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습니까?
* 다음은 헨리 모리스 박사의 "Bible has the answer"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답변 : 이 질문은 성경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온갖 질문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도 이처럼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장남(창4:1)이며 아벨은 차남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창4:2).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후(창 4:8)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벌을 내리사 그의 가정과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떠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뒤에 가인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과 그의 아내와 동침했다는 것 그리고 도시를 세웠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창4:14, 17). 가인의 후손들과 그들이 이룩한,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문명에 대해서는 창세기 4:17∼24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당시에 아담, 하와, 가인만 살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 외의 다른 사람들이 생겨났을까 의심합니다. 하지만 아담이 "첫 사람"이요(고린 15:45),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창3:20)라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에 "아담 이전의 인류"들이 그들 근처에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같이 비평을 하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있는 진화론적 사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특별히 창조하심으로써 인류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대신에 사람은 서서히 진화되고 있는 영장류의 한 집단으로 대략 1∼ 2백만년 전에 현재의 사람으로서의 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요1:1∼1, 골1:16∼17등)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사람을 만드신 이가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마19:4). 그러므로 인류의 처음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창조는 이 땅에 시간이 들어오는 순간인 "처음에" 이루어진 것이며 결코 인류 이전의 동물 집단이 수 백만 년 동안 진화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사람은 처음에 "선하게" 창조되었으며 죄를 짓지만 않았다면 영원히 살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롬5:12).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 저주가 임하여 부패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 백 년 동안 살면서 큰 식구들을 거느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930년이나 되는 아담의 생애에 "아들과 딸들"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창5:4), 이 사실은 창세기 5장의 족보에 나오는 대홍수 이전의 조상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기 전에 하늘로 취해감을 받은 에녹을 제외하고 이 조상들의 평균 수명은 912년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처럼 장수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서 나중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지 그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대홍수 이전의 세상에 사람들이 매우 많이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가족 크기, 평균 수명 등으로 대강 어림 잡아 보아도 가인이 죽기 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언제 자기 동생을 죽였고, 아내를 맞이했으며, 도시를 세웠는지에 대해 성경이 정확히 말하고 있지 많으므로 이같은 성경 기록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때문에 창세기의 저자는 이것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처음의 첫 세대에서는 인류가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이 서로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아담과 하와로부터 온 인류가 생겨나려면 이 외의 다른 가능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 세대에 있어서는 남매간의 결혼이 유전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판명되고 "근친상간"으로 규정되어 금지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법조문도 근친간의 결혼은 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과학적 이유는 이 같은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자녀들이 기형아가 되거나 병약하거나 저능아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확률에 대한 유전학적 근거는 이처럼 해로운 특성을 유발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양쪽 부모가 다 가지고 있을 경우, 그것을 물려받은 그들의 자식들한테서 실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주요한 것은 아담과 하와의 유전 체계에는 돌연변이 유전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나 아담의 다른 아들들이 자기 누이와 결혼했다 해서 유전적인 이상이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근친간의 결혼이 유전적으로 해롭게 되어 인류의 피 속에 유전적 변이가 축적되기 시작한 것은 여러 세대가 지난 후였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 기록에 있어서나 모든 과학적 사실에 있어서나 항상 틀림이 없습니다.
2009-05-07 13:45:44 | 관리자
하루의 길이가 정말로 중요합니까?
다음은 헨리 모리스 박사의 "Bible has the answer"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대답 : 성경을 펴고 창세기 1장을 읽은 뒤에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 우주와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엿새 동안의 평범한 날(24 시간)에 창조하셨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교회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관점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날들"(days)이 수천 년, 수백만 년, 심지어는 수십억 년의 기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날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기간이었는지를 안다는 것이 실로 중요한 것일까요? 이 날들이 평범한 날(하루)인지 혹은 긴 시간의 주기였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하루"는 무엇을 말하는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욤"(yom)입니다. "욤"은 보통 24시간의 하루나 24시간의 하루 가운데 낮(즉, 밤과 구별되는 개념으로서의 낮)을 의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때때로 "재판관들의 시대에"(In the time of the Judges) 혹은 "주의 날에"(In the day of the Lord) 등에서와 같이 정해지지 않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히브리말로 기록된 구약성경에서는 "욤"이라는 단어가 단 한번도 "주기"(period) 즉, 특정한 시작점과 끝점을 갖는 유한한 길이의 시간 간격을 의미한 적이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긴 시간의 주기를 의미하는 단어는 "올람"(olam)입니다. 더욱이 "욤"이라는 단어가 무한한 시간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문맥 자체가 명확하여 그것이 "하루"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창세기에 기록된 "하루"라는 단어가 상징적으로 쓰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중요한 점은 성경에서 한 단어가 처음으로 쓰일 때는 결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실 어떤 단어든지 처음에 문자적 의미로 쓰인 뒤에야 비로소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문"(door)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문"이라는 단어가 입구를 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의미로서 이 단어를 상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실제로 문이라는 것도 이해하게 됩니다. 처음에 "문"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른 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 한, 상징적 의미로는 사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루"라는 단어도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을 때 결코 상징적인 의미로는 쓰일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루"라는 단어를 설명하시며 이 단어를 처음 쓰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원하시는 뜻대로 정의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오래 전에 죽은 창세기의 저자는 "하루"라는 단어가 처음 쓰일 때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정의해 놓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부리시니라."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성경에 사용된 용어들은 매우 신중하게 정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루"(day)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밤"(night)이라고도 하는 "어두움"(the darkness)과 구별되어 "빛"(the light)으로 정의되어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창세기 1장 5절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니라." 이 구절은 이 외의 다른 닷새 동안의 하루하루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 때에 낮들과 밤들 즉 밝은 때와 어두운 때가 명확하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낮과 태양
그러면 태양이 없었는데 어떻게 낮과 밤이 있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태양이 넷째 날에 이르러서야 창조되었음을 창세기 1장이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다고 창세기 1장 3절은 가르쳐주고 있으며, "저녁과 아침"이라는 구절은 빛과 어두움의 반복적인 주기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빛은 실제로 존재했고 그 빛은 한 방향으로부터 와서 자전하는 지구 위에 빛을 비추었으며 그로 인해 낮과 밤의 일정한 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빛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창세기 1장 14∼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넷째 날에 태양의 창조가 있었습니다.
