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위에 아주 자세하게 달린 덧글로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추가 설명을 달아 봅니다. 복음서를 보실 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정확한 교리적 이해와 믿음을 바탕으로 성령님의 조명하심 아래 문맥에 맞게 읽고 생각하신다면 무리 없이 말씀을 잘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1.본문 이해를 위한 배경지식
장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회상하며 약속된 메시야의 왕국을 바라보는 절기로서 유월절(과월절) 및 칠칠절(맥추절, 초실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이다(출애굽기 34:22). 절기를 축하하는 동안 장막집에서 살던 그들의 습관에서 나왔으며, 선조들이 40년 동안 장막에서 살며 방랑하던 유목생활을 기억하여 기념하는 절기이다. 티쉬리얼(9~10월) 15일(추분일에 가까운 보름달)부터 1주간 지켜졌는데,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가 열렸습니다. 한마디로 백성들이 환희와 축제를 즐기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은 예수님의 반대세력들(종교 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했기에 예수님께는 무척이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장막절도 지켜야 하고 자신의 반대 세력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 사면초가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역을 완수하기 까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았고,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불신앙 상태의 형제들의 제안
요7:3~4 그분의 형제들(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생활로 태어난 동생들-가족)이 그분께(예수님께) 이르되, “여기를 떠나 유대로 들어가 당신이 행하는 일을 당신의 제자들도 보게 하소서. 은밀히 일을 행하면서 드러나게 알려지기를 스스로 바라는 사람은 없나이다. 당신이 이것들을 행하시거든 당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봐 왔을 형제들인데도,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믿음이 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시편69:8 참조하세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명 가량의 사람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자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떠난 사건을 기억하면서 이들은 예수님을 약간은 조롱하는 투로, 불신앙의 상태로, 세상적인 관점으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요7:5)
스스로 높아지려 하는 자들은 군중들의 박수 갈채 위에서 성공의 척도를 가늠하지만 하나님의 종들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압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대중적인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기뻐하는 장막절 축제 기간에 다시 한 번 기적을 행함으로 군중들에게 드러나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나타내며, 적대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 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사역을 망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3.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뤄짐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에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사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2:4(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7:6(자신을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요7:8...“나는 내 때가 아직 충만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적을 지키러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7:30(예수님을 잡으려 하는 사람들이 손대지 못함)...“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요8:20...“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요12:23 “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요13:1 (유월절 전에)...“자기 때가 이르러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줄을 아시고...”
요17:1...“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4. 왜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에게 명절 지키러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하시고 나중에 올라가셨나?
요7:6-10을 성령님의 조명하심 아래 여러 번 정독해보면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행동을 조심히 하셨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세상”의 일부이기도 했기에 그런 책망의 당사자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형제들에게는 먼저 올라가라고 말씀하시고
요6:6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요6:8 ...“나는 내 때가 아직 충만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절을 지키러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6절과 8절을 잘 비교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거짓말을 하거나 대충 말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신게 아니라 자신의 때가 충만히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아직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지요.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의 때가 충만히 이르면 올라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비밀히, 은밀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5. 정리
예수님께서는 공생애기간동안에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사셨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위한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장막절 참석을 억지로 하여 하나님의 때에 맞지 않게 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도 않으셨고, 참석할 때가 되었는데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시자 완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한 모습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14-01-09 22:27:55 | 오광일
답변하기 쉽지 않은 질문 같은데..
준비하시느라 많은 시간 할혜를 하였을
이성준 형제님의 성실하신 답변 감사합니다.
저 또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2014-01-09 09:19:38 | 강평원
동물 가운데 늑대만큼 억울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이전의 글 ‘왜, 늑대인가?’에서 잠시 다루었듯이, 늑대는 인간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동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사람들로부터 학살을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끊임없이 테러(terror: 공포, 그리스어 ‘terrior’에서 파생된 됨. ‘terrorism’은 공포의 확산의 뜻을 지님.)를 당해온 셈입니다. 그런 피해자인 늑대를 두고, 우리 사회는 단독테러를 자행하는 범행을 일컬어 일명, ‘론 울프테러(lone wolfe terror)’라고까지 명명합니다. 늑대가 들으면 억울해서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crime)와 테러리즘(terrorism)이라는 용어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팁(tip)을 드리자면, 그것은 범법동기에 의해서 구분됩니다. 범죄는, 가해자 자신(들)의 이익이 동기가 되어 자행하는 범법행위이지만, 테러리즘이란 정치․종교․이념 간의 갈등이 동기가 되어 자행되는 범법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테러(terror)의 개념이 바라보는 각도(입장)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 일제치하로부터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윤봉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의로운 순국열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를 정치적인 테러분자로 여기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한 편에서는 영웅, 다른 편에서는 잔인한 킬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도가 인간과 늑대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15c 이후 인류는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면서 늑대들의 구역을 찬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자신들의 영역과 무리(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목숨을 내놓고 다투는 그들만의 습성이 있는데, 그러한 늑대의 습성을 알리 만무했던 우리 인간과의 갈등은 그때부터 불가피하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를 찬탈당한 늑대들은 전처럼 사냥감을 찾기가 어려워져 새끼들의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개간한 농가의 양, 염소, 말들을 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한 과정에서, 늑대는 인간을 습격하는 ‘잔인한 킬러’라는 오명이 생겼고, 그 이후로 사람들은 늑대를 총, 덪 등으로 사냥하기 시작 했으며 심지어는 현상금까지 걸어가며 마구잡이로 죽여 댔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결과로 사람들은 늑대의 방해가 없이 땅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지만, 늑대의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기는 시국을 맞게 되었습니다.(참고로 늑대는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중간 포식자의 위치를 담당합니다.)
