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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해서 성경이나 종교관 같은 걸 완전히 배제하고, 나 혼자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은 아주 단순하다. “세상의 그 많고 많은 예쁜 여자들을 놔두고 하필 같은 남자가 좋냐? 미친넘~” 정도가 고작이다. 난 동성애가 죄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게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인간이 그런 개념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를 못 했으며 지금도 못 한다.   그러나 그저 나 자신이 모르고 이해 못 하고 싫어한다는 상대적인 이유만 내세워 동성애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는, 동성애에 대해서 세상을 향해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 여러분 중엔 본인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그 많고 많은 유흥과 취미, 오락거리들을 놔두고 하필 철도가 뭐가 좋냐? 미친넘~”   철도를 소수 취향으로 존중해 주는 게 가능하듯이 동성애도 그렇게 취급하는 게 가능할까?   성경을 보면 딱 한 군데 삼하 1:26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워낙 우정이 두터운 친구지간이어서 그 사랑이 ‘여인들의 사랑’, 다시 말해 이성간의 사랑을 뺨칠 정도였다는 표현이 있다.이걸 보고 설마 다윗과 요나단이 게이 사이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과대망상 증세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동성애는 과연 우정의 연장선이며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걸까?동성애자는 둘 다 동일한 동성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난 처음에 동일한 줄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더라.걔네들 사이에서도 남자 역할과 여자 역할이 나뉘어 있다. 또한, 동성끼리 말 그대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동을 한다. 이 과정이 차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엽기적이고 추잡하다.   게다가 동성애자들은 평생 한 배우자(?)하고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게이 바에서 평생 몇십, 몇백 명의 파트너들을 만나서 그 짓을 한다. 한국어엔 놀랍게도 비역질과 밴대질이라고 성별까지 따로 구분하여 이를 표현하는 어휘가 존재한다..;;; 물론, 흡연자가 다 폐암 걸려 죽는 게 아니듯, 동성애를 한다고 다 에이즈에 걸리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 패턴을 보아하면, 성병 발병률이 월등히 높아질 수밖에 없다.이건 단순한 친구 사이와는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 동성애자에 대한 더러운 편견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보여야 하고 여자는 여자답게 보여야 한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보고 이성으로서 매력을 느끼고, 여자는 남자를 보고 이성으로서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코스이다. 그렇지 않은 이상한 것에서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고 성적 충동을 느끼는 걸 우리는 ‘변태’라고 부르며 혐오하고 멀리한다. 이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성적 수치심, 양심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넣어 주신 지극히 당연한 관념에서 비롯된 습성이다.   그런데 비록 변태같긴 해도 동성애자들이 자기네들끼리만 그렇게 즐기는 것 자체는, 무슨 살인이나 강간도 아니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니니까 괜찮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다. 기독교 계열의 종교는 교리적으로 왜 그리 동성애를 싫어하는 걸까?   이것은 현행 법이 동물 학대죄를 단순한 재물 손괴죄 이상으로 엄하게 처벌하는 이유와 아쉬운 대로 비슷한 맥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말 못 하는 미물이지만, 동물을 그 정도로 학대할 정도이면 충분히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반인륜적인 짓을 한 것이고 잠재적으로 사람에게도 잔인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동물이 불쌍해서 차원이 아니다.   그런 것처럼, 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정해 놓으신 지극히 원초적이고 딱히 교육이 필요하지도 않은 본능이다. 그런데 그런 기본 법칙과 질서부터 배배 꼬고 왜곡할 정도이면, 이미 그 사람의 상태는 정상이 아닐 뿐더러 그는 더 어렵고 고차원적인 다른 법칙까지 지킬 리가 없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동성애는 매우 위험하고 심각한 죄로 간주되는 것이다.   어디 한번 동성 결혼을 하고 나서 하나님 이름 팔아서 혼인 서약을 해 보아라. 마치 하나님께 “이 좋은 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하는 것만큼이나 앞뒤가 안 맞고 양심적으로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동성애는 태생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죄악하고 연결이 안 될 수가 없다. 이런 수읽기를 하는 영적인 안목을 인간에게 심어 줄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선천적으로 동성애 기질을 타고나는 사람도 있다고 그런다. 한편으로는 후천적인 개인 취향 운운하더니만 이제는 선천적인 이유를 꺼내 드는 게 의아하다. 그런 사람이 진짜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있다 해도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하나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누구나 안 배워도 잔머리 굴릴 줄 알고 거짓말 할 줄 알고 나쁜 짓 잘 하는 것하고 완전히 똑같은 맥락이다.   동성애를 마음껏 즐기는 건 성적인 해방이 아니며 자유를 얻은 것도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니까 그들이 인간성이고 뭐고 다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리고, 막장의 막장까지 간 끝에 타락의 정점을 찍은 결과물이 동성애라고 로마서 1장 후반부는 말한다. 그 말이 진짜 맞는지는 내가 보기엔 동성애자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지 싶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동성애를 동성애라고 중립적으로 일컬어 주신 적이 없다. 언제나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흉한 짓을 한다”, “남자가 여자와 눕듯이 남자하고 눕는다”는 식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진다는 뉘앙스로 표현한다.   옛날에는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자들도 동성애는 흉하고 추악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은 인권 사각 지대에서 온갖 따돌림과 박해(?)를 받으며 살았다. 한 죄가 다른 종류의 죄를 약간 견제를 하는 일종의 이이제이 효과였다.   그러다가 이젠 시대가 확 바뀐 덕분에 그들은 당당히 길거리를 활보하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다른 사람들은(특히 진보 성향) 그런가 보다 하고 거기에 동조해서 끌려가고 있다. 왜 있잖은가? “난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같이 싸우겠습니다”라고 멋있는 말을 하는 대인배들이 성적 소수자들의 편을 적극 들어 주고 있다.   