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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안에의 킹제임스 흠정역을 읽은지 3주 정도 돼가는 청년입니다.   먼저... 아래의 질문을 올리는 것은 제가 남다른(?) 구원관이 있어서도 아니고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서 쓰는 글도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히려 킹제임스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을 때 오류가 없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생기길 원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몇 일동안 수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찾아보고 또 찾아봤지만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어서 지식인에 올려 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식인엔 워낙 다양한(?) 분들이 있기에 신뢰할 수 없어서 출판사의 홈페이지라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들르게 됐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토론중빌립보서를 보다가 의문이 생겼는데, 빌립보서 2:12 의 한글 번역에 있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라는 부분 중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라는 부분입니다. 개역개정에는 '구원을 이루라' 라고 돼 있지요.   문맥상 여기서의 구원을 이루라는 뜻은, 구원받기 위해 계속해서 순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답게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영어 킹제임스로 봤을 때 이 부분이 'work out' 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work out의 뜻을 찾아보니, 운동하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등의 뜻이었습니다.)   이 'work out'의 뜻을 몰랐을 땐, 봐라, 킹제임스에서 한글로 일해서 드러내라고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냐 라고 했으나... 인터넷사전, 집에 있는 영어 사전, 핸드폰 사전, 모두 뒤져서 work out의 뜻을 찾아봤지만 일해서 드러내라는 뜻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work out이 사용된 문장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일해서 드러내라는 뜻으로 사용된 예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몇분동안만 찾아본게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시는 분이 해석하시는 빌립보서 외에는요...   난감했습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뜻이 당신이 말한대로 그런뜻이라면 있는그대로 번역해두고 뜻을 해석할 때 그렇게 해석하면 되지 왜 굳이 사전에도 없는 뜻인 일하여 드러내라고 해석 되어있냐 번역은 있는 그대로 번역을 해둬야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난감햇지요...   제가 생각할 때도 일하여 드러내라 라고 해석한 게 틀리다고 할 순 없지만 조금 과장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이렇게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work out이 옛날에는 일하여 드러내라는 뜻으로 사용 되었는데 요즘엔 그런 뜻으로 안 쓰이기 때문일 수도 있구... 혹은 현재 work out이 일해서 드러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일수도 있구요...   빌립보서 3:11 에 관해서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건 킹제임스 성경이랑 상관없이 KJV - 빌립보서 3:11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 라는 구절입니다. 앞뒤 구절들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과 같은 그런 권능을 경험하고 고난에 참여하는 경험에 도달 하고자 한다는 고백같습니다. 그런데 위의 11절의 내용이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치 마지막 때에 부활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처럼 보여집니다. 왜 바울은 11절의 고백을 썼을지 궁금하구요. 이 구절로 구원관이 흔들리진 않지만 이에 대해 뭔가 확실히 변증할 수 없기에 질문 드립니다...    별거 아닌 것일 수 있지만 지금 이것들에 대한 확실한 변증을 할 수 없어서 답답한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관한 질문을 인터넷에 처음 올려봅니다. 여태껏 열심히 조사하면 왠만한 것들은 다 답을 찾을 수 있었지만 빌립보서에 관한 것은 어렵네요... 아까전에도 이 질문을 올렸는데 철없이 글을 올렸던 것 사과드리구요.. 이것들에 관한 궁금증이 꼭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4:57:4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16 21:05:15 | 홍석찬
야곱이 라헬에게도 들어가니라. 그가 또한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또 다른 칠 년을 여전히 그와 함께하며 섬기니라(창29:30) And he went in also unto Rachel, and he loved also Rachel more than Leah, and served with him yet seven other years. 위 구절은 more than 이 들어가는 최초의 성경 구절이며, 상황 역시 love A more than B 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more than 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상적인 문법을 따라 읽으면, 야곱이 "라헬과 레아 둘 중에서" (레아에 비하여) 라헬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문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레아가 라헬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야곱이 라헬을 더 많이 사랑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래 구절도 똑같은 형식의 love A more than B 형식입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평안하게 말도 할 수 없었더라(창37:4) And when his brethren saw that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ethren, they hated him, and could not speak peaceably unto him.