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수 사본’은 교리적으로 위험한가?
요한일서 4장 3절은 단순한 문장 하나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식별하는 기준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본문이 **소수사본을 따르는 현대 성경들(NIV, 개역, NASB 등)**에서는 심각하게 삭제되었고, 교리적 파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공인본문 / 다수사본 기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요일 4:3)
이 말씀은 기독론의 핵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임을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현대 역본 (NIV, 개역, NASB 등)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나니…”
(요일 4:3, 개역 / NIV)
▶ 핵심 삭제: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셨다”**는 고백이 완전히 사라짐
▶ 결과: 단순히 ‘예수를 시인하는가’로 바뀌어, 정체불명의 다른 예수도 통과 가능
왜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가?
성육신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의 영’
요한은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들은 이 시험 기준의 본질을 삭제해 버립니다.
"모든 영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라."
(요일 4:2 요약)
삭제되면 어떻게 되는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만 외치면 통과가 됩니다. 다른 예수(고후 11:4), 다른 복음(갈 1:6), 다른 영(고후 11:4)도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헬라어 본문 비교: 삭제의 실체
Scrivener’s Textus Receptus (다수사본)
τὸν Ἰησοῦν Χριστὸν ἐν σαρκὶ ἐληλυθότα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
Nestle-Aland / UBS (소수사본)
τὸν Ἰησοῦν [공란]
(그저 ‘예수를 시인하는가’만 남고, 성육신은 삭제됨)
소수사본은 고의적으로 성육신이라는 핵심 교리를 삭제하고 있음
이 본문 삭제는 결코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구분다수사본 (TR / KJV)소수사본 (NIV, 개역, UBS)
핵심 고백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단순히 ‘예수를 시인함’
적그리스도 기준성육신 부정불분명함, 기준이 무너짐
기독론명확히 보호흔들림 발생
신앙 시험영적 분별력 제공오류 가능성 증가
결론: 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된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말씀을 ‘삭제’하면 저주가 따른다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생명책에서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계 22:19)
성경 번역은 교리를 지켜야 한다
성경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교리의 구조물이다.
핵심이 빠지면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없다.
**소수사본(Nestle-Aland, UBS)**은 천주교의 라틴 벌게이트에서 파생된 왜곡된 본문으로,
성육신, 예수님의 신성, 십자가 피, 부활 등 핵심 교리를 삭제하고 있다.
믿음을 지키는 길: 바른 성경, 바른 본문
**킹제임스 성경(KJV)**은
성육신,
예수님의 피,
그리스도의 신성,
지옥의 실재
…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입니다.
오늘날 진리의 시험은 성경 본문 자체에 있습니다.
소수사본을 따르는 현대역본은 진리를 희석시키고,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것들과 타협하도록 유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은 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 요한일서 4:3, 킹제임스 성경
2025-05-15 17:25:02 | 관리자
이사야서 14장 12절 루시퍼
현대 역본이 루시퍼를 지운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마귀, 곧 사탄의 타락에 대해 가장 분명히 묘사된 구절 중 하나가 이사야 14장 12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마귀의 고유 이름인 **루시퍼(Lucifer)**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한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바닥으로 떨어졌는가!”
(사 14:12)
그러나 개역성경, NIV, NASB, 공동번역 등 현대 역본들은 이 단어를 모두 **‘계명성’ 또는 ‘새벽별(Morning Star)’**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 번역의 심각한 교리적 문제
‘루시퍼’는 마귀의 고유명사이다
히브리어 원어: Heylel (הֵילֵל)
어근: Halal (הָלַל) — "빛을 내다, 찬양하다"
의미: “빛나는 자” 또는 “영광을 지닌 자” → 이는 타락 전 천사장 루시퍼를 지칭
그러나 현대 역본들은 이를 **‘계명성(Morning Star)’**으로 둔갑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와 동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나는 새벽별’**이라 하셨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 빛나는 새벽별이라.”
(요한계시록 22:16, KJV)
따라서 이사야 14장에서 마귀를 지칭하는 말로 **‘Morning Star’**를 사용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를 동일시하는 신성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맥상, 결코 예수님일 수 없다
12절: “하늘에서 떨어진 자” — 예수님이 아니라 타락한 루시퍼
13–14절: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아지리라” —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심 (요1:1), 이 말씀은 교만한 피조물의 언어
15절: “지옥으로 끌려 내려가리라” — 예수님이 아니라 심판받을 마귀
그런데 현대 역본들은 이 존재를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번역하여 전면적인 교리 왜곡을 초래합니다.
현대 역본의 왜곡 요약
항목킹제임스 성경 (KJV)현대 역본 (NIV, 개역, NASB 등)
본문 인물루시퍼 (마귀)계명성/새벽별 (예수님의 칭호)
정체성교만하여 하늘에서 쫓겨난 마귀의미 모호, 그리스도와 혼동 가능
결과지옥으로 내려감무덤(스올)로 완화
신성 모독 여부없음예수님을 마귀와 동일시하는 신성 모독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이 모든 문제는 현대 역본들이 따르는 본문이 **천주교 소수 사본(Alexandrian Text)**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본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로마 카톨릭이 보존해온 조작된 사본들
사탄의 정체를 흐리게 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편집됨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다수사본(공인본문)**에는 Lucifer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음
결론: 왜 킹제임스 성경(KJV)을 사용해야 하는가?
루시퍼라는 마귀의 고유 이름을 유일하게 지켜낸 성경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히 구별하며, 신성 모독을 방지
수천 개에 달하는 다수사본의 일치된 전통을 따름
마귀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어 교리의 순수성을 지킴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빼지 말고…”
― 신명기 4:2
말씀을 지우고 바꾸는 자는 마귀의 편이며,
말씀을 보존하고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2025-05-15 17:17:50 | 관리자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되어야 한다 — 왜 천주교 소수사본은 신뢰할 수 없는가?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다음의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참된 말씀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번역체나 문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의 삭제와 추가, 즉 교리의 왜곡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존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끝까지 보존하신다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 시편 12:7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마태복음 24:35
그렇다면 오늘날 어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일까요?
현대 역본들, 왜 문제가 되는가?
현대 성경 번역(NIV, NASB, 개역개정, 공동번역 등)은 모두 천주교 소수사본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 소수사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티칸 사본 (Codex Vaticanus, B)
시내 사본 (Codex Sinaiticus, א)
알렉산드리아 사본 (Codex Alexandrinus, A)
이 사본들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 오랫동안 보관·관리되어 왔고, 다수사본(안디옥 계열)과는 전혀 다른 본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수 사본들의 특징은?
많은 구절들이 아예 삭제되어 있음
예수님의 신성, 보혈, 부활, 천국 등 핵심 교리와 관련된 내용이 희미하게 되어 있음
사도적 전통이 아니라 후대 종교 권력(카톨릭)의 영향 아래 편집됨
대표적 왜곡 사례: 누가복음 11장의 주기도문 삭제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기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눅 11:2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며, 악에서 우리를 구출하옵소서.”
― 눅 11:4
개역개정/NIV/공동번역/NASB 등:
“하늘에 계신” 생략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생략
“악에서 구출하옵소서” 생략
이 모든 삭제는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의 소수사본을 따른 결과입니다.
이는 천주교 계열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비(非)사도적 본문입니다.
이것이 왜 심각한가?
성경은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 안 된다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빼지 말고…”
― 신명기 4:2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 계시록 22:19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말씀을 훼손한 자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킹제임스 성경(KJV, 흠정역)은 안디옥 계열의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공인본문)에 기초하여 만들어졌습니다.
✔ 이 본문은 5,800개 이상의 일치하는 사본들이 존재하고
✔ 초대 교회 시대부터 계속 사용되어 온 역사적 전통을 지니며
✔ 교리적으로 완전한 일관성을 보여 줍니다.
반면 소수사본은?
