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철 형제님 평안하셨는지요^^
성경에서 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손과 연관된 기록은 시편 8편에만 나오는 낯선 표현이 아닙니다.
아래 구절들을 읽어보시면 보다 이해가 깊어지시리라 생각합니다.
욥기 10:3, 10:8, 14:15/ 시편 102:25, 119:73, 138:8/ 사64:8/ 히 1:10, 2:7
아랫글도 참조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손가락 (출31:18)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529
제 부족한 답변이 불충분하면 다른 분의 답도 기다려 보십시요.
감사합니다.
2014-02-12 19:14:06 | 김대용
성경을 읽다보니, 궁금한 점이 발생되어 질문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여섯째날 땅의 짐승과 가축등과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제외하고는 다 "이르시되"로써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 같은데...
시편8편을 보니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으로 되어있어서 약간 헷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음을 믿습니다. 분명 뜻이 있으실 것으로 생각되어
질문드립니다.
창1: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1: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창1:11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 나무를 땅 위에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창1:20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이 있어 움직이는 창조물과 땅 위 하늘의 열린 궁창에서 나는 날짐승을 풍성히 내라, 하시고 창1:24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살아 있는 창조물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27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시편8:3 주의 하늘들 곧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작품과 주께서 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깊이 생각하오니 시편8:6 주께서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사오니
2014-02-12 15:05:44 | 이종철
안녕하세요?
사랑침례교회 신학원에서는 2014년 봄 학기에 다음과 같이 3과목을 개설하려 하니 수강하실 분들은 미리 준비하기 바랍니다.
1. 설교 코칭: 오프라인 수강, 이것은 2013년 가을 학기의 <설교와 설교자>, 2014년 겨울 학기의 <예레미야>를 들은 분들만 수강할 수 있습니다. 학기 중에 적어도 3번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녹화한 뒤 저를 포함하여 모든 수강생들이 설교 코칭을 할 것입니다. 이것을 수강하실 분들은 미리 설교문을 두세 편 준비하기 바랍니다.
2. 성막 강해: 온라인 수강, 2014년 7월에 졸업하기 원하는 분들은 이 코스를 들어야 10과목을 마치며 졸업 요건을 채우게 됩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0
3. 조직신학 1: 온라인 수강,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신학입니다. 기존 수강생들 가운데 조직신학 1을 듣지 못한 분들은 먼저 이것을 듣기 바랍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286
신학원을 새로 시작하는 분들은 성막과 조직신학 1을 듣기 바랍니다.
2014년 봄 학기는 3월 22일(토)에 개강해서 7월 5일까지 16주 동안 집행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3월 초에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문의하실 분은 주경선 자매님에게 이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okhapjks@naver.com
샬롬
패스터
2014-02-12 13:08:2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희 사이트에서는 성경 강해에 사용된 모든 강해 노트를 누구나 무료로 다운 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해 노트들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어서 공지합니다.
강해 노트들은 다음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cbck.org/ExpositoryBible
강해 별로 노트(PDF 파일)는 모두 1번에 들어 있고 이것들은 모두 빨간색으로 공지되어 있습니다.
혹시 주변에서 이것을 알기 원하는 분이 계시면 이렇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4-02-12 09:34:27 | 관리자
형제님의 글은 저하고는 정반대 스타일로 말이 정말 차분하고 자상합니다. ㅎㅎ
전반적인 내용이, 본문에서 인용된 성경 구절뿐만 아니라 로마서 8장(특히 18절 같은), 히브리어 12장을 상기시키네요.
그 권면 내용을 머리로만 숙지한다고 해서 현실에서 실제로 그걸 진심으로 믿고 실천할 힘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려야 할 겁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2014-02-11 19:36:42 | 김용묵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 목사는 26세에 왕립의학협회로부터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대단히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44년 이상의 목회와 설교 사역을 통해 그는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중 한 사람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물론 이분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성경 신자가 보기에 교리적 한계가 명확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의 초인적인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었고 특히, 저 불후의 명저 ‘설교와 설교자’는 설교자가 왜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위대한 막대기인가를 가장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규명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교리적 한계를 지녔지만 위대한 설교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저서(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에서 성도가 궁극적으로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 논한 한 부분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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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4장에서 ‘짐승’이라고 묘사된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중략- 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모양에 있어서 그들은 혼합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존재들일까요? 그들이 천사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은 대단히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구속받고 영화된 인류를 상징하고 예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피조 된 생물의 최고의 특성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들의 주된 기능이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거하게 될 만큼 고귀하게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요! 그룹과 스랍, 그리고 이 짐승들에 대한 모든 성경의 언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거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이것이 여러분과 나의 미래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의 궁극적 구원과 영화, 그리고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직접적 임재 안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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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정해진 항거할 수 없는 처지가 운명의 사전적 의미라고 한다면 각 사람이 맨 마지막에 처하게 될 영원히 불변할 운명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윗글에서 마틴 로이즈 존스가 묵상한 것처럼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걸쳐 기록된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 펼쳐지는 천상의 예배가 바로 성도의 마지막 운명을 함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부터 이어지는 사도 요한이 바라본 셋째 하늘의 왕좌에는 벽옥과 홍보석 같은 한 분이 좌정해 계십니다(계4;2~3). 왕좌 둘레에는 스물네 자리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찬송(계5:9~10) 등을 살펴볼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표라고밖에 볼 수 없는 스물네 명의 장로입니다.
