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창 1:22과 1:28절을 다시 찾아서 읽어 봅니다.
(1: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let fowl multiply in the earth.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22절에서는 동물들에게 바다를 채우라고만 하시고 별 다른 추가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28절은 땅을 채우라고 하신 다음 추가로 더 말씀하신 내용이 있네요. -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그러고 보니, 땅을 채우는 사람은 앞서 창조하신 생물들에 대한 정복자요 지배자네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사람을 지으실 때 애초부터 그렇게 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26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1:2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그러니까,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이고, 그래서 다른 창조물들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하셨구나,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 하시는 것처럼”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특별한 백성’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사람은 다른 창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창조물로 보시는 것이네요. 그래서, 사전에서는 사람과 동물을 한데 묶어 ‘replenish’로 사용하는 것으로 표시해 두었지만, 그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이 채우는 것은 ‘replenish’, 동물이 채우는 것은 ‘fill’로 구별하기를 원하셨네요. 딤후 2:15에서 성경 기록을 바르게 나누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하나 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성경의 내장 사전에 ‘replenish’의 의미를 “사람이 채우다”라고 정의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성경 기록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어 있는데, 이 정의대로 해석하면 될까요?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9:1)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9: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창 9:1에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땅을 채우라고 하시는 상황이니까 ‘replenish’로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받는 대상은 동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앞의 내장 사전 정의가 여기에서도 바르게 적용된다는 것이 확인이 됩니다.
성경의 다른 용례들도 모두 확인해 보겠습니다.
KJB
흠정역 성경
replenish
(창 1:28, KJV)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1: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주어가 사람
(주어 + 동사 + 목적어)
(창 9:1, KJV)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9: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주어가 사람
(주어 + 동사 + 목적어)
(사 2:6, KJV) 『Therefore thou hast forsaken thy people the house of Jacob, because they be replenished from the east, and are soothsayers like the Philistines, and they please themselves in the children of strangers.』
(2:6) ¶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의 집을 버리셨나이다. 그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것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쟁이가 되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나이다.
주어가 사람(주의 백성)
수동태 (주어 + 동사)
(사 23:2, KJV) 『Be still, ye inhabitants of the isle; thou whom the merchants of Zidon, that pass over the sea, have replenished.』
(23:2) 섬의 거주민들아, 너희는 잠잠할지어다. 바다를 넘나드는 시돈의 상인들이 너를 가득히 채웠도다.
주어가 사람
(주어 + 동사 + 목적어)
(렘 31:25, KJV) 『For I have satiated the weary soul, and I have replenished every sorrowful soul.』
(31:25) 내가 피곤한 혼을 흡족하게 하며 모든 슬퍼하는 혼을 채워 주었노라, 하시니라.
주어가 하나님
(주어 + 동사 + 목적어)
(겔 26:2, KJV) 『Son of man, because that Tyrus hath said against Jerusalem, Aha, she is broken that was the gates of the people: she is turned unto me: I shall be replenished, now she is laid waste:』
(26:2) 사람의 아들아, 두로가 예루살렘을 대적하며 말하기를, 아하, 백성들의 문이던 그녀가 부서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즉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 하였도다.
주어가 사람(두로-나라)
수동태(주어 + 동사)
(겔 27:25, KJV) 『The ships of Tarshish did sing of thee in thy market: and thou wast replenished, and made very glorious in the midst of the seas.』
(27:25) 다시스의 배들이 네 시장에서 너에 대하여 노래하였으며 너는 충만히 채워져서 바다들의 한가운데서 심히 영화롭게 되었도다.
주어가 사람(두로-나라)
수동태(주어 + 동사)
위에서 살펴본 바로는, ‘replenish’가 사람 또는 하나님이 주어인 문장에서 사용되었고, 동물이 주어인 용례는 없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정의한 ‘사람이 채우다’란 뜻에 배치되는 용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어로 사용된 것은 예외적인 사례이지만, 개념상으로는 배치되지 않습니다.
** 참고: 사전에서는 ‘replenish’의 사용 예로서 “사람이 ~으로(사람 또는 동물로) 어디를 ‘채우다’”라는 형식으로 해서, 채우는 대상을 ‘with + (동물 또는 사람)’의 부사구 형태로 사용한 예가 나와 있기도 합니다. (예: I have replenysshed my pastours with catall, and my pondes with fysshe.) 그러나, 성경의 용례는 이처럼 부사를 동반하여 ‘채우다’를 표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모두 부사구의 목적어가 주어가 된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어는 복수입니다. 수동태의 경우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다수의 그 무엇이 주어를 ‘채우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도 주어는 사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목적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쓸 수 있다.