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ethren. 요셉(A)과 요셉의 형제들(B)이 있는데, 야곱이 그 둘 중에서 요셉(A)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고, 그 형제들도 요셉을 사랑했는데, "요셉에 대한 그 형제들의 사랑"에 비하여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정도"가 더 컸다는 뜻입니까?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Neither have I gone back from the commandment of his lips; I have esteemed the words of his mouth more than my necessary food. "주의 말씀과 음식" 이 두 가지 중에서 욥이 말씀을 더 귀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음식이 말씀을 귀히 여기는 것"에 비해서(?), 욥이 말씀을 귀히 여기는 정도가 더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69편 31절에서 ox or bullock와 비교가 되는 것은 그 앞에 있는 30절의 감사와 찬양입니다. 문맥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사람이 수소나 황소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요한복음 21장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 비해 베드로의 사랑이 특별히 더 지극하기를 바라는 질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이 나(예수님)를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하느냐?" 그래서 베드로가 "예, 제가 딴 사람들보다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면 그것을 듣고 좋아하실 예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의 사랑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비해) 좀 미지근하고, 못 미치는 것을 주님이 바라신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로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매(마26:33)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 때문에 다 실족해도, 나는 안 그럴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배신하고 베드로만 주님을 끝까지 따르면(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의 사랑이 다른 제자들의 사랑보다 더 뛰어나니) 예수님께서 좋아하셨을까요? 이렇게 호언장담하다가 진짜 실족한 사람이 누군데 주님께서 또 다시 베드로에게 그런 어리석은 비교와 자신감을 요구하실까요? 베드로: "주여,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예수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1,22) 베드로는 자기와 요한을 비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의 사랑과 헌신이 요한의 사랑과 헌신보다는 더 뛰어나야 내가 기뻐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문맥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지, 베드로의 사랑과 제자들의 사랑을 비교하려고 하는 맥락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숯불 이야기를 가지고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감동적인 묵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Q.T.의 묘미지요. 날이 추우므로 종들과 관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거기 서서 몸을 녹이니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몸을 녹이더라(요18:18). 그들이 땅에 올라와 곧바로 숯불이 거기 있음을 보았는데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더라(요21:9). 그래서 베드로로 하여금 그가 주님을 부인할 때의 그 숯불을 생각나게 하려고 예수님이 숯불을 피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옛날에 이런 식의 감동적인 Q.T.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숯불은 그냥 숯불입니다. 그 때는 종들이 추워서 숯불 피운 거고, 이번에는 예수님이 물고기 구우려고 숯불을 피우신 겁니다. 전기오븐이나 가스렌지가 없는데 당연히 숯불 피워야지요. 숯불이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 무슨 신비한 심리학적인 의미나 영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열심히 생각해봤자 숯불은 그냥 숯불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그분의 진리를 찾기 쉽게 기록해 놓으셨지, 보물 찾기 하라고 꽁꽁 숨겨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준오님이나 혹은 다른 어떤 분들이 어떤 해석을 취하건 저는 별로 상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제 해석을 받아들여 달라고 호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며, 성경의 단어와 용법은 성경의 정의와 용례를 따른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저는 문자적(문법적), 역사적(historical), 문맥적(contextual) 해석을 따릅니다. 이준오님의 견해에 동의하는 많은 설교가들이나 신학자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선 축하를 드립니다다. 그러나 스펄전이 뭐라고 했건, 매튜가 뭐라고 썼건 그게 제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주석이나 해설들은 성경 말씀과 같은 절대적이고 신성한 권위가 없기에, 저는 그것을 교회 역사 상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발견한 하나의 의견으로 간주할 뿐 그들의 글이나 해석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지 않습니다.
