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왕국(마.13:31, 마.11:12) 과 하나님의 왕국(막.4:30, 눅.16:16, 요.3:5) 그리고 하늘 왕국(딤후.4:18) 은 한영대역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과 한영성경 개역 한글판에도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2014-09-05 21:20:27 | 김창수
질문: 골리앗의 동생입니까? 골리앗의 아들입니까? 삼하21:19-22와 대상20:5-8은 서로 모순이 아닙니까? 대답: 현대 역본 역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먼저 이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더니 거기서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동생을 죽였는데 그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또 여전히 가드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거기에 키 큰 자 하나가 있더니 그는 손마다 손가락이 여섯 개요, 발마다 발가락이 여섯 개로 개수가 스물네 개더라. 그도 그 거인에게 태어났더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도전하므로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이 네 사람은 가드에서 그 거인에게 태어난 자들로서 다윗의 손과 그의 신하들의 손에 쓰러졌더라(삼하21:19-22).
또 다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더니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의 창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여전히 가드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거기에 키 큰 자 하나가 있더니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스물네 개로 손과 발마다 여섯 개씩 있더라. 그도 그 거인의 아들이었더라.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에게 도전하므로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이들은 가드에서 그 거인에게 태어난 자들로서 다윗의 손과 그의 신하들의 손에 쓰러졌더라(대상20:5-8).
삼하21:19와 대상20:5를 보면 엘하난이 분명히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골리앗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자, 살펴보겠습니다.
(1) 삼하21:15-18을 보면 골리앗의 아들인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였으나 아비새가 그를 죽입니다. (2) 또한 십브개가 골리앗의 아들인 삽을 죽입니다.(3) 그리고 19절에는 골리앗의 동생인 라흐미를 엘하난이 죽입니다.(4) 마지막으로 20-21절에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골리앗의 다른 아들이 나옵니다. 그는 손마다 손가락이 여섯 개요, 발마다 발가락이 여섯 개로 총 개수가 스물네 개인 자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그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삼하21:22절은 이 4명이 골리앗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 삼하21:19절을 보면 엘하난이 죽인 라흐미는 골리앗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이것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골리앗은 자기 어머니와의 근친상간(incest)을 통해 이들을 낳았습니다.그래서 이들은 골리앗의 아들이기도 하고 동생이기도 합니다(적어도 라흐미는 그러함).마귀의 자식들이므로 이런 일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성경의 기록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에 시내에서 돌멩이 5개를 가지고 갑니다(삼상17:40).
이것을 두고 어떤 이들은 다윗이 골리앗과 그의 아들들(동생들)을 다 죽이려고 5개를 가지고 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상상의 비약입니다. 삼상17에는 다른 거인들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늘 하던 대로 주머니에 돌멩이를 충분히 가지고 갔을 뿐입니다. 그때에는 5개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것 외에 다른 해석은 상식을 벗어난 근거 없는 해석입니다.
샬롬
2014-06-21 22:16:43 | 관리자
예수님의 탄생일(탄생 혹은 출생 시기 혹은 연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시면서 예수님의 탄생일이나 아담의 창조 날짜, 아브라함의 출생일 등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이런 날짜들을 계산해서 정하려는 노력은 사실 불필요하며 많은 경우 상상의 허구 속으로 사람을 인도할 위험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죽을 때 직접 그를 묻으셔서 아무도 그의 무덤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신34:5-6). 그의 무덤이 알려지면 무덤을 순례하며 기념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일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분의 탄생일을 알면 그 날을 절기로 지키려고 애쓰는 종교인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 확실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이날을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사실이 중요하지 정확한 날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많고 미약한 성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그래도 날짜를 알면 그 날을 좀 더 귀중하게 또 거룩하게 여길 수 있으므로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을 이용하여 지금까지 예수님의 탄생일을 추정하고 그렇게 믿고 기념하게 하는 종파들도 있습니다.
여기의 대표적인 사례가 로마 카톨릭 교회일 것입니다. 이교도들의 문화를 수용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12월 25일을 성탄절이라고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상식이 있는 성도라면 12월 25일이 진짜 성탄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교회에서는 이런 절기를 지키는 자들이 참된 성도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을 싸잡아 비난합니다.
주 예수님의 탄생일은 이처럼 큰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추정하여 지키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여러 이론을 들어보고 그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이론을 선택하고는 만족해합니다. 또 그런 날을 기념하려고 노력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도가 다 헛됨을 알고 있지만 그중에 어떤 분들은 거의 아무 근거도 없이 특정일을 정해 기념하려고 하기도 하므로 오늘은 대략적인 예수님의 출생일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어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라는 사람이 양력 5월 14일(혹은 20일)이 예수님의 탄생일이었다고 이야기했으므로 그 날이 탄생일이며 1995년 5월 14일이 예수님의 2,000번째 생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1967년의 ‘6일 전쟁’ 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날을 예루살렘의 날이라고 지정하여 기념하는데 바로 그 날이 예수님의 탄생일인 5월 14일이므로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가 신비하냐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현시대의 어떤 사건을 과거의 무언가와 연결시켜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증거는 그분의 탄생일이 5월 14일(혹은 20일)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성도들은 이런 주장을 펴는 분들 - 대개는 선한 의도를 가진 분들 - 이므로 아무 생각 없이 이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5월 14일(혹은 20일)을 조촐하게라도 기념하자고 하면 따르려고도 합니다.
이 글은 성경 공부 차원에서 이런 주장이 옳지 않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지 결코 성탄일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구글에 가서 ‘Jesus birthday’라고 치면 여러 가지 글이 나옵니다. 이 중에는 성경적으로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통해 어떻게 성경을 공부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이런 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http://www.hebrew4christians.com/Articles/Christmas/christmas.html
위의 글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성경 신자들이 이런 방법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해 추론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나온 날짜 역시 추정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적은 것은 헛된 상상 속에서 헤매는 이들이 있기에 최소한 이런 정도의 추론 과정을 거치면서 성경을 연구해야 함을 보여 드리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기사를 보면 예수님의 출생은 침례자 요한의 출생과 6개월 간격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의 출생 시기를 알면 예수님의 출생일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1장에서 침례자 요한에 대해 살펴봅시다. 5절에 보면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비야 계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5 유대 왕 헤롯 시대에 아비야 계열에 사가랴라는 이름의 어떤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아론의 딸들에게 속하였고 그녀의 이름은 엘리사벳이더라.
23-24절을 보면 사가랴는 직무 수행을 마친 뒤 집에 갔고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곧 수태하였습니다.
23 그가 자기 직무의 날들을 다 마친 뒤 곧 떠나서 자기 집으로 가니라. 24 그 날들이 지난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르되,
26절 이하에 보면 엘리사벳이 수태 후 여섯 달이 지난 뒤 마리아가 예수님을 수태하였습니다.
26 [수태한 이후로]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에 의해 나사렛이라 하는 갈릴리의 도시로 보내어져서 27 다윗의 집에 속한 요셉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렀는데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더라.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의 탄생일은 사가랴가 직무를 마친 뒤 약 280일(유대인들의 음력으로 약 10달) 뒤이고 예수님의 탄생일은 사가랴의 직무 수행 후 약 16달 뒤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사가랴가 직무를 수행한 날만 알면 두 분의 출생일을 성경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다윗 왕의 통치 말기에 제사장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모든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동시에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제사장을 24 계열(그룹 혹은 개역성경의 반열 혹은 반차)로 나누어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였습니다(대상28:11–13). 대상24:1-19는 이렇게 구분된 24 계열의 제사장들의 명단을 보여 줍니다.
7 이제 첫째로 제비 뽑힌 자는 여호야립이요, 둘째는 여다야요, 8 셋째는 하림이요, 넷째는 스오림이요, 9 다섯째는 말기야요, 여섯째는 미야민이요, 10 일곱째는 학고스요, 여덟째는 아비야요, -----19 이와 같은 순서로 그들이 {주}의 집에 들어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의 밑에서 자기들의 관례대로 섬겼더라.
이처럼 구분된 24 계열의 제사장들은 안식일부터 그다음 안식일까지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성소에서 섬겼고 나중에는 성전에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대하23:8).
