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1장 18절 등 아멘 20여 회 삭제
성경에서 "아멘"은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의미로, 기도나 찬양의 끝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동의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 특히 개역성경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이 "아멘"이 여러 구절에서 삭제되거나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멘의 삭제 사례
1. 요한계시록 1장 18절
흠정역: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
개역성경: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NIV: "I am the Living One; I was dead, and now look, I am alive for ever and ever! And I hold the keys of death and Hades."
여기서 "아멘"이 삭제되어,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 약화되었습니다.
2. 요한일서 5장 21절
흠정역: "어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하라. 아멘."
개역성경: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NIV: "Dear children, keep yourselves from idols."
여기서도 "아멘"이 생략되어, 권면의 마무리에서 신앙적 확신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멘의 전체 사용 현황
성경 전체에서 "아멘"은 약 78회 등장합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 중 20회 이상을 생략하여 약 50여 회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NIV와 같은 현대 역본들도 유사한 경향을 보이며, 이는 성경의 원래 메시지와 독자의 신앙적 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결론
"아멘"은 단순한 종결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확신과 동의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성경 번역에서 "아멘"의 생략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정확하고 충실한 번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25-05-07 11:15:16 | 관리자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이 ‘없음’?
– 출애굽기 32:11의 누락된 하나님의 영광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4:35, 흠정역)
그러나 현대 성경들에는 ‘없음’이라는 단어로 대체된 구절이 여러 곳에 존재하며, 구약에서도 중요한 표현이 번역에서 누락된 사례가 반복된다. 출애굽기 32장 11절이 대표적인 예다.
출애굽기 32:11 비교
흠정역 (KJV 기반):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신 주의 백성…”
개역성경:
“…여호와여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개역성경은 이 구절에서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라는 핵심 표현을 누락시켰다. 그 결과,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1. 주체가 불분명해진다
흠정역은 “주께서”라고 분명히 언급함으로써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개역은 그 주어를 생략하여, 누가 이스라엘을 인도해 냈는지 문맥상 흐릿하게 만든다. 문장에서 주체가 빠지면 메시지의 명확성이 사라진다.
2.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가려진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루어진 역사다. 이 표현은 단지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증언하는 핵심 구절로 여러 차례 반복된다.
구체적 증언 예시:
“주의 큰 권능으로 친히…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시며” (신 4:37)
“주의 강한 손으로… 너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나니” (출 13:9)
“주의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와 표적들과 이적들로…” (신 26:8)
“주의 크신 위엄으로 구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신 9:26)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행위와 그 능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따라서 그것을 번역에서 누락하거나 삭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번역 실수”인가, “의도적 삭제”인가?
이 구절에 대해 변호하려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역상의 실수다.”
“고대 어떤 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NIV, NASB,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심지어 개역개정에서도 이 구절은 **‘큰 권능과 강한 손’**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 오직 개역성경에만 해당 표현이 누락되어 있다.
개역개정조차 그 오류를 인정하고 고쳤다.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출 32:11, 개역개정)
이는 개역성경이 원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한 번역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은 삭제되어서는 안 된다
‘개역’이란 말은 ‘고친 번역’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손대어 고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개입 없이도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신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에는 하나님의 큰 권능과 강한 손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단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주의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신…” (출애굽기 32:11, 흠정역)
이것이 ‘없음’이 없는 성경,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 바른 성경,
그리고 그분의 권능을 온전히 증언하는 성경이다.
2025-05-07 11:01:38 | 관리자
‘고아’인가, ‘아버지 없는 아이’인가?
– 하나님의 긍휼을 좁혀 버린 번역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하시며, 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 특별히 과부나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은 구약 성경 곳곳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너희는 과부나 아버지 없는 아이를 괴롭히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2:22, 흠정역)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고아’라는 말은 익숙하고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문제는 그 뜻의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는 데 있다. 국어사전은 고아를 “부모 모두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아버지를 잃은 아이는 고아로 보지 않는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하심으로써, 아버지 한 사람만 없어도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로 인정하신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하나님의 긍휼은 세상의 기준보다 더 넓고, 더 세밀하며, 더 따뜻하다.
흠정역은 그 긍휼의 범위를 그대로 살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도 하나님의 보호 대상임을 증언한다. 그러나 개역성경을 비롯한 NIV, NASB,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등은 ‘고아’라는 단어로 제한함으로써 그 따뜻한 긍휼의 손길을 좁혀 놓고 말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단 한 구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 전체에는 “아버지 없는 자”라는 표현이 50군데 넘게 나오는데, 대부분의 현대역본들은 이를 똑같이 ‘고아’로 번역하고 있다. 그 결과,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아이들이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의 대상이 아님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바로 사본의 문제 때문이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로마 카톨릭의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소수 사본 계열을 따르며 번역되었다. 이 사본들은 본문을 축소하거나 표현을 단순화시켜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왜곡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다수 사본(Majority Text), 즉 초대 교회와 전통 교회들이 수 세기 동안 사용해 온 공인본문을 기반으로 번역되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으며, 아버지만 없는 아이조차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배려의 대상임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고아’와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표현의 차이에서조차 하나님의 성품과 긍휼의 깊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기준을 좁히시는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더 많은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주는 고통받는 자의 힘이시며,
고아들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니이다.”
(시편 68:5, 흠정역)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분의 긍휼을 온전히 증언하는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긍휼의 폭을 좁히는 성경이 아니라,
그 긍휼을 세밀하게 밝혀주는 바른 성경이다.
2025-05-07 10:54:48 | 관리자
여인들을 무시하는 번역들
– 개역성경과 현대역본이 훼손한 성경의 질서와 공정성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동등한 존엄과 책임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분명히 선언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흠정역)
하나님은 남녀를 다르게 만드셨지만, 그들 사이에 구속의 차별이나 인격적 열등함은 두지 않으셨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NIV, NASB, ESV 등)**은
성경이 의도한 남녀의 균형과 책임의 공정성을 자주 왜곡하거나 편향되게 번역하고 있다.
이 문제 역시 단순한 문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문 사본의 차이, 곧 어떤 사본을 따랐느냐에 따라 복음의 구조와 성경의 질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5:16 – 과부 돌봄의 책임은 여인에게만?
● 개역성경: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이 번역은 마치 과부 친척을 돌보는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는 것처럼 읽힌다.
남성은 마치 면책된 것처럼 되어, 책임의 균형이 무너진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만일 믿는 어떤 남자나 여자에게 과부들이 있거든 그들이 저들을 구제하게 하고…”
흠정역은 원문대로 남성과 여성 모두가 가족 내에서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고 정확히 밝히고 있다.
성경은 여성에게만 돌봄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명확히 선언한 것이다.