인간들의 세상에도 공식 행사, 그것도 중요한 행사일수록 참여한 사람들의 자리 배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럴 때는 각 사람의 신분의 존귀함과 직책의 중함 정도에 따라 자리의 순서가 결정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을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의 왕좌 바로 옆 둘레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장로들의 24자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는 하나님의 근위병 역할을 하는 ‘네 짐승’이 지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왕좌와 네 짐승과 장로들의 한가운데 그 고귀한 자리에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천사들은 왕좌와 짐승들과 장로들 밖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의 말씀을 참조하면 구원받은 성도들의 최종적인 위치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 바로 옆, 즉 창조물로서 거룩하신 창조주께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가 주어진다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도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들은 천사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천사를 실제로 보여준다면 지금 바로 미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단숨에 날아갈 사람들이 허다할 겁니다. 지금은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이 다가설 수 없는 거룩한 영역에 존재하며 활동하는 천사들도 요한계시록 천상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옆에 자리한 구원받은 성도들을 밖에서 둘러싸고 있습니다.
할리웃이 만들어낸 히어로들을 보십시오. 소닉붐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초인적 존재인 수퍼맨이나 가슴에 원자로를 품고 철갑을 두른 가공할 위력의 아이언맨이나 사실 이들은 성경에 계시된 천사들의 권능과 존귀함과 비교하면 미미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만약 실제로 나타난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은 온 혼을 쏟아 부으며 그들에게 열광할 겁니다. 그러나 이들도 성경에 기록된 천사들에 견주면 기어 다니는 굼벵이보다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이 지상에 등장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여자가 그들의 사악함은 상관치 않고 자신의 온 마음을 주었고 타락한 천사들은 자기 취향에 맞춰 마음대로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6:1~2).
이런 놀라운 존재인 천사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온 우주와 모든 곳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보좌 바로 옆까지 다가설 수 있는 존귀함, 즉 이 놀라운 신분이 성도에게 주어지는 최종적인 운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삽니까? 매일 매일 닥치는 육신과 삶의 필요를 위해서는 온 신경이 자연스럽게 쏠리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 세계를 먼지처럼 밀어젖히고 장차 우리에게 임할 변치 않을 극히 견고한 마지막 운명에 대해서는 거의 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성도들의 마지막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한 장소가 있습니다. 장차 성도들이 영원의 시간 속에 거하게 될 한 도시입니다. 온 우주의 심장부이며 모든 처소들 중에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존귀한 이 도시에 대해 바울은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땅에 중심부인 예루살렘이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한 도시, 즉 하늘들과 땅의 모든 처소의 영원한 중심이 될 ‘새 예루살렘’은 빛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께서 직접 그 도시의 광채가 되시는 곳입니다(계21:23). 또한, 이 거룩한 도시, 모든 곳의 심장부는 그 누구도 아닌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곳입니다.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우리는 이사를 하기로 한 지역의 아파트를 고를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 중 하나가 어떤 회사가 건설한 아파트인가 하는 겁니다. 인지도가 높은 대형건설사일수록 당연히 동일한 지역에 위치해도 다른 아파트에 비해 매입비용이 높습니다. 그 어떤 아파트나 건축물 혹은 어떤 정부가 기획하고 건설한 도시와도 비교되지 않은 예수님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건설하신 새 예루살렘은 구원받은 성도가 거하게 될 본향이요 최종적인 근거지가 됩니다. 더구나 새 예루살렘 거주민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계21:4)
이렇게 창조물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약속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다시는 타락하여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존재로서 모든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영원히 분리해 주신다는 놀라운 약속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인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겁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벧후1:4)
다시 언급하지만, 사망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아픔이 없다는 약속과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약속은 창조된 존재들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특혜입니다.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믿기에 우리는 구원받고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고 때로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을 감수하고 진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과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 흔들림 없이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요즈음 세상의 많은 교회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체적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여기도록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과연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성도들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얼마나 대접받고 있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의 영역이 아닌 눈에 보이는 환경, 조건, 경력, 사람의 능력, 학력, 재정적 준비, 인지도 등등 이런 것들이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와 개개인의 구체적 삶 속에서 대접받고 있다면 성경에 명확히 기록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권능이 여러분의 지금의 삶까지 바꾸어 놓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상속 유업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18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19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이렇듯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면서도 이 모든 약속과 장차 받을 축복을 잊어버리거나 별 기대 없이 매일 눈에 보이는 필요를 채우는 것에만 열중한다면 성도의 삶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지향점 없는 각박한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속에 절절히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오래전에 한국에서 로또가 처음 판매될 때 재미삼아 사오라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또를 사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치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값을 치르면 주는 영수증처럼 생긴 그 얇고 작은 종이가 수백억 가치가 있는 일등 복권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등에 당첨된 로또 복권을 소유한 사람에게 그 얇고 별 볼 일 없는 바코드가 찍힌 종이는 더는 쓸모없는 종이가 아닙니다. 수백억의 현금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귀한 물건이 됩니다. 그것은 당첨된 복권에 부여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금으로 수백억을 은행에 예금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 순간부터 자신을 수백억의 자산가로 생각하고 그 돈의 용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극도의 흥분과 희락을 절로 경험합니다. 당첨된 복권을 보여주지 않아도 지인에게 당첨 사실을 털어놓는 그의 진지한 표정과 말과 전인(全人)에서 풍겨 나오는 확고한 믿음은 듣는 이가 그의 고백을 절로 신뢰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사실 일등에 당첨된 복권은 같은 회차에 발행된 쓰레기통에 들어간 다른 수많은 복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쇄된 글자가 찍힌 작은 종이에 불과합니다. 단지 그 종이에 부여된 약속이 쓰레기통에 들어간 다른 복권과 다르기에 그런 능력을 발휘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비해 하찮기 그지없는 복권 속에 들어있는 약속에 대한 믿음도 사람을 바꾸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초월해서 감정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꿉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는 모습을 보기는 극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믿음의 능력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려니 눈에 보이는 각종 행사와 초현대식 교회 건물과 유명인 등 사람의 눈을 매료시키는 것들을 전면에 내세울 도리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구원받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성도가 맞이하게 될 최종적인 운명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은 참으로 적은 것을 알게 됩니다. 확률이 극히 희박한 로또 종이에 보내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믿음보다 더 초라한 대우를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천상에서 성도들의 사역을 눈이 떨어지라고 집중해서 보고 있는 천사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깁니다.
