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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긴 시간을 홀로 신앙생활 하다가 근래에 지역 교회에 출석을 시작한 저에게 매우 각별하게 다가오는 묵상입니다. 글을 읽으며 나는 왜 지금 이 지역 교회에 출석하고 있느냐는 본질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골방에서 컴퓨터를 켜고 홀로 예배하며 고독하지만, 양심의 자유를 만끽하던 소중한 시간의 교훈을 잊어버릴 때 존재의 의미와 역할을 상실한 녹슨 나사 하나로 전락하겠지요. 제아무리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지역 교회라 해도 끊임없이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지 않을 때 누구라도 팀킬을 벌이는 내부의 적 곧, 돌연변이 세포로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어야겠습니다. 저에게 꼭 필요한 귀한 묵상의 글에 감사합니다.
2013-08-04 23:53:19 | 김대용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기독교 교리를 딱 함축적으로 요약해 놓음과 동시에, 요즘 같은 인본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거론하기가 정말 과격하고 거북하고 구호이다.또한 이것은 논리적으로 굉장히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명제이기도 하다.책임이라는 게, 굳이 크리스천이 세상을 상대로 꼭 좋은 행실을 보여야 하고 모범생, 일류, 능력자, 리더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선행이 아니다. 그보더 더 원론적으로... 예수쟁이들은 남에게 잘 보이기 전에 자기네끼리부터라도 잘 지내야 한다!자기 깡으로 아무리 착하고 의롭게 살아도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자기 죄 가운데 죽고 지옥 간다고 경고했는데.. 그럼 역으로 예수 믿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서로 어떻게 지내야겠는가?좋은 간증 지키는 방법이 다른 먼 곳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가시적으로 입증해 보이는 방법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불신자 부부는 조금만 틀어지고 자기 이익이 침해받는다 싶으면 싸우고 이혼할지라도, 크리스천 부부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툭하면 법이나 시스템의 힘으로 분쟁을 해결한다 해도 크리스천 내부의 문제는 가능한 한 더 선하고 훈훈한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그런데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교회엔 공통된 신앙 빼고는 지역색이 다르고 정치 성향이 다르고 취미와 성격과 성장 배경과 가치관이 다 도무지 같은 게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그래도 성도들간에는 교리 문제나 반역 문제가 아닌 이상은 이해와 사랑, 희생과 헌신, 섬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만치 거짓 교리, 악의적인 불순분자에 대한 분리와 에러 복구 능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구원 여부를 기계적인 방법으로 판별할 수 없는 이상, 이 능력은 교회 성도에게 필수이다.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신앙과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소재를 두고 끼리끼리 갈라지고 친목질에 심지어 팀킬을 벌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죽했으면 비슷한 논리를 다루는 바알세붑 팀킬 가설은 복음서에서 마 12:24-26, 막 3:22-26, 눅 11:14-19에 무려 3콤보로 기록되어 있다.그 대신 교회에서는 성도들 공통의 목표와 공통의 믿음을 대외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활동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이건 거리 설교의 큰 유익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하나님은 신약 시대에 기독교 정부, 기독교 국가, 기독교 기업, 기독교 학교를 만드신 게 아니라 그냥 간단히 지역 교회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미 변개되지 않은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문자적인 이스라엘의 회복과 문자적인 환난 전 휴거+천년왕국을 가르칠 정도로 건전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복받은 처지에 있는 줄 알고 그 교회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도록 하자.성경은 그리 호락호락 만만한 책이 아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르치지만 그걸로 끝이 절대 로 아니며 그 뒤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아주 판타스틱한 일생 여정을 가르치고 있다.
