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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 분이 시편 136편에 대해 질문해 주셔서 간단히 답을 드립니다. ---------목사님~  시편 136편을 보면 흠정역에는 '감사하라'가 이탤릭체이지만 영어성경에는 ‘endureth’가 이탤릭체인데.. 어찌된 건지요?전 영어성경에 이탤릭체로 된 것만 흠정역에도 이탤릭체로 옮긴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요? 그리고 endureth는 왜 이탤릭체일까요?  흠정역에 있는 말씀대로 시편 136장 찬양이 있으면 좋겠다하는 맘이 드네요..  1 O give thanks unto the LORD; for he is good: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 1 오 주께 감사하라.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2 O give thanks unto the God of gods: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2 오 신들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3 O give thanks to the Lord of lords: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3 오 주들의 주께 감사하라.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4 To him who alone doeth great wonders: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4 홀로 큰 이적들을 행하시는 분에게 감사하라.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5 To him that by wisdom made the heavens: for his mercy endureth for ever.5 지혜로 하늘들을 만드신 분에게 감사하라.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 ---------안녕하세요? 영어의 경우 ‘endureth’가 없으면 문장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역자들이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넣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다'는 구절은 41번 나오는 데 다 ‘endureth’가 없어요. 그래서 역자들이 통일해서 넣은 것입니다. 넣어야 ‘지속하다’는 동사로 인해 영어 문장이 구성돼요. 히브리어에서는 없어도 이미 말이 됩니다. 우리말의 경우 ‘for ever’에 ‘endureth’까지 합쳐서 ‘영원하도다’로 한 것입니다. 즉 ‘그분의 긍휼은 영원히 지속한다’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4-25절은 시작이 ‘to him’이며 이것은 3절의 ‘Give thanks to the Lord’에 붙습니다. 영어로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경우 ‘감사하라’를 안 넣으면 이상하게 됩니다. ‘감사하라’를 빼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4 홀로 큰 이적들을 행하시는 분에게,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5 지혜로 하늘들을 만드신 분에게,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6 땅을 물들 위에 펴신 분에게,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7 큰 광체들을 만드신 분에게,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감사하라’가 들어가야 자연스럽지요. 흠정역 성경은 ‘감사하라’가 추가되었음을 이탤릭으로 표기하였고 다른 한글 성경은 ‘감사하라’가 추가되었음에도 이탤릭으로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탤릭체 원칙:  1. 영어의 이탤릭은 무조건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 말이 된다.2. 그런데 이런 예처럼 우리말의 경우 무언가를 반드시 추가해야 하는 경우 이탤릭으로 표시한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그분의 모든 자녀들에게 그분의 긍휼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8-11-08 11:33:48 | 관리자
안녕하세요?  신실한 성도께서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 주셔서 잠시 소개 합니다.------목사님 안녕하세요! 제가 구원받고 나서 정말 위안을 받고 붙들었던 말씀이 잠언 14장 26절인데요...  흠정역으로 보면 그 의미가 제가 생각해왔던 것과 많이 다른것 같아서요. 전에는 제가 주님을 믿고 의뢰하면 제 아이들도 안전하다고 이해했는데 흠정역에서는 그런거 같지가 않아서요. 여기의 his는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소문자라서 그 의미가 헷갈립니다.  흠정역에서는 주님을 말하는 것 같고 영어에서는 소문자라 아닌 것도 같고.. 사실 주님 앞에 각자 서는 것을 생각할 때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피난처를 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래도 주님의 그 말씀을 약속으로 받고 지금까지 평강 속에 살아왔거든요. 흠정역: {주}의 두려움 속에 강한 확신이 있나니 그분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KJB: In the fear of the LORD [is] strong confidence: and his children shall have a place of refuge. 개역: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NIV: He who fears the LORD has a secure fortress, and for his children it will be a refuge. ------간단히 답을 드립니다. 대다수 한글성경은  his를 거의 번역하지 않거나 ‘그’로 번역하여 이런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당연히 여기의 his는 그분 즉 주님입니다. 부모의 믿음으로 아이들을 잘 가르치면 대개 아이들이 잘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 14장 26절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르게 번역하는 일이 매우 필요합니다.저희는 가능한 한 그의, 그녀의, 그들의 등을 다 살렸습니다. 그리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다른 역본들과 달리 주님을 가리키는 경우에도 대문자를 쓰지 않습니다. His가 아니라 his. 번역자가 번역이 아니라 임의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NIV는 의역을 하였습니다. 원어에는 he who가 없습니다.그러나 KJB, NKJB, NASB 등은 이 구절을 직역을 하여 우리 것과 같습니다.  다른 한글 역본들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공동: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사람은 힘이 있어 자식들에게 믿음직한 의지가 된다.쉬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견고한 요새를 가진 자이며, 그 후손도 그로 인해 피난처를 얻는다.바른: 여호와를 경외하면 강한 믿음이 생기고 그의 자녀들에게는 피난처가 있을 것이다. 다음을 보시면 더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_m.html?board_table=qna&write_id=47  주님을 사랑하는 부모들을 통해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 안전하게 살기를 원합니다.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을 줄 믿습니다. 샬롬 
2018-11-08 11:15:38 | 관리자