태양은 태양이 생기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낮을 주관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 이후의 낮은 이전의 낮과 똑같았습니다. 단지 지구는 새로운 광체 혹은 광원(光源)을 갖게 된 것입니다.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낮, 즉 창조의 처음 사흘 동안의 낮은, 태양이 창조된 이후의 낮과 같은 낮이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세대를 통해서 세계 도처의 많은 사람들이 태양을 생명의 근원으로 숭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아셨고 그래서 일부러 넷째 날까지 태양의 창조를 연기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태양을 숭배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자들도 태양이 지구보다 먼저 탄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구와 빛을 먼저 만드셨고, 넷째 날에 태양을 만드셨으며 그날 이후로는 그것이 빛을 내는 도구로서 낮을 주관케 하셨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창세기의 "날들"을 평범한 날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구가 수십억 년이 되었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말을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지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알아 낼 수 있는 절대적 연대 측정법은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약 6,000년 전에 지구가 생성되었음을 믿게 해 주는 확실한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하루 - 영어로는 'day'이며 사실 'day'라는 단어는 '날'도 되고 '낮'도 됨 - 가 수백만 년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과연 밤(the night)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필이면 왜 엿새 동안에?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십니다. 이 말은 곧 그분께서 무한한 힘, 무한한 지식, 무한한 지혜를 가지셨음을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시작하시며 단번에 원하시던 모든 것을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온 우주와 지구와 그 속에 속한 모든 것을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은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엿새 동안이나 일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엿새라는 기간이 모든 것을 만드실 수 있는 무한한 하나님께 매우 특별한 기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출애굽기 20장 1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손가락"으로 이 명령들을 돌판에 기록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다음의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와 대화하는 것을 마치시고 증거판 두 개를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 판이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더라."(출 31:18)
출애굽기 20장 9절에 있는 네 번 째 계명은 우리가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어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이 명령에 대한 정당성은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 즉 한 주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창조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가 됩니다. 창세기 1장의 "하루"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계속해서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여기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져야만 합니다. 만일 창세기에 기록 된 "하루"라는 단어가 긴 시간을 뜻한다고 주장하려면 출애굽기에 쓰여있는 "하루"라는 단어 역시 유한한 길이의 시간이 아니라 무한하거나 혹은 정의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출애굽기 20장 9∼11절을 다시 해석해 본다면, "여섯 번의 무한한 시간 동안에 일하고, 일곱 번 째 무한한 시간 동안에 안식하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의 하루하루를 평상시의 하루하루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평범한 24시간의 하루하루를 통해 엿새동안 일하시고 하루를 안식하신 것이야말로 우리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 즉 우리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지키고 있는 바 "7일 = 1주(週)"의 형태를 보여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결코 한 시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창세기에 적혀있는 날들(days)을 오랜 시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많은 모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26절∼28절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여섯째 날에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창조된 뒤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에 계속해서 살았으며, 창세기 5장 5절은 아담이 930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아직도 일곱 번째 날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 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그 창조하시는 일로부터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하신다"라는 현재형이 아니고 "안식하셨다"라는 과거형으로 기록된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루하루가 백만년씩이라면 이 구절의 해석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참으로 그 하루하루가 단지 천년씩이라 하더라도 아담의 수명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루는 천년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베드로후서 3장 8절을 언급하며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무지하지 말라." 창세기에 기록된 "날들"(days)이 천년씩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추론의 근거로서 이 구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상당히 잘못된 것입니다. 시편 90편 4절로 돌아가면 그와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음이니이다."
베드로후서 3장과 시편 90편의 전체 문맥은 하나님이 우주 전체의 자연적인 진행 과정과 시간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도 창조하셨으므로 시간의 영역 밖에 계시며, 이런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시간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을 이용하여 창세기에 기록된 바 창조 때의 하루하루가 천년씩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하루가 단지 천년과 같고 천년이 단지 하루 같다는 사실이며, 그 앞 뒤 문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영역 밖에 계시므로 이 구절은 창세기에서의 창조 기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더욱이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하루"는 "천년"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의 "하루"라는 단어는 "천년"이라는 단어와 확연히 구별될 수 있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라는 단어가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코 "천년"과 대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를 통해 주신 메시지의 요지는 사람이나 "자연"이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성취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은 아주 짧은 순간에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이 사람을 탄생시키기 위해 수백만 년을 필요로 하는 무작위적인 "자연 과정"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처럼 진화론에 근거한 수백만 년의 역사를 믿고 있으며, 이런 믿음에다 성경을 첨가시키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수백만 년을 필요로 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화론이 매우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반하여, 베드로후서 3장 8절은 하나님께서 결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짧은 시간에도 자신의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날과 해
창세기 1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계절과 낮과 해를 표시하는 표적이 되게 하라." 여기서 쓰인 "날들"(days)이라는 단어가 실제의 평범한 하루가 아니라면, 같은 구절에 쓰여있는 "해들"(years)이라는 단어는 아무 뜻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하루와 계약
이제 눈을 돌려 예레미야 33장 25∼26절 말씀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낮과 밤과 더불어 맺은 나의 계약이 서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진대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 된 자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이 말씀을 통해 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께서 낮과 밤과 더불어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을 맺으셨으며, 그 계약은 왕좌에 앉기로 약속된 분(그리스도)을 포함하는 다윗의 후손들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낮과 밤과 더불어 맺은 계약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낮과 밤이 존재하도록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정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창세기 1장보다 명확하게 낮과 밤의 기원을 말해주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은 낮과 밤과 맺으신 그 계약이 시작된 곳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명령하셨을 때 낮과 밤과 맺으신 그 계약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즉, 당신이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루하루를 문자 그대로 평범한 엿새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레미야를 통해 내려주신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아무런 근거도 없게 되며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되고 맙니다.
하루의 길이가 정말 중요한가?
결론적으로, 이제 우리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루하루를 평범한 하루하루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혹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정말로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 대답은 "매우 중요하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으로 다가가는 일에서 기초가 됩니다. 예를 들어, 이것을 평상시 하루하루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날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하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마땅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창세기의 다른 부분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셨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만일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완전한 사실로 믿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문자 그대로 믿으라'는 말은 사람의 사적 해석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상징적으로 해석하거나 둘 중 하나를 취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 앞귀 문맥으로 보아 본문 자체가 분명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면 문자적 의미 그대로 믿어야만 합니다. 만일 본문이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을 때는 앞 뒤 문맥이 그 부분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거나 다른 참고 서적으로부터 그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누가 다가 와서 "창세기에 나오는 날 즉 그 때의 하루하루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날들을 실제의 평범한 날들로 믿는 사람을 비난해야 한단 말인가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날들을 평상시의 하루하루로 믿는 사람이야말로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들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누가 잘못되었다고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믿는 지질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매우 오래 된 우주 역사'를 증명하려 하기 때문에 "하루"라는 평범한 단어를 자꾸 다른 의미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시대는, 진화론이 보여주고자 하는 시대 즉 화석들이 죽음과 투쟁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시대와 같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주 오래되었으나 답변을 할 수 없는 문제 즉 '아담 이전에도 죽음과 투쟁이 있었다'는 문제에 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창세기에서 가르쳐주는 진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기록된 날들을 평범한 날들로 받아들인다면, 창세기에 기록된 나머지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2009-05-07 13:44:37 | 관리자
창세기에 기록된 6일 간의 창조는 지질학적 연대와 일치합니까?
