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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3주에 걸쳐 성경 신자들이 믿는 교리를 요약/정리하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신자들의 교리 문답 01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478   성경 신자들의 교리 문답 02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480   성경 신자들의 교리 문답 03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481   샬롬
2013-09-17 14:22:35 | 관리자
Replenish 설명   replenish (ed) - (7x) –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처음 받은 수준대로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의 시작 부분에 있는 ‘re’는 ‘re’라는 접두어를 가진 대부분의 영어 단어들처럼 ‘다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단어의 뿌리는 중세 영어 ‘replenisshen’에서 나오고 이것은 중세 불어인 ‘repleniss’에서 나온다. 이 불어 단어는 ‘replenir’의 가지에서 나왔으며 단순히 “채우다; 사람이나 짐승으로 채우다; 저장하다”를 뜻한다. 이것은 어근 ‘re’와 ‘plenus’라는 단어를 합쳐서 만든 라틴어에서 나온 게 아니다.   예레미야 31장 25절에서 replenish는 ‘흡족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satiate’라는 단어와 평행 단어로 쓰였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반복 용례로서 ‘satiate’와 ‘replenish’가 같은 뜻임을 명백히 보여 준다.   내가 피곤한 혼을 흡족하게 하며 모든 슬퍼하는 혼을 채워 주었노라, 하시니라(렘31:25).For I have satiated the weary soul, and I have replenished every sorrowful soul.   한편 에스겔서 26장 2절에서는 ‘replenish’는 ‘피폐하게 되었다’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 역시 두 단어의 대조를 보여 주는 히브리어의 용례이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즉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 하였도다(겔26;2). I shall be replenished, [now] she is laid waste:   창세기 1장 28절은 자원들을 사용해서 - 정복하고 복종시켜서 - 처음에 받은 수준으로 땅을 가득 채우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부분이 그분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물 중 어떤 것도 멸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시19; 롬1). 1.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아담과 이브는 많은 아이의 출생을 통해서 스스로 번성해야만 하였다(하나님의 명령이었으니까). 그런데 땅의 경우 그들은 땅의 자원들을 사용하거나 복종시켜 처음에 하나님이 주신 상태로 땅을 가득 채워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동물과 식물의 수를 임의대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다(시19:1-4; 롬1:20). 어떤 생물 종을 없애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도록 하는 것을 -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창조하셨다는 증거를 - 없애는 것이다.   2. 창세기 9장 1절-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노아는 모든 동물과 식물의 종들을 지켜야 했다. 홍수 이후에는 많은 동물들이 이제 2마리만 남았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 쉽게 없어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노아는 어떤 종도 사라지지 않도록 채우고 지켜야 했다. 3. 이사야 2장 5-7절- 오 야곱의 집이여,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걷자.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의 집을 버리셨나이다. 그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것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쟁이가 되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나이다. 그들의 땅에는 또한 은과 금이 가득하여 그들의 보물은 끝이 없고 그들의 땅에는 또한 말이 가득하여 그들의 병거가 끝이 없으며   여기서 이사야는 야곱의 집을 불러 주의 빛 안에서 걸을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에게서가 난 것이 아니라 동쪽에서 온 것들을 생계 유지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을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스스로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공급하셨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했으나 그들은 낯선 자들의 자손들에 의해 가득 채워졌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가 난 것이 아니라 낯선 자들로부터 난 것들을 가지고 이전처럼 동일한 수준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4. 이사야 23장 2절- 섬의 거주민들아, 너희는 잠잠할지어다. 바다를 넘나드는 시돈의 상인들이 너를 가득히 채웠도다.   섬의 거주민들은 그들이 매일 필요로 한 것을 시돈 상인들로부터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생계를 매일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하려 했다.  5. 예레미야 31장25절- 내가 피곤한 혼을 흡족하게 하며 모든 슬퍼하는 혼을 채워 주었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replenish는 ‘충분히 만족시키다’(satiate)와 평행을 이루는 단어로서 그 의미는 혼을 흡족하게 하여 한때 그 혼이 피곤하지 않았던 그 지점으로 완전히 되돌린다는 것(이전과 동일한 수준으로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 시편23편...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restoreth) 6. 에스겔 26장 2절- 사람의 아들아, 두로가 예루살렘을 대적하며 말하기를, 아하, 백성들의 문이던 그녀가 부서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 즉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 하였도다.   여기서 ‘replenish’는 ‘피폐하게 되었다’(laid waste) - 완전히 텅 빈 상태 - 와 대조를 이룬다. 두로는 예루살렘에서 두로 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통해 예루살렘의 부의 손실이 이제 자신의 것이 될 것을 자랑하고 있다. 즉 예루살렘의 손실은 두로의 이득이 되어 두로가 원래의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 에스겔 27장 25절- 다시스의 배들이 네 시장에서 너에 대하여 노래하였으며 너는 충만히 채워져서 바다들의 한 가운데서 심히 영화롭게 되었도다.   에스겔은 계속해서 두로에 대한 대언을 한다. 두로는 다시스의 배들을 통해서 자기들의 매일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받고 있다고 선언한다.   결론 1) 사람은 스스로 수를 늘려 번성해야 했지만 땅의 식물과 동물들은 처음 받은 상태로 가득 채워야 했다. 이것은 신명기 22장 7절 말씀을 설명한다.    신22:7- 어미 새는 반드시 놓아주고 새끼를 취할지니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네 날들을 길게 하리라.    만약 히브리 사람들이 어미와 새끼를 모두 죽였다면 그 종들은 곧 멸종했을 것이다.   2) 켄달(이 글의 저자, Dr. Bob Kendall)의 식품 저장 방의 예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만든 예가 있다. 나는 3개월 동안 출장 갈 예정이어서 당신에게 우리 집에 와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사용하면 아주 편하게 지낼 것을 요청한다. 내가 식품 저장 방을 열자 거기에는 땅콩버터가 담긴 5개의 병이 있기에 즉시 물어본다. “땅콩버터가 왜 이리 많아요? 혹시 세일했나요? 어째서 당신은 5병이나 가지고 있나요?” 나는 대답합니다, “아니요, 그건 그냥 켄달 가족의 것이에요. 모두 다 켄달의 것이지요. 내 남동생들(Mr. Kendalls), 내 어머니(Mrs. Kendall), 사촌들(Mr and Mrs. Kendalls)은 식품 저장 방에 5개의 땅콩버터 병을 보관하고 있어요. 