 수백만 년 동안 죽음과 피흘림이 있었고, 아담과 하와 이전에는 인간을 닮은 다양한 ‘혼이 없는‘ 존재들이 있어서 자기들의 시체를 묻었고, 동굴 벽화를 그렸다고 믿고 있다. ‘창조와 시간(Creation and Time)‘ 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의 교회가 할례 때문에 분열되었던 것처럼, 요즘 세기에는 창조의 연대에 관한 논점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음을 본다. 할례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주의를 방해하였듯이, 요즘에도 젊은 지구 창조론이 그러하다.”[2] 그런데, Answers in Genesis와 같은 사역이 급격히 성장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복음주의의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수년간 창조과학 사역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이 창세기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돌아온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편지를 받아왔다. 그 중에는, 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는 오래된 연대 개념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기독교인들에게) 들었던 해답이, 성경을 왜곡하여 현존하는 통설에 끼워 맞추려는 시시한 시도였기 때문에, 이전에 기독교를 포기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창세기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오늘날 그들에게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 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때는 기독교의 ‘근본‘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붙여졌던 명예로운 용어였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테러행위 및 광신과 연합함으로써, 이제는 그것이 극단주의 및 편협한 신앙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미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으므로, 차라리 나는 역사의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 안에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 ‘계시론자(revelationist)‘로 불리고 싶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에서도 그런 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1994년의 AP 연합통신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관한 새로운 바티칸 문서는 근본주의자들의 접근방법이 왜곡되고, 위험하고, 인종차별로 이끌 수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교황직속의 성경위원회가 쓴 그 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일종의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로 유도하고 있다.... 근본주의자적 접근은, 성경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돋우므로 위험하다.”[3]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또 다른 ‘공격‘으로, ‘창세기: 살아있는 대화‘ 라는 빌 모이어(Bill Moyers)의 프로그램이 1996년 10월에 미국 공영 TV에서 방영되었다. 이 쇼는 하나님의 속성과 동기에 대해 경멸적인 판단을 담고 있는데, 창세기를 실제의 역사라고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슬람인, 자유주의 기독교인 및 무신론 주석자들의 의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4] 모이어의 연재물에 관한 Newsweek 지의 기사는 요즘의 기독교 세계에 대해 재미있는 논평을 하였다. ”종파에 대한 충성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이론을 오히려 신학교에서 퍼뜨리고 있다....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거의 절대성을 잃어가고 있다.” [5] 성경적 창조 운동(Biblical creation movement)은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literal Genesis)를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를 고수하며, 교회나 속세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세속적인 학문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압도적으로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 세속적인 이론(증거 없이 주장되는 지구의 나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재해석되기 시작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재해석하는 문이 열리게 되어, 궁극적으로 모든 진리가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최근에 나의 동료가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선도적인 설교가 중의 한 분이며, 매우 영향력 있는 목사님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반대하는 그 분의 입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성경의 권위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훼손된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 주제는 태고의 지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스터플랜’ (Masterplan,창세기를 다룬 그의 책)에서 내가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 분열되어져 있는 의견들이 복음주의 안에서 연합되고자 하는 바램을 반영한 것입니다.” [6] 슬픈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관점을 세속적인 견해와 타협하며, '연합'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는 동안에, 비기독교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World 지가 보도하기를 빌 모이어의 창세기 프로그램에 나온 한 이슬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믿음을 타협하기를 거절한다. 이슬람은 최소한 우리의 교리를 완전하게 유지하기를 원한다. 유대교는 끝없는 문답(dialogue)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이며, 기독교는 변명과 혼돈 속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7] 우리의 서구 문명에는 갈라진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 그 틈은 교회와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려는 문자적 창조론자 같은 교회와 나머지 교회 및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다. 