단번 속죄의 의미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규례에 따라 집단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매해 다음과 같은 수의 짐승을 죽여 주님께 희생물로 바쳤습니다(민수기 28-29장, 레위기 23장 15절 이하) 1. 매일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730마리2. 매주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208마리3. 매달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68마리4. 매해 유월절에 죽여서 드리는 어린양 1마리5. 무교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91마리6. 초실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0마리7. 오순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3마리8. 나팔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2마리9. 속죄일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0마리10. 장막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218마리 매해 적어도 총 1,461마리의 희생물을 주님께 드림. 이 외에도 자원 헌물로 원하는 대로 주님께 희생물을 드림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단 한 번 자신을 완전한 희생물로 영원히 드림으로써 더는 이런 희생물을 드릴 필요가 없게 됨. 할렐루야!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1;29). 히브리서 9장 11-15절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 13 황소와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얼마나 더 많이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느냐? 15 이런 까닭에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법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영원한 상속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10장 11-14절 11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13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14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 헌물을 드림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18절 이제 이것들[죄들과 불법들]의 사면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는 죄로 인한 헌물이 없느니라.
2018-07-07 09:26:08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사도행전 2장의 new wine에 대해 물어서 간단히 답을 적습니다.   <사도행전 2장 13절이 궁금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5261 와인(wine)은 동형이의어입니다. 그래서 wine은 포도주도 되고 포도즙(주스)도 됩니다. 문맥이 술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new wine은 성경에 총 22군데(구약 13, 신약 9) 나오며 이것은 어디서나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주스)을 뜻합니다.   구약에서 가장 명확한 것은 사65:8에 있습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포도송이에서 새 포도즙을 찾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을 멸하지 말라. 그것 안에 복이 있느니라, 하는 것 같이 나도 내 종들을 위해 그와 같이 행하여 그들을 다 멸하지 아니하리라.   신약에서는 마9:17 등에 나옵니다.   사람들이 새 포도즙을 낡은 부대에 넣지도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즙이 흘러나오고 부대도 못 쓰게 되느니라. 오직 그들이 새 포도즙은 새 부대에 넣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 하시니라(마9:17).   이미 발효된 포도주는 탄산가스를 더 내지 못하므로 가죽 부대를 터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새 포도즙은 시간이 감에 따라 발효하면서 가스를 내어 가죽 부대를 터뜨립니다.   그러므로 new wine은 새 포도즙을 뜻합니다.   사도행전 2장 13절에 나오는 ‘new wine’은 그리스어 글레우코스(gleukos, 스트롱 번호 1098)를 번역한 것이며 이 단어는 알코올이 들지 않은 '새로운 즙'(포도 주스 혹은 포도즙)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취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들은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4).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독실한 유대인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놀라 의심하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라고 말하였습니다(12).   그런데 다른 이들은 조롱하면서, 이 사람들이 새 포도즙으로 충만하다, 라고 말하였습니다(13).   요점은 바로 13절의 ‘조롱하다’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들은 사도들이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자 그 일을 두고 그들을 조롱하였습니다.   조롱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저들은 아무리 마셔도 술 취할 수 없는 포도즙을 먹고 술 취해 있다. 심지어 아이들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술 취할 수 없는 포도 주스를 마시고.”   알코올이 들어 있는 포도주를 마시고 그들이 취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조롱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포도 주스를 마신 뒤 취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심히 큰 조롱거리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은 겨우 낮의 세시이므로 너희가 짐작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술 취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 말은 우리를 조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new wine은 그래서 당연히 새 포도즙으로 번역해야만 문맥상 조롱했다는 말과 어울립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 기사가 나오고 예수님은 여기서 물을 와인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여기의 와인은 포도주일까요? 포도즙일까요?   잔치를 주관하는 자는 포도즙이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그 물을 떠 온 종들은 알더라.) 잔치를 맡은 자가 신랑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모든 사람이 처음에 좋은 포도즙을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즙을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요2:9-10).   여기의 wine이 포도주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그 당시 풍습은 처음에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내고 술기운으로 인해 사람들의 감각이 무뎌지면 그때에 덜 좋은 싸구려 포도주를 낸다.”   그런데 가나의 혼인 잔치의 와인을 이렇게 해석하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중에 나온 와인을 맛본 사람들은 나중 것이 처음 것보다 더 좋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이미 와인을 많이 마셨는데도 그들의 감각이 무뎌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처음에 마신 것은 단순히 포도즙이었습니다.   즉 처음에 그들이 먹은 것도 포도즙이었고 나중에 마신 것은 더 좋은 포도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술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마시고 취하라고 술을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속성에 맞지 않습니다.   포도주와 포도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주의 만찬 와인: 포도즙 다시 한 번 설명>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42   <술 - LIQUOR (포도주와 포도즙>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711   <만찬과 술(포도주와 포도즙)>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700   샬롬   패스터   
