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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친구조회수 : 5642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8일 15시 9분 45초
  •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의 극장 관람객 수가 1,00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이 읽혀지고 있을 동안에도 '친구'는 '쉬리'나 'JSA 공동경비구역'과의 차이를 더욱 벌리며 국산 영화의 흥행 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있을 터인데 비디오로 출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불법으로 유통되는 경로를 통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주로 중고등 학생들이겠지만-까지 합치면 현재 전 국민의 사분의 일 이상이 이미 '친구'를 관람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영화 속 대사 하나하나를 읊조리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의 영향력 하에 들어간 이들까지 헤아려 본다면 '친구'는 사실상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한 영화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친구'가 이처럼 대박을 터뜨리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우선은 캐스팅이 잘 된 것이 하나의 요인이다.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유오성과 TV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미남 스타 장동건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았더라면 '친구'의 흥행속도는 분명 느려졌을 것이다.

    또 하나의 흥행요인은 시나리오이다. 즉 '조폭'의 세계를 다루었다는 사실 자체로 흥행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되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내용과 불협화음을 이루는 제목 선정에서부터 디테일한 저급한 대사와 폭력 장면 하나하나를 흥행이 되도록 포장한 감독의 연출력도 주된 성공요인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흥행기록 못지 않게 '친구'가 기록을 세우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방화 사상 유래 없는 찬반 논쟁 속에 휩싸여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매스컴의 연예면, 문화면, 사회면 등에 뿐 아니라 경제면에도 기사가 실리며 급기야는 국회에서도 대정부질문을 통해 영화배우 출신인 강신성일 의원이 강력한 비판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프라인에서는 찬반논쟁이 나름대로 절제된 언어로 균형을 이루는 데 비해 인터넷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친구'의 방법론을 따라 반대의견은 철저하게 원색적으로 짓밟혀지기 때문이다.

    이제 가물에 콩 나듯 인터넷 상에 올려진 비판의 글 몇 편을 어렵사리 찾아내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건 사기다. 카피 몇 줄과 사진 몇 장을 믿고 친구와의 우정을 그린 영화려니 하고 보았다가 웬 조폭 이야기. 입장료 생각이 나더군요. … '친구'를 보고 우정에 감동 받았다는 분도 보았는데 동수가 죽는 부분을 회상해 볼까요. 선수 둘의 야습도 물리친 동수가 대낮에 자신의 본거지 앞에서 인턴 한 명에게 당합니다. 천하의 동수가? 유심히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인턴이 공격하는 순간, 동수가 피하지 못하도록 붙잡는 사람이 있었으니 동수의 시다바리입니다. 자신의 시다바리였던 동수가 '많이 커서' '니가 가라'고 맞먹는 것을 준석이 응징한 거죠. '너도 니 시다바리에게 당해 봐라.'인 셈입니다. 기습은 그렇다 치고. 우정은 고사하고 '친구'였다면 선수를 시켜서 게임을 끝내야 할 텐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죠. 흔들리는 카메라워크는 동수의 시선입니다. 십 미터도 안되는 본거지 사방에 선수들이 퇴로를 막고 있습니다. 인턴에게 자신의 나이만큼 대접을 받으며 동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 상택의 가출을 만류한 것이 우정이라는 분들도 있지만 상택은 준석이가 나도 부모를 잘 만났으면 모범생이 될 수 있다는 자기 위안적인 존재입니다. 준석의 졸개는 많으니 굳이 상택이를 끼워 줄 필요도 없을 테고 뒷날 엘리트가 될 '친구'를 잃을 수는 없는 겁니다."

    "일반인들은 친구라는 말을 들으면 우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친구라는 영화를 보지 못한 수많은 청소년들은 친구라는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친구라는 영화제목에서 떠올려지는 우정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 그 시절(중고등학교) 친구란 거의 생활의 전부이자 때로는 부모님 이상의 의미를 두기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친구라는 단어에서 우정의 참 의미를 찾으려하고 그것에 감동하고자 한다. 하지만 영화 '친구'에는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우정'은 없다. 영화의 내용은 2인자로 남기 싫어하고 정상에 서려고 하는 장동건과 유오성의 갈등에서부터 시작해서 유오성이 친구 장동건의 살인을 교사하는 비극으로 끝나는 게 전부이며 상스러운 욕설과 잔혹함이 영화의 저급함을 더해 준다. 혹자는 너는 욕 안하냐? 내지는 영화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영화이다 (급기야는 무조건 영화비판 한다고 욕부터 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잔혹함과 저급한 언어사용으로 인해 영화를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고 실망을 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미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이고, 대중 매체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너는 욕 안하냐?'라는 등의 말은 참으로 무책임한 감정이 앞서는 말이라고 본다."