그것은 우리 가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심지어 땅콩버터를 다 먹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돌아왔을 때 5개의 땅콩버터 병이 있으면 좋겠어요. 식탁에 이전 수준으로 가득 채워서요. 그래야 내 식품 저장 방이 계속해서 켄달 네 집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3) 또 다른 예시만약 내가 당신을 불러 내 냉장고를 replenish 하라고 부탁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만 할까요?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만약 처음에 냉장고 안에 얼마만큼의 우유가 있었고 몇 개의 버터 조각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코 냉장고를 replenish 할 수 없습니다.           4) ‘replenish’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기 훨씬 이전에 원래 지구가 있었고 그 안에 동물과 식물이 살았다고 주장하는 이론 - ‘재창조 이론’ 혹은 ‘갭 이론’ - 이 잘못된 가르침임을 보여 줍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 가정(재창조이론)이 사실이라 해도 아담과 이브가 이전의 지구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땅을 다시 채울 수(re-fill)있겠습니까?   5) 간단히 말해서, ‘replenish’는 당신이 ‘어떤 것을 발견한 수준으로 그것을 충만히 채워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과 영어 사전의 용례가 이것을 지지합니다.   (*) 17세기 초 KJB가 기록된 때에 ‘replenish’라는 단어는 현대 사전의 용례처럼 ‘다시 채우다’의 의미로 결코 쓰이지 않았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1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29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9-14 16:54:2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3-09-12 15:14:31 | 오광일
안녕하세요?   창세기 1장 18절의 replenish를 '다시 채우다'로 오해하는 분들이 더러 있어서 켄달 박사님이 영어로 설명해 준 글을 올립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replenish의 모든 구절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replenish (ed) - (7x) – simply defined this word means to keep something at the same level as it was received.  The “re” beginning this word does not mean “again” as in most words with the “re” prefix.  It’s root is from the Middle English replenisshen, [note the spelling] which is the same as the Middle French repleniss-, from the stem of replenir, which means to fill; to fill with persons or animals; to stock.  It is not from the Latin word which is a combination of the prefix “re” and “plenus.”  [note spelling]  In Jer 31:25 replenish is paralleled to “satiate” which means also to fill completely.  It is contrasted in Ezek 26:2 with “laid waste.”  Gen 1:28 means to use the resources (subdue) and then “fill it back up” to its previous level. Don’t allow any of God’s creation to become extinct as every part of creation reveals God Himself (Ps 19; Rom 1)   Genesis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Adam and Eve were to multiply through the birth of many children.  However, they were to use the resources of the earth (subdue) and then “fill it back up” to its previous level.  God did not create an arbitrary number of each animal and plant.  All of the creation is a reflection of God Himself (Ps 19:1-4, Rom 1:20).  To erase a species is to take away a visible representation of the invisible God.   Genesis 9:1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Noah was to keep all of the species of animals and plants.  There were only 2 of many animals so it would have been very easy to eliminate a reflection of God’s glory.  Noah was to make sure no species was erased.   Isaiah 2:5 O house of Jacob, come ye, and let us walk in the light of the LORD. 6 Therefore thou [God] hast forsaken thy people the house of Jacob, because they be replenished from the east, and are soothsayers like the Philistines, and they please themselves in the children of strangers. 7 Their land also is full of silver and gold, neither is there any end of their treasures; their land is also full of horses, neither is there any end of their chariots:  Isaiah calling the house of Jacob back to walk in the light of the LORD.  God hast forsaken His people because they are receiving their restored sustenance, not from Him, but from the east; they please themselves in the children of strangers.  They are not pleasing themselves in the LORD.  God provided, the Hebrews consumed it, but were replenished by the children of strangers; they were kept at the same level of sustenance, not from God, but from strangers.   Isaiah 23:2 Be still, ye inhabitants of the isle; thou whom the merchants of Zidon, that pass over the sea, have replenished.  The inhabitants of the isle are keeping their sustenance at the same level daily by receiving what they daily need from the merchants of Zidon.   Jeremiah 31:25 For I have satiated the weary soul, and I have replenished every sorrowful soul. Here replenish is paralleled to “satiate” which means also to fill completely back to the point where the soul once was, not weary.  Cf Psalm 23 “…restoreth my soul…”   Ezekiel 26:2 Son of man, because that Tyrus hath said against Jerusalem, Aha, she is  broken that was the gates of the people: she is turned unto me: I shall be  replenished, now she is laid waste:   Here replenish is contrasted in with “laid waste”, the complete state of emptiness.  Tyrus is boasting that the loss of Jerusalem’s wealth will now be hers through those fleeing from Jerusalem to her.  Jerusalem’s loss was Tyrus’ gain back to a full state.   Ezekiel 27:25 The ships of Tarshish did sing of thee in thy market: and thou wast  replenished, and made very glorious in the midst of the seas.  