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만 형제님,
명쾌한 논리적 분석에 감탄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지혜로 하나님의 성품과 기록된 바 말씀에 따라서 충분한 정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성경 연구를 해주신데 대해 성도들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샬롬!
2015-04-24 23:38:34 | 한원규
형제님, 멀리 호주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어 주시니 은혜가 됩니다.
단순히 보나 상식으로 보나 세밀하게 분석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관된 법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순리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자주 좋은 글로 뵙기를 바랍니다~.
항상 평안하세요. 감사합니다.
2015-04-24 23:34:30 | 김재욱
좁은 길 (The narrow road) :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론이 걸어가는 길
Ken HamPresident of AiG
현대의 복음주의가 6일 창조에 관하여 타협을 하는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창세기에서 비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견해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이간시키지” 말라고 항변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자기 교회 사람들을 우리 세미나에 보내서 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듣게 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와 젊은 지구 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우리의 세미나를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외쳤다! ”단지 본질적인 요소만 의견이 일치한다면 이러한 분열 없이 함께 일할 수는 없을까요?”
”본질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거듭났다면, 그는 창세기의 내용을 당신이 믿듯이 믿고 있지 않은 경우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세요?” 나는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내가 창세기에 대해 믿는 바와 똑같이 그들이 믿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당신이 창세기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입니다. 믿어야 할 본질적인 내용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때 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요?””우리의 죄들을 위해서요”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죄’ 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십시요.
그녀의 대답은, ”음,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내가 계속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반항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예, 물론이지요. 창세기에 기록된 바대로 문자 그대로의 사람과 뱀, 선악과 등이 있었던 실제의 동산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죄에 대한 기원은 없다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했다. ”사람들이 거듭나서 천국에 가게 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원죄‘를 믿는 것이 본질적인 요소 인가요, 아닌가요?”
”요즈음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점점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일치되는 모든 영역을 묻어버리고 같이 일할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요청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단지 사소한 교리상의 차이를 치워놓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역에 있어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심하게 멀어지고 있음을 항의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에 입각한 몇 가지 교리를 살펴보더라도,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사소한 논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 (고전 15:21-22)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전적인 이유는 (문자 그대로의)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罪性)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심으로, 성경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26절)라고 말한 (육체적) 죽음을 정복하셨다. 오래된-연대 이론이 옳다면, 하나님은 수십억 년 동안의 죽음과 고통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를 ‘심히 좋았더라‘ (창 1:31)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는가?
결혼. (막 10:6-9) 예수님은 (수백만 년 이후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문자 그대로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인용하고 계신다.
회복. (행 3:21; 계 21:4, 22:3) 오래된 연대의 지질 시대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고통이 오랜 세월 동안에 계속 있어왔다. 최초의 장소에 죄가 없었고 죽음이 없었던 세상이 결코 없었다면, 모든 사물은 그런 세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성경의 신뢰성. 최고의 히브리 학자들은, 창세기가 정확히 우리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데에 만장일치 이다.[1]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수천 년 간 잘못 인도했었다고 거부했던 자들이 아닌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조과학운동,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음(따라서 지구는 젊다) 등의 견해에 반대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적인 논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창조과학자들을 편협하고 쓸 데 없이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슬프게도, 이런 공격 중의 몇 가지는 스스로 ‘진화론을 반대하는 창조주의자‘ 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예를 들어, 휴 로스(Hugh Ross) 박사는 점진주의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로서, ‘빅뱅(Big Bang)‘을 믿고, 노아 시대의 홍수가 국지적인(a local Flood) 것이었으며, 죄가 들어오기 전에 수백만 년 동안 죽음과 피흘림이 있었고, 아담과 하와 이전에는 인간을 닮은 다양한 ‘혼이 없는‘ 존재들이 있어서 자기들의 시체를 묻었고, 동굴 벽화를 그렸다고 믿고 있다. ‘창조와 시간(Creation and Time)‘ 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의 교회가 할례 때문에 분열되었던 것처럼, 요즘 세기에는 창조의 연대에 관한 논점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음을 본다. 할례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주의를 방해하였듯이, 요즘에도 젊은 지구 창조론이 그러하다.”[2]
그런데, Answers in Genesis와 같은 사역이 급격히 성장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복음주의의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수년간 창조과학 사역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이 창세기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돌아온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편지를 받아왔다. 그 중에는, 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는 오래된 연대 개념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기독교인들에게) 들었던 해답이, 성경을 왜곡하여 현존하는 통설에 끼워 맞추려는 시시한 시도였기 때문에, 이전에 기독교를 포기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창세기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오늘날 그들에게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 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때는 기독교의 ‘근본‘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붙여졌던 명예로운 용어였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테러행위 및 광신과 연합함으로써, 이제는 그것이 극단주의 및 편협한 신앙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미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으므로, 차라리 나는 역사의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 안에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 ‘계시론자(revelationist)‘로 불리고 싶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에서도 그런 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1994년의 AP 연합통신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관한 새로운 바티칸 문서는 근본주의자들의 접근방법이 왜곡되고, 위험하고, 인종차별로 이끌 수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교황직속의 성경위원회가 쓴 그 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일종의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로 유도하고 있다.... 근본주의자적 접근은, 성경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돋우므로 위험하다.”[3]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또 다른 ‘공격‘으로, ‘창세기: 살아있는 대화‘ 라는 빌 모이어(Bill Moyers)의 프로그램이 1996년 10월에 미국 공영 TV에서 방영되었다. 이 쇼는 하나님의 속성과 동기에 대해 경멸적인 판단을 담고 있는데, 창세기를 실제의 역사라고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슬람인, 자유주의 기독교인 및 무신론 주석자들의 의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4]
모이어의 연재물에 관한 Newsweek 지의 기사는 요즘의 기독교 세계에 대해 재미있는 논평을 하였다.
”종파에 대한 충성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이론을 오히려 신학교에서 퍼뜨리고 있다....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거의 절대성을 잃어가고 있다.” [5]
성경적 창조 운동(Biblical creation movement)은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literal Genesis)를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를 고수하며, 교회나 속세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세속적인 학문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압도적으로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 세속적인 이론(증거 없이 주장되는 지구의 나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재해석되기 시작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재해석하는 문이 열리게 되어, 궁극적으로 모든 진리가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최근에 나의 동료가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선도적인 설교가 중의 한 분이며, 매우 영향력 있는 목사님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반대하는 그 분의 입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성경의 권위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훼손된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 주제는 태고의 지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스터플랜’ (Masterplan,창세기를 다룬 그의 책)에서 내가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 분열되어져 있는 의견들이 복음주의 안에서 연합되고자 하는 바램을 반영한 것입니다.” [6]
슬픈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관점을 세속적인 견해와 타협하며, '연합'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는 동안에, 비기독교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World 지가 보도하기를 빌 모이어의 창세기 프로그램에 나온 한 이슬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믿음을 타협하기를 거절한다. 이슬람은 최소한 우리의 교리를 완전하게 유지하기를 원한다. 유대교는 끝없는 문답(dialogue)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이며, 기독교는 변명과 혼돈 속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7]
우리의 서구 문명에는 갈라진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 그 틈은 교회와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려는 문자적 창조론자 같은 교회와 나머지 교회 및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다.
분열은 항상 나쁜 것인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2:5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 말씀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고자 할 때는 약간의 분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문자적 창조론자들이 오늘날의 보수적인 교회에 있어서까지도 소수파로 여겨진다는 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3-14장의 구원에 관한 말씀 속에서, 넓은 길로 열려있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선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소수의 사람들이 찾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논점에 관하여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의 멸망적인 타협 속으로 황급히 돌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종종 그 말씀을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에 따르는 것은 항상 ‘좁은 길(narrow road)‘ 인 것이다. 당신은 진정 어느 길에 서 있는가?