(22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28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22절은 목적어가 바다의 물들(the waters in the seas)이고, 28절은 땅(the earth)입니다. 바다를 채운다는 것은 바다 속을 채운다는 것이고, 땅을 채운다는 것은 지면 위를 채운다는 것이니까, 두 가지의 채우는 용기가 서로 다른 형태인 것은 사실이나, 채우는 동물이나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들이 채우는 곳이 자기가 사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또 이 목적어가 달라짐으로 인해 ‘채우다’의 의미로 달리 사용되는 동사를 찾을 수 없으므로, 이것은 검토 대상에서 제외하겠습니다.
3. 의미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논거: 흠정역 번역에서는 22 절의 ‘fill’을 ‘채우다’로 번역하고, 28 절의 ‘replenish’도 동일하게 ‘채우다’로 번역하였는데, 동사의 단어를 다르게 쓴 이유가 있으므로 동일하게 번역하지 말고 ‘replenish’의 여러 의미 중에서 다른 뜻을 채택하는 것이 두 동사를 다른 단어로 번역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성경 기록들의 다른 구절들을 참조해 볼 때 세상은 재창조되었으며, 옛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창조된 사람이 땅을 채우는 것은 다시 채우는 것이다. 창 9:1에서도 노아의 홍수로 땅의 동물들을 쓸어버리신 후 하나님께서 똑같이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라고 하신 것을 보면, 성경 내장 사전에서 ‘replenish’는 ‘다시 채우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replenish’의 여러가지 뜻 중에서도 이에 부합하는 뜻(다시 채우다)이 있다.
수정안: ‘채우다’로 해서는 안 되고, 당연히 ‘다시 채우다’로 번역해야 한다.
평가 및 반론:
(1) 성경 내장 사전은 어떤 단어가 성경에 처음 나온 곳의 의미가 그 단어의 뜻을 정의하는 것인데, 나중의 창 9:1에서 뜻을 정의 내지 확신하고 그것을 창1:28에 거꾸로 가져와서 그 곳의 뜻을 풀이하는 것은 역적용하는 원칙 위반이지 않은가요? 그 논거는 제척됩니다.
(2) 흠정역에서는 ‘replenish’의 사전적 의미 중에서 ‘채우다’가 적절한 번역이라고 판단하고 그것을 채택했는데, 위의 논거에서는 다른 의미 ‘다시 채우다’를 적절한 번역이라고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단어가 다수의 의미를 가지는 ‘다의성’은 어떤 언어에서나 다 있지만, 이 경우처럼 동일한 의미 ‘채우다’에 ‘다시’라는 반복 개념만을 추가해서 다른 의미의 단어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를 사용할 때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다의성이란 서로 다른 의미가 한 단어 안에 다수 있는 것이고, 의미가 같은 경우에도 사용처가 다른 경우에라야 혼란이 초래되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로 같은 사용처에 동일한 단어를 반복성만 추가해서 쓰는 다의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래 예화를 보기 바랍니다.
2015-04-27 20:12:10 | 최상만
제가 알아본 replenish의 뜻
창세기 1장 28절의 ‘땅을 채우라’의 영어 단어 ‘replenish’를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어서 이 영어단어의 뜻을 검토하고자 합니다.
(22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28절)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두 절을 비교해 보면 우리말 번역은 둘 다 ‘채우다’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fill’과 ‘replenish’로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fill’도 ‘채우다’, ‘replenish’도 ‘채우다’니까 그렇게 번역했겠고, 또 히브리어 원문에도 두 곳에 동일하게 같은 단어 ‘말레’가 사용되어 있으니까 표면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말레’를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번역하면서 한 곳은 ‘fill’, 다른 곳은 ‘replenish’로 다른 단어를 사용해서 번역을 했고, 흠정역 성경이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했기 때문에,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다른 단어를 썼는데 왜 같은 우리말 단어로 번역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최종 권위로 믿는데 그 성경에서 다른 단어를 사용한 취지에 따라 다르게 번역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는 행동 또는 동작 중심의 단어가 발달하고, 한국은 감정이나 느낌 중심의 단어가 발달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늘이 파랗다고 해도, 영어로는 blue, 퍼렇다고 하는 말도 blue, 푸르스럼하다고 하면 뭐라고 영어로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반면에 영어로는 “get on, ride, take, drive, board” 등등 다양한 단어들을 우리는 모두 ‘타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맙니다. 그래서 영어를 번역할 때 다양한 행동을 달리 표현하는 영어 단어들을 우리말로는 일일이 구분해서 번역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제가 기행문을 쓰면서 집을 나서서부터 목적지까지 가는데 “처음에는 택시 타고 버스터미널 가서, 거기서 버스 타고 페리 터미널까지 가서, 거기서 배 타고 제주도 가서, 거기서 버스 타고 한라산 기슭까지 가서, 거기서 자전거 빌려 타고 한라산 관광 코스를 돌아다녔다.”라고 썼다면,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get on, ride, take, drive, board” 중에서 상황에 맞는 단어들을 골라서 쓰겠죠? 그런데, 이렇게 번역된 영어 문장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다고 합시다. 서로 다른 이 단어들을 모두 ‘타다’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죠?