Ezekiel continues his prophecy against Tyrus by proclaiming that Tyrus also kept  here daily needs filled through the ships of Tarshish.   Conclusions   1) Man himself was to multiply, but he was to replenish the plants and animals.  This explains Deut 22:7.  Deuteronomy 22:7 But thou shalt in any wise let the dam go, and take the young  to thee;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and that thou mayest prolong thy days. If the Hebrews killed both the dam and the young, the species would soon be extinct. 2)  The illustration of the Kendall’s pantry   Here’s a silly made-up illustration.  I am going to be gone for 3 months and I ask you to live in my house and “make yourself at home” using all that is there for yourself.  When I open the pantry you cannot help but notice that we have 5 jars of peanut butter which prompts you to ask, “Was peanut butter on sale?  Is that why you have 5 jars?”  I reply, “No, it’s just a Kendall-thing.  All of the Kendall’s—my brothers, my mother, cousins—we all keep 5 jars of peanut butter in our pantries.  It’s a reflection of the Kendall’s.” So I tell you to eat everything you desire, even the peanut butter.  But when I return please have 5 jars of peanut butter; replenish the cupboard.  That way my pantry will continue to reflect the Kendall’s. 3) Another illustration  If I called you and asked you to replenish my refrigerator, what would you have to know?   What was in it in the first place.  You cannot replenish if you did not know how many gallons of milk, how many sticks of butter, etc first were in the refrigerator. 4)  This definition eliminates the false teaching that there was an early earth before Adam and Eve that had animals and plants upon it.  Even if this assumption is true, how could Adam and Eve re-fill the earth if they first did not know what occupied that previous earth? 5) Simply stated, replenish means to keep something at the level you found it.   이 외에 다음 글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1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29  
2013-09-06 14:58:11 | 관리자
완전한 것이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나 보네요, 처음 듣는 일입니다. 새롭고 또 독특한 주장이네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36
2013-08-28 15:22:49 | 관리자
안녕하세요?   게시판을 통해 질문하시는 분께 먼저 성경지킴이 상단의 구글 검색 등을 이용해 직접 찾아보실 것을 권면하는 이유는 결코 답변하는 것이 번거로워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직접 자료를 찾고 킹제임스 성경의 구절과 대조하며 성경을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키우시는 것이 모든 분께 훨씬 유익하기 때문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벧전3:19절에 대한 의문은 답변으로 제시해 주신 글들을 정독하시면 충분히 풀리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구절 등으로 해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 실례로 유명한 기독출판사 홍성사를 경영하는 모 목사도 있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 옆에 문화원을 개설하고 천주교의 사제와 수녀, 불교의 승려 등을 초청해 교인들 앞에서 강의하게 하는 등 각종 배교적 일들을 행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교계의 유명한 지도자라 해서 그 주장을 따르거나 그것에 영향을 받아 마음이 흔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때문에 자신에게 닥치는 영적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키우는 것은 타인(특히, 유명 목사와 신학자)의 권위에 무조건 종속되어 버리는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유명한 교계 지도자들의 주장이 항상 옳을 수 없고 더구나 요즘같이 배교가 일반화된 시대에는 많은 목사와 신학자들이 성경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기에 성도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바른 교리를 체계화 하는 것만이 올바른 믿음 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제아무리 으리으리한 교회 건물을 지어놓고 각양 다양한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라도 새벽기도회나 은사주의 집회, 두날개, 관상기도, 알파코스 등을 행하는 교회들은 목회자에게 교인들을 종속시키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원천차단하는 바르지 못한 교회입니다.   목사가 자신의 부족함까지도 솔직히 내보이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회, 지역 교회의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성경을 기준으로 능히 분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교회가 바른 교회란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상 당대 최고 지성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진리를 만난 후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던 세상의 권위와 명성을 쓸모없는 배설물로 여긴 사도 바울의 담대한 믿음의 고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 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3:8~9)" 창조,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구원, 성경, 교회, 재림 등 기독교의 바탕을 이루는 핵심 교리들의 본질은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내용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간혹 자신을 성경 신자라고 분명하게 얘기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후에 스스로 고백한 믿음을 저버리고 성경 보존의 진리를 부인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주로 뭘 좀 안다는 식자층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바르지 못한 교리와 주장을 주입 당했기 때문이지요. 그 누군가는 대부분 교계의 권위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일 것입니다.   성경 보존의 진리를 비웃고 짓밟는 신학자들의 해묵은 주장은 무엇입니까? '개역이나 개정개역판 성경은 매우 훌륭한 성경이고 그것만으로도 바른  신앙생활 하는 것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악한 열매를 거두는 사람들의 주장에서 참고할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지킴이에 있는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완전한 성경으로서의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증거들 대부분은 차근차근 공부하면 초등학생도 이해할 만한 내용입니다. 