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인가, 심령인가? 마태복음 5장 3절
같은 단어, 다른 번역? – '영(Spirit)'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성경의 뜻이 달라진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말씀이며, 단어 하나하나에는 명확한 의미와 교리적 무게가 담겨 있다. 그런데 번역 과정에서 동일한 원어 단어를 서로 다르게 옮기면, 성경의 의미가 흐려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
영어 성경에 등장하는 'Spirit'
영어 성경에서 **‘spirit’**이라는 단어는 단수로 505회, 복수로 46회 사용된다. 신약성경의 경우 이는 대부분 그리스어 pneuma를 번역한 것으로, 신약 성경에서 ‘영’을 의미한다. 성경적으로 이 ‘영’은 인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영, 혼, 몸—중 하나로서, 특히 하나님을 인식하고 교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살전 5:23).
그러나 ‘심령’으로 번역된 50개 절
개역성경과 개역개정 등은 여러 곳에서 ‘spirit’을 정확하게 ‘영’으로 번역했지만, 문제는 무려 **50개 절 이상에서 ‘spirit’을 ‘심령’**으로 바꾸어 번역했다는 점이다.
국어사전에서도 명확히 구분되는 두 단어
영: 사람의 몸에 있으면서 몸을 거느리고 정신을 다스리는 비물질적인 것. (죽어도 남는 존재)
심령: 정신의 근원이 되는 의식의 본바탕, 혹은 마음의 주체
즉, **‘심령’은 ‘정신적 개념’**에 가깝고, ‘영’은 성경적 존재론에 해당하는 실체적 개념이다. 성경의 ‘영’은 단지 심리적인 상태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영적인 것을 인식하는 기능이다(요 4:24, 롬 8:16).
번역의 차이로 인한 신학적 왜곡
디모데후서 4장 22절을 보자.
개역: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흠정역(KJV):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영과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는 영역은 단순한 ‘감정’이나 ‘마음’이 아니라, 인간의 **영(spirit)**이다. 이것은 성령님이 일하시는 핵심 공간이며, 단어 하나의 차이가 하나님의 임재의 위치를 왜곡할 수 있다.
산상수훈에서의 대표적 예
마태복음 5장 3절은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이다.
KJV 흠정역: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공동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고 겸손히 나아가는 태도이다. 그런데 이를 ‘심령’이나 ‘마음’으로 바꾸면, 단지 기분이나 심리 상태처럼 들리게 되어, 예수님의 참된 의도를 흐리게 만든다.
일관된 번역이 왜 중요한가?
성경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단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는 성경 내에서 ‘영’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 성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배워갈 수 있다.
만약 '영'을 ‘심령’, ‘마음’, ‘정신’ 등으로 상황에 따라 제각기 번역하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 체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번역자의 심리적 해석에 종속되는 일이 벌어진다.
결론: 영은 ‘영’이다 – 번역은 정확하고 일관되어야 한다
‘영’은 성경적 존재이며, 하나님의 영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 기관이다. 이 단어를 ‘심령’이나 ‘마음’으로 바꾸면, 성경의 교리가 흐려지고,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사역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성경 번역은 단순히 의미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손상하지 않는 정확성과 일관성이 요구되는 신성한 작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어선 안 되며, 단어 하나로도 신학과 믿음이 달라질 수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2025-05-10 22:07:39 | 관리자
성령 침례는 불 침례가 아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
– 성경적으로 명확히 구분해야 할 두 침례의 차이
오늘날 일부 교회나 집회에서는 “불 받아야 한다!”는 구호가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성경적으로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령 침례와 불 침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며, 심지어 그 결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침례의 개념부터 마태복음 3장, 오순절 사건,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불의 상징까지 함께 살펴본다.
1. 성경적 침례는 ‘잠기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침례로 번역된 헬라어는 ‘밥티조(baptizo)’이며 이는 ‘담그다’, ‘잠기다’는 뜻이다. 단순히 물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물속에 들어가는 행위를 말한다.
요한복음 3:23 – 침례는 많은 물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도행전 8:36–39 – 침례는 ‘물 속으로’ 내려갔다가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세례(灑禮, 뿌리는 행위)**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2. 마태복음 3:11–12 – 성령과 불 침례는 서로 다른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마태복음 3:11, 흠정역)
이 구절은 흔히 오해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침례’와 ‘불 침례’를 하나의 축복된 경험으로 보지만, 문맥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3:11 – 예수님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성령 침례와 불 침례를 주신다.
3:12 – 알곡은 곳간에, 껍질(믿지 않는 자)은 꺼지지 않는 불로 태워진다.
문맥을 보면 성령 침례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불 침례는 심판받을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 둘은 절대 동일하지 않다.
3. 오순절 사건(행 2장)은 불 침례가 아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할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각 사람 위에 나타났다. 이것은 실제 불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불을 닮은 시각적 현상이다.
행 2:3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이라고 하였으며,
성경 어디에도 이 날 그들이 불에 잠겼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성령 강림의 표적이지, 불 침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4. 불은 대부분 심판과 저주의 상징이다
성경 전체에서 ‘불(fire)’은 500회 이상 언급되며, 대다수가 하나님의 심판, 저주, 멸망과 관련되어 있다.
창세기 19:24 –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히브리서 12:29 –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요한계시록 20:15 – 불못에 던져지는 영혼들
따라서 마태복음 3장의 불 침례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상징한다.
5. 침례는 항상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침례란 단어는 일관되게 어떤 매개체(물, 성령, 불) 안에 완전히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물 침례: 구원의 상징
성령 침례: 몸 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고전 12:13)
불 침례: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속에 던져지는 것(마 3:12)
성경은 불 침례가 긍정적인 체험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에게 내리는 영원한 심판임을 명백하게 말한다.
결론 – "불 받아야 한다"는 외침은 위험한 오해다
많은 이들이 성령 충만을 강조하다 보니 “불 받자!”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불 침례는 절대 성령 충만의 상징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불 침례는 저주, 심판, 지옥과 연결된다.
따라서 믿는 성도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올바로 분별하고, 성령 침례를 사모하되 불 침례를 사모해서는 안 된다.
성령 침례와 불 침례는 하늘과 지옥처럼 다르다.
2025-05-10 10:31:25 | 관리자
미가 5:2 – 예수님은 기원이 있는가, 아니면 영원부터 계신가?
흠정역(KJV):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Micah 5:2)
개역성경: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NIV: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NIV, 개역, 가톨릭 성경 등 다수의 현대역본들은
‘origin’, ‘근본’, ‘기원’, ‘뿌리’ 등으로 번역함으로써
예수님이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존재하게 된 창조물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제한된 시간 속의 존재로 격하시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심각한 왜곡이다.
하나님은 기원이 없는 ‘스스로 계신 분’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 흠정역)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며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시작된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또한 그런 영원자존자이시다.