References and notes
1. Oxford Hebrew professor James Barr has written (in a letter to David C.C. Watson in 1984) that he knows of no professor of Hebrew at any world-class university who thinks that Genesis was meant to convey anything other than an actual account of a real, recent creation in six ordinary days and a global Flood. Like Barr, that does not mean they actually believe Genesis to be true, just that they are unanimous about what it means.
2. Dr. Hugh Ross, Creation and Time, Navpress, p. 162, 1994.
3. Quoted in Foundation, News & Views XV(4), July–August, 1994. On top of this, the Pope’s announcement in October 1996, saying that he saw no conflict between evolution and Christianity (so long as God created the soul of man) provided the media with more ammunition to continue to try to alienate creationists from what it sees as ‘mainstream Christianity.’
4. Time, p. 72, October 28, 1996, reported: ‘ ... Moyers decided not to include Christian Fundamentalists: ... It would have struck people as the same discourse they’ve been hearing for the last 15 years.’ Earlier, the same article stated: ‘Much of the recent popular controversy around Genesis has focused on the issue of whether the Creation should be understood literally. That debate has tended to obscure a further set of issues hinging on the character of both God and the patriarchs.’ Again, literal creationists are made out to be a stumbling block to people understanding the ‘real truth’ of the Bible.
5. Newsweek, October 21, 1996, p. 76.
6. Correspondence from Pastor Roy Clemens, Eden Baptist Church, Cambridge UK September 25, 1996.
7. World, October 26, 1996, p. 23.
*참조 : The Reformation of the 16th Century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reformation-sixteenth-century
Progressive creationist anthropology: many reasons NOT to believe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3/j20_3_31-38.pdf
Western culture and the age of the earth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21/
출처 : Creation 19(2):47–49, March 1997 March 1997URL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9/i2/narrow.asp번역자 : 이종헌
2015-04-24 23:28:12 | 허광무
네 좋은 분석 감사 합니다.
하니님께서는 사람을 살아있는 희생물로 받으십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히 13:1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곧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민 8:11) 그리고 아론이 레위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헌물로 {주} 앞에 드릴지니 이것은 그들이 {주}를 위해 섬기는 일을 집행하게 하려 함이라.
(민 8:13) 레위 사람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주}께 헌물로 드릴지니라.
(민 8:21) 레위 사람들이 정결하게 되어 자기들의 옷을 빨매 아론이 그들을 {주} 앞에 헌물로 드리고 또 그들을 위해 속죄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니
2015-04-24 23:23:49 | 허광무
제가 풀어본 입다 딸의 생사 여부
다들 성경 기록대로 믿으면 쉽게 나오는 결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정반대의 주장이 평행선을 그으며 합쳐질 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두 가지 결론 중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는 것입니다.
우선, 상반된 견해들을 요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상반된 견해 요약)
검토 항목
번제 헌물 NO
번제 헌물 YES
1
(30절)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서원 당시 입다 생각에 사람은 포함하지 않고 서원했다
사람도 포함했다 또는
사람을 대상으로 서원했다.
2
(31절) ‘무엇이든(whatsoever)과 그것을(it)’의 의미
사람은 포함 안 된다
사람도 포함 된다
3
(31절) 번제 헌물로 드려졌나
아니오
예
4
(37절) bewail my virginity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자기의 처녀로 죽음으로 인하여 애곡하고
5
(39절)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사람은 번제 헌물로 드리지 못하므로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드렸다.
번제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대로 불로 태워 드렸다.
6
(39절)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she knew no man)
결혼하지 않았다
처녀로 죽었다
7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나흘씩 애곡한 이유
입다의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처녀로 평생을 살게 되었기 때문
입다의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처녀로 번제 헌물이 되어 죽게 되었기 때문
* 요약해서 언급한 것 외에 세부적으로는 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상반된 견해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번제 헌물로 드려졌느냐, 아니냐’입니다.
성도의 하나됨을 위하여 진실 찾기에 나서 보렵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일곱 명의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예수님께 했던 성경 기록이 생각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즉답을 하지 않으시고 먼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므로 잘못하느니라. (마 22:29)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못하는 것을 먼저 지적하시고 나서, 성경 기록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는 대답으로 그들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입다의 딸 문제를 분명하게 풀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요점 1: 성경 기록들을 알면 잘못하지 않는다.
요점 2: [하나님]을 알면 잘못하지 않는다.
-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포인트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범위를 좁혀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이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나라 (골 1:10)”고 권면하셨습니다.
※ 위의 (마 22:29)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요점 1’을 사용해도 잘못하지 않고, ‘요점 2’를 사용해도 잘못하지 않으며, 두 가지 요점을 모두 사용해도 잘못하지 않습니다. (논리식 “(NOT A) AND (NOT B) = (NOT C)”의 대우(對偶) “A OR B= C”에 해당됩니다. 몰라도 됩니다.)
이제부터 시험을 보겠습니다.
(시험 1) ‘요점 1’에 따라 성경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드려졌다고 결론이 나면 ‘YES’ , 아니면 ‘NO’를 답안지에 적어 주십시오.
네. 제출된 답안지를 보니까 YES도 있고 NO도 있네요. 시험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시험 2) ‘요점 2’에 따라 성경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드려졌다고 결론이 나면 ‘YES’ , 아니면 ‘NO’를 답안지에 적어 주십시오.
네. 이번에도 답안지에 YES도 있고 NO도 있습니다.
제출된 답안지를 토대로 (시험 1)과 (시험 2)에서의 응답 결과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번제 헌물로 드려졌으면 ‘Yes’ , 안 드려졌으면 ‘No’)
응답
유형
[하나님]을 알고
얻은 답
성경 기록들을 통해 얻은 답
설 명
A
YES
YES
논리적으로 OK.
하나님은 악하시고, 인신 제사를 받는다.
B
NO
YES
예수님께서 주신 요점들을 잘못 사용함
C
YES
NO
예수님께서 주신 요점들을 잘못 사용함
D
NO
NO
논리적으로 OK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신 제사를 안 받으신다.
l (요점 1)을 사용하든 (요점 2)를 사용하든 답은 동일하게 나와야 함.
정답: (응답 유형 D)
채점관: 히브리서 기록자 (바울)
채점관 평가(추정):
(응답 유형 A)
입다의 서원에 관한 성경 기록을 잘못 해석하하고, 하나님도 사람을 번제 헌물로 받으시는 악한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있으므로 영적인 분별력이 없음.
입다가 사람을 번제 헌물로 드렸다고 함으로써 믿음의 본으로 기록한 채점관에 정면 도전하고, 차라리 입다 보다는 입다의 딸의 믿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하므로 낙제점을 줍니다.
(응답 유형 B)
입다가 딸을 번제 헌물로 드렸는데 그것을 받으신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응답 유형 C)
입다가 딸을 번제 헌물로 드리지 않았다면서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라고 하면 믿지 않거나 안티 크리스천인가 봅니다. 시험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응답 유형 D)
성경 기록을 잘 해석하였고, 하나님도 올바로 알고 있어서 영적인 분별력이 좋습니다.
채점관이 히브리서에 믿음의 본이 되는 특출한 사람들 중에 입다를 올린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리겠다는 서원을 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한 믿음이 후대에까지 길이 빛나는 귀한 것이기 때문에 본받으라고 한 것임.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죽는 것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죽는 믿음을 보였다면, 그 믿음은 아버지 입다 보다 더 훌륭한 것일 텐데 번제 헌물로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입다의 딸을 기록하지 않았음. 사사기 11장을 읽을 때도 입다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는데 입다의 딸 이름은 기록하지 않은 이유도 서치 라이트를 입다의 딸에게 비추지 말고 입다에게 비추려는 의도임을 알아야 함. 여리고 정복 때의 창녀 라합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채점관인 나도 그 이름을 다시 거명하였지 않았는가. 입다의 딸이 숭고한 희생 정신과 투철한 믿음으로 번제 헌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면 왜 그녀의 이름이 감추어져 있겠는가.