그동안 ‘성경지킴이’와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와 각종 미디어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바른 성경과 그로 인해 세워진 바른 교리가 있음이 전해졌고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가장 부족하고 아둔한 저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존된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접하고 한때 머리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동의를 표했던 사람들 중에서 진리에 응답해 삶이 변화된 사람들은 사실 적다고 봅니다. 진리에 반응하고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스스로 고안한 논리로 그럴 수밖에 없는 궁색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영상이라는 것이 참 편리하고 빠르게 진리를 전하고 있음에 감격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간편하게 진리의 가르침을 접하고 마치 홈쇼핑을 즐기듯 그것을 보는 것에만 만족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히 걱정도 됩니다. 영적으로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지적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이미 우리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할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성도가 종국에 다다를 찬란한 운명을 확고히 믿고 자신의 온 생을 기쁘게 헌신했던 사도 바울의 모습은 진리를 접하고도 여전히 간편함을 추구하며 영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초처럼 떠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오히려 이젠 적은 지식으로 어설픈 선생 역할을 해 보려 하는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만듭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앞으로 역사의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고단한 짐은 점점 가중될 겁니다.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이전처럼 건전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서는 더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회체계가 이룩되어야 적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출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휴거를 통해 교회를 불러올리실지 알 수 없으나 그때까지는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갈수록 악하고 험난해지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생활을 꾸려가야 합니다. 이런 고단한 삶 속에서 성도가 위안을 얻고 경건하고 신실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도의 마지막 운명을 굳게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점점 악해지는 배교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찬란한 약속, 성도가 맞이할 운명의 종착지를 기쁘게 음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바울처럼은 못 되더라도 성도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리를 위해 손해 보고 결단하고 비진리와 결별하고 분리하는 담대한 모습을 보일 때 믿음의 능력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생생하게 세상에 증명될 것이고 바울이 고대하던 운명의 종착지에서 신실한 성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이 하나하나 우리 각자에게 확정될 것이라 믿습니다.
2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고전9:24~25)
2014-02-11 11:32:40 | 김대용
와, 어느덧 7차 모임. 날로 더 많은 분들이 모이셔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위에 있는 복된 소망을 굳건하게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리시고 그리고 나누시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뉴욕에서 이성길형제
2014-02-11 02:32:14 | 이성길
저도 형제님의 댓글을 성경지킴이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아주 반갑고 기쁜 거 아시죠?
최근에는 글도 올리기 시작하셔서 드디어 숨은 고수가 물 위로 떠오르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여전히 정제가 덜 돼서 글 중에 '드문드문' 약간 센 수위의 표현도 있긴 하나.. ㅎㅎ
불신자에게든 기성 신자든, 킹 제임스 신자에게든.. 진리가 있는 그대로 전달되고 믿음이 조목조목 정리되고 세워지는 데 이런 글이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2014-02-09 08:33:26 | 김용묵
김용묵 형제님의 글을 성경지킴이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참 반갑고 기쁘네요.
진리에 대한 명확하고 흔들리지 않는 소신도 여전하시고 일필휘지의 붓글씨 같은
거침없는 문체도 변함없으시네요. 형제님처럼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에 사로잡힌
청춘들이 이 땅에 많이 나오기를 항상 소망합니다.
진리 안에서 변론하고 논박하는 형제님의 순수한 열심이 열매를 맺어 온유함 속에서 강함을 보유하며
지금처럼 앞으로도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성숙해 가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생각하고 돌아볼 것이 많은 의미 있는 글에 감사합니다.
2014-02-09 00:36:15 | 김대용
크리스천의 사고방식은 불신자의 사고방식과 무엇이 다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1. 신의 존재
사실, 신의 존재 여부 자체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증명도 부정도 할 수 없으며, 그런 방식으로 논쟁을 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이 분야는
“직접 관찰한 적이 없으니 신은 없다고? 그럼 너는 네 뇌를 직접 관찰한 적이 없으니 무뇌아냐?” 라든가
“현대 과학이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무수한 미지의 영역에 신이 전혀 없을 거라고 확신 가능하냐?” 같은
당장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추측+아전인수격의 유치한 논쟁에서 크게 더 나아가질 못한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 이골이 난 사람은 보통 불가지론에 빠지게 된다.