이럴 때 내가 늘 드는 비유가 있다.공병우 한글 세벌식 글자판은 한국에서 국가 표준 글자판으로 지정된 적이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벌식은 오늘날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에서 지원되고 있으며, 사용하는 데 아무 불편이나 지장이 없다.   그런 것처럼 오늘날 인권 국가에서는, 동성애자들도 아까 얘기가 나온 것처럼 남에게 티 안 내고 민폐만 안 끼치면 지금도 자기 방식대로 얼마든지 별다른 불편이나 지장이 없이 살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성애 내지 동성 결혼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건 단순히 평범하게 사는 수준을 넘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요구가 관철된다면, 그들은 성병에 걸려도 이제는 당해도 싼 게 아니라 의료보험 혜택을 적극 받으며 치료 받을 수 있다(내가 낸 세금으로!!).정상적인 남녀 결혼 부부와 동일하게 동성 부부도 자녀 양육과 관련된 여러 혜택을 동일하게 받는다.공무원 채용이나 성직자 초빙에서 동성애자는 아무 차별을 받지 않으며, 차별하는 조직을 상대로는 언제든 인권 침해 고소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공식 석상에서 성차별을 조장하는 어휘가 모두 사라진다. 가령, 남편과 아내가 배우자와 파트너로 바뀐다거나. 국어사전에 ‘결혼’이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가 바뀔 것이며, 성경도 당연히 동성애자가 보기에 위화감이 안 느껴지는 어휘로 모두 바뀐 에디션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본문 중에 동성애를 배척하는 구절은 다 삭제되거나 수위가 완화될 것이다. 굳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원인을 죄다 동성애자들에게 돌리고 싶지는 않다. 또한 정치적으로 선동을 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정말 인간적으로 우리 후세에게 저런 상상하기도 싫은 정신나간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동성애는 하나님이 매우 미워하시고 인간에게도 실제로 매우 해로운 죄악이다. 이것은 회개의 대상일 뿐 존중이나 치유의 대상이 아니다. 엉덩국 병맛 만화에 나오는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 존슨이 정말로 성 정체성을 깨달은 건지,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는 성경을 펴면 답이 곧장 나올 것이다.   그저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국에 너무 무관심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너무 미쳐 돌아간다고 스트레스 받고 피해의식에만 휩싸이지도 말자. 왜 마지막 시대에 이런 일이 만연하게 되는지 그 배후를 살펴보고 망조 드는 세상의 타락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일에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여해야겠다.   NOTES:   1. 본문에 인용된 그림들의 출처는 잘 알다시피 칙 전도지(Chick Tracts)이다.   2. gay라는 단어는 원래 좋은 뜻이다가 사회적 의미가 완전히 변질되어 버린 킹 제임스 성경의 대표적인 어휘 중 하나이다.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나오며(약 2:3), 원래는 명사도 아니고 유쾌, 화려, 명랑, 발랄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우리나라에서 ‘동무’가 완전히 못 쓸 말이 되어 버렸고 ‘야동 초등학교’가 학교 이름을 바꿔야 하게 생긴 것과 비슷한 맥락의 변화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5 12:22:3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5-24 00:48:22 | 김용묵
참으로 사람이 있는 그 어떤 곳에서든지 자유 의지란 건 여러 모양으로, 그러나 영향을 받는 일이 있지 않는 한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념을 일순간에 깨기란 참으로 수술대에서 메쓰에 째지는 고통 그 이상으로 아프게 느껴질 때가 많지요. 그래서 깨지기가 점차 쉽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12-05-22 00:19:08 | 소범준
이거, 저도 많이 배우게 되는 글이네요. 솔직히 형제님 주변 분들이 좋은 시선이건 나쁜 시선이건 상관없이 '철도교'를 바탕으로 - 근데 철도교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까지도 흘렀네요?^^; - 도전력을 길러주는 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이런 글 써주시는 게 나을 듯 싶네요^^;)
2012-05-20 20:56:28 | 소범준
난 철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지난 2004년 초, 새마을호 열차 객실과 Looking for you 음악이라는 두 조건이 동시에 만족되었을 때, 본인은 딱 왕하 3:15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철도 성령으로 거듭났다. 한국 철도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집합이 아니라 ‘나’라는 개인을 위한 육상 교통수단임을 실감하였으며, 철도를 나의 개인적인 정신 지주로 영접했다.   나는 철도 덕분에 그야말로 세상을 보는 안목과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철도가 나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주고 감성을 키웠는지, 게다가 심지어 애국심과 국토 사랑 정신까지 고취시켜 줬는지를 나는 언제라도 얼마든지 간증할 수 있다. Looking for you를 안 들어 봤기 때문에 새마을호 여행만도 못한 별 허접하고 수준 낮은 체험을 갖고서 천국 간증이네, 은사주의네 하면서 사람들이 속는다고 난 생각한다.   본인은 지난 수 년 동안 성경을 알고 영적으로 양육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던 것들이 교정되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것이 바로잡혔으며, 모나고 괴팍하던 성격도 예전에 ‘비해서는’ 굉장히 많이 부드러워졌다. 죄에 대한 감각이 더욱 민감해졌고, 지금 상황에 맞는 성경 구절이 더욱 빠르게 생각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철도 사랑은 변함없이,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철도는 예수님도 좋아하시거나 최소한 묵인· 용인하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철도교와 기독교는 모순이나 대립 관계가 아니다. 내가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지 않는 것만큼이나 세상 그 어느 것도 새마을호 안에 있는 철도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 머리 내부에 ‘연예, 오락, 스포츠, 유흥’ 분야는 오로지 철도가 100% 꽉 장악해 있어서 다른 영화, 드라마, 유행가, 스포츠 따위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이렇듯 이 글을 읽는 분들, 그리고 본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은 본인이 못 말리는 철도광이라는 것을 잘 안다. 왜냐하면 내가 맨날 철도 얘기를 떠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회사에서도 내가 철도 덕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내 개인 홈페이지의 방문객 중에서는 더 말이 필요 없다. 그리고 몇몇 지인들은 내게서 맨날 주워 들은 게 있어서 섬식 승강장, 복선, 경부선, 폐색 구간 같은 용어 정도는 구사하며, 심지어 Oh Glory Korail (한국 철도 공사 사가) 노래의 멜로디를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다같이 좀 생각해 보자. 그런 것처럼,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 자신으로 인해서 복음이나 예수님, 성경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올바른 쪽으로 바뀐 게 있는가?