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독수리와 14만 4천
19세기 중반 전 세계가 격변하는 시기에 미국에서는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등의 이단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 같은 경우는 노골적으로 자기들만이 계시록의 14만 4천을 구성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1,000년간의 여호와의 왕국이 이루어지면 자기들만이 구원에 참여하여 왕이 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제사장으로 봉사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윌리엄 밀러에 의해 시작된 안식교는 역사적 전천년설에 의거하여 다니엘서 8장 14절의 2,300일을 2,300년으로 잘못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1차 재림이 1844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다가 주님의 재림이 없자 크게 실망한 뒤 지금은 그분이 조사 심판 중이며 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고 억지 주장을 폅니다.
몰몬교는 종말론과 미국인 선민의식에 빠진 조셉 스미스가 도를 닦다가 UFO의 인도를 받고 특별 계시를 받아 추종자를 거느리게 된 미국인들의 토속 샤머니즘 종교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계룡산에서 도를 터득하여 혹세무민하는 이단의 한 종류로 보면 됩니다. 그 안에는 아메리카 대륙과 미국인들에 대한 강한 선민의식이 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외국계 이단들의 특징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내부의 신도들에게 신비적 종말론을 주입하여 교회와 교주에게 충성봉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14만 4천에만 들어가면 영생복락을 누린다고 신도들을 부추겨 재산을 탈취하고 맑은 정신을 빼앗아가는 것이 이런 이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어느 이단이나 거의 비슷하지만 일단 이런 데 빠지면 이성이 마비되어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본인들만이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강한 확신에 잠겨 바른 것을 말해 주는 모든 사람을 배척하고 자기들이 당하는 고난을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50년대 6.25 전쟁 이후 박태선의 전도관을 필두로 해서 역시 선택받은 14만 4천을 미끼로 내걸며 동시에 한국 민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자생된 사이비 종파들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미국의 이단들처럼 신도들에게 종말론을 강하게 주입하고 재림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도록 강요하며 특히 한국이 동방의 독수리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고양시킵니다.
2013년 3월 4일 자 <한겨례 21>은 한국 내 사이비 교회들의 문제가 심각함을 인식하고는 민중들을 선도하고 계몽하기 위하여 ‘하나님 20명, 재림예수 50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다음은 그중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신과의 합일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신앙 행태는 지금까지도 한국 개신교계 소종파의 주요 특징이다. 2000년 문화관광부의 의뢰로 국제종교연구소가 발간한 보고서 ‘한국의 종교단체 실태조사연구’는 개신교 계통 소종파를 크게 △신비주의 △종말론 △외국계 신흥종파 3가지 계열로 분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수적으로 가장 우세한 것은 신비주의 계열이다. 신비주의 계열은 다시 △베뢰아아카데미(귀신론) 분파 △신비주의 기도원 분파 △직통 계시파 △전도관 분파 △장막성전 분파 △통일교 분파로 나뉘는데, 최근 개신교계가 대대적 배척운동을 벌이고 있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은 장막성전 분파에 속한다.
장막성전은 1960년대 경기도 과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서울대공원이 들어선 막계동 일대가 이들의 ‘성지’다. 신천지 교회의 본부가 과천에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장막성전은 1966년 한국 소종파 운동 사상 가장 나이가 어린 유재열(당시 17살)이 세워 화제를 뿌렸다. 장막성전이란 이름은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 15장 5절 “또 내가 이일 후에 보니 하늘에서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유재열은 1960년대 초부터 부모와 함께 서울 상도동의 호생 기도원을 다니며 신비주의 신앙에 몰입했다. 그는 1965년에 예수의 계시를 받았다며 이듬해 ‘종말 심판의 피난처’라는 장막성전을 설립했다. 전성기에는 청계산 저수지가 있는 막계동 일대에 신도 2천 명이 모여들어 집단생활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조직 운영에 불만을 품은 내부자의 투서 때문에 사기죄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나온 뒤 교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는 1980년 기성 교단에 교회를 헌납하고 홀연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해 사업가로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떠난 뒤 장막성전은 신천지, 증거장막성전, 무지개증거장막 등 여러 갈래로 분리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재열은 자신에게 만국을 다스릴 권세가 있으며 14만4천 명에게 구원의 징표를 주는 사명이 주어졌다고 했는데, 그의 성서 해석과 교리의 기본 골격은 핵심 추종자이던 이만희(현 신천지 총회장)를 통해 지금의 신천지에 고스란히 전승된 것으로 알려진다.
신천지에서 알 수 있듯, 대부분의 소종파들은 강력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존재와 함께 신비주의와 종말론적 흐름이 섞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진구 연구실장은 “예언서·계시록의 종말론과 민족주의적 선민사상이 결합해 재림예수가 한국에 온(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1960년대 이후 한국 소종파에서 보이는 보편적 흐름”이라고 했다.
이런 흐름이 형성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한국교회사 연구자인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교권화된 기성 교회에 대한 불만과 영적 체험에 대한 열망에서 싹튼 해방 전 신비주의 그룹이 전쟁의 참화와 극심한 빈곤의 경험 속에서 종말론적 계기와 만나고, 때맞춰 등장한 카리스마적 개인들이 이 흐름을 주도하며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등장한 소종파들은 처음엔 기독교의 카테고리 안에 머무르며 활동하지만, 교세가 늘고 주류 교회의 배척이 시작되면 점차 그 경계를 벗어나게 된다. 그들의 교주들은 선지자나 성령, 재림예수를 자처하다 말년엔 스스로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 경우도 있다. 박태선(천부교)· 안상홍(하나님의 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탁지원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에 따르면 국내 소종파 지도자 중에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만 20여 명, 재림예수를 자처하는 경우가 5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밖에 하나님의 부인이나 보혜사 성령, 혹은 성서 속 인물인 엘리야나 다윗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소종파 집단 안에서 지도자 개인의 카리스마를 절대화하다 보니, 공교회로서의 성격이 약화되고 여러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횡령이나 폭력, 추행 같은 문제가 외부로 노출되고 결국 사법 권력의 개입을 부르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런 기사에서 보듯이 한국의 소종파 사이비들의 특징은 일단 한국 민족을 특별히 선택받은 동방의 독수리로 보며 그중에서도 자기들에게 속한 자들만 계시록의 14만 4천으로 규정하여 성도들의 맹목적인 추종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통일교에서는 이미 재림주가 재림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계시록 7장 2절에 따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곳이 ‘해 돋는 데’ 즉 동방의 나라인 한국이라고 해석합니다(하나님의 바른 말씀은 ‘해 돋는 데’라고 하지 않고 ‘동쪽’이라고 말함). 따라서 통일교 신도들은 자신들의 교주인 문선명(文鮮明)이 바로 그 재림주라고 주장합니다.
전도관에서는 감람나무가 나타나면 말세가 된다고 말하고 자신들의 교주인 박태선(朴太善)이 곧 감람나무이며 그가 왔으므로 지금이 말세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악조건에서는 14만4천 명만이 천년 성에 들어가고 호조건에서는 14만4천 명 외에도 수많은 무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전도관의 신앙촌 입주자의 수에 따른 변화를 예상하고 내놓은 주장입니다.
요즘 교회들에 큰 문제를 안기고 있는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는 자신을 ‘약속의 목자’, ‘이긴 자’, ‘대언자’,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합니다. 신천지의 핵심 교리는 성경이 온통 비유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비유를 바로 풀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서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친절한 기장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성경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는 목사냐고 묻고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소개하였습니다. 친절한 분으로 알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분의 성경 해석 방법이 기묘했습니다. 그분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마태복음 13장 34-35절을 인용하였는데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개역: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그분은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모두 비유이며 심지어 창세기 이후의 모든 것이 다 비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유를 바르게 깨달은 사람에게 성경을 배워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이분은 신천지에 속한 분이었습니다.
이분의 주장에도 분명히 일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쓰는 개역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그분의 말씀은 모두 비유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마도 정상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알려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계룡산 도사들과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바른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흠정역: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without a parable)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 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세상의 창건 이후로 은밀히 간직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요점을 이야기할 때마다 쉬운 비유를 들어 핵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영어로는 ‘without a parable’인데 이것이 개역성경처럼 ‘비유가 아니면’으로 잘못 번역되면 수십만의 사람들을 무지와 저주 속에 빠뜨립니다. 이런 오역으로 인해 신천지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신천지는 성경 전체를 이와 같은 비유 해석 즉 영해(靈解)로 풀고는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신천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14만 4천명이 구원받는 자로 신천지에 입교하면 신천지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과천의 청계산 부근에 임하게 되며 그들은 육체로 영생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면서 신천지가 들고 나오는 것이 한국 민족의 우수성과 최근에 이루어지는 한류 열풍입니다. 14만 4천의 대부분은 한국 사람들 가운데서 나오며 이런 일을 위해 싸이 등의 한류 열풍이 -비록 저급하지만 - 온 세상에 파급되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신천지 교주가 있는 한국은 성지 중의 성지이며 14만 4천에 속할 한국 사람들은 선민 중의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천지 역시 과거에 토속 종파들이 사용하던 방법대로 비유 해석(영해)의 계시록 설교와 ‘동방의 독수리’ 타령을 다시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는 좋든 나쁘든 한류 붐을 일으킨 것은 싸이를 비롯한 출중한 한민족 가수들 - 신천지의 한민족 선민사상에 따르면 - 인데 신천지는 이들이 일으킨 한류 열풍은 선민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대대 선전하면서도 이런 연예인들의 한류는 저급 한류라고 주장하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신천지의 영적 한류가 새로운 차원의 한류라고 주장합니다.
다음은 ‘새로운 한류 신천지 한류’라는 제목으로 신천지뉴스에 난 기사입니다.
‘
강남 스타일’로 세계적인 톱스타가 된 싸이는 이제 세계 각국을 누비며 노래한다. ‘강남 스타일’의 B급 정서는 전 세계인에게 통했고, 덕분에 싸이는 좋게든 나쁘게든 국가 홍보에 공을 세웠다. 최근 후속곡 ‘젠틀맨’의 관심과 인기도 상당하다. 그러나 이번 ‘젠틀맨’의 가사는 물론 뮤비의 선정성이 심각한 수준이다. 국위 선양이니 창조 문화니 하며 싸이를 온통 찬양하고 있지만, 과연 그 내용과 질이 어떠한지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한류란 대한민국의 문화와 정서가 세계에 전파되어 널리 관심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한 한류란 비단 대중문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나아가 정신적인 것, 종교적인 것까지 아우를 수 있는 통섭(막힘이 없이 여러 분야에 통함)의 흐름이어야 한다. 이에 최근 세계의 종교인들을 눈뜨게 한 새로운 한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4월 중순, 인천공항에 다수의 외국인 목사들이 내한했다. 미국, 영국, 독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세계 각국의 비행기가 착륙했다. 이 나라들은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신천지 예수교의 총회장의 4차에 걸친 계시록 순회강연을 접한 국가들이다. 총회장은 수많은 언론과의 인터뷰와 방송 출현을 통해 뚜렷한 계시복음을 전했고, 각국 정상과의 대담과 종교 지도자들의 기도회에 참석하여 새로운 평화의 재료로서 ‘하늘 문화’를 제시했다. 현지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전에 들어 보지 못했던 미래에 관한 새로운 해법은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했다. 이미 20년이 넘는 목회 연륜과 수만의 성도수를 가르치고 있는 목자들이 대한민국으로 종교 유학을 오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신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직접 확인하며, 비유풀이부터 계시록의 실상까지 보름부터 길게는 석 달까지의 일정으로 성경 전반을 공부하고 있다.
5월 잠실 올림픽 홀에서 ‘신천지 말씀 대성회’가 열렸다. 이들은 행사에 참석하여 자진해서 단상에 올라 뜨거운 간증을 토했다.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 주셨고, 성경 육천년의 역사를 깨닫게 해 준 약속의 목자께 너무 감사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또한 지금껏 무지의 시대를 살던 이 시대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 그리고 성경을 깨닫는 것임을 본국의 성도들에게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많게는 천만이 넘는 성도를 거느린 목자의 입에서 나오는 탄성과 말씀 앞에서의 순종은 과연, 이 역사가 확실한 증거와 비전을 가졌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하였다.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흐름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신천지 한류, 오늘도 신천지는 하늘의 문화와 평화의 정신을 통하여 혼돈한 지구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바야흐로 한류가 대세인 오늘날, 구습을 뛰어 넘어 신한류를 개척한 신천지... 이제는 말세론이 아닌 창조론을 논할 때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신천지는 신패러다임의 주자로 우뚝 섰다.