창조과학 같은 데서는 우주와 지구와 자연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예로 들면서 그게 확률과 우연으로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직관을 많이 내세우는 편이다. 그건 성경적인 근거가 있으며(롬 1:19-20), 나 역시 직관과 양심에 근거하여 그 논조를 큰 틀에서 '지지'한다.
그러나 자연 계시는 과학적으로 온전하고 엄밀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 역시 인정한다. 수학으로 비유하자면, 10의 무려 1500승까지 찾아 봤는데도 없었다고 해서 홀수 완전수가 아예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게 증명된 건 아니라고 하니까. 단지, 한 혼을 움직이고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굳이 과학적으로 온전하고 엄밀한 방법을 꼭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 뿐이다.
(완전수란? 6 (1+2+3), 28 (1+2+4+7+14)처럼 자신을 제외한 약수들의 합이 자신과 같은 수를 말한다. 짝수 말고 홀수 완전수가 존재하는지는 완전히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없는 것으로 추측될 뿐임)
또한, 같은 논리를 동원하자면, 자연에는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틀어지고 망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처참한 살육과 약육강식도 있다. 온갖 나쁜 병균, 기생충도 있고 바이러스도 있다.
이 세상에는 전능하고 공의로운 신이 정말 존재하기는 한지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때로는 신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의구심이 들 정도로 끔찍하고 참혹한 일, 불의한 일, 억울한 일도 많이 벌어진다. 물론 그런 것을 성경적으로 설명하는 방법도 없는 건 아니나, 그걸로 영적 안목이 없는 불신자를 당장 충분히 설득 가능한 건 아니다.
요컨대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은 자주 불거져 나오긴 하지만 과학적 측면보다는 저런 명분론· 변증법(?)적인 측면에서 더 제기되는 편이다. 그리고 아무리 기독교회가 배도하고 타락하고 자유주의로 빠진다 해도 자기 존재 이유를 성립시키는 신 자체를 대놓고 부정할 정도로 막장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껍데기만 유지한 채 변질만 되며, 하나님을 가르치긴 하나 그분의 성품을 완전히 왜곡해서 가르치게 될 뿐이다.
2. 창조-진화
여기는 과학이라는 미명 하에 진흙탕 싸움이 본격적으로 제일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다.
기원이라는 것도 어차피 실험으로 정확하게 재연 가능한 건 아니며, 단지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해서 마치 범죄 수사처럼 과거엔 아마 이랬을 거라고 재구성과 추적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며 학술논문 스타일로 쓰여진 책도 아니다. 그러나 건전한 신자라면, 성경에 양념으로 기록되어 있는 과학적 사실들은 모두 문자 그대로 참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성경이 최소한 당대의 다른 문헌에 ‘비해서’야 과학적 통찰력이 아득히 앞서갔으며 성경 저자의 식견만으로는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진술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그 성경이 너무나 평이하게 신의 존재만큼이나 당연한 듯이 창조를 말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성경을 읽고 믿는 신자들의 한계는 솔직히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가령, 성경에 아무리 ‘땅의 원 위에 앉으신 분’(사 40:22), ‘땅을 허공에 매다시고’(욥 26:7), ‘낮과 밤이 동시에’ 같은 구절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고대의 크리스천들이 성경만 읽고서 세속 과학자들보다 더 일찍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걸 선뜻 알아채지는 못했다. 또한 창세기 1장의 연대기 문제는 같은 믿는 신자들끼리도 진영간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아 뭐 그렇다고 해서 창조를 믿는 성경 신자들이 너무 쫄거나 위축될 필요는 없다.
저쪽 사람들은 창조론자를 어떻게든 바보로 만들기 위해 약간 비논리적인 비약, 비과학적인 표현, 팩트 오류 같은 것만을 찾아내어 집요하게 공략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유리한 전제조건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럼 너의 천 대 만 대 조상은 확실하게 원숭이나 아메바냐?” 같은 원초적인 질문을 절대로 정면돌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공정한 대결이랍시고 그 함정 설정에 필요 이상으로 말려 들어갈 필요 없다.
진화론자는 어차피 기원에 대해서 딱히 이렇다 할 시나리오를 갖추고 있는 게 아니다. 일단 원시 생명체가 있으면 거기서부터 진화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아주 제한되고 미시적인 맥락에서 유기물이 합성됐거나 대진화가 관찰· 재연된 것은, 수많은 놀라운 지능을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실제 자연의 생물들과는 여전히 엄청난 괴리감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든, “인간과 원숭이가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든 이거나 저거나 본질 개념상으로는 차이가 없는 진술일 뿐이다.
일상생활에서야 “A가 틀렸으니 B가 자동으로 맞다” 같은 논리 전개는 억지가 맞다. 그런데 기원은 솔직히 A, B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글쎄, 기어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자면 만들 수는 있다. “신이 창조하긴 했을지 모르나 그게 꼭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보장은 없잖아” 같은 식으로 들이댈 수 있겠는데.. 그렇게까지 무슨 수를 써도 절대로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까지 굳이 설득하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서로 감정만 나빠진다.