문장의 흐름이 어색하고,
중요한 구절이 삭제되며,
복음의 핵심인 부활·승천·하늘의 왕국·예수님의 신성이 흐려집니다.
결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을 뿐 아니라 보존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말씀을 빼앗아 가며,
종교 권세는 말씀을 교묘히 바꾸었고,
오늘날 지식인들은 그것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 (잠 22:28)
그 지계표는 바로 보존된 말씀, 다수사본에 기초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믿음을 지키는 길입니다.
2025-05-15 17:06:09 | 관리자
누가복음 24장 51절, 왜 어떤 성경에는 빠져 있을까?
― 승천 사건을 삭제한 현대 성경들의 심각한 문제
“예수님의 승천이 성경에서 빠져 있다고?”
이 말을 처음 듣는다면 아마 의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역성경, NASB, ESV, NIV 등 현대 성경들은 누가복음 24장 51절의 중요한 내용을 삭제하거나 각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승천 사건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명확한 승천 묘사
누가복음 24:51 (KJV 흠정역)
“그들을 축복하실 때에 그분께서 그들을 떠나서 위로 들려 하늘로 들어가시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승천 사건을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기록은 사도행전과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동일한 저자, 동일한 기록: 사도행전 1:1–2
“...그분께서 친히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해 명령들을 주신 뒤에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사도행전 1:2)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분명히 자신이 쓴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승천까지”**를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승천 구절이 빠져 있다면, 사도행전 1:2의 진술은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은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역본누가복음 24:51
개역개정“그가 그들을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 “하늘로 들려 가심” 괄호(삭제의 의미로 보임)
NIV / ESV / NASB대부분 “he left them” 또는 “was taken up” 구절에 각주: “일부 사본에는 없음”
공동번역 / 천주교 성경유사하게 삭제 혹은 약화된 표현 사용
이로 인해 예수님의 승천이라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 모호하거나 삭제되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연결 고리가 단절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문제의 핵심은 어떤 사본을 근거로 삼았는가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근거: 다수사본 (공인본문, Textus Receptus)
전체 필사본의 99% 이상이 포함
승천 구절이 명확히 기록
현대역본의 근거: 소수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사본 자체가 불완전하거나 편집 흔적 있음
역사적 신뢰성 낮고, 가톨릭 중심의 편집 경향 강함
중요한 논리적 모순
사도행전 1:2는 분명히 “승천까지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51에서 “들려 올라가셨다”는 구절을 지우면 어떻게 됩니까?
결과적으로 누가가 거짓말을 한 것이 되고, 성경의 권위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다수사본 기반의 킹제임스 성경은 이 모든 모순 없이 정확하게 승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어떤 성경을 선택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승천은 복음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중재자로 계시기 때문입니다(히 9:24, 롬 8:34).
승천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말씀이 맞지 않는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복음의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
― 잠언 22:28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거나 삭제한 성경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계시가 온전히 담긴 보존된 성경,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합니다.
2025-05-15 15:11:34 | 관리자
마가복음 16장 9–20절은 원래 성경에 없는가?
― 왜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 온전히 보존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사본을 근거로 성경을 번역했느냐에 따라 말씀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가복음 16장 9–20절입니다.
현대 성경들의 각주
개역성경, NIV, NASB,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 성경까지 모두 이렇게 각주를 달고 있습니다:
“9–20절은 오래된 사본에 없다.”
“후대에 첨가된 구절로 보인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KJV) 은 이 12구절을 온전히 담고 있으며, 어떤 주석도 없이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구절은 나중에 누가 집어넣은 것일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1. 문맥을 살펴보자
마가복음은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언합니다.
복음(Gospel)은 기쁜 소식, 즉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 복음의 위임을 포함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16장 8절에서 끝나면 내용이 이렇습니다:
여인들이 무서워 떨며 도망가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과연 “복음의 끝”이 될 수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이 빠진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2. 9–20절에 담긴 핵심 요소들
구절내용 요약
9–11절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심
12–13절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
14절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심
15–16절복음 전파 명령: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
17–18절믿는 자들에게 따를 표적들
19절예수님 승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심
20절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며 주께서 함께 역사하심
이 구절이 없다면 복음의 완결이 사라집니다.
3. 사본 증거는 어떠한가?
마가복음을 포함한 사본은 약 1,500개 이상 존재
그중에서 단 2개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에서만 9–20절이 없음
사본의 99.9%는 9–20절을 포함하고 있음
즉, 소수 사본을 근거로 9–20절을 빼거나 의심하는 것은 명백히 비논리적이고 불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사진 증거: 시내 사본의 편집 흔적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클라우드 선교사가 직접 촬영한 시내 사본에는 9–20절을 기록할 공간이 남아 있고 지운 흔적이 있음이 분명히 보입니다.
즉, 이 구절은 애초에 있었지만 누군가의 의도로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왜 이 구절을 빼려 하는가?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복음 전파 사명
기적과 표적의 약속
예수님의 승천과 권위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복음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말씀의 핵심과 권위를 공격해 왔고, 이러한 공격은 성경 사본과 번역의 역사 속에서도 계속되어 왔습니다.
결론: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지계표’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 (잠언 22:28)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사본(공인본문)**을 근거로 하며, 수천 년간 보존되어 온 정통 기독교의 말씀의 유산입니다.
반면, 소수사본에 근거한 개역성경, NIV, NASB 등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삭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마가복음 16장 9–20절은 복음의 완성입니다.
이 구절이 없다면 복음은 중단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믿는 자는 의심하지 말고 보존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을 손에 들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2025-05-15 14:55:52 | 관리자
마가복음 10장 24절, 구원이 어려운가?
정말 모든 성경은 다 똑같을까요? – 킹제임스 vs 현대역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차피 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느 성경이나 다 똑같지 않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매우 순진하거나, 사실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주장입니다.
실제로는 ‘어떤 사본을 근거로 하여 번역되었는가’에 따라 성경은 핵심 교리에서조차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는 단지 단어 선택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과 구원 진리에 관한 문제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매우 심각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vs 개역성경 vs 현대역본(NIV 등)의 예시 비교
킹제임스 흠정역 (다수사본 기반)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들에 깜짝 놀라더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얘들아,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심히 어렵도다!
(마가복음 10:24, 흠정역)
핵심 요점:
어려운 이유를 명확히 밝힘 → “재물을 신뢰하기 때문에”
‘믿음’과 ‘신뢰’에 대한 교리적 핵심을 보존
개역성경 / NIV / ESV / 공동번역 등 (소수사본 기반)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문제점:
왜 어려운지 설명 없음
중심 교리가 삭제됨 → ‘재물을 신뢰하는 자’라는 조건이 빠짐
마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식으로 일반화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구분다수사본 기반소수사본 기반
대표 역본킹제임스 성경(KJV), 루터 성경 등개역성경, NIV, ESV, 공동번역 등
사본 계통안디옥 계열 (전통 교회 사용)알렉산드리아 계열 (천주교 벌게이트 기반)
수량약 5,000개 이상 다수 필사본소수의 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교리 보존성정확한 교리 보존중요한 구절 누락 또는 변경
예시 문제마10:24, 요일5:7, 마18:11 등에서 명확하게 드러남
단순 번역 문제가 아니다 — 교리 문제다
이 문제는 단지 “의역”이냐 “직역”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 예수님의 신성, 성령님의 역사, 믿음과 은혜의 관계 등
핵심 진리들이 사라지거나 왜곡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2:33 – 킹제임스는 ‘요셉과 그의 어머니’, 현대역본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 예수님의 신성을 흐림
요한일서 5:7 – 킹제임스에는 삼위일체의 가장 명확한 구절이 있음. 대부분 현대역본에서는 아예 삭제됨
마태복음 18:11 –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 목표 구절 → 개역성경과 NIV에서는 삭제됨
결론: “모든 성경이 같다”는 말은 무지에서 나온 착각이다
오늘날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다양한 한글 성경들은 서로 다른 사본을 근거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단어 선택이나 번역 스타일이 아니라 신학과 교리의 핵심을 흔드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왜곡 없이 진리를 보존한 번역본이다
다수사본(공인본문) 기반
교리적으로 신성, 구원, 믿음, 성령에 대한 핵심이 살아 있음
수백 년 동안 성도들이 실제로 사용해 온 성경
개역성경, NIV, ESV 등은 천주교 소수사본에 근거한 잘못된 요소가 많다
중요한 단어 삭제, 문장 왜곡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게 하고
은혜가 아닌 행위 중심 해석으로 흐르게 만듦
말씀은 정확히 번역되어야 하며, 교리를 왜곡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다수사본에 기초한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KJV)
2025-05-15 14:50:13 | 관리자
‘아마’와 ‘세마’는 다르다 – 성경 번역은 원어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성경 번역에서 우리 문화에 맞는 단어를 끼워 넣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역사와 지역, 언어 속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단어 하나하나도 그 당시의 맥락과 환경에 맞게 정확히 번역되어야 마땅합니다.