말로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고 하면서도, 성경 기록에 하나님께서 인신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면 성경 기록 해석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교묘하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아버지되신 하나님이 식인종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먼저 나서서 사람을 번제 헌물로 받아 잡수신 하나님을 광고한다면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 건가요? 과연 하나님의 자녀 맞습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무리에게서 속히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거짓 교사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2015-04-24 19:00:27 | 최상만
아담의 범죄 이전에 사망이 있었는가?
: (Was there Death Before Adam Sinned?) Kent Hovind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689
2015-04-24 11:09:38 | 허광무
왜 6일 창조에 그렇게 부담을 가질까?
김무현한국창조과학회 미주 텍사스지부장 Texas A&M 대학 교수 해양|토목 공학 박사
대부분의 현대 크리스챤들은 성경이 말하는 6일창조에 엄청난 부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진화론 일색의 과학이 수십억년의 우주와 지구를 과학적 사실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어차피 모든 것을 자연과정(natural process)으로 설명하여야 한다. 크리스챤은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초월적(supernatural)창조주를 믿는다. 그것은 과학의 범주를 벗어난다. 그래서 창조과학은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할 부담이 없다. 단지 이 피조세계에 남아있는 창조와 설계의 흔적들을 말할 뿐이다. 재판정에서는 무엇인가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쪽이 엄청 부담을 갖는다. 그 증명의 부담(burden of proof)은 모든 것을 자연 현상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진화론자들에게 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그들은 결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챤들이 6일창조 문제에 자신을 갖고 접근하기를 바란다.
창세기의 내용 중 진화론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공격을 받는 부분이 창세기 1장의 6일간의 천지창조 내용일 것이다. 전능자를 철저히 배제하고 모든 기원과정이 수십 억 년에 걸친 자연과정(Natural Process) 만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적 자연주의자들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아성이 바로 지질학적/우주적 오래된 연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오래된 연대는 우주/지구/생명의 진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정당화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전제이다.
그들은 지난 200여 년에 걸쳐 과학이라는 학문분야에서 전능적이고 초월적인 창조주의 존재나 지적설계를 철저히 배제해 왔다. 모든 기원이론은 자연주의 관점에서만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고, 그 체계 안에서만 학문의 탑들을 쌓아나갔었다. 그 결과, 모든 자연의 현상 및 기록들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논리적 해석을 하는 대신, 전능자의 지적설계 및 초월적 창조가 철저히 배제된 학문체계로 현대과학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들은 오래된 우주/지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격변의 상황이 없이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는 균일론의 가정하에서 성립된 추론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젊은 우주/지구를 보여주는 자료들도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의 배경신념과 모순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러한 자료들은 철저히 배제/무시당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성경적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은 철저히 왕따를 당하며 지적인 조롱과 핍박 속에 놓이게 되었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로마서 15:3)
이러한 과학의 진화론을 중심으로 한 dogma 때문에 많은 신학교와 교회에서 창세기의 해석을 현 과학의 패러다임(paradigm)과 애써 끼워 맞추려는 시도와 노력들이 많이 있어 왔다.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 간격이론(gap theory),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 그리고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13)
그중, 유신론적 진화론은 그 자체가 초월적 창조주가 없다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복음적 신앙과 병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암시나 힌트조차 없기 때문이다. 간격이론 및 날-시대 이론은 창세기 1장을 현 과학의 오래된 우주/지구 패러다임과 애써 맞추어보려는 노력인데, 성경적 해석에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현 과학의 패러다임인 진화론과도 병행하기가 쉽지 않은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신명기 4:2)
본인도 한때 날/시대 이론이 더 그럴 듯 할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전능적 창조주께서 그 모든 창조를 수 십억 년에 걸쳐 철저히 자연적 과정(Natural Process)에 의존해야만 할 특별한 이유도 없을 뿐더러, 그에 대한 확실한 과학적 증거도 없다는 사실을 안후에는 다시한번 그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게 되었다. 특히, 재림 후에 이루어질 전 우주적 재창조는 수십억 년이 아닌 단시간에 이루어질 것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주님재림 후의 재창조가 수십억년이 아닌 단시간에 이루어질 것이라면, 태초의 창조도 수십억년이 걸려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전능적/초월적 창조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고 과학의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과학으로는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전능적 창조의 흔적들을 이 자연세계에 남겨 놓으셨다고 했다. 크리스챤 과학자들에게 그것을 탐구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 창조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도 간략하게 그 대략을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여 주셨다.
진화론적 세계관과 과학주의로 철저히 세뇌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6일창조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주위사람으로부터 지성인이 아닌 맹신자라고 놀림을 받을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길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오히려 젊은 우주/지구를 보여주는 자료/현상들도 많이 존재하며, 본인이 그랬듯이 그것들을 다 자세히 공부해 보면 성경적 창조가 더 이상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인류의 모든 역사적 기록이나 유물들은 진화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질학적 세월에 걸쳐 존재한 것이 아니라, 노아 홍수를 전후하여 갑자기 나타나게 된다. 세계 모든 종족과 언어의 기원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노아홍수와 바벨탑 사건으로 더 잘 설명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편 33:6)
창조란 것은 인간의 두뇌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관점만이 절대로 옳다고 Doctrine화 하는 것이 문제가 있을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계시하여 주신 성경을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하며, 그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전체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참으로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13:12 말씀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처럼 창조의 자세한 내용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곳에서 계시록의 24장로들과 같이 그 전능하신 창조주를 다음과 같이 찬양할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11)
한편, 창조와 타락의 중요한 신학적 기초가 창세기 1-3장에 있기 때문에 그 내용 자체가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절대적 진리임을 믿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모세오경을 신화로 보려하는 자유주의적 입장은 근거도 희박한 것이며,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무너뜨리려 하는 사단의 가장 좋은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누구든지 이 계명(구약 특히 모세오경)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19)
인간의 머리에서 추론해낸 진화론이란 가설에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애써 끼워 맞출 필요가 없다. 다음에는 6일창조외의 타협적 성경해석을 도입하는 것이 더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는 예를 날/시대 이론을 통해서 살펴 보려 한다. 날/시대 이론은 진화론이 거세게 과학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던 19세기에 Hugh Miller(1869)등에 의해 제안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휴 로스 (Hugh Ross) 등의 Reasons To Believe라는 단체를 통하여 전해지고 있다.
이 이론은 날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 'yom'이 성경에서 '문자적인 24시간의 날'로도 쓰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어느 불특정한 기간'으로도 쓰일 수 있음에 주목하였다 (창세기 2:4(창조하신 때), 시편 20:1(환난날), 욥기 20:28(진노하시는 날), 전도서 7:14(형통한 날)). 그리고 또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순서와 진화론에서 말하는 진화의 순서에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에서 착안하였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론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순서대로 점진적 창조(Progressive Creation)를 하였다는 것이다. 즉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한 날은 역사지질학의 한 시대 만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지층이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균일적으로 다 만들어 졌으므로, 노아의 대홍수를 지역적 홍수(local flood)로 본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노아 홍수가 결코 지역적 홍수가 아니라고 하신것에 위배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에는 여러 가지 성경적 문제점들이 있다. 히브리 원어 상으로도 yom이 숫자를 나타내는 제한적 형용사(either numeral or ordinal)뒤에 쓰인 경우에는 전체 성경을 통하여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문자 그대로의 날을 의미한다 (이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성경에서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부연설명까지 있음). 또한 출애굽기 20:8~11에 보면, 창조의 six days에 해당하는 yom의 복수형 yamin이 쓰였는데, 그와 같이 복수형이 쓰인 경우에는 한번의 예외도 없이 문자적인 날을 의미한다.