이처럼 ‘오해와 편견’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늑대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봤을 때, ‘오해와 편견’이 만들어지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정확한 지식이나 정보가 결여된 ‘선입견’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익관계에 따른 타협(탐욕)’입니다.
심리학에서 ‘초두효과(primacy effect)’라고 불리 우는 용어가 있습니다, 초두효과란, ‘초기의 정보 즉, 첫인상이 나중의 정보보다 그 사람에 대한 인상형성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선입견은 이러한 초두효과로 인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문제점은 한 번 뇌리에 고착되면 좀처럼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좋지 않은 선입견은 자기방어 기재로 작용하기 때문에 객관성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누구나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믿고 싶어 하는 타협성이 강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한비자(韓非子)는 "사람들은 뱀을 보면 놀라고, 뽕나무 벌레를 보면 소름끼쳐 하지만 어부들은 손으로 뱀장어를 잡고 부녀자들은 누에를 친다." 라며 이익이 있는 일 앞에서는 누구나 용사처럼 용감해진다는 인간의 본성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선입견과 이익관계가 하나로 결합하게 되면 선입견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더 없이 좋은 구실이 되어줍니다. 설령 선입견이 이익관계에 결부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또 다른 구실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정당화시키기도 합니다. 마치 이브가 뱀의 말에 꼬임당해 선악과를 탐하기 위한 구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켰듯이 말입니다.<창 3:3> 다시 말해서, 이익을 넘어 탐욕이 되어버리면 기존의 좋은 선입견도 더 이상 귀찮은 것이라고 치부하게 되어버립니다. 이쯤 되면 명확한 기준이 되는 법(法)도 무시하게 되어 탐욕을 위한 타협에 우정을 싹티우며 손잡을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그런 유의 사람에게는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 예로, 자살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들이 이러한 유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한 가지 예를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테러집단은 이슬람교의 부흥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12살 전후의 어린 소년 병사들을 모집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입시키는 내용은, 이슬람 외에는 구원이 없으며 이슬람 교리를 핍박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강하게 응징해야 한다<꾸란 8:39, 9:123, 47:4>는 거짓 교리 입니다. 더 나아가 특히, 기독교인들과 싸울 때는 가차 없이 벌하라<꾸란 8:57>고 합니다(그 방법으로는 목을 베는 것인데, 김선일 사건이 그와 같은 사례입니다). 그 같은 교육을 받은 소년병들에게는, 이슬람을 반대하는 모든 종교는 응징의 대상이 되는데 그들에게 특히 기독교는 가장 나쁜 종교이면서 그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닌 오히려 알라의 뜻이라는 정당성이 선입견으로 뇌리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면 행동적인 것을 요구하게 되는데, 행동적인 실천을 요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구원관과 관련하여 내세에 주어지는 인본주의적 상급(이익)을 가르칩니다. 그 내용은, ‘모두가 죽으면 연옥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다가 죄의 정도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 때에 갈라지게 되는데, 단지 직통으로 천국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알라를 위해서 순교(테러행위)를 당하는 것이다<꾸란, 4:74, 9:89>. 그리고 그 순교자(테러분자)는 포상으로 천국 가는 첫날 72명의 미인들과 성관계를 즐길 수 있는 정력이 부여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어이없는 비상식적인 교리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목숨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자신의 몸을 폭탄과 함께 내던지는 어리석은 일을 자행합니다. 이처럼 ‘선입견’과 ‘이익관계의 조화’는 상식을 뛰어넘는 ‘사탄의 절묘한 계략’으로 활용 됩니다. 그런데, 사탄의 이러한 계략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인가? 답은 아닙니다. 현재 기독교에도 사탄의 탐욕스러운 인본주의 교리가 우리의 신앙 가운데 ‘오해와 편견’이라는 열매로 탐스럽게 무르익고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짜 신도들도 넘쳐 납니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가짜 성도는 자신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은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이 되어주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해하고 사랑한다고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을 향한 지독한 사랑까지도 흉내 내는 일도 가능하며, 심지어는 인류애도 품어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에게는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가짜 성도처럼 장기적으로 흉내 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물론 가끔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남들에게 좋게 보이려하는 그릇된 일도 하지만 그 때마다 성령님의 자극으로 자신들이 곧바로 알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은 결국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기독교는 소위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폄하할 때 표현하는 개독교가 되어 버렸다고 사람들이 종종 표현하는데,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참으로 씁쓸할 뿐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탐욕으로 마귀와 손을 잡은 이 땅의 기독교는 온통 ‘오해와 편견’으로 조장된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가짜의 정체는, 인본주의적 산물인 복(福) 사상의 주체가 되는 맘몬입니다. 맘몬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인양 믿고 있는 가짜 성도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제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바른 교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른말을 하는 그들을 교세라는 뒷배를 이용하여 이단으로 매도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가짜 하나님(실상은 맘몬)이 뭔가 더 직접적으로 해줄 수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맘몬이 하나님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맘몬의 능력으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소위 성령님의 열매라고 착각하면서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만의 확증이라고까지 너스레를 떱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대가를 주님 오신 날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슬피 우며 이를 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자신들이 주님을 오해했다고 변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마태복음 7:21~23> 우리 손 안에 쥐어져 있는 진정한 말씀(KJB)만이 그들의 심판자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작금의 기독교의 행태에 대하여 알파늑대(우두머리)에게 소감을 묻는다면, 알파늑대는 이렇게 말을 할을 할 것 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은 있어. 