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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14년 2월에 독일에서 성경강연회를 개회하려고 합니다.   주변에 계신 분들은 많은 참여와 홍보를 부탁드립니다.       일시 : 2014년 2월 11일부터 20일까지 (세부일정은 광고지 참조)   장소 : 만하임, 프랑크푸르트, 도르트문트   강사 : 김재근 목사 (전주 소망침례교회)   문의 : 이메일 kjbbc1996@hotmail.com           카톡  jack1611 (한국), kleinstein (독일)           전화  010 7797 1611 (한국), 0176 3440 4462 (독일)    
2013-12-16 11:51:20 | 김호성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25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려내려하심이요, 26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것이 어디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니라. 29 그분은 오직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시냐? 그분은 또한 이방인들의[하나님]이 아니시냐? 참으로 또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니 30 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 무할례자를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하실 분은 한 [하나님]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을 통해 율법을 헛되게 만드느냐? 결코 그럴 수 없으니라. 참으로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아멘. 저도 형제님의 2편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3장23~31절까지의 말씀이 다시한번 묵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올바른 하나님의 바른 진리와 말씀이 우리나라에도 분별있게 널리 널리 퍼지는 하루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2013-12-14 21:54:32 | 강인한
김대용 형제님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적은 없지만 이렇게 글로나마 인사를 드립니다. 형제님이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베드로 후서 2장 1~3절을 봅니다. 1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2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독한 길들을 따를 터인즉 그들로 인해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요, 3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들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받을 정죄는 잠자지 아니하느니라. 위의 말씀이.. 요즘 우리들의 시대를 보며 말씀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저도 얼마 전 방송을 보며..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사람의 말에 아멘하는 그들이 아닌~ 진리를 비방하는 그들이 아닌~ 바른 믿음과 참된 진리의 말씀에 아멘하는 그들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3-12-14 13:22:29 | 강평원
매우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 종교적 시스템 때문에 개인적으로 무척 절망할 일이 있었네요.ㅠㅠ 부디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고치는 일이 교계와 개인에게 일어나서 비록 마지막 때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참된 부흥이 한 번 더 일어난다면 좋겠습니다. 김 형제님이 그 일에 앞장서주시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2013-12-14 11:55:02 | 김재욱
*1편 :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867   종교생활에 심취해 바른 신앙과 구원의 도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요? 때로 사람은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쉽게 변하거나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친구 중에 교통사고로 뇌에 위중한 부상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과 본인의 노력으로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큰 불편이 없을 정도로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죽기 직전까지 갔던 엄청난 사고와 오랜 회복기간을 거치고도 이 친구의 성격적인 단점은 거의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인정하는 그 독특한 아집과 단점들이 그런 큰 인생의 위기를 겪고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변하기 힘든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심지어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는 정확하게 증명해 줍니다.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건대 아버지께서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소서.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가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하거늘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저들의 말을 들을 것이니라, 하매 그가 이르되, 아니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 하니(눅16:27~30)    본문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지하세계의 낙원에 있는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 아직 살아있는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한 진리를 증언함으로써 그들이 회개하여 지옥의 자식 신세를 면하게 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종교 시스템의 노예로 살다가 지옥에 왔으면서도 여전히 종교의 핵심 요소인 눈에 보이는 것,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즐겨 반응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형제들의 종교성을 타파시키려는 이 부자의 내면에 증식하는 지독한 종교 바이러스는 지옥의 불꽃으로도 박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호흡이 그 육체에 붙어있는 동안 당대 가장 고급스러운 삶의 범주를 누리고 살다가 지옥의 불꽃 속에 절여지는 대반전을 경험하고도 생각의 중심축이 옮겨지지 않은 이 놀라운 현상은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위에 이야기했듯이 지옥의 고통은 인간의 상상력의 범위를 놀랍도록 한참이나 초월하는 영역에 있습니다. 