‘origin’이라는 단어가 왜 위험한가?
‘origin’은 시간적 시작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돈의 기원은 조개 껍데기다”라는 식의 표현처럼
무엇이든 ‘기원’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 속에서 생겨난 창조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창조물의 기원이시며,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골 1:16–17, 흠정역)
빌립보서 2:6 – 예수님의 신성을 삭제하는 번역들
흠정역: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NIV: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개역과 NIV는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를 포기하거나, 감히 넘보지 않았던 창조물처럼 표현한다.
반면 흠정역과 KJV는 예수님이 본래부터 하나님의 형체로 계셨으며,
하나님과의 동등함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고 선언한다.
왜곡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을 기원이 있는 존재, 즉 창조물로 본 것은
초대 교회 이단자 **오리겐(Origen)**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2등급 신적 존재로 격하시켰으며,
이런 사상이 천주교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NIV, NASB 등 현대역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 역시 동일한 사상을 전파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창조된 존재이며, 성령은 에너지다.”라는 그들의 주장은
결국 많은 현대 번역자들의 왜곡된 신학과 뿌리를 같이한다.
결론: 예수님은 ‘기원’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고,
그분은 말씀이시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요 1:1, 흠정역)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 모든 것보다 먼저 계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신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올바른 성경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성경,
번역을 통해 교리를 훼손하지 않는 성경은
**흠정역(KJV 계열의 성경)**이다.
예수님은 기원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는 주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히브리서 1:3, 흠정역)
이 진리를 흐리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사본에 기반한 바른 성경을 사용해야 한다.
2025-05-10 09:41:48 | 관리자
임마누엘의 뜻 마태복음 1장 23절
임마누엘의 뜻을 바꾸면,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게 된다
– 원어가 같더라도, 번역이 다르면 진리가 달라진다
‘임마누엘’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표현이다.
특히 성탄절 시즌이면 흔히 들리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 (우리와 함께), “엘”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된 가장 위대한 신학 선언 중 하나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 번역 가운데 일부는
이 단어의 의미를 가볍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마태복음 1:23 – 결정적 차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개역성경)
처음 보면 큰 문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표현은 임마누엘이 누구인지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놓치고 있다.
흠정역(킹제임스 기반)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마태복음 1:23, 흠정역)
이 차이는 단순한 문장 구조의 차이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표현은,
마치 하나님께서 따로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일반적인 약속처럼 들린다.
그러나 흠정역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면,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강력한 진술이 된다.
원어는 동일하다 – 차이는 ‘번역자’의 신학에 있다
히브리어 원어는 동일하다:
עִמָּנוּ אֵל (임마누 엘) =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을 포함한 많은 현대역본들은
이 표현을 마치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처럼 약하게 번역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바로 천주교 소수 사본의 영향과,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려는 번역 방향 때문이다.
이런 번역은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핵심 근거인데,
그 뜻이 흐려지면 예수님의 신성을 뒷받침하기 어려워진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표현은
구약의 일반적인 하나님의 임재(出애굽기, 여호수아 등)와 비슷하게 들린다.
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결론: 번역은 신학이다
원어가 같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같은 원어를 어떤 관점에서 번역하느냐에 따라
복음 전체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개역성경은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며,
임마누엘을 단지 하나님의 일반적인 위로 수준으로 만들고 말았다.
흠정역은 그 이름이 선언하는 바를 명확하게 번역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위대한 진리를 드러낸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 이것이 복음이다.
2025-05-10 09:28:10 | 관리자
기도와 금식을 지운 성경들 마가복음 9장 29절
– 천주교 소수 사본에 기반한 번역의 위험성
성경은 영적 싸움과 성도의 능력을 기도와 금식을 통해 강화하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종류는 아무것도,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올 수 없느니라.”
(마가복음 9:29, 흠정역)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경들이 ‘금식’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희석시켰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번역 실수가 아니라,
천주교 소수 사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의 영향을 받은 구조적 문제라는 데 있다.
주요 본문 비교 – 삭제된 금식과 기도
마가복음 13:33
흠정역: “주의하라. 깨어 기도하라. 그때가 언제인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개역 / NIV: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기도하라’(pray)가 삭제됨 → 깨어 있음의 방향을 잃음
사도행전 10:30
흠정역: “이 시간까지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개역 / NIV: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금식이 삭제되어 고넬료의 경건한 행위가 약화됨
고린도전서 7:5
흠정역: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개역 / NIV: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금식’이 사라지면서 부부의 영적 훈련 목적이 반쪽으로 축소됨
고린도후서 6:5
흠정역: “깨어 있음과 금식 가운데서…”
개역 / NIV: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못 먹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자기 정욕을 누르는 영적 행위임
이 삭제의 배후: 천주교 소수 사본
이러한 ‘기도’와 ‘금식’의 연이은 삭제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개역성경과 NIV를 비롯한 현대역본들은 대부분 천주교 주도 아래 편집된 소수 사본을 따른다.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은
로마 가톨릭 교리 정립과 전례 중심의 사본 체계를 따르며
회개, 보혈, 기도, 금식과 관련된 수많은 본문을 축소 또는 삭제하였다.
이 사본들을 필사한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경고하신 위선자들과 같은 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없음’으로 바꾸는 죄를 범했다.
왜 금식이 중요한가?
금식은 단순한 식사 중단이 아니다.
영적 전쟁의 준비이며
기도의 집중을 위한 결단이며
자아를 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행위다.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은 위기의 때, 결정의 때, 회개의 때마다 금식했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영적 훈련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바꿔버린 성경은
성도들에게서 기도의 능력, 경건의 깊이, 순종의 실천을 모두 빼앗아 간다.
결론: 기도와 금식을 지키는 성경은 하나다
**흠정역(킹제임스 성경)**은
수천 개의 **다수 사본(Majority Text)**에 근거하여
금식과 기도의 구절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은
천주교 소수 사본을 따라
구절 삭제, 의미 왜곡, 신앙 약화를 불러왔다.
“이 종류는 아무것도,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올 수 없느니라.” (막 9:29, 흠정역)
이 말씀처럼,
기도와 금식을 부인하는 성경은
결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2025-05-08 11:04:38 | 관리자
겨자씨만큼만 믿으면 된다?
– 믿음이 ‘적은 것’인가, ‘없는 것’인가의 번역 전쟁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왜 그들이 실패했는지 설명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설명을 성경마다 전혀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성경은 “믿음이 적어서”,
어떤 성경은 “믿음이 없어서”,
심지어 어떤 번역은 **“너무 작아서”**라고 한다.
그 결과, 독자들은 믿음이 조금만 있으면 된다는 오해에 빠지게 되고,
예수님의 본래 의도가 완전히 왜곡되고 만다.