당장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받아서 교회 출석을 시작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교회 댕긴다는 인간들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저 사람은 예외적이고 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 쟤 앞에서는 기독교 욕 함부로 하기가 좀 껄끄럽다. 성경에 대해서 만에 하나 궁금한 게 있으면 앞으로 저 사람에게 물어 봐야겠다” 정도의 평판이라도 있는가?   우리가 믿는 복음은 언뜻 보기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낭설 같지만 정말로 살아 있고 권능이 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옛 성현들의 듣기 좋은 격언 같은 차원이 절대로 아니다. 복음은 제일 쉬운 구원의 길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절대로 “나만 구원받고 끝”으로 혼자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영원도, 구원도 없이 그저 세상적인 오덕질에 불과한 철도 복음만 해도 저 정도인데, 진짜 혼을 회심시키고 구원시키는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은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으면 못 배기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를 필사적으로 막고자 마귀는 지능안티들을 참 많이도 만들어 놨다. 정상적으로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상한 위선자, 개념 없는 광신자, 나약한 루저 이미지를 예수쟁이와 딱 연결시켜 놓았다. 그리고 영적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합리적이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육신적인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고작 저런 위선자· 광신자 부류와 같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수준 낮고 답답한 생각인가?   성경을 살펴보자. 출애굽기의 모세는 열 가지 재앙이 내려지던 시절에 파라오가 제안한 각종 절충안들(가긴 가되 애들은 놔두고 가라, 짐승을 일부는 남겨 놔라 등)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영적 교훈을 남겼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행위가 주변이나 후세에 끼칠 파급 효과를 최소화하려고 나름 잔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리오 왕 시절의 다니엘이 있다. 그때 내려진 칙령은 모든 관료들에게 일일이 청문회로 사상 검증을 실시해서 예수쟁이들을 색출해 내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그냥 한 달 동안은 혼자 골방에서 숨어서 기도를 몰래 해도 됐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참 고지식하게도 여전히 늘 하던 대로 공개적으로 “나 하나님 믿소” 티를 다 내면서 기도를 하다가 사자굴에까지 갔다 왔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자. (단 6:7,10)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예수님 얘기가 나오는 건 철도 덕후한테서 맨날 철도 얘기와 Looking for you 얘기가 나오는 것과 같다. 더 직설적인 비유를 동원하자면 똥에서 똥 냄새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방사성 물질로부터 방사능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과도 같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로, 똥 냄새가 안 나는 똥이 똥일 수가 있을까?   “남에게 티를 내거나 강요는 절대로 하지 말고 예수는 너 혼자만 조용히 믿어라”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건 온전한 신앙의 자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식으로 절뚝발이 형태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국가들 사이에도 전쟁을 하는데 룰이라는 게 존재한다. 군인과 민간인을 분명히 구분하여 민간인의 피해가 없게 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운 군인은 설령 포로로 잡히더라도 명목상으로나마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전에서 어떤 군사 집단이 범죄자나 테러리스트 조직이 아니라 교전권을 갖춘 정식 군대로 인정을 받으려면, 신원이 알려진 사령관에 의한 명확한 지휘 체계가 있어야 하고 모든 전투원이 통일된 고유한 복장을 갖춰서 피아 식별이 공개적으로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무기를 겉으로 공공연히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   이것은 영적 전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 쪽 진영의 사령관에 대해서야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원인 우리 역시 자신의 영적 소속과 정체성에 대해서 세상을 상대로 떳떳하고 정정당당하게 드러내고 노출시킬 생각을 해야지,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적진에 침투한 뒤에 주머니에서 수류탄이나 툭 던지고 도망치는 식으로 어줍잖게 싸워서는 공을 세우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러다가 나중에 적에게 잡혔다간 더욱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실수도 많이 한다. 복음을 전하는 열성이 너무 지나쳐서 너무 극성스럽게 굴 때도 있고, 낙담한 나머지 육신이 앞서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 때도 있다. 그래서 도리어 복음에 대한 간증을 잃게 만드는 행동을 종종 한다. 본인 역시 그 누구보다도 그런 사고를 많이 쳤다.   그런데 그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철도 복음이야 안 믿었다고 지옥 갈 일도 없고, 버스와 철도가 힘을 합쳐서 모로 가든 서울만 빠르고 안전하고 편하게 가면 된다고 가르치는 복음이니,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그냥 소꿉장난 수준밖에 안 된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복음 같은 엄청나고 극단적인 복음은 전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실수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다. 예수님도 그걸 뻔히 알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성도들에게 맡기셨다!   실수했으면 하나님께는 회개하고 사람에게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후 다시 본업으로 복귀하면 된다.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안 하면 그걸로 끝이다. 마치, 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성경을 아예 안 읽는 것이 잘못이듯, 미숙함을 핑계로 자신의 영적 소속을 드러내고 알리는 일을 언제까지나 주저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될 수 없다.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의를 철석같이 믿는 사람, 성경에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내 논리와 지식으로 완벽하게 설득하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오만이다. 언제 하나님께서 당신더러 그러라고 하셨던가?   잃어버려진 자들에게 그냥 내 인격을 걸고서 하나님의 의와 심판, 죄와 복음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알려 주기면 하면 된다. 