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936개
할렐루야!~ repent, repented 에 대하여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기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실 때와 민23:19 God is not a man, that he should lie; neither the son of man, that he should repent : hath he said, and shall he not do it? or hath he spoken, and shall he not make it good?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주님이 슬퍼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기록으로 주신 단어도    창6:6 And it repented the LORD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성경 단어 'repent'를 단어 번역시 한글 선택에 대한 성경적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30:3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1-06 16:27:20 | 김원광
         사울에게 나타난 영의 정체는? (삼상 28:11-14)   (삼상 28:13-14, 개역) [13]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14]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 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삼상 28:13-14, 킹흠정) [13] 왕이 그녀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들이 땅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매                [14] 사울이 그녀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자기 얼굴을 숙여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삼상 28:13-14, KJV) [13] And the king said unto her, Be not afraid: for what sawest thou? And the                 woman said unto Saul, I saw gods ascending out of the earth.                [14] And he said unto her, What form is he of? And she said, An old man cometh up;                 and he is covered with a mantle. And Saul perceived that it was Samuel, and he stooped                 with his face to the ground, and bowed himself. 사무엘상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둔 사울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에게 찾아가서 묻는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사울에게서 사무엘의 영을 위로 데려오라는부탁을 받고 영을 불러 올립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나타나서 사울에게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게 될 것과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게 될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무엘의 모습을 한 영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저 역시 한 때는 이것이 무척 궁금했고,그와 관련된 토론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듣고 보기에 이와 관련한 의견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됩니다.   첫째, 죽은 사무엘의 귀신(혼령)이다. (귀신이라는 용어는 제가 쓰는 말이 아니라 베뢰아측 주장을 옮긴 것임)둘째, 하나님이 사무엘의 영을 보내어 사울에게 말하게 하셨다.셋째, 마귀가 사무엘의 행세를 하는 것이다. 1. 사무엘의 귀신이 소환되었다는 주장   주로 베뢰아 측(김기동을 중심으로 한 성락교회)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일본 귀신론 책자를 거의 베끼다시피한그들은 귀신을 죽은 자의 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인간 수명은 120세인데, 불신자가 제 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으면 남은 기간 동안 귀신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수명이 120세라는 그들의 주장은, 창세기 6장 3절에 나오는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는말씀에서 인용해 온 것인데, 이 구절은 인간의 수명과는 관계가 없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인간 수명이 120세로 정해져 있다면, 장수마을에서 사는 120세 넘은 노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들일 겁니다.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관여하시는분이시므로(마 10:29), 사람이 "제 명을 못 채우고 죽는다"는 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 대언자 사무엘이 (그들의 주장대로 하더라도) 귀신이 될 리가 없지요.킹제임스성경을 보면, 개역성경이 말하는 "귀신들"이란 바로 "마귀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삼상 28:14)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울이 그가 사무엘이라는 것을분명히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 구절에서의 "알고"라는 단어는 perceive (지각하다) 입니다. 이 말씀은 사울이 그가 사무엘이라는 것을 분별해냈다는 뜻이 아니라, "지각했다"라는 뜻입니다.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이 "노인"이라는 단서와 "겉옷"이라는 단서를 던져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심정으로 찾아온 사울은 덥썩 그것을 받아들여 그를 "사무엘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인간이 perceive 할 때, 거짓의 아비 사탄이 개입하여 deceive 하면, 얼마든지 지각의 혼란을 일으켜 속아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사울이 이렇게 속아넘어가서 그에게 절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영이 주도권을 잡고 당당하게 사무엘의행세를 하게 됩니다.   현대어역과 GNT는 베뢰아측의 주장처럼, 사울이 "죽은 사람을 불러내어 물었다"고 하지만, 킹제임스성경은사울이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영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대상 10:13, 현대어)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를 배반한 죄 때문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가르침은 따르려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녀를 찾아가 죽은 사람을 불러내어 물어 보기는 하면서도 (1Ch 10:13, GNT) Saul died because he was unfaithful to the LORD. He disobeyed the LORD's commands;                 he tried to find guidance by consulting the spirits of the dead              (대상 10:13, 킹흠정) 이같이 사울은 그가 주께 범한 범죄로 인해 죽었더라. 그가 주의 말씀을 거역하여 지키지                 아니하였으며 또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영에게 묻고           (대상 10:13, KJV) So Saul died for his transgression which he committed against the LORD, even against                 the word of the LORD, which he kept not, and also for asking counsel of one that had                 a familiar spirit, to enquire of it;   2. 하나님이 사무엘의 영을 보내셨다는 주장   죽었던 사무엘이 사울에게 나타난 사건을 두고, 많은 분들이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영을 그에게 보냈다고해석을 합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사건(눅 9:30)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상 28장에서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무엘의 영이 아닙니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땅 속에서 올라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상 28:13, 킹흠정) 왕이 그녀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들이 땅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매   대언자 사무엘이라면 죽어서 하나님께 가 있을텐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영을 보내시려면 하늘로부터 나타나야지 "땅 속에서" 올라올 리가 없습니다.   둘째로, 킹제임스성경은 그것을 "신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상 28:13, KJV) And the king said unto her, Be not afraid: for what sawest thou? And the woman said                 unto Saul, I saw gods ascending out of the earth.   개역성경은 이 부분을 "신"이라고 단수형으로 표현하지만, 킹제임스성경에는 분명히 "gods", "신들"이라고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이라면 한 사람이므로 단수형이지, 복수형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오는소문자로 된 복수형 "gods"는 우상들, 이방신들, 마귀들을 의미하지 사람이나 사람의 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 사울이 범죄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 10:13, 킹흠정) 이같이 사울은 그가 주께 범한 범죄로 인해 죽었더라. 그가 주의 말씀을 거역하여                 지키지 아니하였으며 또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영에게 묻고   하나님께서는 역대상 10:13에서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영에게 물은 것"을 사울이 주께 범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영을 보내어 그에게 말씀하신것이라면, 이 사건에 대해서 주께서 사울에게 책임을 물으실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무엘을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사울이 "그 영에게" 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귀와교제하고 그에게 절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울이 그가 범한 죄 때문에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3. 마귀가 사무엘의 행세를 한 것이라는 주장   성경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는 사무엘상 28장에 나타난 영적 존재가 사무엘이 아니라 사무엘의 행세를 하고있는 마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영은 여인의 부름에 응하여 "땅 속에서" 위로 올라왔으며, 그것의 정체는 단수가 아니라 "신들(gods)"이라고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그 영과 접촉하여 자문을 구한 것이 엄중한 죄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로서 거짓말을 잘 하고 사람을 잘 속입니다(요 8:44). 사울이 영적인 분별력을 잃은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속이기는 쉬웠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내가 사무엘이니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여인이 일러주는 용모(노인, 겉옷)를 통해서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로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자, 그 때부터 마귀가 당당하게 사무엘 행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도망하지만, 우리가 마귀를 두려워하거나 빈틈을 보이거나 하면 그는 어김없이 강하게 공격을 해 옵니다.   (약 4:7, 킹흠정)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4. 사울은 여인에게 물었는가, 영에게 물었는가?   저는 사무엘상 28:11-14을 이해하는 단서를 역대상 10:13에서 발견했습니다. 역대상 10:13은 사울이 만난 것이사무엘이 아니라 마귀이며, 그가 마귀와 접촉하여 그 영에게 물은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중대한 범죄라고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역대상 10:13을 여러 번역본으로 읽으면서 아주 미묘한 번역의 차이를 발견했습니다.그것은 사울이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에게 물었느냐, 그 여인이 불러낸 영에게 물었느냐 하는 겁니다.   (대상 10:13, 개역)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대상 10:13, 킹흠정) 이같이 사울은 그가 주께 범한 범죄로 인해 죽었더라. 그가 주의 말씀을 거역하여                 지키지 아니하였으며 또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영에게 묻고                (대상 10:13, 한글킹) 그리하여 사울이 죽으니라. 이는 그가 주께 범한 죄 때문이었으니, 그가 주의 말씀을                 거역하여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조언을 구하여 그것을 묻고   (1Ch 10:13, NIV) Saul died because he was unfaithful to the LORD; he did not keep the word of the LORD                 and even consulted a medium for guidance,                                (대상 10:13, KJV) So Saul died for his transgression which he committed against the LORD, even against                 the word of the LORD, which he kept not, and also for asking counsel of one that had                 a familiar spirit, to enquire of it;   개역성경: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다한글킹제임스역: 신접한 자에게 조언을 구하여 그것을 묻고킹제임스흠정역: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영에게 묻고NIV: consulted a medium for guidanceKJV: for asking counsel of one that had a familiar spirit, to enquire of it   개역성경에는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한 것으로 되어 있고, 강신술에 심취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부패한 사본에 기초하여 번역된 NIV는 영매(medium)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영매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한글킹제임스역은 "신접한 자에게 조언을 구하여 그것을 묻고" 라고 했는데, 킹제임스흠정역은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영에게 묻고"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역본들은 모두 사울이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한 것"만 언급하고 있는데, 오직 KJV와 킹제임스흠정역만이 "사울이 그 영에게 물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같은 KJV를 기초로 하고 있는 한글킹제임스역과 킹제임스흠정역이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enquire of it" 이라는 구절의 번역입니다. 