이 부자는 지금 그 초월적 징벌의 세계를 온몸―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이들이 말하는 혼적인 몸(soulish body)―으로 경험하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끝내 지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부패한 사고의 틀을 전혀 벗어버리지 못하는 놀라운 실상을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보이는 것이 있어야 믿을 수 있고 기적적인 일 정도는 일어나야 사람이 변하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대언자들의 선포로는 절대 충분치 않다는 이 전혀 낯설지 않은 하나의 전형적인 신념은 21세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기원이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종교 시스템은 심지어 이 부자를 거슬러 올라가 가인에게까지 다다릅니다(유11). 또한, 이러한 굳건한 일종의 사고방식 즉, 사람의 눈과 감각기관으로 감지되는 현실 세계의 증거들을 통해서만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강력한 주장은 모든 현세적인 축복을 갈망하는 기복적 태도와 사실상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는 이를 정확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바로 종교 시스템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역사를 타고 흐르는 이 뿌리 깊은 지독한 욕망의 덫이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누렸던 한 사람을 지옥 자식 신세에서 면하지 못하게 붙잡아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종교에 빠진 이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바른 믿음을 규정하고 정의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못하였느냐? 참으로 들었은즉, 그것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것들의 말들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10:17~18).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11:1~3).   이와 함께 지옥의 불꽃이라는 초월적 형벌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부패한 사고체계를 허물지 못했던 부자를 향한 아브라함의 통렬한 선포가 위의 말씀들과 얼마나 정교하게 일맥상통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그들이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지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눅16:31).   지금 이 순간까지도 천국과 지옥의 방문기를 설파하는 거짓 간증자들을 통해 저리도 명확한 성경 말씀은 여전히 모욕을 당하고 멸시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실존했던 인물인 유대인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종교와 복음의 엄청난 간극에 대해서 명료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불어 끝까지 고집하며 종교인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복음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명확한 계시의 말씀들이 기록된 성경책을 밤낮없이 들고 다니면서도 종교인으로 살다가 파멸해 간 선배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허다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거대한 종교 시스템 속에 기생하는 거짓 대언자요, 거짓 선생들입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5~18).   종교인, 특히 거짓 대언자의 처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마태복음 7장 21절~23절의 말씀도 개역 성경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오히려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1~23)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마7:23).”라는 말씀은 제아무리 기적적인 은사를 뽐내고 세상도 부러워할 만한 찬란한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예수님께서 결코 안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구원받은 적이 없는 거짓 대언자들은 나쁜 열매를 맺는 변질된 나무요,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까지 가로막는 종교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숙주일 뿐입니다.   이렇듯 파멸의 길로 이끄는 거짓 대언자들에게 사로잡힌 종교인들 중에 상당수는 대단한 지성인이며 매력이 넘치는 인기인이고 권세가이며 모략이 넘치는 전략가들입니다. 그들은 복잡한 수식을 척척 풀어내고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뚫고 들어가 유연한 처세로 세상에 우뚝 서고 화려한 논리가 탑재된 말솜씨로 청중을 장악하며 고매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둔하고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명료한 복음의 정수를 깨닫지 못해 수시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나 정작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딤후3:7).   종교인은 여전히 철학, 선행, 고행, 희생, 헌신, 자선과 심지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도, 헌금, 예배, 침례, 유아 세례, 각종 성사 등의 종교 행위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달하고 구원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바람과 달리 사람의 모든 행위와 의는 누더기와 같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갔나이다(사64:6).   심지어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모 교단의 어떤 교회는 그 이름이 ‘종교’라고 한다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묘한 것은 그 교회의 담임 목사가 특별히 지난 WCC 부산총회 준비에 열심을 보였다고 하니 교회의 이름과 무언가 통하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WCC 부산총회 준비가 한창이던 때 그것을 지지하는 한 교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왜 WCC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사악한 단체인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 교인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일쑤였습니다. 대화가 진행되며 제 말에 논리적으로 더 내세울 것이 없어지자 이 교인은 비로소 명언(?) 한 마디를 남깁니다. “당신이 뭘 그렇게 잘 알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장담합니까? 그렇게 당당하다면 WCC 총회를 추진하는 목사님들보다 더 유명해지고 권위가 생긴 다음에 와서 말을 하세요.” 이렇듯 종교인들의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세상이 부여한 권위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시대의 대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심연에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만족하게 하려는 비뚤어진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버려진 음식쓰레기로 연명하던 거지였던 나사로가 낙원의 거주자가 된 모습을 지독한 회한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부자처럼 종교인에게도 생전에 가슴 시린 추억이 있고 소박한 즐거움에 미소 짓던 순간이 있습니다. 