단지 그 말이 정말로 듣는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사랑의 호소력을 불어 넣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봐도 예수님 영접은 어렸을 때 빨리 하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하다. 세상 연륜과 성경 교리와의 충돌의 폭이 그리 크지 않으며, 사고를 친 것도 크게 허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작은 시행착오를 몇 번 미리 겪고 거기에 적응과 면역이 되고 나면, 장성한 뒤부터는 탄탄대로이다. 평생 흥청망청 살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만 예수 믿으면 된다고? 큰일 날 소리이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 볼 게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여러 신앙의 선배들이 있고 특히 순교자들이 있다. 그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삶으로부터 도전을 받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들만 우리로서는 엄두도 못 낼 무슨 엄청난 초인적인 일을 해냈다는 식으로 괴리감을 두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결말로 빠질 수 있다. 그런 사고방식이 악화되면 천주교 성인 제도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약 5:17 같은 말씀을 생각하면서 영웅 콤플렉스를 교정해야 할 것이다.   하늘에 가면 우리도 초대 교회 시절이나 중세 암흑기 시절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놀라겠지만, 그 선조들 역시 말세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교리적 배도와 총체적 혼돈, 그리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 진리를 사수해 낸 성도들의 싸움 얘기를 들으면 아마 까무러칠 것이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상당수의 옛 믿음의 선배들은 진화론이 뭔지도 몰랐을 것이며, 영어 성경 역본이 200종이 넘어가고 이중 대부분은 변개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일례로 인간 횃불이 되고 사자에게 잡아 먹히며 순교한 옛날 사람들은, 말세엔 근본주의 크리스천들이 사형 제도 폐지를 반대하고 비판하게 될 거라고 꿈엔들 예상했을까?우리 같은 마지막 시대 라오디게아 팀은 사육신은 못 돼도 생육신은 충분히 된다. 어깨를 펴고 살도록 하자.   도산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다.“주변에 왜 인물이 없느냐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왜 당신이 그 인물이 될 생각을 안 하십니까?”   안창호 자신이 크리스천이기도 했고, 저건 성경적으로도 굉장히 통찰력이 있는 말이다. 지금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영적으로 더욱 어둡고 암울하고, 경제적으로도 더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게 된다. 환란 전 휴거라는 약속마저 없으면, 정말 꿈도 희망도 답도 없다. 재물이 없으면 시편 37편 같은 신앙밖에는 후세에 물려줄 게 없다.   정말 심각한 마음으로 구국의 일념으로 길거리에서 프리칭을 하고, 전도지를 나눠 주고, 성경과 신앙 서적을 출간하거나 출간을 후원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그저 잠자코 있기에는 너무 위급한 상황이다. 우리도 초대 교회 시절의 순교자처럼 살 수 있고, 살아야만 한다. 단지 그 삶을 실현하는 배경과 방법이 다를 뿐이고, 그 방법을 실천할 기회는 오늘날 시국이 말해 주듯 주변에 널려 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위기인 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기회”라는 사고방식으로 살면 나의 영적 본분을 잊지 않고 살 수 있고 삶을 사는 방식도 많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엄청난 권면을 함부로 늘어놓은 건 아닌가 싶어 글을 맺기가 부담스러우나, 그러나 본인 역시 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차츰차츰 내 삶을 하나님의 방식에 맞춰 보련다. 내가 그걸 지향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철도 오덕질 그렇게 하고도 안 짤리고 보직 유지하고 버티고 있는 게 틀림없다. ㅋㅋ[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1:5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5-19 22:45:01 | 김용묵
‘킹제임스성경’이 하나님께서 보존해주신 순수한 말씀이라고 확신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껏 믿어왔던 것들이 뒤집혀져있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삭제되고 변개된 -성경으로는 구원문제 및 신앙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 되기가 힘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구원문제는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복복복’ 하는 이유가 구원을 너무 쉽게 여겨서 그렇다하고는 그들과 무조건 반대가 되어야 구원받는다며 -마치 여당이 썩었으니 무조건 야당이 옳다는 식으로- 청교도를 뛰어넘어 행위구원을 가르치거나 구원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가 소위 '깨어있는 믿음'으로 인기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그럼 ‘구원을 잃어버리는 조건’과 ‘잃어버린 구원을 다시 찾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입증을 못한단 말이죠! 마귀는 말씀이 없는 것을 알고 다른 것들로 교회를 장악하고 채웁니다. 특히 세상이 흉흉한 이때에 환상과 계시, 꿈, 천국, 지옥 등 은사적인 요소가 결합하여 말씀은 더 멀어지고 그야말로 혼탁 그 자체입니다. 종말론에 관한 베스트셀러 서적들이나 마지막을 전하는 카페등을 보시면 전부 다, 믿음+행위 구원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것이 두려움이지 복된 소망이 아닙니다. 말세가 다가올수록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욕심대로 거짓선생들을 둔다 했듯이 (딤후4:3) 말입니다. 변개된 말씀 ,잘못된 교리를 지지하는 성경을 붙들고 있으니 순진한 양들이 거짓선생에 속고 또 속게 되는 것이 문제인데 , 저는 거짓선생들 중 일부도 ‘속이는 자’ 라기 보다 ‘속은 자’ 즉,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이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겠습니까? 저를 비롯해 여기의 많은 분들이 ‘킹제임스성경’을 통해 위와 같은 오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긍휼로 많은 사람들이 온전히 보존된 이 진리의 말씀을 붙들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시험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2012-05-15 00:22:37 | 이상걸
사람들은 물리학에서 배운 것과 비슷하게 관성이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특별한 계기나 자극이 없는 한 현재의 상태대로 계속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 참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을 따라 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2012-05-14 21:46:31 | 이진호
형제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한없이 모자른 저 역시도 형제님 글에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자문하지 않고 목회자나 신학자의 글을 있는 그대로 정론화하며, 의심없이 받아들임에 처음에는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뿐 입니다. 글도 배우기 전 귀로 듣고 배운 "돌다리도 두둘겨 보고 건너라" 라는 속담이 생각이 나는군요. 의문과 의심이 없이는 잘못된 것을 찾을 수도 그것을 고치는 일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2012-05-14 21:16:29 | 윤대원