2013-08-03 06:12:19 | 김용묵
내가 생각하는 3대 크리스천 바보   1. 유대인을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정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2. 예수님은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교회는 싫어하는 사람3. 성경 맹신주의, 성경의 우상화.. 이런 말을 쓰는 사람 애초에 불신자야 저런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 없지만, 예수 믿는다고 하고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종교 정체성을 밝히는 사람이 저렇게 생각한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다음은 아이템별 간단한 해설이다. 내가 괜히 ‘바보’라는 말까지 쓰는 게 아니다. 1. 반유대주의   우리도 그들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죄인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아니 그럼 예수님이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안 죽으셨으면, 우리가 직접 죄 가운데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됐을 것이다. 도대체 유대인을 특별히 미워해야 할 명분이 어디 있는가?   성경의 기독교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절대로 반유대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기독교를 매우 싫어하지만 그래도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문자적인 회복을 예언하며, 이 교리가 사실 화체설, 마리아, 연옥 이상으로 천주교와 기독교 사이의 매우 큰 교리 차이이기도 하다.   (화체설, 마리아 무염시태, 연옥은 그나마 개신교에서도 부인하는 천주교 교리이지만, 이스라엘의 문자적인 회복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번에 나온 요한계시록 바로 보기 책에서도 잘 다루고 있다.)   물론 유대인들도 죄악에 빠졌을 때는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여타 민족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벌하고 심판하셨다. 많은 불신자들이 간과하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게 많은 만큼, 계약 위반시 뱉어야 할 것도 많았다. 역사적으로 쟤들이 뭔가 죽이고 학살한 게 더 많았나, 아니면 반대로 자기들이 당한 게 더 많았던가?   그 ‘여타 민족’에 크리스천이 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였던 사람들이 최후가 좋았던 적은 없다.2. 교회 무용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이, 당신이 싫어하는 교회의 머리이기까지 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싶고 훗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떳떳하게 회계 보고를 하고 싶다면, 당신은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주변에 도저히 마땅한 교회가 없다거나),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세상에 어차피 완벽한 교회란 없고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만 이뤄진 교회도 없다. 한 치의 허물도 없는 완벽한 교회가 있다면 당신이 거기에 가입하는 순간 그 무결성은 깨진다.대형 교회는 부패하고 돈만 밝힌다고 싫고, 작은 근본주의 교회는 교조주의적이고 ‘가오’가 안 난다고 싫다면 그건 뭐 무슨 상황이든 어차피 싫다는 변명일 뿐이다(마 11:18-19). 3. 성경(말씀) 무용론   이건 도대체 기독교의 믿음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극심한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지위를 부여하시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하나님’이 들어가야 할 곳에 성경이 들어가는가 하면(요 7:38,42; 롬 9:17, 11:2; 갈 3:8,22 등) 시 138:2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자신의 모든 이름보다 크게 높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름도 이미 얼마나 높은 존재인지는 빌 2:9 같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그 높은 성경을 안 믿으면 무엇을 믿겠으며, 아무리 굳건히 믿어도 시원찮을 성경이 어찌하여 ‘맹신과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난 비슷한 맥락에서, 일부 행실이 바르지 못한 크리스천, 육신적인 신자를 빌미로 성경을 폄하하고 특히 킹 제임스 성경 탓을 하는 주장을 매우 싫어하고 경계한다.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잘못 짚은 발상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증은 윤 성목 목사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참고로 바보 크리스천 말고, 바보 불신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성경에서 시 14:1이나 눅 12:20에서 다루고 있다. 