그들도 뜨거운 피를 가졌고 연인과 함께 절절한 사랑을 나누었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녀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다시 오지 않는 흘러간 청춘을 추억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합니다. 그들도 세월 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지는 이런 모든 삶의 조각들의 소중함을 알기에 자기 나름대로 종교 시스템 속에서 영존하는 생명을 얻어 보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마지막은 명백한 파멸입니다. 종교인이 감당해야 할 미래는 철저하게 닫힌 미래일 뿐이고 원상회복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종교 시스템에 발목이 붙잡혀있는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제발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거짓 선생의 덫을 벗기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만족하게 하는 그 자리에 안주하면 당신의 그 모든 소중한 삶의 조각들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당신의 두 눈과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함과 분노와 저주와 자포자기일 것입니다. 유대인 부자처럼 교회 안에서 일생을 복음을 모르고 종교생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절망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만드신 사람의 상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그야말로 완벽한 절망입니다. 부디 종교인이 감당해야 할 완벽한 절망, 그 혹독한 미래에서 속히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거니와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다시는 보상도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 잊혔기 때문이로다. 또한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이제 사라졌나니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어떤 일 중에서 그들이 차지할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전 9:5~6)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막9:48~49)
2013-12-13 23:45:46 | 김대용
사람은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이 끊임없이 미래를 바라보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친구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거나 전화 통화를 하다가 끊을 때 대부분 “다음에 또 보자.” 혹은 “다음에 연락하자.”라고 말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것도 이런 성향이 반영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항상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꾸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는 것을 삶의 의미로 여깁니다. 장성해서 결혼하면 평안하고 안락한 중년과 노년의 삶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자녀들의 미래가 아름답게 펼쳐질 것을 소망하며 삶을 일구어 나아갑니다.   과연 미래가 열려있지 않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동차가 주유를 가득하고 달려갈 준비를 모두 마쳐도 사방이 가로막힌 공간에 놓여 있다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듯이 사람에게 미래가 열려있지 않고 닫혀 있다면 그는 삶의 추진력을 상실하고 모든 기능들이 일거에 해체될 것입니다.   성경은 미래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어떤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에게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미래는 소망을 담고 앞날에 대한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닫힌 미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극심한 근심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살아 있음에도 “요즘 난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야~!”라고 자조 섞인 고백을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도 바로 이런 ‘닫힌 미래’를 맞이하며 살게 된 사람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람이 감당해야 할 닫힌 미래는 더 이상의 변화나 개선이 허용되지 않고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막9:44). 분명히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물인 이 부자는 당시 인간에게 허락된 최고의 풍요와 환락을 누리며 살았던 특권층이었습니다. 그가 입었던 자주색 옷은 당시로서는 왕이나 최고의 권세를 누리는 귀족들이 즐겨 입었던 옷으로 그의 사회적 위치를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삿8:26, 에8:15). 또한,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사치를 즐기고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듯 돈을 맘 놓고 써도 재산이 줄어들 줄 모르는 엄청난 부자였습니다.(눅16:19) 심지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거의 매일 벌이는 파티에서 남겨진 음식쓰레기로 연명하고자 하는 나사로를 비롯한 여러 거지들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건대 실로 대단한 재력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자는 당시에 살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따르는 멋진 삶을 살던 사실상 당대의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던 부자는 삶을 마감한 후에 영원히 고정되어 변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종류의 현실 속에 처하게 됩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눅16:23~24)   언젠가 지금 광주·전남 지역에 킹제임스 성경을 알리고 바른 신약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한재석 형제님의 설교 중 들었던 “여러분은 과연 지금 죽는다면 당장 하나님이 계시는 천상에 올라가 그분을 뵈올 텐데 그때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육신을 벗고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하실지 생각하고 사시나요?”