* 다음은 헨리 모리스 박사의 "Bible has the answer"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대답 : 이미 확립된 역사 지질학의 체계에 따르자면 이 지구의 역사는 여러 개의 지질학적 연대로 나뉘어집니다. 대부분의 지질학자들은 지금부터 약 오십억년 전에 지구가 현재와 같은 구조로 진화되었다고 추정합니다. 원시 바다 속에 있던 매우 복잡한 화학 물질들이 대기 중에 있던 전기적 힘의 작용에 의해 약 삼십억년 전쯤에 스스로 재생할 수 있는 기능을 획득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이 단세포 생명체들이 오랫동안 존재하다가 약 십억에서 이십억년 전쯤에 후생(後生) 생물체들로 진화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한 지금부터 약 십억년 전쯤에 캄브리아기가 시작된 이후로 이 땅에서 갖가지 생명체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지각의 침전암 속에 매장되어 보존된 여러 유기체의 화석들에 의해 입증된다고 추측합니다. 또한 그들의 추측에 따르면, 오르도비시아기에 최초의 척추 동물이 출현했고, 실루리아기와 데본기에 어류가 번성하기 시작했으며, 페르모-석탄기에 양서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약 이억 년 전에는 거대한 공룡들이 살던 중생대가 시작됐습니다. 이 시대는 약 일억년 전 백악기가 끝나갈 무렵에 공룡들이 설명할 수도 없이 갑작스럽게 멸종함으로써 끝이 났습니다. 그 다음은 포유류와 조류 시대인 제3시기였습니다. 사람과 원숭이의 공통 조상으로 추측되는 유인원은 아마도 칠천만년 전에 나타났습니다. 한편 모든 면에서 현대인과 같은 모습의 사람은 약 백만년 전쯤에 출현한 것으로 그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낸 이같이 매우 주목할 만한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이 계시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단지 수 천년 전에 온 우주를 6일 동안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역사 기록이 기껏해야 6000년 정도뿐이 안되었는데 진화론자들은 몇 십억년을 논하니 참으로 놀랄만한 상상력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특히 지난 150년 동안에 많은 기독교 학자들은 지성 있는 인본주의 학들이 세워 놓은 진화론 체재로부터 조롱을 받지 않으면서도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질학자들이 규정해 놓은 지구 역사의 골격에 맞추어 창세기를 재해석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이와 같은 도구들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날-시대 이론"(day-ago)이며 이 이론에 의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창조의 6일 동안의 "하루"를 지질학적 연대의 "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조차도 이것을 단지 도피구 정도로 생각하거나 또는 창세기에 있는 역사 기록을 드러내 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막아보려는 수단으로 생각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놔두면 결국 성경 전체의 역사적 신빙성이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습니다.
"날"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욤"인데 이 단어는 문맥상 분명한 경우에 한해서만 막연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끔씩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 이 단어가 문자적 하루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단어는 만 하루의 태양일 즉 24 시간의 하루를 뜻하든지 태양일의 하루 중 낮시간을 뜻하든지 둘 중 하나로만 쓰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 단어를 처음으로 창세기 1장 5절에서 사용하시며 다음과 같이 친히 정의를 내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light)을 낮(day)이라 부르시고 어두움(darkness)을 밤(night)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day)이니라." 따라서 이 구절을 문맥에서 보면 낮(day)은 낮과 밤이 연속될 때의 낮을 의미하며 또는 빛과 어두움이 연속될 때 빛 부분을 의미합니다.
또, 이 단어의 복수형인 히브리말 "야민"은 구약 성경에서 무려 7백 번 이상 사용되었는데도 이 경우에도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항상 문자적인 "날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돌판의 십계명에 있는 말씀도 이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서 그분께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사 다음과 같이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in six days)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출 20: 11).
"날-시대 이론"은 비성경적일뿐만 아니라 이 이론 자체가 타협하고자 하는 지질학자들의 주장과도 크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비록 "날들"을 "시대들"로 해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창조의 날들에 이루어진 창조의 순서 및 사건들과 지구와 지구의 발전에 관한 표준 지질 역사간에는 20 가지가 넘는 중대한 모순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를 예로 든다면 성경은 지구가 별들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지구가 처음에 물로 덮여 있었으며, 과일 나무들이 어류보다 먼저 나타났으며, 처음 창조된 동물은 고래였으며 조류가 곤충보다 먼저 창조되었으며,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음을 가르치는데 이런 것들은 사실 역사 지질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이 노골적으로 반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날-시대 이론"에서 가장 심각한 오류는 신학적인 것입니다. 지난 50억 년의 역사 즉 아무런 목적도 없이 생긴 변화와 변이, 수많은 부적격자와 멸종, 잔인한 생존경쟁, 강자의 보존과 약자의 멸절, 온갖 자연 재난, 만연하는 질병, 무질서와 부패, 죽음 등으로 점철된 이런 부정적인 역사에 대해 사랑과 자비와 질서와 지혜와 목적의 하나님이 다 책임을 져야한다고 이 이론은 가르칩니다. 이 이론이 이런 엉뚱한 것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창조의 6일이 끝난 뒤에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았다고 선언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성경은 현재 모든 피조물과 함께 이 세상이 "신음하며 고통하는 것"은 사람의 죄와 이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롬 8:2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하나님은 혼동의 창시자가 아니시요"(고전 14:13) .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람의 창조와 구원이었다면 사람이 출현하기 수 천만 년 전에 공룡들이 오랫동안 이 세상을 지배하다가 멸종된 사건에는 과연 어떤 목적이 있었겠습니까? 병자를 고쳐주고 이기심을 버리고 남에게 나누어주며 오른 뺨을 때릴 때에 왼뺨도 돌려대며 자기를 희생하는 기독교의 윤리는 부적격자를 파멸시키고 남을 공격하며 자기만을 보존하는 진화론의 윤리와 정반대가 됩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날-시대 이론"이나 혹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진화론의 신앙에 꿰어 맞추려고 애쓰는 다른 모든 이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성경적, 과학적, 신학적 오류들 가운데 일부에 불과합니다.