사이비들이 선민의식 고취와 함께 혹세무민하는 양상은 전 세계 대부분 이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신천지가 폄하한 싸이가 바로 장막성전의 창시자인 유재열의 사위라는 점입니다(“해 아래 새 것 없다” 신천지의 계보, 교회와 신앙).
싸이를 비롯해서 한류 열풍을 주도하는 K 팝 가수들이 온 세상에 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호루스의 눈, 루시퍼, 단일세계정부, 천주교 마리아 찬양 등 뉴에이지 사상입니다. 이런 적그리스도의 한류 열풍과 하나님의 선민과는 사실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등의 공작을 통해 한국인들이 마귀의 사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게 올바른 분석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도래를 찬양하는 한류 열풍에 대해서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바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이제 계시록 영해로 역시 우매한 사람들을 사로잡는 안상홍 증인회의 동방의 독수리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동방의 독수리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이다(안상홍님)”라는 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마지막 때 동방의 구원자로 등장하신 안상홍님을 믿고 있습니다.동방의 구원자이신 안상홍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은 성경 66권 예언에 따라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영적 고레스이신 안상홍님을 담대히 전하는 전도자들입니다.
<동방의 독수리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동방에 구원자를 보내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46:11)
동방의 독수리는 구원자께서 동방 나라에 사람으로 등장하시어 하나님의 모략인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훼방자들은 사체를 먹는 독수리를 하나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성경의 예언을 부인하고 있습니다.성경을 살펴보면 다양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성정을 알려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성경의 비유는 인간이 이해하기 쉽도록 특징을 인용한 것입니다.그러므로 비유된 동물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찾으려는 의도는 억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자로 비유하기도 하고(계5:5)때로는 어린양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요1:29).또한 포도나무와 (요15장) 성전으로도 표현합니다(계21:22).
하나님을 사자, 어린양, 포도나무, 성전으로 표현하신 데는 각각 뜻이 있습니다.
사체를 먹는 동물에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움직이지 못하는 포도나무나 성전을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것도 불가합니다. 사체를 먹는 독수리에 하나님을 비유하면 안 된다는 훼방자들의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독수리로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마치 독수리가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신32:11)
동방의 독수리로 임하신 하나님은 재림그리스도 안상홍님이십니다.안상홍님께서는 두 번째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모략인 구원을 이루시고 계십니다.안상홍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곳은 절기 지키는 시온, 하나님의 교회입니다.안상홍님의 신성을 깨달아 안상홍님께서 이루시고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을 통해 우리는 안상홍 증인회 역시 한민족의 우수성을 고취시키면서 동방의 독수리가 곧 한국에 임한 구세주 안상홍이라고 주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심지어 계시록의 밧모 섬과 예루살렘 그리고 대한민국이 수평으로 같은 위도에 있다고 세계 지도에 수평으로 금을 그어 놓고는 한국이 곧 계시록이 말하는 ‘해 돋는 데’라고 주장합니다. 실제 지도를 펴서 수평으로 금을 거 보면 이것이 거짓말임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호와’에 ‘o'이 세 개 있듯이 ’안상홍‘에도 ‘o'이 세 개 있어서 안상홍이 여호와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추론은 모두 비유 해석 즉 영해(靈解) 때문에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기존 교회들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은 부산제일교회 박무수 목사의 동방의 독수리 설교인 ‘동방의 독수리의 비밀’(사46:11)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속은 아무도 모르는 깊은 물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마음 속 제일 깊은 곳에 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깊이 숨겨진 죄까지 드러내놓고 회개할 때 눈이 밝아져서 내 앞에 예비 된 복이 보입니다.
1. 동방의 독수리는 모략을 이룰 사람입니다.만일 여러분이 거짓 설교를 듣는 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노략질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들을 분별하여 아무 설교나 들으면 안 됩니다(요일4:1, 잠13:20). 교회에 가면 흔히 구약설교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4단계 회개 그리스도로 수건을 벗기지 않으면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고후3:14).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모르니 ‘동방의 독수리’를 바르게 깨달아 설교하는 분이 없습니다. 동방의 독수리는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모략을 이룰 사람’입니다(사46:11).
2. 동방의 독수리는 참 목사입니다.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모략입니다. 모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명철한 자에게 모략을 주시며 명철한 자가 모략을 얻게 됩니다(잠1:5). 명철한 자는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 목사입니다(렘3:15). 모략을 얻은 참 목사가 여러분을 지혜와 명철로 양육하여 넉넉히 천국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참 목사를 지칭하는 ‘동방의 독수리’를 ‘악한 날짐승’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모략을 얻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을 ‘악한 날짐승’으로 바꾸어 놓아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시107:10-11).
3. 모략은 사람의 깊은 것까지 들여다봅니다.여러분이 독수리의 특성을 알면 왜 참 목자를 독수리에 비유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명철한 참 목사가 말씀을 힘 있고 강하게 전하며 모략을 얻은 자로서 사람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는 밝은 눈이 있습니다(잠24:5, 잠20:5). 참 목자는 모략으로 성도의 깊은 속에 들어있는 죄를 보고 기도하며 말씀을 선포하여 영혼을 살려 주는 것입니다(눅23:34). 우리도 명철한 자에게서 나오는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책망과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잠21:16). 이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동방의 독수리는 특정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명철한 자가 동방의 독수리이며, 이 뜻을 동방에서 이루신다 하셨으니 우리는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모두 참 목사의 설교를 듣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참 목사의 설교를 사모하며 명철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박무수 목사는 동방의 독수리가 참 목자 - 물론 자기 자신 - 를 가리킨다고 영해하고 있습니다. 박 목사는 영해의 대가입니다. 그의 4단계 회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입었던 옷을 로마 병사들이 4조각으로 나눈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4조각으로 나뉘었으니 무조건 4단계 회개가 필요하다고 영해를 합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체계를 영해 체계라 합니다. 이런 해석 체계에서는 교주가 원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면 그것이 곧 그 말씀의 확고부동한 해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국내 자생 사이비 교주들은 성도들의 민족의식 함양을 위해 ‘동방’이 나오는 구절을 찾고는 문맥에 상관이 없이 그것을 한국이라고 주장하고 자기가 만든 집단이 바로 동방의 독수리가 임하는 곳이요, 거기에 속한 신자들이 14만 4천의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방의 독수리는 워낙 유명해져서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김대호라는 작가가 <동방의 독수리>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이것은 안철수를 연상케 하는 18대 대통령 한철주를 주제로 한 미래소설입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한민족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 하나인 단 지파의 후예로서 미래에 동방의 독수리로 세상을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반도는 성지 중의 성지로 여겨집니다. “신앙의 목적에 대한 계시를 받고 지중해 서편에서 동방으로 이동해 온 위대한 민족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동방의 독수리는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또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문자 그대로 풀어야 합니다. 이사야서 40장 이후에서 동쪽을 뜻하는 east라는 단어는 세 군데(사41:2; 43:5; 46:11)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사43:5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씨를 동쪽에서 데려오신다는 말이므로 이 주제와는 상관이 없으므로 나머지 두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누가 동쪽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을 일으키고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 앞에 민족들을 주어 그로 하여금 왕들을 다스리게 하였느냐? 그분께서 왕들을 먼지같이 그의 칼에, 쫓겨 가는 지푸라기같이 그의 활에 넘겨주시매 그가 그들의 뒤를 쫓아가되 심지어 자기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따라 안전하게 지나갔나니(사41:2-3)
내가 동쪽에서 굶주린 새를 부르되 곧 먼 나라에서 나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리라. 참으로 내가 그것을 말하였은즉 또한 그것을 이룰 것이요, 내가 그것을 작정하였은즉 또한 그것을 행하리라(사46:11).
우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잡혀간 이후에 그들을 해방시킬 사람을 동쪽의 메대/페르시아에서 세우려 하시면서 예언의 말씀으로 사41:2~3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사44:28-45:3에서 고레스가 바로 그 사람 즉 하나님께서 동쪽에서 일으키실 자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46:11에서 다시 한번 고레스를 가리키며 동쪽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겠다고 하십니다.
메대/페르시아는 이스라엘에서 보면 동쪽에 있고 또 살짝 북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41:25에서 동일하게 고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북쪽으로부터 한 사람을 일으켰은즉 그가 오리라. 그가 해 뜨는 곳에서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회반죽 위에 임하듯,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는 것 같이 통치자들 위에 임하리라(사41:25).
그러므로 사이비 이단들이 자기들의 교주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이사야서 말씀은 한국의 이단 교주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동북쪽에 위치한 메대/페르시아 왕국의 고레스 대왕입니다. 이것 이외의 다른 해석은 사적인 해석이요, 비유 해석이며 영해의 더러운 산물입니다.
더욱이 이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동방의 독수리는 바르게 된 성경에서는 ‘동쪽에서 오는 굶주린 새’로 되어 있습니다. 굶주린 새는 까마귀도 될 수 있고 육식을 하는 새는 다 될 수 있습니다. 이 새가 꼭 독수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명백히 개역성경은 이것을 오역하였습니다.
영어 KJB와 ASV는 이 단어를 ‘a ravenous bird’(굶주린 새)로 번역하였고, NKJV, NASB, NIV와 RSV는 ‘a bird of prey’(희생물을 먹는 새)로 번역하였습니다. 어떤 역본도 개역성경이 독수리라고 번역한 이 히브리 단어를 독수리 즉 eagle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안상홍 증인회에서 하나님을 독수리라고 하면서 언급한 출19:4와 신32:11은 하나님을 독수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수리처럼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국어를 제대로 보지 않고 무지하게 해석한 결과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비유로, 은유로 풀어야 할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한 번도 독수리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독수리처럼 일을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직시한 대한성서공회는 개역개정판을 내면서 독수리를 '사나운 날짐승‘으로 바꾸었고 그 결과 ’동방의 독수리‘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던 이단들에게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개역성경만 고집하고 성경을 바꾼 성서공회를 향해 불평을 제기합니다. 그토록 좋아 하던 독수리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같이 바르게 번역된 역본으로는 자기들의 영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독수리뿐만 아니라 14만 4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계시록 7장 4-8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 5 유다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갓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만 이천이라. 4절이 말하듯이 14만 4천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입니다. 얼마나 명백합니까? 이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환난기에 왕국의 복음을 선포할 유대인들입니다. 성경에서 이방인을 가리켜 ‘유다 지파, 르우벤 지파…’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길까요? 개신교 내에 천주교에서 전수받은 이스라엘 대체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나오면 이들은 곧바로 영해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 결과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바로 신천지, 안상홍 증인회 등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유다 지파, 르우벤 지파…’의 14만 4천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가정이 파괴되면서도 육체를 입고 영생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에는 미국, 영국, 한국 등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한때 영국이 온 세상을 지배할 때에는 앵글로 색슨족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12지파’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이런 사상이 넘어간 뒤에는 이방인(미국인)이면서도 유대인 행세를 하며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왔습니다. 이러다가 이런 부류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는 한민족이 혹은 한민족의 어떤 종교 지도자가 동방의 독수리로 둔갑하고 그런 단체에 속한 자들이 14만 4천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 중 극단적인 이들은 심지어 구원받으려면 구약의 유월절을 지키고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다 비유 해석 즉 영해(靈解)의 추잡한 쓰레기이며 성경대로 믿는 우리 성경 신자들은 이런 데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해의 근원이 바로 천주교의 교리를 확립해 준 어거스틴과 그의 교리를 그대로 차용한 칼빈이므로 우리는 어거스틴 주의와 칼빈주의를 경계합니다. 둘 다 교회의 세상 정치를 위해 성경을 왜곡한 사람들의 틀린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단 종파들이 비성경적인 종말론을 가르치는 것은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종파만이 마지막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워 자신들을 따르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러한 주장에 미혹되지 말고 항상 경계하며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행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마25:13).
이단 종파들의 교주들은 거의 다 기독교회의 성직자 혹은 광적인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비성경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경전으로 삼아 기성 교인과 불신자들을 미혹하여 자기들만의 집단을 형성하고 반사회적이며 비윤리적인 생활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근신하여 깨어 있음으로써 이들의 미혹에 대항하며 현혹되지 말고 미혹된 자들을 악에서 건져내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이런 사이비 이단 종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이스라엘 대체 신학, 무천년주의를 타파하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저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인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교회가 도둑질하기 위해 영해/비유 해석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것이 잔혹한 마귀의 한민족 선민사상과 결합되어 한국에서만 가능한 종말론 사이비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보존해 주신 바른 성경을 가지고 바른 해석으로 바르게 진리 위에 서서 ‘환난 전 휴거’의 복된 소망을 기다리며 맡은 바 책무를 다 감당하는 좋은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한겨레: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4012.html신천지: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534싸이: https://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29안상홍: http://cafe.naver.com/festival1004/1183박무수: http://www.church.or.kr/board/board_view_01.asp?brdid=20&idx=1069
2013-07-23 11:39:59 | 관리자
참고로 왜 조상들의 불법을 3-4대까지만 벌하시는가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3-4대가 한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는(아브라함은) 낯선 나라에 머무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머물렀고 자기와 함께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가 된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으니(히11:9)
그러므로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자식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조상들에게 가정교육의 큰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민족의 패망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 가운데 한 사람의 죄는 유전되어 지금까지 온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모든 인류의 첫 조상 아담입니다. 그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가는 일은 각 사람의 죄들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계속해서 첫 아담과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만을 비교합니다.
