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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핵심   구원론을 가르치면서 매년 저는 학생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는 불신자를 방문하기 위해 병원에 와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단 스물다섯 단어를 말해서 복음을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스물다섯째 단어가 끝나면 그 환자는 죽게 됩니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 것입니까? 과연 학생들은 이처럼 복음을 간결하게 표현함으로써 숨이 끊어져가는 그 사람이 올바로 반응하기만 한다면 구원받게 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학생들은 복음을 완전히 이해해서 그렇게 짧은 몇 마디 안에 구원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도 학생들이 풀어야 했던 그 문제로 돌아가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16:15). 그렇다면 이제 다음의 세 가지 사항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첫째, 복음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둘째, 복음은 무엇인가? 셋째, 우리가 어떻게 그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1. 복음이 아닌 것들 1.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회의에서 “복음은 언제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에 참여할 책임을 포함하며 인간의 전체성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고발할 의무를 포함한다.” 라고 선언하였습니다(「Christianity Today」, 1972년 1월 2일, p.12).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수년 전 복음전도자인 포드(Leighton Ford)는 아이오와 주의 데모인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두 발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드가 전하는 복음은 WCC의 입장과 흡사한 것으로, 복음은 개인의 구원 뿐 아니라 사회의 구원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2. 미국의 수정 교회를 담당하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수치에서 영광으로, 자기 회의와 자기 정죄로부터 자기 확신과 자기 긍정으로 나가는 구원 메시지로 선포되어야 한다.” 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슐러는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기 존중의 신학으로 선포될 수 있다.” 라고 주장합니다(「자기 존중: 새로운 종교개혁」(Self-Esteem: The New Reformation) p.161, 47).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3. 캘리포니아의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를 담당하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자신의 논쟁적인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갈보리로 초청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대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신다’(Lordship)는 전제 하에서 제자가 되도록 초청하는 것이다(p.21)…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은 제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부르심이었다(p.21)…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의 본질은 자아를 철저히 포기하는 것과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p.15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2.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Gospel)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은 ‘좋은 소식’(good news)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무엇에 관한 좋은 소식인가?” 라는 물음이 뒤따릅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이라는 용어를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은 사람들에 관한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6절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의 흔들림 없는 믿음에 대한 ‘좋은 소식’ 즉 글자 그대로 ‘가스펠’(gospel)을 가져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2. 신약성경은 더 나아가서 ‘왕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주로 ‘왕국의 복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마3:1-2; 4:17; 10:5-7 등). 이것은 메시아가 유대 땅에 오셔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로부터 땅에 임하는 그 왕국에 대한 그분의 참된 제안을 공적으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왕국의 복음은 천년왕국 곧 다윗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의 7년 환난기에 다시 한 번 온 세상에 선포될 것입니다(마24:14). 3.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의 셋째 용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Gospel of the grace of God)입니다(행20:24). 이 복음은 서신서들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습니다.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바울이 선포한 복음 즉 모든 신자들이 선포해야 할 복음은 무엇입니까? 어느 저자가 간결하게 표현했듯이 ‘좋은 소식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다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복음전도: 성경적 접근」(Evangelism: A Biblical Approach), Cocoris, p.60).   라이리(C. Ryrie)는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 나오는 복음의 요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유익한 분석을 했습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분께서 죽으셨고 그분께서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묻힌 사실은 그분의 죽음이 사실임을 입증한다…그분께서는 실제로 죽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해서 죽으셨다…부활의 증인들의 목록은 그분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한다(「이토록 큰 구원」(So Great Salvation) p.39). 그렇다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 즉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분께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이 복음에서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제안하십니다. 죄인은 단순히 이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행16:31). 그러면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그것에 속한 모든 복을 값없이 허락해 주십니다(엡1:3).   3. 어떻게 복음을 소개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죄인의 구원에 있어서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WCC나 포드(Leighton Ford)처럼 복음을 ‘죄인을 대속하는 구원의 복음’과 ‘사회를 개혁하는 사회복음’으로 나눠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슐러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개념을 복음으로부터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맥아더처럼 구원과 성화를 혼동하고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신다’(Lordship of Christ)는 사실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제 제가 학생들에게 제시했던 신학적 물음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이 질문은 원래 라이리 박사의 신학 과목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똑똑한 몇몇 학생들은 보통 이 물음의 대답으로 스물다섯 단어로 표현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인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에는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질문은 자신의 말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답을 제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은 좋은 대답이긴 하지만 썩 훌륭한 대답은 아닙니다. 이 대답에서 부족한 것은 명확한 복음 제시에 필요한 요소들 중 첫째 요소입니다.  