마태복음 17:20 – 번역 비교
흠정역 (킹제임스 기반, 다수사본)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니라…”
(마 17:20)
➤ 이 말씀의 핵심은 ‘믿음 없음’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겨자씨만큼의 믿음조차 없었다고 지적하신다.
개역성경: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 ‘믿음이 적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의도인 ‘믿음 없음’과 거리가 멀다.
이는 구원 신학과 성령의 권세 사용에 대한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
NIV:
“Because you have so little faith.”
➤ NIV는 ‘너무 적은 믿음’으로 표현하며
**사이즈(크기)**의 문제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믿음 유무’**이지, 믿음의 크기가 아니다.
문맥으로 보면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산더러 옮기라 해도 옮겼을 것이며,
너희가 못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마 17:20, 흠정역)
이 말씀은 제자들이 겨자씨만큼의 믿음도 없었다는 전제하에 나온 것이다.
믿음이 적은 게 아니라, 전혀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오역의 뿌리는? → 소수 사본의 영향
개역성경과 NIV는 모두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중심의 소수 사본(Alexandrian Text)**을 기반으로 한다.
이 사본들은 많은 경우 본문을 축소하거나 의미를 왜곡하며,
신약의 믿음, 회개, 구원, 권능, 왕국 등 핵심 교리에서
묽은 표현 또는 중립적인 어휘로 대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책망이 흐려지고,
신자의 영적 책임이 모호해지며,
복음의 힘이 약화된다.
다수 사본(흠정역, KJV)은 어떻게 다르게 말하는가?
흠정역/KJV는 다수 사본(Majority Text)을 따르며
예수님의 말씀을 단호하고 명확하게 보존한다.
“Because of your unbelief.” (KJV)
→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이 정확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셨음을 드러내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된 믿음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결론: 믿음은 ‘조금’이 아니라, ‘분명히’ 있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조금 있으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겨자씨처럼 작아도 진짜 믿음이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예 없는 믿음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
예수님의 요점은 명확하다:
“너희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흠정역)
믿음 없는 자를 위한 주님의 말씀,
그 뜻을 바르게 전하려면 정확한 번역, 정확한 사본이 필요하다.
2025-05-08 10:59:35 | 관리자
마태복음 23:14 – 삭제된 정죄의 말씀
● 흠정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위장하려고 길게 기도하니
그러므로 너희가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
(마 23:14, 흠정역)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짓 서기관들과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하신 강력한 책망이다.
그들은 외식과 기만으로 백성들을 속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없음)
예수님의 정죄의 말씀이 통째로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씀을 필사하던 서기관들—특히 천주교 전통의 소수사본을 기록한 자들—이 고의로 삭제한 결과이다.
말씀을 지운 자들: 천주교 소수사본의 서기관들
오늘날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대부분의 현대역본들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계열의 소수 사본(Alexandrian text)**을 기반으로 한다.
이 사본들은 로마 가톨릭의 교리적 필요에 따라 정리된 사본으로,
수많은 구절이 삭제되거나 축소되어 있음
이 사본을 필사한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 권위와 전통을 우선시했고,
불편한 진리나 자신들을 정죄하는 구절들을 ‘없음’으로 대체하였다
그 결과:
마태복음 23:14, 마가복음 15:28, 사도행전 8:37 등
복음의 핵심을 이루는 수많은 구절이 오늘날 성경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버젓이 “없음”이라는 표시가 들어가 있다
예수님께서 직접 경고하신 서기관들의 죄
예수님은 이런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하셨다.
“화가 있을지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마 23장 전체, 흠정역)
예수님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며,
속으로는 말씀을 가리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에서 바로 이 말씀마저 지워져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심각한 경고인가?
결론: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는 것은 사본 선택에서 시작된다
‘없음’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존재하는 한,
그 성경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
**소수 사본(바티칸, 시내 사본 등)**은
이미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서기관들의 손을 거쳐
말씀을 삭제한 불순한 기록물이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수천 개의 일치된 사본, 즉 **다수 사본(Majority Text)**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없이, 축소 없이, 왜곡 없이 보존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대언들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의 부분을 제거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2:19, 흠정역)
하나님의 말씀을 지우는 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올 수 있는 심각한 범죄이다.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고, 보존하신다,
2025-05-08 10:51:52 | 관리자
‘종교심’인가, 미신인가? 사도행전 17장 22절
원어를 정확히 번역해야 바른 성경이 된다
– ‘종교심’으로 미신을 포장하는 현대역본의 왜곡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번역할 때는,
단어 하나도 원어의 뜻에 충실하게, 왜곡 없이 정확하게 옮겨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현대 성경 역본들(개역성경, NIV, NASB 등)은
원어의 의미를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된 해석을 삽입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흐리고, 교리적 오류와 종교적 혼합을 조장하고 있다.
예시: 사도행전 17장 22절 – 바울의 말이 칭찬으로 바뀌다?
●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기반)
“너희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일에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사도행전 17:22)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서서 우상 숭배에 빠진 아테네 사람들을
**‘superstitious’(미신적)**이라고 강하게 책망했다.
원어는 **δείσιδαιμονέστερους (deisidaimonesterous)**로,
‘대단히 미신적인’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가진 단어이며,
‘daimon’(δαιμον) = 마귀와도 어원이 연결된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한다: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이 번역은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비판이 아니라, 마치 경건한 종교적 열심을 칭찬하는 말처럼 보인다.
이것은 본문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한 오역이다.
원어 무시 =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는 일
문제는 단순히 표현의 뉘앙스 차이가 아니다.
원어 성경에는 'religious'나 'sebomai', 'threskeia' 같은 단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개역성경은 이를 자의적으로 ‘종교심’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이런 식의 오역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우상 숭배를 미신이라 하지 않고, 종교심으로 미화
책망을 칭찬으로 둔갑
구분되어야 할 참된 경건과 거짓 종교가 혼합됨
결국 이러한 번역은 진리를 흐리는 거짓 종교적 정서를 성도들 안에 심어주고,
한국 교회의 형식적 신앙, 미신적 열심, 영적 혼합주의의 토양이 된다.
이 모든 오역의 뿌리는 ‘소수 사본’에 있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NIV, NASB, ESV 등)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소수 사본을 근거로 번역되었다.
이 사본들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문서로,
본문 축소, 왜곡, 교리적 조정이 다수 발견된다.
신약의 수많은 구절이 생략되거나 왜곡되며,
‘회개’, ‘예수 그리스도’, ‘보혈’, ‘믿음’, ‘왕국’ 등의 표현들이
대거 삭제 또는 변경되어 있다.
즉,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본의 문제다.
잘못된 사본을 따르는 번역은, 아무리 정교해 보여도 거짓을 전하게 된다.