오늘은 많은 성경 독자들이 혼동하는 **‘아마’(亞麻)와 ‘세마’(細麻)**의 차이를 통해 왜 성경 번역에서 식물 이름조차도 원어에 충실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경의 ‘아마’는 린넨(Linen)이다
성경에서 ‘아마’(Heb. pishteh, 그리스어 linon)는 린넨, 즉 아마 식물의 섬유로 만든 천을 의미합니다.
영어 KJV 성경: "fine linen" / "linen cloth"
용도: 제사장의 옷, 성막의 휘장, 의로운 행실의 상징 (출28:39, 계19:8)
아마(Linum usitatissimum)의 특징:
유대 지역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중동에서 널리 재배
키 1m 내외, 푸른 자주색 꽃, 줄기 섬유로 린넨을 짐
성경에서 고운 옷, 의식용 옷감으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됨
“또 너는 고운 아마로 속옷을 만들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며...” (출28:42, 흠정역)
2. 그러나 ‘세마’는 고운 ‘삼’ 또는 ‘마’로 오해되기 쉽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종종 ‘세마포’ 또는 ‘고운 세마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세마’를 **‘마’(삼, Hemp)나 ‘삼베’**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세마포’는 실제로 ‘fine linen’, 즉 고운 아마 천을 가리킵니다. 성경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삼(마, Hemp)**이 재배되지 않았습니다.
‘마’(삼)의 정의 (한국어 사전 기준):
삼과 식물, 중앙아시아 원산
주로 동아시아에서 재배 (중국, 한국 등)
줄기에서 섬유를 얻어 삼베를 짜는 용도
반면 성경 시대의 이스라엘은:
삼을 재배하지 않았고
아마를 사용해 린넨 옷감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즉, **성경에서 ‘세마’는 마(Hemp)가 아니라 아마(Linen)**입니다. 그런데도 번역자가 문화적 친숙성이나 언어 감각에 따라 ‘마’로 번역하면 성경 본래의 맥락이 심각하게 왜곡됩니다.
3. 왜 이런 번역 실수가 심각한가?
역사적/지리적 정확성 결여
성경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적 배경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한국에서 자라는 작물과 구분해야 합니다.
교리적 의미 왜곡
고운 아마 옷은 성경에서 의로움을 상징합니다 (계19:8).
만약 ‘세마’를 삼베나 마로 오역하면, 구원의 상징을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 해석에 혼란을 준다
번역이 불일치하면, 같은 헬라어 linon이 어떤 곳에서는 ‘아마’, 어떤 곳에서는 ‘세마’, 또 다른 곳에서는 ‘삼’으로 바뀌며 일관된 해석이 어려워집니다.
4. 동일 단어는 동일하게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 번역의 기본 원칙입니다.
같은 원어는 같은 번역어로 유지해야 하고, 당시 유대 지역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사물이나 작물의 이름을 다른 문화권의 것으로 바꾸면 안 됩니다.
▶ pishteh 또는 linon = 아마 (Linen)
'세마포', '마', '삼베'와 혼용 NO
결론: 성경은 문화적 번역이 아니라 정확한 전달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특정한 시공간 속에 기록하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유대인의 문화, 역사,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우리는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문화에 접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 하신 경고는 단어 하나도 소홀히 번역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2025-05-15 14:42:31 | 관리자
마태복음 26장 3절 수제사장과 대제사장은 다르다 – 오역이 만든 교리 혼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중 일부는, **‘대제사장’(High Priest)**과 **‘수제사장들’(Chief Priests)**의 개념을 혼동하거나 통일해버리는 심각한 오역을 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 여러 명 있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고, 유대 사회와 제사 제도의 본질을 왜곡하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두 용어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고, 왜 이것이 중요한지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 대제사장은 항상 한 명이다
성경에 따르면, **대제사장(High Priest)**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제사장의 수장으로서, 이스라엘에 한 명만 존재했습니다.
그는 오직 속죄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레16:17),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론의 직계 혈통에서 이어지며, 레위기의 제사장 규정 안에서 가장 높은 영적 책임자였습니다.
“...아론을 취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히 구별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게 하라.” (출 28:1)
2. 그런데, 왜 복수의 '대제사장들'이 나올까?
개역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마 26:3, 개역)
여기서 문제는 복수 표현인 **‘대제사장들’**입니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일 수 없듯, 대제사장도 한 명만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복수형으로 번역해버리면, 독자들은 마치 여러 명의 대제사장이 함께 존재했던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3. 킹제임스 성경은 명확하게 구분한다
킹제임스 성경은 정확히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n assembled together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unto the palace of the high priest, who was called Caiaphas.” (Matt. 26:3)
그때에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함께 모여(킹제임스)
기존의 개역성경을 따르면 한 해에 대제사장이 다수였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즉, 가야바는 유일한 대제사장(High Priest)이고,
함께 모인 이들은 수제사장들(Chief Priests), 즉 고위 성전 지도자들입니다.
4. 수제사장(Chief Priests)은 누구인가?
**‘수제사장’**이란 대제사장을 보좌하는 고위 제사장들로, 다음과 같은 성전 직책자들을 포함합니다:
성전 대장 (대제사장의 후계자)
주간 계열 책임자 (24제 계열)
매일 계열 책임자 (156제 계열)
성전 감독자
성전 재무관
이들은 단지 종교의식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 되어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자들 중에도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마 26:3-4).
5. 카톨릭 성경은 ‘수석 사제’라고 번역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카톨릭 성경이 **‘수제사장’**을 **‘수석 사제’**로 번역하여 대제사장과 구분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카톨릭 성경)
비록 카톨릭 교리가 다른 부분에서 오류가 있지만, 이 부분의 번역만큼은 역사적 사실과 맞는 정확한 구분을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6. 왜 이 구분이 중요한가?
구분대제사장 (High Priest)수제사장들 (Chief Priests)
숫자항상 한 명복수 가능
역할속죄일 지성소 출입, 백성 중보자성전 행정과 재정, 교사, 공회원
지위제사장의 최고 수장고위 참모진, 보좌역
대표 인물가야바가야바 주변의 성전 엘리트들
만일 이 구분이 흐려지면 예수님 당시의 영적 권력 구조, 제사장 계급의 부패, 그리고 예수님께서 왜 그들과 부딪히셨는지 등의 이해가 모호해집니다.
성경 해석의 원칙: 동일 용어는 동일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성경 번역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 중 하나는 같은 단어는 항상 같은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King (왕)은 King, Priest (제사장)는 Priest, Kingdom (왕국)은 Kingdom,
그리고 High Priest는 대제사장, Chief Priests는 수제사장으로 정확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결론: 우리는 왜 바른 번역 성경을 사용해야 하는가?
복수의 ‘대제사장들’이라는 번역은 역사적 사실에도 맞지 않고,
예수님 당시의 정확한 권력 구조와 교리적 이해를 왜곡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수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을 명확히 구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원형 그대로 전달하는 데 충실합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 안에 참된 제사장의 정신이 있는가?