야고보서 4:4 – 영적 간음은 남녀 모두의 책임이다
● 개역성경: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개역성경은 여자만을 지목하여 마치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두 마음을 품은 자는 여성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간음’은 육체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간음,
곧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좇는 모든 성도에 대한 경고이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영적 타락은 남녀 모두의 책임이다.
흠정역은 이 점을 정확하게 드러내며, 하나님의 책망이 공정하고 보편적임을 보여 준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 사본 문제의 본질
이러한 번역의 차이는 단순한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헬라어 사본을 기준으로 삼았느냐의 문제이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현대역본은
→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같은 소수 사본 계열을 따르며,
→ 종종 특정 단어의 생략, 문장 축소, 편향된 강조가 들어간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 다수 사본(Majority Text), 즉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사용되고 검증된 공인본문을 따르며,
→ 원문에 충실하고 공정한 진술을 보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하나님께서 남녀 모두에게 요구하신 공정한 책임과 경고를
여성에게만 무겁게 전가하거나, 남성의 책임을 흐리는 방식으로 번역해 왔다.
결론: 성경은 여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성경 번역은 여인을 왜곡되게 취급해 왔다.
디모데전서 5:16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가족 돌봄의 책임을 부여한다.
야고보서 4:4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벗된 모든 자들—남자와 여자—에게 회개를 요구한다.
흠정역은 이러한 진리를 왜곡 없이 정확히 번역하고 보존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갈라디아서 3:28, 흠정역
하나님은 남자도 여자도 긍휼로 구원하시며,
동등한 책임과 책망, 그리고 동일한 은혜의 길로 부르신다.
이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바른 사본, 바른 성경, 바른 복음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증언할 수 있다.
2025-05-07 10:49:14 | 관리자
하나님의 진노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 복음의 경고를 흐린 개역성경과 현대역본의 사본 문제
하나님의 긍휼은 회개한 자에게 임하지만,
그분의 진노는 불순종하는 자들, 곧 죄 가운데 고집하는 자들에게 임한다.
그런데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NIV, NASB, ESV 등)은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임하는지 불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복음의 경고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 문제 역시 사본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킹제임스 성경(흠정역)**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보존하고 있다.
골로새서 3:5–6 – 진노의 대상이 명확한가?
● 개역성경: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진노가 임한다고는 하지만, 누구에게 임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본문을 읽는 이는, 마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동일하게 임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이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닥치느니라.” (골 3:6)
이 표현은 정확하다.
불순종하는 자들, 즉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죄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에베소서 5:6 – 동일한 진리를 반복하는 구조적 짝
“아무도 헛된 말들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닥치나니.” (엡 5:6, 흠정역)
이 구절은 골로새서 3:6과 내용적으로 짝을 이룬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무에게나 임하지 않는다.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 곧 긍휼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만 임한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 구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진노의 대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남겨두어 복음의 경고력을 약화시킨다.
히브리서 3:16 – 진노를 불공정하게 적용한 개역성경
● 개역성경: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이 구절은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마치 이집트를 나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격노하게 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그러지 않았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이는 어떤 자들이 듣고 격노하게 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모세로 말미암아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자가 그리하지는 아니하였느니라.” (히 3:16)
정확하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지 않았고,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다.
이 진실은 민수기 14:29–32에서 명확히 증명된다.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너희가 노력하지 않고 어린아이 같다고 업신여긴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개역성경은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명백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모든 차이는 왜 생기는가? – 사본 문제의 본질
이 문제는 단지 번역 스타일이나 표현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 뿌리는 사본에 있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현대역본들은
→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소수 사본 계열을 따른다.
→ 이 사본들은 말씀의 절단, 진리의 축소, 긍휼의 오용, 진노의 모호화를 반복한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 **다수 사본(Majority Text, 공인본문)**을 따르며,
→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일관되게 보존하고 있다.
하나님은 긍휼과 진노 모두를 완전하게 드러내시는 분이시며,
거룩한 분노는 오직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밝히셨다.
그러나 소수사본은 이를 흐리게 만들어,
모두가 긍휼을 받는다는 인본주의적 복음으로 바꾸고 있다.
결론: 하나님의 진노는 선택적이다. 긍휼 역시 회개 위에 임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임한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은 이 진리를 흐리고, 경고를 약화시키며,
복음을 인간 중심의 긍휼만으로 변형시킨다.
킹제임스 성경은 긍휼과 진노를 동시에, 바르게 선포한다.
→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거룩한 공의와 심판도 함께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하느니라.”
– 골로새서 3:6, 흠정역
“그러나 모든 자가 그리한 것은 아니었느니라.”
– 히브리서 3:16, 흠정역
이제 우리는 사본이 곧 신학이며,
성경 번역이 복음의 모양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바른 사본, 바른 성경, 바른 진노, 바른 긍휼 —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복음이다.
2025-05-07 10:37:39 | 관리자
보편적 구원을 가르치는 성경들?
– 계시록 21:24과 사본의 차이가 만들어낸 심각한 왜곡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열려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조건에 따라 구원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가?
이 중요한 문제를 두고,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NIV, NASB, ESV 등)**은
무분별한 보편 구원(Universal Salvation)의 뉘앙스를 담은 번역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그 근본 원인은 어떤 사본을 따랐느냐의 문제에 있다.
계시록 21:24 – 새 예루살렘에 누가 들어가는가?
● 개역성경: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이 번역만 보면 모든 민족이, 모든 왕이 조건 없이 새 예루살렘의 도시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즉, 구원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그 도시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읽힌다.
이것이 바로 보편 구원(universal salvation),
곧 “누구나 결국은 구원받는다”는 이단 교리와 정확히 맞물리는 표현이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이렇게 말한다: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땅의 왕들이 자기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곳으로 들어가리라.” (계 21:24)
여기에는 분명히 전제 조건이 있다.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라는 말은,
누구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만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차이는 작은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복음 전체의 진리를 좌우하는 본질적인 차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 사본의 문제
이 차이는 단순한 번역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다.
어떤 헬라어 사본을 근거로 성경을 번역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메시지가 된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현대 역본들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소수사본 계열을 따른다.
이 사본들은 오랫동안 이단적 편집, 삭제와 축소, 사탄의 영향을 받아 온 것이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과 흠정역은
**다수사본 계열(Majority Text, 공인본문)**을 따른다.
이 본문은 수천 개의 사본들이 일관되게 동일한 진리를 증거하며,
교회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사용되어 온 본문이다.
즉, 어떤 본문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진짜 성경인가의 문제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복음의 순수성과 생명을 지키는 신앙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오류 있는 성경을 주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성경은 번역이 다를 뿐 핵심은 같아.”