분열은 항상 나쁜 것인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2:5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 말씀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고자 할 때는 약간의 분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문자적 창조론자들이 오늘날의 보수적인 교회에 있어서까지도 소수파로 여겨진다는 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3-14장의 구원에 관한 말씀 속에서, 넓은 길로 열려있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선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소수의 사람들이 찾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논점에 관하여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의 멸망적인 타협 속으로 황급히 돌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종종 그 말씀을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에 따르는 것은 항상 ‘좁은 길(narrow road)‘ 인 것이다.  당신은 진정 어느 길에 서 있는가?   References and notes 1. Oxford Hebrew professor James Barr has written (in a letter to David C.C. Watson in 1984) that he knows of no professor of Hebrew at any world-class university who thinks that Genesis was meant to convey anything other than an actual account of a real, recent creation in six ordinary days and a global Flood. Like Barr, that does not mean they actually believe Genesis to be true, just that they are unanimous about what it means. 2. Dr. Hugh Ross, Creation and Time, Navpress, p. 162, 1994. 3. Quoted in Foundation, News & Views XV(4), July–August, 1994. On top of this, the Pope’s announcement in October 1996, saying that he saw no conflict between evolution and Christianity (so long as God created the soul of man) provided the media with more ammunition to continue to try to alienate creationists from what it sees as ‘mainstream Christianity.’ 4. Time, p. 72, October 28, 1996, reported: ‘ ... Moyers decided not to include Christian Fundamentalists: ... It would have struck people as the same discourse they’ve been hearing for the last 15 years.’ Earlier, the same article stated: ‘Much of the recent popular controversy around Genesis has focused on the issue of whether the Creation should be understood literally. That debate has tended to obscure a further set of issues hinging on the character of both God and the patriarchs.’ Again, literal creationists are made out to be a stumbling block to people understanding the ‘real truth’ of the Bible. 5. Newsweek, October 21, 1996, p. 76. 6. Correspondence from Pastor Roy Clemens, Eden Baptist Church, Cambridge UK September 25, 1996. 7. World, October 26, 1996, p. 23.    *참조 : The Reformation of the 16th Century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reformation-sixteenth-century Progressive creationist anthropology: many reasons NOT to believe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3/j20_3_31-38.pdf Western culture and the age of the earth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21/ 출처 : Creation 19(2):47–49, March 1997  March 1997URL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9/i2/narrow.asp번역자 : 이종헌
2015-04-24 23:28:12 | 허광무
네 좋은 분석 감사 합니다. 하니님께서는 사람을 살아있는 희생물로 받으십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히 13:1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곧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민 8:11) 그리고 아론이 레위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헌물로 {주} 앞에 드릴지니 이것은 그들이 {주}를 위해 섬기는 일을 집행하게 하려 함이라. (민 8:13) 레위 사람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주}께 헌물로 드릴지니라. (민 8:21) 레위 사람들이 정결하게 되어 자기들의 옷을 빨매 아론이 그들을 {주} 앞에 헌물로 드리고 또 그들을 위해 속죄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니
2015-04-24 23:23:49 | 허광무
제가 풀어본 입다 딸의 생사 여부   다들 성경 기록대로 믿으면 쉽게 나오는 결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정반대의 주장이 평행선을 그으며 합쳐질 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두 가지 결론 중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는 것입니다.   우선, 상반된 견해들을 요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상반된 견해 요약)   검토 항목 번제 헌물 NO 번제 헌물 YES 1 (30절)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서원 당시 입다 생각에 사람은 포함하지 않고 서원했다 사람도 포함했다 또는 사람을 대상으로 서원했다. 2 (31절) ‘무엇이든(whatsoever)과 그것을(it)’의 의미 사람은 포함 안 된다 사람도 포함 된다 3 (31절) 번제 헌물로 드려졌나 아니오 예 4 (37절) bewail my virginity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자기의 처녀로 죽음으로 인하여 애곡하고 5 (39절)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사람은 번제 헌물로 드리지 못하므로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드렸다.