여기서 it을 물어본 내용으로 번역할 것인가, 물어본 대상으로 번역할 것인가의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만약 한글킹제임스역과 같이 enquire of it에서 it 을 물어본 내용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묻고"라고 하려면, it 이라는 대명사가 지시하는 내용(예컨대, 사울이 물어본 그의 운명이나 전쟁의 승패 같은 것들)이 나와야 하는데 본문에는 사울의 질문 내용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대명사라면 명사를 대신하여 받는 것인데그 대명사가 지칭하는 명사가 나와 있지 않다는 겁니다.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enquire를 찾아보면 inquire를 찾아보라고 되어 있고, "inquire of …에게 묻다" 라는 숙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enquire of 가 들어가는 예문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출 18:15, 킹흠정) 모세가 자기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내게로 와서 하나님께 여쭈려 하기 때문이니이다.(출 18:15, KJV) And Moses said unto his father in law, Because the people come unto me to enquire of God:   이처럼 enquire of 는 "~에게 물어보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그것을 묻고"가 아니라, "그것(spirit)에게 묻고"와 같이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한 가지 문제는 사울에게 나타난 것은 마귀였는데, 통상 마귀라면 he, 즉 enquire of him 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enquire of it 의 it 이 앞에 나오는 spirit 을 받는 대명사가 될 수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JV의 내장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민 11:17, 킹흠정) 내가 내려와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 위에 있는 영을 취해 그들 위에 있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그것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민 11:17, KJV) And I will come down and talk with thee there: and I will take of the spirit which is                 upon thee, and will put it upon them; and they shall bear the burden of the people with thee,                 that thou bear it not thyself alone.   (민 11:25, 킹흠정)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 위에 있던 영을 취해 칠십 명의                 장로들에게 주시니 그 영이 그들 위에 머물 때에 그들이 대언을 하고 멈추지 아니하였더라.(민 11:25, KJV) And the LORD came down in a cloud, and spake unto him, and took of the spirit that was                 upon him, and gave it unto the seventy elders: and it came to pass, that, when the                 spirit rested upon them, they prophesied, and did not cease.   (사 34:16, 킹흠정) 너희는 주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라. 이것들 가운데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자기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내 입이 그것을 명령하였고 그의 영이 그것들을 모았기 때문이라.(사 34:16, KJV) Seek ye out of the book of the LORD, and read: no one of these shall fail, none shall                 want her mate: for my mouth it hath commanded, and his spirit it hath gathered them.   (눅 8:29, 킹흠정) (이는 그분께서 이미 그 부정한 영에게 명령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 영이 자주 그를 사로잡으므로 그를 사슬과 족쇄에 묶어 두었으나 그가 묶은 것을 끊고                 그 마귀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눅 8:29, KJV) (For he had commanded the unclean spirit to come out of the man. For oftentimes it had                 caught him: and he was kept bound with chains and in fetters; and he brake the bands,                 and was driven of the devil into the wilderness.)   (눅 9:39, 킹흠정) 보소서, 한 영이 그를 붙잡아 갑자기 소리를 지르게 하고 또 쥐어뜯어 다시 거품을 흘리게                 하며 그를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나이다.(눅 9:39, KJV) And, lo, a spirit taketh him, and he suddenly crieth out; and it teareth him that he                 foameth again, and bruising him hardly departeth from him.   (요일 4:3, 킹흠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그것이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그것이 지금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3, KJV) And every spirit that confesseth not that Jesus Christ is come in the flesh is not of God:                 and this is that spirit of antichrist, whereof ye have heard that it should come;                 and even now already is it in the world.   위 말씀들에서 보듯이 분명히 spirit 을 대명사로 나타낼 때에는 it 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KJV의 enquire of it 을 "그 영에게 묻고" 라고 옮긴 킹제임스흠정역의 번역은 옳습니다.   KJV에는 분명히 "사울이 그 영에게 물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왜 NIV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고 "영매에게가르침을 청하였다"라고 번역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NIV가 기초하고 있는 사본들이 바로 강신술에 심취한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변개한 사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대상 10:13에서 사울이 마귀와 접하여 그 영에게 묻는 (enquire of it) 죄를 엄중히 다루셨는데, 이들 강신술 숭배자들은 성경이 자기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역대상 10:13의 enquire of it 은 사람이 마귀와 접하여 그에게 묻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무서운 죄라는 것을 지적하는 중요한 말씀이므로, 이 부분을 번역에서 누락시키거나, "그것을 묻고"와 같은 바르지 못한 번역으로 it 이 그 여인이 불러낸 영(spirit)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사울이바로 이 죄(그 영에게 물은 죄) 때문에 죽었다고 우리에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글   김용묵 이건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논쟁거리인 주제로 알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형제님처럼 '가짜'일 것이었다.. 이다가 지금은 '진짜'일 것이다.. 에 조~금 무게가 더 실려 있습니다. 첫째, 구약 성도들은 어차피 아직 지하 낙원에 있기는 마찬가지. 이 문제가 해결된 게 결정적으로 작용했구요. 굳이 진짜 사무엘이라고 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와야 할 필요가 없어졌죠. (애초에 승천한 에녹, 엘리야나, 훗날 주님께서 부활시키신 모세는 제외) 둘째, 그 여자 무속인은.. 마술을 걸다가 갑자기 "아니, 사울 왕이시군요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 하면서 화들짝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자기는 평소에 하던 대로 눈속임수 가짜 영을 소환하려고 했는데(gods), 평상시와는 다른 진짜 거물이 걸려들어서 뭔가 눈을 떠서 놀란 게 아닐까요? http://www.chick.com/reading/tracts/5012/5012_01.asp "YAAAAH! He's not one of us! It's really Samuel! And he's no stranger! That's King Saul!" 물론 칙 전도지에도 이따금씩 비성경적인 각색이 없지는 않지만(날개 달린 천사처럼), 이 장면이 저는 설득력이 있다고 여깁니다. 사무엘도 있고 gods도 있습니다. ^^;; 셋째, 진짜 사무엘이 나타나 줬다고 해서 대상 10:13이 모순될 필요가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영을 보내어 그에게 말씀하셨다고 해도 사울이 잘못한 건 잘못한 거 맞죠. 형제님의 말씀대로, enquire of it의 it은 부리는 영을 가리키는 게 명백합니다. 우림과 둠밈과 대언자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없자, 사울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어 영적 배교의 최고조로 치닫습니다. 사울은 대상 10:13이 말하는 대로, 부리는 영에게 물으려고 무속인을 찾아갔는데 ... 하나님의 최후의 최소한의 자비인지 배려인지... 마귀 대신 진짜 사무엘이 뿅 나타나서 쓴소리 한 마디 해 준 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좀 사소한 이유로는.. 성경에서 마귀가 무슨 뱀도 아니고 아주 의로운 인물로, 아무 힌트도 안 주고서 둔갑했다는 예가 없고요. '빛의 천사' 같은 구절이 있긴 합니다만, 직접적인 예는 아니죠. 또한 설령 저게 가짜였다고 할지라도, 사울에게 해 준 말이, 어차피 진짜 사무엘이 했을 말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내일 전쟁 결과에 대한 예언도 다 적중했구요. 더구나 그 사무엘은 사울에게 "내일 너와 내 아들들은 나와 함께 있으리라"(19절)라는 말까지 했는데... 요나단뿐만 아니라 사울도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그 당시 있던 곳은 낙원입니다. 그러니 저건 마귀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며, 최소한 마귀의 입장에서 거짓말로라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아무쪼록 저의 간단한 의견을 피력해 보았습니다. 저게 진짜 사무엘이었든 가짜 사무엘이었든 교리가 달라지는 게 아니며, 우상 숭배나 접신 행위가 나쁜 건 변함없습니다. ^^;; 휴거가 언제쯤 일어날 것 같나? 그때 침례 받은 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아기들도 다 휴거될까? 휴거될 때 피는 다 쏟아놓고 올라갈까? 급의 상상의 날개를 펴는 질문이니 가볍게 그냥 재미로 봐 주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아, 저의 영문 닉이 사무엘입니다. 성경의 인물이고 새마을호와 발음이 비슷해서 지은 이름이죠. ㅎㅎ  이건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논쟁거리인 주제로 알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저는 처음에는 형제님처럼 '가짜'일 것이었다.. 이다가 지금은 '진짜'일 것이다.. 에 조~금 무게가 더 실려 있습니다. 첫째, 구약 성도들은 어차피 아직 지하 낙원에 있기는 마찬가지. 이 문제가 해결된 게 결정적으로 작용했구요. 굳이 진짜 사무엘이라고 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와야 할 필요가 없어졌죠. (애초에 승천한 에녹, 엘리야나, 훗날 주님께서 부활시키신 모세는 제외) 둘째, 그 여자 무속인은.. 마술을 걸다가 갑자기 "아니, 사울 왕이시군요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 하면서 화들짝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자기는 평소에 하던 대로 눈속임수 가짜 영을 소환하려고 했는데(gods), 평상시와는 다른 진짜 거물이 걸려들어서 뭔가 눈을 떠서 놀란 게 아닐까요?http://www.chick.com/reading/tracts/5012/5012_01.asp"YAAAAH! He's not one of us! It's really Samuel! And he's no stranger! That's King Saul!"물론 칙 전도지에도 이따금씩 비성경적인 각색이 없지는 않지만(날개 달린 천사처럼), 이 장면이 저는 설득력이 있다고 여깁니다. 사무엘도 있고 gods도 있습니다. ^^;; 셋째, 진짜 사무엘이 나타나 줬다고 해서 대상 10:13이 모순될 필요가 없다는 것.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영을 보내어 그에게 말씀하셨다고 해도 사울이 잘못한 건 잘못한 거 맞죠.형제님의 말씀대로, enquire of it의 it은 부리는 영을 가리키는 게 명백합니다. 우림과 둠밈과 대언자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없자, 사울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어 영적 배교의 최고조로 치닫습니다. 사울은 대상 10:13이 말하는 대로, 부리는 영에게 물으려고 무속인을 찾아갔는데 ... 하나님의 최후의 최소한의 자비인지 배려인지... 마귀 대신 진짜 사무엘이 뿅 나타나서 쓴소리 한 마디 해 준 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좀 사소한 이유로는..성경에서 마귀가 무슨 뱀도 아니고 아주 의로운 인물로, 아무 힌트도 안 주고서 둔갑했다는 예가 없고요. '빛의 천사' 같은 구절이 있긴 합니다만, 직접적인 예는 아니죠. 또한 설령 저게 가짜였다고 할지라도, 사울에게 해 준 말이, 어차피 진짜 사무엘이 했을 말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내일 전쟁 결과에 대한 예언도 다 적중했구요.더구나 그 사무엘은 사울에게 "내일 너와 내 아들들은 나와 함께 있으리라"(19절)라는 말까지 했는데... 요나단뿐만 아니라 사울도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그 당시 있던 곳은 낙원입니다. 그러니 저건 마귀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며, 최소한 마귀의 입장에서 거짓말로라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아무쪼록 저의 간단한 의견을 피력해 보았습니다.저게 진짜 사무엘이었든 가짜 사무엘이었든 교리가 달라지는 게 아니며, 우상 숭배나 접신 행위가 나쁜 건 변함없습니다. ^^;; 휴거가 언제쯤 일어날 것 같나? 그때 침례 받은 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아기들도 다 휴거될까? 휴거될 때 피는 다 쏟아놓고 올라갈까? 급의 상상의 날개를 펴는 질문이니 가볍게 그냥 재미로 봐 주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아, 저의 영문 닉이 사무엘입니다. 