완전하면서도 간결하게 복음을 제시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의 문제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예비이며 셋째는 개인의 구원 획득입니다. 첫째로, 사람의 문제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길을 잃고 헤매며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하신 것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나쁜 소식’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고 자기 자신의 공로나 행위로는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들로 인한 형벌을 자기 위에 몸소 짊어진 ‘죄인들의 대속 헌물’이십니다. 여기서 대속(代贖)이란 대신 속죄를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음을 아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히2:9). 하지만 그 구원자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결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인은 개인적으로 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모두에게 값없이 제시된 구원의 선물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 제시에 필요한 이 세 가지 기본 요소에 비추어서 학생들의 답안지를 분석한 후에 저는 ‘사람의 문제’와 ‘하나님의 예비’와 ‘개인적인 획득’을 모두 포함시키면서 어떻게 스물다섯 단어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지 학생들에게 보여 줍니다.   친구여,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오직 그분만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을 영원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금 그분을 신뢰하기 바랍니다.Friend: You have sinned. But Christ died for sinners and rose again. Trust Him alone and He will save you eternally. Do it now! 간략하지만 이것은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제시할 때 마땅히 포함해야 할 내용과 초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진정 복음을 알고 있습니까? 명확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신학 교육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앤더슨 경(Sir Robert Anderson)은 복음의 증언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고 복음 사역을 맡기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바는 그들이 세련되고 잘 교육받은 신사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천박하거나 무식한 촌뜨기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신학 교리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무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재기 넘치는 사람이거나 웅변에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예 소질이 없거나 지루하고 따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분께서 찾는 사람은 단지 그리스도의 권능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도구 곧 그분께서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자신의 보화를 채워 넣을 수 있는 빈 질그릇이다(「복음과 복음사역」(The Gosple and Its Ministry), p.6-7). 우리의 책임은 모든 창조물에게 구원자를 알려주고 죄들의 용서와 평화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또 이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일을 날마다 더욱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신실하게 반응할 때 우리는 구원을 선포하는 일에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부어주실 것과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그 일을 형통하게 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3-06-03 15:27:16 | 관리자
성경에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진리에 무엇이 부족해서 칼빈의 독선적 가르침을 따른단 말입니까? 신학을 10년이 넘게 공부하며 바다를 건너가 박사과정까지 마치고도 이 위대한 편집광이자 천재적 이론가에게 진리를 양보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허다합니다. 위의 글을 읽고 그 집요한 가르침의 족쇄를 풀고 나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늘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광명한 태양처럼 빛나는 진리가 담긴 귀한 글을 이 아침에 만나게 해 주심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3-05-28 08:15:35 | 김대용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명만이 하나님을 섬기게 될지라도 국가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겁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보장이 되어야 합니다.
2013-05-27 22:58:28 | 길준남
다음의 글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www.keepbible.com/Pds1-5/View/3oZ?stype=snc&keyword=%EB%8B%A4%EB%A5%B8%20%EC%9D%98%EA%B2%AC%EC%9D%84%20%EA%B0%80%EC%A7%88%20%EA%B6%8C%EB%A6%AC   중세 카톨릭 교회의 독재를 벗어나고자 했던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라는, 천주교 교황보다 더 완고하고 무서운 사람의 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죽어가야 했습니다. 칼빈은 이 모든 흉악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행하였으며 이런 신정국가 독재주의의 근본 원리를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아 놓았습니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권한을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관리하고 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감행할 권한이 있고, 이 세계의 위인이나 모든 권력자를 강요하여 하나님의 권위 앞에 머리 숙여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들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법령을 세울 수 있고, 사탄의 왕국을 쳐부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양들을 보살피고 늑대를 절멸시켜야 하며, 복종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반항하는 자들을 고소하고 절멸시킬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결합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으며, 번개와 천둥을 내리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 제네바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 이 시간 한국의 교회들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심지어 국내외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에서도 칼빈과 같은 독재자가 종종 생깁니다. 이런 목사들은 모두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면 교회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킹제임스 성경이 옳고 우리의 교리가 옳아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욕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런 일을 미워하셨습니다.   목사들이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혹시라도 성도들을 압제하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다음은 칼빈에 대한 그 당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평입니다. 아무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교도 신앙이니 개혁주의니 하는 것을 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칼빈이라는 무서운 독재자의 사상을 그대로 지키려는 자들이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보다 더 무서웠던 칼빈의 제네바 철권통치의 실상이 국내 성도들에게 자세히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다시는 이런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독재는 실로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역사는 잘 보여 줍니다.   샬롬   ---------------칼빈은 타고난 질서의 인간이었다. 