2009-05-07 13:43:10 | 관리자
간극 이론을 통해 화석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지질학의 오래된 연대들을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 다음은 헨리 모리스 박사의 "Bible has the answer"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대답 : 역사 지질학자들은 지구가 약 오십억년 전에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반하여 성경은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출 20: 11). 더욱이 창세기 5장과 11장의 연대기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 모든 일이 겨우 수 천년 전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명백한 차이점은 성경적 기독교와 현대 진화론 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싸움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됨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구가 육천년 이상 되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기간에 대해서만 실제로 기록된 역사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과학이 말 그대로 과학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실험적 관찰과 측정을 수반해야 합니다. 그런데 옛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는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기록하려고 그 자리에 있었던 "관찰자"는 지금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의 지질학적 연대를 측정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물리학적 과정들은 증명할 수도 없으며 실제로 이치에 맞지도 않는 가정들을 많이 필요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에 기반을 두고 추측해야만 한다는 압력이 지난 한 세기 동안 너무 강했기 때문에 심지어 많은 성경학자들도 진화론자들이 추정하는 지질학적 연대에 맞추는 방법으로 창세기를 재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결과 두 종류의 이론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지질학적 연대를 창조의 6일 "동안'에 두되 그 때의 하루를 한 시대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날/시대 이론"이라 할 수 있으며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한편 다른 하나는 지질학적 연대를 창조의 6일 전에 두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원래의 지구가 있었는데 대격변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6일"은 실제로 "재창조의 6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번째 이론은 "간격 이론"이라 불리며 진실한 성경 교사들의 큰 옹호를 받으며 근본주의자들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를 잡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이론은 실제로 수많은 심각한 오류를 수반합니다. 지질학적 연대는 단순히 광범위한 화석 기록을 무시함으로써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처럼 추측해서 연대를 세우는 것은 지구와 및 사람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진화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갖게 마련입니다. 사실 화석 기록은 진화론자들이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최상의 증거이며 사실상 무시할만한 크기로 진화가 이루어질 수 있음 - 즉 종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종 안에서 변이가 생기는 것 -을 보여 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더욱이 지질학적 연대는 특히 지각에 있는 침전암의 화석 내용물을 통해 인식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질학적 연대의 명칭들 자체가 이것을 보여 주는데 "고생대"는 "고대 생명 시대"를, "중생대"는 "중간 생명 시대"를, "신생대"는 "최근의 생명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진화론자들이 만든 지질학적 연대를 수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진화론의 모든 주장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침전암에 보존된 대부분의 화석들은 현 세상에도 분명히 그 친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창조"라는 개념은 예전에 오랜 시대에 걸쳐 발전되어 오던 동물과 식물이 결국은 아담의 창조 이전에 있었던 대격변으로 인해 멸종하거나 완전히 사라졌고 그래서 창조주께서는 이러한 동일한 동물과 식물의 대다수를 6일 만에 재창조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이론은 "아담 이전에 사람이 존재했다"는 개념을 필연적으로 수반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형태를 지닌 많은 화석들의 연대가 성경의 연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보다 엄청나게 오래된 것으로 진화론자들이 추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이 약 100만년 전에 출현했다고 하는데 이 간격 이론 역시 아담이 아닌 다른 종류의 인간이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전에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간격 이론은 실제로 진화론 문제를 직면하여 풀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창세기1장 1절과 1장 2절 사이에다 어떤 상상적인 시간의 간격을 만들고 그 안에 이 문제를 집어넣어 묵살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시 세상에서 오랜 시대에 걸쳐 느릿느릿 진화가 일어나게 하신 다음 그것을 파괴하시고는 그 뒤에 또 자신이 파괴시킨 동일한 형태의 동식물을 재창조하기 위해 특별한 창조의 방법을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대해 간격 이론은 전혀 해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최근의 지질학 역사를 보아도 그처럼 온 세계에 걸쳐 대격변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지질학적 증거가 없습니다. 간격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런 대격변을 빙하기와 동일시하지만 이런 빙하기는 온 세계에 걸쳐 일어난 대격변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큰 얼음들은 중위도 지역까지만 퍼졌고 따라서 빙하기 이전의 모든 생명체를 파멸시키지 못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담 이전에 온 세계를 덮은 대격변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성경적 증거도 없습니다. 문맥에서 떨어진 몇몇 본문들이 간격 이론에 맞도록 해석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상상에 의존하는 원시 창조와 아담 이전에 존재했던 대격변 즉 가설에 근거한 대격변이 어떠한 것인가를 직접적이고도 명백하게 보여주는 구절은 성경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성경 교사들이 신학적으로 이 이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온 우주의 근본 역사를 설명하며 이 문제에 대해 그처럼 쉽게 대답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경 말씀에서 이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 이론이 지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도 이 세상의 죄악을 만든 장본인으로 하나님을 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이 암시하는 바는 그분께서 원시 세상에서 적어도 삼십억년 이상이나 자신의 알 수 없는 어떤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 투쟁, 폭력, 부패, 사망의 방법을 온 세계에 적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이론이 성취하고자 하고자 하는 바는 현존하는 화석들과 지질학적 연대들의 증거를 창세기 1장 2절 앞에 두고 무시하려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탄이 하늘에서 하나님께 범죄했고(사14:12-15, 겔 28:11-17)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그를 땅으로 쫓아내심으로써 아담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대격변의 때에 이 지구를 파괴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늘에서 사탄이 범죄한 것은 그런 범죄가 있기 전의 지질학적 시대에 이 세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존재한 고통과 사망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도 결코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땅에 고통과 사망과 혼란을 야기한 것에 대해 홀로 책임을 져야 하는 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사실 신학적으로 흔돈만 생깁니다! 사실 성경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6일간의 창조 끝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여기에 나오는 모든 것에는 지구 전체와 그 안의 모든 것과 하늘들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창 1:16, 2:2 등을 참조바람). 또한 사람이 범죄하기 전까지는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롬 5:12, 고전 15:21).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늘에서 사탄의 반역도 그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매우 좋았다"고 성경이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있는 큰 묘지 즉 전 세계에 걸쳐 발견되는 딱딱한 침전물내의 화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진짜 해답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아주 오랜 시대에 걸쳐 발생한 자연계의 균일한 과정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간격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추측하는 바와 같이 6일 동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 전에 대격변이 일어났다는 상상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이에 대한 해답은 창세기 6장부터 9장 사이에 묘사되어 있는 범세계적 재난 즉 실제로 일어난 노아의 대홍수 기록을 자세히 공부함으로써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대홍수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입증되며 전 세계의 여러 민족 및 부족의 초기 기록에서도 잘 입증됩니다.