창 1:28의 ‘replenish’는 히브리어 ‘말레’를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창 1:22의 ‘fill’도 같은 히브리어 ‘말레’를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을 읽는 사람이 히브리어 성경과 대조하면서 그 곳을 읽다 보니 한 곳은 ‘fill’로, 다른 곳은 ‘replenish’로 쓰여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말레’로 동일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히브리 사람(이스라엘 사람)에게 단어가 다르면 뜻이 다른데 왜 ‘말레’라고 똑같이 썼느냐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영어로는 다른 단어를 썼더라도 우리말로는 같은 단어 ‘채우다’로 쓸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나 우리나 “너희는 구분해서 써라. 우리는 구분 안하고 쓴다. 우리 말로는 같은 단어라서 구분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언어가 발달하기 때문에 원문에는 구분되어 있지 않은 단어라 할지라도 후대에 와서 그것을 구분해서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였다면,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분해서 표현하기를 원하셨다면, 어떻게든 구분해서 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말레’란 말로 표현할 당시에는 개념상으로는 달리 생각하지만 용어가 ‘말레’라는 단어만 있어서 그 다른 개념들을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겠지만, 그것을 영어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영어로 옮길 때 다른 개념을 명확히 드러내도록 표현할 수 있어서 그렇게 했다면, 우리말 성경을 번역할 때에도 그것을 우리말이 수용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겠습니다. 단, 개념 자체가 정말로 다른 개념이라서 다른 단어로 구분해서 표현했는지는 먼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이면 성경의 첫 장입니다. 거기서 ‘fill’이라는 단어가 22절에서 처음 나오고, ‘replenish’라는 단어가 28절에서 처음 나옵니다. 우리가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보통은 사전을 참고합니다만, 성경의 단어는 성경이 스스로 사전의 역할을 하는 ‘내장 사전’ 기능을 중시합니다. 세상 사전이 알려주는 뜻을 참고로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단어는 하나님의 글(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로 그 단어를 쓰셨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상에 태어난 어린 아기가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행동과 표정들을 통해 말을 배우고, 하나 하나 단어의 뜻을 감으로 느껴서 체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말을 배우기 위해 사전을 참고하면서 부모가 하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른이 사전을 보아 가면서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습득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사항을 가지고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파악하면서 하나님께서 쓰신 단어들의 뜻을 알아가게 됩니다. 어린 아기의 언어 습득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을 사용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인데, 그런 중에도 곳곳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단어나 표현 이 있으므로, 그러한 상황이 최초로 나올 때부터 세심히 주의해서 하나님께서 그 단어나 표현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낸 창조물과 날개 달린 날짐승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let fowl multiply in the earth.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창조하시고, 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위의 22절과 28절에서 다같이 ‘채우다’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 두 군데에서 다른 단어를 쓰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파란색 단어들입니다). 이럴 때 “왜지?”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그렇게 하셨는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전에 뒷 부분에 나오는 성경 기록의 용례를 먼저 참고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대로 보아야 나중의 용례로 인한 영향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문장을 자세히 비교해 보겠습니다.
(비교표)
(1)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2)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동사
fill
replenish
주어
큰 고래들과 물들이 낸 창조물과
날개 달린 날짐승 (동물)
남자와 여자 (사람)
목적어
the waters in the seas
the earth
위의 비교표를 보면서 다른 단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주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2. 목적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3. 의미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위의 단서들을 하나씩 검토해 봅니다.
1. 주어가 달라서 다른 동사를 쓴 것일 수 있다.
위 비교표를 보면
문장 (1)은 주어가 동물이다.
문장 (2)는 주어가 사람이다.
** 이 비교를 통해 “동물이 채울 때는 ‘fill’, 사람이 채울 때는 ‘replenish’로 구분해서 사용하는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제 사전을 참고해 봅니다.
1. To make full of, to fill, to stock or store abundantly with, persons or animals [사람 또는 동물로 채우다]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Ladies and gentlemen, please replenish the hall tonight.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밤 홀을 채워 주십시오.