하지만 계시록 21:24 같은 구절은 핵심 자체가 바뀌는 사례다.
개역성경 / 현대역본:
→ 누구든지 들어간다. 모든 민족이 조건 없이 도시로 들어간다.
킹제임스 성경:
→ 구원받은 민족들만이 도시로 들어간다.
→ 복음은 회개와 믿음을 통한 긍휼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마귀는 말씀을 살짝 바꿔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자이며,
그 전략은 오늘날 성경 번역의 왜곡을 통해 더욱 교묘하게 퍼지고 있다.
결론: 구원은 보편적이지 않다.
도시는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계시록 21:24은 복음을 분명히 선포한다.
→ 새 예루살렘의 도시는 구원받은 자들만 들어간다.
개역성경, NIV, NASB, ESV 등 현대역본들은
→ 이 진리를 삭제하거나 흐려서 보편적 구원 교리에 길을 열어 준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다수사본을 따라,
→ 구원의 조건을 정확하게 유지하며,
→ 긍휼로 구원받은 자들만이 그 도시로 들어감을 분명히 가르친다.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계 21:24, 흠정역)
우리는 진리의 말씀, 정확한 성경을 통해 바른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 복음은 ‘누구나’가 아니라, 회개하고 긍휼을 입은 자들만이 누리는 구원의 복음이다.
2025-05-07 10:34:14 | 관리자
복음의 핵심을 부인한 번역
– 예수님의 회개 메시지를 가린 성경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분은 왜 육신을 입고 오셨으며,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셨는가?
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대답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역성경,
그리고 NIV, NASB, ESV 등 현대 영어 역본들은
복음의 핵심을 삭제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마태복음 9:13 – 예수님은 단지 죄인을 부르셨는가?
● 개역성경 / NIV / NASB / ESV: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구절만 보면 예수님이 죄인을 초대하기 위해 오신 분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단지 죄인을 부른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3)
복음의 핵심은 **‘회개’**다.
회개 없는 초청은 아무 효과도 없다.
회개 없는 용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긍휼은 회개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런데 이 ‘회개’라는 단어를 개역성경뿐 아니라 현대 역본들도 모두 삭제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오심이 변화 없이 받아들여지는 초청 정도로 축소되었고,
회개 없는 긍휼, 회개 없는 구원, 회개 없는 복음이라는 잘못된 개념이 퍼지게 되었다.
누가복음 9:55–56 – 예수님은 생명을 구원하러 오셨다
제자들이 사마리아 마을을 불로 멸하자고 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며 그분의 사명을 명확히 말씀하신다.
● 킹제임스 성경(흠정역):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예수님은 심판을 집행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긍휼을 베풀어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다.
하지만 아래 역본들은 이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 개역성경 / NIV / NASB / ESV: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또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정도로만 번역)
긍휼의 목적,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선언,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인자하심 —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결국 독자는 예수님이 단지 화만 내시고 다른 마을로 이동하신 것처럼 읽게 된다.
왜 ‘회개’와 ‘구원’이 삭제되었는가?
이러한 삭제는 단순한 요약이나 문장 정리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소수사본 계열(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을 따르고 있으며,
그 결과 복음의 핵심이 체계적으로 약화되었다.
개역성경은 **그리스어 ‘회개하다(μετανοέω)’**를 삭제하거나 생략한다.
NIV, NASB, ESV도 동일한 구절에서 회개와 구원에 대한 표현을 삭제했다.
이 모든 번역은 예수님의 복음 메시지를 도덕적 권면 수준으로 낮추고 말았다.
결론: 회개 없는 복음은 없다. 긍휼은 회개 위에 임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셨다. 하지만 회개하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셨다. 그 목적이 선포되어야 한다.
회개 없는 긍휼, 회개 없는 용서, 회개 없는 구원은 성경적 복음이 아니다.
개역성경뿐 아니라 NIV, NASB, ESV 등 현대역본들도 동일하게 복음의 본질을 축소하고 있다.
“나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 마태복음 9:13, 흠정역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 누가복음 9:56, 흠정역
우리는 더 이상 왜곡된 성경으로 복음을 흐리면 안 된다.
복음의 본질은 ‘긍휼’이며, 그 긍휼은 반드시 회개하는 심령 위에 임한다.
바른 성경, 바른 복음, 바른 회개가 회복되어야 할 때다.
2025-05-07 10:26:05 | 관리자
빵인가, 떡인가?
– 마태복음 4장 4절과 주의 만찬에 담긴 ‘주식’의 신학적 의미
한국 성도들에게 익숙한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마태복음 4:4, 개역)
하지만 이 표현은 수십 년간 잘못된 번역에 익숙해진 결과이며,
예수님의 말씀의 본래 의도는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흠정역)
이 한 단어의 차이는 단순한 음식 표현을 넘어서,
복음의 본질, 주의 만찬의 상징성,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에 이르기까지
깊은 신학적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빵은 주식이다. 떡은 아니다.
성경 시대 이스라엘 문화에서 **빵(bread, 헬라어: ἄρτος)**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주식이었습니다.
빵이 없다는 것은 곧 굶주림을 의미했고,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를 뜻했습니다.
반면, 떡은 오늘날 한국 문화에서 주로 간식 혹은 의례용 음식으로 사용됩니다.
쌀이나 찹쌀로 만든 떡은 성경 문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영적 진리를 상징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빵은
“육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주식”,
그리고 이 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말씀을 “떡”으로 바꿔버리면,
생명의 필수성이 사라지고, 복음의 무게감도 희미해집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 생명의 주식은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실 때, 신명기 8:3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흠정역)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빵으로 유지되지만,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이를 “떡”으로 번역해버리면,
그 상징의 무게와 본질이 가볍고 모호해져 버립니다.
주의 만찬에서의 ‘빵’ – 생명의 몸을 찢어 주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상징으로 주신 장면에서도 **‘빵’**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집어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태복음 26:26, 흠정역)
“그분께서 빵을 집어 감사하신 뒤에 그것을 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긴 내 몸이니…” (고전 11:23–24)
예수님은 찢을 수 있는 빵을 사용하여,
자신의 몸이 찢기고 나누어지는 희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반면 ‘떡’은 자르거나 베어내는 음식이지, 찢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서 떡이라는 단어는 십자가 희생의 본질을 담기에 부적절합니다.
빵은 생명의 주식, 말씀은 영혼의 주식
성경 전체를 통틀어 ‘빵’은 사람의 생존을 유지하는 기본 양식으로,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양식으로 비유됩니다.
이 구조가 유지되어야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빵이라” (요한복음 6:35) 하신 말씀도
그 무게와 의미가 그대로 전달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니라.”