2009-05-07 13:41:13 | 관리자
진화론은 열역학 제2법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 다음은 헨리 모리스 박사의 "Bible has the answer"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대답 : 진화론자들을 대적하기 위해 창조론자들이 효과적으로 사용해온 반론들 가운데 하나는 우주 및 현존하는 유기체 세계의 발전에 대한 진화론의 가설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곧 열역학 제2법칙과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에 모순이 없으며, 진화론과 열역학 제2법칙이 둘 다 사실일 수 있다고 논박하곤 합니다. 이제 우리는 두 명의 진화론 선두주자가 내리는 두 가지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현존하는 진화론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헉슬리 경(Sir Julian Huxley) 은 다음과 같이 진화를 정의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진화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으로 방향성을 띠고 있으며 또 본질적으로 비가역 과정 즉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변이가 증가하게 되고 그 결과 고도로 발달한 조직체가 증가하고 그 산물들이 생겨난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은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실체가 진화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받아들이게 하고 있으며 사실 진화야말로 스스로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모든 실체의 원인으로 여깁니다. 미립자는 원자로 진화하고. 원자는 분자로, 분자는 세계들과 별들과 은하수들로 진화하며, 무기체는 생명체로 진화하고 이것은 더욱 복잡한 식물과 동물로, 결국 사람으로 진화하여 이제는 사람이 미래의 모든 진화를 지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프린스턴 대학교의 저명한 생화학자 블럼(Harold Blum)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실제 과정이 비가역적인 방향으로 즉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만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은 엔트로피라 하는 어떤 양의 변화를 수반한다......모든 실제 과정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진행한다. 엔트로피는 또한 어떤 계의 무질서도를 나타내는데 계의 무질서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엔트로피도 증가한다."
따라서 헉슬리의 말대로 한다면, 진화는 온 우주에 적용되는 법칙으로 모든 과정으로 하여금 "질서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만 가게 하는 법칙입니다. 즉 생명이 없는 흙덩이에서 생명이 있는 아메바로 옮겨가며, 질서가 낮은 아메바에서 질서가 높은 사람으로 옮겨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블럼의 말대로 한다면, 엔트로피 법칙은 온 우주에 적용되는 법칙으로 모든 과정이 "무질서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만 가게 하는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주장하는 바는 서로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둘 중의 하나는 틀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열역학 제2법칙은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근본 원칙으로 어디에서나 인정받고 있으며, 실험을 통해 수없이 입증되었으며, 우리의 모든 경험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법칙이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과학의 법칙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이것이 그런 법칙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헉슬리의 주장이 틀린 것이며 따라서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에 따른 철학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아주 그럴 듯한 두 가지 방도를 제시할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엔트로피 법칙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식에 한계가 있고 이 광대한 우주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열역학 제2법칙이 시간과 공간의 모든 곳에 다 적용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경험적인 측정만으로는 결코 온 우주에 적용되는 확실한 법칙을 확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반론은 물론 철학적으로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언제나 엔트로피 법칙을 과학적으로 실험해 보면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항상 옳은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비록 온 우주의 총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엔트로피를 과학적으로 시험해 보면 우주의 어떤 부분에서든지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다고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온 우주에 진화가 일어나려면 적어도 온 우주 대부분의 질서도가 반드시 증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과학 실험에 의해서도 이에 대한 정량적인 확증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화론자들이 이런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열역학 제2법칙이 다른 계와는 아무 것도 주고받지 않는 소위 "고립 계"라 하는 특별한 계에만 적용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열린 계"안에서는 질서가 증가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기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두 마리의 동물은 번성하여 수많은 자손을 이루며, 사람이 얻는 지식은 엄청나게 축적됩니다. 심지어 무기체 영역에서도 간단한 원소들이 자연적으로 결합되어 복잡한 혼합물을 형성하며, 분자들은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지닌 수정으로 변합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이 모든 것이 열린 계들이며 이것들의 조직을 증가하는 것은 이것들 밖에 있는 어떤 근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구 자체는 하나의 열린 계로서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끊임없이 받고 있는데 바로 이런 에너지가 진화적 과정과 이 과정이 수반하는 이른 바 계속해서 질서가 증가하는 것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동력의 근원이 될 수 있다고 진화론자들은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 동일한 논법을 태양계 전체와 우주의 어떤 유한한 부분에도 다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열역학 제2법칙은 오직 고립된 계에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구와 같은 열린 계 안에서 진화가 일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하는 바의 핵심입니다. 사실 이것은 진화와 엔트로피를 조화시키기 위해 블럼이 사용하는 계략이기도 합니다.
물론, 창조론자들은 이것이 철학적으로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실제의 모든 과학적 측정 결과와는 여전히 상반된다고 대답합니다. 열역학 제2법칙을 공식적으로는 "이상적인 고립 계"라는 조건하에서 정의해야 하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언제나 열린 계에 대해서만 실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 속에는 참으로 100% 고립된 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어디서 실험을 하든 이 법칙은 항상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역학 제2법칙은 고립 계든 열린 계든 그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떠한 기계나 과정도 100%의 효율을 발휘할 수 없으며 영구운동 기계를 제작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이 결국에는 닳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얼마 동안 질서의 증가를 보이는 계들조차도 결국에 가서는 부패의 법칙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완전해 보이는 수정도 결국은 분해되며, 어른은 결국 사망하며, 종은 결국 멸종되며, 심지어 위대한 문명들조차 외부의 침략이나 기근 또는 핵전쟁 등으로 인해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에서 보아 질서와 복잡성이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기껏해야 국부적이고 일시적으로만 그런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일이 발생하면서 그 계는 주위 환경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에너지를 얻지만 반드시 그 환경에 더 큰 무질서를 안겨주고야 맙니다. 그래서 계와 주변을 포함한 전체의 무질서는 항상 증가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국부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질서가 증가하는 것도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복잡한 과정이 이부에서 그 계에게 주어질 때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식물은 광합성이라는 놀라운 과정을 통해 태양의 에너지를 활용하고 이로써 자라납니다. 동물과 사람은 혈액 순환, 소화, 호흡, 그 밖의 복잡한 여러 과정을 통해 자라납니다. 그리고 식물과 동물의 생명은 나름대로의 종을 유지하기 위해 유전 체계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부호화 작업과 본을 뜨는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에 기반을 둔 모든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가정 즉 질서가 한없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은 잠시나마 성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놀랍고 복잡한 메커니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수 천 명의 과학자들이 수 백 만 달러의 연구비를 써가면서 백 년 이상 열심히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진화의 메커니즘은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열역학 제2법칙과 완전히 일치하는 가운데 활동하고 있는 돌연변이라는 무질서화 메커니즘과 자연계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존의 법칙 즉 자연 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진화의 유기적 단계를 지지하는데 필요한 메커니즘으로 제안하는 것은 참으로 애처로운 일입니다. 또한 이것은 자연에서나 성경에서 분하게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에 관한 분명하고도 만족스런 증거를 피해 기를 쓰고 달아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필사적인 조치입니다.