바른 성경은 다수 사본에 근거한 킹제임스 성경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다수 사본(Majority Text), 즉
초대 교회부터 보존되어 내려온 공인본문을 따르며
모든 원어 단어를 정확하고 일관되게 번역한다.
“너희가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행 17:22, 흠정역)
바울의 의도는 아테네 사람들의 우상 숭배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역본들은 이 구절을 미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증언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론: 정확한 번역은 신앙을 지키는 울타리다
원어를 무시한 번역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다.
천주교 소수 사본에 기반한 번역은 우상 숭배와 종교 혼합을 조장한다.
성경을 올바로 믿으려면,
정확한 사본, 정확한 번역,
그리고 성령의 조명 아래 있는 바른 성경,
**흠정역(KJV)**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는 이시니라."
(잠언 30:5, 흠정역)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번역되어야 한다.
2025-05-08 10:39:08 | 관리자
‘없음’이라는 말이 성경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 마가복음 15장 28절
– 하나님의 대언을 지워버린 소수 사본의 폐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모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며,
그분의 대언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들도 문자 그대로 성취하신다.
“이로써, 그는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도다, 하고 말하는 성경기록이 성취되었더라.”
(마가복음 15:28, 흠정역)
이 구절은 이사야 53장 12절의 예언이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을 통해 정확히 성취되었음을 증언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아예 삭제하고, 대신 ‘없음’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없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있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표현 중 하나가 바로
본문 자체가 빠지고, 그 자리에 ‘없음’이라고 표시해 놓는 것이다.
개역성경: “(없음)”
NIV, NASB 등 현대 역본: 해당 구절 자체를 생략
이런 삭제는 단순한 번역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과 그 성취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 사본 문제
이 문제의 핵심은 바로 사본(Text)의 선택에 있다.
개역성경, NIV, NASB 등 대부분의 현대역본은
→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중심의 소수 사본을 따르고 있다.
→ 이 사본들에는 마가복음 15:28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 **다수 사본(Majority Text, 공인본문)**을 기반으로 하며
→ 마가복음 15:28을 포함한 모든 예언 성취 구절이 정확히 보존되어 있다.
이런 삭제는 초대 교회 이후 “나쁜 서기관들”이 의도적으로 일부 본문을 제거한 결과이며,
이는 성경의 권위와 예수님의 대언 성취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왜 이 구절이 중요한가?
마가복음 15:28은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내용을
예수님의 실제 죽음 장면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구속사적 증거다.
“그가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느니라.”
(이사야 53:12)
이 예언이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죽으신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마가는 성경으로서 분명히 증언한다.
그런데 이것이 삭제되면, 성경은 예언이 실현되지 않은 책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론: ‘없음’이 있는 성경은 좋지 않은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삭제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예언의 성취를 보여 주는 말씀은 더욱 그래야 한다.
‘없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군림하려 할 때 생긴다.
‘없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우고, 인간의 판단을 덧씌운 결과다.
‘없음’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처럼 보이게 만든다.
성경에 없어야 할 것은 ‘없음’이라는 단어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성경은?
**흠정역(킹제임스 성경)**은
→ 하나님의 대언과 성취를 정확히 기록한 성경이다.
→ 다수 사본에 근거하여 말씀의 보존을 신실하게 유지한다.
**개역성경, 현대역본들(NIV, NASB 등)**은
→ 소수 사본에 따라 구절을 삭제하거나 왜곡하며
→ 성경의 예언과 역사적 성취를 흐려 놓는다.
“기록된바… 성경기록이 성취되었더라.” (막 15:28, 흠정역)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되었고, 성취되며, 보존된다는 영원한 진리를 선언한다.
2025-05-08 10:33:28 | 관리자
선지자인가, 대언자들인가? 마가복음 1장 2절
성경에 오류가 있는가, 없는가?
– 번역과 사본의 문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흐려질 수 있는가?
성경은 단순한 고대 문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으로 주신 말씀이다.
따라서 그 안에는 오류나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흠정역)
하지만 오늘날 많은 현대 성경 번역본들은,
사본 자체의 문제와 번역상의 부주의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가복음 1:2–3 – 실제 사례 분석
● 개역성경: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이 표현은 한 구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구약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 말라기 3:1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이사야 40:3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 두 구절 모두를 “이사야의 글”로 묶어버림으로써
성경 안에 명백한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흠정역은 정확하게 번역한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내 얼굴 앞에 보내노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흠정역은 ‘기록된 바’라는 일반적 인용 표현을 사용해
말라기와 이사야의 예언을 모두 아우르며 정확한 출처 혼동 없이 전달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오류는 없으며
오히려 예언의 정확성과 복음의 일관성이 드러난다.
문제의 원인: 천주교 소수 사본
이런 번역상의 문제는 단순한 번역자의 실수만이 아니라,
어떤 사본을 기준으로 삼았는가 하는 사본 선택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개역성경, NIV, NASB 등 현대역본들은
→ 바티칸 사본, 시내(시나이) 사본 등 로마 가톨릭이 주도한 소수 사본 계열을 따름
→ 본문 자체가 축약, 삭제, 문맥 왜곡된 구절이 다수 포함됨
이 사본들은 1800년 동안 교회가 써 오던 전통 본문에서 벗어나 있으며,
종종 ‘기록된 바’를 ‘이사야의 글에’로 바꾸는 등의 수정 흔적이 있다.
왜 다수사본(공인본문)을 따라야 하는가?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수 세기 동안 받아온 **다수사본(Majority Text, 공인본문)**을 기반으로 한다.
수천 개의 사본이 일치하며
초기 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했고
문맥, 교리, 단어의 정확성이 보장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요,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존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의 판단이나 학문적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로 전해 내려온 다수사본에 근거한 성경을 믿고 읽어야 한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의 사본과 번역에는 오류가 있다
개역성경은 말라기의 말씀을 이사야의 것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이는 성경 안에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성경의 신뢰성과 하나님의 진실성을 훼손할 수 있다.
그러나 흠정역은 다수사본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순 없이 정확하게 증언한다.
“기록된바…”
(막 1:2, 흠정역)
이 단순한 표현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며 오류가 없다는 진리를 지켜낸다.
2025-05-08 10:28:50 | 관리자
천국은 마음속에 있는가?
– 성경은 실제하는 ‘왕국’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천국은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듣기엔 아름답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왕국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성경은 천국(heaven)이 아니라 **왕국(the kingdom)**에 대해 말하며,
그 왕국은 단지 내면의 상태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다스리시는 통치 체제요, 실제하는 장소다.
성경의 핵심 개념은 ‘왕국’이다
성경에는 ‘kingdom’이라는 단어가 342회 등장한다.
이 단어는 본래 **왕권(kingship)**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는 대체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실제 통치 체제, 즉 왕국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존 한글 성경들(개역, 개역개정 등)은 이 중요한 단어를
‘나라’,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이 번역함으로써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를 흐리고 말았다.