바른 믿음의 근간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하고 쉽고 단순한 것이지 복잡다단한 많은 설명과 현란한 신학적 지식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완전한 성경이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믿음을 기뻐하다가 신학자들과 원어전문가들의 현란한 요설에 넘어가 고귀한 믿음을 져버린 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벧전3:19절이나 다른 성경의 교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교계의 지도자가 자신의 명성과 권위를 무기로 해괴한 주장을 펼치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말고 내가 평소에 배우고 믿었던 바르고 명확한 성경의 교리를 확고하게 붙잡고 그런 잘못된 주장들을 분별하고 걸러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바른 신학적 관점에서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습관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질문하신 내용과 연결하여 평소에 생각하던 몇 가지를 덧붙여 보았습니다. 한 가지 질문의 답을 얻는 것도 유익이지만 더불어 근본적인 문제들을 생각하고 점검하는 것은 더 큰 유익이라 생각합니다. 읽으시는 분들께 조그만 유익이라도 전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네가 내게 들은 건전한 말씀들의 그 틀을 굳게 붙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네게 맡겨진 그 선한 것을 지키라.(딤후1:13~14)"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2013-08-23 17:24:22 | 관리자
참고로 저는 송인규 교수에 대해 라는 책을 통해 아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어느 분께서 이분의 성경관이나 믿음이 우리와 다르다고 하셔서 참고로 알려드립니다. 그러니 이분의 글은 각자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DSJ
2013-08-23 17:16:47 | 관리자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이교도들, 과거 우리 조상들의 구원 문제   복음이 제시되 때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복음을 회피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이교도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의 구원 문제를 끄집어냅니다. 또 믿는다고 하는 분들 중에서도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다음 글은 한국 장로교의 지성을 대표하는 송인규 교수의 글입니다. 이 글은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온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라는 좋은 책에 있습니다. 그 글 자체가 개역성경을 인용하였으므로 그대로 인용합니다. http://www.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58193   참고로 이것은 다음의 블로그에서 가져왔으며 저는 그 블로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http://www.cyworld.com/cissero2/2848527   --------------------------------- 그리스도 이전 사람들의 구원 문제 -송인규 교수-   복음을 증거하다 보면 적잖은 이들이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조상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우리의 조상 가운데는 청렴하고 의롭게 산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구원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냐며 논지를 펼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질문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만, 막상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에 대해 물으면 머뭇거리며 별 신통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정반대 입장 ―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지옥에 간다 ― 으로 기웁니다. 즉, 그들은 죄 가운데 태어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평생을 살기 때문에 종국에는 모두가 지옥행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반 계시의 구원적 가치   물론 이런 가혹한 견해에 대해 즉각적인 반격이 들어옵니다. 성경은 오히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19~20).   이 구절에는 적어도 세 가지 사항이 나타납니다.   (i)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 세계에 하나님을 알만한 확실한 증거를 두셨다.(ii) 그 증거는 하나님의 영원하심, 능력, 신적 속성에 대한 것이다.(iii) 모든 인간은 만물 가운데 나타난 분명한 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있다.   이렇게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신 일을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사실 일반 계시의 항목 가운데에는 롬2:14~15에서 알 수 잇듯이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도 포함지만, 논의를 간략히 진행하기 위해서 그 항목은 무시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일반 계시의 구원적 가치에 대한 것으로 좁혀집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일반 계시만으로도(그가 옳게 반응하는 것을 전제할 때) 충분히 구원에 이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의 차이가 세 가지 입장을 만들어 냅니다.      |--------------------|---------------------|A 개방파                   B 신중파             C 강경파   이해를 돕기 위해서 도표의 오른쪽 입장 C부터 설명하겠습니다.   C 강경파: 이 입장에 의하면 일반 계시는 전혀 구원적 가치를 갖지 못합니다. 이유인즉, 비록 하나님이 자연 만물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지만, 타락한 인간은 그 지성이 죄의 영향[전문 용어로는 ‘지성에 대한 죄의 영향’(noetic effect of sin)이라고 함]을 받아 일반 계시에 의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국은 우상 숭배로 끝나버린다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 21~23)는 말씀을 기초하여 주장을 피력합니다.   A 개방파: 상기의 내용에 맞서 정반대의 주장이 개방파의 입장입니다. 일반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나 후나 상관없이 늘 상당한 정도의 구원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전능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몹시도 열망하는 분(딤전2: 4)이기 때문에, 일반 계시를 통해서라도 얼마든지 구원 사역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둘째, 롬1: 21~23절에 대한 C 강경파의 주장에 반기를 듭니다. 즉, 일반 계시를 접한 모든 인간이 다 롬1: 21~23절처럼 우상 숭배로 빠져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고 있었던 그 당시 로마인들이나 이집트인들의 경우는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현상을 모든 인류에 확대 해석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의 근거로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만일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의 빛을 좇아 경건히 살았다면, 그는 얼마든지 구원의 반열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B 신중파: 이 입장은 A와 C 사이의 중도파로서, 구원과 관련하여 일반 계시의 상대적 가치를 주장합니다. 