2. To fill up again; to restore to the former amount or condition. [다시 채우다]
Susan was always ready‥to replenish the wallets. 수전은 지갑들을 다시 채우기 위해 항상 대기 상태였다.
사전의 의미 ‘1’을 보면 [사람 또는 동물로 채우다]라고 사용 제한이 보입니다. 즉, 사람 또는 동물이 아닌 것이면 ‘채우다’라는 의미로 ‘replenish’를 쓰는 것은 잘못된 사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황 비교표의 문장 (2)는 사람이니까 ‘replenish’를 쓰면 바른 사용법이고, 그 뜻은 ‘채우다’가 되는군요.
그런데, 상황 비교표의 문장 (1)은 동물이니까 사전에 따르면 역시 ‘replenish’라도 되는데 ‘fill’이 사용되었네요. 처음에 이 단어들을 검토할 때에는 ‘fill’은 별 문제없이 넘어가고 왜 ‘replenish’가 사용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지금 보니 사람이나 동물이면 ‘relenish’를 쓴다는 것 때문에 문장 (2)는 당연한 사용법이고, 오히려 왜 문장 (1)에서는 ‘replenish’가 아니고 ‘fill’이 사용되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2015-04-27 20:07:23 | 최상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형제님의 글을 읽고나서 창세기를 읽어보니
하나님의 창조세상이 더욱 웅장하고 감동스럽습니다.
정말 우리말은 영어가 따라올 수 없는 오묘함이 많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2015-04-27 17:33:37 | 김영익
최상만 형제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 유의지와 자유 분방한 창의적 사고의 관점에서 성경 번역의 '오류'와 성경 번역의 '차이'를 명쾌하게 지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귀한 시간 할애해서 모두에게 유익한 좋은 글을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내용 중) "교리가 달라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하고 공연한 번역 시비를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2015-04-27 14:35:57 | 한원규
최상만 형제님,
영어의 실 생활권인 호주 현지에서 느꼈던 영어와 한국말의 시제의 차이를 매우 정교한 비교 분석으로써 풀이해 주시니 쉽게 이해가 가며 나아가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할 때 번역자의 고심 또한 이해가 갑니다.
(내용 중) "과거의 사실 속에 현재형 시제를 섞어서 쓸 수가 있으며, 이것이 오히려 글의 재미나 몰입도를 높여 줍니다. 그래서, 어법상으로 이런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수사 기법 또는 표현 기법이라고합니다.수사기법, 또는 표현기법 이라고 합니다."
좋은 내용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5-04-27 11:28:24 | 한원규
1.불필요한 반복은 피한다
2.정확성이 훼손되지 않은 범위내에서 읽힘성을 최대한 살린다
3.문체는 의미전달에 적합한 형태를 취한다
는 원칙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유익한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4-27 00:05:39 | 박선규
성경에 대한 권위를 유지해가는 것도 우리의 믿음의 선택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것을 형제님의 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좋은 글을 남겨주셔서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감사해요~~^^
2015-04-27 00:03:33 | 김상진
형제님의 선한 열정이 담뿍 담긴 글을 저는 이제야 귀가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
먼저 형제님! 여러 가지로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시간을 내고 노력을 더 하여
글을 잘 정리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흠정역 성경이 어느 특정인의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그럴듯한 대의명분으로 포장해도 결국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소모적인 논란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에 의해 번역된 성경이라 해도 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한국인이 모국어로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 증거로 흠정역 성경은 가장 신실하고 정확하며 건전한 번역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안다면 설혹 부족함과 아쉬움이 보여도
서로 힘을 합하여 보완하고 더 온전하게 만들어가면
마지막 때 우리는 이 은혜의 열매로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사색당파의 싸움이 끝내 조선을 침몰시켰듯이
끊임없는 소모적 논쟁의 길로 나아가느냐
사람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길로 나아가느냐는
오로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최상만 형제님의 지혜와 용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전염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앞으로도 귀한 글 기대합니다.
2015-04-26 23:57:06 | 김대용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우리 말로 바르게 번역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 처럼 성경을 바르게 변호하는 신실한 성경 지킴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최상만 형제님! 앞으로도 좋은 글을 계속 써 주시길 바랍니다.
샬롬
2015-04-26 20:41:22 | 차대식
자매님, 안녕하세요?
이곳은 짧은 봄이 머물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금방 더워질 것 같습니다.
가끔 뉴질랜드와 모임 사진도 좀 올려 주세요~.