2018-06-19 15:28:10 | 관리자
형제님께서 질문하신 내용과 목사님의 답변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 역시 이런 부분에서 고민이 되었던 적이 있어서 짧은 덧글 하나 달고 지나가겠습니다. " 그 곳에서는 "is fulfilled"로 되어 있어서, 제가 배운 바로는 원문 그대로 해석한다면 "성취되느니라"라고 해석해야 옳다고 생각해서 오늘 이렇게 정동수 목사님께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아마 형제님께서는 is fullfilled 이부분이 현재수동태 문장이라서 '성취되느니라'라고 보신 듯한데요. 이 부분은 목사님께서 위에서 '이미 완료된 현재'라고 답변을 주셨습니다. KJV를 읽다보면 이러한 Be완료형 시제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저의 부족한 지식을 하나 덧붙인다면, 이 부분은 old English에서 'Be완료형'이라는 시제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be완료형은 상태의 완료를 표현하는 옛스러운 표현방식으로 현재수동태와는 형태는 비슷하나 다른 용법입니다. Are you finished with the paper?(신문을 다 보셨나요?) 와 같은 형식도 이 완료형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작의 완료를 강조할 때는 be가 아니라 have를, 상태의 완료를 강조할 때는 have가 아니라 be를 사용합니다.
2018-04-19 18:37:15 | 심재범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분이 요한일서 3장 1-8절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기에 잠시 글을 씁니다.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런즉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3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 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 4 누구든지 죄를 범하는 자는 율법도 범하나니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라. 5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6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어린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 같이 의로우며 8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9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9절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9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질문은 참 단순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도 매일 죄를 지으며 우리 스스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데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난 자가 죄를 범하지 않느다고 말하느냐? 성도는 두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새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였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육신 안에 있는 옛 사람은 이 땅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죄를 짓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7장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 즉 그것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 즉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16 그런즉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내가 행하면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율법에 동의하노니 17 그런즉 이제 그것을 행하는 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즉 새 본성의 새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옛 본성의 옛 사람은 죄를 짓습니다. 옛 사람(혹은 죄가)이 죄를 지으니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괜찮다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구원은 마음대로 죄를 짓는 면허를 주지 않습니다. 다만 피나는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7장 끝의 바울의 결론을 보기 바랍니다. 21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곧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가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들 안에서 다른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내가 보는도다. 24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장과 요한일서 3장을 같이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그리고 로마서 8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2018-04-04 12:59:2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욥기 31장 31절의 뜻이 무어냐고 묻기에 글을 씁니다. 29 혹시 나를 미워한 자가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 내가 기뻐하거나 그가 화를 당한 때에 내 자신을 높였던가. 30 나는 그의 혼이 저주받기를 원함으로 내 입이 죄를 짓게 하지 아니하였노라. 31 혹시 내 장막의 사람들이 이르기를, 오 우리가 그의 살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만족할 수 없노라, 하지 아니하였던가.  무심코 31절을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31장에서 욥은 자신의 의로운 과거 행적을 말합니다.  29-30절을 보면 그는 자기를 미워하고 저주한 자가 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이어서 31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의 장막 사람들 즉 가족들, 친척들, 종들은 욥을 미워하는 자를 보고 “우리가 그의 살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만족할 수 없노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즉 그들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욥은 그를 용서하는 일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의 살을 먹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매튜 헨리 주석이 이를 잘 보여 주므로 영어지만 같이 올립니다.  