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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편 9절)

  • 마태복음 8장 2절: “경배하다”와 “절하다”는 완전히 다르다조회수 : 7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5년 5월 15일 18시 58분 13초
  • “경배하다”와 “절하다”는 완전히 다르다 – 현대역본들이 감추고 있는 진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와 “경배”했습니다. 이 ‘경배’는 단순히 몸을 굽히는 ‘절’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그분께 영적으로 엎드리는 행위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경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roskuneo (Strong's #4352)인데, 이 단어는 본질적으로 **“신적 존재 앞에서 엎드려 절하며 섬김을 드리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 NIV, NASB 등 현대역본들은 이 proskuneo를 ‘경배하다’로 충실하게 번역하지 않고, 일부 구절에서는 ‘절하다’, ‘무릎 꿇다’, ‘엎드리다’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단어 선택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8장 2절에서는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정확하게 **“한 나병 환자가 와서 그분께 경배하며”**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현대역본들은 이 장면을 “무릎을 꿇고”, 혹은 **“절하고”**라는 말로 약화시켜, 경배의 본질적인 의미를 가려버립니다.


    같은 일이 마태복음 9장 18절, 마태복음 15장 25절, 마태복음 18장 26절, 마태복음 20장 20절, 마가복음 5장 6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이 구절들 모두 킹제임스 성경에는 **‘경배하다(worshipped)’**로 되어 있지만, 개역성경과 NIV 등은 ‘무릎을 꿇다’ 혹은 ‘절하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NASB는 일부 구절에서 아예 ‘경배하다’를 삭제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경배하다’와 ‘절하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경배하다(worship)’는 영적 의미를 포함한 말입니다. 그것은 곧 마음과 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고 드리는 행위입니다. 반면에 ‘절하다’ 혹은 ‘무릎 꿇다’는 단순히 신체적 자세를 묘사할 뿐이며, 경배와 같은 신학적 깊이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헬라어 원문을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경배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proskuneo입니다. 이는 신에게 바치는 경배를 말하며,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정당한 행위임을 전제합니다. 반면, ‘절하다’ 혹은 ‘엎드리다’에 해당하는 다른 헬라어 단어들은 kampto, klino, tithemi 등인데, 이는 단순히 몸을 굽히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을 조롱하던 군인들이 무릎을 꿇으며 경배하는 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원문에는 **‘무릎을 꿇고(tithentes)’와 ‘경배하더라(prosekunoun)’**가 같이 나오는데, 이는 몸의 자세와 영적 행위가 분리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왜 현대역본들은 이처럼 ‘경배하다’는 표현을 ‘절하다’, ‘무릎 꿇다’ 등으로 의도적으로 바꾸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들 역본이 **천주교 계열의 소수사본(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을 기반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본들에는 곳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거나, 삭제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본문 변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NIV는 동일한 단어 proskuneo를 사용하는 다른 구절들, 예컨대 마태복음 2장 11절(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함), 마태복음 28장 9절(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함), 요한복음 9장 38절(소경이 경배함) 등에서는 ‘경배하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구절에서는 ‘경배하다’라고 번역하고, 또 어떤 구절에서는 ‘절하다’로 약화시키는 것입니까? 이것은 의도적인 불일치이며, 일관성 없는 번역 방식입니다.


    결국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장면을 흐리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선생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1장 6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4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경배를 받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본문 중 하나입니다. 이를 삭제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흐리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결론

     

    경배는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신적 행위이며, 예수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런데 현대역본들은 일부 구절에서 그 경배를 단지 ‘절하다’로 바꾸거나 아예 삭제해, 예수님의 신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단순한 해석의 차원이 아니라, 본문 자체가 변개된 소수사본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되어야 하며, 경배는 결코 단순한 절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드려진 ‘경배’를 ‘절’로 바꾸는 그 어떤 시도에도 속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주님의 신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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