롬5:15-19, 15그러나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은 또한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죽었을진대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선물은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이니라.
16 또 이 선물은 죄 지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심판은 정죄에 이르렀으나 많은 범죄로 인한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칭의에 이르기 때문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한 사람을 통하여 군림하였을진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더 생명 안에서 군림하리라.)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중간에 낀 다른 조상들은 우리의 죄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하셨습니다(요1;29).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나님 편에서 그분은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계13:8).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들만 걱정하면 됩니다. 이 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한 번에 영원토록 완전히 제거가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죄들을 용서하셨지만 죄들을 제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속죄는 죄들을 덮어서 가려주는 것이었습니다(출34: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그러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죄들로 인해 각 사람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들이 다 용서됩니다.
아담과 우리 사이에 낀 우리 조상들은 죄들에 관한 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샬롬
2013-07-10 15:36:23 | 관리자
참고로 왜 조상들의 불법을 3-4대까지만 벌하시는가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과거 구약시대에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3-4대가 한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는(아브라함은) 낯선 나라에 머무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머물렀고 자기와 함께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가 된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으니(히11:9)
그러므로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자식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조상들에게 가정교육의 큰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민족의 패망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 가운데 한 사람의 죄는 유전되어 지금까지 온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모든 인류의 첫 조상 아담입니다. 그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가는 일은 각 사람의 죄들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계속해서 첫 아담과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만을 비교합니다.
롬5:15-19, 15그러나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은 또한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죽었을진대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선물은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이니라.
16 또 이 선물은 죄 지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심판은 정죄에 이르렀으나 많은 범죄로 인한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칭의에 이르기 때문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한 사람을 통하여 군림하였을진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더 생명 안에서 군림하리라.)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중간에 낀 다른 조상들은 우리의 죄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하셨습니다(요1;29).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나님 편에서 그분은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계13:8).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들만 걱정하면 됩니다. 이 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한 번에 영원토록 완전히 제거가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죄들을 용서하셨지만 죄들을 제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속죄는 죄들을 덮어서 가려주는 것이었습니다(출34: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그러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죄들로 인해 각 사람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들이 다 용서됩니다.
아담과 우리 사이에 낀 우리 조상들은 죄들에 관한 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샬롬
2013-07-10 15:36:23 | 관리자
지난 주 금요 모임이 끝난 뒤 한 젊은 형제가 잠깐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가족들 가운데 부산의 박O수 목사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말을 듣지 않아 답답하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문제인지 물으니 박 목사는 조상들의 죄를 반드시 회개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 너무 불쌍한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박 목사가 인용하는 몇 가지 구절을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가 인용하는 개역성경 벧전1:18을 듣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런 성경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제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살펴보니 그 형제가 말한 대로 되어 있었습니다.
흠정역: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개역성경: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개역개정: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KJB: Forasmuch as ye know that ye were not redeemed with corruptible things, [as] silver and gold, from your vain conversation [received] by tradition from your fathers;
NIV: For you know that it was not with perishable things such as silver or gold that you were redeemed from the empty way of life handed down to you from your forefathers,
개역성경, 개역개정, NIV를 보면 다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 유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유전(遺傳)은 “1. 물려받아 내려옴. 또는 그렇게 전해짐. 2.<생물>어버이의 성격, 체질, 형상 따위의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짐. 또는 그런 현상.”을 뜻합니다.
아니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 피를 타고 유전으로 전해 내려온다니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를 보니 킹제임스 성경에 있는 중요한 단어가 현대역본들에서는 다 삭제되어 있었습니다. 즉 ‘전통으로'라는 단어가 빠지면서 이상하게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 피를 타고 유전된 것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단들이 사실 성경을 유심히 봅니다. 부산의 박 목사는 이 구절을 유심히 보고는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교리를 만들어 신도들보고 그것들을 회개하라고 닦달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박 목사가 좋아하는 구절들은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을 하나님께서 자손들에게 벌하시겠다고 하신 구약의 몇 구절들입니다. 신약의 베드로전서 구절과 구약의 몇 구절을 가지고 박 목사는 이단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먼저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야 하므로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혹은 불법들)’을 담고 있는 구절들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밑에 보시면 그 구절들이 다 나와 았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혹은 불법들)’을 담고 있는 구절은 모두 구약에만 있습니다. 신약에는 한 구절도 없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신정국가로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국가의 헌법으로 주신 십계명에서 처음 나옵니다(출20:4-5). 단순히 출20:5만 보지 말고 5절이 나오는 이유가 설명된 4절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4-5절의 핵심 내용이 우상숭배나 이교도들과의 혼합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혹은 불법들)’을 담고 있는 다른 구절들도 보면 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하다가 포로가 되어 잡혀가거나 가기 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신정 정치 하의 이스라엘에게는 명백한 우상숭배나 이교도들과의 혼합 문제가 곧 질투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그 하나님은 배타적으로 그들에게서 100%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심판은 거의 대부분 이스라엘 온 민족이 당하는 심판이었습니다. 밑에 있는 구절들을 문맥과 함께 보시면 금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을 문맥에 상관없이 떼 내어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 개인이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음과 같이 규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로 인하여 아버지들을 죽이지 말며 아버지들로 인하여 자녀들을 죽이지 말라.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신24:16).
보라, 모든 혼은 내 것이라. 아버지의 혼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혼도 내 것이니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겔18:4).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거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교리였으면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반드시 언급하고 가르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구원은 개인의 죄들의 용서에 달려 있지 티끌만큼도 조상들의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사주팔자도 더 이상 성도들 안에서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런 일들은 과거에 우리가 마귀의 자녀였을 때 일정 부분 우리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딸로 신분이 바뀌었으므로 세상의 신에게 속한 어떤 악한 영들도 우리의 신분과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골2;13-15, 13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 14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15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다시는 이런 헛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의 속임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구약의 신정 정치 하에서 민족적인 심판의 상황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안 됩니다. 또 개역성경 같은 허술한 성경을 의지하여 교리를 만들면 안 됩니다.
성경의 ‘몇 글자’가 이단을 만듭니다.
귀신들이 아니라 마귀들인데 성경이 귀신이라고 하니 베뢰아 귀신론이 만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왕국의 신비들을 설명하시면서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비유가 없이는’(without a parable)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13:34,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런데 이것을 개역성경처럼 ‘비유가 아니면’으로 번역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비유가 되고 맙니다. 여기서 신천지의 비유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은 여기에 근거해서 성경이 다 비유이며 자기들의 교주만이 그것을 알려 줄 수 있다고 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성경 문제 대단히 중요합니다.신약과 구약을 잘 구분하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합니다.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과거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느라 평생을 속박 가운데 지내야 하는 이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다음의 자료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저들의 눈을 속히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944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46
‘
아버지들(조상들)의 불법’이 나오는 구절들
출20:4-5, 4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34: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레26:39-42, 39 또 너희의 남은 자들이 너희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들의 불법 가운데서 쇠약해지며 또 자기 조상들의 불법 가운데서 그 조상들과 함께 쇠약해지리라. 40 그들이 만일 자기들의 불법과 자기 조상들의 불법과 자기들이 나를 대적하며 범한 그 범법을 자백하고 또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걸으므로 41 나도 그들을 대적하여 걸었으며 또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자백하고 자기들의 할례 받지 않은 마음을 낮추어 자기들의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수용하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또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도 기억하며 그 땅을 기억하리라.
민14:18, {주}는 오래 참고 긍휼이 많아 불법과 범죄를 용서하나 결코 죄 있는 자들의 죄를 깨끗이 치우지 아니하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느니라, 하셨나이다.
신5:9-10,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사14:21, 그들의 조상들의 불법으로 인하여 그의 자손들을 살육할 준비를 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일어나거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며 또 도시들로 세상의 표면을 채우지도 못하게 하라.
렘14:19-20, 주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나이까? 주의 혼이 시온을 심히 싫어하셨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치시고 우리를 위해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랐으나 좋은 것이 없고 치료하시는 때를 바랐으나 고난을 보나이다! 20 오 {주}여, 우리가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의 사악함과 우리 조상들의 불법을 우리가 인정하나이다.
렘32:18, 주께서는 인자하심을 수천의 사람들에게 베푸시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그들 뒤에 오는 그들의 자손들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신 이, 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주}가 그분의 이름이로소이다.
‘조상들(아버지들)의 불법들’이 나오는 구절들
레26:39-40, 또 너희의 남은 자들이 너희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들의 불법 가운데서 쇠약해지며 또 자기 조상들의 불법들 가운데서 그 조상들과 함께 쇠약해지리라. 40 그들이 만일 자기들의 불법과 자기 조상들의 불법과 자기들이 나를 대적하며 범한 그 범법을 자백하고 또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걸으므로 41 나도 그들을 대적하여 걸었으며 또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자백하고 자기들의 할례 받지 않은 마음을 낮추어 자기들의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수용하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또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도 기억하며 그 땅을 기억하리라.
느9:2, 이스라엘의 씨가 모든 타국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일어서서 자기 죄들과 자기 조상들의 불법들을 자백하니라.
사65:7, 너희 불법들과 너희 조상들의 불법들을 함께 보응하리니 그들이 산들 위에서 분향하고 작은 산들 위에서 나를 모독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이전 행위를 헤아리되 그들의 품속까지 헤아리리라. {주}가 말하노라.
선조들의 불법들, 렘11:10그들이 내 말들 듣기를 거절한 자기 선조들의 불법들로 돌아가 다른 신들을 따르고 그들을 섬겼은즉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애5:7, 우리 조상들은 죄를 짓고 없어졌으며 우리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하였나이다.
단9:16, 오 [주]여, 간청하옵나니 주의 모든 의를 따라 주의 분노와 주의 격노를 돌이키사 주의 도시 예루살렘 곧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들과 우리 조상들의 불법들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우리의 사방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치욕거리가 되었나이다.
2013-07-09 16:49:47 | 관리자
지난 주 금요 모임이 끝난 뒤 한 젊은 형제가 잠깐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가족들 가운데 부산의 박O수 목사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말을 듣지 않아 답답하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문제인지 물으니 박 목사는 조상들의 죄를 반드시 회개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 너무 불쌍한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박 목사가 인용하는 몇 가지 구절을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가 인용하는 개역성경 벧전1:18을 듣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런 성경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제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살펴보니 그 형제가 말한 대로 되어 있었습니다.
흠정역: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개역성경: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개역개정: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KJB: Forasmuch as ye know that ye were not redeemed with corruptible things, [as] silver and gold, from your vain conversation [received] by tradition from your fathers;
NIV: For you know that it was not with perishable things such as silver or gold that you were redeemed from the empty way of life handed down to you from your forefathers,
개역성경, 개역개정, NIV를 보면 다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 유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의 유전(遺傳)은 “1. 물려받아 내려옴. 또는 그렇게 전해짐. 2.<생물>어버이의 성격, 체질, 형상 따위의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짐. 또는 그런 현상.”을 뜻합니다.
아니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 피를 타고 유전으로 전해 내려온다니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를 보니 킹제임스 성경에 있는 중요한 단어가 현대역본들에서는 다 삭제되어 있었습니다. 즉 ‘전통으로'라는 단어가 빠지면서 이상하게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이 피를 타고 유전된 것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단들이 사실 성경을 유심히 봅니다. 부산의 박 목사는 이 구절을 유심히 보고는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교리를 만들어 신도들보고 그것들을 회개하라고 닦달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박 목사가 좋아하는 구절들은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을 하나님께서 자손들에게 벌하시겠다고 하신 구약의 몇 구절들입니다. 신약의 베드로전서 구절과 구약의 몇 구절을 가지고 박 목사는 이단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먼저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야 하므로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혹은 불법들)’을 담고 있는 구절들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밑에 보시면 그 구절들이 다 나와 았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혹은 불법들)’을 담고 있는 구절은 모두 구약에만 있습니다. 신약에는 한 구절도 없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신정국가로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국가의 헌법으로 주신 십계명에서 처음 나옵니다(출20:4-5). 단순히 출20:5만 보지 말고 5절이 나오는 이유가 설명된 4절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4-5절의 핵심 내용이 우상숭배나 이교도들과의 혼합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들(혹은 조상들)의 불법(혹은 불법들)’을 담고 있는 다른 구절들도 보면 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하다가 포로가 되어 잡혀가거나 가기 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신정 정치 하의 이스라엘에게는 명백한 우상숭배나 이교도들과의 혼합 문제가 곧 질투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그 하나님은 배타적으로 그들에게서 100%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심판은 거의 대부분 이스라엘 온 민족이 당하는 심판이었습니다. 밑에 있는 구절들을 문맥과 함께 보시면 금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을 문맥에 상관없이 떼 내어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 개인이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음과 같이 규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로 인하여 아버지들을 죽이지 말며 아버지들로 인하여 자녀들을 죽이지 말라.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신24:16).