성경의 인물이고 새마을호와 발음이 비슷해서 지은 이름이죠. ㅎㅎ   김문수 대답 저도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마귀가 여인까지 속여넘겼을 수도 있고(그 여인에게 자기가 죽은 자를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을 마귀에게서 받았다고 믿게 함), 그 여인이 마귀와 한 패거리라서 일부러 놀라는 척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놀라는척, 무서운 척 합니다. 그리고, 여인이 부리는 영(마귀)이 그 여인에게 "널 찾아온 사람이 실은 사울이다"라고 말해줘서 여인이 깜짝 놀랐을 수도 있습니다. 놀랄 수 밖에 없지요. 사울이 마술사들과 부리는 영을 지닌 자들을 죄다 죽였는데(삼상 28:9), 이제 자기가 영을 부린다는 것을 사울 앞에서 직접 보여줬으니 이젠 꼼짝없이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죽는구나 생각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귀는 이미 사울이 무슨 고민이 있는지 알고 있고,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라고 사울이 요구했는데, 이 정도 정보라면 사울이나 그 여인을 속이기는 아주 쉽지요. 겉옷 입은 노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만 해도 머리를 조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삼상 28:15과 대상 10:13을 대조해보면 사무엘의 모습을 한 것의 정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상 28: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위로 데려가려고 나를 요동시키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내가 심히 곤궁하나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치려고 싸움을 일으켰고 하나님은 내게서 떠나사 다시는 대언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행할 일을 당신이 내게 알려 주도록 하기 위해 내가 당신을 불렀나이다, 하니라. 분명히 사울은 삼상 28:15에서 "사무엘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대상 10:13에 의하면, 사울은 "그 영에게"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대상 10:13, 킹흠정) 이같이 사울은 그가 주께 범한 범죄로 인해 죽었더라. 그가 주의 말씀을 거역하여 지키지 아니하였으며 또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영에게 묻고 (대상 10:13, KJV) So Saul died for his transgression which he committed against the LORD, even against the word of the LORD, which he kept not, and also for asking counsel of one that had a familiar spirit, to enquire of it; 같은 구절 내에서 "그 영(it)"은 여인이 "부리는 영(a familiar spirit)"입니다. 그 여인이 평소 점치고 마귀들과 교제할 때 부리는 영은 "사무엘의 영"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하나님의 대언자인 사무엘의 영이 이런 무속여인에게 걸려들어 부림을 받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영이 이런 여인에게 부림을 받게 하셨을 리가 없지요. 여러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울은 분명히 사무엘에게 물었다. 성경은 사울이 "그 영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영은 여인이 부리는 영이었다. 여인이 부리는 영은 마귀들이지 사무엘의 영이 아니다. 따라서 사울은 마귀들에게(gods) 물었다. 마귀들을 불러내어 그들에게 묻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무서운 죄다. 즉, 사울에게 나타난 것은 사무엘이 아니라 사무엘 행세를 하는 마귀들이다. 제가 성경에서 발견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믿고, 나머지 그 자세한 정황이나 과정 등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께나 사무엘에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마귀가 여인까지 속여넘겼을 수도 있고(그 여인에게 자기가 죽은 자를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을 마귀에게서 받았다고 믿게 함), 그 여인이 마귀와 한 패거리라서 일부러 놀라는 척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놀라는척, 무서운 척 합니다. 그리고, 여인이 부리는 영(마귀)이 그 여인에게 "널 찾아온 사람이 실은 사울이다"라고 말해줘서 여인이 깜짝 놀랐을 수도 있습니다. 놀랄 수 밖에없지요. 사울이 마술사들과 부리는 영을 지닌 자들을 죄다 죽였는데(삼상 28:9), 이제 자기가 영을 부린다는 것을 사울 앞에서 직접 보여줬으니 이젠 꼼짝없이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죽는구나 생각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귀는 이미 사울이 무슨 고민이 있는지 알고 있고,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라고 사울이 요구했는데, 이 정도 정보라면 사울이나 그 여인을 속이기는 아주 쉽지요. 겉옷 입은 노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만 해도 머리를 조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삼상 28:15과 대상 10:13을 대조해보면 사무엘의 모습을 한 것의 정체를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상 28: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위로 데려가려고 나를 요동시키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내가 심히 곤궁하나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치려고 싸움을 일으켰고 하나님은 내게서 떠나사 다시는 대언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행할 일을 당신이 내게 알려 주도록 하기 위해 내가 당신을 불렀나이다, 하니라. 분명히 사울은 삼상 28:15에서 "사무엘에게" 물었습니다.그런데 대상 10:13에 의하면, 사울은 "그 영에게"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대상 10:13, 킹흠정) 이같이 사울은 그가 주께 범한 범죄로 인해 죽었더라. 그가 주의 말씀을 거역하여 지키지 아니하였으며 또 부리는 영을 지닌 자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영에게 묻고(대상 10:13, KJV) So Saul died for his transgression which he committed against the LORD, even against the word of the LORD, which he kept not, and also for asking counsel of one that had a familiar spirit, to enquire of it; 같은 구절 내에서 "그 영(it)"은 여인이 "부리는 영(a familiar spirit)"입니다. 그 여인이 평소 점치고 마귀들과 교제할 때 부리는 영은 "사무엘의 영"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하나님의 대언자인 사무엘의 영이 이런 무속여인에게 걸려들어 부림을 받게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영이 이런 여인에게 부림을 받게 하셨을 리가 없지요. 여러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사울은 분명히 사무엘에게 물었다. 성경은 사울이 "그 영에게 물었다"고 한다.그런데 그 영은 여인이 부리는 영이었다. 여인이 부리는 영은 마귀들이지사무엘의 영이 아니다. 따라서 사울은 마귀들에게(gods) 물었다.마귀들을 불러내어 그들에게 묻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무서운 죄다.즉, 사울에게 나타난 것은 사무엘이 아니라 사무엘 행세를 하는 마귀들이다. 제가 성경에서 발견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믿고, 나머지그 자세한 정황이나 과정 등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께나 사무엘에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최형규 저도 예전에는 당연히 사무엘로 가장한 마귀의 속임수로  생각했지만 아래 포천교회 홍목사님의 글을 보고 그게 아니란 것을 알고 깨달았던게 있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알고 문자적으로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써진 그대로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경우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알기전 가지고 있던 편견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킹제임스 성경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눈뜬 장님처럼 못본다는 사실을 말이죠.   삼상28장 15절 16절에서 분명 성경은 사무엘이 말했다고 합니다. 20절은 사무엘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냥 겉 옷 입은 노인이라고만 성경이 언급되어 있다면 여러가지 추정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전혀  추정이 필요 없습니다. 사무엘같은 노인이 말했다가 아닙니다. 너무도 분명하게 하나님은 성경에서"사무엘이 이르되"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의 혼인지 영인지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혼은 분명한데 구약시대 성도가 죽은 뒤 몸은 무덤에 있고 영이 혼과 함께 지하 낙원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삼상 28: 11과 12절 사이에 보면 사울이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라고 요구하지만 12절에서는 바로 여인이 사무엘을 알아챈 것이 나옵니다. 즉 이 사이에 사무엘이 여인이 부리는 영의 힘으로 올라온 것인지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올라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이 다른 영매들이 정말 다른 경우에도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 내는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 순간에만 사무엘의 영혼이 올라오도록 허락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인이 신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누가복음 나사로의 죽음에서 나사로가 천사들에 의해 낙원으로 옮겨졌다고 하듯 사무엘이 올라올 때 하나님의 허락으로 천사들이 사무엘과 동행하여 데려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또 사울에 대해 대상 10:13에서 말한 것이 꼭 이번 사건이 아닐 수도 있고 이번 사건이라해도 사울은 부리는 영으로 점을 치라고 요구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와 비슷한 제 다른 경우는  입다의 딸 사건으로 제가 여전히 개역성경식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김문수님의 글을 보고서야 최근에 처음으로  알았지요. 킹제임스 성경으로 "처녀됨을 인해 슬퍼했다고" 다시 읽었지만 그것이 입다의 딸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슬퍼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무심코 읽고 넘어가면서 입다의 딸이 당연히 불에 타 희생되었으리라 생각했었지요. 아래 홍목사님 글을 퍼 왔습니다. 참고 하시길... 광주에서 김선희 자매  --------------------------------------------------------------------------------- 조회 : 102  이름 : 홍성율 작성일 : 2002/02/14 오전 1:56:15 질문 : 삼상28장에 보면 초신자가 사무엘의 혼을 불러내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부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한번 죽은 혼, 영은 주의 권세아래서 다시 어떤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 나올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답변 : 삼상 28장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지 않고 좋은 것들은 살려두므로서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이나, 우림이나, 대언자로도 사울에게 대답하시지 않자 답답해진 사울은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합니다. 그에 따라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은 사무엘이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이 어떤 방법으로 사무엘을 불렀는지, 주문을 외웠는지, 말만 했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하 낙원에 있던 사무엘이 올라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올라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사울의 원수가 되셨으며, 사울의 왕국을 빼앗아 다윗에게 주셨으며 사울은 내일 자신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말대로 다음 날 사울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죽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전인 구약시대 성도들은 죽은 후 간 곳이 어느 곳인지 바르게 알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현재 신약 성도들은 죽으면 혼이 셋째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셋째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지하 낙원으로 내려갔습니다. 지하 세계에 대한 것은 누가복음 16장에서 어떤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에서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어떤 부자와 나사로의 기록은 거의 대부분의 학자나 목사는 비유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비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기록은 지하세계인 낙원과 지옥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해 줍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와 나사로의 상황을 사실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부자와 나사로의 상황은 율법이 적용되는 구약시대의 상황입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죽은 후에 지하의 낙원이나, 지옥에 간 것입니다. 어쨌든지 삼상28장에서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불러 올릴 수 없다는 법을 세워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다시 사울앞에 올려 보내신 것은 법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는 것처럼 한번 죽은 혼, 영은 주의 권세아래서 다시 이끌려 나올 수 없다고 알고 있을지라도 성경의 기록은 한번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기록보다 더 믿을 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성경의 기록을 믿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손바닥을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는 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도 예전에는 당연히 사무엘로 가장한 마귀의 속임수로  생각했지만아래 포천교회 홍목사님의 글을 보고 그게 아니란 것을 알고 깨달았던게 있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알고 문자적으로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써진 그대로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경우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알기전 가지고 있던 편견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킹제임스 성경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눈뜬 장님처럼 못본다는 사실을 말이죠. 