'이는 엿새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출애굽기 20:11)
특히 사람을 창조하여 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왜 특별한 이유 없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랜 지질학적 연대에 걸쳐, 고생대 생물들을 만드시고 다 죽이시고, 공룡을 만드시고 다 죽이시고, 그러한 과정을 밟으셨냐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바로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하던중 본인의 아들이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날-시대 이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병과 고통과 살생과 싸움과 죽음이 아담의 첫 범죄 이전부터 있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오랜 세월을 낭비해가며, 이유 없이 수많은 생물들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등 가장 비효율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이끄시며, 아담까지 오게 하셨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심히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에 조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또한 인간의 불순종의 죄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피조세계에는 질병과 고통과 죽음과 파괴 등이 진행되었으므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죄 때문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이 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창세기 3:16-19)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엇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19-23)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린도전서 15:21-22)
인간의 머리에서 만들어낸 진화론/역사지질학 이란 유사과학에 성경해석을 애써 끼워 맞추려다 보니 오히려 창조-타락-구속-심판/완성으로 요약되는 성경의 큰 물줄기에 큰 흠집을 내게 된다. 그 엄청난 창조가 과학적으로 증명 될수 없듯이 진화도 단지 추론이며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우리 피조물이 초월자가 하신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개미들이 사람이 컴퓨터를 만들고 달나라를 가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과학의 패러다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바란다. 진화는 종교이지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6일 창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경 전체를 바라보기 바란다.
한국창조과학회 자료이어서 관련 성경 구절은 개역성경임.
2015-04-24 11:04:07 | 허광무
오래된 지구의 신 : 점진적 창조론, 간격이론, 날시대이론, 다중격변설...
(The god of an old Earth) Ken Ham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016
2015-04-24 11:00:18 | 허광무
영어로 되어있지만, 이 주제를 잘 설명해주는 사이트가 있어서 첨부합니다.
http://creation.com/from-the-beginning
2015-04-24 08:00:18 | 홍승대
안녕하세요?
이곳 뉴질랜드는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서 남섬에는 눈이 오거나 북섬에는 우박이 오기도 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다시 따뜻한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밤하늘에는 쏟아질 듯한 별들의 향연을 보며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를 감상했지요.
귀뚜라미의 씨르륵거리는 소리가 제법 커져가는 뉴질랜드의 가을 밤은 깊어갑니다.
결실의 계절이라 과일 야채 가게에는 토실토실한 밤들이 그리고 길거리 참나무 아래에는 다람쥐들이 좋아하는 도토리들이 가랑잎 사이로 댁대굴댁대굴 굴러다닙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Bible Believers의 21차 모임을 <아래>와 같이 안내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최종권위로 믿고 읽는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는 성경신자들의 모임에 함께하는 이들이 더해지길 소망합니다.
< 아 래 >
1. 모임 일자와 시간 : 2015년 4월 26일(주일) 저녁 6시
2. 장 소 : ** Awa Road. Kumeu. Auckland
3. 내 용 : 다니엘서 8장-12장
4. 휴 대 전 화 : 027-779-8877(최 문 선)
2015-04-23 21:58:34 | 최문선
한국창조 과학회 간격이론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34&category=B04&orderby_1=editdate+desc&page=9
Soft' gap sophistry
http://creation.com/soft-gap-sophistry
젊은 세계에 대한 증거들 (Evidence for a Young World)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704&category=L04&orderby_1=editdate%20desc&page=10
2015-04-23 17:04:46 | 허광무
사려깊은 답변들과 공유해 주신 자료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잘 살펴 읽어보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2015-04-23 15:06:13 | 한혜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오한 동시에 심오하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세심하게 제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5-04-23 13:46:37 | 김춘섭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 단어들의 뜻을 바르게 찾는 방법에 대해 잠시 글을 쓰며 재창조 논쟁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어떤 분이 ‘replenish’라는 단어가 14세기부터 ‘다시 채우다’의 뜻으로 쓰였다는 글을 보았는데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기에 오늘은 양심이 약한 지체들을 도와야 할 책무가 있는 목사로서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전하다 보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어 성경을 제시하며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신학교 등에서 1-2년 원어 공부를 했다고 마치 자기가 원어를 다 아는 것처럼 자랑하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무시합니다. 20-21세기의 원어학자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16-17세기 영국의 성경학자들보다 원어를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15-16세기의 조선 학자들 즉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 아래서 합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두세 살부터 오로지 한자/중국문학만 공부한 사람들이 현시대 그 어떤 한학자보다 사서삼경, 논어 등을 정확하게 잘 이해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한자/한문 자체를 내 나라말처럼 쓸 정도로 박식하였습니다. 16-17세기 영국의 성경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두세 살 때부터 그리스어/히브리어 교육을 받아 결국 왕실의 귀족이 되고 성경학자/목사 등이 되었기에 원어 구사/번역/해석의 모든 면에서 20-21세기 원어학자들보다 당연히 나을 수밖에 없습니다.
http://keepbible.com/KJB2/View/2Vx?page=6
http://keepbible.com/KJB2/View/2Wf?page=2
이런 간단한 논리는 잘 이해하면서도 단지 영어를 조금 배웠거나 혹은 한국에서 영어 교사/학원 강사 등을 했다는 이유로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미국/영국인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의외로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미국 사람들 중에는 영어 문법을 잘 모르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많은 책들을 읽고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당연히 우리보다 영어 실력이 훨씬 더 나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지식층의 미국 사람들마저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의 지식은 그들이 실제로 구사하는 말과 문화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해당 언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교양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사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전 저자의 생각이나 시대적 배경이 사전의 단어들을 정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그래서 특히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해석할 때는 16-17세기 영국 사람들의 영어 용례를 잘 보여 주는 좋은 사전을 선택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실제 당시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한 단어의 의미를 조금 바꾸어 놓을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재창조론자들이 자주 거론하며 논쟁의 소재로 삼는 ‘replenish’를 봅시다. 이 단어는 진화/윤회/재창조 등이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서구 사회에 소개되던 1850년 이후로 뜻이 추가되거나 다소 바뀌면서 과거에는 없었거나 거의 사용되지 않던 ‘다시 채우다’라는 뜻이 추가되고 사용 빈도가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이런 단어를 접하면 1600년대 그 당시의 뜻이 무엇인지 또 1850년 이전의 미국/영국 사람들은 그 단어를 실제로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고 바로 그 당시의 뜻대로 이해해야 오류 없이 바르게 번역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한국 사람이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1800년대 미국 영어 문법의 기초를 놓은 웹스터(Noah Webster, 1758~1843) 같은 언어학자 겸 사전 편찬자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정치에 흥미를 가지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 뒤 미국의 독자적인 교과서의 필요성을 느끼고 1783년 ~ 1785년 <영문법 강화> 3권을 펴냈습니다. 또한 그는 1806년 백과사전적인 영어 사전을 발행하였고, 1828년 마침내 <노아 웹스터 영어 사전>을 간행하여 사서 편찬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밖에도 그는 미국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 역사 교육에도 공헌하였습니다. 더불어 훌륭한 성도였던 그는 미국 국민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사전을 편찬하면서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영미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라 <웹스터 사전>이라는 귀중한 사전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Noah_Webster
흥미롭게도 그는 사전에 나오는 단어들의 용례를 설명할 때에 그 단어가 킹제임스 성경에 있으면 해당 단어의 킹제임스 성경 구절의 용례를 사전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이 몇 권 되지 않았고 그중에 한 권이 바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사실 오늘날의 미국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다름 아닌 킹제임스 성경이었습니다.
그러면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이 나온 이래로 200년이 지난 시점에 웹스터와 미국 사람들은 ‘replenish’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온라인에 공개된 무료 <웹스터 사전>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http://webstersdictionary1828.com/
이 사전은 ‘replenish’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REPLEN'ISH, verb transitive [Latin re and plenus, full.]1. To fill; to stock with numbers or abundance. The magazines are replenished with corn. The springs are replenished with water.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Genesis 1:28(창1:28).2. To finish; to complete. [Not in use.]