그 결과, ‘왕국’이라는 개념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용 용어처럼 되어 버렸고,
진정한 성경적 왕국의 의미는 일반 성도들에게서 사라졌다.
인본주의적 오해: “천국은 마음속에 있다”?
대표적으로 자주 오용되는 구절이 누가복음 17:20–21이다.
● 개역성경: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사람 마음속에 있는 내면의 상태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인본주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실제 장소가 아닌 ‘영적 개념’으로 축소해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너희’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한다.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바리새인들, 즉 예수님께서 “독사의 세대”라고 책망하신 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
바른 해석: 왕이 임했기에 왕국이 도래했다
이 구절의 바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왕국은 눈에 띄는 외형으로 시작되지 않지만,
지금 너희와 함께 있는 나(예수님)가 바로 왕이므로,
왕국의 실체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했다는 선언이다.
“그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눈에 띄게 임하지 아니하며…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흠정역)
이때 ‘너희 안에’라는 말은 **‘너희 가운데’**라는 의미이며,
헬라어 원문에서도 in your midst, 즉 너희 중에 있음으로 해석되는 것이 맞다.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왕이 계셨으므로, 왕국도 이미 임해 있었던 것이다.
왕국은 실제한다 – 마음속 개념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왕국은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세우실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통치 체제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다니엘 2:44, 흠정역)
예수님은 이 왕국을 제시하시기 위해 오셨고,
부활 후에도 제자들은 이렇게 물었다: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 다시 회복시키려 하시나이까?”
(사도행전 1:6, 흠정역)
이 질문은 결코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구약 예언대로 회복될 실제 이스라엘 왕국을 기다리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결론: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 즉 왕국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직접 오셨고, 하늘의 왕국이 실제로 임하고 또 임할 것이다.
‘천국’이라는 단어는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성경의 본래 뜻을 흐리고 영적·개인적 해석으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아버지의 왕국이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6:10, 흠정역)
이것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핵심이다.
2025-05-08 10:16:48 | 관리자
왕국인가? 천국인가? 마태복음 4장 17절
한 국가의 통치 제도는 누가 그 권력을 행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말해 백성들 개개인이 통치 권력을 행사하면 민주국이 되고 왕이 홀로 통치하면 왕국이 된다. 그러면 성경 속의 하나님의 통치 체제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처럼 여러 사람의 뜻을 물어 민주적으로 통치하실까? 아니면 홀로 주권을 행사하시며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실까?
신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왕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엡1:6, 12, 14).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개념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도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물었으며(마2:2) 그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다(마4:17). 그래서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에 십자가 위의 명패에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라는 글이 붙었다(마27:37).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왕으로, 즉 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을 그들에게 제시하셨으나 배척을 당하시고 결국 유대인들의 왕으로 돌아가시면서 새로운 언약, 즉 신약을 여셨다. 그러므로 왕국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마가복음 같은 경우 그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다.
흠정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여(막1:1, 14)
유대인들에게 우리 예수님은 분명히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런 것을 무시하며 진실을 가리고 있다.
개역: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막1:14)
이렇게 왕국이 중요하므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구절을 개역성경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인데 과연 그 당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제 너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가 되었다고 선포하신 것일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흠정역: 아버지의 왕국이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마6:10).
개역: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실 개역성경으로는 이 구절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개역성경이 ‘나라’로 번역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는 왕국이며 여기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왕국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땅에 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왕국, 즉 ‘하늘의 왕국’이다(마4:17). 이 하늘의 왕국은 대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이미 오래전에 예언된 왕국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시는 왕국이다.
흠정역: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남겨지지 아니할 것이며 도리어 이 모든 왕국들을 부수어 산산조각 내서 소멸시키고 영원히 서리이다(단2:44).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셨으며 결코 우리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왕국을 의도적으로 거부했고(마23:37–39) 이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전해지게 되었다(롬11:30–31).
한편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선포될 복음도 천국 복음이 아니고 바로 왕국의 이 복음이다(마24:14).
흠정역: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바로 그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으로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
위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목숨을 내걸고 주님께 헌신하는 자가 아니고 세상의 끝까지 견디는 자를 말한다. 즉 1차적으로는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으로 7년 환난기를 통과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이들은 로마서 11장 25-26절 말씀, 즉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온 뒤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성취될 때에 구원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7년 환난기에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왕국의 이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고 그 이후에 우리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땅에 강림하셔서 이 땅에 천년 왕국을 세우신다. 그러므로 선교단체나 교회 등이 마태복음 24장을 문맥에 상관없이 취해 선교사들을 많이 보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이것은 후천년주의에서 나온 발상이며 성경은 이런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선교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문맥에 맞지 않는 구절을 취해 내 목적에 맞도록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처음부터 이 왕국의 도래가 가장 큰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분께 가장 먼저 왕국의 회복에 대해 물었다.
흠정역: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 다시 회복시키려 하시나이까? 하매(행1:6)
개역: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또다시 오역하여 그 의미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런 번역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의도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이스라엘 대체 신학’이 주류를 이룬다. 한국 성도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늘의 왕국의 설립과 특히 천년 왕국의 도래 등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학자들로부터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어려서부터 잘못 번역된 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말씀을 공부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결국 성도들이 많은 구절을 ‘영적으로 비유로’ 해석한다. 성경을 – 특히 구약 성경을 – 읽으면서 그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하나님의 치리가 이루어지는 사실로 대하지 않고 다 나하고 상관이 있는 ‘영적 QT 재료’로만 사용하기에 우리 한국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심오한 신학이 형성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왕국을 세우려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무엇보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원대한 계획 안에 사람의 구속이 들어 있고 마귀의 파멸이 들어 있다. 결코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존 한글 성경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경에서 왕국으로 번역된 ‘kingdom’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모두 342회 나오며 이것은 원래 왕권(kingship)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주로 왕이 다스리는 통치 체제, 즉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런 중요한 단어를 ‘나라’나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게 번역했으므로 기존 성경들로는 성경의 핵심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핵심 주제를 보여 주는 이 단어는 단지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용 용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2025-05-08 10:11:05 | 관리자
계시록 1장 18절 등 아멘 20여 회 삭제
성경에서 "아멘"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의미로, 기도나 찬양의 끝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동의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 특히 개역성경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이 "아멘"이 여러 구절에서 삭제되거나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멘의 삭제 사례
1. 요한계시록 1장 18절
흠정역: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
개역성경: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NIV: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now look,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여기서 "아멘"이 삭제되어,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 약화되었습니다.
2. 요한일서 5장 21절
흠정역: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하라. 아멘."
개역성경: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NIV: "Dear children, keep yourselves from idols."