샬롬 (*) 앞으로 1-2년 내로 마제스티 판 교정을 다 끝내고 출간하면 성경의 모호한 구절들을 가능한 한 모두 설명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 자꾸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보며 많이 배웁니다. Job 31:31He was violently urged to revenge, and yet he kept himself thus clear from it (v. 31): The men of his tabernacle, his domestics, his servants, and those about him, were so enraged at Job's enemy who hated him, that they could have eaten him, if Job would but have set them on or given them leave. "O that we had of his flesh! Our master is satisfied to forgive him, but we cannot be so satisfied." See how much beloved Job was by his family, how heartily they espoused his cause, and what enemies they were to his enemies; but see what a strict hand Job kept upon his passions, that he would not avenge himself, though he had those about him that blew the coals of his resentment. Note, (1.) A good man commonly does not himself lay to heart the affronts that are done him so much as his friends do for him. (2.) Great men have commonly those about them that stir them up to revenge. David had so, 1 Sam 24:4; 26:8; 2 Sam 16:9. But if they keep their temper, notwithstanding the spiteful insinuations of those about them, afterwards it shall be no grief of heart to them, but shall turn very much to their praise.(from Matthew Henry's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PC Study Bible Formatted Electronic Database Copyright ?2006 by Biblesoft, Inc. All Rights reserved.) 
2018-03-16 13:58:36 | 관리자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 앞에서는 죄송한 말인데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가면서 느끼는 점들 중의 하나가 내가 정말 많이 무식하다는 것과 또 생각보다 너무 많이 모른다는 것과 더 나아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는 것에 대한 확신이 너무 넘쳐서 절대 틀릴 수 없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자주 든다는 것을 요즘 깨닫습니다. 시간을 내서 귀한 설명을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2018-03-12 23:26:15 | 이남규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갈라디아서 5장 14절의 성취되었다는 말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하여 간단히 글을 씁니다. 질문 요약 ---------- 갈라디아서 5장 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요점은 이 구절을 왜 ‘성취되느니라’ 혹은 ‘성취되고 있느니라’가 아니라 ‘성취되었느니라’로 번역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율법이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때에 성취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 다 성취되리라(마5:18).  그러므로 율법은 지금 성취된 상태로 있을 수 없고 성취되고 있는 중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로마서 11장 25절부터 32절 등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1장 22~33절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생긴다는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 27 내가 그들의 죄들을 제거할 때에 이것이 그들을 향한 내 언약이니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에 관하여는 그들이 너희로 인해 원수 된 자들이지만 선택에 대하여는 그들이 조상들로 인해 사랑받는 자들이니 29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지나간 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이 믿지 아니함을 통해 긍휼을 얻었나니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 또한 이제 믿지 아니한 것은 너희가 얻은 긍휼을 통하여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함이라. 32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믿지 아니하는 데 가두어 두신 것은 친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심이라. 33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1. 갈5:14의 성취되었다는 말  여기서 fulfilled는 이미 성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어와 영어 자체가 이미 완료된 현재를 뜻합니다. 여기의 율법은 모세의 십계명을 말하며, 십계명은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5-40절 35 그때에 그들 중의 한 율법사가 그분을 시험하려고 그분께 질문하여 이르되, 36 선생님이여, 율법에서 큰 명령은 무엇이니이까? 하매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39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 40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느니라, 하시니라.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십계명)의 완성 혹은 성취입니다. 그런데 마5:18의 율법은 구약성경 전체(혹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말합니다. 그중에 초림과 관계된 것들은 이미 이루어졌고 재림 및 천년왕국 등에 관련된 것들을 그때에 성취될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관련 예언들도 그때에 성취될 것입니다. 문맥에 맞추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만을 떼어 내면 안 됩니다. 13절부터 보아야 합니다. 13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에 이르렀으나 오직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 14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13절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십계명의 모든 것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즉 여기의 성취는 예언 성취가 아니라 십계명이라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2. 다윗 이야기  어제 어느 자매님이 구약성경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15장 5절  이는 다윗이 헷 족속 우리야의 일 외에는 평생토록 {주}의 눈에 올바른 것을 행하고 그분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어떤 일에서도 돌이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요점은 이와 같습니다.  “다윗에게 여러 아내가 있었는데 그러면 그것은 죄가 아니란 말인가요?” 