그러나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 기간, 오순절 기간, 그리고 초막절(장막절) 기간에는 어차피 모든 남자가 예루살렘에 가야 했으므로(신16;16) 모든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서 제사장 직무를 행했습니다. 이 삼대 절기에는 율법에 따라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으므로 많은 수의 제사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달은 음력으로 계산되어 월삭(초하루)에서 다음 월삭까지가 한 달이었습니다. 이 음력의 달은 각각 29일 반이었으며 그래서 한 달은 30일, 그다음 달은 29일로 교대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30일이 되는 달은 완전한 달이고 29일이 되는 달은 불완전한 달로 불렸습니다. 음력의 열두 달은 354일 6시간이므로 유대인들의 한 해는 태양력의 한 해보다 12일 적습니다. 춘분과 추분을 회복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3년마다 베아달 즉 ‘둘째 아달’이라는 열셋째 달을 첨가하였고 이렇게 하면 그들의 음력과 현재의 태양력이 거의 일치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음력의 달들을 쓰고 우리는 태양력의 달들을 쓰므로 서로 잘 일치하지 않지만 대개 그들의 첫째 달인 니산(아빕) 월은 지금의 3월 말에서 4월 초에 해당하며 다음은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의 달과 현재의 달을 비교해서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의 열두 달
1월: 니산 혹은 아빕(현재의 3-4월, 출12:2; 13:4; 에3:7)2월: 시브 혹은 이야르(4-5월, 왕상6:1) 3월: 시반(5-6월, 에8:9) 4월: 담무스(6-7월, 겔8:14) 5월: 아브(7-8월) 6월: 엘룰(8-9월, 느6:15) 7월: 티쉬리 혹은 에다님(9-10월, 왕상8:2) 8월: 불(10-11월, 왕상6:38) 9월: 기슬래(11-12월, 슥7:1) 10월: 데벳(12-1월, 에2:16) 11월: 스밧(1-2월, 슥1:7) 12월: 아달(2-3월, 에3:7)
따라서 유대인들은 정상적인 해에는 일 년에 50.6주(반올림하여 51주)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24 계열로 구분된 제사장들은 1년에 두 번(전반기와 후반기에 각각 한 주씩) 의무적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삼대 절기에는 관례에 따라 모두가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정상적인 해에 51주 직무 수행이 완료됩니다. 윤달이 있는 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의 직무 수행에 대해서는 위키 백과 등의 자료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en.m.wikipedia.org/wiki/Priestly_divisions
http://www3.telus.net/public/kstam/en/temple/details/priest_service.htm
따라서 1월부터 각 계열(반열)의 제사장들이 섬기는 순서는 아래 도표와 같았습니다(제사장의 이름은 대상24:1-19 참조 바람).
히브리 달력 1월
(니산 혹은 아빕)
2월(시브)
3월(시반)
첫째 주
1. 여호야립
4. 스오림
전체(오순절)
둘째 주
2. 여다야
5. 말기야
8. 아비야
셋째 주
전체(무교절)
6. 미야민
9. 예수아
넷째 주
3. 하림
7. 학고스
10. 스가냐
이 표에서 보듯이 아비야 계열(반열)에 속했던 사가랴는 셋째 달인 시반 월의 둘째 주에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뒤 그달 중순경에 귀가하였고,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바로 그때에 침례자 요한을 수태하였습니다. 따라서 침례자 요한의 탄생일은 히브리 달력으로 ‘셋째 달 중순 + 임신 기간 열 달(음력) = 열셋째 달 중순경’이며 이것은 곧 그다음 해 첫째 달 중순경입니다. 이때는 히브리 달력에서 첫째 달인 아빕 월 또는 니산 월의 중순경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곧 유월절(14일)을 포함하는 무교절 기간의 어느 날입니다.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보다 여섯 달 늦게 수태되셨으므로(눅1:24–27) 그분의 탄생일은 침례자 요한의 탄생일보다 여섯 달 늦게 되므로 히브리 달력에서는 그 해 일곱째 달 중순경이 됩니다. 히브리 달력에서 일곱째 달인 티쉬리 월 중순은 유대인들의 장막절(초막절)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일이 지금의 태양력으로는 9월 말에서 10월 초에 있는 장막절쯤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침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 직무를 유대인들의 달력에서 셋째 달 둘째 주에 수행한 것에 근거하여 추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24 계열의 제사장 직무는 1년에 전반기에 한 번 후반기에 한 번 총 두 차례 돌아오므로 사가랴는 그 해의 후반기에 34번째 주에 직무를 수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즉 24 계열의 제사장들은 그해 전반부에 한 주씩 24주 동안 직무를 수행하고 또 모두 무교절과 오순절에 걸쳐 두 주 동안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리고 나서 후반부가 되면 아비야 계열은 여덟째 주에 직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후반부 직무 수행 주는 24주+2주+8주=34번째 주가 됩니다. 이 경우 침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은 위의 경우에 계산된 날짜에 24주를 더한 날에 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침례자 요한은 장막절을 지키는 시기에, 그리고 예수님은 무교절을 지키는 시기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경우 예수님의 탄생일은 3월말에서 4월 초가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 반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배반당하고 처형당하신 마지막 유월절을 포함하여 네 번의 유월절이 나옵니다(세 번은 확실하고 한 번은 추정 가능함). 이 네 번은 정확히 3년을 뜻하고 첫째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예비 사역을 약 반 년 동안 하신 것으로 보이므로 그분의 사역은 서른 살이 되시던 해 장막절(지금의 태양력으로 9월 말-10월 초)에 시작되어 3년 반이 지난 유월절(3월 말-4월 초)에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여러 성경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예수님의 출생이 장막절 즈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1. 요1:14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거하다’로 번역된 그리스말은 ‘장막을 치셨다’는 뜻이며(tabernacled) 그래서 예수님이 장막절(feat of tabernacle)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2. 유대 땅의 늦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은 상당히 추우므로 목자들이 자기 양떼를 들에 둘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기록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목자들이 자기 양떼를 밤에 밖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눅2:8). 그러므로 이런 정황으로 보아 예수님은 유월절 부근이 아니라 장막절 부근에서 출생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3. 예수님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예루살렘에서 왕국을 세우실 때에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반드시 장막절을 지켜야 합니다(슥14:16-19). 이런 면에서 장막절이 그분의 출생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사실 장막절은 기쁨의 절기요(눅2:10), 이방 민족들을 위한 절기입니다(눅2:31-32).
4. 침례자 요한의 탄생일과 관련해서 유대인들이 행하는 유월절 의식에서 고려할 것이 있습니다. 유월절 의식에서 유대인들은 다시 올 엘리야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하신 엘리야(말4:5–6)가 유월절에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약성경은 침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왔다고 합니다(눅1:17). 따라서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온 침례자 요한은 유월절에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로부터 6개월 뒤인 장막절에 탄생하셨다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연구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일을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추정 가능한 날짜를 공부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어떤 확실한 도움을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도 상식과 논리를 가지고 이런 문제를 대해야 함을 배웠을 뿐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일이나 아담의 창조 날짜 등에 아무 가치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호기심을 갖고 연구할 수는 있으나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이런 날짜들은 확고하게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날짜를 정하는 일에 과도한 시간을 투자하거나 어떤 사람이 정한 날짜를 기념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전혀 합당치 않습니다. 이렇게 날짜를 정하려는 시도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증인회’ 같은 사이비/이단들에게 기독교가 잘못되었다는 공격의 빌미를 줍니다.
http://cafe.naver.com/kobi9702/210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일 자체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우리는 보는 것으로 걷지 않고 믿음으로 걷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고후5:7)
2014-05-29 10:12:47 | 관리자
참고로 수요일 처형에 대한 요약은 다음 링크에
PDF 파일로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0
2014-05-08 16:42:43 | 관리자
예수님이 죽으신 날과 부활하신 날: 밤낮으로 사흘, three days and three nights(부활 시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죽으신 날과 부활하신 날이 언제인지 궁금해할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나온 개신교회는 대개 전통에 따라 예수님이 금요일에 죽으시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요나의 사건을 언급하며 그분께서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속에 있다가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므로 일단 그분은 금요일에 죽으실 수 없습니다.
38 그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의 어떤 자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선생님으로부터 표적을 보기 원하나이다, 하거늘 39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그 세대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40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마12:38-40).
또한 예수님은 구약의 예표를 100% 그대로 성취하셔야 하므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유월절인 1월 14일에 죽으셔야만 합니다.
구약 출애굽기 12장에 가서 유월절 어린양을 예비하고 죽이는 규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1월 10일에 어린양을 준비하고(출12:3) 14일이 될 때까지(출12:6) 즉 13일이 끝나는 저녁까지 흠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14일이 시작되는 저녁에 그 어린양을 죽이고 구워서 먹고 피를 문기둥과 인방에 뿌려야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1월 10일 즉 보통 종려주일이라 불리는 날(일요일)에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바로 이날 그분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신을 세상에 공식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바로 이때가 다니엘의 70이레 중 69이레 즉 483년이 성취되는 때입니다(단9:25-26).