불규칙한 것, 체계 없는 것은 수학적으로 정확한 그의 천성에 모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새로운 신앙에 알맞도록 훈련시키려고 한다면, 우선 그들에게 무엇을 믿고 고백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상의 왕국처럼 모든 정신의 왕국도 눈에 보이는 경계선과 법칙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석 달이 지나자 벌써 <교리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기본 원칙들을 21개 조항으로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이 <교리문답서>―어느 정도는 개신교의 십계명으로서―는 시의회로부터 원칙적인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단순한 동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점도 벗어남이 없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교리를 형식화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따를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나 따를 것인지 하는 자유가 여전히 개인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리문제와 생활에서 한 치의 자유도 허락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종교적인 문제에서 개인의 내적인 확신을 위해 단 한 줌의 여지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직무가 설교를 마친 뒤에는 자기 의무를 다한 것처럼 편안하게 무릎 위에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교리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문답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으로 강요해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했다. 시민들은 초등학생처럼 열 명씩 ‘장로’(長老)의 안내를 받아 교회에 가서는 오른손을 들고 장관이 낭독하는 맹세를 같이 해야만 했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명령을 받았다. 이 요구는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종교문제에 관한 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만 벗어나도 제네바 성벽 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루터가 요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제네바에서 끝이 났으며, 종교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도 종말을 고했다. 논리가 윤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문자가 종교개혁의 정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칼빈이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제네바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유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 단 하나의 의지 [칼빈의 의지]가 모든 사람의 의지 위에 놓이게 되었다.   모든 독재는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권력의 수단을 쥘 필요가 있다. 명령하는 사람은 형벌을 줄 권리도 함께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의 임용조건에 따르면, 그에게는 교회의 위반사례에 대해서 추방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시의원들은 신자들에게 성서를 해석해주는 ‘성서 강사’를 초빙했을 뿐이었다. 즉 설교를 함으로써 신자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 설교자를 초빙한 것이었다.   시의원들은 시민들의 법적․도덕적인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은 자신들의 재판권에 속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다른 어떤 개혁지도자들도 그때까지 시 당국에 이러한 권한이나 권력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권위적인 칼빈은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쏟아 부었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이라는 수단을 도입해서 그런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만찬이라는 종교적 신비를 천재적으로 이용해서 그것을 개인적인 권력과 압제의 수단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칼빈파 설교자는 평소 도덕적인 태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만을 ‘주님의 만찬’에 와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러나 설교자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바로 여기에 이 무기의 힘이 실려 있다―은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 되었다. 그럼으로써 종교적 관청이 이용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조치가 곧바로 사회적인 조치로 바뀌고 사업상의 보이콧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추방된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는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번개를 손에 든 칼빈은 자기에게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단 한 번 대담하게 움켜쥐는 행동으로 그는 번개와 천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감히 가져보지 못한 무기였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끝없는 심급 과정을 거쳐야만 교인 한 명의 추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카톨릭 교회의 파문은 초개인적인 행동으로, 어떤 개인의 독단적 판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권력의지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대단히 합목적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그러나 이러한 추방권을 일상적인 일처럼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주었다. 이 무시무시한 위협을 거의 규칙적인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제네바 시 당국은 아주 애를 써서 간신히 칼빈이 요구한 대로 만찬을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 년에 네 번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강력한 무기를 다시는 자기 손에서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진 뒤에 그는 비로소 진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총체적인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대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한 국민은 독재체제의 일시적인 이점들, 그 엄격한 규율과 강화된 집단적 작용력이 언제나 개인의 권리들을 희생시키며, 모든 새로운 법칙은 예외 없이 과거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제네바에서도 이제 서서히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민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개혁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중앙 광장에 모여들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쳐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형리의 감독 아래 있는 포로들처럼 열 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가서 교회에서 칼빈의 21개 조항에 대해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화주의적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단지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노래했거나, 아니면 칼빈이나 파렐의 눈에 너무 울긋불긋해 보이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 온 설교자로부터 추방의 위협을 받으려고 엄격한 관습개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네바 시민인가?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이 도시의 위대함과 부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인가? 입증된 애국자인가? 수백 년 전부터 최고 가문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방금 흘러들어온 망명자들에 불과했다. 그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여서 방과 거처를 제공해주고 좋은 일자리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온 관세징수인의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형제와 친척들을 이 따뜻한 보금자리로 불러들이더니, 이제는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책망을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고용한 이 망명자가 이제 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 되는지를 경정하고 있다니!   독재 초기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직 완전히 억압되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모두 쫓겨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저항이 어느 정도 뿌리를 가지는 법이다.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에서는 맹세를 거부하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프랑스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도 않겠노라고 투덜거렸다.   칼빈은 자기에게 헌신적인 ‘작은 시의회’를 이용해서 실제로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 인기 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조건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1538년 시의회에서 열세가 되었다. 제네바에서 민주주의 칼빈의 권위적인 요구에 맞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 