우리 신의 이름은 대자연(大自然)이지. 자연은 여태까지 우리 늑대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락하고 제공해 주었어. 우리가 뭘 잘해서 그렇게 허락해 준 것이 아니라, 자연은 원래 그런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을 대상으로 너희들처럼 감히 거래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해. 우리에게 자연은 오직 경배의 대상일 뿐이지. 자연은 우리가 있기 이전에 스스로 존재<출 3:14>하고 있었어. 그래서 자연 앞에서는 우리 늑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굴복할 수밖에 없지. 우리는 자존심이 강해서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대자연 앞에서 만큼은 굴복할 뿐만 아니라 자연이 정해놓은 규칙(순리)대로 순종하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며 살지. 우리는 그것이 우리 늑대가 오랫동안 멸종당하지 않고 살아온 지혜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어<잠 1:7>. 우리는 너희들이 믿는 신(神)을 잘 몰라. 하지만, 우리도 우리에게 부여해준 모든 대자연을 보면서 자연이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는 신성을 모른 척 변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롬 1:20>.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자연은 잔인하고 사악한 너희 인간을 존중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그것도 많은 권위를 부여해주면서 말이야. 너희가 잔인하다는 소문은 조상 때부터 전해져 내려왔는데 듣자하니, 너희들은 너희들이 믿고 싶은 대로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 내는데 능숙하다지?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조상(늑대)들을 죽여 왔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진정으로 믿는 신(神)까지도 너희 손으로 잡아 죽였다며? 그런데도 너희 신(神)은 너희를 용서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야? 우리는 단지 자연이 너희들에게 부여해준 권위 때문에 너희들에게 복수를 하지 못했지만, 너희 신(神)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너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하여 기꺼히 목숨을 내놓으셨다고 하던데? 아니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게 구원을 위한 계획이었다? 이런 스토리는 소설에서도 듣도 보지도 못한 믿겨지지 않는 일인데 말이야! 만일 그 이야기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너희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너희들을 부러워하지 않아, 왜냐고? 우리는 너희처럼 잘못된 선입견과 탐욕에 가득 찬 추악한 냄새를 풍기면서까지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거든. 우리가 너희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냄새 때문이야.“
인류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한 번도 이성적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수 많은 오해와 편견속에서 인류는 지금까지 흘러왔고, 여전히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해답을 늑대로부터 찾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늑대가 제시해준 비결이라고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침묵’이라는 단어 였습니다. 늑대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라는 듯 권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찬 한 세상. 그리고 이 새대. 이제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수 많은 오해와 편견으로 시험이 찾아 오지만, 어쩔 수 없는 죄 많은 인간이라서 용서를 못한다는 핑계는 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물을 찾지 않고도 죄 없는 늑대처럼 상대를 용서할 수 있음이 가능해 졌기 때문입니다.
<요 13: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2014-01-09 01:40:07 | 김상진
글의 분량만 보아도 얼마나 심혈을 짜내어 답글을 작성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성준 형제님~! 귀한 답글에 대단히 감사하고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가끔이라도 좋은 댓글과 글로 킵바이블에서 함께 해 주세요.
성경 해석에서 앞뒤 문맥을 중요시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문맥은 성경 해석의 왕도다.’라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많은 주석서도 이런 해석방법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물론 주석서들이 절대적이지도 않고 성경 해석에 있어 매번 꼭 보아야 한다고만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어떤 자세로 성경을 보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런 문맥을 살피는 해석법을 무시하고 뭔가 새롭고 명확한 것을 찾다가는 자기 꾀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기가 십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풀려 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도랑으로 빠질 수 있고 신천지처럼 모든 성경을 비유로 풀어야 한다는 영적 괴수마저 탄생하게 됩니다.
질문을 올리시는 분들은 그야말로 단 몇 분 만에 자신이 궁금증을 올리시지만, 답글을 작성하는 수고는 최소한 그의 몇 배 이상이 들어갑니다. 질문하시기 전에 과연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의문인지, 좀 더 스스로 찾고 공부하는 노력을 할 수는 없는 것인지,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지속해서 성경을 찾고 공부함으로써 스스로 해결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한 것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보심이 진정한 영적 유익을 취하는 길이라 감히 생각합니다.
다만 소박한 바람은 질문하시는 분이나 답글 올리는 지체들이나 온라인상이지만 겸손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든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격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 무한한 감사의 마음은 당연히 주님께서 보혈로 대속하여 영적 지체가 되게 하신 형제/자매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마땅합니다. 당장 저부터 겸손히 섬기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문맥을 세세히 살피고 여러 주석서를 상고하며
성실하게 작성해 주신 정성이 가득 들어간
답글을 올려 주시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이성준 형제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성경지킴이를 오가는 모든 분들의 평안함을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8 18:00:13 | 김대용
안녕하세요 오정근 형제님~!!
한참 고민하다가 답글을 달아봅니다. 제가 제대로 된 답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올려봅니다
답글은 처음이라 미숙해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저는 성경을 이런 관점에서 봅니다. 성경이 옳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신실한 분이라는 출발이면 ‘왜 이렇게 기록해주셨을까’ 에서 출발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이미 ‘난 이렇게 생각이 들고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성경은 내 생각과 다를까’ 라는 생각은 출발부터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시작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I. 그럼 첫 번째 질문부터 제가 아는 선에서 답변 달아봅니다. 답변보다는 그냥 구절들 해석이라 보는 게 맞겠네요.