우리 주님께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자신이 돌아보는 그 날(day of visitation)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을 저주하셨습니다(눅19:41-44). 그리고 그 사흘 동안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과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고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마23). 하지만 그 사흘 동안 아무도 그분에게서 흠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마22:46). 그런데 유대인 학자 에더샤임 등의 증언으로는, 예수님의 출생 전에 유월절 풍습에 조그만 변화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14일이 시작되는 저녁에 어린양과 누룩 없는 빵과 쓴 채소를 곁들여 간단하게 식사를 하였고, 무교절이 시작되는 15일 저녁에 성대한 만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14일이 예비일(Preparation day)이라 불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14일이 끝나고 15일이 시작되는 저녁까지 무교절의 큰 만찬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무교절이 시작되면 15일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막15:42, 눅23:54, 요19:31 등은 모두 예수님께서 예비일에 즉 14일(유월절)에 죽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마27:62는 십자가 처형 다음날이 곧 예비일 다음날이라고 하며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즉 사복음서가 다 이 사실에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14일이 시작되는 저녁(13일이 끝나는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그 밤에 붙잡혀서 유월절인 14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에 달리신 후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1월 10일에 선택되어 사흘 동안 검사를 받고 14일에 죽으시며 성경 기록들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1월 14일(목)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려 오후 3시에 죽으시고(마27:1-2) 무덤에 들어가신 뒤 1월 17일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1절은 그 목요일 다음에 온 안식일이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이루어지는 평상시의 보통 안식일이 아니라 큰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런즉 그 날[십자가 처형일]은 예비일이므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그 몸들을 십자가에 남겨 두려 하지 아니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고 그 몸들을 치워 달라고 간청하니 (이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라.) 즉 15일(금요일)은 큰 안식일이고 16일은 늘 지키는 평상시의 토요일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토요일 저녁부터 주의 첫날인 일요일이 시작되었고 예수님은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위의 그림에서 유대인들의 날은 저녁부터 시작됨에 유의할 것).
이것은 눅24:13-35에 있는, 엠마오 마을로 가던 제자들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눅24:21)
여기서 뒷부분은 영어로 “to day is the third day since these things were done.”입니다. 여기의 since는 ‘이후로’를 뜻하므로 그들은 이 모든 일(십자가 처형)이 이루어진 이후로 셋째 날인 일요일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모든 일(십자가 처형)이 일어난 뒤 금요일은 첫째 날이고, 토요일은 둘째 날이며, 일요일은 셋째 날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three days and three nights)이라는 구절에 매여 예수님은 무덤에 72시간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신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예수님이 토요일 오후 3시에 부활하셔야만 합니다. 그때가 바로 72시간이 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엠마오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이 있은 지 넷째 날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처럼 주님께서 목요일 3시에 돌아가셨다가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그분께서 무덤에 계신 기간은 72시간이 아니라 63시간이 됩니다(현대 달력으로 목요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3시간, 목요일 저녁 6시부터 금요일 저녁 6시까지 24시간(유대인들의 금요일, 큰 안식일),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 24시간(유대인들의 토요일 안식일), 토요일 저녁 6시부터 일요일 새벽 6시까지 12시간).
그래서 이 기간이 72시간이 아니므로 틀린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이 셋째 날 부활하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으므로 수요일 십자가 처형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마16:21; 17:23; 20:19 등 14구절). 또한 에스더기 4장 16절과 5장 1절은 세 날(three days)이 꼭 72시간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거기의 세 날은 셋째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저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대로 1월 14일(목) 오후 3시에 죽으셨다가 1월 17일(일) 새벽 6시에 부활하셨다고 믿습니다. 이 경우 14일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까지를 한 낮 즉 ‘one day’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정확히 ‘three days and three nights’ 이후에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이 됩니다. 따라서 무교절의 안식일 이후에 오는 초실절(day of firstfruits)은 1월 17일이 됩니다.
금요일 처형의 경우 엠마오 제자들이 주님을 만난 것은 이 모든 일이 있은 이후로 둘째 날이 되므로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맞지 않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에서 조금 변화가 있지만 그래도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고 이렇게 믿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어 이처럼 생각을 정리하여 올리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의견이 달라도 괜찮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도 예수님의 출생일, 출생 연도, 처형일, 부활하신 날을 정확히 기술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데이터는 하나님의 비밀인 것 같습니다. 다만 확신을 가지고 믿는 바를 잘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이 문제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4-05-08 16:39:59 | 관리자
과연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닌가?
마태복음 19:16-17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해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16 ¶ 보라, 어떤 사람이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하매 17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다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17절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어떤 분들이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사원에 갔더니 거기에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가 있어서 가져다가 읽었다고 합니다.
이 책자의 저자는 “예수님이 자기는 선하지 않다고 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선하다고 했으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그 저자의 주장이 맞는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바르게 설명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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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땅에서 이슬람의 포교 활동이 매우 거세고 활발합니다.이들은 성경의 진리를 뒤엎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유치한 책자를 만들어 유포시키고 있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책자를 접할 때 이들의 포교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들의 주장대로 선한 분이 아닐까요?먼저 성경 기록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0장 11-14절에서 그분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무려 3번이나 말씀하십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거니와‥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노라.
그러므로 마태복음 19장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응답은 결코 자신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행한 일들은 모두 다 선합니다.
30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라. 31 이에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다시 그분을 치려 하거늘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가 내 [아버지]로부터 나온 많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일들 중의 어떤 일 때문에 너희가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하시매 33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요 신성모독 때문이니 곧 사람인 네가 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니라, 하매(요10:30-31)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감추어진 내면의 위선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단지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도 하나님께만 속하는 호칭을 내게 붙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이런 호칭을 내게 붙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너희 유대인들이 그런 마음으로 이런 호칭을 쓸 때에는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록 그 호칭이 내게 적합하지만, 너희는 그 호칭의 참된 의미대로 무한대의 완전함을 가진 분, 즉 신성을 가진 하나님으로서의 의미로 그것을 나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너희는 단지 내게 아첨하려고 그 호칭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너희 마음이 시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첨하려고 아무 뜻도 없이 하나님께만 속하는 그런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선한 속성이나 신성을 부인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은밀한 속 중심을 살피시는 예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께 속한 호칭을 사용하여 아첨하려는 이 사람을 반박하고 그 위선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교훈을 주십니까?“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내가 바로 유일하게 선한 이 즉 하나님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사실 하나님만 선한(good) 분일까요?아닙니다!
성경에는 사람들 중에도 선한 자들이라고 불린 여러 명의 기록이 나옵니다.
20 이로써 네가 선한 자들의 길로 걸으며 의로운 자들의 행로들을 지키리니 21 이는 곧바른 자들이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들이 그 안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라(잠2:20-21).
눅23:50은 아리마대 요셉을 가리켜 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행11:24는 바나바를 가리켜 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외에도 시37:23; 112:5; 잠12:2; 13:22; 14:14; 미7:2; 마12:35 등은 선한 사람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만을 선하다고 했을까요?그것은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신성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이슬람 소책자의 저자는 성경 문맥에 상관없이 한 구절을 따다가 사람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그러나 문맥을 보면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14:1).
사실 이런 수법은 사이비 이단 종파들이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성경 문맥은 무시한 채 자신들이 필요한 성경의 한두 구절만을 취해서 마치 모자이크 조각을 이어 붙이듯이 자신들의 교리를 위한 체계를 만들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영적으로 사악한 무리들이 쓰는 이런 고질적인 수법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해하고 문맥의 흐름에 따라 바르게 읽고 해석하는 습관을 정착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책자의 저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질 수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본래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함의 근원인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첨하는 호칭을 붙이는 자에게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 알라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즉 그 알라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하나님처럼, '삼위일체가 아니라 아버지 홀로 존재하는, 성경 기록과 상관없는, 사람이 만들어 낸 짝퉁 신'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 이 세 분이 한 하나님이신 참 하나님입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5:7).
아멘 할렐루야!!
2014-04-25 17:28:56 | 관리자
악한 자의 대언도 맞나요?
어떤 분이 질문을 해서 답을 드립니다.
“요한복음 11장 49-52절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문맥에서는 예수님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없애려는 바리새인들의 무리가 나오고 그 무리 중에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나와 다음과 같이 대언합니다.