2013-05-27 17:30:47 | 관리자
오늘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서 기다리는 중에 "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회개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어서, 시간상 건강상 습관상 책을 읽지 못하는 분들에게 제가 읽은 내용의 일부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가끔 저희 교회 홈피와 유튜브를 통한 말씀에 감명 받아 교회를 찾아온 분들 중에는 특히 설교에서 선포하는 죄와 회개 부분에 공감하고 찾아온 분들이 있었습니다.처음에 와서는 너무나 감동되고 감화되어 이전 교회에서 하던 봉사를 스스로 해야겠다고 예배당 청소를 자청하는 모습에 저희는 몸 둘 바를 몰랐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강조하는 부분은 회개였습니다.회개가 있는 믿음.정말로 너무나 안이하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젖기 쉬운 생활 속에서 그러한 생각은 나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왠지 그분들은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말씀과 회개의 외침 때문인지 얼마 후 떠났습니다.그리고 가끔 믿음이 무언지 고민하는 분들과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회개에 대해 혼란 때문에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이에 대해 딱히 설명할 재주가 없었는데 오늘은 이 책을 읽으며 회개에 대한 부분이 있어 발췌해서 적습니다. 4장 율법적 회개인가, 복음적 회개인가? 중에서 믿는 자들을 다 싸잡아서 개독이라 부르는 시대를 살며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잘못 되었나, 정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가?” 라며 반성의 부담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강력한 회개의 메신저로 다가온 자들은 신사도 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신사도 운동 교회들의 강한 회개의 외침은 이런 상황과 잘 맞아 마치 천상으로 호출되어 진노의 하나님을 대변하고 곧 세상에 보내어진 선지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습니까?예수를 영접한다고 기도만 하면 다 구원받습니까?죄를 짓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까?회개하세요. 회개하지 않으면 믿는 자도 지옥에 갑니다. 신사도 운동은 복음을 왜곡하면서 회개에 대한 강박 관념만 가지게 한다.사람들은 그들의 설교를 듣고 금세 회개 병에 동화된다.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라며 쉽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되면서 그런 이상한 회개의 열기를 전파하는 선지자들로 변해 버린다.그럴수록 십자가의 진리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확실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사도 운동가들이 전하는 회개는 복음적이지 않고 율법적이다.율법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내실 형벌을 예상하고서 그 형벌로 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회개하게 만드는 원인은 하나님의 진노이고 신자가 회개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노 아래 떨어지지 않고 현재의 행복과 번영을 유지하려는 것이다(중략). 회개의 개념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비해져야 한다고 하니 사실 여간 혼란스럽지가 않다.그러나 그런 회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회개가 아니다 그런 말을 듣고 아무리 회개를 많이 해도 마음에 평안이 오지 않고 영혼이 행복하지 않다(중략). 율법적인 회개에 세뇌당하면 계속 이러한 진노와 회개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영원한 구원으로 인한 성도의 행복과 기쁨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확실한 은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 성도에게 주신 자유 등 기독교 신앙의 중심 기둥들이 부러지고 만다. 그래서 사탄은 시의 적절하게 회개 사상을 퍼트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회개는 복음적 회개이다. [구원 받은 이후] 복음적 회개의 원인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아니고 이미 경험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심판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회개가 아니고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께서 보내신 성령의 감동을 입어 변화된 마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회개다.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됨으로 회개하게 된다.그러므로 회개가 많아지고 깊을수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회개하는 영혼은 더욱 행복해지고 자유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두려움이 없어진다,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복음적 회개다. 여기서 재미있는 예화 하나를 들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크고 작은 다양한 죄를 짓고 사는 죄인들이다. 그래서 누가 강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면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이 찔려서 고개를 숙인다.아무 사람에게나 무작정 “당신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은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오래전에 영국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유명 정치인 10여 명에게 아무런 보충 설명을 달지 않고 “다 들통 났습니다!” 라는 문장의 전보를 보냈다 그러자 전보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사라져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다양한 종류의 죄를 항상 짓고 산다.성도들에게도 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죽은 사람들에게만 죄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는 마음이 순수하고 여리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더 신사도 운동의 회개에 쉽게 속아서 휩쓸리는 것이다. 회개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없어진 자리에 뜻 없는 열심과 기도 회개 봉사 충성 순종 찬양 기적 입신 방언 등이 들어선다. 이상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중에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117558  
2013-05-22 22:14:45 | 관리자
다음의 말씀을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고전14:22). 방언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들과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2013-05-21 11:09:56 | 관리자