∘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
1.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산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출 24:18)
-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 부분에서 조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달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 모세를 두고 1절에서 나오듯이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1절)에서 보듯이 모세가 돌아오지 않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조급함과 인내가 깊지 못해 아론을 다그쳐서 새로운 우상, 즉 형상을 만들어서 우리를 좀 인도해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2. 4절에 ‘새기는 도구로 그것의 모양을 내매...’ 아론이 우상에 참여한 얘기가 나옵니다. 더욱이 섬세하게 만들었다는 구절도 있네요
• 소의 형상에 대한 얘기는 “그러나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들이 각각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이집트의 우상들을 버리지도 아니하였으므로...”(겔 20:8)
“자기들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모습으로 바꾸었도다.” (시 106:20)
이집트의 신인 소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체하는 신성모독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정확히는 십계명 중 제 2계명을 범했다고 많은 학자들이 봅니다.
3.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기 전 아론과 훌을 백성들의 치리자로 모세의 부재로 인한 백성의 치리 문제를 해결하고 갔습니다. (출 24:14)
그러나 백성들이 지도자의 부재와 하나님 임재의 사라짐, 광야에서의 남겨진 상황 등에 격분하자 아론은 너무 두려워서 그 죄를 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1절, 22절-24절)
•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아론의 동료이자 가족이던 훌(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아론과 함께 모세의 팔을 들어 승리로 이끈(출17:10-12))이 백성들의 요구를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죽자(그러므로 이후 성경에서 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이에 놀란 아론이 그들의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임재가 떠난 주님과 눈에 보이는 형상을 봐왔던 애굽땅에서의 풍습에서 아론에게 부탁했다는 학설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종교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산에 나무나 하늘의 해와 달과 별에 비는 모습, 돌을 쌓는 종교심 등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4. 다만 4-6절에서 볼 수 있듯이 형상은 만들었지만 그 대상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을 위한 절기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신 새로운 신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도록 형상화했다는 설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닌 우리 뜻대로 우리 마음대로 드리는 예배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5. 7-10절
• 모세에게 상세히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시며 ‘스스로 부패하고, 주님이 명령한 길에서도 속히 떠났다’ 는 표현을 하십니다.
•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는 표현도 쓰시며 진노하사 그들 모두를 소멸시키시고자 하셨습니다. (느9:18)
• 아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소멸시키고 모세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6. 11-14절
• 모세의 간구함으로(중보) 인해 아론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위기를 모면함.
7. 19-20절
•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했지만 모습이 엄연히 우상숭배며 이교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주관 아래 모세가 백성을 심판함.
8. 21-24절
• 아론의 변명 : 내 주여(모세에게) 맹렬히 분노하지 마소서. 그들은 해악에 빠진 자들이니이다.
--> 죄인의 공통된 특징이 나타난다. 죄인은 본인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 죄를 고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세에게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 이브가 뱀에게 죄를 책임 전가했던 것처럼, 아담이 이브에게 책임을 전가했던 것처럼 아론 역시 백성들에게 죄를 전가시킨다. 본인은 죄가 없다는 듯 변명을 합니다
. -->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 라는 아까 4절에 ‘새기는 도구로 그것의 모양을 내매...’ 라는 구절을 숨기고 거짓말을 합니다.
• 이브는 속고 아담은 죄를 알고 지은 것을 아신 하나님
--> 이 경우와 비슷한 전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딤2:14)
• 아론의 주도로 이루어진 우상숭배가 아닌 백성들의 무리중에 불안함과 강퍅함에서 시작된 우상숭배였다는 사실
--> 35절에서 나타나 듯 주도했던 백성에게 심판(징벌)이 내려졌지만 아론에게는 징벌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 허나 아론은 아들들이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징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요? 그리고 아론은 자신을 징계에서 구해준 모세를 미리암과 함께 대적하다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땅에는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모세의 중보가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9. 26-28절
• 3000명 가량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음 이와 대조적인 신약의 구절 오순절 사건 이후 베드로에게 설교를 들은 3000 혼 가량 구원받음 (행2:41)
--> 킹제임스 성경의 재밌는 표현입니다.
구약 율법 아래 3000명 가량 징계신약 성령 침례 안의 3000혼 가량 구원
10. 레10:1
•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8장에서 제사장 직분으로 거룩히 구별됩니다. 그리고 9장에서 나오듯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게 됩니다.
--> 9:24절에서 나타나듯이 주님의 영광과 임재의 시청각 교육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 10장 1-2절이 되면서 바로 나답과 아비후가 죽습니다.
--> 이상한 불로 거룩히 구별을 못했다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 3절 : 아들들이 죽었음에도 애도하지 못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8-9절에서 성막에서의 금주를 말씀하십니다. 위에 1-2절에는 이상한 불 얘기만 있었지만 많은 학자들이 8-9절이 바로 나옴에 따라 아론의 아들들이 술을 마시고 이상한 불을 드리지 않았겠냐라는 학설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금주에 관한 율법이 바로 이때 처음 등장 했기 떄문입니다. 사28:7
• 신약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
※ 그러면 왜 아론의 아들들이 죽었을 때는 모세의 중보도 없었고 하나님께서 직접 바로 죽이셨을까요?