즉, 특별 계시(구약의 율법, 그리스도, 성경 등)가 활약하는 경우에는 일반 계시의 구원적 가치를 내세울 필요가 없지만, 그리스도 이전에 살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일반 계시가 작게나마 구원적 가치를 발휘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전체의 판도를 보면 A 개방파는 일부 급진적인 복음주의자들, 로마 가톨릭(RC), 다수의 신학적 자유주의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B 신중파는 상당히 많은 복음주의자들(특히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입장입니다. C 강경파는 복음주의자들 중에서도 주로 칼빈주의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은 구원을 받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조금 전까지 설명했듯 일반 계시에 구원적 가치를 어느 정도로 인정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역시 세 가지 입장을 거론하고자 합니다.     |-------------------|---------------------|  D 낙관설                E 일부설             F 정죄설   D 낙관설은 그리스도 이전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이들이 구원을 받으리라 보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분명 일반 계시의 구원적 가치를 크게 평가하는 A 개방파의 입장과 일치합니다. 또 B 신중파의 입장과도 함께 주장될 수 있습니다. F 정죄설은 그리스도 이전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았으나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 아는 지식을 우상 숭배와 맞바꾸었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죄 받아 결국에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C 강경파의 단골 메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 일부설의 입장은 그리스도 이전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예외적으로나마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구원 받게 되는 근거에 따라, 다시 두 갈래로 나뉩니다. 즉, B 신중파의 입장에 따라 ― 일반 계시의 구원적 가치를 인정하여 ― 일부설을 주장할 수도 있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예외적으로 특별 계시가 허락되어 일부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 ― 특별 계시가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는 것 ― 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기 전 사람들 가운데 특별 계시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이 특별 계시를 받은 주류(主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계열과 무관한 다른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주된 사역과 별도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특별 계시의 은택을 입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멜기세덱(창14: 18~20), 모세의 장인 이드로(출18: 9~12), 욥(욥1: 1, 5) 세 사람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나타난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과 교제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혹시 이들 뿐만 아니라 기타 예외적인 소수에게도 특별 계시의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영위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 조상은 구원을 받았을까요? 필자는 이에 대해 확정적으로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는 주장할 수 있습니다. D 낙관설은 일반 계시의 구원적 가치를 과장하여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지므로 필자로서는 지지하기가 힘듭니다. 또 F 정죄설 역시 성경의 증거 ― 성경에 적어도 멜기세덱, 이드로, 욥 세 사람만큼은 이스라엘과 무관하게 구원을 받는 인물로 묘사되었으니 ― 에 어긋나기 때문에 배척하는 바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F 정죄설을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여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E 일부설 뿐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 성경의 증거만을 기초로 한다면 ― ‘삼인 예외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세 사람만큼은 구원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외에 10명이 더 있을지, 50명이 더 있을지,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 조상이 끼어 있을지, 아니면 우리 조상은 하나도 없고 다른 이방 민족 가운데 어떤 이가 될 지……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   훌륭한 분석가이신 송인규 교수의  E 일부설(삼인 예외설)은 다음을 보시면 이해하실 것입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78   <우리의 신앙이 분별력과 만나기까지>는 좋은 책이니 읽고 지성을 훈련시키기 바랍니다.   샬롬
2013-08-23 09:44:59 | 관리자
이교도들은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순신 장군은 복음을 듣지 못했는데 그래도 지옥에 가나요? 세종대왕은요? 아마존 밀림에 사는 미개인들은요?”라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간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이 불공평 혹은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레이시 목사님의 천국과 지옥 바로 알기의 지옥 편 가운데 제5장, 지옥의 등급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라는 사실은 그분께서 구원받지 못한 모든 죄인들에게 내리실 형벌 선고가 의로울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어느 누구도 지옥에서 불공정하게 형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교도 불신자들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누군가 필연적으로 물을 것입니다. “이교도 불신자들은 복음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지옥에 던져질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공정하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에게 답변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 율법 밖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또한 율법 밖에서 멸망하고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자들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으리니 (이는 율법을 듣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아니하고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을 통해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행할 때에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 이런 심판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이루어지리라(롬2:11-16).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 양심이 있으며 그 양심이 그들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창조주께서 그것을 그들의 마음에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양심은 이교도들이 유죄임을 증언하면서 그들 스스로 자신들에게 율법이 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없이 죄를 범한 많은 사람들은 또한 복음 없이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빛을 받지 못한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실까요?”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빛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더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이것은 그 빛에 대해 증언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통해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그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해 증언하도록 보내어진 자더라. 