여기서 보듯이 1811년까지 ‘replenish’는 ‘채우다’(fill) 외에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웹스터는 재창조론자들의 애용 구절인 창세기 1장 28절 즉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를 ‘replenish’의 용례로 들고 있습니다. 어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조금 안다고 해서 웹스터 같은 대가보다 잘 알 수 있을까요? 영어 성경 외에는 다른 책을 거의 구하지 못하던 그 당시 미국 사람들은 그 단어를 그렇게 이해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성경 원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영어 단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웹스터가 죽은 이후에 <웹스터 사전>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편찬되며 1900년 이후에 나오는 것들은 ‘replenish’의 뜻에 ‘다시 채우다’를 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여전히 ‘채우다’라는 본래의 뜻이 먼저 나온 다음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최근에 나오는 메리암-웹스터 사전이 ‘replenish’에 대해 정의한 것입니다.
http://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replenish
replenish: 1 a : to fill with persons or animals : stock b archaic : to supply fully : perfect c : to fill with inspiration or power : nourish 2 a : to fill or build up again <replenished his glass> b : to make good : replace
여기서도 ‘replenish’의 1, 2차 뜻은 ‘채우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 주지 않고 무조건 ‘다시 채우다’라고 주장하면 진실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전 및 뒤에 언급될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OED)에 보면 ‘replenish’의 어원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replenish: Middle English replenisshen, from Anglo-French repleniss-, stem of replenir to fill, from re- + plein full, from Latin plenus — more at fullFirst Known Use: 14th century
여기에 보면 ‘replenish’는 뜻이 ‘more at full’ 즉 ‘full에서 더 많이’ 즉 ‘가득 채우다’로 되어 있고 14세기에 처음 사용된 용례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replenish’의 정의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14세기부터 ‘replenish’가 ‘다시 채우다’로 사용된 것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정직한 일이 아닙니다. 조금 뒤에 옥스퍼드 사전을 통해 보여 드리겠지만 14세기부터 ‘replenish’는 거의 전적으로 ‘채우다’의 의미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래아한글 소프트웨어를 쓰시면 그 안의 내장 사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replenish: replenish [ripléniʃ] vt.① 『∼ +목/ +목+전+명』 채우다; 다시 채우다; (연료를) 계속 공급하다, 대다; 새로 보충[보급]하다(with).② (사람·동물이 땅에) 살다, (땅을) 사람으로[동물로] 가득 채우다.┈┈•∼ one's wardrobe 의상을 사들이다.① ┈┈•∼ the fire with fuel 불에 연료를 지피다.㉺∼ed [-t] ―a. (다시) 가득해진, 가득 찬.㉺∼ment [-mənt] ―n. 보충, 보급; 보급물.replenish [ripléniʃ] vt.
일반 사전도 ‘replenish’의 1차 의미가 ‘채우다’, ‘보급하다’임을 보여 줍니다. ‘다시 채우다’는 최근에 이루어진 정의이기 때문에 2차 의미로 나와 있습니다.
동아출판사 사전도 마찬가지입니다.
replenish: 1. 보충[보급]하다 2. <난로 등에> (연료를) 공급하다[대다] ((with)) 3. 채우다; 다시 채우다(refill) ((with)) 컵에 커피를 다시 채우다4. <토지를> 사람으로[동물로] 가득 채우다
자, 이렇게 역사의 사실을 알려주고 이야기해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분들이 있으므로 이제는 영어 사전의 원조요, 이 세상에서 가장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사전은 1000년경부터 영어가 형성되면서 모든 단어들이 사용된 용례를 문헌별, 연도별로 보여 줍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된 20권(한 권이 보통 1500페이지 정도 됨)의 이 사전에는 50만 개의 단어와 250만 개의 인용 문헌이 들어 있습니다.
http://www.amazon.com/Dictionary-Complete-Reproduced-Micrographically-slipcase/dp/0198612583/ref=sr_1_1?s=books&ie=UTF8&qid=1429246894&sr=1-1&keywords=complete+oxford+english+dictionary
컴퓨터가 없던 시절, 미국에서 영어를(우리나라로 말하면 국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다 이 사전 세트를 구매해서 공부했습니다. 이후 컴퓨터 시대가 열리면서 이 책들의 모든 데이터와 지난 20여 년의 용례 데이터를 담은 DVD가 발매되어 현재 4판까지 나와 있습니다. http://www.amazon.com/Oxford-English-Dictionary-Version-Windows/dp/0199563837/ref=sr_1_11?s=books&ie=UTF8&qid=1429246795&sr=1-11&keywords=oxford+english+dictionary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볼 때 어떤 단어의 뜻이 이해가 안 되면 누구라도 이 사전으로 가서 1600년경 당시의 용례를 확인하면 쉽게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전은 어떤 특정 신학/사상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한 단어의 시대별 용례가 그 당시 문헌과 함께 있는 그대로 모두 나옵니다. 사실 이런 사전을 가진 국가는 없습니다. 이런 독특한 특성으로 인해 영어가 만국의 공용어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이 공용어를 써서 자신의 말씀들을 보존하셨습니다.
OED는 여러 인용 자료를 보여 주면서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은 아예 ‘바이블’(Bible)로 표기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create’라는 단어를 치면 다음과 같은 정의와 용례가 뜹니다.
물론 어떤 사전이든 한 단어의 정의는 그 단어의 가장 중요한 뜻부터 맨 먼저 보여 줍니다.
1.a 정의: 무에서 유를 만들다.용례: 1386년 초서(Chaucer)의 ‘Para. T’ 144쪽……1535년 커버데일 성경(Coverdale) 창1:1…드디어 1611년 바이블(Bible) 시51:10……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이미 영국 사람들에게는(또 그들이 지배한 대영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한 바이블’(Bible)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성경 역본들은 모두 틴데일, 커버데일 등으로 표기되었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 1611년이라는 연도와 함께 바이블 그 자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정의는 1.b, 1.c, 2., 3., 4., 5.로 이어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create’라는 단어의 원뜻(1차 의미)이 무엇이고, 영어 문헌에서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어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의 뜻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려면 OED를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한국 사람이 제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OED 사전 편찬자나 웹스터 같은 분을 능가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신봉하는 특정 신학이나 교리를 관철하기 위해 현대판 사전들(그중에서도 특히 자기가 원하는 정의를 담은 것)을 이용하면서 더욱이 1차 뜻은 무시하고 후대에 파생된 2차, 3차 뜻으로 성경의 단어들을 왜곡하려는 분들이 더러 있기에 이번에는 ‘replenish’를 찾아보겠습니다.
다음은 OED에 기록된 ‘replenish’의 정의입니다(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해 정의 자체를 통째로 올리지만 양이 많아서 글 맨 뒤에 기록하였음).
이 단어는 총 10개의 뜻(정의)을 가지고 있고 용례는 1340년부터 나옵니다. 즉 이 단어는 14세기경에 영어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위에서 메리암-웹스터 사전이 말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사실 메리암-웹스트 사전 등의 원천은 OED입니다. 이 말의 1차 뜻은 1-8번, 그리고 10번 정의가 보여 주듯이 ‘채우다’입니다. 이 말은 14세기부터 그렇게 쓰였습니다.
9번의 정의는 ‘다시 채우다’인데 이 용례는 킹제임스 성경 반포 이듬해인 1612년 이후에 있습니다.
이것들이 영어 단어 ‘replenish’의 뜻입니다.
그 어떤 사전을 보든지 한 단어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뜻은 많은 정의들 중에서 가장 앞에 들어 있습니다. 끝으로 갈수록 예외적이거나 실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정의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어떤 분은 접두어 ‘re’ 무조건 ‘다시’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replenish'와 비슷한 ‘replete’란 단어를 보면 그 뜻은 ‘가득 찬’, ‘충만한’입니다. 여기에는 ‘다시’라는 뜻이 없습니다.