– 주식이신 예수님,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
이제는 번역도 바뀌어야 한다 – 대한성서공회의 인정
주목할 점은, 2024년 대한성서공회가 발행한 『새한글성경』에서 ‘떡’을 ‘빵’으로 바꿨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4:4 (새한글성경):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이는 성경 시대 배경과 본문 원어에 대한 정확한 번역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입니다.
즉, 21세기 한국어에서도 ‘빵’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개역성경, 개역개정,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등 모든 한국어 성경도 ‘떡’이라는 단어를 ‘빵’으로 바꿔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단지 단어 하나의 문제를 넘어서,
말씀의 무게와 복음의 진리를 얼마나 바르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결론: 주의 만찬에 합당한 것은 ‘빵’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빵’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빵’은 성경 시대의 주식이며,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데 정확한 단어이다.
‘떡’은 한국적 문화의 표현일 뿐, 성경적 상징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4:4은 육체적 주식과 영적 주식을 비교하는 본문이며,
그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명의 양식이다.
주의 만찬에서 사용된 빵은 찢긴 몸을 상징하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상기시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마태복음 4:4 (흠정역)
이제는 한국 교회도 ‘떡’에서 벗어나 ‘빵’으로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말씀의 정확성을 위해, 복음의 깊이를 위해, 그리고 주의 만찬의 신비를 온전히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2025-05-06 16:23:44 | 관리자
하나님이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
– 디모데전서 3장 16절, 성육신의 신비를 지키는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 곧 성육신(成肉身)의 신비입니다.
이 진리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분명히 밝히는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 가장 중요한 진리를, 성경 번역 한 단어가 가리거나 드러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디모데전서 3장 16절 – ‘하나님’이냐, ‘그’냐?
이 구절은 신약 전체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장 압축적이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으시고…”
● 개역성경: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He appeared in a body…”
(그는 육신 안에 나타났다…)
문제는 단 한 단어입니다.
God (Θεός, theos) → 하나님
He (Ὃς, hos) → 그는
킹제임스 성경은 원문 그대로 “하나님”이라 고백하지만,
현대 역본들과 개역성경은 이를 “그는”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문법 문제가 아니다
“그는 나타났다”라고 하면, 누구가 나타났는지를 문맥으로 유추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처럼 복잡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이 차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신가?
성육신은 실제 사건인가 상징인가?
를 결정짓는 문제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 사본의 문제
이 문제는 단순한 번역자 해석이 아니라, 어떤 사본을 기준으로 삼았는가의 문제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공인본문 (Textus Receptus)**를 따릅니다.
여기에는 “Θεός (Theos, 하나님)”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등 대부분의 현대 역본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같은 소수 고대 사본을 기반으로 하며
이들은 “Ὃς (He, 그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는(Ὃς)’이라는 단어는 ‘하나님(Θεός)’과 그리스어 문자 하나 차이일 뿐입니다.
헬라어 필사본에서 **Θ (theta)**와 **Ο (omicron)**는 필기체로 구분이 어렵고,
후대 필사자들이 실수하거나 고의로 바꿨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공인본문은 왜 중요한가?
공인본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존되어 온 다수 사본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본문입니다.
수백 년간 교회가 사용해 온 성경의 내용은 바로 이 공인본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종교개혁자들도 이 본문을 사용하여 교리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는 번역은
단순히 문학적 선택이 아니라,
성경 보존의 흐름과 복음의 본질을 지키는 올바른 결론입니다.
요한복음과의 일치 –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요한복음도 분명히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3장 16절이 “그는”으로 바뀌면,
요한복음과의 일관성이 깨지고, 성육신의 신비가 흐려지게 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는 진리를 지켜야 한다
‘그는’(he) 나타났다고 하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나님’(God)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고 해야 성육신의 진리가 드러난다.
개역성경과 현대 역본은 이 위대한 신비를 한 단어로 흐리고 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만이 이 진리를 바르게 보존하고 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디모데전서 3:16, 흠정역)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선지자나 메신저가 아닙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분입니다.
이 한 구절, 한 단어는 그 진리를 지키는 영적 최전선입니다.
2025-05-06 16:07:44 | 관리자
빌립보서 2장 12절 – 구원을 이루라? 아니면 드러내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표현은 한국 성도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읽고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지금 구원받은 줄 알았는데, 이 구원을 끝까지 이뤄야 하는 건가?”
“혹시 내가 끝까지 잘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리는 걸까?”
이런 불안과 혼란은 단지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 번역 자체의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특히 빌립보서 2장 12절의 **개역성경과 킹제임스 성경(KJV)**은 결정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성경 번역 비교 – 같은 말씀, 전혀 다른 의미
● 개역성경: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이 표현은 마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행위와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특히 “두렵고 떨림”이라는 표현과 결합되면,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 부담감 속에 살아갑니다.
●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work out your own salvation)
여기서 “work out”이라는 표현은 무언가를 이뤄낸다거나 만들어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밖으로 표현하거나 실행에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즉, 구원은 이미 “your own salvation”, 너희 자신의 구원으로 존재하며,
이제 그 구원을 삶 속에서 드러내고,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work out? work for? work on? 결정적인 차이
work out your salvation:
→ 이미 주어진 구원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나타내라는 뜻
→ 외부로 드러내다, 열매로 증명하다
work for your salvation:
→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 (성경이 절대 사용하지 않음)
work on your salvation:
→ 구원받는 과정을 작업하듯 계속 다듬는다는 느낌 (역시 성경적이지 않음)
성경은 work out만 사용합니다.
이는 “구원을 완성하라”가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을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완성된 선물이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성경은 구원이 이미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은 이 구원을 유지하거나 쟁취하라는 말이 아니라,
삶 속에서 나타내라는 실천적 명령입니다.
개역성경이 불러온 오해와 위협
개역성경의 “구원을 이루라”는 번역은 다음과 같은 위험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짐
행위로 구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율법적 신앙으로 변질
이러한 해석은 천주교의 점진적 구원론, 즉 죽을 때까지 행위로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는 교리와 유사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의 진짜 의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의 경외감을 뜻합니다.
이는 구원의 불확실성 때문에 느끼는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책임감 있게 살아가라는 겸손한 태도를 말합니다.
결론: 구원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다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다.
→ 우리는 그것을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
“work out your own salvation”은 구원을 실천하라는 명령이다.
→ 얻거나 유지하라는 말이 아니다.
개역성경은 이 중요한 구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불안과 오해를 심어준다.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 빌립보서 2:12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명령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이유는 구원이 불안정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2025-05-06 15:59:19 | 관리자
베드로전서 2장 2절 –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
개역성경: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 표현만 보면 신자가 아직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 있고, 말씀을 통해 조금씩 자라가야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이는 천주교식 점진적 구원론, 즉 평생 행위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어떤 자격을 채워야 주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믿는 즉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의 정확한 번역
흠정역: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자라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장(grow)’의 목적은 성숙이며, 구원은 그 전제입니다.