-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아론은 백성들의 반 강제적인 협박에 못이겨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이 있고 아론의 아들들은 본인들이 자행해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성막에서의 거룩함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왜 성막의 거룩함을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육체를 멸하심을 아끼지 않으시는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알리고 싶으신 계획이 성경을 통해서 있으신거죠
• 쭈욱 나열만 하겠습니다(유대인을 위한 프로그램과, 이방인을 위한 프로그램,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대인 이방인 구분없는 프로그램)
1. 아담과 이브의 결혼(최초의 명령이신 가정) 둘이 결합해 하나가 됨을 알려주심(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됨의 예표)
2. 애굽에서 이끌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청각으로 보여주신 거룩한 성소
3. 솔로몬 때 지어진 거룩한 성전
4.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성전을 허물고 3일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던 그 성전.
5. 십자가 사건 이후에 건물로서의 성전은 의미가 없어지고 (실제로 AD70년에 무너짐)
오순절 사건 이후에 성령침례 받은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또는 성령님 안에 거하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칭해주시고 교회라고도 칭해주십니다.
6. 사도 바울은 이 교회를 정결한 한 처녀로 또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몸단장을 시켜줍니다.
7. 바로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서 자격을 갖도록 말이죠.
8.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결합해서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 교회(건물 아님)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하나님의 프로그램입니다.
※ 자, 보이시나요? 하나님의 경륜이...? 특히나 이 중요한 프로그램에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함이 손상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엄격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아론은 모세의 중보도 있었지만 아론의 아들들은 이런 중요한 문제가 있었음을 생각해봅니다.
∘ 참고 문헌 : 매튜 헨리 주석, 헤세드 레마, 랑게 주석, IVP주석
II.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은 성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100% 인간의 모습과 100% 신의 모습이 공존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 사건으로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모습 보다는 공생애 기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메시아로서 큰 표적과 이적들을 행하고 계신데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사역에 위기를 느끼시고 모습을 나타내셔야 할 곳을 제외하고는 조심하시는 모습이 성경에 나옵니다.
1. 7장 8절보다 우선적으로 문맥을 따라 6장에서 실족해서 떨어져 나간 제자들이 많은 걸 보실 겁니다.
• 요6:61 이것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
64절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며 또 자기를 배반하여 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셨기 때문이라.
•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고자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 (요5:18)
• 성전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할려고 했습니다
- 20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성전 보고에서 이 말씀들을 하셨으나 아무도 그분께 손을 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 8장 56-59절 : 그때에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 하거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숨기시고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렇게 나가시니라.
•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지 못하나 나는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에 대해 증언하되 곧 세상의 행위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라. (요7:7)
-->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2. 예수님은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표적과 이적들을 계속 보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로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데요 제일 중요한 십자가 사역을 방해할려고 하는 무리들이 늘어나자 은밀히 이동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죽일려고 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중에는 이 메시아를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할 일과 은밀히 해야하는 십자가 사역의 길이 달랐음을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7:1-10절과 같은 구절들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제자들의 무리에 섞여서 올라가면 사람들 눈에 금방 들키고 마니 은밀히 올라갔다는 얘기를 합니다. 글고 예수님 본인을 원래 이 땅에 온 의미로 보지 않고 자꾸 인간들의 욕심으로 채울려고 하여 때로는 제자들과 뜻을 달리하여 은밀히 사역을 행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3. 여기서 참고하고 넘어갈 부분이 예수님의 인성입니다. 신성과 달리 인성의 모습이 묻어 나오는 구절들이 무언인가 알아보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A. 여자에게서 태어남(눅1:31; 갈4:4).