OED나 메리암 웹스터 사전은 ‘replete’ 역시 기원이 ‘replenish’처럼 프랑스어이며 ‘re’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가득 채우다’(more at full)라고 말합니다.
replete: Middle English, from Middle French & Latin; Middle French replet, from Latin repletus, past participle of replēre to fill up, from re- + plēre to fill — more at fullFirst Known Use: 14th century
즉 ‘re’는 ‘다시’가 아니라 ‘뜻을 강하게 하는’ 의미의 접두어입니다(more at full). 동일 사전들은 ‘replenish’도 정확히 ‘가득 채우다’(more at full)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접두어 ‘re’는 여러 뜻을 갖습니다. 다음은 아래아한글 소프트웨어의 정의입니다.
① 라틴계의 낱말이 붙어서 ‘반복, 강의(强意), 되, 서로, 반대, 뒤, 비밀, 격리, 가버린, 아래의, 많은, 아닌, 비(非)’ 따위의 뜻을 나타냄: recognize, recede, recompense
OED는 ‘plenish’도 ‘replenish’와 동일하게 ‘채우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OED의 전체 용례를 보면 ‘replenish’, ‘replete’ 등의 경우 ‘강의(强意)’ 즉 ‘뜻을 강하게 하는’ 접두어 ‘re’가 붙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 뜻을 조금 더 풀면 ‘확실히 가득히 채우라’가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 하나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아래아한글 소프트웨어의 ‘re’ 정의에 보면 ‘recognize’가 있습니다. 이것도 ‘다시 안다’가 아니라 ‘안다’입니다. 그런데 접두어 ‘re’가 붙어서 ‘확실히 안다’는 뜻을 갖습니다.
OED나 메리암 웹스터 사전은 ‘recognize’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recognize: modification of Anglo-French reconois-, stem of reconoistre, from Latin recognoscere, from re- + cognoscere to know — more at cognition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의 ‘re’는 ‘다시’가 아니라 ‘more’ 즉 ‘더 확실히’를 뜻합니다. 사실 영어에서는 ‘fill’과 ‘refill’처럼 접두어 ‘re’가 분명하게 ‘다시’를 뜻하는 경우보다는 ‘강의(强意)’ 즉 ‘뜻을 강하게 하는’ 경우로 사용된 예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처럼 영어에서 ‘replenish’는, 1828년의 웹스터가 내린 정의처럼, 1611년부터 1828년까지 200년 이상 오직 ‘채우라’는 뜻으로만 쓰였고, 그래서 어떤 주석서도 창세기의 ‘replenish’를 ‘재창조’의 근거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예 재창조는 그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개념입니다. 재창조라는 사상 자체가 유대교에 없습니다. 재창조 가능성은 1850년 이후에 진화론의 출현과 함께 과학을 신봉하는 세상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 성경과 과학을 타협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비록 촐머스(혹은 찰머스) 등이 선한 뜻으로 시도했다 해도). 그 이전에는 신학 서적 어디에도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주석서 중에 성경을 대하는 경건함으로 인해 가장 널리 읽히는 주석서는 매튜 헨리의 주석서일 것입니다. 헨리는 1662-1714년까지 살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총 6권에 달하는 주석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그는 영어 성경 자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한 훌륭한 성경 신자입니다. 그 역시 창1:28의 ‘replenish’를 땅을 충만히 채우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 단어는 ‘채우다’ 외에 다른 뜻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Matthew_Henry
또한 미국에서는 1798-1870년까지 반즈(Albert Barnes)라는 훌륭한 주석가가 있었습니다. 이분 역시 대단한 규모의 주석서를 지었는데 창1:28의 주석을 보면 재창조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습니다. 그 역시 헨리처럼 사람이 번성해서 땅을 충만히 채울 것에 대해서만 기록합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lbert_Barnes_(theologian) 참고로 헨리나 반즈는 청교도/장로교의 배경이 있어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해석을 여러 군데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를 빼면 어느 누구의 주석보다 경건하고 아름답게 글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들은 인격과 덕 그리고 학문의 측면에서는 저나 럭크맨 등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있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 ‘replenish’를 ‘채우다’로 이해하고 그렇게 주석을 썼습니다. 최소한 1870년까지는 그 뜻 외에 다른 뜻은 ‘replenish’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히브리말 자체에도 ‘다시 채우다’라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replenish’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레’(male, 스트롱 번호 4390)는 처음부터 끝까지 ‘채우다’의 의미로만 쓰였습니다.
OT:4390 male' (maw-lay'); or mala' (Est 7:5) (maw-law'); a primitive root, to fill or (intransitively) be full of, in a wide application (literally and figuratively):
KJV - accomplish, confirm, consecrate, be at an end, be expired, be fenced, fill, fulfil, (be, become, draw, give in, go) full (-ly, -ly set, tale), [over-] flow, fulness, furnish, gather (selves, together), presume, replenish, satisfy, set, space, take a [hand-] full, have wholly.
이 단어는 구약에만 253회 나오며 다음 그림은 창세기 1장부터 레위기 12장까지의 예를 순서대로 보여 줍니다. 지면 관계상 예는 이 정도로 하고 생략합니다.
그래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를 비롯해서 어떤 정통파 유대교 랍비도 ‘재창조’ 등을 가르친 것이 없습니다. 히브리어 ‘말레’에는 ‘다시’라는 뜻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려면 먼저 OED 사전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그 단어의 여러 정의 중 첫 번째로 제시된 정의로 가서 1600년대 용례를 보면 그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특정 신학의 틀 밖에서 중립적으로 성경 말씀의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합당한 내적/외적 증거 위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는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믿음이 온전한 것입니다.
라킨과 럭크맨의 후예들 소수를 제외하고 지금 미국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성경 신자들 가운데 ‘replenish’를 ‘다시 채우다’로 해석하며 재창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재창조는 사실상 구시대에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려는 유신론적 진화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그런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다음은 이 문제에 대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저와 의견이 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객관적 사실의 토대 위에 신학을 정립함이 옳기에 제가 살펴본 것들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1. 히브리말이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2. 영어가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3. 예수님께서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으신다(막10:6).4. 성경이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말 자체가 없고 재창조론자들이 증거라고 하는 구절/단어들 역시 문맥 밖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가미해 왜곡된 것들임).5. 화석의 증거들이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6. 역사적 유대교/기독교 주석가들의 견해가 전혀 재창조를 지지하지 않는다.7. 재창조는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이 땅의 죄는 아담으로 인해 들어왔고 그 이후에 사망이 생겼다(롬5:12). 9. 재창조는 19세 중후반 이후에 진화론의 노도의 물결을 막기 위해 성도들이 선한 의도로 창조해 낸 허구(fiction)이다.
마치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하게 재창조를 입증해 주는 성경으로 광고하면 그것 자체가 킹제임스 성경의 진로를 가로막습니다. 과거에 말씀보존학회가 기존 교단들에 의해 이단 정죄를 받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창1:28을 ‘다시 채우다’로 번역하여 재창조를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채우다’는 결코 킹제임스 성경만의 독특함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를 포함해서 틴데일 등 15-17세기의 성경 번역자들 가운데 아무도 재창조를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부디 이제는 유익 없는 재창조 논쟁은 접어두고 킹제임스 성경으로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데 우리 모두 매진하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독자 스스로 판단을 내려 신학을 잘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목사인 저에게 연약한 지체들이 이런 것들을 묻기에 저는 아는 대로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긍휼이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 참고 링크(재창조 반박 글 모음) --------------
정상적으로 창세기 1장과 2장 읽기http://new.cbck.org/BoardRedirect/sermon2/892
럭크맨의 극단적 세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http://keepbible.com/Cmn2/View/4CU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간극 이론, 갭 이론)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Nz 재창조 간극 이론 사실인가, 허구인가?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2 스코필드 성경의 창세기 재해석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0 히11:3에서 말하는 '세상들'이란?http://www.keepbible.com/Cmn1/View/42t 재창조론에 관한 7가지 의문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1 And’를 살려 창세기 1장 읽기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H 왜 둘째날에는 '좋았더라'가 없을까?http://www.keepbible.com/Cmn1/View/42u 누가 화석더미를 말했는가?http://keepbible.com/Cmn1/View/43L#c_14090 제가 알아본 replenish의 뜻http://www.keepbible.com/Cmn1/View/43G 작금의 논쟁 배경 설명
http://www.keepbible.com/Cmn2/View/4CW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을 동시에 들으면서
http://www.keepbible.com/Study5/View/3Zr
'replenish’의 진실과 성경의 창조 정리(재창조 반박 글 모음)
http://keepbible.com/Cmn2/View/4CX?page=2
-------------- OED Replenish 정의 --------------- Replenish, v. (rɪˈplɛnɪʃ) Forms: 4–5 replenys, 5 -ysch, 5–6 -ysh(e, -yssh(e; 4–5 replenisch, -issh, 6 -ishe, 4– replenish (also 5 -esch, 6 -esh; 5 repleinsch, -pleynsch, 6 ? replynyssh). See also repleshed and replevish v.2 [f. OF. repleniss-, lengthened stem of replenir: see re- and plenish.]