2011-03-01 04:19:26 | 김문수
형제님! 킹제임스 성경의 문법은 오늘날 현대의 문법과 약간 다릅니다. 킹제임스성경은 그것이 번역된 그리스 원문의 문법체계를 최대한 따라 번역되었습니다. 그 점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위의 영어 답문에 fish가 나와있는데 킹제임스 성경의 fish는 단수 혹은 대표의 성격을 갖습니다. 복수는 항상 fishes를 써왔습니다. 위에서 말하는 여러종류가 아니더라도 복수면 항상 fishes로 옵니다. 오늘날의 문법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할 때에도 five loaves and two fishes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 본문의 문법을 최대한 따랐기 때문에 than 다음에 비교의 대상만 나오고 동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콘코던스로 than을 찾아보아 확인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편 69:31을 보면 Psa 69:31 This also shall please the LORD better than an ox or bullock that hath horns and hoofs. 현대의 문법에 따라, "이것이 또한 수소나 굽이 있는 황소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로다" 라고 해석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것이 또한, 수소나 굽이 있는 황소가 주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주를 기쁘게 하리로다."라고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흠정역은 "이것이 또한 수소나 뿔과 굽이 있는 황소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지만 문맥상 두번째 의미로 모두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요 21:15의 more than these의 해석의 논란은 형제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적어도 200년 이상되어 온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부분을 해석해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 왔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love me?" 즉,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런 식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석한 사람들을 적어보자면, St Augustine부터 시작해서 제가 확인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Spurgeon, Warren Wiersbe, Albert Barnes, Adam Clarke, John Darby, John Gill, Matthew Poole, John Wesley, Arthur Pink. 동일하게 말하는 주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Combined Bible commentary, The Greate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Daily Study Bible, People's New Testament, Jamiesson & Fausset & Brown Commentary, Robertson's Word Pictures, Treasury Scriptural Knowledge, Vincent's Word Studies. 여기서 DSB(Daily Study Bible)는 두가지 견해 즉, 물고기와 그물과 배 즉 어부의 삶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견해 모두 제시합니다. 반면 Guzik은 "fish and a fishermans's life"이라고 제시했고 Fourfold gospel(1914, J.W. McGarvey, Philip Pendleton) 역시 "fishes and this fishing business"이라고 해석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세가지 의견을 모두 언급했습니다: 물고기와 배와 그물,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문맥상 잘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부를 때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눅 22:31을 생각나게 합니다. 눅 22:31~32 또 주께서 이르시되,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3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쇠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은즉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 하시니 주님은 또한 추위에 떨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숯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주님은 또한 베드로에게 세번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지극히 베드로 개인과 연관이 있는 질문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이 물고기와 어부의 삶을 두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베드로 뿐 아니라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베드로를 따라 고기를 잡으러 배에 올라탔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 견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기 때문에 "이들"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이 되면 오직 한 견해만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영어 성경처럼 스스로 판단하도록 여지를 둘 수 있게 "이들"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2011-03-01 02:01:11 | 이준오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뜻이라면, 비교의 대상은 예수님과 이것들 (둘 다 love의 목적어)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랑하는 정도" 對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정도"가 됩니다. 이 경우 than 뒤에 나오는 these는 목적격이 아니라 주격이 되어야 하며, 문법적으로 ...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do(love) 가 되어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these 다음에 동사나 대동사가 없습니다. 따라서 these는 주격이 아니라 목적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사도 요한과 비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 것을 내가 원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2) 15절 이후에 바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른 사람들이 나(주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제자들 중에서 누가누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라는 문제로 경쟁을 붙이실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1-02-28 06:02:01 | 김문수
저는 다른 의견입니다. these는 남성 복수명사라면 두 가지 모두 가능합니다. 첫번째 물고기들과 배와 그물들 즉 예전의 어부의 삶을 의미할 수 있고 두번째는 그들 즉 베드로와 함께 했던 사람들 둘다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물고기들을 의미하는가? 과연 주님이 베드로가 물고기보다 즉 예전 어부의 삶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셨나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제가 볼 때에 these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일까요? 이것도 아닐 것 같습니다. 이미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베드로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저는 이 질문이 답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실언에 대한 것입니다. 마 26:33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로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매 적절한 번역은 "이들"로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것들은 사물만 의미하나 이들은 둘다 가능합니다.