―물론 제 기억에서 추출한 것으로 설교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라는 대략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 설교를 들으며 매우 참신하게 우리가 잊고 있는 부분을 지적해 주셨다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을 반대로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죽은 후에 눈을 떠 보니 지옥의 불꽃 가운데 놓여 있을 때 그 사람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요? 사실 상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솔직한 답입니다. 천상에 올라가 하나님을 뵈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지옥 불꽃 속에 절여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심정도 감히 인간의 평범한 정서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임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지옥은 제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사람이 지옥이라는 무자비한 진공청소기의 위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누리다 삶을 마감한 부자가 그야말로 대반전, 엄청난 뒤바뀜, 상상 이상의 엄혹한 현실을 마주할 때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지는 짐작이 불가능하고 간접체험은 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매우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옥은 대문을 활짝 열고 지금도 쉴 사이 없이 구원받지 못한 혼들을 빨아들이고 있는데 살아있는 사람은 정작 이런 심각한 위기를 뼈가 저리게 느낄 수 없으니 정말이지 이보다 더한 인간에게 닥친 시급한 위기와 위협은 없다고 해야겠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받은 구원의 감격만을 기뻐하기에는 주위에 파멸의 길로 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복음이 널리 퍼져있다고 자부하는 한국 땅에서조차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미처 구원받지 못하고 심장의 박동과 호흡이 멈춰 버리는 비극이 지금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단히 특이하고 충격적인 것은 파멸의 대륙으로 건너가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살아생전에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라고 자부했던 종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가 아브라함을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주저함 없이 부르는 것을 볼 때 그는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이었고(24절) 생전에 모세 5경을 읽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구약 시대의 대언자들의 선포를 직접 들었던 사람일 것입니다(29절). 짐작건대 그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걸맞게 유대인의 율법과 규례를 배우고 지키며 각종 헌물과 희생물을 부족함 없이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훌륭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지없이 그가 죽은 후 지옥의 불꽃 속에 절규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16장 23절의 ‘고통 중에’라는 말의 원어는 고문 등의 극단적 자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 견딜만한 고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부릴만한 상황이 절대로 아닙니다. 살아있다면 곧 기절해 버릴 수도 있는 극한의 고통을 쉴 사이 없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이런 지옥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여의도에 위치한 불신자들도 다 아는 한 대형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던 형제님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형제님의 고백은 전에 그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교리와 규범에 빠져 소나무 뿌리를 뽑아낼 기세로 기도에 열중하며 신비한 것을 추구하던 시절에도 무엇인가 은사주의 교회의 모든 모습이 내내 역겹고 불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바른 교회를 찾고 또 찾아 결국 그곳에서 빠져나와 지금의 교회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그 교회를 세계적인 초대형 교회로 일군 목사 일가의 범죄와 비리는 낱낱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해당 교회의 교인들은 잠잠하기만 합니다. 매 주일 기독교방송에 방영되는 예배 영상을 보아도 여전히 평안하게 주일예배에 참여하고 문제의 핵심에 위치한 원로 목사가 노구를 이끌고 더듬거리며 하는 그 설교에 아멘을 연발할 뿐입니다. 수십만 명의 교인들 중에 그런 비리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폭로 기자회견을 열고 또는 더 이상 참지 못해 교회를 뛰쳐나가는 등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단 1%도 안 되는 듯합니다.   하나님과 본인 자신만 알 수 있는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뉘라서 함부로 재단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런 명명백백한 비리와 타락을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이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영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생전 모범적으로 멋지게 별처럼 살았다고 자부했던 유대인 부자는 실은 마귀의 자녀요 지옥의 자식이었습니다. 사실 그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것도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세상 누구보다 구원받기에 가장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이었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을 읽을 수 있었고 살아서 활동하던 구약 시대의 대언자들의 선포를 직접 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풍요로운 생활이 그의 영적 지각을 둔감하게 했지만, 그것이 그가 구원받을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언제든 그의 몸에서 호흡이 멈추기 전까지 회개하고 돌이켜 참믿음을 소유한 자가 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너무도 명료하고 단순한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채 많은 종교 행위만을 먼지 같은 유산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나 지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영적 문제에 있어 가장 심각한 것 중에 하나가 그 옛날 유대인 부자처럼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의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시급하고도 위중한 문제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여기서도 교묘한 기만전술을 펼칩니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으로 이끌어 가려는 마귀의 집요함은 또 다른 이단의 무리를 통해 이 화급한 문제에 물타기를 시도하곤 합니다.   