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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 – 디모데전서 3장 16절, 성육신의 신비를 지키는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 곧 성육신(成肉身)의 신비입니다. 이 진리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분명히 밝히는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 가장 중요한 진리를, 성경 번역 한 단어가 가리거나 드러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디모데전서 3장 16절 – ‘하나님’이냐, ‘그’냐? 이 구절은 신약 전체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장 압축적이고 강력하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으시고…” ● 개역성경: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He appeared in a body…” (그는 육신 안에 나타났다…) 문제는 단 한 단어입니다. God (Θεός, theos) → 하나님 He (Ὃς, hos) → 그는 킹제임스 성경은 원문 그대로 “하나님”이라 고백하지만, 현대 역본들과 개역성경은 이를 “그는”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문법 문제가 아니다 “그는 나타났다”라고 하면, 누구가 나타났는지를 문맥으로 유추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처럼 복잡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이 차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신가? 성육신은 실제 사건인가 상징인가? 를 결정짓는 문제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 사본의 문제 이 문제는 단순한 번역자 해석이 아니라, 어떤 사본을 기준으로 삼았는가의 문제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공인본문 (Textus Receptus)**를 따릅니다. 여기에는 “Θεός (Theos, 하나님)”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개역성경, NIV 등 대부분의 현대 역본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같은 소수 고대 사본을 기반으로 하며 이들은 “Ὃς (He, 그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는(Ὃς)’이라는 단어는 ‘하나님(Θεός)’과 그리스어 문자 하나 차이일 뿐입니다. 헬라어 필사본에서 **Θ (theta)**와 **Ο (omicron)**는 필기체로 구분이 어렵고, 후대 필사자들이 실수하거나 고의로 바꿨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공인본문은 왜 중요한가? 공인본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존되어 온 다수 사본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본문입니다. 수백 년간 교회가 사용해 온 성경의 내용은 바로 이 공인본문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종교개혁자들도 이 본문을 사용하여 교리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는 번역은 단순히 문학적 선택이 아니라, 성경 보존의 흐름과 복음의 본질을 지키는 올바른 결론입니다. 요한복음과의 일치 –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요한복음도 분명히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3장 16절이 “그는”으로 바뀌면, 요한복음과의 일관성이 깨지고, 성육신의 신비가 흐려지게 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는 진리를 지켜야 한다 ‘그는’(he) 나타났다고 하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나님’(God)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고 해야 성육신의 진리가 드러난다. 개역성경과 현대 역본은 이 위대한 신비를 한 단어로 흐리고 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만이 이 진리를 바르게 보존하고 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디모데전서 3:16, 흠정역)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선지자나 메신저가 아닙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분입니다. 이 한 구절, 한 단어는 그 진리를 지키는 영적 최전선입니다.
2025-05-06 16:07:44 | 관리자
빌립보서 2장 12절 – 구원을 이루라? 아니면 드러내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표현은 한국 성도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읽고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지금 구원받은 줄 알았는데, 이 구원을 끝까지 이뤄야 하는 건가?” “혹시 내가 끝까지 잘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리는 걸까?” 이런 불안과 혼란은 단지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 번역 자체의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특히 빌립보서 2장 12절의 **개역성경과 킹제임스 성경(KJV)**은 결정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성경 번역 비교 – 같은 말씀, 전혀 다른 의미 ● 개역성경: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이 표현은 마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행위와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특히 “두렵고 떨림”이라는 표현과 결합되면,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 부담감 속에 살아갑니다. ●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work out your own salvation) 여기서 “work out”이라는 표현은 무언가를 이뤄낸다거나 만들어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밖으로 표현하거나 실행에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즉, 구원은 이미 “your own salvation”, 너희 자신의 구원으로 존재하며, 이제 그 구원을 삶 속에서 드러내고,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work out? work for? work on? 결정적인 차이 work out your salvation: → 이미 주어진 구원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나타내라는 뜻 → 외부로 드러내다, 열매로 증명하다 work for your salvation: →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 (성경이 절대 사용하지 않음) work on your salvation: → 구원받는 과정을 작업하듯 계속 다듬는다는 느낌 (역시 성경적이지 않음) 성경은 work out만 사용합니다. 이는 “구원을 완성하라”가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을 나타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완성된 선물이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성경은 구원이 이미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은 이 구원을 유지하거나 쟁취하라는 말이 아니라, 삶 속에서 나타내라는 실천적 명령입니다. 