49 …너희가 결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50 또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게 되는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줄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더라51 그는 스스로 이 말을 하지 아니하고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님께서 그 민족을 위해 죽으실 것을 대언하되,52 그분께서 그 민족만을 위해 죽지 아니하고 널리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함께 모아 하나가 되게 하려고 죽으실 것을 대언하였더라.
위의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의 사람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내용을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요?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잡으려 하는 바리새인의 일당인가요?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 장에서 어떤 인물인지 또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악인입니다.그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한 사람이 죽어 민족을 살리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고
약 60년이 지난 뒤에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이것을 가리켜 그가 대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그의 말을 후에 살펴보니 그것 자체가 대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악한 자도 사용하여 대언하실까요?
물론입니다.
민수기 24장에서 거짓 대언자 발람이 나옵니다.그는 민24:15-17에서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대언하였습니다.
15 그가 비유를 지어 이르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이 열린 자가 말하고 16 [하나님]의 말씀들을 들은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지식을 안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본 자, 무의식 상태에서도 자기 눈을 뜬 자가 말하였노라. 17 내가 그를 볼 터이나 지금 보지 아니하며 내가 그를 바라볼 터이나 가까이서 보지 아니하리로다. 야곱에게서 한 별이 나오며 이스라엘에게서 한 홀(笏)이 일어나서 모압의 구석구석을 치고 셋의 모든 자녀들을 멸하리로다.
그러므로 악인인 가야바는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성경적으로 대언하였습니다.
아마 발람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샬롬
2014-04-24 16:32:16 | 관리자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마가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 ¶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그분께서 시장하시므로 13 멀리서 잎사귀 달린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가셨으나 그것에 이르러 보시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더라. 14 예수님께서 그 나무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것을 듣더라.
어떤 분이 이렇게 묻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때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므로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한데 왜 주님은 이 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잎사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에 잎사귀가 있으면 당연히 열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으므로 보는 사람을 속입니다.
사실 여기의 무화과나무는 앞뒤 문맥 상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성한 종교 의식은 가득한데 아무 열매도 없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저주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나무는 영원히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그로부터 약 40년 뒤에 저주가 임하여 AD70년에 성전과 나라를 잃고 1948년까지 떠돌아다녔습니다. 이 이스라엘에게는 앞으로 주님의 재림과 함께 왕국의 통치가 임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 자체는 영원히 저주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 기사는 위선의 잎사귀가 아니라 진정한 열매를 바라시는 주님의 열망을 잘 보여 줍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7 그때에 그(침례자 요한)가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게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너희 속으로,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로 있다, 하고 말하기 시작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느니라. 9 이제 또한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하니라. 10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1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겉옷이 두 벌 있는 자는 하나도 없는 자에게 나누어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니라. 12 그때에 세리들도 침례를 받으려고 와서 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정해 준 것 이상으로 거두지 말라, 하니라. 14 군사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아무도 폭행하지 말고 아무도 거짓으로 고소하지 말며 너희가 받는 급료로 만족하라, 하니라.
샬롬
2014-04-24 16:17:17 | 관리자
사울과 아브엘은 사돈이 아니라 사촌입니다.
2014-04-15 11:53:41 | 관리자
사울의 할아버지는 아비엘인가요? 넬인가요?
이제 기스라는 이름의 베냐민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사대 손으로 베냐민 족속이며 능력 있고 강력한 자더라(삼상9:1).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마아스의 딸 아히노암이요, 그의 군대 대장의 이름은 아브넬인데 그는 사울의 삼촌 넬의 아들이더라.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인데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더라(삼상14:50-51).
넬은 기스를 낳고 기스는 사울을 낳고 사울은 요나단과 말기수아와 아비나답과 에스바알을 낳았으며(대상8:33) 넬은 기스를 낳고 기스는 사울을 낳았으며 사울은 요나단과 말기수아와 아비나답과 에스바알을 낳았더라(대상9:39).
삼상9:1과 14:50-51을 보면 넬과 기스는 형제지간입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비엘입니다.그러므로 이 넬은 사울의 삼촌입니다. 이 넬의 아들은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입니다. 그러므로 사울과 아브넬은 사촌지간입니다.
그런데 대상8:33과 9:39를 보면 넬은 사울의 할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실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아들이나 손자 등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미국 등에서 매우 흔한 일입니다.
즉 사울의 할아버지 이름은 아비엘이기도 하고 넬이기도 합니다.즉 사울의 할아버지는 두 개의 이름 즉 넬과 아비엘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사울의 할아버지도 넬(혹은 아비엘)이고 삼촌도 넬입니다.
샬롬
2014-04-14 13:48:49 | 관리자
다음을 참조하세요.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53
2014-04-10 13:31:24 | 관리자
예수님은 지상 사역 기간에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요12:27).
지금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이때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이때까지 왔나이다.
어떤 분들은 히5:7을 언급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5:7).
히5:7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면하셨어야 합니다.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히5:7의 사망은 육체적 사망이 아니라 둘째 사망 즉 하나님과 영영히 분리되는 사망을 말합니다. 그분은 이 기도를 드리신 뒤 기도의 응답을 받아 부활하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분이 둘째 사망에서의 구원을 기도했을까요?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실 때에 그분이 친히 죄가 되셨기 때문입니다(고후5:21; 벧전2:24).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육신의 죽음이 두려워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고 친히 죄가 되실 터이므로 영원한 둘째 사망에서 구출받기 위해 아버지께 기도한 것입니다.
샬롬
2014-04-10 13:28:59 | 관리자
창49:24의 ‘거기서부터’는 무엇을 뜻합니까?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죽기 전에 자기의 열두 아들에게 복을 줍니다.그러면서 22-24절에는 요셉에 대한 복이 나옵니다.
22 ¶ 요셉은 열매가 많은 가지 곧 샘 옆의 열매가 많은 가지인데 그것의 작은 가지들이 담을 넘는도다. 23 활 쏘는 자들이 그를 심히 괴롭게 하고 그를 쏘며 그를 미워하였으나 24 그의 활이 강하고 그의 손의 팔이 야곱의 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강하게 되었나니 (거기서부터 목자 곧 이스라엘의 돌이 나오는도다.) 24 But his bow abode in strength, and the arms of his hands were made strong by the hands of the mighty [God] of Jacob; (from thence [is] the shepherd, the stone of Israel:)
어느 분이 24절 끝 부분을 언급하면서 ‘거기서부터 목자 곧 이스라엘의 돌이 나오는도다’는 분명히 메시아 예언 같은데 어떻게 요셉에게서 메시아가 나오느냐고 물어서 간단히 답을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또 여러 사람들의 주석을 보아도 24절 끝 부분은 메시아에 대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from thence)는 무엇을 뜻할까요?
얼핏 보면 전체 구절들이 요셉에 대한 것이라 ‘요셉에게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을 보시면 ‘from thence’ 앞에 바로 야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거기서부터’는 ‘야곱으로부터’를 뜻합니다. 즉 야곱에게서 목자 곧 이스라엘의 돌이신 메시아가 나옵니다. 그 메시아는 초림 때에는 목자로 오시고(요10:11, 14; 벧전5:4; 히13:20) 재림 때에는 돌로 오십니다(단2:34-35, 44-45; 마21:44).
이런 면에서 영어 성경이 조금 더 유용합니다.
샬롬
2014-04-08 13:56:59 | 관리자
왕상6:1의 480년과 행13:20의 450년은 모순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다음과 PDF 파일을 보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45
샬롬
2014-03-27 14:06:01 | 관리자
이 글을 인쇄해서 볼 수 있도록 PDF 파일을 올렸습니다.
샬롬
2014-03-27 14:03:50 | 관리자
사도행전 13장 20절의 450년에 대하여
어떤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는 자기 신분이 노출될까 봐 은밀하게 다른 사람을 통해 킹제임스 성경에도 오류가 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구절이 있다는 쪽지를 교회 사무원에게 전달하게 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킹제임스 성경만이 올바른 성경이라고 일방적으로 우기지 말라고 경고 메시지까지 끝에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분이 지적한 킹제임스 성경의 명백한 오류란 다름 아닌 사도행전 13장 20절입니다. 이 구절은 오랫동안 학계에서 논쟁이 되어 왔지만 뚜렷한 단일 해결책을 찾지 못한 유명한 구절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3~41절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선교 여행을 가서 유대인들에게 구약의 유대인 조상들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출현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단 문제가 되는 20절 부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6 이에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이르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그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거할 때에 그들을 높이시며 거기서 그들을 높으신 팔로 데리고 나오시고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 동안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며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사 그들의 땅을 제비뽑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20 그 뒤에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 동안 그들에게 재판관들을 주셨느니라.