이 번역은 신약 전체가 일관되게 말하는 복음의 본질과 일치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순전한 젖이란 무엇인가?
흠정역은 이 젖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라납니다.
하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성장은 **성화(성숙)**의 과정이지, 구원 획득의 조건이 아닙니다.
개역성경은 왜 위험한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개역의 표현은 본의 아니게 다음과 같은 오류를 불러옵니다:
구원은 점진적인 것이라는 오해
말씀과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왜곡
사제나 교단의 중재를 통한 ‘구원 관리’ 체제 정당화
이는 로마 가톨릭의 행위 구원, 성례 중심의 구원, 죽을 때까지 확신할 수 없는 구원 교리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타이밍
성경은 명확히 말합니다: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성도는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구원을 기초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구원을 받았느니라.”(딤후 3:15)
결론: 구원은 순간의 사건, 성장은 평생의 여정
구원은 믿는 순간 즉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장은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입니다.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 순서를 뒤집고, 점진적 구원론으로 오도할 수 있습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구원의 순간성과 말씀을 통한 성장을 정확히 구분해 보여줍니다.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 베드로전서 2:2 (흠정역)
구원은 얻기 위해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이미 얻은 생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여정입니다.
이 진리가 흔들릴 때, 우리의 복음도 흔들립니다.
2025-05-06 15:51:45 | 관리자
창세기 2장 1절 – 하늘이 하나인가, 여러 개인가?
개역성경: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간결하지만, 복수 개념이 사라졌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이같이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니라.”
히브리어 본문은 “shamayim”(שָׁמַיִם)으로, 분명히 복수형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복수형을 사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은 이를 단수로 바꾸어 **“하늘들”이 아닌 “하늘”**로 번역했습니다. 간결성은 지켰지만, 의미는 지워졌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셋째 하늘’
복수형 ‘하늘들’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늘이 최소한 세 영역으로 나뉘어 있음을 명확히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흠정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사도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장소, 곧 천국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셋째 하늘이 있다면, 첫째와 둘째 하늘도 존재한다는 논리는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인 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분류됩니다:
첫째 하늘: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기권 – 구름, 새가 나는 하늘
둘째 하늘: 태양, 달, 별들이 있는 우주 공간
셋째 하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영적인 세계, 천국
그러므로 **‘하늘들’**이라는 복수 표현은 단순한 문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는 세계 구조에 대한 선언입니다.
왜 복수형이 중요한가?
성경은 말씀이자 교리의 기초입니다. 작은 단어 하나의 차이가 교리를 바꾸고, 교리를 바꾸면 결국 신앙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복수형을 무시하고 간결성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심각합니다.
‘하늘들’ → ‘하늘’
→ 하나님의 계시 구조가 희미해짐
‘하늘들’이 사라진 신학
→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의 구분이 흐려짐
→ 천국의 실체에 대한 오해 가능성
결국 성경의 정확한 구조와 계시를 모르게 되면, 부실한 번역은 부실한 교리를 만들고, 부실한 교리는 부실한 신앙을 낳습니다.
흠정역이 복수형을 지킨 이유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 원문(KJV)의 표현을 충실히 따라, the heavens를 그대로 **‘하늘들’**로 번역합니다. 이는 단지 언어적 충실함을 넘어서, 성경 계시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기 위한 신학적 책임감의 표현입니다.
결론: 하늘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성경 원문은 복수형 ‘하늘들’을 사용한다.
셋째 하늘의 존재는 단수 ‘하늘’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개역성경은 간결하지만 중요한 신학적 요소들을 희생시켰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구조를 올바르게 드러낸다.
“내가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고후 12:2)
하늘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의 무대입니다. 우리는 그 하늘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2025-05-06 15:47:58 | 관리자
십일조를 삼 일마다 바치라고?
– 개역성경의 오역이 만든 황당한 명령
성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과 십일조에 대해 매우 명확한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역성경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을 담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삼 일마다 드리라”**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걸까요?
아모스 4장 4절 – 삼 일마다 십일조?
개역성경: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이 구절만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건 명백한 오역이며, 원래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십일조 주기
성경은 십일조를 매년 드리는 것 외에도,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합니다.
신명기 14:28 (흠정역):
“삼 년이 끝날 때에, 너는 바로 그 해에 거둔 네 소출의 십일조를 모두 가져다가 네 성문들 안에 저장하여…”
신명기 26:12: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되어…”
성경 어디에도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삼 년마다 따로 구별된 십일조를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어떻게 번역했는가?
아모스 4:4 (흠정역):
“벧엘로 가서 범법하고 길갈에서 범법을 크게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 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이 구절의 원래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으로, 외식적으로 희생물을 매일 드리고 정해진 주기인 삼 년 후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비꼬는 말입니다.
즉, 이 구절은 삼 일마다 드리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종교 행위를 풍자적으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NASB 등 현대역본도 동일한 오류
문제는 개역성경만이 아니라, NASB와 일부 현대 영어 성경들도 이 구절을 "every three days"로 번역함으로써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히브리어 본문의 ‘셋 셋(שָׁלֵשׁ)’**을 잘못 해석한 결과로 보입니다.
번역의 오류가 만드는 오해
“십일조를 삼일마다 바친다”는 말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심각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규례를 과도하게 해석하거나 왜곡하게 만들고
율법적 헌금 압박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정확한 성경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해야 합니다.
결론: 성경은 십일조를 삼 일마다 드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삼 년마다 드리는 특별한 십일조를 말한다.
아모스 4:4는 형식적인 종교 행위를 비판하는 말이지, 새로운 명령이 아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만이 본문을 정확히 번역하여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분명합니다. 문제는 잘못된 번역이 하나님의 뜻을 흐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성경이 아니라, ‘정확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2025-05-06 15:44:16 | 관리자
여자 목사와 집사는 안 된다. 디모데전서 3장 2절
초대 교회부터 성경에는 이름 없이 주님을 섬긴 많은 여인들이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는 여자들의 활동이 아주 왕성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 보기에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창조의 질서가 지켜지길 원하신다.
흠정역: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잠잠히 배울지니라. 더욱이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여자는 잠잠히 있을지니라(딤전2:11–12).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영감을 주사 교회의 두 직무 수행자인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셨다.