소위 매우 큰 믿음을 소유했다고 자부하는 어떤 목사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매우 참신한 화두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미 다 알 듯이 이 사람은 지독한 은사주의자요, 신사도주의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신 속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명백한 행위구원론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들에 대한 중대한 이슈를 이런 황당한 거짓 선생을 통해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 철저하게 매장해 버리려는 사탄의 간악한 술책에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도 끝끝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요,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오늘날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종교생활에 빠져 끝내 구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도 결코 사탄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은 그들은 자신의 욕망, 고집, 불순종,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 굳어 버린 양심 등으로 인해 스스로 수렁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이 감당해야 할 대가는 실로 엄청나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2편 계속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868
2013-12-13 23:42:18 | 김대용
두 분의 글을 모두 잘 읽었습니다. 오래 전에(아마 10여년 전?) 알던 자매님 한 분이 암 투병기간 중에 매일 아침에 성경을 들고 쫙 펴서 열린 장을 그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믿고 읽는다고 하셔서 자제분을 통해 미신적인 생활이니 그만 두시고 순서대로, 혹은 자기가 정해서 읽으시라고 권했다가 섭섭하다는 말씀을 들은 경험이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의도가 선하다고 해도 그것은 절 다니는 습관으로 교회 다니고 무당 찾아가는 심정으로 목사 찾아가고 점치는 자세로 말씀을 뽑는 것입니다. 이렇게 겉보기에 아무에게도 해를 안 끼치고 잘못된 것이 없어보이는 미신적인 일들 속에 마귀가 활약하는 공간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2013-12-12 18:45:27 | 류인선
안녕하세요?   드디어 엊그제 달력이 나와서 오늘 가져다가 학교 사무실 문에 걸었습니다. 크기도 좋고 말씀 중심이라 좋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배송하려고 합니다.   달력을 원하시면 다음에 있는 대로 주문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557   수량이 있는 대로 선착순으로 마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3-12-12 18:07:15 | 관리자
한 해가 지나가고 있지만, 자매님의 열정은 변함없이 식지 않는 뜨거움을 유지하고 계시네요. 이번 모임도 성경지킴이 회원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은혜가 충만한 시간 되시길 소망합니다.
2013-12-07 10:07:25 | 김대용
안녕하세요?   뉴질랜드 최문선 자매입니다.^^       이제 12월이라 성탄절이라고 한국은 캐롤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양으로 분위기가 들썩들썩 하겠네요.   이곳은 한여름인데 아직도 여름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어색하고 적응이 안되네요.^^   한국은 요즘 스모그 현상으로 공기가 탁해서, 호흡기가 약하신 분들은 더욱 건강에 유의하셔야 되겠더군요. 우리 모두 건강관리를 잘해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들을 잘 감당하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지난 4차 모임도 은혜가운데 함께 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답니다.  이번 모임은 12월 12일 목요일에 모이기로 했습니다.   주로 토요일에 모이는데, 맴버 들에게 사정이 생겨서 요일이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모임에는 그 동안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고 관심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모이지 못했던 분들이 함께 모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의 상황과 마음을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길 기도 부탁 드립니다.    우리의 모임을 성장시켜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번 모임은 아래와 같습니다.       < 아   래 >   일자와 시간 : 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저녁 7시   장       소 : ****번지  Pah  Road.  Empsom.  Auckland.   내       용 : ‘요한계시록 바로 알기’(김** 형제님 저)   3. 공중강림과 휴거(216쪽~229쪽)   연  락  처 : 휴대폰 027-663-9777 (최문선)       아는 분 중에 뉴질랜드에 거하는 분이 있으면, 이 내용을 알려주시고 함께 연락하고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가 거주하는 곳 Auckland는 뉴질랜드 북섬입니다. 혹시 뉴질랜드 남섬에  거주하는 분이 계시면,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연락해서 격려하고 위로하길 소망합니다.    Keep Bible 회원들께서 이 모임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샬롬!           A. Q & A로 알아보는 '성탄절'의 오해와 진실   http://woogy68.blog.me/140063736968?Redirect=Log&from=postView       B. 예전에 밥 피어스 선교사님께서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올려놓으신 글이 있어 링크 해놓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984       요한복음 1장 1절, 2절, 14절,    1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2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3장 16절, 36절    16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6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2013-12-06 18:20:46 | 최문선
안녕하세요? 저도 전에 이 주제의 글을 쓴 적이 있네요. http://woogy68.blog.me/140178085895 저는 이런 일은 그냥 미신적 습성이라고 생각하고요, 점쟁이가 새를 시켜 점괘가 적힌 종이를 뽑게 하는 것이 떠오릅니다. 너무 비난할 필요는 없겠지만 빨리 없어져야 할 일이겠지요. 이런 일에 활용되는 것이 모두 개역성경이기 때문에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2013-12-04 22:23:33 | 김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