그러므로 실제가 아닌 형이상학적인 추측을 통해 열역학 제2법칙을 거부하며 진화를 변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뿐만 아니라 확실한 과학적 증거들조차도 다 진화를 반대합니다.
2009-05-07 13:38:28 | 관리자
기원이라 하는 모세의 첫 번째 책: 창세기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기록자: 모세, 기록 시기: 주전 1450년경, 성격: 역사, 기간: 약 2,315년(어셔의 연대기)
수신자: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온 인류(롬15:4; 고전10:11)
이름: 유대인들은 이 책을 ‘처음에’(In The Beginning)라고 불렀다. Genesis는 창세기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책명 ‘게네시스’에서 나와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정착된 이름으로 ‘기원’을 뜻한다. 따라서 창세기는 사람과 온 우주의 시작을 보여 주는 책이다.
주제: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죄가 들어온 땅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을 써서 여러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
목적: 사람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온 인류에게 보여 주는 것(3:15, 21; 22:8; 마20:28; 요1:29; 갈4:4-5)
내용: 창세기는 창조주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의 기원을 보여 주는 책으로 온 우주 만물의 창조, 사람의 창조, 가정의 형성, 죄의 기원, 사람의 타락, 희생 예물을 통해 하나님과 잠정적으로 관계가 회복되는 것과 여자의 씨인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회복될 것에 대한 예언, 노아의 대홍수, 민족들의 발전,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시작, 족장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기사, 요셉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진출 등을 담고 있다. 창세기는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특별히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과 그 뒤 죄가 은밀히 들어와 온 세상에 파멸과 죽음을 가져온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비극적 결과를 보여 준다. 창세기는 사람이 죽는 이유와 만물이 쇠퇴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므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초가 된다. 그래서 창세기는 곧장 신약으로 연결되어 창세기의 말씀들이 신약성경의 17권의 책 속에서 60여 차례 인용되고 있다. 창세기는 생명으로 시작해서(1:20-28) 사망으로 끝난다(50:26). 창세기는 50장, 1,533절, 38,267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1장(창조), 12장(아브라함을 부르심)
핵심 절: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1:1)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의 다른 부분을 믿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한 구절은 사람이 만든 여러 가지 그릇된 이론을 산산조각 낸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무신론은 존재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으므로 범신론도 존재할 수 없으며 유일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므로 다신론도 무효하고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므로 물건이나 천체를 숭배하는 유물론도 무효하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진화론도 성립되지 않는다.
핵심 단어: 처음(시작), 핵심 구: “처음에”(1:1)
창세기의 그리스도: 1. 여자의 씨(3:15; 마1:18-25; 갈4:4), 2. 아브라함의 씨(12:1-2; 갈3:29), 3. 우리의 화평이신 실로(49:10; 요16:33; 롬5:1), 4. 이스라엘의 돌이신 목자(49:24; 요10:11), 영적 교훈: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라.”(눅1:37; 요15:5)
2009-05-07 13:36:18 | 관리자
창세기 10장의 노아의 자손들은 역사적 인물들입니까? |
노아의 손자들이 건설한 나라들-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 있다. 수많은 고대의 지명들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는 노아의 후손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역사적 기록은 노아의 홍수가 사실이었으며 살아남은 자들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부터 나왔을 때 그들은 지구상에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 이후 지구는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과 그들의 아내들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에 의해 채워졌다.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16명의 손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노아의 16명의 손자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한 인물들임을 확신시켜 줄 수 있는 풍부한 증거들을 남겨 놓으셔서 창세기에 나오는 이름들이 그들의 실제 이름이고 바벨탑이 무너진 이후(창세기 10장) 그들의 자손들이 전 세계로 흩어진 후 다양한 고대 왕국을 건설했다는 말씀도 사실이었음을 입증해 주신다.
홍수 이후의 첫 번째 세대는 매우 오래 살아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아들, 손자, 증손자보다도 오래 살았다. 노아의 16명의 손자들은 각 부족의 족장이 되었으며 자기들 지역에서 커다란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1. 각 지역 사람들은 자기들 조상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2. 그들이 거주한 땅, 주요 도시, 강 등의 이름 또한 그들의 조상들의 이름으로 불렸다.
3. 가끔씩 각 나라는 자기들의 조상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으로 조상의 이름 뒤에 자기들 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장수한 조상을 자기들의 신으로 추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에 근거해서 노아 후손들의 이름은 유실될 수 없는 방법으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으며 그 사람들의 모든 흔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검증해 보자.
1. 야벳(Japheth)의 일곱 아들
창세기 10장 1-2절 : “이제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세대들이 이러하니라. 홍수 이후에 그들에게 아들들이 태어났으니 야벳의 아들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1) 고멜(Gomer)
노아의 손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사람은 고멜이었다. 에스겔서에는 도갈마(Togarmah, 고멜의 아들)와 함께 고멜의 초기 자손들이 북쪽 지역(극한 북방)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겔38:6). 현재의 터키(Turkey) 지방은 신약시대에 갈라디아(Galatia)라 불리던 지방이다.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자기가 살던 시대인 주후 93년경에 갈라디아 지장에 거하던 갈라디아 사람들(Galatians) 또는 골 사람들(Gauls)이 예전에 고멜 사람들(Gomerites)이라고 불렸음을 기록했다. 이들은 현재 프랑스와 스페인이라 불리는 서쪽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수세기 동안 프랑스는 고멜의 자손들이라는 뜻을 가진 골(Gaul)이라 불렸으며 현재도 스페인의 북서쪽은 갈리시아(Galicia)라 불린다.