삼상28장 15절 16절에서 분명 성경은 사무엘이 말했다고 합니다.20절은 사무엘의 말이라고 합니다.그냥 겉 옷 입은 노인이라고만 성경이 언급되어 있다면 여러가지 추정이 가능하겠지만여기서는 전혀  추정이 필요 없습니다.사무엘같은 노인이 말했다가 아닙니다.너무도 분명하게 하나님은 성경에서"사무엘이 이르되"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의 혼인지 영인지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혼은 분명한데 구약시대 성도가 죽은 뒤 몸은 무덤에 있고 영이 혼과 함께 지하 낙원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삼상 28: 11과 12절 사이에 보면사울이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라고 요구하지만12절에서는 바로 여인이 사무엘을 알아챈 것이 나옵니다.즉 이 사이에 사무엘이 여인이 부리는 영의 힘으로 올라온 것인지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올라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이 다른 영매들이 정말 다른 경우에도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 내는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 순간에만 사무엘의 영혼이 올라오도록 허락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인이 신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누가복음 나사로의 죽음에서 나사로가 천사들에 의해 낙원으로 옮겨졌다고 하듯사무엘이 올라올 때 하나님의 허락으로 천사들이 사무엘과 동행하여 데려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또 사울에 대해 대상 10:13에서 말한 것이 꼭 이번 사건이 아닐 수도 있고 이번 사건이라해도사울은 부리는 영으로 점을 치라고 요구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와 비슷한 제 다른 경우는  입다의 딸 사건으로 제가 여전히 개역성경식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김문수님의 글을 보고서야 최근에 처음으로  알았지요. 킹제임스 성경으로 "처녀됨을 인해 슬퍼했다고" 다시 읽었지만 그것이 입다의 딸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슬퍼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무심코 읽고 넘어가면서 입다의 딸이 당연히 불에 타 희생되었으리라 생각했었지요. 아래 홍목사님 글을 퍼 왔습니다.참고 하시길... 광주에서 김선희 자매  ---------------------------------------------------------------------------------조회 : 102  이름 : 홍성율 작성일 : 2002/02/14 오전 1:56:15 질문 : 삼상28장에 보면 초신자가 사무엘의 혼을 불러내는 내용이 나옵니다.이부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한번 죽은 혼, 영은 주의 권세아래서 다시 어떤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 나올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답변 : 삼상 28장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지 않고 좋은 것들은 살려두므로서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하나님께서 꿈이나, 우림이나, 대언자로도 사울에게 대답하시지 않자 답답해진 사울은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합니다. 그에 따라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은 사무엘이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이 어떤 방법으로 사무엘을 불렀는지, 주문을 외웠는지, 말만 했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에 모르겠습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하 낙원에 있던 사무엘이 올라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올라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사울의 원수가 되셨으며, 사울의 왕국을 빼앗아 다윗에게 주셨으며 사울은 내일 자신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말대로 다음 날 사울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죽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전인 구약시대 성도들은 죽은 후 간 곳이 어느 곳인지 바르게 알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현재 신약 성도들은 죽으면 혼이 셋째 하늘로 올라갑니다.그러나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셋째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지하 낙원으로 내려갔습니다.지하 세계에 대한 것은 누가복음 16장에서 어떤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에서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어떤 부자와 나사로의 기록은 거의 대부분의 학자나 목사는 비유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비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기록은 지하세계인 낙원과 지옥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해 줍니다.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와 나사로의 상황을 사실 그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부자와 나사로의 상황은 율법이 적용되는 구약시대의 상황입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죽은 후에 지하의 낙원이나, 지옥에 간 것입니다. 어쨌든지 삼상28장에서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불러 올릴 수 없다는 법을 세워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다시 사울앞에 올려 보내신 것은 법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는 것처럼 한번 죽은 혼, 영은 주의 권세아래서 다시 이끌려 나올 수 없다고 알고 있을지라도성경의 기록은 한번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기록보다 더 믿을 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성경의 기록을 믿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손바닥을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는 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문수 대답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렸고, 저 역시 산 자와 죽은 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사무엘의 영을 보내어 사울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삼상 28:14, 킹흠정) 사울이 그녀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자기 얼굴을 숙여 땅에 대고 절하니라. 위 말씀을 보면 사울은 "땅 속에서 올라온 신들(gods)"의 모습을 볼 수가 없고, 그 여인이 전해준 정보를 통해서 그를 사무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사울은 부리는 영을 가진 여인을 매개로 해서 그 신들(gods)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의 영을 직접 보내어 사울을 책망하신다면 사울이 확실히 알아볼 수 있도록 사무엘의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삼상 28:15, 킹흠정)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위로 데려가려고 나를 요동시키느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셨다는 이야기는 없고, 그 땅속에서 올라온 사무엘이라는 존재는 사울이 그를 "위로 데려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사무엘이라면, "주께서 나를 보내사 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느니라"라고 했을텐데, 오히려 그는 "왜 나를 bring up 했느냐"고 합니다. 이는 그가 자의로 올라오거나 혹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온 게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삼상 28:16, 킹흠정) 이에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너를 떠나 네 원수가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삼상 28:16은 사울이 "사무엘에게" 물었다고 했고, 대상 10:13은 사울이 "그 영" = "부리는 영"에게 물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진짜 사무엘의 영은 그 여인이 부리는 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삼상 28:17-18 말씀은 이미 사무엘이 살아있을 때 사울에게 경고했던 내용이며, 마귀도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사무엘이 하는 말의 내용은 옳고 또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그 영을 진짜 사무엘이라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귀도 가끔 맞는 말을 합니다. 부정한 영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며(막 3:11), 점치는 영에게 사로잡힌 소녀도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을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자라고 널리 선전해 주었습니다(행 16:16-17). 성경은 "사무엘이 이르되"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주의 말씀이니 믿어야겠지요. 창세기 3:1에서 뱀이 여자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와가 만난 것은 뱀이고, 그녀는 뱀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저 뱀"의 정체가 용, 사탄, 마귀라고 합니다(계 12:9). 이것과 마찬가지로, 삼상 28:16은 사무엘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대상 10:13은 사울이 물어본 그 대상의 정체는 "부리는 영"이었다고 합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진짜 사무엘의 영을 보내셔서 말씀하셨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주권 가운데서, 여인이 마귀를 불러 올려 사울을 미혹하게 하는 사건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사용하여 사울에게 경고를 주셨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신다면, 나귀의 말도 사용하시고, 발람을 통해서도 복을 선포하시고, 믿지않는 대제사장의 말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양을 희생물로 바치려면, 그 희생물이 주께 바치기에 적합한 지 제사장이 판정을 내려줘야 합니다. 요 11:49-52에서 가야바는 "백성들을 위하여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민족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죽기에 합당한 희생물임을 대제사장의 입으로 공식적으로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부리는 영을 지닌 여인과 마귀들도 주께서 그 분의 절대주권 가운데서 이렇게 사용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대상 10:13의 번역에 대한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이지만, 삼상 28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영에 대한 부분은 저의 의견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009-09-03 15:41:40 | 관리자
여자가 긴 머리를 하면 집회에서 굳이 너울이나 모자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고전11:15). 긴 머리가 덮는 것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개역성경이 '덮다'(cover)를 '쓴다'(put on)로 번역한 데서 나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편견 없이 그냥 읽어 보기 바랍니다. 15절을 보세요. 천주교나 성공회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교회만 무엇을 쓰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그런 풍습이 없습니다(16절). 여자는 적당히 머리를 길게 하면 그게 곧 머리를 덮는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을 입고 안 입고로 영적인 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그런 것이 철폐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단정하게 하고 예배를 드릴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니라. 4 머리를 덮은 채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남자는 다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거니와 5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여자는 다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나니 그것은 그녀가 머리를 민 것과 전적으로 같으니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거든 또한 깎을 것이로되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수치가 되거든 덮을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인즉 참으로 자기 머리를 덮지 않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나니 10 이런 까닭에 여자는 천사들로 인하여 마땅히 자기 머리 위에 권능을 두어야 하느니라.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는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고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아니하니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또한 여자로 말미암아 났느니라.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덮지 않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냐? 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면 그것이 그에게 수치가 되는 것을 본성 그 자체도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그러나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지면 그것이 그녀에게 영광이 되나니 여자의 머리는 덮는 것으로 주어졌느니라. 16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논쟁하려 할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들에는 그런 풍습이 없느니라.
