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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 1 - 첫 번째 편지 조회수 : 5823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3일 16시 1분 11초
  •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첫 번째 편지      

    ● H.A.아이언사이드     

    이 글은 1914년에 미국의 Loizeaux Brothers가 발간한 「Letters to a Roman Catholic Priest」를 번역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유명한 복음 전도자로 많은 영혼을 구원한 인물이다. 이 소책자는 저자가 A.M.S.라는 약칭의 한 천주교 사제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기차 여행을 하다가 이 사제를 만났으며 교양이 넘치는 사제와의 대화로 인해 큰 기쁨을 느꼈다. 헤어질 때에 저자는 사제에게 성경의 일부분을 다룬 소책자를 주었고 이에 대해 사제는 후에 편지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저자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저자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글을 쓰지 못했다. 처음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나중에 쓴 것들은 두 장씩 썼기에 남아 있다. 여기 이 글들은 남아 있는 그 편지들이며 저자는 이 글들이 천주교를 바로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로 펴냈다.

    A.M.S. 사제님께:

    친애하는 사제님! 저는 아직까지도 사제께서 보내 주신 마지막 편지 두 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토록 오랫동안 그것들을 무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나 사정상 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뒤에는 아파서 병석에 누워 몇 달을 지냈고 그러다 보니 그만 제때에 답장을 쓰지 못했습니다. 사제와 다시 편지 교환을 하기에 앞서 저는 천주교의 가르침과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으며 그래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양쪽을 다 공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뉴먼(Newman)과 치니키(Chiniquy)의 책; 기본(Gibbon)과 리틀데일(Littledale)의 책; 「카톨릭 백과사전」과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의 글; 교부들의 글, 니케아 공회 전․후와 중세와 현대 신학자들의 서적들 등등.

    사실 저는 어떤 편견 없이 또한 사실을 잘못 표현하는 일이 없이 쟁점이 되는 문제들을 사제와 함께 살펴보기 위해 이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예전보다 한결 더 진지하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은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번의 연구를 통해서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천주교 교리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천주교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 혹은 기독론 - 를 깊이 인정하는 데 대해서는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하나님 우편으로 높임을 받으셔서 통치자와 구원자가 되신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두는 한 몸 즉 보편적인 교회(The Catholic Church)의 한 지체입니다. 이 땅에서 그분을 믿는 참 신자는 모두 다 성령님의 침례를 통해 그 한 몸의 지체가 됩니다.

    그러나 제가 예전보다 더 확실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로마의 주교 즉 교황과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크게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제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이처럼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심각한 저주의 말씀을 선언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지상에서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는 로마의 교황이 이처럼 두려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갈1:6-9).

    마지막에 보낸 편지에서 ‘복된 성사 안에 담긴 실제적 임재야 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제께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 천주교인들이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복된 성찬 속에 실제로 임재합니까? 아니면 그것이 단지 상징에 불과합니까?” 이제 저는 아주 확신 있게 다음과 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역사와 고대의 모든 기록은 사제의 주장 즉 미사에서 빵 조각이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반박합니다.”

    저는 사제께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무모하신 분이라는 점에 사실 크게 놀랐습니다. 분명히 사제께서는 교부들과 역사에 대해 잘 아십니다. 특히 교부들의 글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사제께서는 니케아 공회 이전 시대의 교부들이 어디에서도 지금 사제께서 주장하시는 그런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천주교가 수세기 동안 그런 교리를 주장해 왔다는 것은 제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동방 교회 즉 그리스 정교회가 그런 교리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루터도 이와 비슷한 것을 가르쳤으며 헨리 8세 이후의 일부 영국 국교회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도 천주교의 교리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가르침들은 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가르침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고대의 가르침은 최근의 이러한 가르침들이 전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제가 지금 ‘고대의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실수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의 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권위 있는 기록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경에 기록된 ‘주의 만찬’에 관한 말씀 즉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사제 앞에 다 제시하면서 사제께서 가능한 한 니케아 공회 이후의 신학자들이 세워 놓은 이론은 잊어버리고 단지 이 말씀들만을 제대로 평가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제께서는 또한 제가 인용한 성경 말씀들이 천주교의 해석을 지지하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6장 26-2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그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의 기사도 비슷하지만 이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저는 마가복음 14장 22-25절을 인용하려 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이 다 그것을 마시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성속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하나님의 왕국에서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다시는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의 기사는 두 절(눅22:19-20) 밖에 되지 않습니다(17-18절은 주의 만찬이 제정되기 전에 있었던 유월절의 잔을 가리킵니다).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그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라.

    사제께서 아시다시피 성도 요한은 기독교의 어떤 명절을 제정한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관해서는 나중의 편지에서 언급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3-29절에서 주의 만찬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느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느니라.

    이제 주의 만찬에서 ‘잔’에 관하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문자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상징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도록 저는 한 가지를 더 묻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미 피를 흘리셨습니까? 아니면 아직 흘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분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니라”(This is my blood which is shed). 아직 피를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미 흘렸다고 하시므로 “이것은 나의 피다.”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흘렸다.”(which is shed)는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사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잔에 담긴 액체를 가리켜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the fruit of the vine)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액체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로 변했다면 사실 우스운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논제는 마가복음 기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으며 누가복음은 이를 더 강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This cup is the new testament in my blood).

    사제께서는 과연 그때에 주님께서 “이 잔 속에 새 언약이 담겨 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 잔을 마시면 새 언약을 마시는 것이다.”라고 문자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상징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주님께서 이 ‘잔’에 대해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음이 분명하다면 주님께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고 하실 때에 이것을 문자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논리적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 이미 그분의 몸이 우리를 위해 주어져서 희생되고 부셔지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빵에 대해서도 상징적으로 말씀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많아도 한 빵이요,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그 한 빵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한 빵이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을 상징적으로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초기의 사도 교회들이 다 이런 것을 주장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된 배도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런 것에 다른 어떤 의미도 첨가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혼과 신성이 하나 속에서 실제로 임재한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그로 인해 일반 성도들에게는 잔을 주지 않는 것은 스스로 실재적 임재의 교리 즉 화체설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빵에 대한 것이며 그것은 죽음에 넘겨진 그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잔은 그리스도의 몸과는 구별된 그분의 피를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직 몸과 피의 분리가 실제로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방식으로 주의 만찬을 대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고전11:28). 여기서도 이것은 여전히 빵이며 잔입니다. 빵과 잔에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빵과 잔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사제님! 이제 저는 매우 심각하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제께서는 천주교의 미사를 행하면서 우리가 방금 읽은 성경 구절 속에서 드러난 주의 만찬의 아름다움과 단순함을 조금이라도 발견하신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는 평신도와는 구별된 성직자 계급 혹은 거창한 고위 계급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크리스천 형제들이 함께 모여 기독교의 단순한 명절을 지키는 것뿐이며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건하게 두려움 마음으로 기억하면서 그 빵을 먹으며 그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신실한 벗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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