B. 영과 혼과 몸을 가지고 있었다: 몸(마26:12), 혼(마26:38; 요12:27), 영(마2:8; 눅23:46)
C. 사람(유대인)처럼 생기셨다(요4:9; 8:57; 20:15).
D. 살과 피를 가지셨다(히2:14).
E. 성장하셨다(눅2:52).
F. 물으셨다(눅2:46).
G. 지혜가 자라셨다(눅2:52).
H. 아는 것에서 제약이 있으셨다. 이것은 스스로 취하신 것이다(빌2:5-8).막5:30; 막13:32;요11:34
I. 기도하셨다(막1:35; 눅11:1).
J. 시험을 받으셨다(마4:1; 히2:18; 4:15).
K. 순종하기를 배우셨다(히5:8).
L. 시장하셨다(마4:2; 21:18).
M. 갈증을 느끼셨다(요4:7; 19:28).
N. 피곤을 느끼셨다(요4:6).
O. 주무셨다(마8:24).
P. 사랑하셨다(막10:21).
Q. 불쌍히 여기셨다(마9:36).
R. 노하시고 슬퍼하셨다(막3:5).
S. 우셨다(요11:35; 눅19:41).
T. 기쁨을 느끼셨다(눅10:21; 히12:2).
U. 고통을 받으셨다(요11:33; 12:27; 13:21; 막14:33-34).
V. 피 같은 땀을 흘리셨다(눅22:44).
W. 고난을 당하셨다(벧전4:1).
X. 피를 흘리셨다(요19:34).
Y. 죽으셨다(마27:50; 고전15:3).
Z. 묻히셨다(마27:59-60).
∘ 참고 문헌 : 메튜헨리, 헤세드 레마, nic신약주석, 캐논 4복음 주석, 에메트 신학 주해, 웨슬리안 주석
2014-01-08 16:57:59 | 이성준
안녕하세요? 2014년에는 여러 가지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뉴질랜드의 최문선 자매님께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365일 동안 매일 낭독해서 유튜브에 올리기로 하셨습니다.앞으로 최 자매님의 성경 읽기 스케줄에 따라 성경을 읽거나 들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링침례교회 사이트에서 상단의 녹색 메뉴 중 설교와말씀 메뉴에서 시리즈말씀 안에 성경낭독 메뉴를 추가하였습니다.앞으로 사이트 담당자가 링크를 걸어놓을 것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3&cate_name=성경낭독 하나님의 말씀이 큰 영광을 받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킹제임스 흠정역 연대기 성경 낭독.1월 1일(창세기 1장-3장)http://www.youtube.com/watch?v=KNKyrvo-kEo **킹제임스 흠정역 연대기 성경 낭독.1월 2일(창세기 4장-7장)http://www.youtube.com/watch?v=8ccSMwDxkVA
2014-01-08 14:42:37 | 관리자
위선(僞善)은 참으로 집요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집요함이 마치 그림자와 같습니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달음질을 해도 전혀 거리가 벌어지지 않고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아옵니다. 잠시 마음의 긴장을 풀면 어느덧 위선은 사람의 내면 깊숙이 둥지를 틀고 곧바로 증식을 위한 세포분열을 시작합니다.
위선과 관련된 성경 구절은 신구약을 통틀어 모두 42번 등장합니다. 위선, 위선자들에 해당하는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는 hypocrite, hypocrites, hypocritical, hypocrisy, hypocrisies, dissemblers, dissembled, dissimulation 등이며 특히, 신약성경에 27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위선(僞善) 관련 구절들 중에 마태복음 7장 1~5절과 누가복음 6장 41~42절에 기록된 동일한 예수님의 교훈을 중심으로 성경이 위선과 위선자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으며 위선이 사람의 내면에 파놓은 은밀한 함정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위선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기 중에도 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중화기에 속합니다. 매우 선한 사람조차도 한순간에 위선의 늪에 빠질 수 있고 복음 사역에 매진하던 교회나 단체가 위선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거나 심지어 와해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치 누룩과 바이러스처럼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기에(눅12:1) 삽시간에 대중들을 선동해 위선적 사고와 행동 아래로 헤쳐 모이게 만들어 한 시대를 타락하게 하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합니다.
먼저 위선의 독특한 기능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심리적 좌절을 경험하게 될 때 또는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하게 될 때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타인과 단체 그리고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찾게 합니다. 그런 후에 외부로부터 포착한 문제를 자신의 내면에서 확대 재생산하고 왜곡시켜 집착하게 만듭니다.
41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 네 형제에게 이르기를, 형제여,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겠노라, 할 수 있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 뒤에야 네가 분명하게 보고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리라. (눅6:41~42)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가 빠져버린 함정의 특징이 타인의 잘못과 부정적인 면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정확하게 잡아내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는 보지 못하는 모순의 극치임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위선자가 집중하는 타인은 우선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가까이에 있는 동역하는 형제/자매일 경우가 많다는 것도 중요한 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아주 작은 먼지로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생활하는데 큰 지장이 없고 사실 시간이 지나면 눈물 등에 의해 저절로 제거되어 해결될 수 있는 정도의 사안입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속담을 적용해도 무방할 정도의 것으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지만 크게 걱정하거나 공론화할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위선자의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어떤가요? 물론 물리적으로 눈 속에 기둥만큼이나 큰 나무인 들보가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비유이기에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들보는 눈의 모든 기능을 영구히 상실시키고도 남을 치명적이고 위급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선자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감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생길 수 있는 부산물과 같은 형제의 눈 속에 작은 티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때는 온유하게 문제에 대한 권면의 말을 건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진 사람은 절체절명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형제를 몰아붙이고 공격하며 급기야 공동체 전체를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할 일은 형제의 눈 속에 미세한 티끌을 놓치지 않는 극도의 예민함이 자신을 성찰하는 것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내면은 이미 파국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데 아직은 그냥 두어도 괜찮은 형제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이 어리석음은 결국 심각한 위기로부터 방치된 자기 자신과 무모한 위선자의 비판의 칼날을 감내해야 하는 형제/자매와 공동체 모두를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맙니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할 수 없고 눈 속에 거대한 들보로 막혀 있는 자가 어찌 티끌이 들어간 사람의 눈 속에 바람을 집어넣어 그 부스러기를 제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누가복음 6장의 위선자는 그런 명백한 자신의 모순과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내겠다고 소리를 칩니다. 내 의견과 관점이 정확하니 내 말을 듣고 내가 제시한 해결책을 따르라고 호언장담하는 위선자는 교회 안의 지체들과 공동체에 커다란 짐이 될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위선자가 발견한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당장은 그냥 두어도 되지만 제거해 버린다면 좋을 것이고 분명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커다란 들보를 눈 속에 간직한 위선자가 그 티를 제거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눈 속에 있는 들보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코가 눈인지 입이 눈인지 분간조차 못하는 위선자의 손은 치료하고 해결하는 손이 아니라 흉기로 돌변할 것이 뻔합니다.