여기서도 "아멘"이 생략되어, 권면의 마무리에서 신앙적 확신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멘의 전체 사용 현황
성경 전체에서 "아멘"은 약 78회 등장합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 중 20회 이상을 생략하여 약 50여 회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NIV와 같은 현대 역본들도 유사한 경향을 보이며, 이는 성경의 원래 메시지와 독자의 신앙적 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결론
"아멘"은 단순한 종결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확신과 동의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성경 번역에서 "아멘"의 생략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정확하고 충실한 번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25-05-07 11:15:16 | 관리자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이 ‘없음’?
– 출애굽기 32:11의 누락된 하나님의 영광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4:35, 흠정역)
그러나 현대 성경들에는 ‘없음’이라는 단어로 대체된 구절이 여러 곳에 존재하며, 구약에서도 중요한 표현이 번역에서 누락된 사례가 반복된다. 출애굽기 32장 11절이 대표적인 예다.
출애굽기 32:11 비교
흠정역 (KJV 기반):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신 주의 백성…”
개역성경:
“…여호와여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개역성경은 이 구절에서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라는 핵심 표현을 누락시켰다. 그 결과,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1. 주체가 불분명해진다
흠정역은 “주께서”라고 분명히 언급함으로써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개역은 그 주어를 생략하여, 누가 이스라엘을 인도해 냈는지 문맥상 흐릿하게 만든다. 문장에서 주체가 빠지면 메시지의 명확성이 사라진다.
2.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가려진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루어진 역사다. 이 표현은 단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증언하는 핵심 구절로 여러 차례 반복된다.
구체적 증언 예시:
“주의 큰 권능으로 친히…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시며” (신 4:37)
“주의 강한 손으로… 너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나니” (출 13:9)
“주의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와 표적들과 이적들로…” (신 26:8)
“주의 크신 위엄으로 구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신 9:26)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행위와 그 능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따라서 그것을 번역에서 누락하거나 삭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번역 실수”인가, “의도적 삭제”인가?
이 구절에 대해 변호하려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역상의 실수다.”
“고대 어떤 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NIV, NASB,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심지어 개역개정에서도 이 구절은 **‘큰 권능과 강한 손’**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 오직 개역성경에만 해당 표현이 누락되어 있다.
개역개정조차 그 오류를 인정하고 고쳤다.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출 32:11, 개역개정)
이는 개역성경이 원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한 번역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은 삭제되어서는 안 된다
‘개역’이란 말은 ‘고친 번역’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손대어 고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개입 없이도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신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에는 하나님의 큰 권능과 강한 손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단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신…” (출애굽기 32:11, 흠정역)
이것이 ‘없음’이 없는 성경,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 바른 성경,
그리고 그분의 권능을 온전히 증언하는 성경이다.
2025-05-07 11:01:38 | 관리자
‘고아’인가, ‘아버지 없는 아이’인가?
– 하나님의 긍휼을 좁혀 버린 번역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시며, 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 특별히 과부나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은 구약 성경 곳곳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너희는 과부나 아버지 없는 아이를 괴롭히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2:22, 흠정역)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고아’라는 말은 익숙하고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문제는 그 뜻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는 데 있다. 국어사전은 고아를 “부모 모두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아버지를 잃은 아이는 고아로 보지 않는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하심으로써, 아버지 한 사람만 없어도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로 인정하신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하나님의 긍휼은 세상의 기준보다 더 넓고, 더 세밀하며, 더 따뜻하다.
흠정역은 그 긍휼의 범위를 그대로 살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도 하나님의 보호 대상임을 증언한다. 그러나 개역성경을 비롯한 NIV, NASB,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등은 ‘고아’라는 단어로 제한함으로써 그 따뜻한 긍휼의 손길을 좁혀 놓고 말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단 한 구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 전체에는 “아버지 없는 자”라는 표현이 50군데 넘게 나오는데, 대부분의 현대역본들은 이를 똑같이 ‘고아’로 번역하고 있다. 그 결과,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아이들이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의 대상이 아님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바로 사본의 문제 때문이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로마 카톨릭의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소수 사본 계열을 따르며 번역되었다. 이 사본들은 본문을 축소하거나 표현을 단순화시켜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왜곡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다수 사본(Majority Text), 즉 초대 교회와 전통 교회들이 수 세기 동안 사용해 온 공인본문을 기반으로 번역되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으며, 아버지만 없는 아이조차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배려의 대상임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고아’와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표현의 차이에서조차 하나님의 성품과 긍휼의 깊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기준을 좁히시는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더 많은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주는 고통받는 자의 힘이시며,
고아들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니이다.”
(시편 68:5, 흠정역)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분의 긍휼을 온전히 증언하는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긍휼의 폭을 좁히는 성경이 아니라,
그 긍휼을 세밀하게 밝혀주는 바른 성경이다.
2025-05-07 10:54:48 | 관리자
여인들을 무시하는 번역들
– 개역성경과 현대역본이 훼손한 성경의 질서와 공정성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동등한 존엄과 책임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분명히 선언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흠정역)
하나님은 남녀를 다르게 만드셨지만, 그들 사이에 구속의 차별이나 인격적 열등함은 두지 않으셨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NIV, NASB, ESV 등)**은
성경이 의도한 남녀의 균형과 책임의 공정성을 자주 왜곡하거나 편향되게 번역하고 있다.
이 문제 역시 단순한 문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문 사본의 차이, 곧 어떤 사본을 따랐느냐에 따라 복음의 구조와 성경의 질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5:16 – 과부 돌봄의 책임은 여인에게만?
● 개역성경: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이 번역은 마치 과부 친척을 돌보는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는 것처럼 읽힌다.
남성은 마치 면책된 것처럼 되어, 책임의 균형이 무너진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만일 믿는 어떤 남자나 여자에게 과부들이 있거든 그들이 저들을 구제하게 하고…”
흠정역은 원문대로 남성과 여성 모두가 가족 내에서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고 정확히 밝히고 있다.
성경은 여성에게만 돌봄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명확히 선언한 것이다.
야고보서 4:4 – 영적 간음은 남녀 모두의 책임이다
● 개역성경: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개역성경은 여자만을 지목하여 마치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두 마음을 품은 자는 여성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간음’은 육체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간음,
곧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좇는 모든 성도에 대한 경고이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영적 타락은 남녀 모두의 책임이다.
흠정역은 이 점을 정확하게 드러내며, 하나님의 책망이 공정하고 보편적임을 보여 준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 사본 문제의 본질
이러한 번역의 차이는 단순한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헬라어 사본을 기준으로 삼았느냐의 문제이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현대역본은
→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같은 소수 사본 계열을 따르며,
→ 종종 특정 단어의 생략, 문장 축소, 편향된 강조가 들어간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 다수 사본(Majority Text), 즉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사용되고 검증된 공인본문을 따르며,
→ 원문에 충실하고 공정한 진술을 보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하나님께서 남녀 모두에게 요구하신 공정한 책임과 경고를
여성에게만 무겁게 전가하거나, 남성의 책임을 흐리는 방식으로 번역해 왔다.