3-1. 성경의 보존과 번역
창조-진화가 자연과학 쪽의 전쟁터라면, 여기는 언어학, 고고학 같은 인문계 영역의 전쟁터이다. 사실은 기독교의 근간을 구성하는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이야말로 제일 치열하고 집요하고 처절하다. 인류 역사상 성경만치 공격을 많이 받아 온 문헌이나 종교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1) 성경이 자필 원본 이래로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됐을 리가 없다고 공격하고, (2) 그 원문이 있다 해도 그 뜻을 우리가 제대로 알 수 없어서 완벽한 번역이 있을 수 없다고 공격한다. (1)은 원문 계층이고 (2)는 원어 계층 되겠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건 교회 댕기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심지어 목사, 신학자라는 사람들까지 그 공격에 고스란히 넘어가서 불신자· 기독안티와 다를 바 없는 성경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니 이를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
그런 허접한 텍스트를 근거로 어떻게 성경은 영감 받은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라고 가르칠 수 있으며, 안 그래도 요즘 교회 이미지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세상을 상대로 감히 복음 전하고 예수 믿으라고 전할 수가 있는가? 당신이 믿는 그 영감 받은 온전한 말씀은 도대체 무슨 성경이며 지금 우리 손에 있긴 한가? 문체 수준이 아니라 서로 번역과 내용이 제각각인 성경들 중에 무엇이 진짜 옳은 말씀이란 말인가?
킹 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는 진영은 이 문제에 관한 한은 확실한 정답을 가지고 있으며 비판에 대한 대안을 갖추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을 믿느니 차라리 400여 년 간의 선한 열매가 분명히 있는 옛 성경 역본을 믿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기독교계에 다툼과 분열을 야기하는 고집쟁이 전투종족 집단이 절대로 아니다. 기독교를 믿을 거면 제대로 믿으려고 모 아니면 도 신앙 노선을 추구하며, 크리스천의 신앙을 최전방에서 방어하는 건전한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성경은 그저 내용 요점만 두리뭉실하게 적혀 있는 도덕 경전이라고 취급하기에는 너무 엄청나고 과격한 내용도 많이 들어있다. 정확도와 신뢰도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성경이라는 책이 말하는 내용들은 그저 판타지일 뿐 진지하게 믿을 가치가 없다!
3-2. 성경의 무오성과 해석
앞의 (1)과 (2)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3) 팩트와 해석 차원의 공격도 무진장 많다. 왜, (a) 성경에 오류와 모순이 잔뜩 있다는 태클들 말이다. 사복음서간에 뭐가 일치 안 하고 동일 사건에 대한 진술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는 내부 모순이 있으며, 세속 역사 문헌 어디에도 요셉이나 모세나 출애굽 사건,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고증이 안 맞다는 식의 외부 공격도 있다.
또 (b)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든가 “가나안 민족들을 모조리 진멸하라”, “고환이 상한 자는 주께 나오지 못할지니라” 이런 것만 뚝뚝 떼어 와서 하나님이 인종 차별적이고 잔인하고 뭐 같다고 이상한 딴지 거는 얘기들도 한둘이 아니다.
어디 그 뿐이랴? 이제는 아예 (c) “성경 어디에도 예수 말고는 구원의 길이 없다거나, 예수가 자기 안 믿는 사람은 다 지옥 보내 버리겠다는 공갈을 한 적은 없다”고 교리를 제멋대로 정반대로 재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난독증 수준의 억지에 비하면 “모세는 진짜 홍해를 횡단한 게 아니라 근처의 갈대밭을 건넌 거다”는 차라리 애교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의 얘기에만 끌려가다 보면.. 기독교와 바이블은 진작에 외면받고 사라지고 소멸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존속해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고 내가 정말 어지간히 ‘쎈 걸’ 믿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읽으라고 부탁하고 간청을 해도 안 읽을 재미없는 책을 옛날에 악의 무리들은 왜 그리도 없애려고 발광을 했으며, 그 책을 소지하거나 읽느라 순교까지 당한 바보들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던 걸까?
성경에는 왜 그렇게 적혀 있는지 정말로 알 수 없는 의문 구절도 일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 말고 (a)에 속하는 상당수의 딴지들은 이미 반박과 해결책이 다 알려져 있으며, (b)도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 경륜 구분 같은 걸로 바르게 나누고 분간하면 성경에 왜 그런 무지막지한 말이나 모순점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오류 없이 거의 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c)는...? 대꾸할 가치도 없을 것 같다. 입만 아프다. 믿어지지 않고 믿기 싫으면 전체를 거부하고 안 믿으면 된다. 단지 취사선택을 하지 말고, 비기독교적인 자기 신념을 기독교라고 우기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떡밥을 하나 남기면서 이 주제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생명의 기원만큼이나 인간의 언어의 기원도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건 화석이나 방사선 원소 연대 측정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보니, 오늘날 언어학계에서는 언어의 기원은 그냥 불가지론으로 간주하고 함구하고 있다.
4. 내세
제아무리 불신자 무신론자라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이건 마치 “목 잘린 직후의 느낌이 어떻냐”만큼이나.. 체험해 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질 못하니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다.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론이 접근할 수도 없으며,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종교관에 의지해서 신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윤회· 환생이든, 완전 소멸이든, 하늘과 지옥이든 그 무엇이든지 말이다.
이 분야는 불가지론의 영역이다 보니, 옳다 그르다 같은 감정 싸움은 딱히 없다. 뭐, 굳이 하나 지적하자면 “예수 안 믿으면 다 지옥 간다니 너네 종교는 참 편협하고 배타적이다” 정도의 딴지만 있을 뿐.