마태복음 26장 3-4절에서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거룩했지만, 속은 타락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안에서 어떤 기능이나 직분을 맡고 있다면,
그 책임이 영적 위치에 맞는 순전한 헌신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진리를 정확히 알고 가르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첫 걸음입니다.”
지금 이 시간, 정확한 말씀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 삶을 바르게 세울 수 있습니다.
2025-05-15 14:33:20 | 관리자
마태복음 26장 41절, “영은 원하나 육이 약하도다”
― Spirit을 **‘마음’**이라 번역한 개역성경의 치명적인 오역
마태복음 26장 41절 – 무엇이 원한다고 하셨는가?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기반)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나 육이 약하도다, 하시니라.”
개역개정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헬라어 원문
τὸ μὲν πνεῦμα πρόθυμον, ἡ δὲ σὰρξ ἀσθενής
→ 직역: “영은 참으로 간절하나 육은 약하다”
⚠ 문제의 핵심: **영(Spirit)**을 왜 **마음(mind/heart)**으로 바꾸었는가?
헬라어 pneuma는 성경 전체에서 **‘영’(spirit)**으로 번역되어야 할 단어입니다.
이는 영어 성경(KJV, NIV, NASB 등)과 전 세계 대부분의 번역에서도 일관되게 spirit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개역성경은 이곳에서 이를 **‘마음’**으로 바꾸었습니다.
“영(spirit)은 원하나” → “마음은 원이로되”
이 단어 하나의 오역으로 인해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구분이 무너지고 맙니다.
‘영’과 ‘마음’은 성경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다
항목영 (Spirit)마음 (Heart/Mind)
헬라어 원어pneumakardia / nous
기능하나님을 의식하는 기능 (영적 교통 기관)생각, 감정, 의지 등 혼의 요소
용도성령과 교제, 계시 수용, 거듭남의 자리사고, 정서, 선택 등의 인간 내면 활동
예시 성구요 4:24 – “하나님은 영이시니...”
롬 8:16 –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마 22:37 – “네 마음을 다하고...”
잠 4:23 – “마음을 지키라...”
결론: 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 기관이고, 마음은 혼(정신)의 일부입니다. 둘은 명확히 다른 개념입니다.
왜 이 번역이 위험한가?
1. 구원론적 왜곡
성경은 우리가 거듭날 때 영이 살아나는 것(엡 2:1, 요 3:6)을 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화의 과정입니다(롬 12:2).
영을 마음으로 바꾸면, 영적 변화와 구원의 핵심이 흐려지고,
단지 결심이나 감정의 변화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2. 혼과 영의 구분이 무너짐
히브리서 4:12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혼과 영과...를 찔러 가르기까지 하며”
그런데 개역성경처럼 ‘영’을 ‘마음’으로 계속 바꾸면
혼과 영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고,
혼적 신앙(감정 중심, 결단 중심)으로 기울게 됩니다.
3. 기도와 깨어 있음의 오해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육체는 지쳐 졸고 있었지만 영은 간절히 깨어 있으려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걸 **‘마음은 간절하나’**로 바꾸면, 그들의 신앙을 자기 의지나 결심 수준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왜 ‘영(spirit)’은 영으로 번역되어야 하는가?
성경 해석의 일관성 유지
모든 성경이 pneuma를 ‘영’으로 번역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직접 교통 기관이라는 성경적 개념 때문이다.
신학적 구조 보존
영(Spirit)과 혼(Soul), 몸(Body)의 삼분법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구조이다 (살전 5:23).
이것을 ‘마음’으로 바꾸면 삼분법이 무너지며 이단 해석에 문을 연다.
영적 진리 수용을 위한 필수 요소
성령께서는 우리 영과 교제하신다 (롬 8:16).
마음(mind)이나 혼(soul)은 성령의 직접 통로가 아니다.
결론: 영은 영으로,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영은 원하나 육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내 마음은 하고 싶다”는 감성적인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육체는 지쳤으나 그들의 속 사람, 즉 거듭난 영은 깨어 있고자 하는 의지를 지녔다는 고백이다.
이 진리는 우리 신앙의 본질이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따라서 개역성경처럼 pneuma를 마음대로 ‘마음’으로 번역하면,
성경 해석은 점점 심리학적 해석 또는 행위 중심 신앙으로 흘러가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단어 하나가 교리를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원어와 일치하고 교리를 일관되게 전달하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과 같은 바른 번역을 사용해야 한다.
“영은 원하나 육이 약하도다” (마 26:41, 흠정역)
영은 하나님과의 교제 통로이며, 이것이 바로 신자의 정체성이다.
이 진리를 마음(mind)으로 바꾸는 번역은… 진리를 가리는 일이다.
2025-05-15 14:24:55 | 관리자
사도행전 1장 6절, 예수님이 전하신 ‘왕국’은 어디로 갔는가?
― 개역성경의 오역이 감추어 버린 메시아 왕국의 진실
1.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 그분과 제자들이 전한 복음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하는 왕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선포하신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마 4:17, 흠정역).
이 왕국은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예언된 '메시아의 왕국',
즉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왕으로서 오셔서 실제로 이 땅에 세우실 하늘로부터 오는 통치 체제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 중대한 진리를 모두 **‘천국’**이라는 추상적 표현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은 예수님이 죽은 후 가게 되는 '하늘나라'만을 전하신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2. 사도행전 1장 6절, 제자들의 질문은 ‘이스라엘의 왕국 회복’이었다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 다시 회복시키려 하시나이까?” (행 1:6, 흠정역)
개역성경: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제자들의 관심은 언제나 예수님이 실제로 이 땅에 세우실 왕국이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행 1:3).
행1:3절그분께서 수난을 받으신 뒤에 또한 그들에게 절대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자신이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시고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자신을 보이시며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들을 말씀하시고
그러나 개역성경은 ‘왕국’이라는 단어를 **‘나라’**로 무력화시켰고,
‘그 왕국’을 ‘이스라엘 나라’로 바꾸어 이 중요한 신학적 맥락을 완전히 흐려버렸다.
이 결과로 한국 교회에는 “예수님은 천국을 전했다”는 왜곡된 메시지만 남았고,
이스라엘의 회복, 천년왕국, 메시아의 지상 통치 같은 성경적 주제들은 거의 잊혀졌다.
3. 하늘의 왕국은 실제로 땅에 임할 왕국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우실 왕국을 끊임없이 가르친다.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흠정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그 왕국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왕국’을 ‘나라’로 바꾸며 이를 비현실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모호하게 만들었고,
결국 한국 교회는 성경의 핵심 메시지인 왕국 교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4. 이 왕국은 왜 지금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왕국을 제시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분을 거절했고 (마 23:37–39), 결국 왕국은 일시적으로 연기되었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요 1:11)
이 거절로 인해 왕국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야 실현될 수 있게 되었고,
그 사이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며 교회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롬 11:25–27).
5. 오역의 결과: 이스라엘 대체 신학과 비유적 해석
개역성경은 ‘왕국’을 일관성 없이 ‘나라’, ‘천국’ 등으로 바꾸었고,
이로 인해 로마 카톨릭의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한국 교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이로 인해 성경의 많은 예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지 않고 **‘영적인 비유’**로 전환되었다.
예루살렘 → 내 마음
시온 → 교회
다윗의 왕좌 → 하늘의 보좌
이런 식의 해석은 성경을 교리책이 아닌 감성적 묵상집으로 전락시켰다.
6. 바른 성경, 바른 번역만이 바른 교리를 세운다
성경 전체에 ‘kingdom(왕국)’은 342회 등장한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것을 천국, 나라, 하나님 나라 등으로 불규칙하게 번역했다.
이는 번역상의 일관성 부족이며, 교리적 혼란을 유발한다.