보라, 모든 혼은 내 것이라. 아버지의 혼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혼도 내 것이니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겔18:4).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거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교리였으면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반드시 언급하고 가르쳤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구원은 개인의 죄들의 용서에 달려 있지 티끌만큼도 조상들의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사주팔자도 더 이상 성도들 안에서 작용하지 못합니다. 그런 일들은 과거에 우리가 마귀의 자녀였을 때 일정 부분 우리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아들딸로 신분이 바뀌었으므로 세상의 신에게 속한 어떤 악한 영들도 우리의 신분과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골2;13-15, 13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 14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 15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다시는 이런 헛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의 속임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구약의 신정 정치 하에서 민족적인 심판의 상황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안 됩니다. 또 개역성경 같은 허술한 성경을 의지하여 교리를 만들면 안 됩니다.
성경의 ‘몇 글자’가 이단을 만듭니다.
귀신들이 아니라 마귀들인데 성경이 귀신이라고 하니 베뢰아 귀신론이 만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왕국의 신비들을 설명하시면서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비유가 없이는’(without a parable)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13:34,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런데 이것을 개역성경처럼 ‘비유가 아니면’으로 번역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비유가 되고 맙니다. 여기서 신천지의 비유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은 여기에 근거해서 성경이 다 비유이며 자기들의 교주만이 그것을 알려 줄 수 있다고 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성경 문제 대단히 중요합니다.신약과 구약을 잘 구분하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합니다.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과거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느라 평생을 속박 가운데 지내야 하는 이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다음의 자료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저들의 눈을 속히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944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46
‘
아버지들(조상들)의 불법’이 나오는 구절들
출20:4-5, 4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34: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레26:39-42, 39 또 너희의 남은 자들이 너희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들의 불법 가운데서 쇠약해지며 또 자기 조상들의 불법 가운데서 그 조상들과 함께 쇠약해지리라. 40 그들이 만일 자기들의 불법과 자기 조상들의 불법과 자기들이 나를 대적하며 범한 그 범법을 자백하고 또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걸으므로 41 나도 그들을 대적하여 걸었으며 또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자백하고 자기들의 할례 받지 않은 마음을 낮추어 자기들의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수용하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또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도 기억하며 그 땅을 기억하리라.
민14:18, {주}는 오래 참고 긍휼이 많아 불법과 범죄를 용서하나 결코 죄 있는 자들의 죄를 깨끗이 치우지 아니하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느니라, 하셨나이다.
신5:9-10,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
사14:21, 그들의 조상들의 불법으로 인하여 그의 자손들을 살육할 준비를 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일어나거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며 또 도시들로 세상의 표면을 채우지도 못하게 하라.
렘14:19-20, 주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나이까? 주의 혼이 시온을 심히 싫어하셨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치시고 우리를 위해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랐으나 좋은 것이 없고 치료하시는 때를 바랐으나 고난을 보나이다! 20 오 {주}여, 우리가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의 사악함과 우리 조상들의 불법을 우리가 인정하나이다.
렘32:18, 주께서는 인자하심을 수천의 사람들에게 베푸시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그들 뒤에 오는 그들의 자손들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신 이, 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주}가 그분의 이름이로소이다.
‘조상들(아버지들)의 불법들’이 나오는 구절들
레26:39-40, 또 너희의 남은 자들이 너희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들의 불법 가운데서 쇠약해지며 또 자기 조상들의 불법들 가운데서 그 조상들과 함께 쇠약해지리라. 40 그들이 만일 자기들의 불법과 자기 조상들의 불법과 자기들이 나를 대적하며 범한 그 범법을 자백하고 또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걸으므로 41 나도 그들을 대적하여 걸었으며 또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자백하고 자기들의 할례 받지 않은 마음을 낮추어 자기들의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수용하면 42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또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도 기억하며 그 땅을 기억하리라.
느9:2, 이스라엘의 씨가 모든 타국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일어서서 자기 죄들과 자기 조상들의 불법들을 자백하니라.
사65:7, 너희 불법들과 너희 조상들의 불법들을 함께 보응하리니 그들이 산들 위에서 분향하고 작은 산들 위에서 나를 모독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이전 행위를 헤아리되 그들의 품속까지 헤아리리라. {주}가 말하노라.
선조들의 불법들, 렘11:10그들이 내 말들 듣기를 거절한 자기 선조들의 불법들로 돌아가 다른 신들을 따르고 그들을 섬겼은즉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애5:7, 우리 조상들은 죄를 짓고 없어졌으며 우리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하였나이다.
단9:16, 오 [주]여, 간청하옵나니 주의 모든 의를 따라 주의 분노와 주의 격노를 돌이키사 주의 도시 예루살렘 곧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들과 우리 조상들의 불법들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우리의 사방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치욕거리가 되었나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7-10 15:37:37 성경교리에서 복사 됨]
2013-07-09 16:49:47 | 관리자
배도와 분리
현대 교회들이 많이 배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배도라는 말은 구원에 대한 교리와 대부분의 교리들이 올바른데 시간이 지나면서 구원 이외의 다른 교리들이 심각하게 타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나 불교가 배도했다는 말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 신천지나 안상홍 파가 배도했다는 말도 의미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데에는 배도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것으로 알았던 교회나 교단이나 학교가 타락하는 것을 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한 마디로 배도와 분리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는 보수적인 개혁 교회 목사들을 배출하기 위해 1812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배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여기서 나온 메이첸, 밴틸 박사 등이 1929년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도 자유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밥 존스 대학의 설립자인 밥 존스는 감리교도(침례를 주는 감리교도)였습니다. 과거에 미국 감리교는 매우 근본적인 믿음을 소유하였지만 1900년대를 거치면서 1920년대의 자유주의 파동을 겪으면서 인본주의로 흘러서 지금은 미국 장로교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인본적인 교단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에 밥 존스는 감리교에서 분리하여 1926년에 근본주의 초교파 학교인 밥 존스 대학을 세웠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가장 강력하게 근본주의와 킹제임스 성경을 옹호하는 학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킹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천주교 세력과도 연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밥 존스 출신으로 호튼 박사는 1950년대에 펜사콜라에 내려가 펜사콜라 바이블 칼리지(www.pcci.edu)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현재 학생 수가 5000명이 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독립침례교회 대학입니다. 대규모 대학으로는 공공연하게 킹제임스 성경을 옹호하는 학교입니다. (참고로 이 학교는 럭크맨의 펜사콜라 바이블 인스티튜트(펜사콜라 성경 학교)와 같은 도시에 있지만 다릅니다. 참고로 럭크맨도 밥 존스 대학 출신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도 언제 타락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또 거기서 다른 이들이 분리해서 진리를 수호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도와 분리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분리(separation)를 통해 진리를 순수하게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나 사람은 변합니다. 만약 그 변화가 진리를 배격하는 것이면 가차 없이 분리해서 진리를 순순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분리하려면 말씀에 대한 지식과 확신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 나라에 분리를 알고 실천하는 형제/자매들이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어떤 분의 말처럼 하나님은 큰 그릇, 금 그릇, 은그릇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어도 깨끗한 그릇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샬롬
레위기 10장 8-11
8 ¶ {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너나 혹은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니 그것은 너희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아니한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 사이에 구별을 두고 11 이로써 {주}가 모세의 손으로 말한 모든 법규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에스겔 22 : 26 그녀의 제사장들이 내 율법을 범하고 내 거룩한 것들을 더럽히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전혀 구분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차이를 보이지 아니하며 자기 눈을 가려 내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느니라.
에스겔 44 : 23 또 그들은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를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분별하게 할지니라.
고린도후서 6장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느냐?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느냐?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느냐?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무슨 몫을 나누겠느냐?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17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딸이 되리라. [전능자] [주]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
2013-07-06 15:40:48 | 관리자
다음은 <하나님의 뜻>에서 발췌한 것입니다.교회와 목사의 역할에 대해 잘 보여 주며이단 교회의 문제를 잘 보여 줍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75 선택에서 교회의 도움을 받을 때 바른 시각 유지하기 교회는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활용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이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 조심하는 마음도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가장 신실한 신자라도 동기가 얽혀있어 엉뚱한 조언을 줄 수 있다.
둘째,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권한 남용에 능한 자들이 있다.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권위를 주장하며 사실상 독재자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있다. 보수성이 강한 진영에서 특히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교인들에게 결혼 대상과 취직할 직장과 돈 쓰는 방식과 시간 사용 방식을 정해 줄 권리가 있는 사람인 줄로 착각한다. 기독교 교회는 어느 종교 집단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이단처럼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신중하게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선한 지도자는 양들을 지배하지 않고 섬긴다.
사회학자들은 사람들이 이단에 들어가는 이유를 연구했다. 이단의 영향에 가장 쉽게 넘어가는 자들은 권위적 기독교를 경험하며 안전을 얻기 원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신약성경에 약속된 것 - 사랑, 봉사, 높은 기준, 진지한 헌신 - 을 실현하는 듯 보이는 단체에 들어간다. 그러나 머지않아 덫에 걸린다. 이미 심각한 피해를 당한 후에야 그 집단의 정체가 밝혀진다.
몇 년 전 어느 장례식에서 만난 한 여자가 나한테 말했다. “내 가까운 친구들이 다 죽었어요.” 깜짝 놀라 사연을 묻자 그녀가 들려준 내막은 이랬다. 캘리포니아 주에 살 때 그녀는 자기 말로 ‘지상 천국 같은’ 단체를 발견했다. 그래서 들어갔다. 몇 년 후 그녀는 너무 늦기 전에 그 단체를 나왔다. 지도자는 갈수록 철권을 휘둘렀고 단체는 점점 고립되었다. 마침내 사면초가의 심정에 빠진 그들은 남아메리카에 땅을 사 그곳으로 이주했다. 몇 년 후 900명이 넘는 멤버들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집단 자살했다. 지상 천국 같던 곳이 지상 지옥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극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권위적인 교회는 여전히 위험하다.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타인의 일을 대신 결정해 줄 만큼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도를 넘어선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공금을 횡령하거나 간음하거나 자녀를 홀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교회가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직업의 종류 - 교사가 아니라 의사 - 나 결혼 대상 - 철수가 아니라 길동이 - 에 있어 타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는 우리가 그분을 구하며 사는 한 우리가 이 땅에서 내리는 많은 결정들에 대해 하나님이 크게 개의치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2013-06-26 16:26:49 | 관리자
정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슬람권에 사역하는 저로서는 이 심각성이 배나 됩니다.
국내에 계시더라도 이슬람의 확장과 동향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천주교와 이슬람교는 세계 최대 종교들로서
어떻게든 공존하거나 연대하거나 상생하며 적그리스도적인 행보를 이어 갈거라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이슬람은 기독교와 천주교를 핍박합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적그리스도적이지만 복음에 무지한 무슬림은 품어야할 한 생명임을...
킵바이블에서 짧지만 이슬람권에 대해 언급되는 것을 의미있게 생각하며 댓글을 남깁니다.
2013-06-23 01:51:15 | 허충식
이슬람이 몰려온다!
앞으로 천주교와 함께 이슬람이 온 세상을 장악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의 영상과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zdNg8Dotovc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11&cate_name=%EC%9D%B4%EB%8B%A8+%EA%B5%90%EB%A6%AC
샬롬
2013-06-22 10:07:24 | 관리자
앞으로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공중 강림과 지상 재림의 두 단계로 되어 있고 총 7년의 기간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이 한 순간이 아니라 33년 반 동안에 이루어진 것처럼 재림도 7년의 기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 강림하시면 그리스도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자들이 휴거되어 영화로운 몸으로 공중으로 채여 올라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들은 7년 동안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혼인식을 거칩니다. 그 7년 동안 이 땅에는 창세 이후로 없었던 극심한 환난의 시간이 임합니다.
이때에 수많은 환난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합니다. 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7년 환난기의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근방의 올리브 산에 강림하셔서 왕좌에 앉아 친히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 민족을 나누어 심판하는 일입니다.