16~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 조상들을 택한 때부터 사무엘까지의 여러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반대자들은 20절의 450년 즉 바울이 재판관들이 다스린 때라고 한 기간이 실제로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열왕기상 6장 1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집트 탈출부터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 즉 그의 통치 제4년까지의 기간이 480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 되는 해 곧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지 사 년이 되는 해 시브 월 즉 둘째 달에 그가 {주}의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더라(왕상6:1).
간단하게 재판관들 이후의 연대를 계산해 보면, 사울 왕의 통치 40년과 다윗 왕의 통치 40년,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3년을 포함하여 약 83년입니다(나중에 언급할 중첩 기간은 일단 무시한 것임). 여기에다 이집트 탈출 이후부터 재판관들의 통치 시작까지 약 47년의 기간이 있습니다(광야 생활 40년과 가나안 땅 정복 기간 7년). 이 두 기간을 합하면 130년이 됩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 반대자들은 행13:20에 기록된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인 450년에 130년을 더하면 580년이 되어야 하는데 왕상6:1은 480년이라고 하므로 바로 이것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왕상6:1의 기간인 480년이 확실히 맞으므로 킹제임스 성경이 행13:20에서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450년이라고 한 것은 명백하게 틀렸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정도의 연대 계산은 구약성경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고전적 문제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하느냐에 따라 성경 신자와 불신자가 갈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행13:20의 450년에 대하여
자, 그러면 먼저 성경은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에 대해 무어라 말할까요?이것을 조직적으로 해결하려면 먼저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열된 대로 햇수를 계산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 표는 사사기와 사무엘기상에 기록된 기간을 보여 줍니다.
성경 구절
내용
기간
(년)
이교도 통치
(년)
삿3:8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리사다임을 팔년 동안 섬김
8
8
삿3:11
옷니엘 때에 그 땅에 사십 년 동안 안식이 있음
40
삿3:14
이스라엘 자손이 에글론을 십팔 년 동안 섬김
18
18
삿3:30
그 땅에 팔십 년 동안 안식이 있음
80
삿4:3
야빈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함
20
20
삿5:31
그 땅에 사십 년 동안 안식이 있음
40
삿6:1
{주}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심
7
7
삿8:28
기드온 시대에 사십 년 동안 그 지역이 평온함
40
삿9:22
아비멜렉이 삼 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함
3
삿10:2
돌라가 이십삼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23
삿10:3
야일이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22
삿10:8
블레셋과 암몬이 십팔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함
18
18
삿12:7
입다가 육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6
삿12:9
입산이 칠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7
삿12:11
엘론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10
삿12:14
압돈이 팔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8
삿13:1
{주}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심
40
40
삿15:20
삼손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20
삼상4:18
엘리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재판함
40
총 햇수
450년
111년
이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구약성경 사사기와 사무엘기상에 기록된 재판관 시대의 햇수를 정리하여 합산하면 묘하게도 ‘정확히 450년’이 나옵니다(만일 사무엘도 재판관에 넣는다면 물론 그 기간이 더 길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단 행13:20의 450년 문제는 해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450년이 계산되므로 논쟁을 그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한 가지 문제가 더 남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왕상6:1의 480년과 여기의 450년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논증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며 이제 이 둘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 불신자들이 하는 방법: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방법
자, 먼저 450년이라는 기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킹제임스 성경만 행13:20의 기간을 450년이라고 하지 않고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성경들도 450년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450년이라는 기간 자체는 그리스어 원어 성경에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성경들은 이런저런 형태로 19절이나 20절에 450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450년이라는 기간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주교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한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 - 개역성경과 그것의 모체가 된 ASV, ASV의 현대판인 NASB, 그리고 카톨릭 성경인 Amplified Bible, NIV 등 - 은 공인본문과 킹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생각하여 원래 20절 중간에 있던 450년을 19절의 맨 끝이나 20절의 맨 앞으로 마음대로 옮겨서 다음과 같이 읽히도록 하였습니다.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사 그들의 땅을 제비뽑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이 모든 것은 450년이 걸렸고20 그 뒤에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그들에게 재판관들을 주셨느니라.
“19 And when he had destroyed seven nations in the land of Canaan, he distributed their land as an inheritance- ALL OF WHICH TOOK ABOUT 450 YEARS: 20 and after these things he gave them judges until Samuel the prophet.”(NIV 개역성경 등)
즉 이들은 킹제임스 성경처럼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450년이 아니라,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유대인 조상들을 택한 때부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분배한 때까지의 기간이 450년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그들은 이렇게 해야만 행13:19~20과 왕상6:1에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본인들에게도 난제인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에 대한 불확실성을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한 것입니다. 먼저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원문에는 없는 ‘이 모든 것은’(all of which)이라는 말을 첨가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택한 시점이 아브라함 때부터가 아니라 이삭 때부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야만 BC 1896년경의 이삭 출생부터 BC 1444년경의 가나안 땅 분배까지 약 450년이 되기 때문입니다(어셔의 연대기 기준).
하지만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 조상들을 택하신 때부터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이야기하므로 아브라함부터가 아니라 이삭부터 그들의 조상들을 언급하는 것은 문맥에서 맞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부터 하자면 적어도 여기에 몇 십 년을 더해야 하고 그러면 자기들의 주장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이런 주장을 펴는 학자들은 반드시 이삭부터 연대를 세려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이처럼 성경 자체를 마음대로 변경하고 또 기간을 세는 기점이 될 인물까지 바꾸면서 모순처럼 보이는 성경의 연대들을 억지로 맞추려 하는 것은 일단 옳지 않습니다.
2. 성경 신자들의 방법: 성경을 그대로 두고 450년과 480년을 조화시키는 방법
사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A) 480년을 실제 햇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구속의 햇수(years of redemption)로 보는 방법
위의 표에서 보듯이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 450년에는 111년 동안 이교도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이 있습니다. 또한 사울의 통치 40년 가운데 얼마는 재판관 시대(사무엘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사무엘의 재판관 통치 기간과 사울의 왕정 통치 기간이 중첩된 때가 있었으며 그 기간이 약 11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집트 탈출부터 솔로몬의 통치 제4년까지의 기간은 원래 580년인데, 여기서 재판관들의 전체 통치 기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이교도들의 통치 기간 111년을 빼고 사무엘과 사울의 통치 기간 중 중첩되는 12년을 더하면 481년이 됩니다. 이를 근거로 왕상6:1의 480년이 계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록 480년과 481년 사이에 1년의 차이가 있지만 이것은 햇수 계산에서 반올림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바울이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약 450년’이라고 했으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분들 가운데는 중첩 기간을 25년으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이 경우 494년이 나오며 이때 480년과의 차이인 14년 역시 ‘약 450년’이라는 구절의 ‘약’(about)이라는 말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왕상6:1의 480년을 실제 햇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구속의 햇수(redemption years)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는 대부분의 성경 신자들이 알고 있듯이 490년입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상관하시는 때입니다. 그런데 첫 69이레 즉 483년과 마지막 한 이레 7년 사이에는 교회 시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과 상관 있는 기간을 일반적인 기간과 달리 정하실 수 있습니다.