결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에 그분은 1차적으로 가는 천국을 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구약의 대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왕국을 실제로 이 땅에 세우러 오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거절로 그 왕국은 연기되었고,
지금은 교회 시대, 즉 이방인에게 은혜가 전파되는 기간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지 “신앙생활 열심히 하자”는 감성적인 해석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의 왕국, 땅의 통치, 재림, 천년왕국, 메시아의 통치라는 하나님의 역사적·계획적 구속 프로그램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 시작은 바른 성경, 바른 번역, 킹제임스 성경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 다시 회복시키려 하시나이까?” (행 1:6)
✝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왕국은 반드시 이 땅에 팔레스타인 땅에 문자 그대로 임할 것이다.
2025-05-15 14:15:54 | 관리자
끝까지 견디는 자, 마태복음 24장 13-14절
마태복음 24장, “끝까지 견디는 자”는 누구인가?
― ‘하늘의 왕국’을 ‘천국’으로 오역하면 생기는 교리적 혼란
1.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핵심 계획은 한 단어로 요약된다.
바로 **“왕국”(Kingdom)**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왕국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친히 통치하시는 왕국
구약의 대언자들,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선포하신 바로 그 왕국이다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흠정역)
하지만 한국어 개역성경은 이것을 모두 **‘천국’**으로 번역함으로써
사람들은 이 구절을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로 이해하게 되었고,
결국 하늘의 왕국을 신비화하거나 영적인 개념으로 축소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2. 하늘의 왕국 ≠ 천국
그리스어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은
직역하면 **“하늘로부터 온 왕국”**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임하시고,
실제적인 통치를 하시게 될 천년왕국(계 20장)의 실현을 의미한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시리니…” (단 2:44)
즉, 하늘의 왕국은 하늘에서 시작되지만, 땅에 세워지는 것이다.
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 24:13)의 문맥은?
많은 설교자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맥을 무시한 적용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왕국의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3–14, 흠정역)
문맥을 보자:
이 구절은 대환난기(7년 환난) 중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향한 경고다.
“끝”이란 이 세상의 끝이며, 7년 환난의 끝 시점을 말한다.
여기서 “구원”이란 혼의 구원이 아닌, 육체적인 보호와 환난을 통과한 남은 자들의 구원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교회 시대를 말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때 이미 휴거되어 하늘에 있다.
4. “왕국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 왕국의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로 선포되리니…” (마 24:14)
이 역시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복음이 아니다.
“왕국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처음 선포하신 바로 그 메시지다: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이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왕국(천년왕국)이
곧 임박했다는 선언이자,
예수님을 그 왕국의 왕으로 받아들이라는 요청이었다.
대환난기에는 이 왕국 복음이 다시 전 세계에 선포된다.
특히 유대인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한 복음이며,
이는 마태복음 10:5–7, 요한계시록 7장 등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다.
5. “끝까지 견디는 자”는 누구인가?
이들은 단순한 열심 있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대환난기에 믿음을 지키고 짐승의 표를 거부하며 살아남은 유대인들이며,
환난 말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영접하게 될 자들이다.
로마서 11:26의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예언이 이때 성취된다.
6. 잘못된 해석이 만들어내는 오류
개역성경이 “하늘의 왕국”을 **‘천국’**으로 번역함으로써:
복음이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로 왜곡되었고
마태복음 24장은 교회 시대 신자들의 경건 생활로 오해되었으며
“왕국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과 혼동되어
선교 전략의 기준 구절로 잘못 사용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마 24:14을 근거로 “복음을 다 전하면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후천년주의 신학적 오류가 퍼졌고, 이는 성경적 재림론을 훼손하게 되었다.
결론: 바른 번역이 바른 교리를 지킨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열심히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다.
이것은 환난기에 왕국 복음을 믿고 순교를 각오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유대인 남은 자들의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진리를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하늘의 왕국’을 ‘천국’으로 바꾼 오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킹제임스 흠정역은 이 중요한 교리적 흐름을 왜곡 없이 그대로 보여 준다.
개역성경, 공동번역 등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사람 중심의 해석을 심어두었다.
바른 번역이 바른 신앙을 낳는다.
하늘의 왕국을 왕국으로, 끝까지 견디는 자를 환난 통과 유대인으로 문맥적으로 바르게 보자.
2025-05-14 20:05:48 | 관리자
마태복음 21장, 두 아들의 비유 – 회개와 위선, 그리고 성경 번역의 치명적 왜곡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고발하기 위해 두 아들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 간단한 비유 속에는 진정한 순종이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왕국에 먼저 들어가는지에 대한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역성경은 이 비유의 핵심 구조 자체를 정반대로 왜곡하여 복음의 진리를 가리우고 있다.
1. 비유의 기본 구조 (흠정역 기준)
첫째 아들: “안 가겠습니다” → 그러나 뜻을 돌이켜 갔다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
처음엔 불순종했으나 회개하고 순종함
둘째 아들: “가겠습니다” → 그러나 가지 않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상징
말로는 순종하지만 실제로는 불순종함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첫째 아들입니다.”
(마 21:31, 킹제임스 흠정역)
2. 개역성경의 치명적 오류
개역성경은 아들의 순서를 정반대로 바꾸어 버린다:
맏아들(첫째): “가겠습니다” → 가지 않음
둘째: “싫습니다” → 후에 회개함
그 결과,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느냐는 질문에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게 만든다. 이는 복음의 구조 자체를 왜곡하는 중대한 오역이다.
3. 이 비유가 말하는 핵심 교훈
진정한 순종은 말이 아니라 행위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회개한 자가 하나님께 합당하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한 죄인에게 열려 있다
세리와 창녀들(첫째 아들처럼)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믿고 회개했다.
바리새인들은(둘째 아들처럼) 의롭다고 자부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종교인의 위선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그들은 겉으로는 “예, 주여” 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다.
4. 왜 번역이 이렇게 달라졌는가?
흠정역(KJV)은 다수사본(공인본문)에 따른 번역이다. 전 세계 성경 번역, 심지어 가톨릭, 공동번역, NIV까지도 첫째 아들이 옳았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유독 개역성경만 반대 구조로 기록되어 있다.
번역본 누가 회개한 아들인가?
킹제임스, 흠정역 첫째 아들
NIV, NASB, 가톨릭 첫째 아들
개역, 개역개정 둘째 아들 ❌ (역전됨)
이로 인해 복음의 구조 자체가 바뀌며,
회개의 우선성, 겉모습과 실제 행동의 차이, 믿음의 본질이 흐려진다.
결론
예수님께서 주신 이 비유는 “하나님의 왕국은 누가 들어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다.
회개한 죄인들이 먼저 들어가며,
겉만 경건한 종교인들은 오히려 거절당한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개역성경의 오역으로 완전히 반대로 전달되고 있다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바른 번역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다수사본을 기반으로 한 흠정역 성경과 같은 바른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참된 의도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느니라.”
(마태복음 21:31, 킹제임스 흠정역)
오직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위선자는 비록 “주여” 외쳐도 문 앞에서 거절당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진심으로 회개하라.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기뻐하신다
2025-05-14 19:56:50 | 관리자
왜 성경 번역이 교리를 바꾸는가? — 마태복음 19장 17절의 ‘선하심’ 왜곡 문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성을 선하심으로 자주 표현합니다.
▶ “내가 내 모든 선하심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출 33:19)
▶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회개로 인도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2:4)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은 의, 거룩함, 긍휼, 자비, 사랑 등 그분의 성품을 포괄하는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진술 중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19장 17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한 부자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킹제임스 성경 (KJV, 흠정역 동일)
“Why callest thou me good? there is none good but one, that is, God...”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구절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자신을 “선하다”고 부른 것에 대해 되묻습니다.
▶ "너는 정말 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말한 것이냐?"
즉,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개역개정 / 공동번역 / 카톨릭 성경 / NIV / ESV: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또는
“Why do you ask me about what is good?”