2011-02-27 21:52:55 | 이준오
감사합니다. 힘이 됩니다 ! 제 눈에는 153마리 잡힌 것도 물론 기적이지만(11절), 3절에서 한마리도 잡히지 않은 것도 기적인 것 같습니다. 실패가 항상 실패는 아니라는 교훈을 배웁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속박되어 살아 왔었지 않나 반성해 봅니다.
2011-02-22 23:47:12 | 곽연우
요한복음 21:15의 “이것들”   (요 21:15) “이처럼 그들이 식사를 한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하의 글은 요한복음 21장 15절의 "These"의 의미에 대하여 “이것들” 보다는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은지, 정 동수 목사님께 질의를 보낸데 대하여 답변해주신 내용입니다.   내용으로 보아 정 목사님께서 신중한 답변을 위하여 다른 분(Mr. Bob ?)과 의견을 교환하신 다음, 확인하신 후 제게 보내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 이하, 답신의 원문과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사용하신 단어는 단순한 반면, 표현방법이 고급스러워서 번역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번역해 주시지 않고 원문으로 보내시다니.......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셨습니다. ---------------------------------------------------------------------- Dr. Jung,   "These" is masculine plural and refers back to the (masculine plural) fishes in vs. 11. Fish is singular and plural in English. Fish would refer to only one species of fish (catfish, gar, salmon, bass, etc); whereas, "fishes" refers to fish of many different types of species; a mixture of different species.   Peter had said in vs three that he was going "a-fishing." The "a-" prefix intensifies and is stating that Peter, at this point in time, has decided to return to a life of fishing. Jesus has been raised but now some 40 days later nothing has really happened and Jesus has not appeared all that often to the disciples (this is the 3rd time - vs14). Note that in vs 2, that 3 of them are mentioned along with "other disciples" who go unnamed. Peter, Nathaniel, and Thomas are mentioned by name. What do they have in common? They are all doubters.   Hope this helps.   Bob --------------------------------------------------------------   번역:   ‘these’는 남성형 복수이고, 앞서 나온 (남성형 복수인)물고기들(11절)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Fish는 영어에서 단수로도 쓰이고 복수로도 쓰이는데, Fish는 단 한 종의 물고기들만을 의미합니다(배스, 연어 등 물고기의 개체 수와 관계없이 한 종이면 단수로 표현함). 반면, ‘fishes’는 다양한 종의 물고기들, 혹은 다양한 종이 섞인 군집을 지칭합니다.   베드로는 3절에서 ‘a-fishing’을 하러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a-‘라는 접두사는 이 시점에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갈 것을 명시함과 동시에 강조합니다. 이 시점이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나 현재 40일이 지나도록 별다른 일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사도들에게 그렇게 자주 모습을 보이지도 않으신 그 시점입니다.(14절)   2절과 3절에는 ‘다른 사도들’이라고 이름 없이 언급된 것에 주목합시다. 베드로, 나다니엘, 도마는 이름과 함께 언급되었습니다. 이 셋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모두 의심했던 자들입니다.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Bob ------------------------------------------------------------------------------------ 이미 파악 하셨겠지만 요한복음 21:15 의 “이것들”은 베드로 옆에 있는 다른 제자들을 가리킴이 아니고 베드로가 잡으러 왔던 “물고기”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선을 사랑할리는 없고, 이것들(물고기) 예수님을 알기 전의, 어부의 삶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것들"이라는 번역은 정확했습니다.   이 친절한 해석을 곁들인 답변으로 인하여 눈이 많이 밝아지고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대한 신뢰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정 목사님과, 도움을 주신 Bob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2011. 2. 18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4:33:5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2-22 17:54:23 | 류인선