결론: 성경은 여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성경 번역은 여인을 왜곡되게 취급해 왔다.
디모데전서 5:16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가족 돌봄의 책임을 부여한다.
야고보서 4:4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벗된 모든 자들—남자와 여자—에게 회개를 요구한다.
흠정역은 이러한 진리를 왜곡 없이 정확히 번역하고 보존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갈라디아서 3:28, 흠정역
하나님은 남자도 여자도 긍휼로 구원하시며,
동등한 책임과 책망, 그리고 동일한 은혜의 길로 부르신다.
이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바른 사본, 바른 성경, 바른 복음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증언할 수 있다.
2025-05-07 10:49:14 | 관리자
하나님의 진노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 복음의 경고를 흐린 개역성경과 현대역본의 사본 문제
하나님의 긍휼은 회개한 자에게 임하지만,
그분의 진노는 불순종하는 자들, 곧 죄 가운데 고집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그런데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NIV, NASB, ESV 등)은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임하는지 불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복음의 경고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 문제 역시 사본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킹제임스 성경(흠정역)**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보존하고 있다.
골로새서 3:5–6 – 진노의 대상이 명확한가?
● 개역성경: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진노가 임한다고는 하지만, 누구에게 임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본문을 읽는 이는, 마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동일하게 임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이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닥치느니라.” (골 3:6)
이 표현은 정확하다.
불순종하는 자들, 즉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죄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에베소서 5:6 – 동일한 진리를 반복하는 구조적 짝
“아무도 헛된 말들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닥치나니.” (엡 5:6, 흠정역)
이 구절은 골로새서 3:6과 내용적으로 짝을 이룬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무에게나 임하지 않는다.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 곧 긍휼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만 임한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 구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진노의 대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남겨두어 복음의 경고력을 약화시킨다.
히브리서 3:16 – 진노를 불공정하게 적용한 개역성경
● 개역성경: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이 구절은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마치 이집트를 나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그러지 않았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이는 어떤 자들이 듣고 격노하게 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모세로 말미암아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자가 그리하지는 아니하였느니라.” (히 3:16)
정확하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지 않았고,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다.
이 진실은 민수기 14:29–32에서 명확히 증명된다.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너희가 노력하지 않고 어린아이 같다고 업신여긴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개역성경은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명백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모든 차이는 왜 생기는가? – 사본 문제의 본질
이 문제는 단지 번역 스타일이나 표현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 뿌리는 사본에 있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현대역본들은
→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소수 사본 계열을 따른다.
→ 이 사본들은 말씀의 절단, 진리의 축소, 긍휼의 오용, 진노의 모호화를 반복한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 **다수 사본(Majority Text, 공인본문)**을 따르며,
→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일관되게 보존하고 있다.
하나님은 긍휼과 진노 모두를 완전하게 드러내시는 분이시며,
거룩한 분노는 오직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밝히셨다.
그러나 소수사본은 이를 흐리게 만들어,
모두가 긍휼을 받는다는 인본주의적 복음으로 바꾸고 있다.
결론: 하나님의 진노는 선택적이다. 긍휼 역시 회개 위에 임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임한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이 진리를 흐리고, 경고를 약화시키며,
복음을 인간 중심의 긍휼만으로 변형시킨다.
킹제임스 성경은 긍휼과 진노를 동시에, 바르게 선포한다.
→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거룩한 공의와 심판도 함께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하느니라.”
– 골로새서 3:6, 흠정역
“그러나 모든 자가 그리한 것은 아니었느니라.”
– 히브리서 3:16, 흠정역
이제 우리는 사본이 곧 신학이며,
성경 번역이 복음의 모양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바른 사본, 바른 성경, 바른 진노, 바른 긍휼 —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복음이다.
2025-05-07 10:37:39 | 관리자
보편적 구원을 가르치는 성경들?
– 계시록 21:24과 사본의 차이가 만들어낸 심각한 왜곡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열려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조건에 따라 구원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가?
이 중요한 문제를 두고,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NIV, NASB, ESV 등)**은
무분별한 보편 구원(Universal Salvation)의 뉘앙스를 담은 번역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그 근본 원인은 어떤 사본을 따랐느냐의 문제에 있다.
계시록 21:24 – 새 예루살렘에 누가 들어가는가?
● 개역성경: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이 번역만 보면 모든 민족이, 모든 왕이 조건 없이 새 예루살렘의 도시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즉, 구원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그 도시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읽힌다.
이것이 바로 보편 구원(universal salvation),
곧 “누구나 결국은 구원받는다”는 이단 교리와 정확히 맞물리는 표현이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이렇게 말한다: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땅의 왕들이 자기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곳으로 들어가리라.” (계 21:24)
여기에는 분명히 전제 조건이 있다.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라는 말은,
누구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만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차이는 작은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복음 전체의 진리를 좌우하는 본질적인 차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 사본의 문제
이 차이는 단순한 번역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다.
어떤 헬라어 사본을 근거로 성경을 번역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메시지가 된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현대 역본들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소수사본 계열을 따른다.
이 사본들은 오랫동안 이단적 편집, 삭제와 축소, 사탄의 영향을 받아 온 것이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과 흠정역은
**다수사본 계열(Majority Text, 공인본문)**을 따른다.
이 본문은 수천 개의 사본들이 일관되게 동일한 진리를 증거하며,
교회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사용되어 온 본문이다.
즉, 어떤 본문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진짜 성경인가의 문제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복음의 순수성과 생명을 지키는 신앙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오류 있는 성경을 주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성경은 번역이 다를 뿐 핵심은 같아.”
하지만 계시록 21:24 같은 구절은 핵심 자체가 바뀌는 사례다.
개역성경 / 현대역본:
→ 누구든지 들어간다. 모든 민족이 조건 없이 도시로 들어간다.
킹제임스 성경:
→ 구원받은 민족들만이 도시로 들어간다.
→ 복음은 회개와 믿음을 통한 긍휼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마귀는 말씀을 살짝 바꿔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자이며,
그 전략은 오늘날 성경 번역의 왜곡을 통해 더욱 교묘하게 퍼지고 있다.
결론: 구원은 보편적이지 않다.
도시는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계시록 21:24은 복음을 분명히 선포한다.
→ 새 예루살렘의 도시는 구원받은 자들만 들어간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현대역본들은
→ 이 진리를 삭제하거나 흐려서 보편적 구원 교리에 길을 열어 준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다수사본을 따라,
→ 구원의 조건을 정확하게 유지하며,
→ 긍휼로 구원받은 자들만이 그 도시로 들어감을 분명히 가르친다.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계 21:24, 흠정역)
우리는 진리의 말씀, 정확한 성경을 통해 바른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 복음은 ‘누구나’가 아니라, 회개하고 긍휼을 입은 자들만이 누리는 구원의 복음이다.