한편 이렇게 되면 아담까지의 연대기를 계산할 때 왕상6:1의 480년을 580년(혹은 어떤 분은 611년)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통상적으로 알려진 어셔의 연대기 등에서 이집트 탈출 이전의 역사는 약 100~131년씩 위로 밀려나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사실 이 방법은 아주 깔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성경을 뜯어고치지 않고 성경대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어 많은 성경 신자들이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B) 모세와 여호수아를 재판관으로 보고 행13:20의 450년을 모세로부터 사무엘까지의 통치 기간으로 보는 방법
이것도 성경을 뜯어고치지 않고 행13:20의 450년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입니다.성경이 모세와 여호수아를 명확히 재판관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 두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정 전에 재판관으로 민족을 통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경우 모세의 이집트 탈출부터 솔로몬의 통치 제4년까지의 480년에서 사무엘과 사울의 중첩 기간과 다윗의 통치 기간 40년, 솔로몬의 3년 등을 빼면 425년이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고 이 정도면 ‘약 450년’이라는 표현에 맞는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이 경우는 위의 표와 달리 사무엘의 죽음까지를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실 사무엘 때까지라는 것은 확실치 않은 표현입니다. 사무엘을 포함해야 할지 포함하지 말아야 할지, 포함한다면 사무엘의 어느 때까지를 포함해야 하는지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 450년’이라고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C) 450년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숫자들을 단순히 나열해서 더한 숫자이지 실제 햇수는 아니라고 보는 방법
매튜 헨리 등의 성경 주석가들은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이 성경에 기록된 햇수를 더해서 450년이라고 말했을 뿐이며 이 햇수는 실제로 450년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바울 당시에 유대인들은 흔히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재판관들이 다스린 기간을 450년으로 이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정확한 연도와 기간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본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그대로 제시하면서 이들의 불순종을 이야기하려 했습니다. 즉 문맥의 흐름을 보았을 때 바울의 의도는 정확히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사사기와 사무엘기상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면서 그들의 불순종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확히 450년이라고 하지 않고 ‘약 450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사무엘도 포함해야 할지 제외해야 할지 막연합니다. 다시 말하면 왕상6:1은 분명히 연대기를 염두에 두고 정확한 햇수를 말한 것이고, 반면에 행13:20은 정확한 연대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재판관들의 연대가 ‘약 450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유대인들의 불순종을 상기시키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대략적인 수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에도 화자(話者)의 의도와 필요에 따라 그가 말하는 구체적인 숫자는 정확하게 인용되는 경우도 있고 대략의 수치로 인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왕상6:1과 행13:20을 서로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신빙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사기와 사무엘기상을 근거로 만든 위의 표에는 사실 재판관들 사이에 중첩되는 기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삿13:1에서 블레셋의 통치 기간은 40년입니다. 삿15:20에서 삼손의 통치 기간은 20년입니다. 그런데 이 40년과 20년은 서로 상관없는 기간이 아니라 블레셋의 40년 통치 기간 안에 삼손의 통치 기간 20년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재판관들의 시대가 중첩되었음을 보여 주는 분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사사기 11장 26절에서 입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것의 고을들과 아로엘과 그것의 고을들과 아르논 지경에 있는 모든 도시에 거한 지 삼백 년이 되었거늘 그런즉 너희가 어찌하여 그것들을 그 기간에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삿11:26)
즉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면서 헤스본을 정복한 이후로 입다까지 300년이 있었습니다. 이 300년은 왕상6:1의 480년이 실제 기간이라야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재판관들의 중첩 기간과 입다의 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행13:20의 ‘약 450년’에 해당하는 실제 햇수는 330~340년이 됩니다.
그래서 어셔를 포함한 대부분의 연대기 학자들은 왕상6:1에 근거하여 이집트 탈출은 BC 1491년에 이루어졌고,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BC 1012년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프레임 안에서 보면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은 BC 1400년경부터 마지막 재판관인 사무엘이 죽은 BC 1060년경까지 약 341년이 됩니다.
위의 세 가지 방법 외에도 문헌을 찾아보면 킹제임스 성경을 뜯어고치지 않고도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더 있습니다.
이 문제를 보면서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13:20의 재판관들의 통치 기간이 450년이라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성경 신자들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난제를 만났을 때 반드시 성경을 그대로 두고 해당 구절들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말씀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현대 역본들의 역자들처럼 자기 생각과 성경의 햇수가 다른 경우 본문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범법 행위입니다.
이런 범법 행위는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면 다음은 유명한 예입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64
앞서 살펴본 대로 킹제임스 성경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성경이 사도행전 13장 20절의 기간을 450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약 450년’이라는 기록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을 들어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에 흠집을 내 보려는 사람들의 의도는 마치 이솝 우화에 나오는 ‘꼬리 잘린 여우’의 심리와 같습니다. 이것은 사냥꾼의 덫에 꼬리가 걸려 잘린 여우가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가리기 위해 동료 여우들에게 꼬리가 없으므로 편리한 것들을 이야기하며 꼬리를 잘라 스스로 장애를 입도록 꾀었다는 우화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성경에 있는 오류가 킹제임스 성경에도 있으니 킹제임스 성경 역시 인간에 의해 개정될 수 있는 불완전한 번역본에 불과하고 완전한 성경은 있지도 않으며 필요도 없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 안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탁월함에 대한 무수한 증거나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 등 변개된 성경들에서 수없이 드러나는 심각한 오류와 신학적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교회들의 타락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을 작은 허점에 근거해 붕괴시키고자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그런 허점은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어떻게 보실지 깊이 생각하고 오직 바른 성경을 통한 믿음 안에서 바르게 행하는, 지혜와 분별력이 충만한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2014-03-26 17:28:18 | 관리자
우리의 구원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근간입니다.
이를 위해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이트의 기사로 읽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PDF 파일을 다운받아 인쇄해서
성경과 비교해 가면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으로 소책자를 읽고 모든 것을 요약해서 머리에 넣기 바랍니다.
요즘 구원 취소 교리로 성도들을 불안하게 하는 자들이 많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부랴부랴 이 글을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4-02-20 14:58:36 | 관리자
히브리서 6장 4-8절과 10장 26-27절은 구원 취소를 가르치지 않습니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히6:4-8; 히10:26-27)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606
히브리서 배경
1. 요즘 구원이 취소된다는 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많다. 이들이 이런 이단 교리를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 바로 히브리서 6장 4-8절과 10장 26-27절이다. 이런 악한 교리로 인해 고통당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기에 이 글에서는 성경을 통해 바른 교리를 정립하고자 한다.
2.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의 수신자와 문맥이다. 이런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이 히브리서 구절들 역시 수신자와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초대 교회가 형성될 때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히브리) 성도들이다. 이 당시에는 여전히 유대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유대인 교사들은 기독교로 회심한 이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다시 유대교로 복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3. 이에 히브리서 기록자인 사도 바울은 유대인 교사들의 악한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천사와 모세와 여호수아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레위의 제사장 체계와 그 안의 모든 희생물보다 우월함을 증명한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사도는 율법의 의식 법들이 제정된 목적과 용례를 보여 주고 이제는 그것들이 그리스도라는 실체가 옴으로써 완전히 폐기되었음을 논리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사도는 극심한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을 참으라고 권면하면서 배도의 물결에 휘말리지 말 것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사도는 구약시대 영웅들의 믿음 열전을 보여 주며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동일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우리의 참 소망이 하늘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4. 이 히브리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때에 그분을 믿은 자들에 의해 주님께 인도된 자들이었다(히2:3). 이들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해 안으로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밖으로는 로마 제국에 의해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히10:32-34; 12;4; 13:13-14) 믿음의 진보를 거의 이루지 못하고 성화의 삶을 포기한 채 영적으로 답보 상태에 있었다(히6:1). 이들은 또한 거짓 교리들에 유혹을 받았고(히13:9) 처음에 자기들에게 진리를 바르게 가르쳐 준 사람들을 차츰 잊어버리는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히13:7), 그중에는 심지어 예배에 나오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히10:25).
5. 이런 위험에 빠진 히브리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들이 이런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면 비록 구원은 잃지 않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히12:5-11; 고전3:11-17).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의 구원자가 누구인가?”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다시 믿음을 평가한 뒤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전진해 나가라고 권면한다(히12:12-13).
6. 이 점들을 기억하면서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이 난해 구절들이 사실 구원 취소가 아니라 보상의 취소와 징계를 가르치는 말씀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히브리서 6장 배경 설명
1. 사도는 5장에서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과 신약시대의 유일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비교하며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구약시대 대제사장들과 달리 아론(레위)의 계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하면서 5장 11절에서 사도는 과연 이 히브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미숙하여 자기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5장 12-14절에서 그들이 시간상으로 보아 마땅히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를 이해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아직도 젖을 빠는 아기들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이것을 지적한 뒤 사도는 6장 1-3절에서 이제는 그들이 이런 미숙한 상태를 벗어나 완전함(성숙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권면한다. 바로 이런 문맥의 흐름에서 저 유명한 4-8절 말씀이 연이어 나온다.
히브리서 6장 4-8절 설명
히브리서 6장을 전체적으로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이 구절들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음에 대해 말하지 않음을 금세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사도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침체 상태에 빠져 있는 이 히브리 성도들을 일깨우려고 충격 요법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히6:4-8과 히10:26-39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살펴보고 이 구절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6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7 자기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땅을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채소를 내는 땅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니와 8 가시와 찔레를 내는 것은 버려지고 저주함에 가까이 있어 마지막에는 그것이 불살라지리라.