2015-04-26 12:55:56 | 김재욱
이렇게 설명해 주시니 막혔던 마음이 시원하게 뚫어지네요.
한국말의 깊음이 영어의 단순함과는 차이가 크네요
형제님 감사합니다.
2015-04-26 08:28:27 | 김영익
주일 아침 시간에 좋은 글을 접했습니다.
형식적 일치를 유지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우리 말 어법에 맞춘 번역은 힘든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흠정역 성경은 세심한 주의가 기울여 졌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부드러운 마음과 선한 마음을 갖고 가이오와 같이 진리의 동료 조력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5-04-26 07:42:16 | 조양교
네 김형제님도 잘 계시지요?
운동으로 하고 있으니 계속 타고 있지요.
제가 창조 과학을 배우다 흠정역을 알았고 바른 믿음에 들어선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번역전 원문은 KJV일 걸로 생각됨니다.
2015-04-26 07:31:53 | 허광무
형제님 뵌 지도 오래 됐는데 게시판에서 자주 뵈니 좋습니다.
요즘도 외발자전거 타시나요?
국내의 창조과학자들도 흠정역 성경을 보면 훨씬 더 지혜가 넘칠 텐데...
여러 곳에 전해도 잘 안 받아들여서 아쉽습니다.
좋은 자료 많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4-26 00:46:43 | 김재욱
김경완 목사님, 안녕하세요?
여기서 송창식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토함산'은 어법에 관한 설명으로 적절한 예라고 생각합니다.ㅎㅎ
경주도 석굴암이 있는 도시인데 하필 왜 거기 이야기를 쓰느냐, 이럴 필요는 없겠지요.^^
말씀하신 목사님의 좋은 시는 언제 한번 직접 소개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4-26 00:40:01 | 김재욱
재미있네요.^^ 좋은 분석과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저런 걸 말하는 분들도 매우 똑똑합니다.
이런 국어의 어법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 워낙 근거 구절이 없기 때문에.............
직접 성경을 만들어도 저 도표의 오른쪽에 있는 식으로 번역하진 않겠죠.
과거형이 다 표현되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도 창조를 오래 전 과거의 일로 이해하진 않는데
왜 우리말 흠정역을 문제 삼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흠정역 때문에 진리가 가려진 것처럼 주장하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흠정역이 널리 퍼진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4-26 00:35:59 | 김재욱
영어성경을 우리 나라말로 번역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흠정역이 엄청난 수고의 결과가 그대로 반영됩니다. 흠정역의 좋은 부분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쎄시봉 팀중에 한 장로님이 열심히 전도해도 믿지 않고 있는 송창식 씨의 노래 가사로 흠정역의 번역이 좋다고 설명한다는 것이 오히려 흠정역을 안좋게 만드는것 같네요. 차라리 신실하게 믿고 있는 시인이나 가수의 노래가사로 적용하심이 더 좋았을듯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이 있습니다. 별세 하셨지만 월간 현대시조(새시대시조)에 오랫동안 편집장으로 수고하셨고 많은 수상까지 하신분입니다. 고 선정주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의 시는 주로 고난에 대한 시인데 시적 표현이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장로교 목사이었고, 개역성경을 보신분입니다. 과거 제가 흠정역 성경도 알려드렸었습니다.) 참고하시면 우리 나라말의 의미를 더 이해하기가 쉬울것 같아서 글을 남깁니다.
2015-04-26 00:07:39 | 김경완
우리말이 어떻게 영어와 틀린지를 잘 설명해 주셨네요.
기계적 시제의 일치는 우리말 특성상 문장구성이 잘 안된다는 것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번역이 얼마나 어려운지 약간이나마 느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에 맞추어 완전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습니다.
2015-04-25 23:21:33 | 홍승대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멋지지 않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라는 표현은 과거의 어떤 한 때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위와 같이 ‘하시니라’로 표현하면 시간의 경계를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저는 ‘하시니라’가 ‘하셨느니라’보다 훨씬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들에서 사용된 과거형 시제로도 충분히 확인이 됩니다. 저는 이와 같이 현재형과 과거형을 교차 사용한 훌륭한 문체가 “흠정역 성경 문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위의 기행문 (2) 다음에 인용한 송창식의 노래 ‘토함산’의 가사에서도 “해를 안고 앉았어라”,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라고 특유의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송창식 특유의 문체로 토함산 가요의 맛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1) 흠정역 번역
(2) 과거형 준수 번역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2) 땅은 형태가 없었고 비어 있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느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빛이 있으라, 하셨으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셨더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셨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셨으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었더라.
(6) ¶ [하나님]께서 이르셨으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셨고
(7)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셨고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셨으니 그대로 되었느니라.