그 빛은 참 빛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느니라(요1:4-9).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붙잡아 두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18-20).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진리 곧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분이 의로우시고 사람들은 불의하다는 진리를 충분히 알 만한 빛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롬1:18).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불의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 안에 분명히 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성경은 그것이 그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를 봄으로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을 분명히 압니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원토록 능력이 있으시며 삼위일체라는 것을 압니다. 성경이 없이도 누구나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부인하는 모든 이방 종교 역시 영원한 능력을 지닌 절대자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기독교를 부인하는 종교들 중 대부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과 비슷한 신을 숭배해 왔습니다. 단지 여호와의 증인들과 몰몬 교도들과 현대주의자들과 같은 아주 저속한 이교도들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단호히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빛을 주셨고 만일 사람이 그 빛을 따르면 그에게 좀 더 많은 빛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만일 사람이 자기가 받은 그 빛을 따른다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 더 많은 빛을 주실 것입니다.  또 너희가 마음을 다하여 나를 찾으면 나를 찾고 나를 만나리라(렘29:13).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정글이나 외딴 섬이나 멀리 떨어진 산에 살던 사람들에게 지옥 형벌을 선고하시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과 예레미야서 29장 13절을 다시 읽어 보기 바랍니다. 만일 외딴 지역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빛을 진심으로 좇았다면,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복음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이 변명할 수 없다.”(롬1:20)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2013-08-22 16:19:48 | 관리자
이제 종교통합 배도의 물결이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종교 간의 벽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20/2013082000202.html?news_Head1   2013년 종교 올림픽 WCC를 한국에서 개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명성 교회 김삼환 목사의 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바른 성도들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샬롬 
2013-08-20 10:45:39 | 관리자
이제는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인 자격을 중지한다고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십일조 안 내는 교인은 자격 정지 추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12/2013081202499.html?news_Head3   날이 가면서 교인 수가 줄어들어 교회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코앞에 닥치다 보니 이런 고육지책으로 교회를 유지해 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목사들이 생깁니다.   과연 법으로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요? 세상의 일반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올 정도로 교회의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교인 감소 현상은 이미 미국에서 겪었던 일이고 누구나 예상했던 일입니다. 건물을 유지하려 하지 말고 성도들을 바른 예배자로 성장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책을 읽고 목회자가 변해야 교회가 삽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186   우리 주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큰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 원합니다.   샬롬
2013-08-13 12:36:51 | 관리자
이렇게 죄와 죄들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우리말의 특성 상 목사가 강단에 서서 선포하는 경우 죄의 용서 혹은 짧게 죄 용서 혹은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지 죄들의 용서를 받으라고 길게 복수의 죄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목사와 성도들이 서로 이해하며 들으면 됩니다. 다만 단복수가 구분되지 않은 개역성경으로 교리를 세우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만은 명심해야 합니다. 샬롬
2013-07-25 10:55:48 | 관리자
죄와 죄들의 차이   참고로 이 글의 앞부분은 워치만 니의 글입니다. 니의 글은 많은 경우 분명한데 어떤 경우에는 나누지 않아도 될 것까지 심하게 나누므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글은 괜찮아서 올립니다. 워치만 니 말고 지방 교회의 위트니스 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영해의 대가로서 매우 이상한 해석을 취하므로 그의 글은 아예 처음부터 읽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두 사람의 책들이 다 지방 교회가 운영하는 복음 서원에서 나오므로 조심하고 경계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죄와 죄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죄는 단수이고 죄들은 복수이다. 우리는 죄와 죄들의 차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죄와 죄들을 구분할 줄 모른다면, 당신은 구원에 대하여도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죄와 죄들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자기의 구원 여부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무엇이고 또 죄들이란 무엇인가? 간단한 정의를 내리겠다. 죄는 당신 안에서 당신에게 죄들을 범하게 하는 능력이고, 죄들은 밖으로 범한 낱낱의 죄들을 가리킨다.   죄란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죄의 뿌리, 죄의 근원 혹은 본죄, 원죄 등의 명사는 쓰지 않겠다. 이 명사들은 다 신학자들이 지어낸 것이므로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겠다. 단순한 것이 좋다. 여기서 우리는 체험에서 이것을 보기로 하자. 우리 속에서 우리를 사욕과 정욕의 길로 향하게 하고 그런 자연스런 경향을 갖도록 우리를 지배하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우리를 강요하고 재촉하는 죄뿐 아니라 밖으로 행한 낱낱의 죄들도 있다. 성경에서 죄들은 행위에 속하고 죄는 생명에 속한다. 죄들은 우리의 손과 발과 마음 곧 우리 온 몸으로 행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몸으로 행한 일들이다. 그러나 죄는 어떠한가? 죄는 우리의 육체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일종의 율이다. 항상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죄이다.  우리가 죄와 죄들을 잘 구분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완전히 보여 준다. 