1.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여기서 사도는 구원받은 자들이 믿다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 지옥에 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들은 완전히 배도하여 옛 생활로 돌아갔으므로 구원을 잃고 영원히 구원을 잃게 된다.”
a. 이것은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은사주의 순복음 교회 등과 같이 ‘알미니안 주의’를 견지하는 자들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짧게 ‘구원 취소 교리’로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으로 서울 ‘큰 믿음 교회’의 변OO 목사, 연세중앙교회의 윤OO 목사, 서울 순복음교회의 조OO 목사 같은 유명(?) 목사들이 이런 교리를 주장한다. 이들 외에도 7년 환난 통과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카페와 거기서 소개하는 데이비드 O, 벤자민 O 등의 목사들 - 이 이 교리를 주장하면서 신부 단장 연습, 주님의 군대 가입 등을 통해 행위로 믿음을 유지할 것을 가르친다.
b.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 교리와 전적으로 배치된다. 히브리서 자체가 이를 증언한다.
(1)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히5:9). (2)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히7:25). (3)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속이다(히9:12). (4) 우리는 영원한 상속 유업을 받는다(히9:12).(5)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다(히13:5-6).
c. 또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구원이 취소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말한다.(1)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5:24). (2)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서 성도들을 빼앗을 수 없다(요10:20). (3) 이 세상 어떤 창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다(롬8:28-39).
d. 아이러니하게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또한 구원을 잃은 뒤에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말하지만 6절은 그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한다. 즉, 구원을 잃었다가 다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2.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이 히브리 성도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그들은 말로는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전혀 설득력이 없다.
a. 이들은 ‘한 번’ 빛을 받은 자들이다(히6:4). 여기의 ‘한 번’은 사실 ‘영원한 한 번’을 말한다. 히브리서의 ‘한 번’의 용례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한 번’은 ‘영원한 한 번’이다(히7:27; 9:12, 26-28; 10:10 등).
b. 이들은 하늘의 선물을 맛보았다(6:4).
c.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보았다(6:5).
d. 이런 주장을 펴는 자들은, 이 히브리 성도들이 구원받지 않았음을 강변하기 위해 그들이 구원을 맛보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맛보다’라는 말은 실제로 먹는 것을 뜻한다. 히2:9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고 기록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은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죽지는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죽음을 맛보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맛보다’는 표현은 실제로 맛보고 먹었다는 뜻이다. 벧전2:2의 ‘맛보다’도 같은 뜻이다.
e. 이들은 성령님에게 참여한 자들이다(6:4). 히3:1은 이들을 가리켜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하며 히3:14는 이들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라고 한다.
f. 이런 것들로 보아 이들은 분명히 구원받은 자들이다.
g. 구원받지 않은 불신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을 모욕할 수 있겠는가?(6절) 불신자들은 항상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항상 그분을 모욕하지 새로이 하지는 않는다.
3. 어떤 이들은 이런 죄가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 있을 때까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지금 영적 성숙과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를 연결하고 있는가? 히브리 성도들은 지금 영적으로 미숙해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은 지금도 미숙한 성도들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지금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이런 권면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4.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7년 환난기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럭크맨(Peter Ruckman)을 추종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히12:23을 보면 이들은 교회에 속한 자들이므로 히브리서를 환난기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하려는 시도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5. 그러면 이 구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6절의 ‘if’와 9절의 ‘But’과 ‘though’이다. 이것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a. 사도 바울은 복지부동의 자세를 고집하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기 위해 가정법을 사용해 구원받는 자는 구원이 아니라 보상을 잃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히6:9-10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은 잠시 후에 9-10절을 보여 주면서 설명할 것이다. 사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이런 가정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육체에 따른 내 형제들, 내 친족들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으리니”(롬9:3). 자기 육신의 친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다고 고백했다. 이 말의 본래 의도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애타게 바라는 바울의 심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결코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듯, 가정법은 화자(話者)의 간절한 의도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는 서법이다.
b. 히6:3까지 사도는 자기를 포함하여 ‘우리’(we, us)라는 표현을 쓰다가 4절부터는 갑자기 ‘우리’ 대신 ‘자들’(those)로 주체를 바꾼다(우리말 성경에서는 5절). 즉, 지금 그는 무언가를 가정하려 하고 있다. “For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were once enlightened…”
c. 히브리서를 바로 이해하려면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우리’는 사도 바울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을 가리킨다(히1:2-3; 2:1; 3:1, 14; 4:14; 4:16…12:1-2, 28-29; 13:6, 15).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d.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애용하는 히10:26-27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면 쉽고 바르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19-25절을 살펴보자.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20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므로 22 우리 마음이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23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 24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며 25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 히10:19-25의 ‘우리’는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몸은 순수한 물로 씻긴 자들이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를 포함한 이 히브리 성도들이 즉 ‘우리’가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문맥에 따라 이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바로 바울을 포함한 구원받은 자들임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 뒤에 유명한 26-27절이 나온다. “26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 27 대적들을 삼킬 심판과 불 같은 격노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어떤 일만 남아 있느니라.”
f. 그러면 히10:26의 ‘우리’ 즉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않고 불 같은 격노를 두렵게 기다려야만 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여기서도 사실 사도는 ‘if’를 사용하여 가정하고 있다.) 어쨌든지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여기의 ‘우리’가 바로 위에 있는 히10:19-25의 ‘우리’라는 점이다. 즉, 여기의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19-17절을 통합적으로 보아야지 26-27절만을 따로 떼어 문맥에 상관없이 해석하면 안 된다. 구원 취소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애용하는 히10:26-27의 ‘우리’는 히브리서 전체와 10장에서 보듯이 분명히 사도 바울을 포함한 구원받은 자들이다.
g. 그런데 이 사람들이 고의로 죄를 짓지 않으려면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만 한다(23절). 그리하지 않으면 히10:28에 있듯이 구원은 받았어도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히10:28).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어린양의 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다(고전10:1-5). 이집트 탈출은 성경에서 항상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도 고라와 그의 무리들(민16장) 또 나답과 아비후처럼(민3:4) 모세의 율법을 멸시하다가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히브리 성도들이 더 이상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면 심지어 육체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육체의 죽음을 뜻하지 구원의 상실을 뜻하지 않는다.
h. 구원받은 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히브리서의 교훈은 히10:34-35에 있다. 즉 성도들이 확신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확신을 버리고 말씀을 저버리면 보상의 손실을 입고(고전3:12-17) 더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i. 그러므로 이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보상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자들이다.
j. 신약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도 (육체적)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요일5:16-17; 고전5:5; 딤전1:19-20; 딤후2:16-17; 요삼9-10).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니니야와 삽비라이다. 이들은 구원받았지만 성령님을 속이려 들다가 즉사하였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을 멸시하다가 죽은 자들이 있었다(고전11:28-30).
k. 결론적으로 히브리서는 - 특히 6장과 10장 - 결코 성도가 구원을 잃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l. 히브리서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성도들은 미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완전함으로/성숙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벧후3:18).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신다(히10:30; 12:5-11). 또한 성도가 극심한 죄를 지으면 신구약의 여러 사례에서처럼 곧바로 죽이기도 하신다.”
6. 히브리서 6장은 산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열매)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 8-10절이 가르치는 바이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7. 사도는 4-6절에서 충격 요법인 가정법을 사용하여 구원받은 자들이 떨어져 나가면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7-8절은 4-6절과 동일한 맥락으로서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태워짐을 말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이 불로 태워져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불타 없어지는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등이지 땅 자체가 아니다. 땅은 남아 있다. 즉 비록 불살라지는 저주를 받을지언정 땅 자체는 남아 있다. 이것은 고전3:13-16절을 그대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8. 이제 끝으로 우리는 “히브리서 수신자인 이 히브리 성도들은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는 올바른 질문이다. 반면에 “이 히브리 성도들은 구원을 잃는가? 잃지 않는가?”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9절과 10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9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 관한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온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9. 먼저 9절이 ‘그러나’로 시작됨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는 앞에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를 가리키는 역접 접속사이다. 즉, 9절에서 사도는 앞의 4-8절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말하려고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구절을 시작한다. 또한 사도는 앞에서 가정법을 써서 그들에게 있지 않을 일을 이야기하였음을 보여 주기 위해 “비록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만”이라는 양보 구절을 사용한다. 즉, 내가 앞에서 그렇게 심하게 가정하여 말을 했지만 그게 너희와는 실제로 상관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그는 “너희에 관한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이 히브리 성도들에게는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 즉 열매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열매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는 10절에서 그들에게 구원 이후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음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 성도들은 땅(구원)도 좋고 그 위에 열매 즉 믿음의 행위도 내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보상도 받는다. 다만 지금 그들이 믿음의 답보 상태에 있으므로 이대로 가면 앞으로 더 받을 수 있는 보상을 받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기에 사도는 이들을 자극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10. 그래서 사도는 11-12절에서 열심을 내어 너희가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11 우리는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바라노니 12 이것은 너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인내를 통해 약속들을 상속받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즉, 사도는 그들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 많은 보상을 받기 바랐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결코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은 끝났다. 12절에서도 사도는 그들이 확실하게 인내하여 구원이 아니라 ‘보상의 약속들’을 상속받으라고 주문하다.