2009-08-25 18:05:23 | 관리자
성경을 읽다가 여자들의 머리에 쓰는것에 대한 구절을 접하고,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신약성경을 읽다가 여자들의 머리가 긴것은 영광이 되고, 수건은 긴머리를 대신하여 쓰는것이라고 나와있는데, 현제, 예배나 기도시간에 머리에 수건을 쓰는 교회가 있는것으로 아는데,(신약교회인가? )  그렇다면, 그들은 성경을 그대로 지키는것이 될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않는 교회, 성경 그대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교회 어느게 더 성경적이 되는건지 알고 싶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9:3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8-25 15:34:44 | 윤혜정
이런 의견의 주석도 있어 소개합니다. 2 Samuel 1:17-27. David's public expression of grief over the deaths of Saul and Jonathan has been preserved in a poem, "The Song of the Bow" (vv.19-27). This in turn is part of a now-lost longer composition referred to by the historian as the Book of Jasher (cf. Josh. 10:13). The same epic contained the short quatrain sung by Joshua on the occasion of the defeat of the Amorite league (Josh. 10:12-13). in David's song, which opens and clothes with the refrain, How the mighty have fallen! (2 Sam. 1:19, 27; cf. 1:25). David warned against telling of the tragedy in Philistia lest the Philistine maidens rejoice (v. 20) just as the Israelite maidens had sung of the triumphs of Saul and David years before (1 Sam. 18:7). David then cursed the mountains of Gilboa for having been the stage of Saul and Jonathan's heroic but fruitless defense against the enemy (2 Sam. 1:21-22). The undying loyalty of Jonathan comes in for special praise as David viewed father and son knit together in life... and in death (v. 23). Even though Saul had oppressed the poople at times, he had also, David said, brought them luxury and bounty (v. 24). But it was Jonathan whom David celebrated with special pathos. All the years of their unbroken friendship are captured in his stirring tribute, Thy love to me was wonderful, passing the love of women. (from An Exposition of the Scriptures by Dallas Seminary Faculty)
2009-08-06 17:49:11 | 양경수
번역을 위해 KJV는 the use of를 NASB는 the song을 첨가하였습니다. 원어에 있는 대로 bow 자체만으로는 번역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패망 원인이 블레셋 사람들의 활에 있다고 보았습니다(삼삼31:3). 그래서 유다 지파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KJV 번역자들의 생각입니다. 다음은 유명한 매튜 헨리의 주석입니다. 풀핏 주석도 비슷합니다. 다만 19세기 말의 영국개역성경이 이것을 활의 노래라고 한 이후로 현대 역본들은 대부분 그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2 Samuel 1:17-27 The bow used in war. Not but that the children of Judah knew how to use the bow (it was so commonly used in war, long before this, that the sword and bow were put for all weapons of war, Gen 48:22), but perhaps they had of late made more use of slings, as David in killing Goliath, because cheaper, and David would have them now to see the inconvenience of these (for it was the archers of the Philistines that bore so hard upon Saul, 1 Sam 21:3), and to return more generally to the use of the bow, to exercise themselves in this weapon, that they might be in a capacity to avenge the death of their prince upon the Philistines, and to outdo them at their own weapon. It was a pity but those that had such good heads and hearts as the children of Judah should be well armed. David hereby showed his authority over and concern for the armies of Israel, and set himself to rectify the errors of the former reign. But we find that the companies which had now come to David to Ziklag were armed with bows (1 Chron 12:2); therefore, (from Matthew Henry's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PC Study Bible Formatted Electronic Database Copyright ?2006 by Biblesoft, Inc. All Rights reserved.)
2009-08-05 15:40:45 | 관리자
(삼하 1:18) (또 그들에게 명하여 활 다루는 법을 유다 자손에게 가르치게 하였으니, 보라, 그것이 야셀의 책에 기록되어 있느니라.)-킹제임스 흠정역 (삼하 1: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개역개정 (삼하 1:18) 유다 사람들에게 이 ‘활의 노래’를 가르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야살의 책에 기록돼 있습니다-우리말성경 (삼하 1:18) (그가 또한 그들에게 명하기를 유다 자손에게 '활의 용도'를 가르치라고 하더라. 보라, 그것이 야셀의 책에 기록되니라.)-한글 킹제임스 (삼하 1:18) (Also he bade them teach the children of Judah the use of the bow: behold, it is written in the book of Jasher.)-kjv   (2Sm 1:18) and ordered that the men of Judah be taught this lament of the bow (it is written in the Book of Jashar)-niv   (삼하 1:18) and he told [them] to teach the sons of Judah [the song of] the bow; behold, it is written in the book of Jashar.-nasb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1:4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8-05 11:37:30 | 양경수
숫염소들인가, 마귀들인가?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레위기 17장 7절을 흠정역 성경과 개역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흠정역: 또 그들이 전에 마귀들을 따라 음행의 길로 갔으나 다시는 그 마귀들에게 희생물을 드리지 말지니 이것은 그들의 대대로 그들에게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하라.  개역: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흠정역은 마귀들이라고 번역하였고 개역은 숫염소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과연 어느 것이 더 잘 맞을까요?   다음은 히브리어 학자인 김경래 교수(전주 대학교)의 글입니다.   레위기 17:7에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라는 지시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 ‘숫염소’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낱말(‘쎄이림’ = ‘싸이르’의 복수형)은 문자적으로 ‘숫염소’를 뜻한다. ‘음란히 섬긴다’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묘사로서 무수히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에 ‘숫염소들’을 음란히 섬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레17:7의 ‘싸이르’는 단순히 동물로서의 ‘수염소’가 아니라 우상 내지는 귀신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은 ‘싸이르’ 숭배를 이집트에서부터 배워온 듯 하다. ‘싸이르’는 일반적으로 황량한 지역에서 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13:21; 34:14).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거하는 동안 이미 그들은 ‘싸이르’를 섬기기 시작하였다(수24:14; 겔20:7; 23:3, 8, 19, 21, 27).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된 여로보암 역시 숫염소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대하11:15). 숫염소, 마귀 둘 다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숫염소라고 하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마귀라고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컬트 세상에서 잘 알려진 대로 마귀들의 왕 루시퍼의 상징은 두 뿔이 달린 염소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들 역시 비슷한 상징으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2009-06-04 11:08:10 | 관리자
사무엘은 레위 지파 사람인가요?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기상 1장 1절의 말씀을 개역성경이나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성경에 오류가 생기고 마찰이 생깁니다. 개역(개정):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표준새번역: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이, 에브라임의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로함이고, 할아버지는 엘리후이고, 그 윗대는 도후이고, 그 윗대는 숩이다. 킹제임스 흠정역: 이제 에브라임 산의 라마다임소빔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엘가나더라. 그는 에브랏 사람으로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사대 손이더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므로 반드시 레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개역(개정)성경 등은 그를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이렇게 성경에 모순이 생기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김경래 교수(전주대학교)의 글입니다. 이분의 분석을 읽으면 킹제임스 성경은 옳고 다른 성경은 틀리다는 것을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어느 지파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독자는 사무엘상 1:1에 근거하여 ‘에브라임 지파’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무엘상 1:1에서 이 책의 저자는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를 ‘에프라티’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말 표준새번역은 이를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으로 번역함으로써 엘가나와 사무엘 부자(父子)를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 규명하고 있다.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를 ‘에브라임 사람’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러한 번역 역시 표준 새번역과 똑같은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어 ‘에프라티’는 구약 성경에 모두 합하여 다섯 번 출현한다. 먼저 길르앗 사람들과 에브라임 지파의 싸움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사사기 12:5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의 집안 배경을 기술하고 있는 열왕기상11:26에서 이 낱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열 두 지파의 하나인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다는 의미로 ‘에브라임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조상 엘리멜렉을 소개하는 사무엘상 17:12과 룻기 1:2에서 이 동일한 히브리어 낱말은 ‘에브랏 사람’, 즉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리는 에브랏 마을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두 구절에서는 모두 보다 큰 지명 내지 지파 이름인 ‘유다’와 그리고 ‘에브랏’의 다른 이름인 ‘베들레헴’과 (창세기 35:16-19; 48:7; 룻기 4:11 참조) 더불어 ‘유다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사무엘상 1:1에서 히브리어 낱말 ‘에프라티’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앞서 언급한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는 문구와는 달리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낱말은 베들레헴의 별칭인 ‘에브랏’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는 ‘에브랏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참고로 사무엘의 아버지가 살았다는 ‘라마다임소빔’은 유일하게 사무엘상 1:1에만 출현한다.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소빔’은 사무엘상 나머지 전체에 걸쳐서 나오는 ‘라마’와 동일 명칭이다 (1:19; 2:11; 7:17; 8:4; 15:34; 16:13; 19:18, 22; 25:1; 28:3). 단순히 산봉우리와 같은 ‘높은 곳’을 가리키는 ‘라마’라는 지명은 이스라엘에 흔한 이름으로서, 구약 성경에 기록한 바에 따라 대략 다섯 곳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각기 베냐민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8:25; 사사기 19:13; 열왕기상 15:17, 21, 22; 역대하 16:1, 5, 6; 에스라 2:26; 느헤미야 7:30; 11:33; 이사야 10:29; 예레미야 31:15; 40:1; 호세아5:8), 에브라임 산지의 한 성읍 (사사기 4:5), 납달리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9:36), 아셀 지파에 속한 한 성읍 (여호수아 19:29), 길르앗의 한 성읍 (열왕기하 8:29; 역대하 22:6) 들이다. 사무엘상에 언급된 ‘라마’는 모두 위의 다섯 곳 중에서 ‘에브라임 산지의 한 성읍’을 가리킨다. 이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가 ‘에브라임 사람’을 뜻한다고 단정내리기 전에 사무엘의 족보를 추적하여 그의 출신 지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무엘상 1:1에서는 엘가나의 조상을 여로함, 엘리후, 도후, 숩 의 순서로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하고 있다. 역대상 6장에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또 나타난다. 역대상 1-9장은 이스라엘의 족보를 다루고 있는데, 그중에서 6장은 레위 지파의 족보이다. 레위에게는 게르손과 그핫 (=고핫)과 므라리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역대상 6:1). 이 세 아들중 아론과 모세의 조상도 되는 (출애굽기 6:18-20 참조) 그핫의 후손 가운데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있다 (역대상 6:28, 33, 34). 역대상 6:34-38에서 사무엘의 조상은 엘가나, 여로함, 엘리엘, 도아, 숩, 엘가나, 마핫, 아마새, 엘가나, 요엘, 아사랴, 스바냐, 다핫, 앗실, 에비아삽, 고라, 이스할, 그핫, 레위, 이스라엘의 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되고 있다. 한편 6:25-27절에서 사무엘의 조상은 엘가나, 여로함, 엘리압, 나핫, 소배, 엘가나의 이름 순으로 열거되고 있다. 이제 사무엘에서 숩 (또는, ‘소배’)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친 이 집안 계승자들의 이름을 표를 통하여 비교해 보기로 하자. 이름 표기상 비록 근소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같은 집안의 족보임이 분명하다. 이뿐만 아니라 사무엘에게 요엘과 아비야 두 아들이 있다는 기록에 있어서도 사무엘상 8:1-2과 역대상 6장 (28, 33절)은 서로 일치한다. 참고로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여,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울 때까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한’ 레위 사람들 중의 하나인 헤만은 사무엘의 손자요, 요엘의 아들이었다 (역대상 6:31-34). 이상의 족보 고찰을 통하여 사무엘은 레위 지파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역대상 6:66에 의하면, 레위 지파의 한 가문으로서 사무엘이 속한 ‘그핫 자손의 몇 족속은 에브라임 지파 중에서 성을 얻어 영지를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수아 21:4-5, 20 참조). 이 사실은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가 레위인으로서 왜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살았는지 설명해 준다. 이런 점에서 사무엘상 1:1의 ‘에프라티’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 (표준 새번역 참조) 이라는 뜻이 아니요, 단순히 ‘에브라임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결론을 바탕으로 필자는 사무엘상 1:1에 대하여 “에프라임 산지 라마타임 쪼핌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인데, 그는 에프라임 지역 주민으로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토후의 증손이요 쭈프의 현손이었다”라는 새로운 번역문을 권하고 싶다. 정직한 히브리어 학자가 권하는 번역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입니다. 정직하게 성경을 대하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원문을 보존해 주시고 바르게 번역하도록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본문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2009-06-01 17:15:30 | 관리자