방언(타언어)의 목적을 이해하기 앞서 먼저 이해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점을 이해하면 방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여깁니다.   알다시피 방언과 관련한 성경구절은 고전 14:2-5에서 나옵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 3 그러나 대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나니 4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나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느니라. 5 나는 너희가 다 타언어들로 말하기를 원하되 차라리 대언하기를 원하노니 타언어들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가 세움을 받게 하지 아니하면 대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나으니라."(고전 14:2-5)   이 중에서 "알지 못하는 언어"가 바로 개역성경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부분입니다. 영어로는 unkown tongue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 사람들이 현대의 "방언"을 붙드는 이유는 "하나님께 말하나니"와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함이라" 이 부분일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며 나는 영으로 신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이 바로 "신비"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비란, 우리가 신비스럽다고 말할 때의 그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비는 항상 "계시되지 아니한 감추어진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런 점으로 인해 성경에서 "신비"와 함께 사용되는 단어는 거의 대부분이 "알다"와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진리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계시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눅 8:10, 킹흠정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11:25, 킹흠정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 롬 16:26, 킹흠정 이제는 밝히 드러났으며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자들의 성경 기록들을 통해 믿음에 순종하게 하려고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지게 된 신비의 계시에 따라 너희를 굳게 세우실 분 고전 13:2, 킹흠정 내가 대언하는 선물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5:51, 킹흠정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엡 1:9, 킹흠정 친히 자신 속에서 작정하신 자신의 크신 기쁨을 따라 자신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니 엡 3:3, 킹흠정 곧 계시로 그분께서 내게 그 신비를 알리셨나니 (그것은 내가 전에 몇 마디 적은 것과 같으니라. 엡 3:4, 킹흠정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읽을 때에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깨닫게 되리라.) 엡 3:5, 킹흠정 그분께서는 이제 자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대언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이 신비를 계시하신 것 같이 다른 시대들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알리지 아니하셨는데 엡 3:9, 킹흠정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골 1:26, 킹흠정 이것은 곧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로부터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드러난 신비에 관한 것이라. 골 1:27, 킹흠정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골 4:4, 킹흠정 이것은 내가 마땅히 할 말을 하여 이 신비를 드러내고자 함이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방언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십시오. 방언이 가장 먼저 주어진 때는 오순절 날로 그 때 방언을 받은 제자들이 무엇을 선포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행 2:11)   그 다음 방언이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하여 이방인들의 구원을 믿지 못했던 유대인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방언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크게 높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며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이더라."(행 10:46)   그 다음 방언이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 19장입니다. 오직 요한의 침례만을 알고 성령님의 침례에 대해 알지 못하던 사람들을 위해 바울은 그들을 위해 재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받고 한 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므로 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고 대언하니라."(행 19:6)   이들은 방언을 가지고 대언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이 완전히 주어져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드러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그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언"의 역할입니다. 성경이 완전히 주어지기 전 "대언자"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습니다. 문제는 대언자는 자기의 말들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전해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됨에 따라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방언"의 은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계시되지 않은 감추어진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왔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사들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못했고 자기들이 가진 은사들을 남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은 혼란스러워졌고 바울은 그들의 남용되는 은사들의 사용을 바로 잡고자 고린도전서 14장을 기록하였습니다.   대언과 마찬가지로 방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알립니다. 그러나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방언의 은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세움을 얻게 하려면, 그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 목적에 따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전해 주던가 아니면, 교회 내에서 "통역자"를 통하여 그에게 계시된 것을 전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안에서 그의 영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그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전 14:21에서 인용한 말을 보십시오.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에게 말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으니"(고전 14:21)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대언과 방언을 같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방언과 대언은 같은 목적으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3:10의 완전한 것이 오면에 대해서는 저 역시 그것이 완전한 성경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견해는 문맥의 의미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같이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대언과 방언은 완전히 그쳤는가? 저는 그 대답을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부분들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드리고자 합니다.   벧후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입니다. 그 어떤 대언이나 방언이라도 성경보다 더 확실한 대언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2013-05-21 11:05:29 | 관리자
성경 말씀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김기덕 형제님의 열정과 관심이 여기에 있는 많은 형제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충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의 말을 듣고서 헤롯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지를 물었습니다. 수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미가 대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답했습니다(마2:5-6). 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벧엘에 있던 대언자들, 여리고에 있던 대언자들은 주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왕하2:1-6). 그러나 그들은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러 따라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틀림없이 엘리야는 어느 산이나 골짜기에 떨어졌을 거라고 믿고 실종된 엘리야를 수색, 구조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왕하2:16-18). 그들은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눅4:41). 이런 말씀들을 보면 "지식"이 반드시 "믿음"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지식적으로는 알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선포된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섞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히4:2).