11. 그리고 앞부분이 보상에 대한 내용임을 확증하기 위해 사도는 13-15절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14절 말씀 즉 “내가 반드시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창22:16-17에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은 무슨 약속인가? 구원에 대한 약속인가? 아니면 구원 이후의 상속에 대한 약속인가? 아브라함의 구원은 이미 창15:6에서 끝났다. 여기의 약속은 분명히 그의 씨가 번성하게 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즉, 보상에 대한 것이다.
12.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견딘 뒤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자손들이 번성하는 복을 받았다. 그는 75세에 자손들의 복을 약속받았고(창12:1-5), 그 이후에 24년을 약속의 자식 없이 떠돌아다니다가(창17:1-6), 100세에 가서야 이삭을 유일한 아들로 받았다(창21:1-5). 실제로 그는 자기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음을 보지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고 그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요8:56). 즉, 그는 육체적 후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영적 후손들까지 다 보았다. 그가 이처럼 상속의 소망을 - 구원이 아니다 - 받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사도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말한다.
13.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6장과 10장에서 구원이 아니라 보상의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히브리서 6장 1-3절의 권면 즉 완전함으로, 성숙함으로 나아가라는 사도의 권면이 문맥상으로 딱 들어맞게 된다.
성경 문제
1. 위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6장과 10장이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의 손실과 징계를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6장에서 개역성경은 구원 취소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2. 먼저 4-6절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if를 사용한 가정법 문장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가정법의 ‘if’(만일 …하면)를 없애고 6절에서 아예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개역 히6:6). 즉, 개역성경은 ‘if’를 없앰으로써 아예 히브리 성도들을 타락한 자들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배교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NIV도 6절에서 ‘if’는 그대로 살려놓았다. NKJV, Amplified Bible 등도 다 6절에 ‘if’를 제대로 달아놓았다. 개역성경이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은 ASV(NASB의 모체)를 대본으로 사용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ASV와 NASB는 개역성경처럼 ‘if’가 없고 ‘타락한 자들의 경우에는’으로 되어 있다.
3. 그 뒤 개역성경은 9절에 치명적인 오류를 만들어 놓았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개역 히6:9). 일단 9절 처음에 ‘그러나’가 나오면서 문장이 역전됨을 보여야 하는데 개역성경은 ‘그러나’를 없앴다. 참고로 NKJV, ASV, NASB, Amplified Bible 등도 다 ‘그러나’로 시작한다. 그리고 개역성경은 ‘though’를 단순히 뒤에 ‘말하나’로 번역하여 뜻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개역성경은 “우리는 너희가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로 번역하였다. 그들이 구원에 가깝다면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면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도 받지 못한 자들의 행위와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신단 말인가? 이것은 실로 말이 안 되는 번역이다. NKJV, ASV, NASB, NIV 역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처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그들에게 있다”라고 바르게 번역하였다. 다만 카톨릭 성경인 Amplified Bible만 ‘구원에 가까운’이라는 절을 삽입하여 놓았다. 즉, 이런 번역은 구원을 평생 과정으로 이해하는 로마 카톨릭 주의의 산물이다.
4.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가 바로 벧전2:2이다.
흠정역: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개역(ASV, NASB, Amplified Bible 등):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5. 개역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말하면서 구원이 평생 과정임을 보여 준다. 이런 성경으로는 구원을 받았다가도 언제라도 잃을 수 있다는 구원 취소 교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며 무지한 성도들은 이런 성경과 그 안의 가르침으로 인해 평생토록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면서 살게 된다. 이렇게 두려움의 불씨를 품고 사는 자들에게 개역성경의 빌립보서 2장 12절은 기름을 부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6. 성경이 두렵고 떨면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꼼짝없이 교회와 교단과 목사의 말에 순종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개역성경을 사용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이다. 그러나 바른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흠정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7.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미 얻은 구원을 가지고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밖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요점이다. 여기서 영어는 ‘work out your own salvation’이라고 말한다. 요즘 우리는 ‘워크아웃’(work out) 기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잘 나가던 회사의 재무 상태가 나빠지면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회사가 일하는 것을 감독하고 채찍질하는 것을 워크아웃이라고 한다. 즉, 기업의 경우든 성도의 경우든 워크아웃은 기업이나 구원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하여 외부로 무언가를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을 뜻한다.
8. 이런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이 믿음 생활에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가 성경 때문에 잘못되면 이로 이한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성도들이 당해야 한다. 사실 구원 취소 같은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도 잘못된 성경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1.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한다(엡2:8-10; 딤2:14).2. 한 가지 죄를 지으면 모든 죄를 지은 것과 같다(약2:10). 그러므로 무슨 죄든 죄로 인해 구원을 잃는다면 구원을 유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즉 우리의 행위가 구원에 일조하지 못하듯이 우리의 행위는 또한 구원 유지에도 일조하지 못한다. 3. 예수님의 단번 속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4. 구원은 출생이므로 출생이 여러 번 있을 수 없다.5. 구원은 영원한 생명, 영존하는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인데(롬8:14-17; 31-39), 이런 영원한 생명과 영존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에게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하며 영존하기 때문이다.6.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성령님에 의해 봉인되어 있다(엡5:30; 고전12:18). 이 세상의 어떤 창조물도 성령님을 이기고 그분의 봉인을 풀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다.7.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요일5:10).
이 글과 함께 <구원의 기쁨과 확신> 소책자를 참조하면 구원의 기초가 확실히 놓일 줄 믿는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02-21 15:58:19 성경교리에서 복사 됨]
2014-02-20 14:33:54 | 관리자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요한복음 11장에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음으로 인해 고통당하면서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다가 마침내 우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3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 34 이르시되, 너희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 하매 35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그런데 개역성경을 보는 분들 중에는 잘못 번역된 성경으로 인해 예수님이 우시는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사사로운 해석을 펴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역성경으로 33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역성경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통분하다.’는 말의 사전적 뜻은 '원통하고 분하다.'입니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속으로 억울하고 분해서 화를 내셨다. 또한, '민망하다.'는 말의 뜻은 '답답하고 딱하다.'이므로 '예수님은 이들을 답답하게 여기고 안타까워하셨다.'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성경을 완전히 오역한 것입니다. 이런 오역을 가지고 성경을 무리하게 풀자면 할 수 없이 영해(靈解)를 해야만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화를 내고 답답히 여기셨을까?”(개역성경)
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11-15절에 있는 말씀 즉 예수님이 죽어 있는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께서 분을 내고 답답해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오역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사로운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11~15절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고 말씀하셨지 마리아의 집에 온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기 위해 그의 집에 온 유대인들은(19절) 사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화를 내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우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억지 주장을 펴는 목사들과 그들의 말을 따르면서 올바로 된 해석 즉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죽음의 고통과 아픔으로 보시고 괴로워하시고는 우셨다는 해석을 오히려 사적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오셔서 인간의 모든 연약한 감정을 몸소 느끼신 분이라는 진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5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우시는 모습이 기록된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이 천지 만물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사람으로서 사람의 모든 연약함을 친히 경험하신 분이라는, 하늘의 천사들도 심히 놀랄 만한 진리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이런 심오한 의미가 담긴 말씀을 대단히 잘못된 해석으로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주장을 강요하는 것은 자신과 함께 다른 사람까지도 실족하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시되,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둘 다 도랑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눅6:39)
올바른 해석을 오히려 영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사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아서 예수님이 화를 내고 답답해했다는 해석이 바로 영해입니다.
이런 문제는 다 개역성경의 오역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오역이 영해를 생산해 냅니다.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바른 성경을 가지고 앞뒤 문맥을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요11장에서 예수님이 우신 유일한 이유는 인간들이 죽음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괴로워하셨기 때문입니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부디 바른 성경을 맑고 깨끗한 정신과 마음으로 바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더욱 많아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3-12-31 18:29:48 | 관리자
위 글을 한글로 번역한 내용입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31
2013-10-28 18:25:36 | 오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