2025-05-07 10:34:14 | 관리자
복음의 핵심을 부인한 번역
– 예수님의 회개 메시지를 가린 성경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분은 왜 육신을 입고 오셨으며,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셨는가?
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대답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역성경,
그리고 NIV, NASB, ESV 등 현대 영어 역본들은
복음의 핵심을 삭제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마태복음 9:13 – 예수님은 단지 죄인을 부르셨는가?
● 개역성경 / NIV / NASB / ESV: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구절만 보면 예수님이 죄인을 초대하기 위해 오신 분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단지 죄인을 부른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3)
복음의 핵심은 **‘회개’**다.
회개 없는 초청은 아무 효과도 없다.
회개 없는 용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긍휼은 회개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런데 이 ‘회개’라는 단어를 개역성경뿐 아니라 현대 역본들도 모두 삭제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오심이 변화 없이 받아들여지는 초청 정도로 축소되었고,
회개 없는 긍휼, 회개 없는 구원, 회개 없는 복음이라는 잘못된 개념이 퍼지게 되었다.
누가복음 9:55–56 – 예수님은 생명을 구원하러 오셨다
제자들이 사마리아 마을을 불로 멸하자고 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며 그분의 사명을 명확히 말씀하신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예수님은 심판을 집행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긍휼을 베풀어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다.
하지만 아래 역본들은 이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 개역성경 / NIV / NASB / ESV: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또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정도로만 번역)
긍휼의 목적,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선언,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인자하심 —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결국 독자는 예수님이 단지 화만 내시고 다른 마을로 이동하신 것처럼 읽게 된다.
왜 ‘회개’와 ‘구원’이 삭제되었는가?
이러한 삭제는 단순한 요약이나 문장 정리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소수사본 계열(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을 따르고 있으며,
그 결과 복음의 핵심이 체계적으로 약화되었다.
개역성경은 **그리스어 ‘회개하다(μετανοέω)’**를 삭제하거나 생략한다.
NIV, NASB, ESV도 동일한 구절에서 회개와 구원에 대한 표현을 삭제했다.
이 모든 번역은 예수님의 복음 메시지를 도덕적 권면 수준으로 낮추고 말았다.
결론: 회개 없는 복음은 없다. 긍휼은 회개 위에 임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셨다. 하지만 회개하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셨다. 그 목적이 선포되어야 한다.
회개 없는 긍휼, 회개 없는 용서, 회개 없는 구원은 성경적 복음이 아니다.
개역성경뿐 아니라 NIV, NASB, ESV 등 현대역본들도 동일하게 복음의 본질을 축소하고 있다.
“나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 마태복음 9:13, 흠정역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 누가복음 9:56, 흠정역
우리는 더 이상 왜곡된 성경으로 복음을 흐리면 안 된다.
복음의 본질은 ‘긍휼’이며, 그 긍휼은 반드시 회개하는 심령 위에 임한다.
바른 성경, 바른 복음, 바른 회개가 회복되어야 할 때다.
2025-05-07 10:26:05 | 관리자
빵인가, 떡인가?
– 마태복음 4장 4절과 주의 만찬에 담긴 ‘주식’의 신학적 의미
한국 성도들에게 익숙한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마태복음 4:4, 개역)
하지만 이 표현은 수십 년간 잘못된 번역에 익숙해진 결과이며,
예수님의 말씀의 본래 의도는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흠정역)
이 한 단어의 차이는 단순한 음식 표현을 넘어서,
복음의 본질, 주의 만찬의 상징성,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에 이르기까지
깊은 신학적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빵은 주식이다. 떡은 아니다.
성경 시대 이스라엘 문화에서 **빵(bread, 헬라어: ἄρτος)**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주식이었습니다.
빵이 없다는 것은 곧 굶주림을 의미했고,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를 뜻했습니다.
반면, 떡은 오늘날 한국 문화에서 주로 간식 혹은 의례용 음식으로 사용됩니다.
쌀이나 찹쌀로 만든 떡은 성경 문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영적 진리를 상징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빵은
“육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주식”,
그리고 이 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말씀을 “떡”으로 바꿔버리면,
생명의 필수성이 사라지고, 복음의 무게감도 희미해집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 생명의 주식은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실 때, 신명기 8:3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흠정역)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빵으로 유지되지만,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이를 “떡”으로 번역해버리면,
그 상징의 무게와 본질이 가볍고 모호해져 버립니다.
주의 만찬에서의 ‘빵’ – 생명의 몸을 찢어 주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상징으로 주신 장면에서도 **‘빵’**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집어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태복음 26:26, 흠정역)
“그분께서 빵을 집어 감사하신 뒤에 그것을 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긴 내 몸이니…” (고전 11:23–24)
예수님은 찢을 수 있는 빵을 사용하여,
자신의 몸이 찢기고 나누어지는 희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반면 ‘떡’은 자르거나 베어내는 음식이지, 찢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서 떡이라는 단어는 십자가 희생의 본질을 담기에 부적절합니다.
빵은 생명의 주식, 말씀은 영혼의 주식
성경 전체를 통틀어 ‘빵’은 사람의 생존을 유지하는 기본 양식으로,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양식으로 비유됩니다.
이 구조가 유지되어야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빵이라” (요한복음 6:35) 하신 말씀도
그 무게와 의미가 그대로 전달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니라.”
– 주식이신 예수님,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
이제는 번역도 바뀌어야 한다 – 대한성서공회의 인정
주목할 점은, 2024년 대한성서공회가 발행한 『새한글성경』에서 ‘떡’을 ‘빵’으로 바꿨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4:4 (새한글성경):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이는 성경 시대 배경과 본문 원어에 대한 정확한 번역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입니다.
즉, 21세기 한국어에서도 ‘빵’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개역성경, 개역개정,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등 모든 한국어 성경도 ‘떡’이라는 단어를 ‘빵’으로 바꿔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단지 단어 하나의 문제를 넘어서,
말씀의 무게와 복음의 진리를 얼마나 바르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결론: 주의 만찬에 합당한 것은 ‘빵’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빵’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빵’은 성경 시대의 주식이며,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데 정확한 단어이다.
‘떡’은 한국적 문화의 표현일 뿐, 성경적 상징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4:4은 육체적 주식과 영적 주식을 비교하는 본문이며,
그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명의 양식이다.
주의 만찬에서 사용된 빵은 찢긴 몸을 상징하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상기시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마태복음 4:4 (흠정역)
이제는 한국 교회도 ‘떡’에서 벗어나 ‘빵’으로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말씀의 정확성을 위해, 복음의 깊이를 위해, 그리고 주의 만찬의 신비를 온전히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2025-05-06 16:23:4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