고멜의 자손들(Gomerites) 중 몇몇은 현재 웨일즈(Wales)라 불리는 곳까지 더 멀리 이주하였다. 웨일즈의 역사학자인 데이비스의 기록에 의하면, 전통적인 웨일즈 사람들은 고멜의 자손들이 프랑스로부터 영국의 섬으로 와서 정착한 사람들이고 그 시기는 대략 대홍수로부터 약 3백년이 지난 후였다고 믿고 있다. 또한 그의 기록에 의하면 웨일즈의 언어도 ‘Gomeraeg’라 불렸는데 이것 역시 그들의 조상인 고멜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 부족의 다른 무리는 아르메니아(Armenia)에 속해 있는 땅에 정착하였다. 고멜의 아들들은 아스그나스(Ashkenaz)와 리밧(Riphath)과 도갈마(Togarmah)였다(창10:3).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도갈마와 아스그나스의 자손들이라고 주장했음을 보여 준다. 고대 아르메니아는 터키에까지 국경이 닿아 있었다. 터키(Turkey)라는 지명도 도갈마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 다른 이들은 독일로 이주하였다. 아스그나스(Ashkenaz)는 독일(Germany)을 가리키는 히브리말이다.
2) 마곡(Magog)
노아의 다음 손자는 마곡(Magog)이다. 에스겔서에 의하면 마곡은 북쪽에 살았다(겔38:15; 39:2).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마곡 사람들(Magogites)이라 불렸으며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을 스키티아 사람들(Scythians)이라고 불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지금의 루마니아(Romania)와 우크라이나(Ukraine)를 포함한 지역의 고대 이름이 스키티아(Scythia)였다고 증언한다. 신약성경은 이들을 ‘스구디아인’이라고 번역하였다(골3:11).
3) 마대(Madai)
다음 손자는 마대(Madai)이다. 셈의 아들인 엘람(Elam)과 함께 마대는 현재 이란 사람들의 조상이다. 요세푸스는 마대의 자손들이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 메대(Medes)라 불렸다고 증언한다. 구약성경에서 메대가 언급될 때마다 그것은 히브리어로 마대(Madai 혹은 Maday)로 기록되었다. 고레스(Cyrus,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대왕 시대 이후에 메대는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항상 페르시아 사람들과 함께 언급되었다. 그들은 하나의 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 하나의 왕국이었다.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들의 법’(단6:8, 12, 15)이라는 어구를 보기 바란다. 이후에 그들은 간단하게 (메대를 생략하고) 페르시아 사람들(Persians)로 불렸다. 1935년 이후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이란(Iran) 이라고 불렀다. 한편 메대 사람들은 인도에도 정착하였다.
4) 야완(Javan)
다음 손자 이름인 야완(Javan)은 그리스(Greece)의 히브리 단어이다. 그리스, 그리시아(Grecia) 또는 그리스 사람들(Grecians)은 구약성경에 다섯 번 나타나며 그때마다 히브리어로는 항상 야완이라 쓰였다. 다니엘은 ‘그리스의 왕’(단8:21) 이라는 단어를 인용했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야완의 왕’을 뜻한다. 야완의 아들들은 엘리사(Elishah)와 다시스(Tarshish)와 깃딤(Kittim)과 도다님(Dodanim)이었는데(창10:4) 이들은 모두 그리스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명칭인 엘리사 사람들(Elysians)은 엘리사(Elishah)로부터 그들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다시스(Tarshish) 또는 다소(Tarsus)는 길리기아(Cilicia, 현재의 터키) 근방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깃딤(Kittim)은 성경에서 키프러스(Cyprus, 구브로)를 가리킨다. 그리스 사람들은 주피터 도다네우스(Jupiter Dodanaeus)라는 이름의 주피터 신을 숭배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야벳(Japheth)과 야완의 네 번째 아들인 도다님(Dodanim)에서 파생된 말로 보인다. 그의 신탁 장소(oracle)는 도데나(Dodena)에 있었다.
5) 두발(Tubal)
다음은 두발(Tubal)이다. 에스겔은 그를 곡(Gog)과 메섹(Meshech)과 함께 언급하였다(겔 39:1). 주전 1100년경에 아시리아의 왕이었던 디글랏빌레셀(Tiglath-pileser) 1세는 다발리(Tabali)라 불리던 두발의 자손이었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이름을 도벨 사람들(Thobelites)이라고 기록하였으며 후세에 이들은 이베리아 사람들(Iberes)로 알려졌다. 요세푸스 시대에 그들의 땅은 로만 이베리아(Romans Iberia)로 불렸다. 이곳은 현재 구소련 연방인 그루지아(Georgia) 지방에 속한다. 현재 그곳의 수도는 트빌리시(Tbilisi)이며 이 지명은 두발(Tubal)이라는 이름으로부터 파생되었다. 이 사람들은 이곳으로부터 코카서스 산맥을 가로질러 정확하게 북동쪽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그 부족의 이름을 따서 그곳의 강 이름도 도볼(Tobol)라라 불렸고 토볼스크(Tobolsk)라는 유명한 도시의 이름도 거기서 나왔다.
6) 메섹(Meshech)
다음 손자의 이름인 메섹(Meshech)은 모스크바(Moscow)의 옛 이름이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임과 동시에 그 도시를 둘러싼 지역의 명칭이기도 하다. 현재에도 그 주변 지역 중 메스체라 노렌드(Meschera Lowland)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메섹의 이름을 따라 불리고 있다.
7) 디라스(Tiras)
요세푸스에 의하면 디라스(Tiras)의 자손들은 디라스 사람들(Thirasians)이라고 불렸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이름을 트라시안(Thracians)으로 바꾸었다. 트라키아(Thrace)는 남쪽으로는 마케도니아(Macedonia), 북쪽으로는 다뉴브 강, 동쪽으로는 흑해까지 이르렀다. 이 사람들이 유고슬라비아를 이루었다. 세계대백과사전에 의하면 트라키아 사람들은 야만적인 인도/유럽계통의 사람들로 전쟁과 약탈을 좋아하는 민족이었다고 한다. 디라스는 그의 자손들로부터 두라스(Thuras) 또는 번개의 신인 토르(Thor)라는 이름으로 숭배를 받았다.