  자유의지 많은 사람들이 오류와 착각 속에서 산다.특히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그렇다.바른성경을 알려줘도 믿음의 오류에 대해 알려줘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답변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뭐 이런 수준이다. -_-;그리고 그 오류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아니 나오려는 생각을 안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현재 믿고있는 믿음이 절대 옳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오류의 고정화 토착화 되어 바른것을 알려줘도 자신의 믿음을 합리화 하기에 바쁘지 진짜 한번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자신이 속해 있는곳이 자신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주장하는 프로그램이나 신학(?)이 내가 알고 있는것이 믿고 있는것이 잘못된 것이라 단 한번도 생각을 안한다. 예전에 사도신경에 기원과 진실을 알고 그사실에 대해 프린터를 해서 담당여전도사님께 물어보았더니   당사자도 갸우뚱? 하시더니 자신이 속한 신학대학교 교수님께 질문을 한 후 돌아온 답변이 "사도신경을 해서 뭐가 문제가 되냐"는 답변을 들은 후   난 정말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구나 라고 생각을 했고   그 후엔 내 신앙양심에 따라 예배시간에 절대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았다.   지금은 바른교회를 다니고 있고 그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다..     믿음의 기준은 성경말씀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한번 진짜로 그런가 아닌가 연구하고 생각해봐야 되는 것이 상식 아닌가?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가장많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과 개역개정 성경이 잘못된사본과 번역의 오류로 13군데의 말씀의 삭제와 전체 내용의 7%정도의 변개 첨삭이 있는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그래서 킹제임스성경이 바른성경이라고 "없음" 이 없는 성경이 있다고 알려줘도 시큰둥이다. 반응이 거의 없다.아는 형님(현재 목회중)께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을 후원회 행사를 통해선물을 드렸더니 "없음"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고 답변을 해왔다.상식적으로 절은 있는데 내용이 없으면 "아 원래 절은 있는데 내용이 삭제 된것이구나" 라고 생각해야 하는것이 정상아닌가? 왜 개역성경이 개역개정으로 바뀌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오늘날 한국교회들이 정말 바르게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교과서가 잘못되어 있는데 그 잘못된 교과서로 말씀을 잘못 공부해서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어 진짜를 알려줘도 거짓을 진리로 철두철미하게 고집하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모든것이 자유의지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것도   잘못된 믿음을 갖는것도   잘못된 교리나 사람을 추종하는 것도   잘못된 성경을 바른 성경이라 고집하는것도 다 자유의지다.   당신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 절대 동의하지는 않지만 ........종교, 그 어둠의도시 란 글을 강력하게 추천한다.http://new.keepbible.com/Pds1-5/View/3nI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1: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5-14 19:09:32 | 송재근
요한계시록 13장 3절, 12절, 14절을 읽으면서......   먼저 이 글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이 글에는 전제 조건이 먼저 있습니다. 전제조건에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은 무의미한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제조건 들입니다. 전제 조건이지만 저에게는 100% 당연한 진리, 참인 조건들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1611년 영어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습니다. 2 번은 1번으로부터 당연히 도출되었습니다. 3. 킹제임스 성경은 진리입니다. 이것도 1번으로부터 당연히 도출됩니다. 4. 킹제임스 성경은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어떤 사건에 대하여 말하려고 할 때에는 과장, 미화, 숨김, 속임수 등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합니다. 이것도 1번으로부터 당연히 도출됩니다. 5. 큰 용, 옛 뱀, 마귀, 사탄, 온 세상을 속이자는 사건에 대하여 속임수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속성이 속이는 자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9를 보시면 사탄의 속성을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한계시록 13:3, 12, 14절을 묵상할 때에는 4, 5번에 주안점을 두면서 묵상하였습니다.   제가 출퇴근을 할 때에는 차에서 mp3로 킹제임스 성경을 듣습니다. 2주전부터 반복해서 요한계시록을 듣고 있던 중에 갑자기 13장 3절에 생각이 멈추면서 -또 내가 보니 그의 머리들 중의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는데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매 온 세상이 놀라며 그 짐승을 따르더라- 아니! 치명적인 상처가 어떤 치명적인 상처길 레 상처가 나았다고 온 세상이 놀라 짐승을 따를까라는 의문이 든 겁니다.   12절에는 치명적인 상처가 나은 자에게 경배하게 하고, 14절에는 상처가 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다고 하고,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한 짐승이 일어나는데, 그 짐승의 머리들 중의 하나가 어느 부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칼로 인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는데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았고 온 세상이 그에게 경배하게 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전제 조건 4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고 ...... 성경기록에는 많은 사건들이 사실대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성경에 어떻게 저런 사건까지 기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쁜 일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이든 현재의 일이든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의 일이든 성경에 기록된 것들은 전부 사실입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칼로 인한 치명상이지만 죽지는 않았다고..... 