문제를 발견한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위선자의 좌충우돌하는 일련의 행동은 사사건건 지체들과 공동체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주 작은 위선이라도 사람의 내면에서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에게 진리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해결책을 꺼내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치명적 문제인 들보에 대해 집중하고 깊이 생각하라는 교훈입니다(마7:3). 자기 내면의 어떤 굽어진 요소들이 거대한 들보라는 문제를 키웠나를 차분하게 생각하고 돌아보는 것이 묵직한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위선자의 눈 속에 들보를 빼내는 첫 시작은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정확하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눅6:42) 눈 속의 티가 점점 커져 시야를 가리는 들보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또한,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들보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부지런히 자신을 말씀의 거울로 비춰보고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속속들이 성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급한 행동보다 먼저 깊이 자신의 속 중심까지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이 위선의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치료제입니다.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6장에 나타난 위선자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위선자 그룹이었으며 종교 시스템의 전도사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도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도다. 그것은 겉으로는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마23:27)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곤경에 빠트릴 함정을 파는 행위가 정당하고 선한 것이라 여겼기에 자신들의 악행을 절대로 고침 받지 못했습니다.
자! 오늘날 교회 안에 널리 퍼지고 있는 배교의 물결을 보십시오. 이 가증한 물결의 최전방에 서 있는 타락한 기독교계의 리더들은 자신들이 이런 악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렇게 행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날 밤 베개를 베고 누워 잠들기 전 저절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그 짧은 몇 분의 시간조차 두려워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져 항구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스스로 장애를 입힌 사람들입니다.
1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2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딤전4:1~2)
이 시대가 더욱 빠르게 극악한 배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것은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만이 위선의 독주에 취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이런 심각한 배교현상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하기만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은 성경에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는 '위선의 역사'가 주는 뼈아픈 교훈을 깊이 되새기지 않았기에 발생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착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적어도 현시대의 기독교는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교보다 당연히 하나님 앞에 선하며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오늘의 목사와 신학자들은 월등하고 바르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이 무모한 믿음은 성경의 교훈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미 있던 것 즉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전혀 없도다. (전1:9)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벧후2:1)
은사주의로 교인들을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자들로 전락시키고 WCC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도 자신을 복음주의자라 외치며 만담가와 개그맨처럼 우스갯소리로 설교시간을 장식하는 타락한 목사들도 강단에서만큼은 다들 한국교회는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 위기는 도대체 누가 불러온 것일까요? 각자 다 선한 선생이 되어 한국교회의 위기와 해법을 논하는데 과연 그 위기를 만든 장본인은 누구란 말입니까?
독주에 진탕 취하고 싶은 알콜중독자도 처음엔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딱 한 잔 만!!'이라는 위선의 구호를 외칩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만든 배교의 장본인들이 하나같이 강단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를 걱정하고 위기라고 떠드는 것은 자신의 배교행위에 면죄부를 발행하기 위한 일종의 위선입니다. 가증함으로 가득한 이런 위선적 설교에 취해 교인들은 '그래 아직 우리 교회는 괜찮은 교회야.' '아직 우리 교회는 살아있어.' '그래도 우리 목사님은 이 시대의 모순과 문제를 분별하는 제대로 된 분이군.'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깊은 늪 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위선으로 가득 찬 거짓 대언자, 거짓 선생을 구별하는 간단명료한 기준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하고 번지르르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행위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쌓인 구체적인 행동들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진리의 길을 택한 행동들이 그의 세월의 앨범 속에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15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16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남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마7:15~18)
위선자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겁니다. 더불어 위선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모순은 자신의 치명적 문제는 제쳐 두고 타인의 작은 잘못과 문제를 교정해보려 달려드는 무모함입니다.
정리하면, 위선이라는 모순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마7:3)”와 “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눅7:42)”의 말씀처럼 먼저 자신의 문제를 감지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실체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 장애를 겪게 하는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야 형제/자매의 영적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고 교회와 공동체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 원리입니다.
성경은 많이 선생이 되길 권장하지 않고(야3:1)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밝혀내는 논박의 전문가가 되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마7:1~2, 눅6:37). 물론 한편으로 성도는 시대를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성경을 기준으로 바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고전6:2).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반드시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허물은 없는가, 나에게 부족함은 없는가, 내 생각에 잘못된 부분은 없는가를 항상 먼저 살피는 사람이 지혜롭게 위선의 은밀한 함정을 피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논쟁과 논박에서 승리한 사람보다 한참이나 성숙한 주님 보시기에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한없이 부족한 사람인 저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엄격하고 빈틈없이 자신을 살피고 온유하게 지체를 섬길 수 있는 지혜와 명철함이 임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갈6:1)
2014-01-08 14:36:13 | 김대용
킵바이블 형제, 자매님들의 뜨거운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또한 이곳 킵바이블을 통해 바른 말씀과 교리를 알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소중하고 귀한 곳이며, 킵바이블을 통해 바른 신앙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그 자체가
제게는 행복입니다
자주 들러서 글도 올리고 교제도 나누어야 할텐데요. 늦게나마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이제 걸음마 단계라 은혜 침례교회를 위해 꾸준한 기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광주 뿐만아니라 곳곳에서 바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가 이곳 킵바이블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2014-01-08 13:25:43 | 한재석
바른 말씀으로 바른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이 정말 좋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실 것을 생각하니 기쁨이 넘치는군요.
앞으로도 여러지역에 바른 교회가 세워지길 바라며 광주 은혜 침례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샬롬
2014-01-08 10:43:46 | 차대식
서울에 있는 다른 독립교회 말씀인가요?
상단 메뉴 중 지역교회 안내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4-01-08 10:32:50 | 김재욱
참 보기가 좋습니다.
지속적으로 많은 분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알고
합류하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더 많은 교회들이 지역마다 생기기를 기대합니다.
2014-01-08 10:29:56 | 김재욱
한재석 형제님~!