(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느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었더라.
자, (2) 번처럼 고쳐 놓고 읽어 보니까 어떠십니까? (1) 번처럼 번역한 것을 읽으시고 시제가 과거로 생각이 안 되어서 불편하십니까? 앞서 마태복음 3장과 똑 같은 원리로 실제로는 과거이지만 현재형을 사용하여 창조의 장엄함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1) 번 번역이 더 자연스럽고 수준 높은 번역이 아닙니까? 마태복음과 같은 신약 성경 기록이나 다른 구약 성경 기록에서 이처럼 시제를 섞어 쓴 것을 가지고는 문제삼지 않고 유독 창세기 1장 첫 부분에서 시제를 문제삼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과거 사실을 기술하거나 번역할 때, 과거 사실인 것이 자명한 문맥에서 모든 동사들을 과거형으로 고집함으로써 글의 질을 저하시키고 읽음성을 훼손시키기 보다는 필요한 경우에는 현재형 동사를 쓰더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고 봅니다. 과거형 동사로 충실하게 번역하면 마치 배우는 학생이 작문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준 높은 글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러한 성경 기록을 학생 수준의 번역으로 읽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학생 수준의 번역 성경을 그래도 원하신다면 별도로 그렇게 번역하셔서 원하시는 분들은 그것을 보셔야겠지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신세계역 성경을 만들고, 가톨릭이 가톨릭 성경을 만들듯이 교리가 달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번역이라고 한다면 말릴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교리에 맞는 성경으로 번역하는 수밖에요.
그러나, 성경 번역에 임하는 사람이 명확한 교리적 주관이 없이 단지 영어 실력과 한국어 실력만 있으면 성경 번역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의 딸이 자신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처녀로 죽음을 애곡했다고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면 ‘오역’ 또는 ‘흐지부지역’이 될 수 밖에 없는 사태가 생기니까요. 따라서, 교리가 달라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하고 공연한 번역 시비를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현재의 번역이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는 최상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무랄 데 별로 없이 아주 잘 된 번역이며,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이 지금으로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보다 더 잘 가꾸고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도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도 주셨다는 생각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흠정역 성경을 받아 들이고 아끼게 되기를 바라고, 아울러 한국 교회에서도 기존의 개역(개정) 성경을 버리고 흠정역 성경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면 합니다.
바른 성경 불모지에서 수십 년 동안 바른 말씀이 없어 목말라 하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제대로 된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2015-04-25 23:06:30 | 최상만
성경의 문체
(1)
천년의 한이 서린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다
(경주 고적 답사기)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짬을 내어 경주를 찾았다.
가는 차편에 무르익은 산야도 구경할 겸 부산 해운대역에서 동해남부선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출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타는 사람들이 있는지 기차가 가지를 않는다. 나처럼 관광하러 나선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서민들이 여기 저기 몸에 지고 이고 타서는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철커덕, 철커덕, 쿵, 쿵, 철커덕 , 철커덕, 쿵, 쿵
어릴 적 수학여행 갈 때 탔던 완행열차 기억이 난다.
…………………………………..
………………………
(2)
드디어 토함산 정상에 오르다
버스가 석굴암까지만 운행하고 토함산 정상까지는 도보로 가야 한다고 해서 석굴암을 둘러본 뒤 짐을 가볍게 하려고 이것 저것 요긴하지 않은 무거운 것들은 배낭에서 꺼내어 버렸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돋아난다. 앞서 가던 사람들 중에서도 연세가 드신 분들은 길 옆에 자리를 펴고 쉬고 있는 분들도 있다. 나는 그래도 아직 초로에 접어들기 시작한 나이라 내친 김에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쉬지 않고 계속 걸어 올라갔다. 이제 막 피로가 쌓여 지치나 보다 하는데 눈 앞에 토함산 산봉우리가 보인다. 여기서 쉴 수가 없어 마지막 힘을 내어 힘들게 정상까지 올라가니, 오! 눈 앞에 탁 트인 하늘과 그 하늘 아래 저 멀리까지 울창한 숲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수려한 그림이 따로 없다.
토함산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가슴속에 품었어라 세월도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 터져 부서질 듯 미소짓는 님의 얼굴에는 천년의 풍파세월 담겼어라 바람속에 실렸어라 흙이 되어 남았어라님들의 하신 양 가슴속에 사무쳐서 좋았어라 아 아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흘려 올라라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받쳐라산산이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힘차게 뻗었어라 하늘향해 뻗었어라팔을 든 채 이대로 또다시 천년을 더하겠어라세월이 흐른뒤 다시 찾는 님 하나 있어천년 더한 이가슴을 잊고 서게 아 아
(3)
해외 조기 교육 일화
우리 집이 호주로 이민 온 것은 큰 딸이 5학년 때였습니다.