이 여덟 장의 성경 말씀에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1장부터 5장 11절까지는 죄(sin)보다는 주로 죄들(sins)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2절부터 8장까지는 주로 죄들이 아닌 죄를 보여 준다.   즉 로마서 1장부터 5장 11절까지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로마서 5장 12절 이후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어떠함 곧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죄는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이 어떠한가를 말해 준다.   로마서 5장 11절 이전의 말씀은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서의 문제는 살아나게 하는 필요보다는 범한 낱낱의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5장 12절 이후의 말씀, 둘째 단락에서 우리는 몸의 지체들 안에 있는 법, 즉 우리 속에 있는 강하고 힘센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임을 알게 된다. 이 죄가 우리를 끌어당겨 죄를 짓게 강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은 죄들이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들을 범하도록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이므로, 이 죄에 대해서는 해방될 필요가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한번은 어느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가 대화 중에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라는 말을 사용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서 성경의 어느 곳에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라는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많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한 군데만 보여 달라고 말했다. 그는 “당신은 없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체에서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라고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죄들의 용서(the forgiveness of sins)’라고 말합니다. 용서받는 것은 죄들이지 죄가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을 신뢰하지 않고 성경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게 “니 선생님, 정말 그렇군요. 성경에서 죄들이 용서받는 것을 말할 때마다 복수를 표시하는 ‘s’를 붙였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용서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죄들임을 볼 수 있다.   죄들은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신 안에 있는 어떤 것, 강하고 힘세며 당신에게 죄를 범하도록 재촉하는 그것은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고 그것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당신이 그것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갖지 않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죄들은 용서받을 때 해결된다. 그러나 죄는 그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맺지 않을 때 해결된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고 낱낱이 행한 것이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죄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 번도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한 적이 없고 항상 죄들을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동시에 죄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나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음을 장담할 수 있다. 성경에는 죄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있어도 죄들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없다. 왜 그런가? 당신 속에서 당신을 억압하고 죄들을 범하게 하는 그것에 대하여 당신은 다만 거기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성경에서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비교하여 제시해 보겠다. 성경에서 죄는 육체 안에 있고, 죄들은 행위에 속한다고 말한다.   죄는 우리 몸에서 원칙(생명의 원칙)이고, 죄들은 우리 몸에서 사실(생명의 사실)이다.죄는 지체 안에 있는 법이고, 죄들은 사실적인 범죄요, 실제로 행한 것이다.죄는 우리의 어떠함과 관계있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과 관계있다.죄는 우리의 어떠함에 속하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에 속한다. 죄의 범위는 생명의 범위이고, 죄들의 범위는 양심의 범위이다. (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능력이고 죄들은 양심의 능력이다. 사람은 생명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밖으로 사람이 많은 죄들을 범할 때 양심 안에 참소와 불안이 있게 된다.)죄는 총체적인 것이고, 죄들은 낱낱의 것이다.죄는 해방 받을 필요가 있고, 죄들은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죄는 성화와 관련되고(롬5:12-8장), 죄들은 칭의와 관련된다(롬1장-5:11).죄는 사람의 본성 안에 있고, 죄들은 사람의 길에 있다.   비유로 말하자면, 죄는 나무와 같고, 죄들은 나무의 열매와 같다.   많은 경우,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죄인을 빚진 사람에 비유한다. 우리는 빚을 지는 것이 아주 좋지 않은 일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빚을 진 사람에게 있어서 빚을 진 것도 문제이지만 그의 속에 빚을 지는 성향이 있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빚을 지다 보면 남의 돈을 빌려 쓰고서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빚진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남에게 빌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누구에게서 이삼백 원 또는 이삼천 원을 빌렸는데 나중에 갚을 능력이 없어서 친척이나 형제 또는 친구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 그 빚을 갚아 주었다 하자. 그런데도 삼사 일 후에 당신이 또 남에게 빌리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당신은 돈을 빌리는 것과 빌리고자 하는 마음은 별개임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빌린 빚은 성경에서 말한 죄들과 같다. 걸핏하면 돈을 빌리려고 하는 습관과 성향은 죄와 같다. 그러한 사람은 누가 빚을 갚아 주었다고 해서 돈을 빌리는 일을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빚을 갚아 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더욱 돈을 빌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죄들을 처리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죄로 향하는 우리의 속마음도 처리하신다. 우리가 죄들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죄를 처리하는 것도 중요함을 보아야 한다. 반드시 우리가 이 두 방면을 보아야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복음(워치만 니) 제1권 제1장에서 발췌함   박옥수 구원파의 문제   죄와 죄들의 단복수 구분이 안 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박옥수 구원파에서는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광고를 버스에 붙이고 대형 체육관에서 집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죄와 죄들을 전혀 구분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죄 사함’이 죄들뿐만 아니라 죄(죄성)의 용서(사함)을 뜻한다고 믿고는 한번 구원받으면 그 사람은 완전히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죄들이 매일 반복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주 목사는 “죄 없다!”