그러나 그건 협박이나 공갈이 아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심판해서 죄인을 지옥에 보낸다는 거지, 그 말을 전하는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을 제멋대로 해코지 차원에서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 아니다. 그 교리가 안 믿어지면 그냥 개인적으로만 안 받아들이고 안 믿으면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내세관은 그 배타적인 것 딱 하나만 받아들이고 넘기면, 나머지는 생각보다 굉장히 뒤끝 없고 깔끔하고 건전하다! 이건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귀신 없고 미신 없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교류 없고, 죽은 사람 갖고 현질(=돈 내라)을 유도하는 지긋지긋한 종교 장난질이 없다! 그 대신 부활의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5. 보편적인 윤리
기독교가 가르치는 성경적 윤리관은 어지간한 세상 사람들이 ‘진보 트렌드’라고 생각하는 것들과는 완전 정반대인 수구꼴통(?) 성향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일단 필요악이라고 여겨지는 것에는 다 긍정적이다. 사형제, 체벌, 나라 지키는 군대, 공권력 같은 것. 절대적인 선악 기준이 없을 때는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흉악범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 피해자 유족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를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은 단호하기 때문이다.
사형제가 있어서 범죄가 줄어들었느냐, 범죄자의 교화는 어떡하냐 그딴 건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성경의 판결은 “흉계를 품고 사람을 고의로 죽게 한 사람은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 / “ ‘살인하지 말라’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인 것이다. “너 고소”가 아니라 “너 죽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흉악범도 개인적으로야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지만, 법적으로는 형벌에 의해 세상 하직해야 한다. 자기 목숨 바쳐서 피해자 유족들의 한을 풀고 자기 피로 땅을 깨끗하게 해 준 뒤, 빨랑 하늘나라 가야 된다.
그리고 성(sex) 관념도 진짜 깔끔하다. (1) 결혼한 (2) 남자사람과 (3) 여자사람이 하는 것 말고는.. (1)부터 (3)까지 한 단서라도 누락되거나 바뀐 것은 전부 음행, 죄악이고 그것도 굉장히 큰 죄이다.
이런 법칙들이 온갖 인간적인 부조리와 모순을 핑계로 문란해지고 무너졌다고 해서 인권이(특히 여성 인권) 실질적으로 향상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야금야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헬게이트만이 열릴 뿐이다. 당장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을 낳은 뒤 책임감 있게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성장한 당신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늘 이상한 통계 자료나 주고받으면서 답 없는 쳇바퀴 같은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 윤리관의 경우, 다른 창조/진화나 성경 같은 이슈와는 달리, 굳이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단순히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크리스천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6. 예수님의 부활
위에서 소개된 여러 아이템들도 중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가르는 가장 크리티컬한 변수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식이다!
세속 백과사전이나 세계사 만화, 인명 사전, 위키백과 같은 데서 ‘예수’를 찾아 보시라. 제아무리 개독안티라 해도 예수라는 인물 자체가 허구라고는 안 그런다. 그건 역사적 증거가 너무 분명해서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열이면 열 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얘기로 끝난다. 아니면 부활까지도 소개는 하지만 “성경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랬다고 한다, 기독경에 따르면 그랬다고 전해진다”라고 단서는 꼭 붙이고서, 우리는 저 진술에 책임 안 진다는 식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직접 확인해 보아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묻혔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라고 쓰는 순간 그 책은 객관성을 잃고 특정 종교 집단의 교리를 대변하는 경전(?) 내지 간증집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부활이 역사적으로 진짜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 시점에서 관심사가 아니다.
정체불명의 위경이나 이상한 사료를 토대로 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예수는 사실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해 있었으며, 나중에 제자들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한 뒤,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후손을 남기고 죽었다는 얘기까지 지어낸 개독안티가 고대로부터 있었다. 고대의 철학자나 석학들도 현대의 지성인 무신론자보다 지성과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얼마 못 가 쏙 들어갔다. 지금도 예수 부활을 공격하는 얘기가 강경한 개독안티 커뮤니티 위주로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 내지 창조/진화보다는 강도가 “훨씬” 덜하다. 이 주제는 너무 민감한 나머지 마치 ‘내세’만큼이나, “진실은 저 너머에” 수준으로 그냥 쉬쉬 하는 분위기다.
그야말로 오합지졸 겁쟁이었던 예수님 제자들이 불과 수십 일 만에 예수 전하느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역전의 용사로 뒤바뀐 것, 고대로부터 수많은 신자들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믿음을 지킨 것, 더 나아가 오늘날까지 기독교회가 수백, 수천 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우려먹는 레퍼토리이자 복음의 핵심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새마을호 열차에서 Looking for you가 흘러나온 사건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게 호락호락 정면으로 뒤집히고 반박당할 것 같은가? 아예 예수님을 비롯해 사도들의 존재를 송두리째 다 무시하고 부정하지 않는 이상, 부활만 쏙 부정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해서 살아난 거라면 제자들이 그걸 모를 수가 절대 없었을 텐데, 겨우 그런 예수님을 보고는 역전의 용사로 바뀌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담대히 증언하다가 순교까지 했다고? 에라이..