개역성경이 불러온 오해와 위협 개역성경의 “구원을 이루라”는 번역은 다음과 같은 위험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짐 행위로 구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율법적 신앙으로 변질 이러한 해석은 천주교의 점진적 구원론, 즉 죽을 때까지 행위로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는 교리와 유사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의 진짜 의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의 경외감을 뜻합니다. 이는 구원의 불확실성 때문에 느끼는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책임감 있게 살아가라는 겸손한 태도를 말합니다. 결론: 구원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다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다. → 우리는 그것을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 “work out your own salvation”은 구원을 실천하라는 명령이다. → 얻거나 유지하라는 말이 아니다. 개역성경은 이 중요한 구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불안과 오해를 심어준다.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 빌립보서 2:12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명령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이유는 구원이 불안정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2025-05-06 15:59:19 | 관리자
베드로전서 2장 2절 –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   개역성경: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 표현만 보면 신자가 아직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 있고, 말씀을 통해 조금씩 자라가야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이는 천주교식 점진적 구원론, 즉 평생 행위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어떤 자격을 채워야 주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믿는 즉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의 정확한 번역 흠정역: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자라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장(grow)’의 목적은 성숙이며, 구원은 그 전제입니다. 이 번역은 신약 전체가 일관되게 말하는 복음의 본질과 일치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순전한 젖이란 무엇인가? 흠정역은 이 젖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라납니다. 하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성장은 **성화(성숙)**의 과정이지, 구원 획득의 조건이 아닙니다. 개역성경은 왜 위험한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개역의 표현은 본의 아니게 다음과 같은 오류를 불러옵니다: 구원은 점진적인 것이라는 오해 말씀과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왜곡 사제나 교단의 중재를 통한 ‘구원 관리’ 체제 정당화 이는 로마 가톨릭의 행위 구원, 성례 중심의 구원, 죽을 때까지 확신할 수 없는 구원 교리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타이밍 성경은 명확히 말합니다: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성도는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구원을 기초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구원을 받았느니라.”(딤후 3:15) 결론: 구원은 순간의 사건, 성장은 평생의 여정 구원은 믿는 순간 즉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장은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입니다.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 순서를 뒤집고, 점진적 구원론으로 오도할 수 있습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구원의 순간성과 말씀을 통한 성장을 정확히 구분해 보여줍니다.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 베드로전서 2:2 (흠정역) 구원은 얻기 위해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이미 얻은 생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여정입니다. 이 진리가 흔들릴 때, 우리의 복음도 흔들립니다.
2025-05-06 15:51:45 | 관리자
창세기 2장 1절 – 하늘이 하나인가, 여러 개인가?   개역성경: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간결하지만, 복수 개념이 사라졌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이같이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니라.” 히브리어 본문은 “shamayim”(שָׁמַיִם)으로, 분명히 복수형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복수형을 사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은 이를 단수로 바꾸어 **“하늘들”이 아닌 “하늘”**로 번역했습니다. 간결성은 지켰지만, 의미는 지워졌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셋째 하늘’ 복수형 ‘하늘들’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늘이 최소한 세 영역으로 나뉘어 있음을 명확히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흠정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사도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장소, 곧 천국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셋째 하늘이 있다면, 첫째와 둘째 하늘도 존재한다는 논리는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인 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분류됩니다: 첫째 하늘: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기권 – 구름, 새가 나는 하늘 둘째 하늘: 태양, 달, 별들이 있는 우주 공간 셋째 하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영적인 세계, 천국 그러므로 **‘하늘들’**이라는 복수 표현은 단순한 문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는 세계 구조에 대한 선언입니다. 왜 복수형이 중요한가? 성경은 말씀이자 교리의 기초입니다. 작은 단어 하나의 차이가 교리를 바꾸고, 교리를 바꾸면 결국 신앙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복수형을 무시하고 간결성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심각합니다. ‘하늘들’ → ‘하늘’ → 하나님의 계시 구조가 희미해짐 ‘하늘들’이 사라진 신학 →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의 구분이 흐려짐 → 천국의 실체에 대한 오해 가능성 결국 성경의 정확한 구조와 계시를 모르게 되면, 부실한 번역은 부실한 교리를 만들고, 부실한 교리는 부실한 신앙을 낳습니다. 흠정역이 복수형을 지킨 이유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 원문(KJV)의 표현을 충실히 따라, the heavens를 그대로 **‘하늘들’**로 번역합니다. 이는 단지 언어적 충실함을 넘어서, 성경 계시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기 위한 신학적 책임감의 표현입니다. 결론: 하늘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성경 원문은 복수형 ‘하늘들’을 사용한다. 셋째 하늘의 존재는 단수 ‘하늘’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개역성경은 간결하지만 중요한 신학적 요소들을 희생시켰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구조를 올바르게 드러낸다. “내가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고후 12:2) 하늘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의 무대입니다. 우리는 그 하늘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2025-05-06 15:47:58 | 관리자