양 떼 혹은 양과 염소 떼? ● 정동수 킹제임스 성경에 보면 영어 flock이 111회 나옵니다. 성경에 익숙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예수님이 양떼를 언급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flock이 당연히 양 떼를 가리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영어 flock은 양, 염소, 집오리, 새 등의 떼를 가리킵니다(네이버 사전). 특히 성경에서는 flock이 양과 염소 떼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레위기 1장 2절 같은 경우 반드시 양과 염소 떼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and say unto them, If any man of you bring an offering unto the Lord, ye shall bring your offering of the cattle, even of the herd, and of the flock.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 중에 누가 {주}께 헌물을 가져오려거든 너희는 가축에서 곧 소 떼나 양과 염소 떼에서 너희 헌물을 가져올지니라. 이런 곳을 양떼라고 번역하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은 김경래 교수(전주 대학교)가 이 문제에 대해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 글을 보면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 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 המהב )과 ‘새’( ףוע )로 나뉜다. 가축 중에는 ‘소’( רקב )와 ‘양떼’( ןאצ , ‘쬰’)가 가능한데 (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 (1:3, 10). ןאצ (‘쬰’) 중에는 다시 ‘양 ( םיבשׂק )과 염소 ( םיזע )’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위기 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위기 1:2, 10; 3:6; 5:6 등의 ‘쬰’( ןאצ )은1:10; 3:7의 ‘케쎄브’ ( בשׂק )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ןא (쬰)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그 말씀」 1995년 10월호에 실린 필자의 “신약성경 번역상의 몇 가지 문제점”, 145-151 참조). 한편 השׂ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ןאצ (‘쬰’)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ןאצ 은 השׂ 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브리어 ‘쬰’ ( ןאצ )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역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쬰’ ( (ןאצ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 ( בשׂק )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애굽기 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השׂ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 (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השׂ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 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 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영어 flock은 히브리말의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으나 우리말에서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유의하여 영어 성경을 보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2009-06-01 16:21:35 | 관리자
  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죽었을까요?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입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딸을 죽게 하면서까지 서원을 지키는 인물이 입다라고 배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사기 11장 37-39절을 봅시다.   개역: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흠정역: 또 그녀가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해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해 애곡한 뒤   두 달이 끝날 때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왔으므로 그가 전에 자기가 서원한 그 서원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개역성경은 히브리말에도 없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마음대로 집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다가 처녀 딸을 죽여 번제 헌물로 바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앞뒤 문맥상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39절 끝에 입다의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녀는 평생 처녀로 지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전주대학교의 김경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사사기 11:37-40에 대한 한글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 및 표준 새번역 등의 번역문은 번역과정에서 역자가 나름대로의 특정한 해석을 본문에 가미시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의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담게 된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이 주제를 이미 「그 말씀」 1995년 7월호 (195-200쪽)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우리말 번역본들의 부당성만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사기 11:37-40에서 우리말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입다의 딸이 죽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해석적 입장을 번역문에까지 반영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본문 중에 입다의 딸이 죽는다는 표현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고대 역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개역에서는 “죽다”라는 단어를 조그만 글자로 삽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런 식의 구분도 없이 아예 입다의 딸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이 단어를 번역본문 안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입다가 서원대로 자기 딸을 죽여서 번제로 바쳤을 거라는 해석은 우리 한글 번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기독교 주석가들은 그만두더라도,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 역시 사사기 11장의 내용을 재기술하면서 입다의 딸이 이때 죽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대 고대사 5권 7장).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한글 번역문에서 히브리어 원문에도 없는 ‘죽는다’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삽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한글 성경은 이 구절들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사사기 11장을 통하여 볼 때, 어쩌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고자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도 크다. 성경을 번역할 경우 아무리 그럴듯한 해석이라도 함부로 본문에 그 내용을 삽입시켜서는 안 된다.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습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009-05-30 15:10:44 | 관리자
마태복음 24장의 이 세대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 정동수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올리브 산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징조들과 - 즉 전 세계적인 전쟁, 기근, 질병, 지진, 그리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의 싹이 남 등 - 자신이 권능으로 영광스럽게 이 땅에 재림하기 전에 있을 사건들 즉 7년 환난기에 벌어지는 무서운 사건들을 말씀하신 뒤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약속을 하셨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되리라.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4-35). 여기 이 놀라운 예언 속에는 ‘이 세대’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특별한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세대를 의미하며 바로 ‘이 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 예수님께서 영광의 왕으로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세대를 이스라엘의 독립과 관련된 한 세대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1948년에 독립했고 한 세대는 20-40년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앞뒤 문맥상 이 세대는 24장의 무서운 일들이 이루어지는 세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2009-05-30 14:51:39 | 관리자
창세기 1-11장의 난해 구절 성경의 미스테리   ● 김경래 [김경래 교수는 총신대와 이스라엘 Institute of Holy Land Studies(M.A.)를 졸업하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본학으로 박사학위( Ph.D.)를 받았다. 지금은 전주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글은 1996년 7월호 월간 그 말씀(p.190-196)에 실린 것이다. 창세기를 비유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이 교수님의 글은 그렇지 않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특히 다음의 문제를 잘 다루셨다.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 우리 성경대로 믿는 이들은 분명히 이것이 천사라고 믿는다.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UFO는 있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창세기 2장의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구절: 이것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개역성경만이 범한 오역이며 킹 제임스 성경은 이를 정확하게 "살아 있는 혼"으로 번역했다. 이 구절로 인해 "영이 있는 사람"이 있고 "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소위 베뢰아의 거짓 교리가 등장했고, 많은 이들이 그 안에 빠져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노아의 대홍수: 진화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노아의 대홍수는 전세계를 덮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셈과 야벳의 나이 관계; 많은 이들이 셈을 장자라고 생각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야벳을 장자로 규정짓고 있다. 여러 가지 크리스천 소설 -진짜 이야기가 아니고 소설이니 가짜임-을 지어 교계에서 유명하게된 분이 있는데 그분은 늘 장자 이론을 써서 글을 전개하지만, 사실 성경은 모두 두 번째 사람들에 의한 새 역사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성경의 처음부터 자세히 보기 바란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므낫세와 에브라임, 사울과 다윗, 첫째 아담과 나중 아담(예수님) 등등. 그래서 우리도 모두 두 번 태어나야만 한다. 부디 크리스천들이 소설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실에 무지하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이들이 소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우며,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현실임이 매우 안타깝다. 저자의 의도를 다 살리기 위해 성경 구절을 그대로 두었으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 덩어리(창2:6) 창세기 2장 6절에 "땅에서 '에드'가 올라와 온 지표면을 적셨다."는 기록이 있다. 히브리어 '에드'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두 차례 나온다(여기서와 욥기 36:27).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이를 '안개' 라고 번역한 반면에 표준새번역에서는 '물'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욥기 36장 27절의 경우, 개역은 역시 '안개'라고 번역하고 표준새번역은 이 낱말이 속한 문구를 '그것으로 빗방울을 만드시며'라고 번역하고 있다. 주전 3세기경에 번역된 칠십인역은 창세기 2장 6절의 '에드'를 보통 '샘'을 뜻하는 '페게'로 번역하고, 아람어 탈굼은 이를 '구름'을 뜻하는 '아네나'로 번역하고 있다. 이 낱말의 해석에 있어서 일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혹자는 이를 '수증기' 내지는 '안개'로 보는가 하면, 혹자는 '샘' 또는 '우물'로,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고대 근동 유사 언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지하의 물줄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창세기 2장 6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를 해석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은 인간의 주소지인 지구를 중심으로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 반면, 창세기 2징은 그 초점을 인간 창조에 두고 있다. 이는 마치 전체 풍경을 촬영한 후 다시 줌을 이용하여 촬영자가 원하는 특정한 풍경을 보다 상세히 촬영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이러한 식의 대구적 묘사가 자주 나타나는 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2장 4절 하반절에서 일반적으로 '히늘과 땅' 대신 순서를 바꾸어 '땅과 하늘'이라고 말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울러 창세기 2장 5-6절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말하는 바를 다른 문구를 통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 5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는 구절은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토후 바보후')라는 표현을 달리 또는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장 2절에서 '테홈'과 '물'('마임') 등 두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 '커다란 물의 집합체'는 2장 6절에서 우리의 관심사인 '에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온 지표면('콜프네 하아다마')라는 표현을 통해 볼 때, '에드'의 범위는 결코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만큼 땅의 일부분만 적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2장 5절에서 이미 비를 내리는 것과 식물의 생장을 연관시켜 언급하였으므로 2장 6절의 '에드'는 식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치 않은 점은, 2장 6절의 '에드'가 둘째 날 하나님이 물을 가르기 전의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물을 가르고 난 이후에 '궁창 아래의 물'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다만 그 안의 동산만을 적실 뿐이었다(창2:10). 그러나 2장 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에드'는 '온 지표면'을 적시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에드'라고 불린 '물체'는 반드시 커다란 규모의 것이어야만 한다. '안개'나 '수증기', 또는 단순한 '샘' 같은 것들로는 이러한 역할을 해낼 수 없다. 