이 역시 누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2013-08-03 06:08:30 | 김용묵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히 11:1~3}" 하나님께서 구원을 믿음의 영역 안에 묶어 두신 것이 참으로 합당하다는 것을 세상을 더 알고 사람을 더 알고 삶을 더 살아가면 갈수록 더욱더 깊이 절감하게 됩니다. 요즘은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 안 구석구석까지 보이는 것들을 숭배하는 일이 가득하며 목사와 장로 등 교회를 치리 하는 이들이 그 누구보다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쫓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제 막 바른 기상을 키우고 신앙을 올곧게 성장시켜 가야 할 청년들이 십자가 아래에서조차 변종인간으로 성장하길 강요받고 있는 현실이지요. 돌이켜보면 이런 일은 그 지독한 욕망의 사탕을 교묘히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란 허울 좋은 거짓으로 포장해 청년들에게 안길 때부터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상식조차 포기하고 자신을 보이는 것에 굴복시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리고 있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바른 진리가 더 널리 전파되기만 소망할 뿐입니다. 성경지킴이의(저는 특히 이 한글이름을 좋아합니다.) 윤활유라 할 수 있는 형제님의 글을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되시는 대로 종종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2013-08-01 23:00:31 | 김대용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신 내지 절대자에 대해서 여러가지 크고 작은 불만· 불평을 품고 있다.그 근거 중에는 어떻게 해 주든 어차피 트집잡으며 불평하는 비논리적이고 질 나쁜 불평이 적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마 11:18-19가 아주 대표적인 예이다.그런 것들을 다 제끼고 나면 그래도 좀 합리적이고 한번쯤 생각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의문사항이 소수 존재한다. 신이 정말 있기나 한지 모를 세상의 온갖 죄악과 범죄와 비리와 불공평 말이다. 나쁜놈들은 잘 살면서 착한 사람만 손해 보는 사회 시스템 등.특히 사회 구조 매사에 불만이 많은 진보 성향은 그렇다 치더라도, 반공 우익 성향이 강한 분들도 이건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무능하거나 나빠서 그 최악의 지상지옥 김씨 왕조 독재 체제를 몇십 년씩이나 아직까지 멀쩡히 놔 두고 계신 걸까? 진보를 해도 성경보다 더 앞서 가서는 안 되듯, 반공을 해도 하나님보다 더 심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악인의 번영에 대한 고찰은 성경에서도 하박국서나 시편 73편에 몇 차례 언급되어 있다.허나, 내가 보기엔 겨우 악인이 잘 먹고 잘 사는 이유를 따지는 건 그렇게 수준 높은(?) 불평이 아니다.인생에 대해 조금이라도 사색을 해 본 사람이라면, 신에 대해서 이의 제기를 할 거면 최소한 이런 걸 해야 하지 않나 싶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진짜 필요한 것을 왜 도무지 정량적으로 측정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는가? (그래서 인간 사회를 이런 헬게이트로 빠뜨렸나?)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교육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누구나 황금 만능주의의 폐단을 외쳐도 현실에서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 맨날 인성 교육 윤리 교육을 외쳐도 공염불에 그치는 이유가 전부 저기에 있다. 현실적으로 돈밖에, 시험 점수밖에 제일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게 없으니까 말이다.더 나아가면, 구원의 길을 좀 확실하게 과학과 수학의 힘으로 증명 가능한 영역에다 안 놔두고, 왜 두리뭉실 어정쩡한 믿음의 영역에다 놔 뒀는지, 왜 그런 경륜을 만들어 놨는지 그 자체가 신에 대한 트집거리가 될 수 있다.그런데 그걸 밀고 공략하려다 보면 결국 자가당착에 빠진다. 하나님은 다른 물질적인 여건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마다 제각각 놔뒀지만, 구원 같은 진짜 인간에게 결정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아무 스펙 없이도 접근 가능하게, 정말 공평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돈의 힘으로 스펙 쳐바른 배우자와 결혼하고 열쇠 세 개는 장만할 수 있어도, 돈으로 이혼 없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구입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진짜 행복을 선사하는 진리는 과학으로 측정할 수 없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다행이고 감사할 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기독교 변증이라는 게 별 거 아니다. 없어졌으면 진작에 없어졌을 정도로 일면 황당하게 들리는 복음이 그렇게 호락호락 허술한 논리로 이뤄진 게 아니다. 괜히 소멸하지 않고 2천 년 가까이를 버틴 게 아니다.