I.I In pa. pple., denoting a condition or state.
1.I.1 Fully or abundantly stocked with things or animals (†also sometimes extended to persons). ? Obs. (very common c 1535–1660, in a great variety of contexts.)
1340 Hampole Pr. Consc. 8908 Fayr bygyngs on ilka syde,‥with alkyn ryches replenyst. c 1400 Mandeville (Roxb.) vii. 25 Þus es all þe cuntree replenyscht with swilk maner of fewles. 1432–50 tr. Higden (Rolls) III. 169 When kynge Cirus hade fixede his tentes‥repleneschede with victelles [etc.]. 1532 G. Hervet Xenophon's Househ. (1768) 17 That these gardeines maye be‥well replenyshed with trees, and all maner of thynges. 1577 B. Googe Heresbach's Husb. iv. (1586) 171 b, A Country replenished with Gentlemen of good houses, and good house keepers. 1631 Weever Anc. Funeral Mon. 421 This religious house was‥replenished with blacke Nunnes. 1696 Whiston Th. Earth iv. (1722) 362 The Waters of the Antediluvian Earth were much more replenish'd, nay, crouded with Fish than now they are. 1741 Watts Improv. Mind i. (1801) 127 It is probable they are replenished with intellectual beings dwelling in bodies.
b.I.1.b Provided, furnished, or supplied with something. Also without const. ? Obs. 1533–4 Act 25 Hen. VIII, c. 11 §1 At suche time as the saide olde fowle be mouted and not replenished with fethers to flie. 1588 Shakes. L.L.L. iv. ii. 27 His intellect is not replenished hee is onely an animall. 1650 Bulwer Anthropomet. 137 Whence Infants speak not before their mouths are replenished with teeth. 1707 Mortimer Husb. (1721) I. 266 Cattle and Fowl, wherewith the Country-Farmer is replenished. 1796 Morse Amer. Geog. I. 367 These vast and irregular heights, being copiously replenished with water.
†2.I.2 Filled, fully imbued, pervaded or possessed, with some quality or condition. Obs. c 1374 Chaucer Boeth. i. pr. iv. 12 (Camb. MS.), They trowen þat I haue had affinite to malefice,‥bycause þat I am replenysshed and fulfylled [L. imbutus] with thy thechinges. 1483 Caxton Gold. Leg 63/1 Iosue the sone of Num was replenyssyd with the spyrite of wisdom. 1502 W. Atkynson tr. De Imitatione i. xxiv. 174 Couetyse persons shalbe replenysshed with all confusyon & penury. 1558 Warde tr. Alexis' Secr. i. 44 Death‥is‥an entring into an eternal life replenished with all joye, solace, and pleasure. 1604 T. Wright Passions iv. ii. §1. 127 A soule altogether depriued of vertue, and replenished with vice. 1633 Bp. Hall Occas. Medit. 271 How happily is hee replenished with knowledge and goodnesse! 1702 Echard Eccl. Hist. (1710) 226 Peter being now replenish'd with the Holy Ghost.
3.I.3 Physically or materially filled with some thing or things, people, etc. Also (in later use) without const. 1490 Caxton Eneydos xiv. 52, I shalle sodaynly make the ayer to wexe obscure‥replenysshed with hayle. 1555 Eden Decades Pref. (Arb.) 55 Suche owlde caues of the mynes as haue byn dygged, are ageyne replenysshed with vre. 1578 T. N. tr. Conq. W. India 74 All the streetes were replenished with people which stoode gaping and wondering. 1612 Woodall Surg. Mate Wks. (1653) 221 Generally all the earth is replenished with Brimstone. 1671 J. Webster Metallogr. xvii. 246 The Ore of Copper‥hath a leaden colour, replenished with certain yellow veins. 1727 Swift Baucis & Philem. 33 They found, 'Twas still replenish'd to the top, As if they ne'er had touch'd a drop. 1791 Cowper Iliad iv. 308 Thou alone‥Drink'st not by measure. No, thy goblet stands Replenish'd still.
†4.I.4 Full, made full, of something. Obs. c 1400 Mandeville (Roxb.) xxi. 93 A gude ile and full replenischt of many maners of ricches. c 1450 Lovelich Grail l. 695 Every day Repleinsched they were Of the holy gost. 1494 Fabyan Chron. v. lxxxii. 60 At sondry tymes whenne the sayd Countre was replenyshed of people. 1568 Grafton Chron. II. 684 Of whose valiaunt actes‥their eares had manye times bene fylled and replenished.†b.I.4.b Possessed of something. Obs. rare—1. 1482 Rolls of Parlt. VI. 224/1 Forsomoche that as well the Kyng‥, as other Lordes herebefore have ben gretely replenysshed of Markes and Games of Swannes.
II.II In ordinary transitive uses.
†5.II.5 To make full of, to fill, to stock or store abundantly with, persons or animals. = fill v. 5. c 1386 Chaucer Pars. T. ⁋ 846 Trewe effect of mariage‥replenysseth hooly chirche of good lynage. c 1400 Mandeville (1839) ix. 102 Thei wolde lye with here Fadre‥for to replenyschen the World aȝen with Peple. 1494 Fabyan Chron. vii. ccxxii. 247 This man made the newe forest‥and replenysshed it with wylde bestes. 1530 Palsgr. 687/1, I have replenysshed my pastours with catall, and my pondes with fysshe. 1596 Bacon Max. & Use Com. Law i. iv. (1636) 23 But [I] am without any remedy except I replenish the ground again with Deere.†b.II.5.b To provide fully with something. Obs. 1526 Pilgr. Perf. (W. de W. 1531) 4 b, God wrought‥the effectes of his mercy in replenysshynge them with his benefytes. 1535 Coverdale Ecclus. xxxii. 13 Geue thanks vnto him that hath‥replenished the with his goodes. 1582 Bentley Mon. Matrones ii. 30 His riches doo replenish eurie one with his goods.
†6.II.6 To occupy (a place) as inhabitants or settlers, to inhabit; to people. Obs. c 1400 Destr. Troy 12414 Mony weghes thedur went, & wond in the toune, And Replenisshed the place & the playn londis. 1590 Spenser F.Q. iii. vi. 36 Daily they grow, and daily forth are sent Into the world, it to replenish more. 1605 Verstegan Dec. Intell. i. (1628) 13 They were mightily increased in‥Germanie, replenishing euerie quarter and part thereof. 1788 Gibbon Decl. & F. lii. V. 460 The vacant habitations were replenished by a new colony.
b.II.6.b To occupy the whole of (a space or thing); = fill v. 7. Now rare. 1563 Homilies ii. Idolatry iii. (1859) 216 God is a pure Spirit, infinite, who replenisheth Heaven and Earth. 1593 Shakes. Lucr. 1357 The more she saw the blood his cheeks replenish The more she thought [etc.]. 1664 Power Exp. Philos. 93 The Quicksilver cannot totally replenish and fill the Tube again. 1675 Traherne Chr. Ethics 295 Nothing but honour, and kindness, and contentment would replenish the world. 1829 Landor Imag. Conv., Scipio Æmilianus, etc., Wks. 1853 II. 249/2 A light, the pure radiance of which cheered and replenished the whole heart.