물론 그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는 아브라함 이후부터 모세를 거치면서 누구나 짓는 죄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왕들이 일부다처제를 시행하였습니다. 가장 경건했던 히스기야도, 요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결코 일부다처제가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모세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허용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 3-9절 3 ¶ 바리새인들도 그분께 나아와 그분을 시험하여 그분께 이르되, 남자가 무슨 이유로든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이 율법에 맞나이까? 하매 4 그분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처음에 그들을 만드신 분께서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거늘 7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 그녀를 버리라고 명령하였나이까? 하니 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이 강퍅하므로 너희 아내를 버리도록 너희를 허락하였으나 처음부터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며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신 것은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는 일을 고의로 계획적으로 행하였다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다윗은 주님 앞에서 사악하게 행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윗이 일부다처제를 취한 것은 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일부다처제를 스스로 행했지만 고의로 사악하게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우리야의 일을 제외하고는 고의로 사악하게 다른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또 기록하시는 성령님께서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8-03-12 09:33:0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다음 구절을 보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14 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15 그분께서 자신의 때에 그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그분은 찬송 받으실 유일한 권능자이시요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시니라. 16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글 성경을 보면 16절의 ‘그분’은 문맥상 14절부터 이어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아무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다는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33년 반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14, 15절을 보면 여기의 그분은 ‘앞으로 나타나실 예수님’ 즉 찬송 받으실 유일한 권능자이시요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이신 예수님입니다. 다시 말해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이신 그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샬롬
2018-03-05 19:53:5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한복음 4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침례를 주신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시고...When therefore the Lord knew how the Pharisees had heard that Jesus made and baptized more disciples than John, 왜 여기에 '그러므로'가  나오느냐고 물어서 잠시 적습니다. 사실 안 나와도 문제는 없습니다. 기존의 다른 성경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어와 영어에는 이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가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3장의 구조와 상관이 있습니다.  3장 22절에는 예수님이 침례를 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일들 뒤에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유대 땅으로 들어갔고 그분은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며 침례를 주시더라(22). 그리고 23절부터 3장의 끝 절인 36절은 침례자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즉 23-36절은 괄호로 보면 됩니다. 괄호를 빼면 4장 1절은 3장 22절과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4장 1절의 그러므로는 22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유대 땅에서 침례를 주셨으므로(이것이 그러므로임)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침례를 주신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설명이 필요하다 하여 간단히 올렸습니다. 참조하세요. 샬롬 .      
2018-02-06 16:24:18 | 관리자
욥기 분석 책 소개(1-2장)욥과 친구들의 논쟁(3-42장)  I. 첫 번째 논쟁 시리즈(3-14장)   (1) 욥이 자기의 출생을 저주하며 논쟁을 시작함(3장)   (2) 엘리바스의 말(4-5장)   (3) 욥의 대답(5-6장)   (4) 빌닷의 말(8장)   (5) 욥의 대답(9-10장)   (6) 소발의 말(11장)   (7) 욥의 대답(12-14장)  II. 두 번째 논쟁 시리즈(15-21장)   (1) 엘리바스의 말(15장)   (2) 욥의 대답(16-17장)   (3) 빌닷의 말(18장)   (4) 욥의 대답(19장)   (5) 소발의 말(20장)   (6) 욥의 대답(21장)  III. 세 번째 논쟁 시리즈(22-31장)   (1) 엘리바스의 말(22장)   (2) 욥의 대답(23-24장)   (3) 빌닷의 말(25장)   (4) 욥의 대답(26-31장)  IV. 엘리후의 말(32-37장)  V. 논쟁의 귀결(38-42장)   (1)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38-41장)   (2) 욥의 회개와 축복(42장) 