안녕하세요. 형제님 글을 읽으면서 여러방법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놀라고 감사하는 중에 질문을 하나 드려도 괜찮을런지요. 김문수 형제님의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을 어디서 구하셨는지. 검색을 해도 왜 저는 찾을 수가 없는지 ㅠㅠ
2011-02-05 15:34:05 | 송혜민
그러면 이 복됨이 할례자에게만 임하느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 임하느냐? 이는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다고 우리가 말하기 때문이라. 그런즉 그것을 어떻게 의로 간주하셨느냐? 그가 할례 받은 때였느냐, 할례 받지 않은 때였느냐? 할례 받은 때가 아니요, 할례 받지 않은 때니라. 그가 할례의 표적 곧 아직 할례 받지 않은 때에 그가 소유한 믿음의 의를 봉인한 표적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는 아니하였으나 믿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어 의가 그들에게도 인정되게 하려 함이요, 또 할례자들에게 속할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직 할례 받지 않은 때에 소유한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자들에게 할례의 조상이 되려 함이라. 그가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씨에게나 율법을 통해 주어지지 아니하고 믿음의 의를 통해 주어졌느니라. (롬4:9~13) 교회를 영적으로 이스라엘에 적용하는 것은 먼저 일차적인 말씀의 뜻과 세대 등을 잘 구분하고 이해한 뒤에 교훈으로 삼을 경우 뿐입니다. 그런 이해 없이 이스라엘에 교회를 대입하면 모든 것이 뒤틀리고,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해괴한 교리와 엉뚱한 주장이 나옵니다. 구원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음을 통해서만 받는데, 아브라함은 할례받기 전에 의를 인정받았습니다. 교회에 적용하면 도저히 안 풀리는 이스라엘에 관한 말씀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안식일, 금기된 음식, 할례 등은 영적으로 해석하고, 절기와 헌금 등에서는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행세하려는 것이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돈 생기는 일에서는 우리가 이스라엘이고, 귀찮은 일에서는 영적인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장사수완이고 그런 폐단을 타파하지 못한 개신교의 부실한 신학이자 무식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사랑이 안 생길 리가 없지요. 가끔 예전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은 어느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에게 임한 성령님을 따라 맺는 열매입니다. '갈5:22'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사랑이 생기느냐고 묻는 이들은 사람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 즉 언제나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완전한 사랑을 하고 있나요? 사랑을 너무 강조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사랑은 중요한 것이지만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아니며 구원의 척도로 이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예수님의 사랑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고 둘 다 필요한 것이며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을 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사이트를 통해 많은 것을 얻으셨다고 했는데, 충분히 보신 것 같지는 않네요. 궁금해하시는 점들은 모두 이 사이트에서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강해를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파의 누구만 주장하는 신학이 아닙니다. 맑은 정신과 상식으로, 성경을 따라 판단하시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많은 자료들을 주의깊게 보시면 궁금증이 다 풀리실 겁니다.