2013-08-01 21:26:17 | 김용묵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품꾼 비유는 논조가 다소 이질적이며,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만큼이나 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도 1데나리온을 받고, 마감 한 시간 전에 와서 1시간만 달랑 일한 사람도 1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에다 이런 불공평한 이야기를 왜 써 놓으신 걸까?나도 하나님의 심정을 다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이나 인류 역사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짐작해 보건대, 하나님께서 그런 정책을 취하시는 것이 충분히 가능은 하다는 걸 느낀다.저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똑같은 예수님의 사도 중에서도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곧장 순교한 반면 베드로는 천사가 와서 몇 번이고 구해 줬다. 이것은 하나님이 근본 성품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쟁이 기분파여서라거나, 야고보가 베드로보다 영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또한, 세상에서 꼭 실력 좋은 사람만 1등을 하는 게 아니라는 자조적인 차원(전 9:11)의 이야기도 아니다.욥은 현대인 같았으면 몇 번이고 멘붕을 거듭하다가 자살했을 정도의 최악의 고난과 시련을 경험했다. 이를 체험하고 욥이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은 것은 바로,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분께서 자신에게 그 어떤 일을 허락하시든지 그분은 선하고 전지전능하신 면모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욥을 죽을 때까지 그 상태로 내버려 두시든,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 불에서 보호하지 않고 순교하게 내버려 두시든지 말이다(단 3:17-18).그 정도인데 그런 하나님이 하물며 비유에서처럼 일꾼을 고용하고 품삯을 주는 정책 하나조차 마음대로 결정을 못 하시겠는가?애초에 하루 일당을 1데나리온으로 계약했으니, 그 주인은 나중에 말을 바꾸지도, 임금을 떼먹지도 않고 품꾼에게 그 약속을 정확하고 성실하게 이행했다. 이게 바로 포인트다.나중에 다른 일꾼이 추가 투입될 수도 있고 그들은 일당을 얼마만치 받을지에 대해서는 애당초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건 주인 사정이고 추가 일꾼의 사정이지,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내용인 것이다.그런데 그런 걸 자꾸 부각시킴으로써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신뢰를 틀어지게 만들고, 자기 처지를 불평하게 만들고 남을 탐내고 원망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역사이다. 공산주의도 이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생겨났다.주인의 이런 반응에 삐쳐서 “흥, 그럼 다음부터는 나도 문 닫을 때 다 돼서 일하러 가야지” 같은 잔머리를 굴리는 건 별 의미나 영양가가 없는 짓이다. 솔로몬의 재판을 보고는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이 무슨 이런 허접한 재판이 다 있냐? 그럼 나도 아기를 납치한 다음엔 상대방에게 아이를 주라고 생색 내면 되겠네.” 이러는 것과 똑같다.성경을 읽고도 그 집필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숲을 보지 못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인간의 잔머리에 결코 조롱· 농락을 당하지 않는다는 힌트까지 알려 놓으셨다(갈 6:7).이런 비논리적인 하나님 무조건 킹왕짱 정신승리법이 어디 있느냐고 비아냥거리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뭐, 틀린 지적은 아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는 기본 원칙이며, 크리스천과 불신자의 사고방식의 큰 차이 중 하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엎드리고 바보 되는 것 말이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셨고 킹왕짱 사랑을 베푸셨으니까!요컨대 마태복음 20장의 품꾼 비유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1데나리온 일당을 지급한 눈에 띄는 정책 자체보다도,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주권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하나님은 진짜로 공평해야 하는 분야에는 정말 칼날같이 공평하며, 정말로 논리가 필요한 곳에서는 완전 철두철미한 논리 체계가 갖춰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물론, 그냥 영적으로 적용해서 모태신앙으로 나태하게 산 사람보다 뒤늦게 구원받고도, 알찬 인생을 살고 주님으로부터 상을 더 많이 받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 역시 나쁘지 않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것이다”란 교훈이 뒤에 등장하니까 말이다.
2013-08-01 21:06:04 | 김용묵
부산 사경회에서도 교회 안팎에서 80여분이 참석하여 말씀 가득하고 유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광주 은혜침례교회의 설립을 감사드리고 이 교회를 통해 그 지역에 주님의 말씀이 높이 들림 받기를 원합니다.