모르긴 몰라도 아폴로 계획 달 탐사 자작극 음모론을 반박하는 것만큼이나 예수 기절설 같은 건 단박에 반박 가능할 것이다. 법학자로서 무신론· 회의론자이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법적으로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이라는 걸 발견한 사이먼 그린리프 같은 사람은 과연 무엇을 알아낸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 예수라는 인물이 정말 부활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성경 전체의 실질적인 진위 여부와 여러분의 혼의 미래까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 결론
잠시 눈을 돌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을 좀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는 당장 북한과 휴전 상태이고 대립 상태이다. 물론 365일 24시간 내내 긴장만 하고 있으면 너무 피곤하고 피차 좋을 게 없으니, 가끔은 대화도 시도하고 화해 무드도 만들려 노력한다. 그러나 둘은 근본적으로 통치 체제와 지향하는 바가 180도 완전히 너무 다른 정치 집단이며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이 상태로는 둘은 도저히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일본하고도 미묘한 애증의 관계가 있다. 경제 쪽으로는 분명 협력과 공존 관계이며, 개인적으로야 한국인과 일본인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독도 때문에 여전히 대립하고 있고, 과거사 문제도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
바로 이런 세상 국가들의 정치적 분쟁과 비슷한 맥락으로..
개인간의 영적 세계에는 예수님을 두고, 생명의 기원을 두고, 성경을 두고 다양한 분쟁 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도 일시적인 휴전 상태일 뿐, 완전한 종전이 아니다. 기회가 되면 이 불씨는 언제든지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다. 크리스천은 불신자와는 얼마나 넘사벽급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갖췄는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건 혈과 육의 싸움이 전혀 아니다. 그러니, 이런 걸로 신자와 불신자끼리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싸운다거나, 한 신념을 남에게 폭력과 협박으로 강요한다거나, 그걸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차별의 근거로 활용한다거나 해서는 정말 절대로 안 된다. 크리스천은 다른 불신자와도 ‘가능한 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롬 12:18).
그런데.. 종교 쪽 논쟁은 서로 싸워 봤자 별로 답도 안 나오고 서로 말도 안 통하고 감정만 나빠진다고 해서 아예 완전 입 다물고 말을 말고 “너는 네 식대로 믿어라. 나는 내 식대로 믿는다”고 선을 마냥 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경의 판결대로라면 이건 또 다른 극단이며 크리스천의 직무유기죄로 빠진다. 성경을 읽다 보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진술로 인해 그럼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싶은 딜레마가 느껴질 때가 왕왕 있다.
이런 문제의식이라도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크리스천으로 최소한의 영적 생명력은 갖췄다고 하겠다.
그런데, 나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분야에서 개독안티와의 어떤 논쟁도 다 이길 방대한 지식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록 악의적인 의도는 아니었지만 왕년에 간증 잃을 병맛 같은 행실도 많이 남겼다. 게다가 나 또한 하나님의 모든 사고방식이 다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성품을 다듬고 내 행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도록, 오늘은 어제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보이도록 간구하고 노력을 할 뿐이다. 최소한 상대방이 복음이 무엇이고 기독교 교리가 무엇인지 알기는 제대로 알고서 거절하든가 반대하지, 삐쳐서 마음을 확 닫아 버리는 일은 없게 내 말에 너를 ‘위한다’는 진심을 담으려 노력한다.
사실, 불신자가 예수 믿기 위해서 지금 당장 안 믿어지는 창조론이라든가 하나님의 경륜을 납득해야 할 필요도 없고, 자기 힘으로 술· 담배를 끊어야 할 필요도 없고, 성경관· 윤리관 같은 사상을 인위로 개조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노력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구원을 위해 당장 가장 중요한 건 4번과 6번일 것이다. 일단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머지 믿음은 추가로 공급된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복음 전하다가 불신자가 1~3, 5번 같은 걸 갖고 불필요하게 논쟁을 걸면서 시간을 끌면, 적당히 커트를 하는 기지도 발휘해야 한다. 그런 데에 끌려가면 힘만 빠지지 결론 절대 안 난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께서 유한하고 부족하고 여건마저 제각각 불공평(?)하게 타고나는 사람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육신적인 스펙이 아니라 ‘믿음’으로 귀착된다.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그래도 공평하게 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평한 거다.
기독교는 처음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몇몇 전제조건 아이템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에는 나름대로 상당히 건전한 원칙과 일관성과 체계가 잡혀 있다. 크리스천들은 그걸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리고 안 믿는 건 개인 자유인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걸 남들이 기독교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는 것도 분명히 전해야 한다. 이렇게 영적 전투를 치르는 것이 신자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2014-02-08 23:19:50 | 김용묵
안녕하세요?
뉴질랜드 최문선 자매입니다.
2014년이 밝았나 싶었는데, 벌써 2월의 3분의 1이 지나고 있네요.
여러분들은 올 초에 계획하신 일들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요?
이곳 뉴질랜드는 낮에는 뜨겁고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합니다.
이제 가을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냄비에 찐 잘 익은 옥수수는 입안에서 알알이 톡톡 맛있게 터진답니다.
햇과일들이 예쁜 빛깔을 뽐내며 출하되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대전 모임이 형성된다는 기쁜 소식이 들리는군요.
많은 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하심이라 여겨집니다.
저희도 벌써 7차 모임을 갖게 되어 <아래>와 같이 안내해 드립니다
< 아 래 >
일자와 시간 : 2014년 2월 15일 토요일 저녁 7시
장 소 : ****번지 Awa road Kumeu Auckland(West Auckland)
내 용 : 개역성경분석
연 락 처: 027-779-8877(최문선)
이 내용을 보시고 뉴질랜드에 사시는 분들이 저희들과 함께하여 진리의 말씀을 나누고 행복해지길 소망합니다.