2018-02-03 10:10:3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judgment라는 단어를 왜 판단 혹은 재판으로 하지 않고 판단의 공의 혹은 판단의 법규 혹은 판단의 규범 등으로 번역했느냐고 물어서 간단히 글을 올립니다.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뒤에 있을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판단의 공의를 행하리니 이로써 {주}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한 것을 친히 그에게 이루리라, 하시고(창18:19) For I know him, that he will command his children and his household after him, and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that the LORD may bring upon Abraham that which he hath spoken of him.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5134 여기에 나오는 judgment는 히브리어 미스팟을 번역한 것입니다. 제가 가진 원어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4941  fP;v]mi   mishpat  {mish-pawt'}8199에서 유래; 본래 의미는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호의적으로나 비호의적으로) 특히  ‘언도’나 공식적 선언(인간의 ‘법’, 혹은【특히】거룩한 ‘율법’, 개체적으로나 집합적으로), 그 행위, 장소, 소송, 범죄, 형벌을 포함함; 추상적으로 ‘정의’, ‘권리’나 ‘특권’(법령에 의한 것이나)이나 ‘양식’까지도 포함하여:-+반대자, 의식(예법), 고발, ×범죄, 관습, 결정, 분별, 결정하는, 부과금, 유행, 형태, 재판받다, 재판, 정당한(정의, 바르게), 법(적인)(태도),  방법, (정당한)절차, 규례, 권리, 판결, ×가치있는, +잘못된 성경에 나오는 judgment라는 말은 영어에서도 매우 특별합니다. 그래서 옥스퍼드 사전은 아예 이 단어의 성경적 용례를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Biblical usage로 10번 항목으로 따로 떼어 놓았습니다.    가서 보니 말씀드린 대로 이 말은 정의/공의/공평을 말합니다(justice, righteousness, equity).  그런데 judgment라는 말이 판단 혹은 재판을 뜻하므로 이 말은 판단하거나 재판할 때 공의롭게 정의롭게 공평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판단의 공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에 가서 보면 judgment는 말은 많은 경우 justice와 함께 나옵니다(위에 있는 창세기 18장 19절 참조, 왕상10:9; 대상18:14; 대하9:8 등 다수)).그러면서 옥스퍼드 사전은 2개의 예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틴데일 성경의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1526 Tindale).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pay tithe of mint and anise and cummin, and have omitted the weightier [matters] of the law, judgment, mercy, and faith: these ought ye to have done, and not to leave the other undone. 다른 하나는 1611 Bible 즉 킹제임스 성경의 이사야서 61장 8절입니다. 나 {주}는 판단의 공의를 사랑하며 번제 헌물에 쓰기 위해 강도질하는 것을 미워하노니 내가 진리 안에서 그들의 일을 지도하며 그들과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라. For I the LORD love judgment, I hate robbery for burnt offering; and I will direct their work in truth, and I will make an everlasting covenant with them. 보시다시피 이런 데를 그냥 재판 혹은 판단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들도 모두 공의나 공도 혹은 의로 번역하였습니다.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런데 단순히 공의 혹은 의라고 하면 righteousness로 생각이 되며 실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judgment를 righteousness의 의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재판할 때 공의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판단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원래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공의롭게 판단된 것들이 판단의 법규 혹은 판단의 규범입니다. 이것들 역시 judgment입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2018-02-02 11:19:57 | 관리자
안녕하세요?어떤 분이 앞으로 있을 성전에 대해 물으셔서 잠시 대답합니다. 1. 천년왕국의 성전은 재림 이후에 있습니다. 겔40-48장을 보세요. 2. 그런데 성경을 보면 7년 환난기에도 성전이 있고 적그리스도가 후반부 3년 반 시작되는 때에 거기로 들어갑니다.어떤 이들은 이것을 환난기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7년 환난기 바로 전에 혹은 시작되면서 건축될 것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또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살후2:4). 1 또 내가 막대기 같은 갈대를 받으매 그 천사가 서서 이르기를,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밖에 있는 뜰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셨은즉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계11:1-2).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후반부 3년 반 시작되는 때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7). 샬롬
2018-02-01 10:32:39 | 관리자
안녕하세요?어떤 분이 히브리서 4장 12절 번역에 마치 주어가 2개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가 무어냐고 묻기에 간단히 글을 적습니다.12절의 주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12절 끝에 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으로 하였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주어로 잘못 생각하여 번역한 결과가 아니냐는 것이 아마도 의문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영어를 보면 답이 쉽게 나옵니다. 12절의 전체 주어는 the word of God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역자들은 뒷부분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인화하였습니다. The word of Go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다른 성경처럼 ‘의도를 분별하니’로 하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The word of God discerns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그러나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말씀을 높이기 위해 a discerner라고 의인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라고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13절의 그분은 말씀으로 봐도 되고(discerner) 하나님으로 봐도 됩니다. 물론 discerner가 3인칭 단수이므로 아무 문제없습니다.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13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12 For the word of God is quick, and powerful, and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iercing even to the dividing asunder of soul and spirit, and of the joints and marrow, an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13 Neither is there any creature that is not manifest in his sight: but all things are naked and opened unto the eyes of him with whom we have to do.샬롬패스터
2017-12-21 10:19:58 | 관리자