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대로 불로 태워 드렸다. 6 (39절)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she knew no man) 결혼하지 않았다 처녀로 죽었다 7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나흘씩 애곡한 이유 입다의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처녀로 평생을 살게 되었기 때문 입다의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처녀로 번제 헌물이 되어 죽게 되었기 때문 * 요약해서 언급한 것 외에 세부적으로는 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상반된 견해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번제 헌물로 드려졌느냐, 아니냐’입니다. 성도의 하나됨을 위하여 진실 찾기에 나서 보렵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일곱 명의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예수님께 했던 성경 기록이 생각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즉답을 하지 않으시고 먼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느니라. (마 22:29)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못하는 것을 먼저 지적하시고 나서, 성경 기록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는 대답으로 그들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입다의 딸 문제를 분명하게 풀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요점 1: 성경 기록들을 알면 잘못하지 않는다.   요점 2:  [하나님]을 알면 잘못하지 않는다. -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포인트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범위를 좁혀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나라 (골 1:10)”고 권면하셨습니다.   ※ 위의 (마 22:29)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요점 1’을 사용해도 잘못하지 않고, ‘요점 2’를 사용해도 잘못하지 않으며, 두 가지 요점을 모두 사용해도 잘못하지 않습니다. (논리식 “(NOT A) AND (NOT B) = (NOT C)”의 대우(對偶) “A OR B= C”에 해당됩니다. 몰라도 됩니다.)    이제부터 시험을 보겠습니다. (시험 1) ‘요점 1’에 따라 성경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드려졌다고 결론이 나면 ‘YES’ , 아니면 ‘NO’를 답안지에 적어 주십시오.   네. 제출된 답안지를 보니까 YES도 있고 NO도 있네요. 시험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시험 2) ‘요점 2’에 따라 성경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드려졌다고 결론이 나면 ‘YES’ , 아니면 ‘NO’를 답안지에 적어 주십시오.    네. 이번에도 답안지에 YES도 있고 NO도 있습니다.    제출된 답안지를 토대로 (시험 1)과 (시험 2)에서의 응답 결과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번제 헌물로 드려졌으면 ‘Yes’ , 안 드려졌으면 ‘No’) 응답 유형  [하나님]을 알고 얻은 답 성경 기록들을 통해 얻은 답 설    명 A YES YES 논리적으로 OK. 하나님은 악하시고, 인신 제사를 받는다. B NO YES 예수님께서 주신 요점들을 잘못 사용함 C YES NO 예수님께서 주신 요점들을 잘못 사용함 D NO NO 논리적으로 OK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신 제사를 안 받으신다. l  (요점 1)을 사용하든 (요점 2)를 사용하든 답은 동일하게 나와야 함. 정답: (응답 유형 D) 채점관: 히브리서 기록자 (바울) 채점관 평가(추정): (응답 유형 A) 입다의 서원에 관한 성경 기록을 잘못 해석하하고, 하나님도 사람을 번제 헌물로 받으시는 악한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있으므로 영적인 분별력이 없음. 입다가 사람을 번제 헌물로 드렸다고 함으로써 믿음의 본으로 기록한 채점관에 정면 도전하고, 차라리 입다 보다는 입다의 딸의 믿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하므로 낙제점을 줍니다.   (응답 유형 B) 입다가 딸을 번제 헌물로 드렸는데 그것을 받으신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응답 유형 C) 입다가 딸을 번제 헌물로 드리지 않았다면서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라고 하면 믿지 않거나 안티 크리스천인가 봅니다. 시험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응답 유형 D) 성경 기록을 잘 해석하였고, 하나님도 올바로 알고 있어서 영적인 분별력이 좋습니다. 채점관이 히브리서에 믿음의 본이 되는 특출한 사람들 중에 입다를 올린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리겠다는 서원을 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한 믿음이 후대에까지 길이 빛나는 귀한 것이기 때문에 본받으라고 한 것임.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죽는 것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죽는 믿음을 보였다면, 그 믿음은 아버지 입다 보다 더 훌륭한 것일 텐데 번제 헌물로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입다의 딸을 기록하지 않았음. 사사기 11장을 읽을 때도 입다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는데 입다의 딸 이름은 기록하지 않은 이유도 서치 라이트를 입다의 딸에게 비추지 말고 입다에게 비추려는 의도임을 알아야 함. 여리고 정복 때의 창녀 라합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채점관인 나도 그 이름을 다시 거명하였지 않았는가. 입다의 딸이 숭고한 희생 정신과 투철한 믿음으로 번제 헌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면 왜 그녀의 이름이 감추어져 있겠는가.  말로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고 하면서도, 성경 기록에 하나님께서 인신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면 성경 기록 해석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교묘하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아버지되신 하나님이 식인종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먼저 나서서 사람을 번제 헌물로 받아 잡수신 하나님을 광고한다면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 건가요? 과연 하나님의 자녀 맞습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무리에게서 속히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거짓 교사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2015-04-24 19:00:27 | 최상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