2013-05-17 09:04:16 | 김문수
김문수목사님을 비롯해서 여러 형제님들이 좋은 말씀들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제가 알고자 하는 것만큼 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한것 같습니다. 전 생각하기를 적은 죄를 지은 사람과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 받는 지옥의 형벌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목사님 글 중에서 알면서도 믿지 않는 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건지요? 알면서도 믿지 않을수가 있는 건지요? 조지 와일드 교수님 그런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아님 믿다가 타락해서 믿음에서 떨어진 사람을 애기하는 건가요? 제가 질문한 내용은 기존 교회에서 전혀 듣지 못한 것이라 질문을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이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많은 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13-05-17 02:26:17 | 김기덕
안녕하세요?   이것은 아내를 통해 아침에 들은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 어떤 자매(?)는 "이렇게 무서운 글에 은혜가 있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이 글이 무엇이 그리 무서울까요? 지극히 정상적인 글인데 말입니다. 신비주의, 은사주의, 기복주의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사는 분들에게는 무서운 글일지 모르지만 정상적으로 믿음 생활 하는 이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극히 정상적인 글입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의 어려움이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샬롬   (원 저자가 개역성경을 썼으므로 성경 구절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에센스만 보시기 바랍니다.)   ----------------------    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   불의 앞에 오랜 침묵은... 죄를 부추기는, 가장 비겁한 무언의 동조이다.계속해서 오랫동안, 그대로 조장 되었던... <비겁한 침묵의 악들.>   침묵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다양한 언어의 색깔과 표현들이 있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이든 함께 해야 할 목표와 방향들을 정해야 될 때 그 의견들이 제시 되 면은, 그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침묵으로 일관 하게 된다.   그 침묵 속에는...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그 뜻을 지지하고 함께 동참한다는 긍정의 의미가 들어가 있고   그와는 정 반대로, 나와는 뜻이 다르기에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으로 그 침묵들을 쓰기도 하며이것도 저것도 그다지 모두 다 관심이 없기에 그대로 그렇게 침묵들을 하기도 한다. 또, 우리의 여러 상황들과 오랜 정서 상조용히 있는 침묵들을, 미덕처럼 여겨왔고 여겨져왔었다. 한 두 번씩은 모두 다 경험들을 해 봤던 일들... 그것은 말하지 말아야 할 때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말해서 생겨났던 어려운 일들 또 굳이 빠르게 행동하고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 그러함에도...그러나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또 분명하게 행동하고 움직여야 할 때 임에도 가만히 있어서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위험한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죄를 부추기는 일들에... 함께 덩달아 수없이 무언의 동조를 해 왔던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불의와 불법들 앞에, 그대로 말하지 않는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그 곳이 바로 이 시대 전혀 부끄러움들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벌거벗은 교회들이 아닐까?   오랫동안 하나님께선 불의와 불법 수많은 악들 앞에서그 악의 근원인 이유와 원인들 뿐 아니라침묵하는 절대 다수에 대한 분명한 의지와 뜻들도 계속해서 보내 오셨다.그 무지함과 안타까운 많은 연약함들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꼭꼭 집어서 다 드러내시고 나타내 보이시고 있는데... 지금은, 침묵 할 때가 아니고... 절대로 결코, 침묵해서도 안 된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행전 18:9,10>   교회들 속... 수많은 불의와 불법들이 일어 날 때마다하나님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속에서 수도 없는 무지함 가운데그 안에서 계속 되어지는 무분별함과 무책임들 가운데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의와 불법 속에 타락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버렸고 설령, 불의와 불법들 앞에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뜻들을 알았다 해도서로의 기득권들과 더러운 이권들이 오랜 세월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 켜눈감고, 입을 다물고, 철저하게 침묵함으로...끓어오르는 탐심과 탐욕으로, 오랜 때가 찌들어가는 흉칙한 성으로이 땅의 주님의 교회들을 이렇게 까지, 이렇게 되도록 망가트려 버렸다. 이제, 이 상황들 속에서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그 어느 것보다... 불의와 불법들 앞에 오랜 침묵은, 가장 비겁하고 비참한 무언의 동조이다.이제 곧 이어, 그 책임들을 너무나 선명히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하나 물으실 것이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보라 이 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이사야65:2~7>   이제, 하나님의 그 모든 때가 되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영적 무지함 들과 무관심들로 함께 빚어 만들어 놓은 교만함의 축제들로 높이 쌓아올린 타락한 성들...   그 안에서... 그 속에서...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악한 패역들의 끈질긴 고리들... 정작 말해야 할 때 비겁하게 말하지 않아서 불의와 불법의 타오르는 세력들을 더 크게 확장 시키고 확대시키는 일에 무언의 동조들을 해 왔던 수많은 일들   세상 그 어디,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랫동안 진실들을 꼭꼭 감추고 비겁한 침묵으로 인하여 수많은 악들을 무방비 상태로 조장하는 곳들이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이 시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우리들의 벌거벗은 몸,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전혀 알지 못하는 교회들이 아닐까?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 <이사야5:12,13>   정녕 눈앞에서 수많은 불의가 행하여지고 도적질한 영적 권력의 남용들이 자행되어도알면서도, 보면서도, 그 권력의 폭력들 앞에서자신들의 이름과 영역, 지위와 위치들을 모두 잃어버릴까 노심초사 아무 말 하지 못하고도리어 그 권력 앞에 아부하고, 아첨하며, 묵인해 버리는 정녕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많은 모습들이 그동안 얼마나 비참 하도록...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아왔던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문제와 비리가 무엇인지는 그 권력의 혜택들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들이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 받는 영향력의 달콤함들 때문에 모두 다 쉬쉬쉬하며 꼬리들을 감추고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탐욕의 방들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은 정녕 아닌지....   "악을 선하다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이사야5:20>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 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어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8:12>   그러나 오래도록, 오랫동안 이 패역 앞에 긴긴 침묵을 깨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광과 이름을 위해 하나님 스스로 일어나시리니... 그 때가 되면 불의와 불법들을 알면서도 도와주었던 자와 도움을 받았던 자 모두가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대의 채찍들 앞에 반드시 그대로 두렵게 서게 될 것이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예레미야 6;30,31>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려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3>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8Xq5/3988?listURI=%2Fhowsarang%2F_rec%3FboardType%3DM&boardType=M&regdt=20130514032134