아이들 영어 습득을 생각해서는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좋았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큰 딸이 철이 일찍 들어서인지 부모들 말을 잘 따라서 학교 다녀 와서도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고, 정확한 발음이 잘 안 되는 단어는 혼자서 짬나는 대로 몇백 번씩 중얼거리며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큰 딸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교 수업도 잘 따라가고 공부도 곧잘 하게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제 웬만큼 원어민 발음 가까이 영어를 하게 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오후에 바깥에 나가서 있던 딸아이가 자기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는 바깥에서 엄마랑 저녁 식사를 하자고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메뉴니 시간이니 장소니 이야기를 하고서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해서는, “엄마, 오실 때 아빠 가지고 와요.” 합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지 그만 깔깔깔깔 웃습니다. 저는 휴대폰 소리가 커서 다 들렸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아내가 멋적은 듯이 “얘가 영어가 웬만큼 되니까 한국말을 잊어먹나 봐요.” 합니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이 “혀가 꼬인다”고들 하죠. 두 가지 언어의 개념이 섞이는 때가 있는가 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Come together with Dad.”라고 할 건데, ‘with’ 다음에 사물이 나오면 ‘가지고’라고, 사람이 나오면 ‘함께’라든지 ‘데리고’라고 해야 하는 걸 혼동해서 말이 헛나왔나 봐요. 다행히, 그런 고비를 지나고서 지금은 우리말도 영어도 막힘없이 잘 하고 있습니다.
위의 세 편의 짧은 이야기 중 두 편은 기행문 형식이고, 마지막 한 편은 수필 형식입니다.
기행문 형식의 두 글은 제목을 “~하다” 형식으로 적었는데, 글의 제목으로 흔히들 이렇게 동사 원형을 쓰죠.
글의 내용을 보면, 모두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기술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중간 중간에 현재형 표현이 섞여서 나옵니다.
(1) 기차가 가지를 않는다,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완행열차 기억이 난다 – 처음에는 과거형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아예 현재형으로 가버렸습니다.
(2)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돋아난다, 쉬고 있는 분들도 있다, 눈 앞에 토함산 산봉우리가 보인다, 울창한 숲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수려한 그림이 따로 없다 – 과거형으로 했다가 현재형, 또 과거형으로 갔다가 현재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글들을 읽으실 때 부자연스럽다거나, 문법(시제)이 틀렸네 하면서 읽으신 분 있으십니까?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제를 일치시켜야 올바른 글이라고 한다면 모르겠으나, 초등학생들이 글을 배우는 단계가 아니라면 글의 성격에 따라, 또 글의 전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과거의 사실 속에 현재형 시제를 섞어서 쓸 수가 있으며, 이것이 오히려 글의 재미나 몰입도를 높여 줍니다. 그래서, 어법상으로 이런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수사 기법 또는 표현 기법이라고합니다. 과거의 사실을 마치 현재 사실처럼 묘사 또는 표현함으로써 그 글을 읽는 독자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고, 독자로 하여금 글 속에 몰입하게 하는 기법이지요. “기행문을 쓸 때는 현재형으로 써라.” 작문 교사의 작문 지침입니다.
마지막 글은 기행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과거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느라 글을 쓰다보니 저도 모르게 현재형으로 써진 부분이 있습니다.
[“엄마, 오실 때 아빠 가지고 와요.” 합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지 그만 깔깔깔깔 웃습니다, “~ 한국말을 잊어먹나 봐요.” 합니다]처럼 저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글이 써지고, 읽으시는 분들도 했습니다, 웃었습니다, 했습니다로 쓴 것보다 더 현장감있게 읽게 됩니다. 마치 옆에 함께 있어서 보는 것처럼요.
이렇게 과거 사실인데 현재형으로 썼다고 해서 그 글을 읽는 독자가 현재 사실인가 보다 하고 읽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집에서 TV로 영화를 볼 때, 큰 것일수록 더 실감나게 보며, 비싼 돈을 내고 영화관에 가서 대형 TV를 보면서 웅장한 사운드를 들으려고 하는 이유도 모두 현장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눈 앞에서 펼쳐지는 영화 화면의 스토리를 현재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록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생생하게 눈 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현실처럼 느낄 지언정, 그 장면들이 과거에 영화 촬영장에서 찍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이치를 모르고 “과거 사실을 현재 사실로 기술했으니 잘못한 거다 고쳐라” 이러면 정말 갑갑한 노릇이죠.