이들에 대한 판단의 근거는 이들이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예수님의 형제들인 유대인들을 환난기에 잘 대우해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이 내 형제들은 양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의 친 백성/형제들인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양/염소 민족의 심판 때에는 예수님 앞에 세 부류가 섭니다: 가운데에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살아남은 유대인들, 오른쪽에는 양 민족에 속한 자들, 왼쪽에는 염소 민족에 속한 자들
이런 심판을 통해 염소 민족에 속한 자들은 마25:41의 저주를 받습니다.
그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
한편 양 민족에 속한 자들은 34절의 복을 받습니다.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창세로부터 예비된 왕국이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채 7년 환난기를 끝까지 통과한 유대인들과 이방 민족(양)들이 육신을 입고 천년왕국에 들어갑니다. 이들은 육신을 입었으므로 아기를 낳을 수 있고 또 낳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하나님께서 1000년 동안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어두시므로 마귀가 사람을 직접 유혹하지 못합니다. 1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바닥없는 구덩이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2 마귀요 사탄인 그 용 곧 저 옛 뱀을 붙잡으니라. 그가 그를 붙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바닥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어 가두고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이 차기까지는 그가 더 이상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니라. 그 뒤에는 그가 반드시 잠시 동안 풀려나리라(계20:1-3).
땅에는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수명은 다시 노아의 홍수 이전처럼 1000살까지 늘어납니다. 이사야서 65장 19-25에 이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19 내가 예루살렘을 기뻐하며 내 백성을 기뻐하리니 슬피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다시는 그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라. 20 날수가 많지 않은 어린 아기나 자기의 날들을 채우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거기에 없으리니 아이가 백 세에 죽으리라. 그러나 죄인은 백 세가 되어도 저주받은 자가 되리라. 21 그들이 집을 지어 거기에 거주하고 포도원을 세워 그것의 열매를 먹으리라. 22 그들이 짓되 다른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심되 다른 사람이 먹지 아니하리니 내 백성의 날수는 나무의 날수와 같으며 나의 선택한 자는 자기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리리라. 23 그들이 헛되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받으려고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주}에게 복 받은 자의 씨요, 그들과 함께하는 그들의 후손도 그와 같으리라. 24 그때에는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하는 도중에 내가 들으리라. 25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으며 흙이 뱀의 양식이 되리니 나의 거룩한 모든 산에서 그것들이 해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22절에 있듯이 사람들의 수명이 나무의 수명과 같이 길어집니다. 20절에 있듯이 백 세에 죽는 사람을 아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때에는 25절에 있듯이 처음의 에덴동산에서처럼 모든 짐승이 초식을 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상하게 하거나 해치는 일이 없습니다.
이사야서 11장 1-10절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막대기가 나며 그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자랄 것이요, 2 {주}의 영 곧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략과 능력의 영이요, 지식과 {주}의 두려움의 영께서 그 위에 머무시며 3 그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속히 깨닫게 하시리니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책망하지 아니하며 4 오직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의롭게 재판하고 땅의 온유한 자를 위해 공평하게 꾸짖으며 자기 입의 막대기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호흡으로 사악한 자를 죽이며 5 의로 자기 허리의 띠를 삼고 신실함으로 자기 콩팥 주위의 띠를 삼으리라. 6 이리도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하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놀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로되 9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10 ¶ 그 날에 이새의 뿌리가 있어서 그것이 만백성의 기로 설 것이요, 이방인들이 그에게 찾아오리니 그가 베푸는 안식이 영화로우리라.
자, 그러면 이때에도 사람이 죽을까요?
20절에 보면 백 세에 죽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때에도 사람이 죽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처음 들어가거나 거기서 태어난 사람은 다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므로 죽음을 면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마귀가 1000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는데 이들이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처음에 거기 들어간 사람들은 100%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다른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마귀의 직접적인 유혹이 없어도 그들은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므로 모든 시대의 사람들처럼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죽습니다. 마귀의 유혹이 없어서 조직적인 저항이나 범죄는 없다 해도 구원은 마음의 문제이므로 이들이 회개하고 마음을 다해 주님을 찾지 않으면 비록 유토피아에 살아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65:20은 “죄인은 백 세가 되어도 저주받은 자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1000년이 흘러가는 동안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됩니다. 계20:7-10은 이들의 마지막 상황을 보여 줍니다. 마귀가 잠시 풀려나자 이 죄인들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귀에게 붙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마귀와 함께 영원무궁토록 불 호수의 치욕을 당합니다.
7 그 천 년이 다 차매 사탄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고 8 나가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속이며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 그들이 땅의 넓은 곳으로 올라가 성도들의 진영과 그 사랑받는 도시를 에워싸매 불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켰고 10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환경만 좋으면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사람의 문제가 환경이 아니라 타고난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유토피아의 천년왕국에서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불 호수로 들어가는 자들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천년왕국에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유대인과 이방인(양 민족)만 들어갑니다.이들은 아이를 낳습니다.이 아이들 중에는 죄인들이 많고 또 천년왕국의 시민들 중에는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기 적어도 7년 전에 휴거 받거나 부활한 신약 성도들과 7년 환난기 끝에 부활할 구약 성도와 환난기 성도들은 영화로운 몸을 입고 - 아이는 낳지 못함 - 아마 이때에 왕국의 백성들과 함께 천년왕국(에덴동산)의 아름다움과 부요함을 누릴 것입니다.
샬롬
참고로 천년왕국에도 성전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있고 구약의 희생 예물을 드리며(겔40-48장, 말3:1-3) 또 장막절을 지킵니다(슥14:16-19). 이때의 희생 예물은 십자가 사건 이후의 신약시대 성도들이 지키는 주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013-06-15 15:38:54 | 관리자
사무엘기상 28장에 보면 사울이 위급한 상황에서 엔돌의 영매를 찾아가 죽어 있는 사무엘을 불러오라고 이야기하고 그 영매는 사무엘을 불러옵니다(7-20절).
많은 이들이 이때에 올라온 사무엘은 가짜라고 이야기합니다.영매가 어떻게 죽은 사람을 불러올릴 수 있느냐는 생각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실로 모든 영매나 소위 ‘귀신 쫓는다는 목사’들이 불러올리는 처녀 귀신, 할아버지 귀신 등은 사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거짓 영인 마귀들입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진짜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목소리를 내니까 이들은 자기들이 진짜로 죽은 사람을 불러올린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또 그것을 보는 이들도 그렇게 착각하게 됩니다. 죽은 사람과 목소리도 같고 말하는 게 같기 때문에 그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은 다 마귀들의 장난에 속아 넘어갑니다. 김기동 목사 등의 베뢰아 귀신들도 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매일 귀신/사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마귀의 종들입니다. 다락방이라는 데도 늘 마귀 이야기하만 하지요. 이런 단체가 사실은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단체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영매나 ‘마귀 들려 축사하는 목사’는 결코 죽어 있는 사람의 영/혼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러 특별한 일을 허용하십니다.
사무엘기상 28장에서는 분명히 사무엘이 올라왔습니다. 영매는 자기가 사무엘을 불러올린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이 일은 사실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매 자신도 놀라고 맙니다(12-13절). 사무엘기상 28장의 앞뒤 문맥 상 땅 속에서 올라온 이 존재가 사무엘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존재는 분명히 땅속의 낙원에 있던 사무엘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였고 그대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싸움터에서 죽어서 사무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근거로 영매가 죽은 사람을 불러올릴 수 있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예외적인 기적입니다.
민수기 22장 22-35절에는 나귀가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 역시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일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개나 고양이에게 말을 시키려 하면 안 됩니다. 이 일 역시 보편적인 하나님의 일과는 거리가 먼 특별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만 이런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간구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어떤 단회적 사건을 가지고 보편적 해석을 하는 오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도 단회적 사건입니다. 지금 이 시간 또 다른 오순절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번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신 사건이지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매일 매일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보편적 사건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다마스쿠스(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대개 보편적인 방법으로 섭리를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단회적 특수 상황을 가지고 보편적 교리를 만들려고 하면 여기서 이단 교리나 잘못된 가르침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식과 이성과 논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변치 않는 말씀의 틀 안에서 바르게 이런 것들을 사용하는 법을 늘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다음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07&page=
샬롬
2013-06-15 14:39:14 | 관리자
구약 시대 성도(의인)들의 거처는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땅속의 낙원에서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옮겨졌습니다(엡4:7-10). 비록 이들 중 극소수가 예수님 부활 당시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부활하였으나(마27:51-53) 대부분은 부활하지 않은 채 처소만 옮겼습니다. 구약시대 성도들과 환난기 성도들은 7년 환난기가 끝난 뒤에 부활할 것입니다(욥19:1-27; 사26:16-21; 단12:13 등 참조). 그러므로 비록 그들의 거처가 지금 셋째 하늘의 낙원이라도 그들은 부활의 몸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기 전에 구약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9 이 사람들은[구약 성도들] 다 믿음을 통해 좋은 평판을 얻었으되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40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신약 성도들]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하사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11:39-40).
또한 신약 시대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빌1:23; 고후5:8). 그런데 이곳을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낙원이 이제는 옮겨져서 셋째 하늘에 있지만,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셋째 하늘에,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성도들은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낙원이 아니라] 셋째 하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거기 있던 신약 시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거기로부터 그분과 함께 와서 부활한 몸과 연합할 것입니다(빌3:20-21). 빌3:20-21에서 사도 바울은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장로 교인들은 신약 시대 성도가 죽으면 대피소에 있다가 나중에 주님을 만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대피소를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하면 십자가 옆의 강도가 간 낙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못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대피소 같은 데 가지 않고 직통으로 셋째 하늘에 갑니다. 이것인 신약 시대 성도들의 더 나은(better) 특권입니다.
샬롬
2013-06-15 14:11:10 | 관리자
요즘 저희 교회 자매님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사람이 죽어도 여전히 몸이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하여 간단히 답을 드립니다.
먼저 영/혼/몸에 대해서는 노영기 형제님이 잘 정리해 놓으셨으니 그 기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315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실 때부터 영/혼/몸을 동시에 가진 3중적인 존재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이 땅에 있든, 지옥에 있든, 천국에 있든, 부활하기 전이든, 부활한 후든 언제나 3중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언제 어디서든 몸이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그리고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다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나사로와 아브라함은 지옥(지하세계)의 아브라함의 품이라 불리는 낙원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지하세계)의 불타는 뜨거운 부분에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한 부류는 천국에, 한 부류는 지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다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입, 눈, 손, 발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몸은 지상에서 그들이 쓰던 몸이 아닙니다. 그 몸들은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20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썩어서 없어졌거나, 부자나 나사로처럼 그 당시 무덤 속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다 부활할 때까지 어떤 형태의 중간 단계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몸을 혼적인 몸(soulish body)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6장 9-11절을 보면 죽임당한 혼들이 나오는데 그 혼들 역시 말도 하고 옷도 입습니다. 몸이 없다면 이런 것들이 다 불가능합니다.
사무엘기상 2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통해 단 한 번 낙원에 있던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사무엘도 정상적인 몸을 가진 사람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의 몸은 그 당시 그의 무덤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에게 잠정적인 중간 단계의 몸을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우리의 몸을 부활시키실까요?
그 이유는 사람의 죄로 인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사망을 예수님 스스로 이기시고 또 모든 성도들도 그분의 피로 사망을 이겼음을 입증하시고자 함입니다. 중간 단계의 몸으로는 성도들이 사망 권세를 이긴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은 곡식의 알갱이입니다. 이 알갱이를 뿌린 뒤 이것이 죽어야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나서 하나님이 주기를 원하시는 고유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고전15:35-39).
이 영화로운 몸을 가져야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먹기도 하고 마음대로 제약 없이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과 우주)에 영원히 살게 될 사람들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땅에서 제약 없이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아마 중간 단계의 몸은 이런 면에서 부족함이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주 예수님처럼 순식간에 영화로운 몸을 입을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큰 평강을 기원합니다.