2013-05-16 23:25:21 | 관리자
역시, 김문수 목사님께서 정확한 말씀 적용으로 참된 진리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하여 주셔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참되고 정확무오 하신가를 마음속에 한번더 새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013-05-16 14:59:41 | 김건
네, 여러 형제님들이 답을 올려주셨네요. 아래 말씀들도 함께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자기를 예비하지 아니하고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그 종은 채찍을 많이 맞되 알지 못하고 채찍 맞을 일들을 한 자는 적게 맞으리라. 누구든지 많이 받은 자에게는 사람들이 많이 요구할 것이요,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는 더 많이 달라고 하리라(눅12:47-48). 내 형제들아,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너희가 아느니라(약3: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진리를 듣고, 알면서도 믿지 않고 따르지 않은 자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 책임에 있어서 차등을 둔다는 뜻이지 몰랐기 때문에 책임을 면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세상의 창조 이후로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 그들은 주의 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8-9).
2013-05-16 14:28:11 | 김문수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네게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였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에게는 더 큰 죄가 있느니라, 하시니라. (요 19:11)
2013-05-16 09:27:26 | 답변팀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만약 큰 죄를 지은 사람과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똑같은 벌로 다스리신다면 공평하지 못한 일입니다. 갈6:7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죽어서 지옥에 간 사람과 여러 번 듣고도 자기 마음으로 거부한 사람이 갈 곳의 등급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11:20-24 그때에 그분께서 능력 있는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도시들을 꾸짖기 시작하시니라. 고라신아, 네게 화가 있을지어다! 벳새다야, 네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 안에서 행한 능력 있는 일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오래 전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속에서 회개하였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여졌으나 지옥에까지 떨어지리라. 네 안에서 행한 능력 있는 일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것이 이 날까지 남아 있었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히10:28-29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영께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되는 형벌은 얼마나 더 극심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보라. 알 레이시의 천국과 지옥 바로알기(그리스도 예수안에)라는 책에 더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찾아보고 생각해 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05-16 09:13:38 | 유준호
정목사님 설교중  제가 들은 것인데요(지옥의 등급)  어떤 사람이 복음의 빛을 많이 받았는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지옥의 고통이 더 클 것이고 복음의 빛을 적게 받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옥의 고통이 덜 할 것이라는 설교를 들었는데요.   그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 수가 있을까 해서요? 알려주셨음면 감사하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5-20 22:56:5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3-05-16 05:33:09 | 김기덕
안녕하세요? 지인을 통해 옥성호 형제의 귀한 글 한 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런 글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위력 있는 설교입니다. 바른 것을 선포하는 좋은 목사가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 위험한 설교   며칠 전 만난 친구에게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더군요. “그 목사님 설교를 한 마디로 하면 ‘안전한 설교’라고 할 수 있지. 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안전한 설교....다른 말로 하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없는 설교를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설교는 그 어떤 영혼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하는 그런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듣는 내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교회 건물을 나서는 순간 내 머리에서 사라지는 설교, 내 속에서 그 어떤 고뇌와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설교.....바로 안전한 설교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그 분의 가르침은 실로 ‘안전한 설교’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해 그를 죽이려고 하던가 아니면 그의 말씀에 인생 전체가 변화되거나....둘 중 하나였습니다. 안전한 설교를 달리 표현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설교’를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 이 글을 목회자들 중에 보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설교는 안전한 설교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나의 설교가 과연 ......성도들의 현실과는 동 떨어져 저 멀리 구름 위에서 들리는 월요일 학교 조회 시간의 ‘교장 선생님 훈시’와도 같은 그런 설교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설교로 가득찬 교회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안전한 설교에 물든 목회자와 그런 설교를 듣는데 익숙해진 성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현상 유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상의 평온함을 깨는 어떠 시도들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일상의 평온함을 유지해온 것이 비록 ‘거짓과 기만, 위선’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관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참과 거짓이 아닌 일상이 제공하는 기득권일 뿐이니까요.