창세기 1장 2절의 '태홈'과 관련된 '커다란 물 덩어리' 말고는 이런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물체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개역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세기 2장 7절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 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세기 1장 20∼21절, 24절, 30절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성경은 그 곳에서 '생물'이나(1:20∼21,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세기 2장 19절, 9장 10,12,15∼16절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역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 인 우리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여타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 2장7절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창6:1∼4) 창세기 6장1∼4절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 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 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 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아마도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형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방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유일하게 욥기에 또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대로 창세기 6장 1∼4절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욥기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22:30, 막 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20장 34∼36절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 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말고도 에녹서, 요세푸스 등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세기 6장 1∼4절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떄까지 지키게 하신 일'(4절)과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5절)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20절의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베드로후서 2장 4절("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 3장 19∼20절과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필자의 글 "그리스도인의 고난: 베드로 전서 3:13∼22" 참조, 「설교자를 위한 성경 연구」, 1996년 5월호, 12∼22쪽에 실림).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세기 6장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창세기 6장 3절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의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히브리어의 '레올람'은 '영원히'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수명을 누려왔었다(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할 때 더욱 쉽게 이해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이들 '타락한 천사들'이나 그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의 존재에 대하여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후자는 노아 홍수 때 이미 모두 멸망하였겠고, 전자는 신약성경의 기록대로(그리고 이사야 24:21∼22 참조) 심판 때까지 옥에 갇혀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필자와 견해를 같이하는 김상복 목사님의 저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도서출판 횃불에서 간행한(1993년 초판) 그의 저술「잃어버린 왕좌」는 창세기 1∼11장에 대한 강해집으로서, 창세기 6장 1∼7절에 대하여는 제16장에서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성경은 창세기 5장 32절을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세기 5장 32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 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노아가 오백 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났다. 둘째,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 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났다. 셋째, 노아가 오백 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났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났다. 히브리어 어법 상 앞의 두 가지보다는 세 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 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세기 10장 21절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둘 다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로도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세기 10장 21절의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악히 예펫 하가돌')이다. 마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첫째, '야벳의 큰 형제', 둘째, '큰 야벳의 형제'이다.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마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마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마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세기 11장 10절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년에는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 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창 7:9∼12),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이년'(슈나타임 악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육백 세와 육백일 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 후 두 해(노아 나이 육백이 세와 육백삼 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육백사 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백 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오백사 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세기 5장 32절("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증거로서 창세기 9장24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9장20∼27절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창 15:16, 19∼21절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세기 9장 24절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개역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27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보았다. 노아의 세아들 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세기 9장 24절의 '작다'('하카탄')나 10장 21절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노아 집안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그렇게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오백 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오백사 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2009-05-30 14:26:51 | 관리자
미갈과 메랍 ● 정동수 일반 성경은 삼하21:8에 메랍의 다섯 아들로 되어 있는데 흠정역에는 미갈의 다섯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영어 KJB에도 미갈로 되어 있구요. 그런데 삼상18:19을 보면 사울의 큰 딸 메랍은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어졌고 삼하6:23에는 사울의 다른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하21:8에는 미갈의 다섯 아들로 기록될 수 있을까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삼하21:8을 개역성경과 흠정역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흠정역: 다만 왕이 아이야의 딸 리스바의 두 아들 곧 그녀가 사울에게 낳은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붙잡고 또 사울의 딸 미갈의 다섯 아들 곧 그녀가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을 위하여 키운 아들들을 붙잡아 개역: 왕이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붙잡아 KJV: But the king took the two sons of Rizpah the daughter of Aiah, whom she bare unto Saul, Armoni and Mephibosheth; and the five sons of Michal the daughter of Saul, whom she brought up for Adriel the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NIV: But the king took Armoni and Mephibosheth, the two sons of Aiah's daughter Rizpah, whom she had borne to Saul, together with the five sons of Saul's daughter Merab, whom she had borne to Adriel son of Barzillai the Meholathite.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미갈이 '낳은 아들들'이 아니라 '키운 아들들'이라고 말하며 개역성경과 NIV는 메랍이 '낳은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자, 그러면 히브리 마소라 원문은 메랍이라고 할까요? 미갈이라고 할까요? 예수님이 생전에 보시던 전통 마소라 본문은 분명히 미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대 역본인 NKJB조차도 미갈이라고 정직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같은 현대 역본들은 미갈은 아들들이 없으므로 히브리 기자가 메갈을 미갈이라고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메갈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낳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을 근거로 듭니다. 여기에 원어의 함정이 있습니다.  원어는 어느 단어든지 몇 개의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각 단어의 뜻(번역)은 문맥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 '낳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은 대부분 '낳다'(bear, beget)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 그렇게 번역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창세기 50장 23절을 봅시다. 흠정역: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을 삼대까지 보았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이들도 요셉의 무릎 위에서 자랐더라. 개역: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여기서도 동일한 히브리말(스트롱 번호 3205)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흠정역이나 개역 모두 '자라다', '양육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같은 히브리말(예를 들어 스트롱 번호 3205)이라도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원문에 있는 대로 미갈을 그대로 두고 미갈이 키운 아들들이라고 정확히 번역하였습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NIV 등은 '낳다'는 뜻만 고집하고 그러면 앞뒤가 안 맞으므로 과감히 미갈을 메랍으로 바꾸고 서기관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주석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신학자들도 대부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하나님의 방법인지 독자께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보존하십니다. 그 말씀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 안에 확실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완전한 성경입니다. 우리말 킹제임스 성경은 그 성경을 우리말로 최대한 정직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2009-05-30 14:08:32 | 관리자
뵈베와 여자 집사 ● 정동수 다음은 뵈베와 여자 집사에 대해 어느 분이 보내 글입니다.   로마서 16장 1절에 보시면 뵈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영문 킹제임스 성경에선 이 뵈베가 servant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시면 집사는 deacon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킹제임스 성경에선 분명히 다르게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모두 똑같이 diakonos로 나오지 않습니까? 스트롱 성구사전을 들이대면서 여성집사는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니 어떻게 반박을 못하겠더군요...... 답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을 알려 주어도 이미 마음에 그렇게 믿기로 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이 성경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사람(그리스도인 포함)의 현 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다만 성경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례교회가 대세를 이루는데 거기서는 교단 차원에서 여자는 목사나 집사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오순절주의 교회 등에서도 여자 집사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자매들이 집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집사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신학교나 목사 혹은 집사는 로마서 16장 1절의 뵈베를 가리킵니다. I commend unto you Phebe our sister, which is a servant of the church which is at Cenchrea:(KJV) I commend to you our sister Phoebe, a servant of the church in Cenchrea.(NIV) 영어 KJV, NKJB, NIV, NASB 등은 모두 뵈베를 servant 즉 종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IV와 NASB는 그 옆에 각주로 여집사(deaconess)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즉 원래는 종이 맞지만 현대의 여집사 추세를 반영하여 여집사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서로 상충되는 듯한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때에 우리가 취해야 할 성경 해석 원칙은 명백한 구절을 교리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들과 잘못된 교리는 개인이나 교단의 역사성 혹은 이득을 위해 명백한 것들을 흐릿한 것들 뒤로 놓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자, 여기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기록자는 디모데전서라는 목회 서신에서 분명하게 목사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지역교회의 목사)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2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서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동일한 기록자 사도 바울은 분명히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로 인해 타격을 입지만 그래도 교단이나 개인의 생각을 버릴 수 없으므로 이들은 원어 게임장으로 달려 갑니다. 즉 딤전 3장의 집사는 원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스트롱 번호 1249)이며 신약성경에 30회 나오고 ‘minister’, ‘serve’, ‘servant’로 번역되었습니다(마20:26; 마23:11; 롬16:1 등). 또 동사 ‘디아코네오’(스트롱 번호 1247)는 신약성경에 37회(마4:11; 마20:28; 행6:2 등) 나옵니다. 로마서 16장 1절의 뵈베는 분명히 원어로 ‘디아코노스’(diakonos, 스트롱 번호 1249)입니다. 그런데 ‘디아코노스’는 딤전 3장의 집사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minister, servant로만 번역되었습니다. 디아코노스의 용례를 보기 위해 16장 바로 앞에 있는 로마서 15장 8절을 보겠습니다. Now I say that Jesus Christ was a minister of the circumcision for the truth of God, to confirm the promises made unto the fathers: 이제 내가 말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할례자들의 사역자가 되신 것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확증하려 하심이요, 여기서 minister 즉 사역자로 번역된 단어는 16장 1절의 servant와 마찬가지로 '디아코노스'입니다. 원어를 주장하는 이들의 뜻대로 하자면 이것도 deacon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할례자들의 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번역되면 맞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이것이 바로 원어 게임의 함정입니다. 그러면 왜 같은 디아코노스를 딤전 3장에서는 집사라고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거기의 집사가 교회의 직분을 맡은 종으로서의 집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딤전 3장 12절을 종으로 바꾸어 봅시다. 종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집사 대신 종으로 바꾸면 말이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므로 한 마디로 집사는 교회에서 종의 직무를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는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도 가능하다고 믿고 교단과 개인이 그대로 실행하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데서 성경관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런 말씀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자유주의 쪽이고 아니하고 하면 근본주의 쪽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많은 굴곡을 겪어 왔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려고 합니까? 집사에 대해서는 자료실의 영상 자료 내의 교회 분류에서 집사를 보기 바랍니다(강해 노트와 동영상).   첨언: 아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혹은 성경대로 함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 교회에는 여자 집사가 없다고 자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일반 교회의 여자 집사들만큼 부지런히 일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근본주의 교회들의 문제입니다.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랑할 근거는 별로 없습니다. 자기들이 우습게 여기는 일반 교회 성도들보다 더 사랑하고 더 뜨겁게 모이고 섬기는 일이 있어야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미지근하고 덜 모이고 덜 희생하는 게 근본주의 교회들의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근본적인 교회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2009-05-29 14:14:53 | 관리자