샬롬
2013-06-14 18:47:39 | 관리자
우리는 벧전3:19-20을 통해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의해 노아 시대에 죄를 지은 영들(천사들과 거인들)에게 가셔서 자신의 승리와 그들의 패배를 선언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214
그런데 곧바로 벧전4:6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와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벧전4:6에는 ‘죽어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 천주교를 포함해서 - 이 두 부분을 이용하여 사람이 죽은 뒤에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말씀 즉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히9:27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뒤에 또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벧전4장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는 이미 죄를 그쳤나니 2 그런즉 그는 자기 육체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 3 우리가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한 우상 숭배 속에서 걸어 이방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한 것이 우리 삶의 지나간 때로 우리에게 족하도다. 4 이 점에서 그들이 너희가 자기들과 함께 달음질하여 그처럼 극한 방탕에 이르지 아니함을 이상히 여기며 너희를 비방하나 5 그들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할 준비가 되신 분에게 회계 보고를 하리라. 6 이런 까닭에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1-2절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정욕을 떠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보여 줍니다. 3절은 과거의 우리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변하자 과거에 같이 지내던 불신 친구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봅니다. 그것이 4절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주님께 모든 것을 낱낱이 회계 보고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 모든 것을 회계 보고해야 하므로 -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여기의 ‘죽어 있는 자들’은 베드로 당시에 이미 죽어 있는 자들로서, 복음 선포를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살아 있을 때에는 5절이 이야기하듯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영으로는 살아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가장 명백한 해석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벧전4:6은 벧전3:19-20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문맥이 그렇게 말합니다.
샬롬
2013-06-08 15:47:09 | 관리자
요즘 저희 교회를 방문하시는 분들 가운데 안수 복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제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50세가 넘도록 교회를 다녔어도 안수 복음이라는 말은 처음 듣기에 그게 무어냐고 물으니 네이버 등에서 찾아보면 된다고 해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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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소식선교회(기소선) 박옥수 목사의 안수 복음의 정의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개역성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수 복음은 곧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세례 요한의 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원래 글에 세례라고 되어 있기에 일단 세례라고 썼지만 세례라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의 책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1, 영원한 속죄 편)에서 박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 세례를 베풀 때 머리에 안수를 합니까, 안 합니까? 합니다.
이 안수가 전 인류의 죄를 세례 요한이 대표해서 예수님께 넘기는 그 과정입니다.알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지요?"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왜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머리에 안수하고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니까 모든 죄가 예수님께로 건너갔습니까, 안 건너갔습니까?」(1권 218쪽).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에게 안수했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넘겨졌고, 예수님이 그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이었고요.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1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
세례 요한은 인간 중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 가장 큰 자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어른이며 대표자란 의미입니다((기쁜소식지 2001년 8월지. 김성훈)
여러분 모두 여자가 낳았지요. 여자도 여자가 낳았고, 남자도 여자가 낳았어요. 온 세상은 여자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인류의 대표자로 세워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인간 중에 제일 큰 자이고,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례 요한을 온 인류의 대표자로 세운 이유는 예수님에게 온 인류의 죄를 넘겨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이 하셔야 할 일은 마태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 이 두 분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복 받는 거는 너무 쉬운 것입니다. 이 두 분이 잘 돼야 저나 여러분이 잘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갈릴리 요단강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고 있는데, 예수님이 뚜벅뚜벅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요한이 궁금해 하는데 예수님이 요단강에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아, 내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왔다.” 하고 이야기를 하시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아, 이분이 죄 사함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된 그 예수님이시구나. 구원자시구나.” 그것을 세례 요한이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한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안수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야, 세례 요한아, 너 나한테 안수해.” 하니까 세례 요한이 깜짝 놀랐습니다.“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안수를 합니까? 내가 받아야지.” 근데 예수님이 이야기를 해주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짜 교만한 사람이구나.”“네가 내게 안수해야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는 말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봅시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이틀 전에 예수님에게 넘겨준 죄는 세상 죄입니다. 즉 이틀 전에 세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세상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할 때 세례 요한의 죄만 넘어갔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가 다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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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례자 요한이 인류의 대표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2. 침례자 요한이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에게 안수를 주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3. 그 안수에 의해 세상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4. 더욱이 예수님은 머리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온 몬이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안수했다는 주장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5. 침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 이방인들이 아니라 -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회개의 침례를 선포한 구약의 마지막 대언자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드러나야 하므로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노라, 하니라(요1:31).
6. 세상의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에게 전가되어 심지어 그분 자신이 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7. 침례자 요한의 안수가 없었으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기소선의 안수 복음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창조물인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개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데 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8. 침례자 요한이 안수함으로 모든 의를 이루었다는 것 역시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회개의 침례를 승인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복음으로 즉 다른 복음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다른 복음을 가져오는 자가 있고 그런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 8-9).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11:4).
이런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그런 구원이 과연 성경적인지 궁금합니다.
기소선을 세운 대표 목사의 성경 해석이 이 정도면 나머지는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한 사람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하기 시작하면 한 가지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신학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골병들어 고칠 수 없게 됨을 보여 줍니다. 즉, 오류는 오류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오류를 생산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실로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죄악입니다.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이 홀로 하신 일입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만의 하나라도 사람의 행위가 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 같은 사람을 높이는 안수 복음은 영원히 하나님께 저주받을 ‘다른 복음’입니다.
아, 이런 것을 복음으로 알고 그것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픕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탐구해야 이런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요5:39).
2013-06-07 14:41:30 | 관리자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남자와 결혼할까, 다른 사람과 할까?
이 직장으로 할까, 더 기다릴까?
무언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계시를 주실 줄로 생각하고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뜻을 알려주실까요?
"하나님이 이번에 인도하셨어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겠어요. 그분의 뜻을 알아보려고요.'
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그라미 안에 찍혀 있는 자그마한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가 가능한 거대한 강과도 같습니다.
그 가능성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백 혹은 수천 가지의 대안적 선택들이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빨간 색 글은 피터 블룸필드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http://itempage3.auction.co.kr/DetailView.aspx?ItemNo=A553518626&frm3=V2
성도님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필독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악순환에 들어가면
정상적인 믿음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하기 바랍니다.
이 책은 너무 좋은 내용을 좋은 예와 함께 잘 가르쳐 줍니다.
다음은 책의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맹목적 신앙이 문제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할 때 일어나는 주된 문제는 주관주의의 문제다. 사람의 지각과 주관적 경험들은 증명할 수 가 없다. 우리 자신의 내적인 경험을 우리는 입증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것을 반증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냥 경험일 뿐이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는 말이나 ‘내가 꿈을 꾸었다’는 말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두 가지 모두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누군가가 주장할 때 거기에는 신빙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왜 그 말을 믿어야 하는가? 객관적인 사실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맹목적 신앙일 뿐이다.
참 선지자들의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입증해 주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심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이 그 선지자들의 신분증이었다. 하나님이 그 위에다 인증 도장을 찍으셔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음을 분명히 하셨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셨다. 모세의 기적, 사도들의 기적,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은 그들이 전한 메시지를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표적들이 이제는 멈추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위대한 일들을 하시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의미의 ‘표적’이 아니다.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 전달자임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기적’이라는 단어가 흔히 오용되는 현상에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맹목적 신앙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잭과 질이라고 하는 두 교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번 상상해 보자.
잭 : 지난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어.
질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잭. 계시는 성경이 완성되면서 멈추었어.
잭 : 내가 직접 들은 말도 모르겠어? 네가 지금 나한테 말한 것처럼 확실하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니까.
질 : 잭, 네가 무언가를 경험하기는 한 것 같은데, 그건 잘못 해석한 거야.
잭 : 어떻게 네가 감히 나더러 틀렸다고 말할 수가 있어! 내가 안다니까! 나한테 일어난 일이라고! 어쩜 너는 그렇게 독단적일 수가 있니? 무슨 근거에서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건데?
질 :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과 정통 기독교 신학에 근거해서야.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 적이 있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완전하게 다 말씀하셨다고 했어. 역사적인 증거도 보았고, 성경적인 증거, 그리고 신학적인 증거도 다 보았어. 참교회는 언제나 지속되는 계시를 부인해 왔대. 지속되는 계시는 영지주의자나, 몬타누스파나, 신비가들이나 퀘이커들 같은 분파나 이교들이 하는 전형적인 주장이야.
잭 : 그것 참 안 됐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내게 말씀하셨고, 나는 무슨 이교를 믿는 게 아니거든!
질 : 좋아, 그렇다면 개신교 신조들이 어떤 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지 나한테 설명해 봐! 그리고 목사님이 어느 부분에서 성경을 잘못 해석했는지도 보여줘 봐. 왜냐하면 핵심적인 본문들을 예로 들어서 나를 납득시키셨거든. 목사님의 강해를 하나하나 짚어볼 테니까 어디에서 틀렸는지를 말해 봐.
잭 : 그게 바로 너의 문제야, 질. 너는 너무 지적이야. 너는 너무 논리적인 게 탈이라니까. 기독교는 원래 그렇게 교리적으로 정확한 게 아니야. 너는 성경이 마치 모든 행동과 견해의 최종적 판단자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성경을 대해. 마치 칼처럼 그것을 휘두른 다구! 긴장을 좀 풀고 그 책에만 머리를 박고 있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마음을 열어봐.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시게 해! 하나님이 네게 새로운 계시를 말씀하시게 해드려! 성경과 정통 신학의 역사로 나를 판단하는 일은 이제 그만둬. 모든 위대한 신조들과 신학자들이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상관 안 해. 그건 그 사람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니까.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는 거야.
질 : 그러니까, 잭, 네 말은 너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이 틀렸다는 거니? 그거 좀 걱정되니 않니?
잭 : 내가 걱정되는 건, 질 네가 너무 객관적이어서 하나님의 영을 거절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거야. 너는 객관적이고 문법적인 성경적 사실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열려’ 있지가 않아. 네게는 신앙이 파고들 여지가 없어.
질 : 나는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고 거기에서 제대로 추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믿어. 참된 신앙은 합리적이지 너처럼 맹목적이지가 않아. 잭, 너는 너의 감정과 경험이 네 신앙을 지배하게 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네가 지속되는 계시 같은 걸 믿는 거야. 잭, 내가 보기에 너는 신비주의자 같아. 네가 이미 논리적 추론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기 때문에 나는 너를 설득 할 수가 없어. 가장 유능한 사상가와 저자들이 네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너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 교회사에서 가장 학식 있는 종교 회의와 위원회가 네 견해가 틀렸다 해도 너는 그걸 대수롭게 여기지를 않아. 너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들여서 그들이 성경의 어느 부분을 잘못 해석했는지를 보여 주려고도 하지 않아. 너는 하나님이 너한테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확신 때문에 교만해져서 경건을 가장하는 거만한 태도로 식견 있는 교회를 깔보고 있어. 그들이 네 입장이라면, 하나님이 너한테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말씀하셨다면 이해할 거라는 생각으로 너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어. 너는 속으로 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겠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짐작하다시피 대화는 이렇게 끝도 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모든 논쟁을 아주 빨리 끝내 줄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질에게는 있다.
잭 : 지난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어.
질 : 나는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는데, 네가 그 말을 할 거라고 하셨어. 하지만 네 말을 믿지 말라고 하셨어. 그런 적이 없다고.
불에는 불로 맞서라! 주관적인 허튼 소리는 더한 허튼 소리로 맞서라.
이제 잭은 자신이 촉발시킨 것과 비슷한 종류의 신비주의적 주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질의 주장을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 질은 잭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맹목적 신앙’의 반응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에 잭이 질이 받은 ‘계시’를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잭은 질에게도 그가 받은 ‘계시’를 부인 할 권리가 있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2013-06-05 17:53:54 | 관리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학창시절 도덕책에서 본 기억이 있어 찾아 보니 있네요.
추억이 되 살아나 덧글을 달아 봅니다.
미국 청도교시절 시절,
사형선고를 받은 한 젊은이에게
형이 집행되는날이었어, 집행관이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느냐고 물었는데 사형수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한 번만 뵙고 인사를 드리고 오면
안 되느냐고 간청을 했어, 집행관들도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행여 도망가면
누가 그 책임을 지겠어,
그때 사형수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와 있던 고향 친구가 사형대 앞으로 나왔어,
이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제가 사형대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집행관이 놀라서 물었어,
친구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자네가 대신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럴수 있나?
친구는 조금도 불안한 기색 없이 서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래서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사형대를 지키게 되었다.
친구가 돌아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돼 가고 있었어,
하지만 어머니를 보러간 친구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바보 같은 놈"
형 집행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자 집행관이 불쌍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어, 이젠 네가 대신 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느냐?
내 친구는 분명 올 것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늦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 친구가 도착하면 꼭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친구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갔다고 말입니다
드라마처럼 형 집행을 바로 눈앞에 두고 친구가 나타났어,
옷은 찢어지고 신발도 벗겨진 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기어오다 시피 도착했어,
사형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어,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 외나무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와서 다리가 떠내려 가버렸다는 거야,
할 수 없이 물속에 뛰어들어 헤엄쳐 오느라고 시간이 오래걸렸대.
나 대신 목숨을 내줄 수 있는 친구가 당신에게는 있는가?
나를 대신해 사형대를 지켜줄 만큼은 아니어도 답답할 때
소통이 되고 만나기만 해도 힘이 되는 친구가
당신에게는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 까지...