2. 함(Ham)의 네 아들
'함의 아들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창10:6)
1) 구스(Cush)
함(Ham)의 자손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남서부 지역과 아프리카에 살았다. 성경에서는 아프리카(Africa)를 함의 땅이라고 부른다(시105:23, 27; 106:22). 노아의 손자 이름인 ‘구스(Cush)’ 는 옛적에 이디오피아(Ethiopia, 아스완 남부로부터 카르툼까지)를 가리키는 히브리말이다. 예외 없이 영어성경에서 이디오피아란 단어는 항상 히브리말 ‘구스’를 번역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그 이름을 ‘Chus' 라고 표현하였으며 심지어 현재에도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구스 사람들(Chusites)이라고 부르며 다른 아시아 사람들도 그들을 그렇게 부른다.
2) 미스라임(Mizraim)
노아의 다음 손자는 미스라임(Mizraim)이다. 미스라임은 이집트(애굽, Egypt)를 가리키는 히브리말이다. 이집트란 이름은 구약에서 수백 번 언급되는데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것은 항상 미스라임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 땅의 거주민 가나안 족속이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애곡하는 것을 보고 이르되,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심히 슬픈 애곡이라, 하였으므로 그것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Abel Mizraim)이라 하였으니”(창50:11).
3) 붓(Phut)
노아의 다음 손자인 ‘붓’(Phut)은 리비아(Libya, 이집트의 서부지역)를 가리키는 히브리말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세 번 이렇게 번역되었다. 리비아 내에는 고대에 붓 강이 있다. 다니엘 시대에 이미 그 이름은 리비아로 바뀌었다(단11:43). 요세푸스에 의하면 붓은 리비아를 창건한 사람이며 그의 후예들은 붓 사람들(Phutites)이라 불렸다.
4) 가나안(Canaan)
노아의 다음 손자인 ‘가나안’(Canaan)은 훗날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 불리게 된 현재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지역을 가리키는 히브리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몇 함의 자손들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창10:14-18). ‘블레셋’(Philistim)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의(Philistines)의 조상임이 분명하며 후에 여기서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는 이름이 나왔음도 확실하다). 시돈(Sidon)도 시돈이라는 도시를 창건한 조상의 이름이고 헷(Heth)도 고대 히타이트족(Hittite)의 조상이었다. 또한 그의 자손들은 창세기 10장 15-18절에 나오는 여부스 족속(Jebusites, 여부스(Jebus)는 예루살렘의 옛 이름이었음. 삿19:10), 아모리 족속(Amorites), 기르가스 족속(Girgasites), 히위 족속(Hivites), 알가 족속(Arkites), 신 족속(Sinites), 아르왓 족속(Arvadites), 스말 족속(Zemarites), 하맛 족속(Hamathites)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들은 가나안 땅에 살았던 고대인들이었다.
함의 자손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자손은 니므롯(Nimurod)이었는데 그는 바벨(Babel, Babylon)의 창시자였으며 시날(Shinar, Babylonia) 땅의 에렉(Erech)과 악갓(Accad)과 갈레(Calneh)를 창건한 인물이다.
3. 셈(Shem)의 다섯 아들
마지막으로 셈의 다섯 아들을 살펴보자.
'셈의 자손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창10:22)
1) 엘람(Elam)
엘람(Elam)은 페르시아(Persia)의 옛 이름이며 페르시아는 또한 이란(Iran)의 옛 이름이다. 고레스(Cyrus) 시대까지 이곳 사람들은 엘람 사람들(Elamites)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은 신약시대에까지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2장 9절에 보면, 오순절 날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페르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엘람 사람들(Elamite) 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페르시아 사람들은 셈의 아들인 엘람과 야벳의 아들인 마대(Madai)의 자손(앞의 내용 참조)들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 이후로 그들은 자기 나라를 이란이라 불렀다. 흥미로운 사실은 히틀러로 인해 유명해진 ‘아리안(Aryan)’이란 단어가 '이란(Iran)'이라는 단어로부터 왔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순수한 아리안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우수한 민족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추구한 ‘아리안’이라는 민족은 셈족(Semites)과 야벳족(Japhethites)이 합쳐진 혼합된 민족이었다.
2) 앗수르(Asshur)
앗수르(Asshur)는 아시리아(Assyria)를 가리키는 히브리말이다. 아시리아는 고대의 거대한 왕국 중의 하나였다. 구약에서 아시리아 사람이나 아시리아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그것은 앗수르(Asshur)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자손들로부터 숭배를 받았다. 참으로 아시리아 제국이 지속되던 때에(주전 612년경까지) 전쟁과 외교 관계 그리고 해외소식들은 매일 그의 동상 앞에서 낭독되었으며 모든 아시리아의 왕들은 자기들의 조상인 앗수르 - 즉 조상신 앗수르 -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3) 아르박삿(Arphaxad)
아르박삿(Arphaxad)은 갈대아(Chaldeans) 사람들의 조상이었다. 이것은 허리안 서판(Hurrian(Nuzi) tablets)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는 갈대아의 창시자를 아립허라(Arip-hurra)라는 이름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후손인 에벨(Eber)은 아르박삿의 이름을 에벨-벨렉-르우-나홀-데라-아브람의 경로를 통해 히브리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창11:16-26). 에벨은 ‘강을 건넌 자’라는 뜻이며 히브리라는 말이 바로 이 에벨에서 유래되었다. 에벨의 다른 아들인 욕단(Joktan)에게는 13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창10:26-30) 그들은 모두 아라비아(Arabia)에 정착하였다.
4) 룻(Lud)
룻(Lud)은 리디아 사람들(Lydians)의 조상이었다. 리디아는 현재 서부 터키(Western Turkey)로 알려진 곳이다. 그들의 수도는 사데(Sardis)였으며 이곳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하나이다(계3:1).
5) 아람(Aram)
아람(Aram)은 시리아(Syria)를 가리키는 히브리말이다. 구약에서 시리아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것은 ‘아람’을 번역한 것이다. 시리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아람 사람들(Arameans)이라고 부르며 또 그들이 쓰는 언어도 아람어(Aramaic)라고 불린다. 그리스 제국이 확장되기 전까지 아람어는 국제어로 사용되었다(왕하18:26).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oi, Eloi, lama sabachthani)’라고 부르짖으셨는데(막15:34) 이것은 그 시대에 일반인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아람어였다.
결론
우리는 노아의 16명의 손자들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했던 인물들이었다는 증거는 매우 많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들의 조상들에 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신화나 전설들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며 고대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책이다.
(*) 이 글은 한 형제가 참고하라고 보내 준 글을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여 고치고 몇 부분을 추가하여 수정한 것입니다. 원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teen Grandsons of Noah by Harold Hunt, Russell Grig
2009-04-21 10:09:1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