흠정역: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받을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딤전3:2)
흠정역: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지 아니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딤전3:11–12)
여기서 말하는 감독은 교단의 감독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교단이 나오지 않으며 성경의 교회는 모두 독립/자치 교회이다. 여기서 감독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bishop’인데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이것을 주교로 부르고 있다. 현대 교단들의 감독 체제는 바로 로마 카톨릭교회의 주교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감독은 한 지역 교회의 감독을 말한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될 것이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밖에 없으며 이들은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즉 여자는 이런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창조 질서를 위배하기 때문이다. 개역성경도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12절은 잘 번역했으나 11절에서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
개역: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11)
개역성경은 이곳을 ‘여자들도’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여자들도 집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번역했다. 그러나 심지어 NIV 같은 현대 번역본들도 킹제임스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그들의 아내들도’, 즉 ‘집사들의 아내들도’라고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여자 집사를 인정하기 위해 이런 번역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흠정역: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지 아니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2025-05-06 15:38:00 | 관리자
예수님은 죽음 이후 사흘 동안 어디에 가셨나? 지옥인가, 음부인가 사도행전 2장 31절
지옥인가, 감춰진 진리인가?
– ‘지옥’을 삭제한 번역이 감추려 한 진실
예수님께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신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지옥’**입니다. 불이 꺼지지 않고 벌레도 죽지 않는 곳,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교회가 주로 사용하는 개역성경은 이 지옥의 개념을 반복적으로 흐리거나 삭제해 왔습니다. 무엇이 지워졌고, 무엇이 가려졌는지 성경과 영어 사도신경을 통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지옥”은 예수님의 경고였다 – 그런데 번역이 삭제했다?
마가복음 9장 45절을 비교해 봅시다.
개역성경: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흠정역은 지옥이 꺼지지 않는 불의 장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개역은 단순히 ‘지옥에 던져진다’고만 번역하여 지옥의 형벌성과 영원성을 제거해버렸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44절과 46절이 개역성경에서 완전히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흠정역 (막 9:44, 46, 48):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은 동일한 구절을 세 번 반복하심으로써 지옥의 실체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를 생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내용을 사람의 판단으로 삭제한 셈입니다.
‘음부’, ‘스올’… 번역이 만든 지옥의 실종
지옥을 가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번역어의 변조입니다. 사도행전 2장 31절을 보십시오.
흠정역: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개역성경: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지옥’이라는 분명한 단어가, 알 수 없는 ‘음부’로 바뀐 것입니다. 비슷한 예는 구약에도 존재합니다. 지옥을 뜻하는 히브리어 **“스올”**이 등장할 때마다 개역은 일관되게 이를 **‘스올’ 혹은 ‘음부’**로 번역하여, 일반 독자들이 지옥의 실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 셈입니다.
영어 사도신경이 증언하는 지옥의 존재
우리는 종종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한국어 사도신경에는 없는 구절이 영어 원문에는 있습니다:
H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며, 지옥에 내려가셨다.)
이 문장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지옥 즉 누가복음 16장에서 아브라함의 품이라 불리는 지하 세계에 가셨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사도신경에서는 이 구절이 삭제되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번역자들이 ‘지옥’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과 교회 전통 모두에서 지옥의 존재는 명확하지만, 그 실체는 점점 번역을 통해 지워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옥의 어원과 위치 – 성경과 언어가 일치하다
‘지옥’을 뜻하는 영어 단어 **“hell”**은 앵글로색슨어 helan에서 왔으며, **‘감추다’, ‘덮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지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The abode of the dead; the infernal regions or lower world regarded as a place of existence after death.”
즉, 지하 세계에 존재하는 죽은 자의 처소, 특히 악한 자들이 고통받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한국어 **‘지옥’(地獄)**이라는 단어는 **‘땅의 감옥’**이라는 뜻으로, 성경의 묘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는 바벨탑 이후 언어가 혼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말에 정확한 개념을 허락하신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땅의 중심부’에 내려가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40 (흠정역):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땅속 깊은 지옥, 즉 지하 세계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곳에 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분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행 2:31).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대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과학적 세계관에 따라 이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지옥의 실재를 선포합니다.
최후의 형벌: 불로 가득한 호수
마지막으로, 성경은 모든 불신자들이 향할 최종 목적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시록 20:14: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이 **불 호수(lake of fire)**는 지옥보다도 더욱 무서운 장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이 영원히 고통받게 될 마지막 형벌의 장소입니다.
결론: 지옥은 실재하며, 그것을 숨기는 번역은 죄다
지옥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실체이며, 예수님 자신이 강조하신 경고의 대상이다.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 ‘스올’로 대체하며 그 실체를 가렸다.
영어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지옥 강하’를 분명히 언급하지만, 한국어 사도신경은 이를 삭제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만이 지옥의 실체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9:48
우리는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믿어야 한다. 지옥은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곳에 가지 않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2025-05-06 15:27:15 | 관리자
지옥인가, 음부인가?
– 지옥의 실체를 숨기려는 번역의 덫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단어에 점점 둔감해지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의 실체는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번역의 잘못은 이 중요한 진리를 가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역본인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나 ‘스올’로 대체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고, 그 결과 지옥 교리에 심각한 왜곡이 생겨났다.
1. 예수님은 ‘지옥’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표적인 구절을 보자:
흠정역 (막 9:45):
“지옥에,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흠정역 (막 9:44, 46, 48):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처럼 지옥은 불이 꺼지지 않고, 벌레도 죽지 않는, 영원한 고통의 장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구절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며 그 심각성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막 9:44, 46을 아예 생략해버렸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부분을 번역자가 스스로 판단해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2. 개역성경은 왜 ‘지옥’을 숨겼는가?
성경에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총 54회 등장한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구약에 등장하는 31회의 ‘지옥’ → 모두 ‘스올’로 번역
신약의 23회 중 13회만 ‘지옥’으로 번역, 나머지는 ‘음부’로 대체
결과적으로, ‘지옥’이라는 명확한 단어는 대부분 제거되었고, 대신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음부’나 ‘스올’이라는 애매한 단어가 채워졌다. 이는 번역자들의 샤머니즘적 세계관과 종교 혼합주의의 흔적이며, 불교 개념인 ‘저승’, ‘구천’, ‘유명’ 같은 개념과도 쉽게 연결된다.
예를 들면:
개역 (잠 15:11):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 앞에 드러나거든…”
흠정역: “지옥과 멸망도 주 앞에 있거늘…”
개역 (잠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흠정역: “지옥과 멸망은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느니라…”
이처럼 **‘지옥’과 ‘멸망’**이라는 강력하고 분명한 개념을 **‘음부’와 ‘유명’**이라는 이교적 이미지로 바꿔 버린 것이다.
3. 예수님도 지옥에 가셨다?
믿기 어렵겠지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기록한다.
사도행전 2:31 (흠정역):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러나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로 번역하여, 이 중요한 사실을 흐려 놓았다.