이 뉴질랜드 모임을 위하여 늘 관심과 기도로 동역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함께 전합니다.
샬롬!
2014-02-08 19:23:26 | 최문선
안녕하세요. 킵바이블 형제/자매님들
이전에 공지드린 "대전 흠정역 성경모임"의 장소와 일정이 여러 형제님들의 도움을 통해 다음과 확정되어 알려드리니 참고하셔서, 관심있으신 분들은 연락을 주시거나 참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장소 : 서대전역 매화실 (대전역에서 서대전역으로 바뀌었습니다)2. 일시 : 2월 15일 토요일 오후 3시 (3시에서 5시까지 논의 예정)3. 기타 1) 현재까지 참석 의사를 전달해주신 대전 및 청주지역 형제/자매님들은 총 17명입니다. 2) 회의실이 15인용이라 추가 참석하실 분은 미리 연락을 주세요. 공간은 충분하니, 여분의 의자를 추가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처 : 010-2415-7069, hjkim1611@gmail.com
감사합니다.
2014-02-08 13:27:08 | 김학준
왠지 올해는 좋은 소식이 더 많이 들릴 것 같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지경이 날로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2014-01-29 17:44:07 | 류인선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말씀의 자유로운 행로를 보는 것 같아서 감격스럽고,
또 여러분의 소중한 사역에 감사드립니다.
진리의 말씀을 힘입어 항상 승리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2014-01-29 17:42:27 | 류인선
김** 형제님, 안녕하세요^^서로 얼굴본지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왕성한? 활동에 늘 감사합니다.대전에 오시면 연락주세요 샬롬.
2014-01-27 15:47:49 | 김학준
오- 정말, 유익한 글이네요! -한동안 소설을, 쓰면서 이 부분에대해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렇게 정리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출력해갑니다-
2014-01-27 10:41:16 | 신진성
안녕하세요
엊그제 대전에서의 임시모임에 함께 했던 박천호 입니다. 김학준형제님이 사준 콩나물국밥과 함께 정말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기분좋은 모임을 가졌습니다.
아쉬운점은 현재 대전에서 모이기로 얘기나눈 형제님들은 아직 네분정도에 불과합니다. 전해들은바로는 대전에 흠정역성경을 보는 형제님들이 적지 않은걸로 아는데 용기내어 참여의사를 밝히지 못하신 분들이 많은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거리로 주저하지 마시고 주님이 일하심을 믿고 용기내어 함께 모일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전역내에 있는 30인용 회의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월15일은 정동수목사님도 멀리서 오시는데 자리가 썰렁하지 않도록 아무쪼록 많이들 나오셔서 모두함께 기뻐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참석하실분들은 김학준형제님께 가급적 빨리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박천호 올림
2014-01-26 17:52:28 | 박천호
안녕하세요
자유게시판에 이런 협조 요청글을 올려서 죄송하지만, 관련된 많은 분들이 읽으실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글을 올리니, 여러 형제/자매님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미 공지사항에 공지된 내용이지만, 몇몇 형제분들이 이번 대전 모임을 제안했으며 대전 및 청주 지역에서 관심있는 분들이 모여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같이 논의를 해보자고 해서 이번 모임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참여의사를 말씀해주신 형제님들을 어제 저녁, 대전에서 만나 모임을 가졌습니다. 사실,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형제님들입니다.
본 모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미 공지 사항에 있으므로 이것을 참조하시면 될 것 같구요.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578
2월 15일 대전 모임은 1차로 대전역 근처의 회의실을 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인원 규모에 따라 가격차이가 있어 대략적으로 나마 참여 인원을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본 게시글을 올립니다.
인원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되면 적정 크기의 회의실을 예약할 계획입니다.
모임 이후에 같이 저녁 식사도 할 예정이니 이런 준비를 위해서, 본 모임에 참석 의사가 있으신 분들은 아래 메일이나 전화 문자로 가능한 한 빨리 알려주시면 예약을 진행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연락처: 010-2415-7069, hjkim1611@gmail.com
감사합니다. 샬롬.
2014-01-25 09:13:38 | 김학준
형제님, 공감합니다.
그 경계를 뒤섞고 애매하게 만들면 교리도 흐트러지지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서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데
늘 안타깝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22 09:32:37 | 김재욱
안녕하세요?
이런 경우의 날은 하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간을 나타냅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436
살후2:2의 그리스도의 날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공중 강림(휴거)부터 시작되며 그 이후에 그분의 영광과 권능이 드러나는 모든 기간(7년 환난기+천년왕국+새 하늘과 새 땅)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전1:8, 그분께서 또한 너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하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가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시리라.
빌1:6,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이것을 나는 확신하노라.
빌1:10, 너희가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며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실하고 실족거리가 없는 사람이 되며
빌2:16, 생명의 말씀을 제시하나니 이로써 나는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지 아니하고 헛되이 수고하지 아니한 것에 대해 그리스도의 날에 기뻐하리라.
또한 빌2:3의 ‘그 날’은 문맥상 2절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문맥상 다른 날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3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앞뒤 문맥상 이렇게 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날과 주의 날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4-01-22 06:45:4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