요아스와 여호아스열왕기하 11-12장에는 유다의 여호아스(Jehoash) 왕의 기사가 나옵니다. 여호아스는 요아스(Joash)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주로 여호아스라 불립니다.그러나 기존 한글 성경에서 여호아스를 대개 요아스로 번역하다 보니 킹제임스 성경이 여호아스와 요아스 둘로 번역한 것을 두고 오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여럿인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왕하11-12장을 읽을 때 유다의 여호아스이면 유다의 요아스와 같은 인물로 이해하면 됩니다.뉴킹제임스, NASB 등도 킹제임스 성경과 같이 왕하 11-12장에 여호아스로 기록하였습니다.이런 것은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이름에 대한 용례에 대한 것이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호아스인지, 남 왕국 유다의 여호아스인지 분별해서 읽으면 됩니다.  다음 예는 두 여호아스를 구분하기 위해 남 왕국 유다의 여호아스를 요아스로 지칭한 사례이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왕하13:10 ¶ 유다 왕 요아스의 제삼십칠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여호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여 십육 년 동안 통치하며 샬롬패스터-------------왕하11장여호아스가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나이가 칠 세였더라(왕하11:21).왕하 12장1 예후의 제칠년에 여호아스가 통치하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브엘세바의 시비아더라. 2 제사장 여호야다가 여호아스에게 교훈을 주던 모든 때에는 그가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였으나 3 산당들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들에서 희생물을 드리며 분향하니라. 4 ¶ 여호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주}의 집으로 가져와 봉헌한 물건들 중에서 모든 돈 곧 계산이 끝난 모든 사람의 돈이나 모든 사람에게 정해 준 돈이나 {주}의 집에 가져오려고 어떤 사람이 마음에 정한 모든 돈을 5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가 아는 자들에게서 취하여 그 집의 어느 곳이든지 무너진 곳을 발견하거든 그 무너진 곳을 보수하라, 하였으나 6 여호아스 왕의 제이십삼년이 될 때까지 제사장들이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 아니하므로 7 여호아스 왕이 제사장 여호야다와 다른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아는 자들에게서 더 이상 돈을 받지 말고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도록 그것을 넘겨주라, 하니 8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서 돈을 받지도 아니하고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 17 ¶ 그때에 시리아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와 싸워 그곳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자기 얼굴을 고정하고 올라오려 하였으므로 18 유다 왕 여호아스가 전에 자기 조상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봉헌한 모든 거룩한 것과 자기의 거룩한 것과 또 {주}의 집의 보고와 왕의 집에서 찾은 모든 금을 취하여 시리아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그가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2017-12-02 09:16:41 | 관리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는가?   (*) 이 글은 한마음 미션의 고정인 자매님께서 번역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출하기 위해 파라오를 방문한 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곧 해방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 곧 [전능자]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출6:2-3)   성경학자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대다수 역본들에서 주(LORD)로 번역된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창세기에 이미 160번이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호와’ 즉 ‘주’(LORD)라는 이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족을 주로 다룬 창세기 12-50장에서 10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희생 제물을 바칠 수 있도록 양을 미리 준비하셨고 이에 대해 창세기 22장 1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이 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 하느니라."   수년 뒤, 이삭은 축복을 받기 위해 자기를 속인 자기 아들 야곱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그것을 이같이 속히 찾았느냐? 하거늘 그가 이르되, {주}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게 보내 주셨나이다, 하니”(창27:20)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여호와 즉 ‘주’(LORD)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에서 스스럼없이 사용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모세에게 “내가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출6:3)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신가요? 성경은 이 점에 대해 모순을 보이나요? 합리적인 대답은 무엇인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창15:7; 22:14; 24:35, 40, 42, 48, 50, 51, 56; 26:22; 27:20; 49:18 등 참조).   성경 비평가들과 불신자들이 이런 구절을 두고 시비를 걸 수 있지만 우리는 성경에 의거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주)라는 이름을 아는 것(To know the name of the LORD’ 혹은 단순히 ‘여호와(주)를 아는 것’(To know the LORD)이라는 표현은 종종 그분의 이름과 존재에 대해 단순히 아는 것 혹은 인식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야다’(yada)에서 유래된 ‘알다’(To know)라는 말은 종종 경험으로 확실히 습득하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이 소년이었을 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주} 앞에서……{주}를 섬겼더라.”(삼삼2:18; 3:1) “그가 {주}와 사람들에게 호의를 입었더라.”(2:26)   그런데 바로 다음 중에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주}를 알지 못하였고 {주}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아니하였더라.”(삼상3:7).   어떤 의미에서 사무엘은 인생에서 매우 일찍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무엘기상 3장 7절에서부터 전격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참조 삼상3:11-14; 8:7-10, 22; 9:15-17; 16:1-3 등). 이 사건 전에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가 그분에 대해 알았던 것을 이 시간 이후에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 및 그가 그분에 대해 알게 된 것과 비교하면서 사무엘기상의 저자는 이 사건 전에는 “사무엘이 아직 {주}를 알지 못하였다.”