만 외치므로 오래 거기 다니다 보면 양심이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거기서는 성화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성화 이야기를 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전혀 성화를 모르는 신도를 만들어 놓습니다. 요일1:8-9에는 죄와 죄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8절 만일 우리에게 죄(단수)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9절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복수)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8-9).   물론 개역성경은 9절 역시 죄들 대신 죄라고 단수로 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 되고 맙니다. 8절은 우리(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죄 즉 죄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믿음에도 불구하고 죄들이 있으므로 고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9절은 말합니다.   또한 구원파 교주는 사람에게 두 개의 본성이 있음을 가르쳐주지 않고 죄(죄성)이 전혀 없는 새 본성만 있다고 가르치므로 추종자들은 심각하게 양심의 찔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면 “죄 없다”는 소리에 취해서 양심이 무뎌지므로 악한 일을 하고도 찔림이 생기지 않는 나병 현상이 발생합니다.   또한 모 단체에서는 아담의 죄(원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은 육신적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옥 불 속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은 죄인 각 사람의 죄들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사람이 다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은 불의의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죄들’에 대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용서입니다(요일1:7). 아무리 많이 울어도 참회해도 선행을 해도 죄들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죄들을 용서합니다(마. ‘죄’에 대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출입니다. 로마서 5장은, 죄인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인이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롬5:19를 보기 바랍니다. 즉 사과 나무가 죄이고 사과들은 그 나무에서 나오는 죄들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책은 부모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생에 의해 아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담에게서 나오려면 죽어야 하며 롬6:3-4는 어떻게 우리가 아담에 대해 죽었는지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 안에서 우리는 아담 안에서 또 죄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라는 측면에서는 사실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상태는 그렇지 못합니다. 현실은 우리에게 아직 옛 본성 즉 육신(죄)이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성화 과정을 통해 죄를 십자가에서 죽여 처리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해 한 번 죽으셨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매일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역시 2000년 전에 죄에 대해 한 번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롬6:11). 롬6:14의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의 단수 죄는 성화와 연관이 있는 죄성을 뜻합니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롬6:1-2) 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여기에서 의미한 바는 우리가 판결을 받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우리가 새 본성을 받아 죄의 법에 대해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사도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6:11).   이 말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고 또 옛 생활 습성에 대해서도 죽은 자로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라고 말하며 또한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라”(롬6:12)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될 때 다음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롬6:14). 위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믿는 자의 위치는 하나님 앞에서 확고히 정착되어 안전하나 그의 상태는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 본성이 그를 지배하느냐 새 본성이 그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는 죄로 가득하기도 하며 죄가 없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둔 채 로마서 강해 노트를 보면 강해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참고로 영어를 하시는 분들은 다음의 자료를 보기 바랍니다.   http://www3.telus.net/trbrooks/SinSins.htm(*) 역시 워치만 니 자료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입니다.   구약은 죄와 죄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신약은 죄와 죄들이 놀랍도록 명확히 구분됩니다.   죄(단수): “Sin” in singular number: Matt.12.31; John 1.29; 8.34 (twice), 46; 9.41 (twice); 15.22 (twice), 24; 16.8,9; 19.11; Acts 7.60; Rom. 3.9,20; 4.8; 5.12 (twice), 13 (twice), 20,21; 6.1,2,6 (twice), 7,10,11,12,13,14,16,17,18,20,22,23; 7.7 (twice), 8 (twice), 9,11,13 (thrice), 14,17,20,23,25; 8.2,3 (mg., thrice), 10; 14.23; 1 Cor. 15.56 (twice); 2 Cor. 5.21 (twice); 11.7; Gal. 2.17; 3.22; 2 Thess. 2.3; Heb. 3.13; 4.15; 9.26,28 (the second “sin”); 10.6,8,18; 11.25; 12.1,4; 13.11; James 1.15 (twice); 2.9; 4.17; 1 Peter 2.22; 4.1; 2 Peter 2.14; 1 John 1.7,8; 3.4 (twice), 5 (the second “sin”), 8,9; 5.16 (twice), 17 (twice).   죄(복수)“Sins” in plural number: Matt. 1.21; 3.6; 9.2,5,6; 26.28; Mark 1.4,5; 2.5,7,9,10; Luke 1.77; 3.3; 5.20,21,23,24; 7.47,48,49; 11.4; 24.47; John 8.21, 24 (twice); 9.34; 20.23; Acts 2.38; 3.19; 5.31; 10.43; 13.38; 22.16; 26.18; Rom. 4.7; 7.5; 11.27; 1 Cor. 15.3,17; Gal. 1.4; Eph. 2.1; Col. 1.14; 1 Thess. 2.16; 1 Tim. 5.22,24; 2 Tim. 3.6; Heb. 1.3; 2.17; 5.1,3; 7.27; 8.12; 9.28 (the first “sins”); 10.2,3,4,11,12,17,26; James 5.15,20; 1 Peter 2.24 (twice); 3.18; 4.8; 2 Peter 1.9; 1 John 1.9 (twice); 2.2,12; 3.5 (the first “sins”); 4.10; Rev. 1.5; 18.4,5.   이것을 정리하면 내용은 위와 같습니다.
2013-07-24 17:28:25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