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참과 거짓을 놓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 소 귀에 경읽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실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위험한 설교를 하면 할수록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더 큰 위험과 더 많은 적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위험한 설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록 33년간 짧은 생이었지만 자신의 ‘위험한 인생’을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이어갔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볼 때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사는 것은 피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감당해야 할 내 삶의 몫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외쳤던 ‘위험한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어집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설교는 점점 더 우리의 예배 속에서 사라지고 우리 주변은 ‘동업자 의식’에 젖은 ‘안전한 설교’, ‘믿음의 명문가를 만들자’라는 식의 안전함을 넘어 실로 하나마나한 헛소리 설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합시다. 이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신앙을 가지고 위험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로 인해 바뀌었고 발전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이 메일을 통해 내가 갈급하던 ‘위험한 설교’를 하나 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다름 아닌 사랑의교회 문제들과 관련해 한 집사님이 내게 보낸 장문의 글었습니다. 그 메일은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몇 년전 제 초심과 각오를 놓지 않으려 합니다.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지쳐서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지만...그래선 안되겠지요?”   이 분의 글은, 이 분의 인생은 그 자체로서 내게 하나의 ‘위험한 설교’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강단 위에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가 실종되어가는 만큼 나는 내 주변에서 삶으로 외쳐지는 ‘위험한 설교’들을 더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을 때마다 신앙은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삶으로 사는 일이라는 기본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원문: http://m.cafe.daum.net/howsarang/Dxch/60?listURI=%2Fhowsarang%2FDxch%3FboardType%3D
2013-05-15 14:56:30 | 관리자
사사기 14:10-17 10 이처럼 삼손의 아버지가 그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젊은이들이 그리하곤 하였더라. 11 그들이 삼손을 보고 서른 명의 동무를 데려다가 그와 함께하게 하니라. 12 ¶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능히 수수께끼를 알아내어 확실히 내게 밝히 보이면 내가 얇은 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 그러나 너희가 그것을 능히 내게 밝히 보이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얇은 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줄지니라,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수수께끼를 내어 우리가 듣게 하라, 하매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라. 15 일곱째 날에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네 남편을 꾀어 그가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밝히 보이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너와 네 아버지 집을 불태우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려고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하매 16 삼손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당신이 내 백성의 아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는 그것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였도다, 하니 삼손이 그녀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늘 어찌 그대에게 알려 주리요? 하였으나 17 그들이 잔치할 때에 그의 아내가 이레 동안 그 앞에서 울며 그를 몹시 괴롭게 하므로 일곱째 날에 그가 자기 아내에게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수수께끼를 자기 백성의 아이들에게 알려 주었더라. 질문의 요지는 15절에서 삼손의 아내가 일곱째 날에 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왜 17절은 그의 아내가 잔치하는 이레 동안 울었느냐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그냥 풀리는 것 같습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이 잔치를 시작하면서 수수께끼를 냈는데 아무도 그것을 풀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처음부터 그에게 울면서, 이레 동안 내내 울면서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15절에 있는 대로 블레셋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불사르고 죽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급해지니까 이레 째 되는 날 그녀에게 와서 15절처럼 확실하게 위협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삼손 앞에서 또 울었습니다. 큰 문제가 안 되는 이런 부분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잠시 생각하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와 자기 아버지 집의 생명이 위협을 받자 처음부터 이레 동안 내내 운 것으로 보면 됩니다. 샬롬 (*) 참고로 다음에 질문을 올릴 때에는 차분하게 요점을 잘 적어서 올리면 좋겠습니다. 글을 잘 쓰면 보기에도 좋고 답하는 사람도 요점을 알고 잘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3-05-10 10:15:56 | 관리자
삿 14장 15절에 일곱째 날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손이 동무들에게 수수께끼를 낸 기간이 잔치 기간 이레인데 14절에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라. 라고 되어있고 15절에는 일곱째 날에 그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17절에 그들이 잔치할 때에 그의 아내가 이레 동안 이라 되어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사흘이 지나서 하면 4일 남았는데 17절에 이레 동안 이라하면 날짜가 안 맞는거 같은데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면 감사합니다. 전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이해가 부족하니 너그러운 아량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5-10 10:16:5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3-05-09 16:22:00 | 김기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