2013-08-01 10:23:33 | 윤봉주
진리의 말씀과 바른 복음을 알고 바른 교회를 하고자 하는 광주지역 형제자매님들 힘내시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은혜침례교회와 함께 하실 겁니다! ~,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시니(요 8:31-32)
2013-07-31 17:41:56 | 장인교
안녕하세요? 2013년 8월 14-15일(수목)에 전남 광주에서 다음의 일정으로 성경 사경회를 엽니다. 구원, 성경, 교회, 예배 등에 대해 말씀을 전하려 하니참여하실 분들은 오시기 바랍니다.  강사: 정동수 목사주최: 광주 은혜침례교회 장소: 광주시 북구 운암동 1596번지 공구의 거리 168호(운암동 반디가스 건너편 건물 3층), 이번만 여기서 모임. 사경회 스케줄   14일 (수)저녁 7:00-7:50 구원 1저녁 8:00-8:50 구원 2 15일 (목)오전 10:00-10:50 성경 1오전 11:00-11:50 성경 212:00-1:30 식사 및 교제오후 1:30-2:20 교회 1오후 2:30-3:20 교회 2 오후 3:20-4:00 교제  1) 문의: 이지아 자매님 010-6607-1611, 한재석 형제님 010-8978-8275 2) 참가비는 없습니다.   은혜침례교회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신자들이 함께하는 모임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성경 사경회를 열면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많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3-07-31 15:12:33 | 관리자
  저희 대구지역에 드디어 이번 금요일부터( 8월2일) 바른 말씀을 사모하는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금요일 오후 7시 30분 각자 저녁 해결 후 모이기로 했습니다. 교재 :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말씀을 가르쳐주실분 : 최근 포항에서 새롭게 사역을 시작하신 김 문수 목사님 장소 : 수성구 황금동 근처 어학원  이번에 시작되는 이 작은 모임을 통해 바른 말씀에 기초한 바른 교리로 세워지는 교회들이 대구 지역 곳곳에 일어나는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성경공부 모임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연락처로 연락 바랍니다.   임정휘 010-4655-0980
2013-07-31 14:10:30 | 임정휘
샬롬~! 연일 계속되는 장마와 찜통 더위속에 모든 분들 건강히 잘 지내시죠? 오늘 저녁 7시에 김문수 목사님을 모시고 22명의 형제자매님들이 모인 가운데 "왜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은혜롭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성경번역의 변개된 과정과 오류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새삼스레 느끼는 시간이었으며 킹제임스 성경이 오랜 시간 동안 단 한번의 개정도 없이 얼마나 잘 보존되었는지 다시 한번 증명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진정으로 바른 말씀에서 바른 교리가 뿌리가 내려진다는 것을 재차 깨닫게 됩니다. 오늘도 창원에서, 양산에서 또한 포항까지 멀리서들 오신 형제자매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한동대에서 오신 교수님 부부께서도 열심히 경청하면서 바른진리의 말씀에 탄복하셨습니다. 다음 모임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07-26 00:06:14 | 조영근
이렇게 죄와 죄들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우리말의 특성 상 목사가 강단에 서서 선포하는 경우 죄의 용서 혹은 짧게 죄 용서 혹은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지 죄들의 용서를 받으라고 길게 복수의 죄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목사와 성도들이 서로 이해하며 들으면 됩니다. 다만 단복수가 구분되지 않은 개역성경으로 교리를 세우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만은 명심해야 합니다. 샬롬
2013-07-25 10:55:48 | 관리자
죄와 죄들의 차이   참고로 이 글의 앞부분은 워치만 니의 글입니다. 니의 글은 많은 경우 분명한데 어떤 경우에는 나누지 않아도 될 것까지 심하게 나누므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글은 괜찮아서 올립니다. 워치만 니 말고 지방 교회의 위트니스 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영해의 대가로서 매우 이상한 해석을 취하므로 그의 글은 아예 처음부터 읽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두 사람의 책들이 다 지방 교회가 운영하는 복음 서원에서 나오므로 조심하고 경계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죄와 죄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죄는 단수이고 죄들은 복수이다. 우리는 죄와 죄들의 차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죄와 죄들을 구분할 줄 모른다면, 당신은 구원에 대하여도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죄와 죄들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자기의 구원 여부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무엇이고 또 죄들이란 무엇인가? 간단한 정의를 내리겠다. 죄는 당신 안에서 당신에게 죄들을 범하게 하는 능력이고, 죄들은 밖으로 범한 낱낱의 죄들을 가리킨다.   죄란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죄의 뿌리, 죄의 근원 혹은 본죄, 원죄 등의 명사는 쓰지 않겠다. 이 명사들은 다 신학자들이 지어낸 것이므로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겠다. 단순한 것이 좋다. 여기서 우리는 체험에서 이것을 보기로 하자. 우리 속에서 우리를 사욕과 정욕의 길로 향하게 하고 그런 자연스런 경향을 갖도록 우리를 지배하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우리를 강요하고 재촉하는 죄뿐 아니라 밖으로 행한 낱낱의 죄들도 있다. 