개역: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사실은 사도신경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He descended into hell.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으며…”
하지만 한국어 사도신경에는 이 문장이 빠져 있다. 번역자들이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제거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주문처럼 신조를 외우지 않지만, 지옥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문장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다.
4. 예수님의 죽음 이후, 죽은 자의 행방은?
예수님 부활 이전에는 죽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품’(낙원)**과 지옥으로 나뉘어 갔다(눅 16:19–31). 예수님의 부활 이후, 낙원은 천국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죽는 즉시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간다(엡 4:8–10; 고후 5:8; 히 11:40).
따라서 ‘스올’, ‘음부’, 혹은 ‘유명’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지옥과 천국이라는 두 장소만이 남아 있다.
5.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은 지옥이 ‘땅의 중심부’에 있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12:40 (흠정역):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행 2:31 (흠정역):
“그리스도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지옥(hell)’이라는 영어 단어도 ‘감추다’, ‘덮다’는 의미를 가진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되었다. 즉, ‘지하에 감춰진 장소’라는 개념이 내포된 것이다. 이에 비해 한자 ‘지옥’(地獄)은 ‘땅의 감옥’, 성경적 의미를 정확히 반영한 놀라운 표현이다.
6. 최후의 심판 후, 영원한 형벌의 장소는?
성경은 지옥은 최종적인 장소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불 호수(lake of fire)’**로 던져질 것이라고 말한다.
계시록 20:14: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이 불 호수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이 영원히 고통받게 될 장소다. 그 위치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지옥보다 더 무서운 곳임은 분명하다.
결론: 지옥은 실재하며, 그것을 흐리는 번역은 심각한 문제다
지옥은 영원한 불의 형벌의 장소다.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 ‘스올’ 등으로 바꾸어 그 실체를 가렸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만이 정확히 ‘지옥(hell)’이라는 표현을 유지하고 있다.
지옥은 상징도 아니고 비유도 아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영원히 떨어질 실제 장소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왜곡하거나 흐리는 번역은 성도들의 영혼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2025-05-06 15:16:43 | 관리자
마귀인가, 귀신인가?
– 성경은 ‘귀신’을 말하는가, 아니면 ‘마귀’를 말하는가?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귀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할아버지 귀신, 처녀 귀신, 혹은 억울하게 죽어 이 땅을 떠도는 존재들 말이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이러한 존재들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개념인가?
1. 개역성경의 혼란스러운 번역 – 귀신은 누구인가?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을 보자:
개역성경: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이 구절만 보면, 조상귀신에게 제사하는 한국적 전통이 성경적으로도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조상신을 불러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전통과 이 표현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정말 성경이 그런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단 말인가?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오히려 나는 이것을 말하노라. 즉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들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리느니라.”
핵심은 ‘귀신’이 아니라 ‘마귀(devils)’다.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는 단순한 헌금이나 예배가 아니라, 구약적 개념의 **희생물(sacrifice)**을 뜻한다. 조상신을 섬기기 위해 드리는 제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구약의 번제, 소제, 화목제 등은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철저히 **희생을 동반한 헌물(offering)**이었다.
2. 죽은 자의 혼, 즉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죽은 자는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나 ‘이승에 머무는 원혼’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죽은 자의 행방이 뚜렷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뉨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9장: 변화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을 때, 이들이 결코 구천에 떠도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에는 ‘죽은 사람의 혼’이 이 땅을 떠돈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3. ‘귀신(demon)’과 ‘마귀(devil)’의 명확한 차이
웹스터 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귀신(demon): 고대 이교도들이 말하던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 존재. 선한 귀신과 악한 귀신이 있으며, 죽은 자의 혼이 귀신이 된다고 믿음.
마귀(devil): 기독교에서 말하는 타락한 천사들. 하나님께 대적하여 하늘에서 쫓겨난 존재이며, 그 우두머리는 ‘the devil’, 즉 사탄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지혜를 인도하는 귀신(demon)’이 있다고 말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귀신이 반신반인이라 믿었다. 이런 이방의 개념이 오늘날에도 ‘귀신’이라는 단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4. 원어 논쟁의 오류 –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문제
일부 원어 옹호자들은 "신약에서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은 ‘demon’이고,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는 ‘devil’이므로 둘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같은 논리를 구약에 적용하면 모순이 생긴다.
레위기 17:7, 신명기 32:17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shed’(7700)과 ‘sair’(8163)는 NASB 등의 현대 역본들에서 모두 그냥 **‘demon’(귀신)**으로 번역되었다.
즉, 구약과 신약,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논리를 바꾸는 것은 정직한 성경 해석이 아니다. 원어는 해석의 도구이지 권위가 아니다.
5. ‘사신에게 제사’? – 이해하기 어려운 개역성경
개역성경 (시편 106:37):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
‘사신’이 누구인가? 이 단어로는 현대 독자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흠정역:
“참으로 그들이 자기 아들딸들을 마귀들에게 희생물로 바쳤으며”
어떤 번역이 더 명확하고 성경적인가? 개역성경은 시대를 지나며 고어와 불명확한 표현들로 인해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심지어 같은 히브리어 단어(shed)를 시편에서는 ‘사신’으로, 신명기에서는 ‘마귀’로 번역한 것도 일관성 결여를 보여준다.
6. 복수 개념의 중요성 – '들'로 번역하라
개역 (신명기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흠정역: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렸으니…”
복수형을 단수로 번역하면 오해가 생긴다. 성경은 ‘많은 마귀들(devils)’이 있다고 말한다. 유일한 사탄(the devil) 외에도 수많은 타락한 영들이 존재한다.
7. 정리하며 – 귀신은 없다, 마귀는 있다
성경은 죽은 자의 혼이 이 세상을 떠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귀신(demon)**이 아니라 마귀(devil) 혹은 **타락한 영들(evil spirits)**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개역성경은 불명확한 번역과 시대착오적 표현으로 인해 오히려 이방 사상과 뒤섞인 해석을 낳고 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단어 하나까지 정확하며, 성경의 교리를 바르게 전달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
2025-05-06 15:09:20 | 관리자
성경적 삼위일체: “세 인격, 하나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삼위일체(Trinity)**는 성경이 계시한 하나님의 본질이며, 구원의 복음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교리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무지로 인해 양태론(모달리즘)과 같은 이단 사상이 자주 등장하였고, 심지어 복음적인 교단 내부에서도 잘못된 비유나 설명이 통용되곤 한다.