이렇게 번역이 바뀌면 중요한 신학적 차이가 발생합니다:
‘나를 왜 선하다 하느냐?’ → 예수님의 신성을 전제로 한 질문
‘왜 선한 일을 묻느냐?’ → 예수님은 단순한 도덕 교사 정도로 축소됨
이것은 단순한 뉘앙스의 차이가 아닙니다.
▶ 전자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다”는 교리적 선언이고,
▶ 후자는 예수님을 좋은 스승, 도덕 선생 수준으로 낮추는 이단적 해석의 여지를 줍니다.
문제의 핵심: 왜 이런 번역 차이가 생겼는가?
그 이유는 어떤 사본을 근거로 번역했는가에 따라 다릅니다.
현대역본(NIV, ESV, 개역, 공동, 카톨릭성경 등)의 근거:
소수사본(알렉산드리아계열) =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이 사본들은 천주교의 라틴 벌게이트(Vulgate) 번역의 기초가 되었고
역사적으로 *에클레시아(교회)*보다 종교기관 중심으로 편집됨
킹제임스 성경(KJV, 흠정역)의 근거:
다수사본(공인본문) = 안디옥계열, 5,000개 이상의 일치하는 필사본들
초기 교회들이 실제 사용해 온 본문을 보존
왜 이 차이가 심각한가?
‘선한 이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핵심 증언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역본은 이 부분을 교묘히 삭제하거나 바꾸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애매하게 흐려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역본내용 요약
KJV / 흠정역"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외에 선한 이가 없다." → 예수님의 신성을 전제로 한 질문
개역 / 공동 / NIV"왜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사라지고 도덕 교사처럼 보임
결론: 왜 킹제임스 성경, 공인본문을 써야 하는가?
이처럼 사본의 차이는 단지 단어 몇 개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교리 전체를 뒤바꾸는 핵심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게 만들고
그분을 단지 착한 선생님, 선한 스승 정도로 낮추며
기독론의 핵심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수사본에 기초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개역성경, NIV, ESV, 공동번역, 천주교 성경은 모두 동일한 천주교 소수사본 계열에서 나온 것이며,
그 결과 동일한 오역, 동일한 교리 왜곡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9:17, KJV)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이 중요한 진리를 왜곡하는 번역을 우리가 따를 수 있겠습니까?
바른 성경, 바른 본문, 바른 교리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2025-05-14 19:37:56 | 관리자
“열두 영(靈)”이 아니라 “열두 군단”이다 — 성경 번역의 일관성과 신학적 정확성
성경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동일한 원어는 동일한 의미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역개정 성경은 이 기본적인 원칙조차도 지키지 않아 심각한 신학적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마태복음 26장 53절의 **‘열두 영’**이라는 표현입니다.
문제의 구절: “열두 영”인가, “열두 군단”인가?
마태복음 26:53 (개역개정)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이 구절을 읽으면 독자들은 보통 이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천사령(靈)을 부르실 수 있었구나…”
하지만 이 해석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마태복음 26:53 (킹제임스 흠정역)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당장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서 헬라어 원어는 “λεγεωνας (legionas)”, 즉 레기온, 군단입니다.
‘레기온(legion)’은 무엇인가?
‘레기온’은 로마 제국의 군사 단위를 뜻하며,
▶ 하나의 군단은 보통 약 6,000명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따라서 열두 군단은 약 72,000명의 병력에 해당하며, 이는 압도적인 천상의 전투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를 ‘열두 영(靈)’으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일반 독자들은 이것을 ‘영적 존재 12명’ 혹은 '12의 천사 무리' 정도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 권세, 전능성을 심각하게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왜 ‘군단’은 ‘군단’으로 반드시 번역되어야 하는가?
같은 헬라어 단어 **“레기온”**은 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의 장면입니다.
마가복음 5:9 (킹제임스 흠정역)
“그가 그에게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이름은 군단이니 이는 우리가 많기 때문이니이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여기를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마가복음 5:9, 개역개정)
여기서는 ‘군대’라고 번역하고,
마태복음 26:53에서는 똑같은 단어를 **‘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번역 일관성 위반입니다.
성경 번역은 문맥에 따라 의역이 필요할 수 있지만,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상황에 따라 아무렇게나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학적 해석에 미치는 영향
“열두 군단”의 천사는 예수님의 전능한 권세와 자발적인 희생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면 언제든지 하늘의 군대를 부를 수 있었지만, 십자가를 지기로 스스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 영”이라는 번역은 이 의미를 완전히 흐리게 만듭니다.
“영”이라는 단어 자체가 영적 존재들 중 일부, 혹은 막연한 하늘의 도우심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번역은 신학이다
성경 번역은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해석이며 신학입니다.
개역성경이 이렇게 잘못 번역한 이유는 천주교에서 번역된 라틴어 성경과 소수사본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며,
**공인본문(다수사본)**을 바탕으로 한 킹제임스 성경은 이러한 실수를 철저히 피하고 있습니다.
‘군단’은 반드시 ‘군단’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레기온’이 ‘군단’으로 통일되게 번역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권세와 말씀의 정확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의 열두 군단도 지금 부를 수 있으나,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말씀의 위엄을 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확한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2025-05-14 19:29:44 | 관리자
“요나의 아들 시몬아…” 요한복음 21장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는 오역이다 — 왜 우리는 다수사본(공인본문)을 따라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성경의 작은 차이 하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표현이 사실은 성경의 권위를 흔드는 중요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한복음 21장 15–17절 (개역성경)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구절은 오랫동안 복음성가나 설교에서 그대로 인용되어 왔지만, 정확한 원문에 따르면 "요한"이 아니라 "요나"의 아들이어야 맞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 맞는 이유
마태복음 16장 17절을 보면 개역개정조차도 이렇게 말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여기서 *‘바’*는 아람어로 “~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히브리식 인명입니다. 즉, **‘바요나 시몬’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동일하게 **‘요나의 아들 시몬’**이어야 일관성 있는 성경 번역입니다. 실제로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에서는 모두 정확하게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Simon, son of Jonas”
“요나의 아들 시몬아…” (요 21:15, 흠정역)
왜 개역성경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로 되어 있을까?
이것은 단순한 오역이 아닙니다. **천주교가 채택한 소수사본(Alexandrian Text, 소위 비잔틴이 아닌 본문)**에 따른 오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은 초기에 **천주교에서 번역된 성경(라틴어 벌게이트 및 알렉산드리아 사본계열)**을 참고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이름 혼동과 본문 왜곡이 자주 발생합니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과 흠정역 성경은 **다수사본(Received Text, 공인본문)**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일관성과 정확성을 유지합니다.
고유명사 문제는 사소한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든 요나든 어차피 발음이 비슷한데 큰 문제가 되겠느냐?"
그러나 유대인 문화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정체성과 족보, 신뢰의 근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한 이유는 바로 그 아버지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곧 정확한 신학과 교리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왜 우리는 다수사본 기반의 공인본문 성경을 사용해야 하는가?
개역성경은 천주교 계열의 소수사본에 근거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에 곳곳에 오역과 혼동이 존재합니다.
그 결과 '요한의 아들 시몬아' 같은 오역이 생기며, 오랫동안 신자들이 복음성가까지 잘못 부르고 믿게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KJV)**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다수사본, 즉 **공인본문(Received Text)**에 따라 정확하게 **‘요나의 아들 시몬’**으로 번역합니다.
우리는 소수사본의 불확실성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보존된 공인본문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곧 바른 성경, 바른 믿음, 바른 신학의 출발점입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진실한 부르심 앞에, 우리는 바른 성경으로 바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2025-05-14 19:23:16 | 관리자
박옥수 씨의 회개 폐기론 이단 교리와 개역성경 오역의 위험성
나무위키 발췌
1944년생 박옥수 씨는 통칭 ‘구원파’에 속하는 기쁜소식선교회를 설립하고, 현재 기쁜소식강남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기쁜소식선교회의 기본 교리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죄가 없다”? - 성화를 부정하는 위험한 주장
박옥수 씨는 구원받은 자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는 단순한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의 근본 교리를 왜곡하는 이단적 주장이다.