죽게 된 것 같았는데, 즉 죽지는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사건은 온 세상의 주목을 받는 정점에 이른 대단한 사건으로 생각이 듭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온 세상이 놀라게 되어 치명적인 상처가 난 짐승에게 권력이 집중이 되니까요 (13장 7절 참조) 즉 온 세상의 권력이 이 짐승에게 집중되게 되는 사건이 칼로 인하여 상처를 입어 나았기에 권력이 집중이 됩니다.   여기에서 또 한번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경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칼로 상처가 나서 나았다고 온 세상이 상처가 나은 짐승을 경배하고 그에게 권력을 집중하여 준다.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칼로 상처가 나서 나았다고 온 세상이 경배하고 온 세상의 권력을 그짐승에 준다.   그래서 생각을 더 해 봅니다.   5번을 생각해 봅니다. 온 세상을 속이는 자가 사탄인데 이 사건에는 온 세상을 속이려는 사탄의 속임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칼로 상처를 입었다는 부분인데요. 이것은 이 짐승이 온 세상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아주 유명한데 테러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칼로 테러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칼로 테러, 암살을 시도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가능이나 할까요. 경호원들이 있는데, 유명한 누구는 투명한 방탄유리로 사방을 방호한 차에 타고 다닙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경호원과 또한 경찰들이 즐비하게 여러 겹으로 경호를 합니다. 그런데 이 경호 망을 뚫고서 칼로 치명적인 상처를 낸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요? 가능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 짜고서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시면서…….이 사건은 이 짐승을  전 세계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한 무대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칼로 상처를 입었다가 나은 짐승을 위한 자작극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거리에서 칼로 해야 더욱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겠지요. 온 세상의 미디어가 짐승을 주목하는 상태에서 칼로 난도질을 당하고 그리고 상처의 치명상의 정확도를 높이고요. 총으로는 움직이는 사람에 대하여 잘못하면 치명상이 아닌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왜 바다에서 일어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의 머리들 중의 하나가 칼로 인한 치명상을 입게 되느냐 인데요.   여기에 속이는자 사탄의 속임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창조물은 스스로가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이 죽음, 사망을 이기실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스스로 죽음을 이기신 분은 단 한분이신데요. 앞으로도 스스로 죽음을 이기는 창조물은 없습니다. 오직 죽임을 이기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께 경배 드립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휴거 또는 첫째 부활을 할 것입니다. 아멘.   사탄, 온 세상을 속이는 자는 절대로 죽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죽음을 이겼다고 쇼를 하는 거죠. 실상은 죽지는 않고 거의 죽게 된 것 같기만 한 것인데. 사탄은 칼로 치명상을 입은 짐승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온 세상을 속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탄의 속성이기 때문이니까요. 단지 상처가 나은 짐승을 온 세상이 경배할 리가 없습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의 부활을 모방한 사탄의 사기극입니다. 성경은 단지 칼로 인하여 죽지는 않았고 죽게 된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속임수를 사용하여 칼로 상처를 입어서 죽었고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부활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놀라고 그 짐승에게 경배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지만 할 수도 없는 것을 속임수를 사용하여 온 세상을 속이려고 할 것입니다.   이 몸이 이러한 속임수를 보기 전에 휴거 되거나, 첫째 부활하여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 풀은 마르고 그것의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된 말씀이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23절 후반부터 -25절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5:3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5-11 15:44:59 | 길준남
어버이날 아니 어머니의 날을 찾아보면 신약이 열리는 시대까지 건너가야 할겁니다. 그 당시에는 2월의 둘째주였는데, 지금은 노르웨이를 제외하곤 많은 나라들이 5월의 둘째주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날은 옛날부터 있었던건 아니고 1900년대가 넘어가고 나서 생겼다네요. 날짜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미국,영국 기준으로 6월의 셋째주 일요일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2-05-10 07:22:58 | 박범준
(뭐니뭐니 해도 항상 철도로 끝나시는 우리 김용묵 형제님 덕분에 한참 웃었지만..(^^;)) 너무나 우리를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뼈 빠지게 고생하신 부모님의 은혜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껴 봅니다. 또한 부모님의 그런 고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우리는 없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음 번에는 어버이날에 꼭 부모님께 감사를 전하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2012-05-10 00:06:18 | 소범준
저는 40대 초반 가장입니다. 그래서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불효자로서 부모님을 생각하면 늘 눈물이 나며, 가장으로서 저를 의지하는 가족들을 보면 책임감을 느낍니다. 쏜 살같은 시간속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일은 달라져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형제님!
2012-05-08 09:39:43 | 양희석