양태론의 위험성
양태론이란 하나님께서 시대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나타나신다고 가르치는 이단 교리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에게는 아버지고, 아내에게는 남편이며, 교회에선 목사다”
“물은 얼음, 물, 수증기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이런 설명은 표면상 이해를 돕는 듯 보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가 아닌 ‘하나님 한 분이 세 역할을 번갈아 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명백히 양태론이다.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구별되는 인격체로 존재하시며, 서로 교제하시는 세 위격,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한다.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의 핵심 진리
삼위일체 교리는 다음 세 가지 명제를 모두 포함한다:
1.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one LORD)시니…”
(신명기 6:4, 킹제임스 흠정역)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하나이시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one)'는 본질적 단일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시며, 동일한 신성을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세 인격체가 공유하신다.
2. 성부, 성자, 성령님은 각각 하나님이시다
성부: 고린도전서 8:6
성자: 요한복음 1:1, 요한일서 5:20
성령님: 사도행전 5:3–4
3. 이 세 위격은 서로 구별된다
예: 예수님이 침례받으실 때(마 3:16–17) — 아버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은 비둘기처럼 임하시며, 예수님은 물속에서 올라오셨다.
자연계에 반영된 삼위일체의 그림자
하나님께서는 창조물 속에 삼위일체의 흔적을 두셨다:
1. 시간
과거, 현재, 미래: 서로 구별되지만 함께 시간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이룸.
어느 하나만 있어도 시간은 온전하지 않음.
2. 공간
길이(x), 너비(y), 높이(z): 이 셋은 모두 물체의 실재성을 구성함.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음.
이 예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구별되면서도 결코 나뉘지 않는 단일성—을 제한적으로 반영한다.
바른 삼위일체 신앙을 위하여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지만, 믿음으로 받아야 할 계시의 진리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또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고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
— 요한일서 5:20
정리: 성경적 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신명기 6:4)
→ 이는 수적 개념이 아니라 **본질의 단일성(one in essence)**을 의미한다.
세 위격이 존재하신다
→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인격이시며, 각각 참 하나님이시다.
세 분이 함께 한 하나님을 이루신다
→ 세 인격은 동시에 존재하며, 동일한 신성을 공유하시며, 분리되지 않고, 혼동되지 않으며, **하나의 하나님(one God)**을 이루신다.
양태론은 이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 하나님을 한 인격의 세 역할로만 보는 주장은 성경적 계시를 부정한다.
2025-05-06 11:44:44 | 관리자
신령과 진정이 아니라 영과 진리입니다
― 요한복음 4장 24절과 바른 예배의 기준
우리는 종종 예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요한복음 4장 24절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지만 과연 이 표현이 성경 원문에 충실한 번역일까요?
그리고 이 표현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방향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아니오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정확히 번역하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가 맞습니다.
개역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의 차이
과거 개역성경은 요한복음 4:24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지만 개정판(개역개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KJV)은 처음부터 이렇게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왜 “신령과 진정”은 잘못된 번역인가?
원문 헬라어는 “en pneumati kai aletheiai(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입니다.
이것은 직역하면 “**영(spirit)**과 진리(truth) 안에서”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의 “신령과 진정”은 그 의미를 크게 왜곡시켰습니다.
“신령(神靈)”은 ‘영적인’이라는 뜻보다는 신비롭고 신기한 느낌을 주며,
마치 영묘하고 환상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진정(眞情)”은 원래의 ‘진리(truth)’가 아닌 감정적 진심이나 정성 정도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되면 예배는 ‘신기한 느낌이 있는 예배’ 혹은 ‘감정이 진실한 예배’로 축소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참된 예배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잘못된 예배의 위험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감정적 체험 중심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물, 전율, 방언, 쓰러짐, 환상 등 외적인 반응이 곧 “신령한 예배”라고 오해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르쳐 주신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 말씀하시며 장소, 의식, 느낌이 아닌 본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느니라.” (요 4:24, KJV)
즉, 예배는 거듭난 자의 영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바른 이유
킹제임스 성경은 이 구절을 원문 그대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in spirit and in truth”는 외적인 느낌이나 태도가 아니라,
내적인 새 영과 진리의 말씀에 입각한 예배를 강조합니다.
또한 영어 성경들 중에서도 KJV를 포함한 모든 전통 역본들은 예외 없이 **“spirit and truth”**를 사용합니다.
대문자 Spirit이 아닌 소문자 spirit으로 기록한 이유는 이것이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난 후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 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배는 감정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서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진정성 있게’ 예배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가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감정, 분위기, 감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정확한 예배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는 오직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며,
그것을 가장 정확히 가르쳐주는 성경은 바로 KJV이다.”
2025-05-05 16:21:10 | 관리자
마태복음 1장 6절: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는 왜 중요한가?
성경은 단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의도와 진리를 담고 있는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번역에서 단어 하나의 차이가 교리적으로도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대표적인 예로 마태복음 1장 6절을 살펴보며, 왜 킹제임스 성경(KJV)이 옳은 성경인지, 그리고 개역성경이나 NIV와 같은 현대역본들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
먼저 킹제임스 성경(KJV)의 마태복음 1장 6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Jesse begat David the king; and David the king begat Solomon of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구절의 핵심은 바로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라는 표현입니다. 단순히 “우리야의 아내”가 아니라, “한때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다윗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를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바세바와 간음을 저질렀고, 그 결과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으며, 그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여인은 이후 다윗의 정식 아내가 되었고, 그 관계 안에서 솔로몬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의 합법적인 아들입니다.
KJV는 이 여인을 단지 “우리야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그 전에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 “우리야의 아내”라고만 기록함
하지만 개역성경, NIV 등 현대역본들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개역성경: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NIV: “David was the father of Solomon, whose mother had been Uriah’s wife”
겉으로 보기엔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야의 아내”라는 표현은 마치 지금도 그 여인이 우리야의 아내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간음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와 용서를 무시하고, 다윗의 죄가 끝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는 왜곡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윗은 분명히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를 받으시고, 그 여인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야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가 맞는 표현입니다.
이런 번역은 솔로몬을 다윗의 불법적인 아들로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올바로 반영한 성경은 KJV
이처럼 KJV는 하나님의 눈으로 본 사실과 구속의 역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죄의 관계로 시작했지만,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다윗의 정식 아내가 되었고,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해 메시아의 계보가 이어지게 됩니다.
반면, 개역성경이나 현대역본들은 단어를 단순화하거나 의미를 흐려,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 속의 회개와 용서, 구속의 흐름을 놓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론: 단어 하나가 교리를 바꾼다
성경에서 단어 하나는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의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는 단지 과거형 표현 하나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공의, 다윗의 회개, 하나님의 은혜, 구속의 역사가 다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온전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현대역본들이 놓치고 있는 진리의 핵심을, 우리는 KJV를 통해 다시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지금도 보존하고 계신다.”
2025-05-05 14:50:1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