(3:7)라고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처(Gleason Arche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주라는 것을 알다’(to know that I am the LORD)나 또는 ‘주라는 이름을 안다’(to know the name of LORD)는 표현은 구약에서 적어도 26번 나타나며 이 모든 경우에 이 표현은 실제 경험에 의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하단 참조 문헌, Archer 1982, pp. 66-67)   데이비스(John Davis)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에만 ‘알다’(야다)라는 표현이 주(여호와)와 관련하여 5번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경우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암시한다. 이 모든 경우에 여호와(혹은 여호와라는 이름)를 아는 것은 그분의 인격과 능력을 나타내는 여호와의 어떤 행위나 행동과 관련이 있다.”(하단 참조 문헌, Davis, 4[1]:39).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취하여 내게 한 백성으로 삼고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는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6:7)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집트 사람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출7:4~12:30), 홍해를 가르셨으며(출14), 기적으로 쓴 물을 달콤하게 만드셨습니다(출15:22-25). 그 이후에 그분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불평하는 것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저녁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출16:11-12)   몇 주가 지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 그들의 [하나님]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나는 {주} 그들의 [하나님]이니라.”(출29:46)   이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누구신지 알지 못했나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 그들은 그분이 자기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모세 시대 이후 수백 년이 지난 뒤 이사야가 대언했던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가 말하노라. 내 백성이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잡혀갔으니 여기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주}가 말하노라. 그들을 다스리는 자들이 그들로 하여금 울부짖게 하며 날마다 계속해서 내 이름을 모독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알리로다.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니, 보라, 그것이 곧 나니라.”(사52:5-6)   이 예언이 있은 지 100년도 더 지난 뒤에 유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대언자를 통해 그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하시고 이렇게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보라, 내가 이번에 그들에게 알리리니 곧 내가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리리라. 그리하면 내 이름이 {주}인 줄 그들이 알리라.”(렘16:21)   이러한 진술들은 다 무엇을 말할까요?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들의 역사에서 이 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이름 즉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주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안다’(to know the name of Jehovah)는 표현은 단순히 아는 것 이상의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것은 히브리어 관용어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루실 때에 드러나는 특정한 행위나 속성에 대해 아는 것을 나타냅니다.” (Davis, 4[1]:40).   현시대에서도 누군가가 사람을 정말로 ‘알지’ 않고서도 (또는 그 사람의 직업 혹은 특징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도)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직업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농구 선수 마이클 ‘에어’ 조던(Michael ‘Air’ Jordan)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들이 그가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은퇴한 지 몇 년 뒤 어떤 대회에서 그를 만났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조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이름 마이클 ‘에어’ 조던으로 그를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경기장에 가서 그가 자유투 라인에서 덩크슛을 넣거나 혹은 공기(에어)처럼 가볍게 날아서 슛을 넣는 것을 보고 - 그래서 그의 가운데 이름인 Jeffrey 대신 공기처럼 가볍게 몸을 놀린다는 의미의 에어(Air)가 붙었음을 알고 - 그가 나이키 신발회사에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오리지널 ‘에어 조던’ 신발은 신은 것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외국인들은 ‘에어 조단’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 그래서 그의 이름이 ‘에어’ 조던이구나!”   언뜻 보기에 출애굽기 6장 3절은, 창세기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족장의 지식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특히 이름을 ‘안다’)라는 히브리어 관용구가 단순히 사람을 인식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우주의 주권자이자 창조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 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출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성취하셨을 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지키시는 분 여호와라는 이름의 온전한 의미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다음 2구절을 통해 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창4:1,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그녀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아담은 그 전에 이브를 몰랐을까요?  2. 요17:3,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습득해서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서 아는 것입니다.   참고 문헌:   Archer, Gleason L. (1982), An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Grand Rapids, MI: Zondervan).   Davis, John J. (1963), “The Patriarchs’ Knowledge of Jehovah: A Critical Monograph on Exodus 6:3,” Grace Theological Journal, 4[1]:29-43, Winter.   출처: http://apologeticspress.org/apcontent.aspx?category=6&article=1051  
2017-10-24 10:16:3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