1. 어버이날과 부모님에 대해서   내가 분류해 보니,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각종 특별한 명절, 기념일 등의 명칭은 크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갈래로 나뉜다.   - ‘절’로 끝나는 한자어: 제헌절,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성탄절 - ‘일’로 끝나는 한자어: 석가탄신일, 식목일, 현충일 - 완전히 독립적인 한자어: 추석, 단오 - ‘날’로 끝나는 고유어: 한글날, 어버이날, 어린이날, 설날 - ‘-의 날’로 끝나는 고유어: 철도의 날, 스승의 날   이런 조어 원리는 그다지 규칙성이 없고 전적으로 그냥 어감을 고려한 case by case인 걸로 보인다.똑같이 종교 공휴일일 뿐인데 성탄절과 석가탄신일의 조어 원리가 서로 다른 이유라든가, 어린이날이 ‘아동의 날’이 되지 않고 굳이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딱 떨어지는 규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자, 5월 5일 어린이날 다음으로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다. 어린이날이야 아동 문학가 소파 방정환이 제정한 굉장히 한국적인 근거를 지닌 날인 반면, 어버이날은 명목상의 근거는 미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외국엔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이 따로 있는 곳도 많고, 또 한국의 어버이날이 어린이날보다 나중인 것이 윤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은 철없는 막장 부모도 많아서 참 문제이긴 하다만, 그래도 ‘일반적인’ 경우로 볼 때, 인생의 참으로 막대한 부분을 희생하여 우리를 이 정도까지 키운 부모님의 은혜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성경도 예외가 아님. 십계명에서 종교적인 규범에 속하는 1~4를 제끼고 곧바로 등장하는 인륜 규범 1타는 “부모를 공경하라(honour)”이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 명령에 무조건 ‘까라면 까’라는 식의 발상이라기보다는, 그보다도 일단 자기 부모를 사랑하고 기쁘게 하고 남들 보는 데서 부모님 품위를 존중하고 명예를 높여 주라는 뜻이다.   부모의 사상과 가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녀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대체로 부모가 너님들 먹여 살릴 여건을 만들고 체통 세우느라 사고방식이 최대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방향만을 추구하게 돼서 그런 거다. 부모 세대라고 해서 쿨하고 개방적인 걸 몰라서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산 게 절대 아니다. 그러니 동의는 못 하더라도 부모님 마음을 이해는 할 필요가 있다.   제아무리 가난하고 못 배운 부모라 해도, 너님을 낳아서 키울 필요가 없었다면 그 연세에 이르기까지 신세 못 펴고 그 모양 그 꼴로 살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정말이다.   물론, 부모가 예수 믿지 말고 네 신앙을 부인하라고 한다거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교리 노선을 추구하는 교회에 강제로 다니라고 한다면 그런 데에까지 맹목적으로 순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품위와 명예를 존중해 주면서 불순종할 수는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지는 먼저 구원받고 먼저 바른 신앙을 물려받은 자녀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방법을 생각해야 할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소한의 윤리와 기강을 갖춘 문명 사회에서는 효도를 강조하고 패륜은 엄벌로 다스렸다. 구약 율법은 부모를 저주하거나 때리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심지어 신명기에는 고집 세고 식탐이 심하고 부모의 교정만으로 씨가 안 먹히는 싹수 노란 자식은 아예 마을 차원에서 린치를 가해서 죽여 버리라는 섬뜩한 추가 지시까지 있다(신 21:18-21). 하나님은 그 정도로 패륜을 싫어하신다. 특히 “젠장, 내가 어쩌다가 이런 집/곳에서 태어나게 됐어” 부류의 패드립 말이다(사 29:16, 45:9).   이 명령이 특히 무시무시한 이유는, 부모의 말이 사실인지 이웃 주민이나 자식 당사자로부터 최후 변론을 듣는 절차도 전혀 없이 완전 비민주 인민재판 즉결처분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도 행위가 발견되었을 때는 ‘부지런히’ 진상 파악부터 하라고 돼 하지만(신 13:12-16, 17:2-7) 저건 그렇지 않다. 사실, 자식 새끼를 제발 좀 어찌해 달라고 친부모가 제 발로 찾아올 정도면 자식이 얼마나 막장인지 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을 터이다. 이 명령이 실제로 얼마나 시행되었는지는 모르겠다.   2. 가정과 성에 대해서   5월이고 하니 가정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다시 해 보게 된다.   성경에서 창세기 1~2장은 전반적으로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천지 창조에 대한 과정을 묘사하는 내용인데, 끝부분에 유일하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아예 독자에게 코멘트를 남긴 구절이 있다. 바로 창 2:24로, 그게 그 이름도 유명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라는 결혼 제도 구절이다. 기독교식 결혼식의 목사 주례에서 단골로 듣는 구절이다.   오늘날 이 정도라도 사회가 유지되고 돌아간 데엔 가정의 공이 절대적이었을 것이고, 특히 여성의 희생과 헌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옛날에 지금 같은 여성 인권 단체가 있었고 사람들이 좀 힘들다고 덥석 집 나가고 이혼을 해 버렸다면, 파탄 나는 집안과 인생 망치고 자살이나 범죄로 빠지는 애들이 넘쳐나게 됐을 것이다.   옛날에 가혹한 여성 인권 유린이라 불릴 정도로 엄한 성 억압(?) 관습이 왜 있었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다. (민망하니, 구체적인 예를 거론하진 않겠다) 마치 고문처럼 그것도 물론 나쁜 관습이고 부조리이다. 언제까지나 여성만 일방적으로 당하고 살 수는 없는 것 역시 본인은 안다. 단지 옛날에 죄의 결과 때문에 그런 게 왜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는 뜻이다.   성이라는 건 정말로 생판 모르던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유지시키는 근간으로만 ‘은밀하게’ 쓰여야 하는 선물이요 비밀 병기이다. 부부 사생활은 하나님도 전혀 간섭 안 하고, 서로 같이 뭘 하며 즐기든 존중해 주는 절대적인 영역이다(히 13:4. honour과 동일한 어근인 honourable).   그러나 반대로 성이라는 게 다른 용도로 오· 남용되는 것을 하나님은 구역질을 할 정도로 가증스럽게 여기며 미워하고 정죄한다. 결혼한 부부가 사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성 교육이나 상담을 받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미혼 청소년이나 청년에겐 피임법을 가르칠 게 아니라 잠언 6장이나 딤후 2:22를 숙지시켜야 한다. 이걸 몰라서 인생 망친 안타까운 예가 허다하다. 옛날에 서부희 씨도 그랬고.   도대체 성을 왜 남의 것하고 비교를 하는가? 그게 공공연한 개방과 비교의 대상이 되고 금전 거래의 대상이 되고 개나 소나 다른 용도로 문란하게 쓰이기 시작하면, 그때야말로 진짜로 옛날에 어떤 아저씨의 절규처럼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헬게이트가 시작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위의 화면은 2003년 12월 23일자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 장면이다.사업 실패로 인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던 어느 40대 남성이 아내를 칼로 찌르고 10층 베란다에 매달려 자살 소동을 벌였다. 집 윗층에서 어느 기자는 마이크를 아래로 들이대고 당사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그때 횡설수설하던 중에 저런 희대의 명대사가 나온 덕분에 인터넷 상으로 무수한 인용과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옷이 찢어지면서 진짜로 떨어졌지만, 구조 대원이 매트를 밑에 이미 깔아 둬서 별다른 부상 없이 생존했다.비슷한 시기에 개독안티들에게 복음이 무수히 비방당할 빌미를 제공한(삼하 12:14) '에어장' 목사의 추락 장면이라고 소개된 사진은 사실은 저 아저씨가 떨어지는 장면이다.   3. 출산과 자녀 교육에 대해서   성경의 사고방식은 결혼과 출산에 아주 옹호적이다. 성경에는 “다산하고 번성하라”라는 명령만 있을 뿐 맬서스 같은 사고방식은 결코 찾을 수 없다. 소위 가족 계획이란 건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도 간섭 안 하는 영역을 공권력이 나서서 자기 편한 대로 제어하겠다고 하는 굉장히 무모한 생각이다.   