    "그렇게 굉장한 여운을 주는 영화는 처음이다. 사실 그 잔인성에 질려 한참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니까 … 욕설, 폭력, 살인 … 정말 놀라웠다. 놀라기는 이 사이트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런 무서운 욕들을 할까? 그런 욕들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친구'에 난무하는 욕들이나 폭력에 무감각할 수도 있겠지 싶다. 남자친구 왈 '멋있잖아!' 뭐가 그렇게 재밌냐는 나의 말에 대한 대답이다. 멋있잖아 … 어떤 점이 멋있었을까? 매도하는 듯도 싶지만 남자들은 폭력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의 지나친 폭력은 그런 성향을 충족시켜 주는지도 … 이 영화가 얻은 큰 소득이 아닐까? 특히 극중의 진숙에 대한 폭력은 여자로서 불쾌하다. 준석은 상택에게 그녀를 주기도 하고 … 친구들의 우정인가? 마지막엔 중호가 갖게 되나? 기대감까지 합해서 영화를 본 소감은 완벽한 실망이다. 남자들이 의리, 우정 그리고 옛 향수 그런 것들이 주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의 친구들은 오해하기를 쉽게 하면서 정말 중요한 믿음을 알지 못한다. 또 그들은 친구의 뒤통수를 치는 비열함을 보이며 친구를 죽이는 비정한 사람들이다. 글쎄,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또 있는 걸까?"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무엇이 사람들을 감동적이게 했는지 의문이 갑니다. 감동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들은 극중 준석이 동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인가요? 저는 감독이 TV에 나와서 '준석이 동수를 죽인 것이 확실하고(실제 있던 일이므로 더더욱 확실) 담배를 떨어뜨리는 등의 암시를 주었음에도 관객들이 너무 준석이를 믿는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도대체 친구며 우정이라는 가치있는 단어를 그런 살인사건에 언급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보고 감동을 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네요."

    이러한 네티즌들의 의견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현재 '친구'라는 프리즘을 통해 확인되는 이 시대의 사회심리적 기반은 한마디로 '조폭문화'라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미국의 연예산업전문지 '버라이어티(variety)'는 최근 한국영화의 중심을 조폭이 차지했다는 서울발 기사를 내보냈을까. 이 이상한 조폭 붐은 '친구'에 뒤이어 개봉 중인 '신라의 달밤'의 높은 흥행고도로도 알 수 있고 또 남녀 불문하고 조폭이 주인공인 영화가 현재 6편이나 제작 중에 있다고 하는 사실로써도 입증이 될 수 있다. 또 CF나 뮤직비디오도 조폭이 휩쓸고 있는데 특히 뮤직비디오로 가면 조폭 이미지 남용이 더 심각하다고 일반 문화평론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조폭 비디오의 원조로 조성모의 '가시나무'가 지칭되는 것을 들으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욱 마음이 씁쓸해 질 수밖에 없다.
    영화나 CF나 뮤직비디오에서 조폭의 순기능이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것밖에 없지만 그 역기능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심지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나 간단한 커뮤니케이션에도 폭력적인 색깔이 입혀지곤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의 밀교주의(密敎主義)는 왜 팽창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때문이다(삿21:25). 물론 이 폭력(暴力; violence; 자연 현상, 사람의 행동, 감정 등의 격렬함, 맹렬함)의 원조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사건(창3:6) 이후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게 되는 열역학 제2 법칙(창3:17-19)이 태동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폭력이 이 지구상에 존속하며 날로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더욱이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이 확산됨에 따라 앞으로는 폭력이 이 세상에서 더욱 세련된 형태로 변환이 되면서 점차 그 혼돈의 팽창도는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례로 아주 잘 알려진 광고 카피 'just do it!'을 생각해 보자. 그 문구 다음에 남는 여운 곧 생략된 말은 무엇일까? 아마도 'whatever you want'일 것이다. 즉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라. 그것이 폭력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신(god)이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결정은 모든 것이 다 옳으며 따라서 당신은 그 결과에 책임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논리가 바로 뉴에이지 운동의 기본 정신이다.

    사실 '폭력'이 땅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은 시간 문제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면에 번성하기 시작하고 그들에게 딸들이 태어나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그들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 … 그 때에 땅도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폭력이 땅에 가득하더라. 하나님께서 땅을 보신즉, 보라,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 위에서 모든 육체가 자기들의 길을 부패시켰음이더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들로 인하여 폭력이 땅에 가득함이라. 보라,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6:1,2,11-13, 흠정역)

    아울러 예수님께서도 재림의 시기를 폭력이 땅에 가득하였던 노아의 때에 견주어 말씀하고 계시지 않는가.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으니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흠정역)

    그렇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들에게는 '복된 소망'이 있다(딛2:13).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친구(요11:11)이시며 구원자(요14:6)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폭력'은 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폭력이 네 땅에서 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황폐함이나 파멸이 네 경계 안에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부르며 네 성문을 찬양이라 부르리라."(사60:18, 흠정역)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22:20하, 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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