2013-06-05 16:05:18 | 허광무
대신 죽은 윌리 리어(Willie Lear the Substitute)
위틀 소령(Major D. W. Whittle) 아무에게도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노라(요한복음 15장 13절). 윌리 리어는 미국 미주리 주 팔미라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1862년에 그는 열여덟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때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는 때였고, 그는 그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남부를 지지하였습니다. 북부의 세력은 팔미라 도시를 점령하고 그 구역을 지배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양쪽 세력 모두 끔찍한 폭동들을 행하였고 도덕적으로 용납 할 수 없는 일들이 역사에 수두룩이 기록되었습니다. 북군들은 총에 맞아 쓰러져 나가곤 했습니다. 또 집에서 쫓겨나 부당한 일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복수하고 적들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북부의 지휘관은 많은 시민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잡힌 시민들은 군법회의 재판에서 게릴라 부대라는 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리어도 그중에 한 명이였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린 뒤 장군은 총살형을 받은 사람 중 열 명을 뽑았고, 나머지 시민들은 폭동이 그친 후 사면이나 추후 형벌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즉시 사형 받을 이 열 명은 제비뽑기로 뽑혔는데 다행히 리어는 거기에 들지 많았습니다. 하지만 리어의 이웃은 즉시 총살형을 받을 무리의 한명으로 뽑혔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이웃은 대가족의 가난한 가장이었는데 사형된 뒤 두고 떠날 처자식들 걱정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이웃의 상황을 지켜본 리어는 마음에 부담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리어는 자기가 그 이웃을 대신하겠다고 장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장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열 명을 뽑으라는 명령이 내려졌기에 열 명이라는 조건만 맞으면 법률상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 대신 대리자가 되어 죽겠다는 제의를 너무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삼 자 즉 사형 선고를 내린 자와 선고 받은 자 그리고 선고받은 사람을 대신하는 대리자가 동의함으로 이 상황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자신의 이웃 대신 사형장에 나선 리어는 사형 선고를 받은 나머지 아홉 명과 함께 “발사!” 라는 외침과 더불어 소총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리어가 흘린 피, 그리고 찢기고 망가진 그의 몸을 안으며 리어가 대신 죽어 준 그 이웃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친 그 사람, 그 사람에게 내 생명을 빚졌구나. 나를 위해 이 엄청난 일을 해 준 그 사람에게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할까!” 라고 생각했을까요? 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에게 떨어진 사형을 모면하였나요?” 라고 그에게 물어본다면, 과연 그는 대신 죽겠다는 사람의 제의를 수용할 때에 자기가 행한 멋진 일들이 더 중요했다고 자랑하면서 그 사람이 행한 일을 무시하고자 했을까요? 또는 “아, 나는 나의 믿음과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의지로 인해서 살아남았어요. 이 모든 것이 믿음과 나의 인격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지요.” 라고 대답하고자 했을까요?
만약에 자기를 대신하여 죽은 그 대리자의 값진 희생을 생략한 채 대답을 한다면, 그는 대신 죽어 줄 가치도 없는 배은망덕한,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그 사건은 그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웃은 결코 그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친구의 희생을 그렇게 무심히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친히 달리심으로 살려 주신 사람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무심히 그리스도를 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를 위해 대신 죽은 것이 자기를 살렸다는 소식을 쉬지 않고 퍼뜨리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독자여,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대신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고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였으므로 당신의 모든 죄들이 용서된 것을 믿습니까? 그분을 믿으면서 당신은 그분을 시인하고 그분을 섬기는 삶을 삶으로써 그분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오, 그리스도의 소유인 우리는 그분의 피로 인한 구속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결코 싫증을 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죄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시요, 구속자이신 그분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떼놓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이루신 ‘대신 속죄의 죽음’ 이외의 ‘다른 복음’ 혹은 ‘복음의 다른 형태’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권능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와 그분의 피 즉 ‘죄들의 사면을 위하여 그분께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은 분’입니다.
22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24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로 돌아왔느니라(벧전2:22-25).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느니라(요10:11).
Taken from Gospel tract distributed by Pilgrim Tract Society, Randleman, N.C.
By Major D.W. Whittle
초역: 정아현
2013-06-05 14:04:44 | 관리자
아침에 제 아내가 읽으라고 준 글입니다.
도전이 되는 말씀이라 같이 공유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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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미로에서 뒤틀린 목회자의 영성
(목회와 신학, 2004년 7월호)- 박영돈(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영성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마 목회자일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영성을 소유하기가 가장 힘든 사람 역시 목회자이다. 이것이 목회자가 처한 영적 딜레마이다.
최근 영성의 붐이 일어나면서 목회자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목회자의 영성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부족한 듯하다. 영성 추구에 있어서 목회자만이 갖는 어려움과 위기가 무엇인지를 바로 직시하고 올바로 대처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것이다.
욕망의 위력
러브호텔이 전 국토의 구석구석에 창궐했다. 신도시에까지 무섭게 번져가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의 시위가 연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공권력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다음과 같이 예리한 분석을 하였다.
행정력뿐 아니라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해도 러브를 막을 수 없다
종교나 교육의 힘도 러브 앞에서는 무력해 보인다. ‘종말이 가까워 왔다’고 겁주어서 될 일도 아니다. 욕망에는 종말이 없고, 욕망에는 회개가 없다.” 이 말은 욕망의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통제할 수 없는 마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 안에 이보다 더 큰 활력은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이성으로 육신의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자유롭고 고상한 존재인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의 역작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인간은 이성보다 육적인 욕망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더욱 사실적인 인간 이해라고 분석했다. 니체나 프로이드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은 이성보다 그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 성적 욕망, 물질에 대한 욕망에 의해 더 은밀히 자극되고 주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을 이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또는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활용한다. 이성이 욕망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육도 권력과 물질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권력의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세속적 욕망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위장되고 합리화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종교이다. 성스러운 명분과 슬로건 아래 속된 욕망이 흉측스럽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감쪽같이 은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 종교로 겉포장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은밀히 결합하여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평안, 세상에서의 형통함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되기 쉽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에 여실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축복 신학, 번영 신학, 성공주의 메시지가 이를 부추기는 동시에 합리화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열심히 추구하는 성령운동은 영적인 에너지와 힘을 끌어당겨 이기적 자기실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욕망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목회자의 세속적 야망이 교인들의 그런 욕심과 하나로 맞물려 대형화와 물량주의, 성장제일주의의 폐단을 불러왔다. 한국사회가 온통 물질과 권력과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휘청거리고 있는데, 세상을 헛된 욕심에서 해방시켜야 할 책무를 띤 교회마저 그 욕망의 광적 질주에 합세하고 있는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대는 성속이 함께 뒤엉켜 품어내는 욕망의 열기로 가득한 정욕의 분화구와 같은 모습을 방불케 한다. 한국교회의 세속화 문제는 심층적 분석을 요한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교인들의 ‘욕망의 세속화’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성령의 소욕으로 교묘히 위장된 육신의 소욕 - 힘과 성공과 명예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성직을 수행하고 영적인 일을 해온 것이 한국교회의 신앙과 영성을 세속에 오염시켜 혼탁하게 하고 뒤틀리게 하는 근본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적 명분으로 가려진 육적 욕망
욕심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며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육적인 욕심은 영안을 멀게 하여 영적 분별력을 둔화시킨다. 그래서 신자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수록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기가 힘들어진다. 더욱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 거룩한 일을 하는 성직자의 경우에 있어서 이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육신의 간교함이 성스러운 명분으로 인해 보강되고 이중적으로 위장되면 그 ‘미혹의 힘’은 배가 되어 영적 분별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이기적 욕망을 따라 목회하는 이들이 자신의 영적인 진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기가 가장 힘들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투철한 명분론에 빠져서 자신이 그런 줄로 착각하며 그러한 구호를 더욱 힘차게 외치곤 한다.
그러나 존 오웬(John Owen)이 지적했듯이, 육신의 세력은 “가장 잘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가장 강력하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영적 문제는 자신 안에 얼마나 육신이 강하게 역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힐라리(Hilary)가 말한 “하나님을 위한 불경건한 열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신성 모독적인 열망”을 부단히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이 얼마나 자신의 영광과 명성과 성공에 대한 욕망에서 자극될 수 있는지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고 싶은 갈망은 자신이 경배를 받고 싶은 마귀적 욕망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에 대한 욕망은 곧 자기숭배의 열망이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를 숭배하는 무서운 죄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곳이다.
목회자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은밀히 자신의 이름 내기, 업적 쌓기와 명성 얻기에 집착하게 될 때 이런 위험은 극대화 된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자기중심적인 문화는 목회자의 이런 이기적 야망을 부추기고 고조시킨다. 목회자마저 자기도 모르게 성공지향적인 경쟁사회의 논리와 가치관에 젖어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되어가기 쉽다.
또한 교회 성장은 수적 증가라는 가시적인 증거로 나타나야한다는 인식이 교인들 안에 보편화되면서 목사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스트레스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성장을 추구한다.
‘교인수가 목사의 계급장’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생길 정도로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회성공의 척도라는 은연중의 암시가 교계 안에 편만하게 되면서, 이것이 젊은 목회자들 안에 무서운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성공 마니아’를 배태하였다.
사무엘 리마(Samuel Rima)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다.
나는 노골적으로 영적인 스타의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내 모든 사역의 은밀한 동기가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완벽하게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수년 동안 나의 사역의 노력은 미묘하게 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에 의해 운전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천국의 언어로 그러한 의도를 위장했고, 나와 함께 사역한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비슷한 성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양적 팽창과 대형화를 위한 열심이 영적 명분으로 포장된 목회자들의 세속적 욕망에서 상당부분 자극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복음 전파라는 미명으로 섬긴 우상, 교회성장”이라는 손봉호 교수의 비판은 교회성장을 위한 과도한 열심 속에 감추어진 목회자들의 헛된 욕망을 간파한데서 나온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하겠다.
헛된 욕망의 열매들
이러한 목회자의 육적인 욕망은 그의 인격과 영성, 그리고 모든 사역을 부패하게 한다. 목회자가 개인적인 야망에 이끌려 목회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인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도구들로 은밀히 이용하려는 것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사람들을 “너”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세상에 보편화된 인간관계임을 지적했는데, 목회자가 이런 세속적인 원리를 따라 교회를 운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변질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사람과 인격 중심의 목회가 아니라 일과 업적 중심의 목회로 치우친다.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동기를 감추고 교묘한 수법으로 교인들을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감쪽같이 위장해 교인들이 그 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사실은 그들이 내 뜻을 행하여, 내가 영광을 받는데도 말이다.
육신을 따르는 목회자는 교인들의 에너지와 자원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 그들의 신앙인격 성숙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목회자의 성공적인 업적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도록 교묘히 유도한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거대한 건물 건축과 숫자 늘이기 전도와 프로그램 확장에 그 힘을 소진하게 한다.
또한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은 목회자 자신의 인격과 기도와 영성에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의 기도는 순수성을 잃어버린다. 겸손과 거룩함을 구하는 기도마저도 경건 자체보다 경건의 유익과 명성에 더 집착하는 육적인 마음에서 촉발된다.
야고보는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는데(약 4:3), 육적인 목회자의 기도가 많은 경우에 이런 기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미명으로 치장된 ‘목회자의 은밀한 종교적 정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때로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이기적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그의 기도를 기뻐하셔서가 아니라, 그가 섬기는 교인들과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그것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줄 알고 거룩한 성령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동력으로 이용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런 욕망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기도가 더욱 간절해진다.
기도라는 욕망의 탱크로 천국을 침노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적 보화들을 자신의 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육적인 목회자에게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패한 인간의 육신을 섬기는 ‘색욕거리’로 변질된다.
육적인 소욕을 따르는 목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목회자의 영성이 현저히 퇴화된다는 것이다. 육적인 욕망은 목회자를 영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역기능을 발휘한다. 목회자를 지치고 탈진하게 하며 영적인 고갈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는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공허하며, 말씀을 전하고 나서도 마음에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죄에 대한 저항력은 약화되고 유혹에 대한 면역은 저하되어 특별히 자극적인 죄, 음란과 같은 죄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기적 야망과 음란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욕심이 많고 이기적 야심이 클수록 음욕이 커진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목회하는 이는 결국 여러 가지 부도덕하고 음란한 죄에 연루되기 십상이다.
슈네이즈(Robert Schnase)가 지적했듯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목회자 자신들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대다수의 비극은 목회자의 타락한 욕망에서 초래한 것들이다.”