†7.II.7 To fill with food; to satisfy, satiate. Also transf. and fig. Obs. c 1450 Lovelich Grail xlviii. 377 Nethir mete ne drynk haue we non;‥For the vessel vs repleynscheth not here. 1526 Pilgr. Perf. (W. de W. 1531) 8 All the appetytes of man shall be replenysshed with all goodnes. 1566 W. Adlington Apuleius x. (1893) 51 When I had wel replenished my self with wine. 1665 Bunyan Holy Citie 251 Wherewith she is watered and replenished, as the Earth with rain from Heaven.
†8.II.8 To fill (a place or space) with something. = fill v. 1. Obs. c 1477 Caxton Jason 28 Ye are worthy that the ayer be replenisshed with callynges and of voyses. a 1548 Hall Chron., Rich. III 28 b, With pitefull scriches she repleneshyd the hole mancion. 1613 Purchas Pilgrimage iv. vii. (1614) 372 Replenishing the way betweene the Temple and Pallace, with offerings of gold, siluer [etc.]. 1615 G. Sandys Trav. 134 They drew out the brains at the nostrils,‥replenishing the same with preseruatiue spices.
†b.II.8.b To fill (a person, the heart, etc.) with some feeling or quality. Obs. c 1529 Wolsey in Ellis Orig. Lett. Ser. i. II. 7 The delay wherof so replenyssheth my herte with hevynes, that I can take no reste. 1552 Bk. Com. Prayer, Ordering Deacons, Replenishe them so with the trueth of thy doctryne. 1635 R. N. Camden's Hist. Eliz. i. 68 The immortall joy wherewith shee should replenish all her subjects.
†c.II.8.c To fill (the mind) with some occupation. a 1548 Hall Chron., Hen. V 35 b, Thei determined‥to replenishe the kynges brayne with some pleasante study.
9.II.9 To fill up again; to restore to the former amount or condition. 1612 Drayton Poly-olb. ii. 38 The naked Sea Nymphs ride Within the ouzie pooles, replenisht euery Tide. 1666 Pepys Diary 19 July, Full of wants of money and much stores to buy, for to replenish the stores, and no money to do it with. 1748 Anson's Voy. iii. viii. 370 His stores replenished, and an additional stock of provisions on board. 1776 Adam Smith W.N. ii. ii. (1869) I. 301 The coffers of such a company‥must require‥a more constant and uninterrupted exertion of expense in order to replenish them. 1832 H. Martineau Homes Abroad v. 68 Susan was always ready‥to replenish the wallets and fill the cans. 1883 C. J. Wills Mod. Persia 185 She took the little silver spoon, and replenished my inkstand with water.
†b.II.9.b To fill up (a vacant office). Obs. rare. 1632 Sir T. Hawkins tr. Mathieu's Unhappy Prosperitie ii. 229 Petrus Moronus, whom Charles had drawen from the Cell, to replenish the vacant See. 1651 C. Cartwright Cert. Relig. i. 40 Though all vacancies are replenished by Ministers of the Gospel, yet the succession of the Authority was in the Bishops.
III. 10.III.10 intr. To become filled; to attain to fullness; to increase. rare. 1579–80 North Plutarch (1676) 76 The City of Athens began to replenish daily more and more, by mens repairing thither from all parts. 1673 H. Stubbe Further Vind. Dutch War 80 Her Coffers began to replenish, Her Subjects were rich. 1814 W. Taylor in Monthly Rev. LXXIV. 308 He does not luxuriate and replenish, and promise to bloom again.
2015-04-23 12:26:05 | 관리자
샬롬! 자매님 질문을 크게 두가지로 요약해 보았어요.
1. 이번에 제가 부딪친 문제는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사람의 행위나 노력, 열심 등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과
제가 죄인이라는 것은 깊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내게 진정한 믿음이 있었나? 라는 물음에 스스로 쉽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내 내면의 믿음과 과거의 생활들을 깊이 돌이켜보았는데
물론 특별한 고뇌 없이 즐겁게 신앙생활을 했던 적도 있었겠지만
제 안에는 크고 작은 의심이 있었던 것들만 더 확대되어 떠올랐습니다.
2.그래서 몇번 씩 영접기도도 해봤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믿는다고 했는데, 성경외에 다른 생각을 안해보려고 집중도 해보고 하면서
열심히 믿는다고 했는데
혹시 하나님께서는 '너의 믿음은 의심이 섞여있다. 너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구원을 주지 않으셨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마음둘곳 없이 초조한 생활을 ...
요약해 보면, 구원의 확신문제로 마음의 평강이 없어서 힘든 생활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신것 같습니다.
위에 두 분 형제님께서 링크해 주신 자료들을 차분한 마음으로 읽고, 강해설교를 들어보시면 답을 얻으실 수 있을 거에요.
저의 견해로는..
지금 자매님은 신앙이 성장해 가고 있는 단계인것 같습니다. 영적 사춘기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매님같은 고민을 다 하는 것이니 일단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구원받은 자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한 여러가지 내,외면의 상황들로 인해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에 대한 확신의 강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 자신의 그 어떠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마귀자녀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에는 절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니 그 사실을 믿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옛자아는 죽은 것으로 여기고, 우리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면 됩니다.(로마서 6장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건전한 의심(궁금함)은 우리자신을 더욱 낮추고 성경을 통해 주님 더욱 묵상하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으로 인도하지만, 불건전한 의심(불신)은 사람을 영적으로 피폐하게 만듭니다.
나에게 의심이 찾아올때 먼저는 하나님께 그런 자신의 상황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주님께서 선하게 인도해 주시길 간구하는 마음으로 성경으로 돌아가면 마음의 평강을 내려주실줄 믿습니다.
힘내시고, 주님께서 주신 이 큰 구원의 감격과 평강의 삶을 누리시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겠습니다
2015-04-23 01:59:20 | 오광일
참조하세요.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582
2015-04-22 22:47:0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렇게 절절한 사연으로 성경지킴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앞서 김항수 형제님께서 참으로 귀한 영상을 소개해 주셨습니다.여기에 이런 사연을 올리실 때는 마치 요술방망이처럼 몇 마디 답변으로그동안의 고민이 눈 녹듯이 사라지길 기대하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이제 위 영상 중 특히, 구원바로알기 1~8강까지를 순서대로 찬찬히 모두 시청하십시오.분명 대단히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아울러 아래 '구원바로알기' PDF 파일도 내려받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구원바로알기 PDF 파일http://www.keepbible.com//View/5월 초에는 구원에 관한 김** 형제님의 신간도 출간 예정입니다. 참조해 주십시오.부디 그동안의 고민이 해결되시고 성경이 가르쳐주는 참된 복음 안에서 흔들림 없는 평안을 찾으시기 원합니다.감사합니다.
2015-04-22 21:18:58 | 김대용
성경 신자라는 이름표가 부끄러움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요즘엔 참으로 고심이 많습니다.......
글을 써 주신 노고에 감사합니다.
2015-04-22 21:09:45 | 김대용
안녕하세요!
결론부터 답변드리면 둘 다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음의 마태복음 강해 영상을 시청하시면 그 의문이 시원하게 풀리실 겁니다.
*마태복음 강해 제8강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122&cate_name=%EB%A7%88%ED%83%9C%EB%B3%B5%EC%9D%8C&page=4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며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4-22 21:07:37 | 김대용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롬10:17)
안녕하세요?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구원에 관한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3&cate_name=%EA%B5%AC%EC%9B%90
샬롬
2015-04-22 20:41:17 | 김항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