드보라와 여자 목사   ● 정동수   다음은 드보라와 여자 목사에 대해 어느 분이 보내 글입니다.   제가 오늘 읽은 글을 쓴 저자는, 여대언자 드보라를 리더쉽과 연결시켜 말하면서, 교회나 가정에서 여자가 남자를 가리칠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속 드보라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은 드보라 시대를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삿17:6, 21:25 이렇게 평가하신다. 여대언자 드보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다른 재판관( 옷니엘, 기드온 등등..)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드보라는 하나님이 선택한 대언자가 아니다, 그녀가 행동한 것은 "또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작은 숲들을 섬겼더라" 삿 3:7과  관련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을 받은 여대언자이지만, 하나님께선 그녀를 대언자로 혹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대충 이런대용이였는데요,, 이 저자가 쓴 드보라에 대한 평가가 아무래도 아닌것 같아서요.. 제 생각과 너무 많이 달라서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어떤 한 글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드보라의 시대에 재판관을 대신할 남자가 없없고, 결국 하나님은 여자 드보라를 대언자로 사용하셨다, 이것을 지금시대랑 연결시킬수 있는데, 어느 한 지방에 형제,자매 기독교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 목사의 역할을 대신할 형제가 없다면, 능력부족이나, 믿음부족으로,, 그렇다면 성경믿음,지식방면으로 뛰어난 자매를 목사로 세울수 있다.   여대언자 드보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그리고 인터넷에서 찾아본 글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한국 교회에서는 특이하게 여자 목사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침례교회가 대세를 이루는데 거기서는 교단 차원에서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오순절주의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고 거기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자 목사의 근거로 대는 것이 바로 사사기 4,5장에 나오는 여대언자 드보라입니다.   대언자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다.  대언자(Prophet)의 여성형인 여대언자(Prophetess)는 성경에 8번 나옵니다(출15:20; 삿4:4; 왕하22:14; 대하34:22; 느6:14; 사8:3; 눅2:36; 계2:2).   가장 처음 나온 사람은 미리암입니다. 그리고 드보라, 훌다 등이 있고 신약성경에는 안나와 거짓 여대언자 이세벨이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드보라를 가리켜  여대언자라고 하므로 드보라는 대언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And Deborah, a prophetess, the wife of Lapidoth, she judged Israel at that time(Judg 4:4).   그러나 여자 대언자가 구약성경에 있었다는 것과 여자 목사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성경(딤전3장)은 분명하게 목사와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지역교회의 목사)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2절)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서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12절).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는 여자 집사와 여자 목사도 가능하다고 믿고 교단과 개인이 그대로 실행하면 그것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데서 성경관이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이런 말씀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면 자유주의 쪽이고 아니하고 하면 근본주의 쪽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많은 굴곡을 겪어 왔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서려고 합니까?   목사에 대해서는 자료실의 영상 자료 내의 교회 분류에서 목사를 보기 바랍니다(강해 노트와 동영상).  
2009-05-29 13:30:29 | 관리자
질문: 계시록 4장 6절은 짐승이 맞습니까? 아니면 생물이 맞습니까? 그리스어로는 생물이 맞는다고 하는데요. 대답: 먼저 이 문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장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 번역의 문제라고 지적한 글을 인용하겠습니다.헬라어 원문 : τεσσερα ζωα, 영어 KJV : four beasts, 말씀보존학회  한글 KJV : 네 생물, 한글개역판: 네 생물이 부분도 영어 KJV는 완전한 오역이다. ‘조아‘(ζωα)는 헬라어에서 ‘생물‘을 의미하지 영어 KJV같이 ‘짐승‘이나 ‘야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헬라어에는 ‘짐승‘이나 ‘야수‘를 의미하는 ‘데리온‘(θηριον)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있다 (cf. 계13:1, 2, 11).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왜 영어 KJV를 번역하지 않았는지 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한글 KJV가 영어 KJV의 번역이라면 영어 KJV가 비록 잘못되었더라도 그대로 번역을 해야 한다. 만약 고치려면 sic이란 문장 부호를 사용하든지 다른 방법으로 원문대로 번역하지 않았음을 표시해야지 번역자의 마음대로 내용을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 KJV는 영어 KJV의 번역도 아니고 헬라어 원문에서의 새로운 번역도 아니다. 장 박사가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 KJV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입니다.
2009-05-07 17:21:37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계시록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대답: 둘 다 가능하지만 계시록 전체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므로 전자를 택한 것입니다. 영어 원문은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영어에서 ‘of’만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주격, 소유격, 목적격 등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므로 추후에 ‘of’의 용례에 대해서는 하나씩 다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혹은 대한) 계시’로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책의 제목이 ‘요한의 계시록’이기 때문에 계시록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며 이 경우 예수님은 계시의 대상이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하면 예수님이 계시의 주체가 되며 이 경우 예수님이 계시록 전체를 주시는 분이 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어떤 번역을 취하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저희는 계시록이 ‘예수님의 계시’라고 믿습니다. 그 근거는 계시록 2, 3장에서도 일곱 교회에게 계시를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며 4장 이후부터 일어나는 7년 환난 기간의 모든 계시를 주는 분도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계시록 22장에는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안에서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계22:16).이 구절과 1장 1절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계시록을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 모든 계시의 주체가 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계시를 적은 사람은 요한이므로 요한의 계시록이라 해도 이 또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럭크맨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로 가르치므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럭크맨  말고도 훌륭한 성도들이 많이 있으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읽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근거는 성경의 문맥입니다.한 성경에 두 가지 번역을 다 담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만 적어야 하므로 킹제임스 흠정역에서는 앞뒤 문맥을 살펴보고 전체 책의 요점을 머리에 둔 채 적합하게 번역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계1:1을 논하실 때도 오역이라 하지 말고 이역이라 하기 바랍니다.
2009-05-07 17:20:20 | 관리자
아침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왜 candlestick을 촛대로 번역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즉 candle이 초라면 candlestick은 촛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계시록 2:1, 5 등에 나오는 candlestick이라는 단어는 최초로 출애굽기 25장 31절에 성막을 지으면서 기구의 하나로 등잔대(candlestick)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옵니다. 성경 전체에는 단복수 합해서 44번 나오는 것 같습니다. And thou shalt make a candlestick of pure gold: of beaten work shall the candlestick be made: his shaft, and his branches, his bowls, his knops, and his flowers, shall be of the same(출25:31). Remember therefore from whence thou art fallen, and repent, and do the first works; or else I will come unto thee quickly, and will remove thy candlestick out of his place, except thou repent(계2:5).  이런 혼동은 현대 영한사전에 candlestick이 촛대로 나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candle의 본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지로 기름이나 밀랍을 빨아올려 빛을 내는 기구를 뜻합니다. 최근에는 양초의 재료인 밀랍이 주로 쓰이고 있지만 과거에는 특히 성전과 성막에서는 언제나 기름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출27:20-21에는 등잔대에 쓸 올리브 기름이 나오고 또 슥4:1-4에서는 등잔대와 일곱 등잔과 그것들을 연결하는 일곱 개의 관이 나옵니다. 왜 관이 필요할까요? 기름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초가 흐른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계시록에서도 동일한 등잔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를 촛대로 번역하면 완전히 잘못된 그림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실수의 근원이 어디인가 봤더니 또 말씀보존학회더군요. 그들은 candlestikc을 모두 촛대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익숙한 사람이 우리 흠정역 성경을 보고 또 현대 영한 사전을 보면 우리 것이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지요. 요즘 이런 질문을 받으면서 번역의 중요성을 실감합니다. 물론 개역, 표준 새번역, 공동 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도 모두 등잔대로 번역했습니다. 아무리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옳아도 그 텍스트를 가지고 번역을 잘못하면 나쁜 텍스트를 가지고 번역을 잘한 경우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틀린 데가 있다고 생각되면 통보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협조가 성경 본문을 고정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읽어 봐야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낼 때 인격적인 글로 보내기 바라며 제안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 노력은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05-07 17:19:45 | 관리자
하나님의 사람 성도 요한의 계시록: 요한계시록 THE REVELATION of ST. JOHN The Divine 기록자: 요한, 기록 시기: 주후 96년경, 성격: 예언, 수신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하나님의 모든 성도 이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담은 기록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그것을 받아 천사에게 주었고 천사는 요한에게 그것을 표적으로 보여 주었다. 주제: 하나님이 정하신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요5:22, 27) 목적: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최종 목적과 인류와 사탄의 최종 종착지 특별히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최후 상태를 보여 주는 것 내용: 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이 외부의 원수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또 미지근한 성도들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위로와 경고의 메시지로 모든 교회에게 주어졌다. 이 책은 또한 신구약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의 성취를 보여 주고 특히 창세기와 함께 완전하게 진리의 사이클을 구성한다. 요한은 자기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을 기록하면서(1:19) 먼저 그리스도의 환상(1장), 교회의 심판(2-3장), 교회의 휴거 이후에 이 땅에 남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을 향한 7년 환난기(4-19장), 천년왕국(20:1-6),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사탄의 패배(20:7-15),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21-22장)을 차례대로 기록한다. 요한계시록은 22장, 404절, 12,000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19장(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핵심 절: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을 기록할지니”(1:19)핵심 단어: 이기다(2:7, 11, 17, 26; 3:5, 12, 21), 세상을 이기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이다(요일5:5), 핵심 구: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2:7) 계시록의 그리스도: 살아 계셔서 승리하시는 주님(1:18), 영적 교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키라.”(1:3)
2009-05-07 17:19:0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