참 자아를 잃은 목회자
또 다른 치명적인 결과는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이 진정한 자아형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점이다. 목회자가 육적소욕을 따라 사역하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모든 정신적인 힘과 영적인 에너지가 자기중심적 추구를 위해 소모된다. 그래서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세계는 황폐해진다. 목회자가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자아중심적인 뜻과 욕망을 좇을 때 그의 내면세계는 그 안에 계신 성령과 날카로운 긴장과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부여하는 풍성한 영적 생명력의 공급이 차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가는데 필요한 영적자원이 고갈된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화는 진행되지 않고, 성령의 열매도 산출되지 않는다. 결국 목회의 은사는 있을지라도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사가 된다. 그래서 뛰어난 설교의 은사는 있지만 좋은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회자가 될 수 있다.
설교와 영성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영성을 소유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설교의 은사가 남다르게 뛰어날수록 그 은사의 탁월함과 위력 때문에 더 고차원적으로 자신을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가장할 수 있는 위험이 커진다.
물론 영성과 설교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온 말씀이 감동적이고 은혜롭다. 이렇게 영성과 설교는 함께 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목회자의 죄성 때문에 이것이 괴리되는 변칙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의 진정한 영성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설교의 은사가 아니라 인격의 열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인격만을 중시한 나머지 은사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목회자의 참된 영성을 위해서는 인격의 열매와 설교의 은사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영적 성숙과 성화의 진전은 은사와 열매의 상호작용과 연합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목사가 설교의 은사를 성령의 소욕을 따라 겸손히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역을 위해 활용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랑의 인격자로 성숙한다.
반면에 설교의 은사를 육신의 소욕, 즉 이기적 야망을 따라 사용하면 그 은사는 영적성숙에 기여하는 성화론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열매로 귀결되지 못하는 은사로 전락한다. 결국 목회자의 육신적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은혜가 자신의 인격개발과 자아성숙에 사용될 수 없게 한다.
육신적 목회자는 성화보다 사역과 업적성취를 위해 성령의 은혜를 더 열심히 구한다. 강단 위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강단 밑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그렇게 원치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의 참된 영성은 강단 밑에서의 그의 모습에서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은사와 열매, 사역과 성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으면 목회자의 진정한 자아 성숙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 문제가 있고,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에게 가식의 무거운 짐이 가중된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자신을 좀 더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교인들이 기대하는 목회자 상에 자신을 맞추거나, 자신이 가장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아내려고 힘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인격과 욕망을 숨기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이려 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그가 애써 창출해낸 경건의 모습은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한 자율성과 창의성이 결여 되었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되고 가식적이다.
목회자가 이런 가식에 익숙해져서 점차 자신의 외양을 실제로 착각하여 가면을 참 자아와 동일시하게 되면 진정한 자아를 상실할 위기에 봉착한다. 그의 열심과 헌신은 그 가면을 보강하여 참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기 더욱 힘들게 하고, 이렇게 종교적인 가면으로 완고해진 자아는 깨어지기가 가장 힘들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서
그러므로 목회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살펴보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개혁주의 목사」에서 목회자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임무는 자기성찰이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지금은 이 고전적 영성훈련의 부활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목회자들이 외적 성취에 너무 분주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볼만한 여유가 없다. 자신 안에 깊은 마음의 동기와 욕망을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매우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흉한 “파충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욕망의 용솟음침을 예민하고 솔직하게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을 최대한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대개 점검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주관된다. 자신 안에 측량할 수 없이 간교하고 거짓된 육신의 소욕이 무섭게 역사하며, 이를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통절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이 욕망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자신 안의 욕망의 움직임, 은밀한 동기의 복합성을 판독할 수 있는 예리한 영적 투시력을 갖는 것이 목회자의 영성 계발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시편기자와 같이 “나를 살피소서”라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가, 무엇이 나를 어떤 일에 매진하도록 몰아가는가, 내 마음이 지속적으로 애착하며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구할 때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 은혜를 구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정규적으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이 일을 과연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 자신을 항상 정직하게 돌아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목회자 안에는 항상 개인적인 야망과 주님을 위한 열망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하며,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 맹렬한 싸움이 계속된다. 목회자의 심령이 가장 격렬한 영적 전쟁터일 것이다.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총동원하여 공격하며, 그의 탁월한 위장술로 목회자를 미혹해 자신의 욕망, 즉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주의 일을 하게 한다.
교회의 영적 성쇠는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 목회자가 육신의 소욕에 굴복해서 마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때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는 시작된다. 역으로 목회자가 육신을 쳐서 복종시킬 때 그의 영혼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온 교회에 풍성한 생명력을 공급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가 살면 교회가 죽고 목사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먼저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기적 욕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 하에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우상들, 성공과 명예와 인기라는 우상들을 쳐부수는 것이다. 칼빈이 강조했듯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목회자가 자아 중심성을 포기할 때 그의 자아는 내면세계에 거하시는 성령께 다시 사로잡힘으로써 좁은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큰 자아, 하나님께 지배받는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거짓된 외면을 계속 지탱하기 위해 허비했던 영적 에너지를 성령 안에서 참된 자아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욕망으로의 초대
이기적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은 결코 욕망 자체를 아예 죽이거나 그것을 최소한도로 억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기적 욕심이 많은 것뿐 아니라 욕망이 없거나 적은 것도 영성의 무서운 적이다. 이기적 동기부여가 없으면 도무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자극되지 않는 영적 냉담함과 나태는 거짓된 육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육신적인 목회자는 자신에게 크게 성공할 만한 잠재력과 은사가 없거나 그럴만한 현실적 가능성이 희박하면 성공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리고 현 상태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진다.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잘 개발하여 성공과 명성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야망에 사로잡힐 확률이 높은 반면, 설교의 은사가 그다지 탁월하지 못한 이들은 그런 야망이 없는 대신 말씀사역에 성의와 열정 없이 임하는 적당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이와 같이 육신적인 욕망으로 주의 일을 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열정을 의무감으로 죽이고 직업적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목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큰 문제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육적인 욕망을 비운 마음의 공백을 새로운 욕망, 더 강하고 고귀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결코 욕망을 죽이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욕망으로 초대하며, 우리 안에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기독교는 성공을 위한 욕망과 훌륭한 업적을 이루려는 열심 자체를 본질적으로 죄악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원대한 꿈과 포부와 비전을 갖게 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갱신하는 사역은 먼저 우리 마음의 깊은 욕망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우리 마음의 근본적 지향성, 추구, 애착이 획기적으로 전환되게 하신다. 육신의 일에 집착하고 몰두했던 생각이 성령의 일에 집중되고 이끌리게 하신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소생시키신다. 이기적인 욕망은 소멸되고 거룩한 열망이 타오르게 하신다. 이런 거룩한 욕망이 없이 성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마음의 성결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함은 우리의 욕망이 오직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만 온전히 집중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영적 성숙이 없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두 방향으로 나누이기 때문이다.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이렇게 분열되어 통합된 욕망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마음이 다시 하나로 모아져 하나님의 뜻만을 “전심”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자유함이며, 이러한 자유함 속에서만 성화와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거룩한 욕망이 참된 영성의 핵심이다. 이 욕망이 영성의 질을 결정하며, 그 강도가 영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이런 욕망 없이 성령을 따라 살 수 없으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 또한 이런 욕망 없이는 진정한 기도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위대한 일도 성취할 수 없다. 교회사에 길이 빛날 신앙의 본과 자취를 남긴 주의 종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불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욕망을 죽이는 것은 영적 자살행위이며 영적인 거장이 되게 하는 원동력을 말살해 버리는 것이다. 이 욕망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죄에 대한 사랑이 그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되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진정한 영성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욕망은 주님께 최상의 존귀함과 영광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My Utmost for His Highest)다하려는 열정이며, 주님을 본받아 최대한 성결하게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 성공한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은 잊혀 질 때 행복해하는 주의 종이 되기를 전심으로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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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11:15:43 | 관리자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관한 66가지 사실
1. 잃어버린 자(that which was lost)[눅19:10]2. 길 잃은 양(sheep going astray)[벧전2:25]3.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자(without God in the world)[엡2:12]4. 멀리 떨어져 있는 자(who were far off)[엡2:13,17; 골1:21]5. 그리스도 밖에 있음(ye were without Christ)[엡2:12]6.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were not a people of God)[벧전2:10]7. 이스라엘 공영권 밖에 있는 외인(being aliens from the commonwealth of Israel)[엡2:12]8. 육체로는 이방인(Gentiles in the flesh)[엡2:11]9. 무할례자(Uncircumcision)[엡2:11]10.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낯선 자(strangers from the covenants of promise)[엡2:12]11. 하나님의 왕국에 대하여는 외국인(foreigners)[엡2:19]12. 나면서부터 길을 잃고 거짓을 말함(they go astray as soon as they be born, speaking lies)[시58:3]13.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every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창6:5]14. 그의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함(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desperately wicked.)[렘17:9]15. 마음속에서 악을 행하기로 완전히 작정되어 있음(the heart of the sons of men is fully set in them to do evil)[전8:11]16. 불순종함(disobedient)[딛3:3]17.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음(ye walked according to the course of this world)[엡2:2]18. 이방인들의 뜻을 따라 행함(have wrought the will of the Gentiles)[벧전 4:3]19. 육신의 생각과 욕망을 성취함(fulfilling the desires of the flesh and of the mind)[엡2:3]20. 정욕과 향락을 섬김(serving divers lusts and pleasures)[딛3:3]21.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한 우상숭배 가운데 살고 있음(walked in lasciviousness, lusts, excess of wine, revellings, banquetings, and abominable idolatries)[벧전4:3]22. 악의와 시기 속에 살고 있음(living in malice and envy)[딛3:3]23. 증오에 가득 차서 서로 미워하고 있음(hateful, and hating one another)[딛3:3]24.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함(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요3:19]25. 사실 그 자신이 ‘어두움’임(darkness)[엡5:8]26.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마귀)를 따름(according to 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엡2:2]27.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가려서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음(the god of this world hath blinded the minds of them which believe not, lest the light of the glorious gospel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should shine unto them)[고후4:4]28. 속임을 당함(deceived)[딛3:3]29. 십자가를 선포함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임(the preaching of the cross is to them that perish foolishness.)[고전1:18]30. 어리석음(foolish)[딛3:3]31.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듦(he that believeth not God hath made him a liar)[요일5:10]32. 본성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고전2:14]33.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are of the works of the law)[갈3:10]34. 그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와 같음(all our righteousnesses are as filthy rags)[사64:6]35.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거하지 않음(ye have not his word abiding in you)[요5:38]36.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지 아니함(he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고전2:14]37. 그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함(the carnal mind is enmity against God)[롬8:7]38.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음(they that are in the flesh cannot please God)[롬8:8]39.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롬3:23]40.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음(the wrath of God abides on him)[요3:36]41.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음(like the chaff which the wind driveth away)[시1:4]42. 사악한 행위들로 인해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enemies in your mind by wicked works)[골:21; 롬5:10]43. 정죄를 받을 것임(he that believeth not shall be damned)[막16:16]44. 사실 그는 이미 정죄 받음(he that believeth not is condemned already)[요3:17-18]45. 저주받은 자(under the curse)[갈3:10]46. 멸망하는 자(them that perish)[고전1:18]47. 마귀의 자녀(the children of the devil)[요일3:10]48. 진노의 자녀(were by nature the children of wrath)[엡2:3]49. 진노의 그릇(the vessels of wrath)[롬9:22]50.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지 못함(had not obtained mercy)[벧전2:10]51. 자기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임(ye shall die in your sins)[요8:24]52. 그는 허물과 죄들 가운데 이미 죽어 있음(who were dead in trespasses and sins)[엡2:1]53. 이름이 생명책에 없음(whosoever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계20:15]54. 생명을 보지 못할 것임(he shall not see life)[요3:36]55. 불 호수에 던져질 것임(cast into the lake of fire)[계20:15]56.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는 자(having no hope)[엡2:12]
그러나…
57.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God so loved the world)[요3:16; 롬5:8]58.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구원자를 준비하셨음(he gave his only begotten Son)[요일2:2]59. 그의 죄는 용서될 수 있음(through his name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all receive remission of sins)[엡1:7; 행10:43]60. 그러나 그는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음(not of works)[엡2:9]61. 그는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엡2:8]62. 그는 믿지 않는 분을 부를 수 없음(how then shall they call on him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롬10:14]63. 그는 듣지 못한 분을 믿을 수 없음(how shall they believe in him of whom they have not heard?)[롬10:14]64. 그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음(In whom ye also trusted, after that ye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엡1:13]65.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구원자로 믿기 전까지는 다시 태어날 수 없음(whosoever believeth that Jesus is the Christ is born of God)[요일5:1]66. 이 죄인들의 이름은 ‘누구든지’임(whosoever)[요3:16, 행10:43]
2013-06-04 18:16:3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