성경에서 죄들은 행위에 속하고 죄는 생명에 속한다. 죄들은 우리의 손과 발과 마음 곧 우리 온 몸으로 행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몸으로 행한 일들이다. 그러나 죄는 어떠한가? 죄는 우리의 육체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일종의 율이다. 항상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죄이다.  우리가 죄와 죄들을 잘 구분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완전히 보여 준다. 이 여덟 장의 성경 말씀에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1장부터 5장 11절까지는 죄(sin)보다는 주로 죄들(sins)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2절부터 8장까지는 주로 죄들이 아닌 죄를 보여 준다.   즉 로마서 1장부터 5장 11절까지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로마서 5장 12절 이후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어떠함 곧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죄는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이 어떠한가를 말해 준다.   로마서 5장 11절 이전의 말씀은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서의 문제는 살아나게 하는 필요보다는 범한 낱낱의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5장 12절 이후의 말씀, 둘째 단락에서 우리는 몸의 지체들 안에 있는 법, 즉 우리 속에 있는 강하고 힘센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임을 알게 된다. 이 죄가 우리를 끌어당겨 죄를 짓게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은 죄들이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들을 범하도록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이므로, 이 죄에 대해서는 해방될 필요가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한번은 어느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가 대화 중에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라는 말을 사용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서 성경의 어느 곳에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라는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많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한 군데만 보여 달라고 말했다. 그는 “당신은 없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체에서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라고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죄들의 용서(the forgiveness of sins)’라고 말합니다. 용서받는 것은 죄들이지 죄가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을 신뢰하지 않고 성경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게 “니 선생님, 정말 그렇군요. 성경에서 죄들이 용서받는 것을 말할 때마다 복수를 표시하는 ‘s’를 붙였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용서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죄들임을 볼 수 있다.   죄들은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신 안에 있는 어떤 것, 강하고 힘세며 당신에게 죄를 범하도록 재촉하는 그것은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고 그것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당신이 그것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갖지 않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죄들은 용서받을 때 해결된다. 그러나 죄는 그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맺지 않을 때 해결된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고 낱낱이 행한 것이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죄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 번도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한 적이 없고 항상 죄들을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동시에 죄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나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음을 장담할 수 있다. 성경에는 죄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있어도 죄들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없다. 왜 그런가? 당신 속에서 당신을 억압하고 죄들을 범하게 하는 그것에 대하여 당신은 다만 거기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성경에서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비교하여 제시해 보겠다. 성경에서 죄는 육체 안에 있고, 죄들은 행위에 속한다고 말한다.   죄는 우리 몸에서 원칙(생명의 원칙)이고, 죄들은 우리 몸에서 사실(생명의 사실)이다.죄는 지체 안에 있는 법이고, 죄들은 사실적인 범죄요, 실제로 행한 것이다.죄는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있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과 관계있다.