그 결과, 그는 구원 이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부정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목적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즉, 구원은 시작일 뿐이며, 그 이후에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기쁜소식선교회는 구원 그 자체에만 집착한다. "나는 죄가 없다"는 주장만을 반복하며, 실제 삶에서는 계속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이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회개 폐기론까지 주장하면서, 죄를 지어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회개 폐기론의 위험성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는 **회개(悔改, repentance)**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세상과 육신,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는 삶이 요구된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성령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런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구원받은 교회들에게도 “회개하라”는 명령이 반복된다.
박옥수 씨와 그가 이끄는 선교회는,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씻으셨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며,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 전체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는다.
요한일서 1:9의 오해와 왜곡
박옥수 씨 교리의 핵심은 다음 구절에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개역개정)
그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러분,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일 뿐입니다. 문둥병의 증상과 같이, 도둑질이나 간음은 죄가 아니라 ‘결과’일 뿐입니다.”
— 박옥수, 『죄사함』 1권, p.33
즉, 그는 죄와 범죄를 구분하며, 요일 1:9에서 말하는 "죄"는 근본적인 죄이지, 구체적인 행위(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해석은 개역성경의 오역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오류이다.
원문이 말하는 것은 ‘죄들(plural)’이다
개역성경은 요일 1:9을 **‘죄’(단수)**로 번역했지만, 모든 영어 성경과 헬라어 원문은 '죄들'(sins, 헬라어 tas hamartias)로 되어 있다.
즉, 요일 1:9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체적인 죄들(sins)**을 하나님께 자백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옥수 씨는 개역성경의 단수 번역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근본적 죄’로 해석하면서 ‘죄들을 자백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번역 오류에 근거한 성경 해석의 왜곡이다.
성경적 해석: 구원받은 자들도 죄들을 자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요일 1:9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구원 이후에도 성도는 육신 가운데 살아가며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죄들을 자백하고, 다시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
이는 요한계시록 2–3장에서 반복되는 회개 명령과도 일치한다.
결론: 박옥수 교리는 성경 오역에서 비롯된 이단 사상이다
박옥수 씨의 ‘죄 없음’ 교리, ‘회개 폐기론’은 모두 개역성경의 오역과 잘못된 성경 해석에서 기인한 것이다.
“죄”를 단수로 이해하여 죄의 자백과 회개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성화’를 부정함으로써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방해한다.
이는 단순한 해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과 복음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이단적 가르침이다.
성도는 바른 성경, 바른 해석 위에 신앙을 세워야 한다.
“나는 죄 없다”고 반복하는 것으로 신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진리 가운데 거하고, 날마다 말씀 안에서 자기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
2025-05-14 17:25:16 | 관리자
박옥수의 <죄사함> 책, 요한일서 1장 9절의 문제
요일 1:9절은 박옥수 씨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성경구절이다. 따라서 책의 맨 처음 내용부터 이것을 비중 있게 취급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박 씨가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구절인 요일1:9절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경 본문과 이에 대한 박 씨의 해설 살펴본 후에 그것에 대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분석을 해 보자. 먼저 요일1:9절의 성경 본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개역개정)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경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한 박옥수 씨의 해설을 들어보자. 물론 박 씨의 <개정판>에 나타나는 내용이다.
“요한1서 1장 9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지은 죄를 하나하나 모두 고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달랐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천만에요.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문둥병이 무엇입니까? 손가락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일그러지면 문둥병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은 문둥병의 증상이고, 문둥병의 결과이지 문둥병 자체는 아닙니다. 여러분, 장티푸스가 무엇입니까? 열이 나고 머리가 빠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장티푸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티푸스 균이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것처럼 죄와 범죄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박옥수, <개정판> p. 40, <죄사함> 1권 p.33)
죄와 범죄는 ‘근본’이 다르다고 한 박 씨의 해설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도둑질, 거짓말, 간음 그리고 살인도 죄가 아니라고 했다. 범죄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일1:9절을 해설한다면서 그가 하는 말이다. 이렇듯 박 씨의 괴상한 주장을 조금 더 들어보자.
“성경에는 ‘죄’와 ‘범죄’에 대해 명백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 말씀에서 ‘내가 도둑질했습니다’하고 범죄한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라는 뜻입니다.”(박옥수, <개정판> pp.42-43, <죄사함> 1권 p.35)
“그러니까 요한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 말씀에서는 내가 지은 범죄나 죄의 결과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근본적으로 죄인이므로 해도 안 되니까 주님 당신이 구원하여 주옵소서’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그 모든 문제를 주님이 해결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해서 덮어놓고 회개만 합니다.”(박옥수, <개정판> p.45, <죄사함> 1권 p.38)
무슨 말인가. 박 씨의 주장을 요약하면 요일1:9절 중 “우리 죄를 자백하면”에서 ‘죄’는 ‘범죄’가 아니라 근본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설한다. 이러한 박옥수 씨의 성경 해설은 옳을까? 요일1:9절은 과연 그런 의미일까? 살펴보자.
우리는 여러 번역본 성경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각 성경 구절이 원어로 처음에 사용될 당시의 의미는 물론 오늘의 의미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을 먼저 활용해 보자. 성경 번역의 원칙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직역과 의역이다. 직역은 있는 그대로의 번역이고, 의역은 오늘의 의미를 첨가한 형식의 번역이다. 그 중간이라고 할 수 있는 역동적 번역 원칙도 있다. 먼저 역동적 번역 성경으로 잘 알려진 NIV와 의역 성경인 NLT를 살펴보자. 물론 요일1:9절이다. 여기에서는 ‘죄’라는 단어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요일1:9, NIV)
“But if we confess our sins to him,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cleanse us from all wickedness.”(요일1:9, NLT)
두 성경은 ‘죄’에 해당되는 단어로 모두 ‘sins’를 사용했다. 이는 복수형이다. ‘죄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박옥수 씨의 표현에 따르면 ‘범죄’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 위 박 씨의 요일1:9절 성경 해설의 내용과 NIV, NLT 성경의 내용이 정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박 씨는 요일1;9절의 ‘죄’는 범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NIV, NLT)은 죄의 복수형인 ‘sins’(죄들)로 기록하고 있다. 박 씨의 표현에 따르면 ‘범죄’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직역 성경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KJV과 NASB를 살펴보자.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orm all unrighteousness.”(요일1:9, KJV)
역시 마찬가지다. 직역 성경에도 ‘sins’로 되어 있다. 요일1:9절의 ‘죄’에 대한 박 씨의 성경 해설은 근본적으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박 씨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시점에서 혹시 원어성경(헬라어)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직역 성경을 참고하면 될 것을 굳이 헬라어 원어를 고집하는 이도 가끔 나타난다. 그들을 위해 헬라어 원어까지 살펴보자. 아래와 같다.
“ἐὰν ὁμολογῶμεν τὰς ἁμαρτίας ἡμῶν, πιστός ἐστιν καὶ δίκαιος ἵνα ἀφῇ ἡμῖν τὰς ἁμαρτίας, καὶ καθαρίσῃ ἡμᾶς ἀπὸ πάσης ἀδικίας”(요일 1:9, 헬라어 성경)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죄’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하마르티아’(άμαρτία)이다. 이 단어가 위 본문에서는 ‘τὰς ἁμαρτίας’라고 사용되었다. ‘타스 하마르티아스’라고 읽는다. 문법적 설명이 필요하다. 헬라어 명사는 남성형, 여성형, 중성형으로 구분이 된다. ‘하마르티아’(άμαρτία)는 여성형 명사다. 성경 본문에 쓰여진 ‘타스 하마르티아스’(τὰς ἁμαρτίας)의 ‘타스’(τὰς)는 여성 복수형 관사이고, ‘하마르티아스’(ἁμαρτίας) 역시 여성 복수형 명사다. 단어 끝에 영어의 '에스'(s)자처럼 생긴 ‘시그마’(ς)표시가 복수형이란 의미다. 결론적으로 헬라어 성경에서도 요일1:9절의 ‘죄’는 복수형, 즉 ‘죄들’의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요일1:9절에 대한 박 씨의 성경 해설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의 성경 해설이 잘못된 것이니 이것을 바탕으로 나온 그의 사상 역시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이단 교리의 문제는 개역성경의 번역에서 생긴 것이다.