이러한 원리로 성경 번역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고어체를 사용하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보다 생생한 현장감과 경우에 따라서는 장엄함을 전달하려고 수사 기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래 성경 말씀 마 3:13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은 과거 사실이지만 시제를 과거로 해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셨거늘”로 하면 잘못된 우리말 표현입니다. 14절도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가 올바른 우리말이지 “요한이 그분을 말렸으며 일렀으되,”로 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살펴 보겠습니다.
(1) 흠정역 번역
(2) 과거형 준수 번역
(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
(14)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매
(15)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시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더라.
(16)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17)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3)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셨거늘
(14) 요한이 그분을 말렸으며 일렀으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였으매
(1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어 그에게 이르셨으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셨으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였더라.
(16)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셨을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왔었어 자기 위에 내려앉았는 것을 그분께서 보셨더라.
(17)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었어 이르셨으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위의 두 가지 번역을 각각 차분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럽고 보다 실감나는 번역입니까? 제가 읽어 보니 (2) 번 번역은 너무 부자연스럽고 지나간 과거 이야기가 되어서 현실감도 안 나고 우리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1) 번 번역을 읽으시면서 그 내용이 현재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셨습니까 아니면 과거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셨습니까? 현재 사실이라고 생각하신 분은 아무도 안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를 교차 사용(시제 교체 기법)하고 있기 때문이죠. 문장은 원활하게 하면서도 뜻은 손상을 주지 않는 뛰어난 표현 기법입니다.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양치는 하지 않고 대신 가글만 하고 세수는 간단하게 하고서는 버터 바른 빵 한 조각만 먹고 전철 타지 않고 택시 타고 사무실로 갔습니다.
영어로 바꾸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 Because I got up late this morning, I did not brush my teeth, but just gargled with water instead of it and washed my face quickly, and ate only a piece of bread and butter, and went to my office not by subway but by taxi.
이 영어를 다시 시제를 정확히 살려 우리말로 직역 형식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 나는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양치를 안 했고 그 대신 물로 가글만 했고 빨리 세수했고 버터빵 한 조각만 먹었고 전철을 탔지 않고 택시 탔고서 사무실에 갔다.
번역도 잘 되지 않네요. 아무튼 영어가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 과거로 바꾸어 번역하면 우스꽝스런 우리말이 됩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우리말의 특성을 살려서 시제를 융통성있게 사용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방금 든 예는 하나의 문장에서는 마지막 말만 시제를 살려 주고 이전의 동사나 형용사는 현재형으로 사용해야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시제를 언급하는 말이 한 마디만 있어도 그 문장 안에 사용된 말들이 그것과 동일한 시제이라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문장에서 이런 식으로 시제를 언급하듯이, 한 문단이나 일정한 범위의 글 안에서도 시제를 파악할 수 있는 언급이 있으면 독자는 그것으로 다른 말들의 시제도 손쉽게 파악하고 글을 이해하기 때문에 영어처럼 낱낱이 시제를 맞추어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은 우리말의 ‘시제 생략 기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말 사전에서 ‘공부했다’라는 단어를 표제어에서 찾으면 그런 말이 나올까요? 안 나옵니다. 대신 ‘공부하다’만 나옵니다. 영어 사전에서도’studied’를 표제어로 찾으면 안 나옵니다. 대신 ‘study’만 나옵니다. 이른 바 ‘동사 원형’만 나오지 현재형이나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표제어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동사 원형으로 말을 하면 잘못된 표현이 됩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나는 어제 열아홉 시간 공부하다.”라고 하면 그 친구가 이상하다고 볼 것입니다. 일상 언어에서는 동사 원형에 시제를 나타내는 어미를 붙여서 쓰지요. 과거 시제로는 “나는 어제 열아홉 시간 공부하였다.”처럼 쓰고, 현재 시제로는 “나는 지금 밥을 먹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지금 밥을 먹는다.”라고 씁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에는 동사 원형을 쓰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밥을 먹다 말다 하니?”처럼 쓸 때도 있고, 이 글의 첫 번째 기행문 (1)의 제목처럼 “천년의 한이 서린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다”라고 쓸 때도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을 “~ 경주를 찾다”라고 동사 원형을 썼다고 해서, 미래형인가 아니면 현재형인가 하면서 고민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당연히 과거를 이렇게 멋스럽게 혹은 뭔가 그럴듯하게 썼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다.”가 현대 문학 작품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가 고어체를 채택한 동일한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의 문체 계속되는 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4026
2015-04-25 23:01:25 | 최상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