죄는 우리의 어떠함에 속하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에 속한다. 죄의 범위는 생명의 범위이고, 죄들의 범위는 양심의 범위이다. (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능력이고 죄들은 양심의 능력이다. 사람은 생명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밖으로 사람이 많은 죄들을 범할 때 양심 안에 참소와 불안이 있게 된다.)죄는 총체적인 것이고, 죄들은 낱낱의 것이다.죄는 해방 받을 필요가 있고, 죄들은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죄는 성화와 관련되고(롬5:12-8장), 죄들은 칭의와 관련된다(롬1장-5:11).죄는 사람의 본성 안에 있고, 죄들은 사람의 길에 있다.   비유로 말하자면, 죄는 나무와 같고, 죄들은 나무의 열매와 같다.   많은 경우,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죄인을 빚진 사람에 비유한다. 우리는 빚을 지는 것이 아주 좋지 않은 일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빚을 진 사람에게 있어서 빚을 진 것도 문제이지만 그의 속에 빚을 지는 성향이 있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빚을 지다 보면 남의 돈을 빌려 쓰고서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빚진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남에게 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누구에게서 이삼백 원 또는 이삼천 원을 빌렸는데 나중에 갚을 능력이 없어서 친척이나 형제 또는 친구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 그 빚을 갚아 주었다 하자. 그런데도 삼사 일 후에 당신이 또 남에게 빌리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당신은 돈을 빌리는 것과 빌리고자 하는 마음은 별개임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빌린 빚은 성경에서 말한 죄들과 같다. 걸핏하면 돈을 빌리려고 하는 습관과 성향은 죄와 같다. 그러한 사람은 누가 빚을 갚아 주었다고 해서 돈을 빌리는 일을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빚을 갚아 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더욱 돈을 빌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죄들을 처리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죄로 향하는 우리의 속마음도 처리하신다. 우리가 죄들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죄를 처리하는 것도 중요함을 보아야 한다. 반드시 우리가 이 두 방면을 보아야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복음(워치만 니) 제1권 제1장에서 발췌함   박옥수 구원파의 문제   죄와 죄들의 단복수 구분이 안 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박옥수 구원파에서는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광고를 버스에 붙이고 대형 체육관에서 집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죄와 죄들을 전혀 구분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죄 사함’이 죄들뿐만 아니라 죄(죄성)의 용서(사함)을 뜻한다고 믿고는 한번 구원받으면 그 사람은 완전히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죄들이 매일 반복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주 목사는 “죄 없다!”만 외치므로 오래 거기 다니다 보면 양심이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거기서는 성화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성화 이야기를 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전혀 성화를 모르는 신도를 만들어 놓습니다. 요일1:8-9에는 죄와 죄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8절 만일 우리에게 죄(단수)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9절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복수)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8-9).   물론 개역성경은 9절 역시 죄들 대신 죄라고 단수로 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 되고 맙니다. 8절은 우리(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죄 즉 죄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믿음에도 불구하고 죄들이 있으므로 고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9절은 말합니다.   또한 구원파 교주는 사람에게 두 개의 본성이 있음을 가르쳐주지 않고 죄(죄성)이 전혀 없는 새 본성만 있다고 가르치므로 추종자들은 심각하게 양심의 찔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면 “죄 없다”는 소리에 취해서 양심이 무뎌지므로 악한 일을 하고도 찔림이 생기지 않는 나병 현상이 발생합니다.   또한 모 단체에서는 아담의 죄(원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은 육신적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옥 불 속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은 죄인 각 사람의 죄들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사람이 다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은 불의의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죄들’에 대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용서입니다(요일1:7). 