2011-02-05 13:55:46 | 김재욱
샬롬!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제법 긴 답변이 필요하지만,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 따라 생각할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따라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씨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육신을 따라 아브라함의 씨가 되었지만 믿음으로는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므로 여전히 교회와 이스라엘은 구별됩니다. 두번 째 질문에 대하여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직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 할 수 있고, 또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막 구원받은 어린아이는 아직 사랑을 못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혹은 내가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지 깊이 알면 알수록 주님과 형제자매님들에 대한 사랑이 자랍니다. 그리고 물론 더 배우고 계속 자라셔야 됩니다. 박ㅇㅅ 계열은, 구원 까지는 잘 가르쳐주는 편이지만 그 이후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신앙이 어느 정도 자라시기 까지 길게 접촉 안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2011-02-03 22:42:35 | 류인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적으로는 이방인이지만 -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받은 상속자라는 뜻이죠! 히브리서를 자세히 읽어보세요- 구약과 신약, 유대인과 이방인, 율법과 은혜 이 모든것을 저는 히브리서를 통해 많은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예수님의 '사랑'.... 근본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는 곰곰히 생각해봤었습니다. 첫째는 - 그분은 정말 살아계시고 세상모든만물을 창조한 신이시기때문에 둘째는 - 그분은 절대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두려운분이기때문에 셋째로는- 그분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에 가기때문에.. 저도 - 처음에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무궁한 능력만 보였었지요- 근데 반대로 만약 신이 이런 절대전능한 능력이 없다면 어떨까? 과연 그러한 신이 있다면 과연 그 신은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신인가? 그런대 놀라운 사실은 - 우리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 모든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모두다 버리신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 -진짜로 이 모든것을 다 버리시고 - 오직 우릴 향한 그분의 마음만 가지고 내려오신적이 있으셨지요. 나사렛 촌동네 출신에 , 직업은 3D업종인 목수에 , 학력도 무졸인데다가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잘생긴 외모를 가진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낮고 천하게 오신이유가 - 그 무한하신 능력보다 그 거룩하심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바로 그분의 마음만을 봐주길 원했던것이 아닐까하고말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부모마음 알아주길 원하듯 .... 이제는 날위해 십자가 져주신 -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이 더 크게 보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이제 뒤늦게 그분의 짝사랑을 깨닫고 나서 그분의 뜻때로 살려고 노력 한다는점.. 때론 넘어질때도 있지요.. 그럴때 더 그분의 사랑을 더 깨닫게 됩니다. 아...난 역시 죄인이구나...모든것이 은혜구나 하고 말입니다. cf.저뿐만 아니라 - 주위 모든사람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내어주셨으니- 그 사람들을 함부로 생각할수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하라...물론 어려운 계명이지만- 나중에 그들이 받을 형벌을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 성경에 보면 서로 사랑하라. 다투지말라. 싸우지말라. 등등 여러 말이 나오죠?? 예수님을 믿고 로보트처럼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성인군자가 된다면- 이러한 믿는자들에게 주시는 명령들이 필요했을까요? 또 바울이 자신이 개척한 여러 교회에게 보낸 서신들을 읽어보면- 정말 믿는사람이 그럴수있을까 할정도로 가관이 아닌 교회도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한 사랑이 생기냐고요?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은 로보트가 아닙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 다른면에서 보면 가능합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는것(성화)은 가능합니다. 왜냐면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기때문에 그사랑을 알고 우리안에 계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분께 기대어 그 사랑을 실천하는것도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어렵게 제시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자 2000년전에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고, 죄로부터 돌이키고 그분의 뜻에따라 살아가겠다고 마음먹고-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기만하면 구원받는것입니다. 참쉽죠? 근데 아이러니 하게도 - 길가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서 신은 있다고 , 지구는 창조되었다고 이걸믿으라고 붙잡고 말해보시죠- 다들 미친 사람 취급할겁니다. 형제님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다는것 자체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거의- 아니 완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불가능한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성령님밖에 없습니다. 형제님께서 믿고 계시다는것 자체가!! 바로 형제님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것이고- 믿고 구원받았으며 이미 거듭난 상태라는것을 증명하는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고 그 믿음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 항상 평안하시길~샬롬^^
2011-02-02 20:58:11 | 최홍진