흔히 중국 하면 자녀를 한 명씩밖에 못 낳는 나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과거에 마오 쩌둥은 한때 굉장한 산아 장려책을 폈으며 20세기 중반에만 해도 6억 남짓이던 중국 인구를 10억이 넘게 불려 놓았다. 중국이 처음부터 지금만치 인구가 많은 게 아니었다는 게 충격적이다.   마 주석은 쪽수가 국력이라고 여겼으며 어느 문헌에 따르면, “아이는 전투기에서 투하하는 폭탄과 같다”고 교시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라? 무신론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답지 않게 저 말의 표현 자체는 묘하게 성경적이다. (시 127:3-5) 무기에다 비유한 게 일치한다. 비록 그러다 얼마 못 가서 중국은 다시 산아 제한으로 돌아섰지만 말이다.   단, 성경이 말하는 다자녀 예찬은 자녀들을 성경대로 잘 양육했을 때에나 가능한 시나리오이다. 안 그러면 뼈 빠지게 자식 키워 봤자 미래에 부모는 휴거되는데 자녀는 못 되고 땅에 남아서 오히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온갖 재앙을 당하거나,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군대에 징집되어 계 19:18-21의 악역에 동참하는 비참한 신세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종말이 지금으로부터 가까운 시간에 발생한다면 말이다.   성경은 자녀 양육에 대해 절대적으로 각 가정의 부모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있다. 그리고 체벌에도 아주 옹호적이다. 잠언에 애들 때리면서 키우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른다. 나도 부모님에게 맞으면서 컸지만, 그거 정말 공감한다. 안 그랬으면 내가 죄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실감을 못 했을 것이다.   사랑의 체벌은 가정 폭력 및 아동 학대하고는 가히 종이 한 장 차이인 걸지도 모르겠다. 이게 인생에서 정말 미묘한 점이고, 어찌 보면 세상이 참으로 공평한 면모이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 없이 돈만 쏟아 붓는다고 절대로 저절로 바르게 크지는 않으니 말이다. 내 말이 안 믿어지면, 한번 실제로 저렇게 해 봐라.   부모가 세상적으로 잘났기 때문에 애를 때리고 자녀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게 아니다. 비록 부모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안 하면 애가 정말로 바르게 클 수가 없으며 자녀에게 그 정도까지의 악역을 눈물을 머금고라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나, 오늘날 사회는 부모의 권위가 실종되고, 애들을 부모로부터 점점 떼어 놓으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매우 큰 심각한 문제이다. 아이들에게 바른 크리스천 신앙을 전수해 줄 수 있는 건 올바른 가정 교육밖에 없는데 요즘은 이런 현상까지 있는 듯하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om&write_id=1715#c_1744  대부분의 가정에서 지원을 안 받으면 손해라고 여기고 한창 부모와 상호작용할 나이의 어린 아이들을 어린이집, 유치원 등 교육기관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http://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1&wr_id=4546  능력 있는 국민들까지 공짜로 내모는 정부 때문에 엄마 정신이 병들고 애기도 파괴됩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이런..결혼은커녕 여친 사귄 적도 전혀 없는 주제에 나 벌써부터 너무 애늙은이 같은 글을 써 버렸다. =_= 하지만 이 글은 어버이날 기념 특집이니 양해 바란다.마지막으로 애늙은이 같지 않은 젊음과 패기가 느껴지는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 글을 맺겠다. 바로...   4. 철도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계시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모님의 은혜와 관련하여 가장 감화를 받았던 때는 2007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 병특 복무 중이었고, 그러고 보니 훈련소에 들어가기 얼마 전이었다.   대전에 볼일이 있어서 경부선 새마을호 특실을 탔다. 그때 본인은 새마을호 특실의 음악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의 샘플을 채널별로 15분씩 녹음해 놓으려고 컴퓨터와 양방향 잭을 챙긴 상태였다. 특실에는 마치 비행기 객실처럼 다음과 같은 6개의 채널이 있다. (지금은 없어졌음)   (1) 자연의 소리 (이지리스닝 instrumental) (2) 한국 가요 (3) 가곡 (4) 재즈 (5) 클래식 (6) 객실에서 방영되는 TV 방송    일반실은 이어폰을 꽂으면 6번만 들을 수 있다.   철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저 으리으리한 좌석을 보라!“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새마을호의 날이로다.”“KTX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새마을호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는 아니하니라.”새마을호는 몇 년 뒤면 퇴역하여 더 볼 수 없게 된다. 지금 많이 타 두시기 바란다.   그랬는데 1번과 2번 채널 다음으로 3번 가곡 채널을 듣고 있으니 얼마 후 <어머니의 마음>이 흘러나왔다. 양주동 박사가 작사한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그 곡 말이다.   그 곡은 가사가 잘 알다시피 정말 애절하고 감동적으로 지어져 있다. 국문학 박사가 쓴 가사답게 예스러운 표현도 제법 들어가서 품위 있어 보인다. 100을 의미하는 ‘온’, 그리고 일부러 음운을 탈락시킨 ‘따(땅) 위에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그지없다’ 등. 3절 가사를 보시라. 눈물 없이는 못 듣는다.     사람의 마음 속에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요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3절이 흘러나올 때, 철도 성령님으로부터 계시가 내려왔다. 아아, 어머니께서 나를 낳아서 키워 주신 덕분에 내가 지금 이런 지상천국 열차를 타면서 한없는 행복에 젖을 수 있구나!   그 깨달음으로 인해 행복과 감격과 감사와 감동이 교차하면서 콧등이 찡해졌고, 나는 옆자리 승객이 보건 말건 엉엉 흐느껴 울음을 터뜨렸다. 남들은 군대에 가서 유격 훈련 때 PT 체조 8번을 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이 <스승의 은혜>로 바뀌는 체험을 한다지만 나는 그걸 열차 안에서 체험했다.   세상에 지구상의 어느 교통수단에서 이런 체험을 할 수 있었겠는가?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는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알면 퇴치되지만, 사실 철도만으로도 충분히 퇴치 가능하다. 정말 이 정도 간증이 있으니 철도'교'라는 말까지 쓰는 것이다. 난 말을 장난으로 하지 않는다.   철도가 나의 삶을 얼마나 엄청나게 변화시켰고 음침하고 어둡던 나의 가치관을 건전하게 바꿨으며, 심지어 신앙에도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이 자리에서 다 간증하기에는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다. 이 땅에 성경과 복음과 더불어 이런 철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드릴 뿐이며, 우리나라에 철도 덕후들이 많이 많이 배출되면 좋겠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53:1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5-08 05:24:29 | 김용묵
예수님께서 낙원과 함께 통째로 데리고 올라간 구약 성도들은 아직 부활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들의 처소 위치가 옮겨졌을 뿐입니다. 그들의 몸은 여전히 땅에 묻혀 있습니다. 이들의 몸은 7년 환난기 끝에 부활합니다.
2012-05-07 09:28:5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