아무리 많이 울어도 참회해도 선행을 해도 죄들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죄들을 용서합니다(마. ‘죄’에 대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출입니다. 로마서 5장은, 죄인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인이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롬5:19를 보기 바랍니다. 즉 사과 나무가 죄이고 사과들은 그 나무에서 나오는 죄들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책은 부모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생에 의해 아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담에게서 나오려면 죽어야 하며 롬6:3-4는 어떻게 우리가 아담에 대해 죽었는지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 안에서 우리는 아담 안에서 또 죄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라는 측면에서는 사실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상태는 그렇지 못합니다. 현실은 우리에게 아직 옛 본성 즉 육신(죄)이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성화 과정을 통해 죄를 십자가에서 죽여 처리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해 한 번 죽으셨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매일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역시 2000년 전에 죄에 대해 한 번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롬6:11). 롬6:14의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의 단수 죄는 성화와 연관이 있는 죄성을 뜻합니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롬6:1-2)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여기에서 의미한 바는 우리가 판결을 받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우리가 새 본성을 받아 죄의 법에 대해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사도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6:11).   이 말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고 또 옛 생활 습성에 대해서도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라고 말하며 또한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라”(롬6:12)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될 때 다음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롬6:14). 위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믿는 자의 위치는 하나님 앞에서 확고히 정착되어 안전하나 그의 상태는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 본성이 그를 지배하느냐 새 본성이 그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는 죄로 가득하기도 하며 죄가 없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둔 채 로마서 강해 노트를 보면 강해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참고로 영어를 하시는 분들은 다음의 자료를 보기 바랍니다.   http://www3.telus.net/trbrooks/SinSins.htm(*) 역시 워치만 니 자료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입니다.   구약은 죄와 죄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신약은 죄와 죄들이 놀랍도록 명확히 구분됩니다.   죄(단수): “Sin” in singular number: Matt.12.31; John 1.29; 8.34 (twice), 46; 9.41 (twice); 15.22 (twice), 24; 16.8,9; 19.11; Acts 7.60; Rom. 3.9,20; 4.8; 5.12 (twice), 13 (twice), 20,21; 6.1,2,6 (twice), 7,10,11,12,13,14,16,17,18,20,22,23; 7.7 (twice), 8 (twice), 9,11,13 (thrice), 14,17,20,23,25; 8.2,3 (mg., thrice), 10; 14.23; 1 Cor. 15.56 (twice); 2 Cor. 5.21 (twice); 11.7; Gal. 2.17; 3.22; 2 Thess. 2.3; Heb. 3.13; 4.15; 9.26,28 (the second “sin”); 10.6,8,18; 11.25; 12.1,4; 13.11; James 1.15 (twice); 2.9; 4.17; 1 Peter 2.22; 4.1; 2 Peter 2.14; 1 John 1.7,8; 3.4 (twice), 5 (the second “sin”), 8,9; 5.16 (twice), 17 (twice).   죄(복수)“Sins” in plural number: Matt. 1.21; 3.6; 9.2,5,6; 26.28; Mark 1.4,5; 2.5,7,9,10; Luke 1.77; 3.3; 5.20,21,23,24; 7.47,48,49; 11.4; 24.47; John 8.21, 24 (twice); 9.34; 20.23; Acts 2.38; 3.19; 5.31; 10.43; 13.38; 22.16; 26.18; Rom. 4.7; 7.5; 11.27; 1 Cor. 15.3,17; Gal. 1.4; Eph. 2.1; Col. 1.14; 1 Thess. 2.16; 1 Tim. 5.22,24; 2 Tim. 3.6; Heb. 1.3; 2.17; 5.1,3; 7.27; 8.12; 9.28 (the first “sins”); 10.2,3,4,11,12,17,26; James 5.15,20; 1 Peter 2.24 (twice); 3.18; 4.8; 2 Peter 1.9; 1 John 1.9 (twice); 2.2,12; 3.5 (the first “sins”); 4.10; Rev. 1.5; 18.4,5.   이것을 정리하면 내용은 위와 같습니다.
2013-07-24 17:28:25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