박옥수 씨는 순진하게 개역성경을 그대로 믿고 요한일서 1장 9절의 죄를 단수의 죄로 보고 그것이 근본적인 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기의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이들은 구원 이후에도 죄들을 지으므로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교제가 원활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의 단복수 번역은 큰 차이를 가져오고 심지어 이단 교리까지도 생산될 수 있다.
2025-05-14 17:00:18 | 관리자
요한복음 1장 29절: 기쁜소식선교회(기소선) 박옥수 목사의 안수 복음이라는 거짓말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개역성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수 복음은 곧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세례 요한의 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원래 글에 세례라고 되어 있기에 일단 세례라고 썼지만 세례라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의 책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1, 영원한 속죄 편)에서 박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 세례를 베풀 때 머리에 안수를 합니까, 안 합니까? 합니다.
이 안수가 전 인류의 죄를 세례 요한이 대표해서 예수님께 넘기는 그 과정입니다.
알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머리에 안수하고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니까 모든 죄가 예수님께로 건너갔습니까, 안 건너갔습니까?」(1권 218쪽).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에게 안수했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넘겨졌고, 예수님이 그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이었고요.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1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 세례 요한은 인간 중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 가장 큰 자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어른이며 대표자란 의미입니다((기쁜소식지 2001년 8월지. 김성훈)
여러분 모두 여자가 낳았지요. 여자도 여자가 낳았고, 남자도 여자가 낳았어요. 온 세상은 여자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인류의 대표자로 세워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인간 중에 제일 큰 자이고,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례 요한을 온 인류의 대표자로 세운 이유는 예수님에게 온 인류의 죄를 넘겨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이 하셔야 할 일은 마태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 이 두 분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복 받는 거는 너무 쉬운 것입니다. 이 두 분이 잘 돼야 저나 여러분이 잘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갈릴리 요단강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고 있는데, 예수님이 뚜벅뚜벅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요한이 궁금해 하는데 예수님이 요단강에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아, 내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왔다.” 하고 이야기를 하시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아, 이분이 죄 사함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된 그 예수님이시구나. 구원자시구나.” 그것을 세례 요한이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한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안수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야, 세례 요한아, 너 나한테 안수해.” 하니까 세례 요한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안수를 합니까? 내가 받아야지.”
근데 예수님이 이야기를 해주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짜 교만한 사람이구나.”
“네가 내게 안수해야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는 말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봅시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이틀 전에 예수님에게 넘겨준 죄는 세상 죄입니다. 즉 이틀 전에 세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세상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할 때 세례 요한의 죄만 넘어갔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가 다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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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례자 요한이 인류의 대표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2. 침례자 요한이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에게 안수를 주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3. 그 안수에 의해 세상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4. 더욱이 예수님은 머리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온 몬이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안수했다는 주장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5. 침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 이방인들이 아니라 -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회개의 침례를 선포한 구약의 마지막 대언자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드러나야 하므로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노라, 하니라(요1:31).
6. 세상의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에게 전가되어 심지어 그분 자신이 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7. 침례자 요한의 안수가 없었으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기소선의 안수 복음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창조물인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개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데 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8. 침례자 요한이 안수함으로 모든 의를 이루었다는 것 역시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회개의 침례를 승인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복음으로 즉 다른 복음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다른 복음을 가져오는 자가 있고 그런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 8-9).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11:4).
이런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그런 구원이 과연 성경적인지 궁금합니다.
기소선을 세운 대표 목사의 성경 해석이 이 정도면 나머지는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한 사람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하기 시작하면 한 가지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신학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골병들어 고칠 수 없게 됨을 보여 줍니다. 즉, 오류는 오류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오류를 생산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실로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죄악입니다.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이 홀로 하신 일입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만의 하나라도 사람의 행위가 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 같은 사람을 높이는 안수 복음은 영원히 하나님께 저주받을 ‘다른 복음’입니다.
아, 이런 것을 복음으로 알고 그것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픕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탐구해야 이런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요5:39).
2025-05-14 16:49:48 | 관리자
단수와 복수의 중요성
마태복음 12장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곡식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곡식 이삭을 따서 먹기 시작하자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그분께 이르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행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을 행하나이다, 하고 제자들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자 주님은 안식일 규정과 다윗이 제사장의 빵을 먹은 것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이 말슴하신다.
마태복음 12장 7절
킹제임스 흠정역: 그러나,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즉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율법의 희생물을 드리는 것보다 나은데 이것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무죄한 자들은 영어로 the guiltless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개역처럼 the guiltless를 무죄한 자라고 단수로 하면 그들이 무죄하신 예수님을 비난한 것으로 오해가 생긴다.
그러나 그리스어는 복수이며 따라서 무죄한 자들이라고 이것을 번역해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죄가 없다고 하신 것이 된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보자.
킹제임스 흠정역: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해 한 번 고난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해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의로운 자(단수)이고 그분은 불의한 자들(복수)을 대신하셨다.
그러나 개역은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라고 하여 그분이 불의한 자 하나를 대신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디모데후서 4장 1절도 동일한다.
킹제임스 흠정역: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또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개역: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킹제임스 흠정역은 예수님이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지만 개역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
복수와 단수의 이런 구별이 있어야만 성경이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원어도 영어도 단복수 구별이 있고 우리말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런데 개역 성경에는 단복수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이 되기 위해 이런 명사들의 단복수를 반드시 명기해야 한다.
2025-05-14 14:30:28 | 관리자
왜 마태복음 11장 25절부터 갑자기 아기들이 나오는가?
마태복음 11장 25-27절에는 갑자기 아기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이것들을 지혜롭고 분별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드러내셨으니 감사하나이다.
26 과연 그러하니이다. 아버지여, 그리하심이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좋았나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넘겨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며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낼 자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나이다.
이 표현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이전 담화가 끝났고, 이 말씀이 단지 그 시기에 하신 독립적인 발언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앞선 내용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응답하여”라는 표현 자체가 그런 연결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응답하여 말했다”고 할 때, 실제 누군가의 질문이 없더라도 이 표현은 보통 방금 전 이야기된 내용이나 상황에 대한 정신적 또는 감정적인 반응으로서의 “응답”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앞서 탄식하신 사역의 비통한 결과들에 대한 반응이다.
곧, 많은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거부했으며,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기회가 외면당한 현실에 대해 슬퍼하셨던 바로 그 직후의 말씀이다.
사실 바로 앞의 20-24절에는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 그분께서 강력한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때에 그분께서 그 도시들을 꾸짖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25절부터는 마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래, 많은 이들이 영원한 생명의 메시지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그림에도 밝은 면이 있다.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단지 자기 마음속의 교만 때문이며, 오히려 진리의 영광은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눈멀었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빛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도 모두가 복음을 거절한 것은 아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들은 기쁨으로 구원의 샘물에서 물을 길었고,
지친 자들은 안식을 얻었으며, 굶주린 자들은 좋은 것으로 배부름을 받았다.
반면에 자기가 부요하다고 생각한 자들, 자기의 의로 가득 찼던 자들은 오히려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이 사람의 교만한 이성이나 세상적 지혜가 아닌, 겸손하고 갈급한 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의 이 감사는 복음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결코 좌절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가 더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신앙고백이다.
이 구절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선택에 기초한 복음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2025-05-14 14:12:5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