이렇게 벅찬 소식을 성경지킴이에 전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교회 사역과 여러 일로 너무나 바쁘시겠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가끔
이곳에 귀한 글을 선보여 주실 때를 기대만 하고 있겠습니다. ^.^
항상 강건하시고 광주 은혜 침례교회에 우리 주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부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4-01-08 10:08:20 | 김대용
한 형제님!
새해 벽두에 너무 귀한 소식 듣고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앞으로 전남 광주 지역에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교회가 잘 세워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함께하시는 형제/자매님 모두에게 교회 이름처럼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4-01-08 09:57:39 | 관리자
혹시 서울에는 없나요?
2014-01-07 23:29:17 | 이혜숙
킵바이블 형제,자매님 여러분들의 기도와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소식을 전해야지 하면서 시간을
보낸 것이 훌쩍 한 해가 지나가버렸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많은 분들이 문의를 주시고, 광주 은혜 침례교회에 관심을 갖고 계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바른 말씀으로 바른 신앙을 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2013년 5월 부터 김규태 형제님 댁에서
저희 부부와 김선희 자매님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김형제님 부부의 섬김으로 맛있는 음식이 늘 넘치고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2013년 7월 경 부터 나상규 형제님의 요청으로 나형제님 사무실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드디어 7월 28일 사랑 침례 교회에서 저를 비롯한 약 12명의 광주 거주 성도분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8월 14일, 15일은 정동수 목사님을 모시고 킹제임스 성경과 바른 교리를 광주에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성경 사경회를 열었습니다. 예상보다 더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큰 은혜를 받은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바른 말씀을 알고자 갈급해서 산전수전(?) 겪은 성도님들이 한 두분 씩 오셔서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2월 25일,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탄성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넘치는 하루였습니다!!!
다시금, 김규태 형제님 댁에서 모여서 이지아 자매님의 음식 솜씨와 함께
나상규 형제님이 준비한 삼겹살과 싱싱한 굴을 형제님들이 정성스럽게 구었습니다
너무도 맛있어서 계속 먹다가 배가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을 위한 선물도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모두들, 교회를 이루어 주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제는 모이는 수가 거의 30명이 되어서 모임 장소를 위해 건물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같은 생각으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대한 같은 확신을 갖고,
바른 교리에 대한 같은 믿음으로 광주 은혜 침례교회가 출발하였습니다
율법주의,은사주의,거짓 교리등에 빠져 헤매이다가 이제야 진정으로 말씀에 기초한
바른 신앙을 하겠다는 한가지 결심으로 모였습니다.
동일한 고민 가운데 있다가 찾아 오시는 분들을 위해
언제든지 환영하는 마음과 섬기는 마음을 갖도록 다짐하고 있습니다.
광주 은혜 침례교회에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연락 바랍니다
한재석 형제 : 010-8978-8275 ( 낮 12시 30분 ~ 1시 30분, 오후 6시 이후 )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형제,자매님들의 관심과 기도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14-01-07 22:18:15 | 한재석
풀리지 않는 말씀으로 고민중입니다.
첫 번째 아론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후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데 도저히 납득이 안됩니다. (출 32:01-06)
그후 그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인해 즉사했습니다. (레 10:01-02)
성경이 잘못되었을리는 없고, 저는 아론을 먼저 죽였어야 한다고 봅니다.
현명한 답변을 기다립니다.
두 번째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장막절에 형제에게 먼저 올라가라 하시고,
나는 내때가 아니므로 올라가지 않겠다 하신후
은밀하게 올라가신 이유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요? (요07:08-10)
속된말로 “거짓말“을 하실꺼 까지야 없었을 건데요...
아님 당신의 때가 갑자기 임했을까요?
용서하옵시고, 말씀을 밝히 열어 깨닫게 하소서..
2014-01-07 16:01:10 | 오정근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는
국기가 초록 바탕에 아랍어(語)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알라 외에는 신(神)이 없고, 무함마드는 예언자이다.”라는
《코란》1절이 씌어 있을 정도로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이며,
외국인의 내륙여행은 불가능할 정도로 폐쇄적인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유적 발굴이나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볼 만은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히브리서 11 : 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의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7 13:24:21 | 강평원
늑대가 아주 사려깊은 동물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부일처로 평생 산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것 같습니다.
인간 세상에도 늑대같은 양과 양 같은 늑대가 있지요.
동물은 인간과 차원이 다른 존재지만 그들의 세계를 통해 느끼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동물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창조물이며, 우리가 다스릴 존재라는 것,
인간은 아무리 짐승 같아도 본질을 잃어버렸을 뿐 본디 하나님 종류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좋은 관찰이자 시도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김 형제님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보는 이야기,
계속 잘 보겠습니다~.
2014-01-07 10:42:37 | 김재욱
성경지식이 일천하여 두서없는 질문이었습니다만 알고 싶은 요점을 자세하고도 친절히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본 사이트를 통해 성경말씀을 더 정확하게 더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친절한 답변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2014-01-07 09:17:31 | 이성호
강평원 형제님~! 평안하시지요?
자료를 정리해서 올려주시느라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저 또한 수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이 분의 강연을 직접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떨기나무'라는 책 출간 후에 여기저기 강의를 많이 다니시는 듯합니다.
중동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이 분의 참신한(이미 널리 알려진) 주장은 귀담아들어 볼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입장이나 종말적 현상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태도 등 잘 분별하고
걸러서 들어야 할 부분도 있었습니다. 분별해서 잘 살피면 될 줄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7 00:09:46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