안녕하세요. 그동안 자료라는 자료는 다 공짜로 다운받아 보다가 게시판에는 처음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간단히 제 소개를 먼저 드린다면 저는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고 교회다닌지는 4년 7개월 가량 된 나이가 좀 있는 청년입니다. 교회에는 4년가량 계속 출석만 하는 주일 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김문수형제님의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고 이 keepbible.com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이트에 있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계속들어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이트를 알게된 것이 저에게는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 다음카페에서도 이 사이트를 많이 알리고 있습니다. 너무 자주 광고하게 되면 경고를 받게 되어서 한달에 한번 정도 알게 모르게 광고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궁금한 사항이 두가지 있어서 여쭈어 보려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경말씀중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목사님 말씀을 듣고서 현재 그렇게 분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갈 3:29절 말씀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   어떤분들은 이 말씀 때문에 이스라엘에 교회를 적용해도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할런지요..?   그리고 두번째는 가능하시면 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구원받은뒤로 거룩하게 살아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음카페에서 우연찮게 구원파(박oo계열) 어떤 분하고 대화할 기회가 있어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구원의 확신이 안생긴다고 해서 저는 이 사이트를 추천해주고 말씀을 많이 들어보라고 권유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구원을 받고 나서 어떤 행동의 변화가 생기느냐고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나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노력하게 되더라'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럼 '사랑도 생기나요?'라고 물어 보시더군요. 한 1분가량  글을 쓸수 없을 정도로 멍한상태였습니다. 저는 이제껏 거룩하려고만 했지 다른사람에 대한 사랑은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제가 문제가 있는것은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상충이 안되겠습니까..?   아무쪼록 알고 계시거나 저에게 조언의 말씀을 해주실 수 있는 분들의 도움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1:4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2-02 18:53:28 | 유해용
저는 주석이 없어서 볼 수도 없습니다만, 전후 문맥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14절 앞부분에서 "열한 제자가 " , 또 19절 앞부분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라고 되어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말씀하신 것이 분명해집니다. 15정과 16절에서의 "믿음"은 15절 끝에서 "모든 창조물에게"라고 했으므로 열한 제자들만의 믿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믿는 자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고요. 17절의 "믿는 자"는 14절 끝부분에서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라고 꾸짖은 것과 이어져서 "믿는 자"는으로 연결 되므로 열한 제자로 이해가 됩니다. 16절 말씀때문에 조금의 혼동이 생기는 것 같은데 16절을 15절에 포함시고 15,16절을 하나의 "의미 문구(단락)"으로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2011-01-24 17:06:29 | 양희석
. 제가 부족하지만 한 말씀드리자면, 우선 먼저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현상/환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상/환경을 근거로 해서 성경말씀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오류와 잘못에 빠질 확률이 대단히 커집니다. 저는 막 16:17 말씀의 "믿는 자"는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본문을 우선으로 하여 앞뒤 문맥을 통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믿는 자는" 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에게는" 이라고 말씀하셨더라도 그 "너희"를 11 사도로 한정해야 할지 아니면 11 사도를 대표로하는 초대 교회 시기의 모든 성도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신약시대 전반에 걸쳐 모든 성도라고 해야 할지 해석해야만 합니다. 이런 경우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믿는 자는" 이라고 하셨는데 이 "믿는 자"를 11 사도로 한정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조차도 "믿는 자"를 11 사도로 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말씀은 고전 12 장의 은사에 대한 말씀과 함께 참으로 수많은 의견들이 존재합니다. 제가 한두 마디로 이렇다 저렇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제 생각은 - 제가 저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나름 열심히 생각하고 묵상하고 내린 결론은 그렇습니다. 샬롬~~
2011-01-24 11:12:57 | 이재연
15절에 나와 있듯이 그들에게 / 너희는 : 11명의 제자를 말함 17절에 믿는 자들에게 말씀은 유대인 및 이방인 즉 15절에 나와있듯이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 하라고 말씀하심 중요한 것은 11명의 제자가 표적을 행할때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아울러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믿는다고 표적을 행한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것임 18절을 잘보시면 11명의 제자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20절을 보시면 그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매 여기서 그들은 11명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20절 후반부에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로 말씀을 확증해 라고 되어 있듯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정도면 얼마나 복음전하기가 힘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1제자에게 표적들로 말씀을 확증해 주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2011-01-21 02:39:24 | 고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