십일조를 삼 일마다 바치라고? – 개역성경의 오역이 만든 황당한 명령 성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과 십일조에 대해 매우 명확한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역성경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을 담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삼 일마다 드리라”**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걸까요? 아모스 4장 4절 – 삼 일마다 십일조? 개역성경: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이 구절만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건 명백한 오역이며, 원래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십일조 주기 성경은 십일조를 매년 드리는 것 외에도,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합니다. 신명기 14:28 (흠정역): “삼 년이 끝날 때에, 너는 바로 그 해에 거둔 네 소출의 십일조를 모두 가져다가 네 성문들 안에 저장하여…” 신명기 26:12: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되어…” 성경 어디에도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삼 년마다 따로 구별된 십일조를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은 어떻게 번역했는가? 아모스 4:4 (흠정역): “벧엘로 가서 범법하고 길갈에서 범법을 크게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 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이 구절의 원래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으로, 외식적으로 희생물을 매일 드리고 정해진 주기인 삼 년 후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비꼬는 말입니다. 즉, 이 구절은 삼 일마다 드리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종교 행위를 풍자적으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NASB 등 현대역본도 동일한 오류 문제는 개역성경만이 아니라, NASB와 일부 현대 영어 성경들도 이 구절을 "every three days"로 번역함으로써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히브리어 본문의 ‘셋 셋(שָׁלֵשׁ)’**을 잘못 해석한 결과로 보입니다. 번역의 오류가 만드는 오해 “십일조를 삼일마다 바친다”는 말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심각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규례를 과도하게 해석하거나 왜곡하게 만들고 율법적 헌금 압박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정확한 성경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해야 합니다. 결론: 성경은 십일조를 삼 일마다 드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삼 년마다 드리는 특별한 십일조를 말한다. 아모스 4:4는 형식적인 종교 행위를 비판하는 말이지, 새로운 명령이 아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만이 본문을 정확히 번역하여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분명합니다. 문제는 잘못된 번역이 하나님의 뜻을 흐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성경이 아니라, ‘정확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2025-05-06 15:44:16 | 관리자
여자 목사와 집사는 안 된다. 디모데전서 3장 2절   초대 교회부터 성경에는 이름 없이 주님을 섬긴 많은 여인들이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는 여자들의 활동이 아주 왕성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 보기에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창조의 질서가 지켜지길 원하신다.   흠정역: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잠잠히 배울지니라. 더욱이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여자는 잠잠히 있을지니라(딤전2:11–12).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영감을 주사 교회의 두 직무 수행자인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셨다.   흠정역: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받을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딤전3:2)   흠정역: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지 아니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딤전3:11–12)   여기서 말하는 감독은 교단의 감독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교단이 나오지 않으며 성경의 교회는 모두 독립/자치 교회이다. 여기서 감독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bishop’인데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이것을 주교로 부르고 있다. 현대 교단들의 감독 체제는 바로 로마 카톨릭교회의 주교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감독은 한 지역 교회의 감독을 말한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될 것이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밖에 없으며 이들은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즉 여자는 이런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창조 질서를 위배하기 때문이다. 개역성경도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12절은 잘 번역했으나 11절에서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   개역: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11)   개역성경은 이곳을 ‘여자들도’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여자들도 집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번역했다. 그러나 심지어 NIV 같은 현대 번역본들도 킹제임스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그들의 아내들도’, 즉 ‘집사들의 아내들도’라고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여자 집사를 인정하기 위해 이런 번역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흠정역: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지 아니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2025-05-06 15:38:00 | 관리자
예수님은 죽음 이후 사흘 동안 어디에 가셨나? 지옥인가, 음부인가 사도행전 2장 31절   지옥인가, 감춰진 진리인가? – ‘지옥’을 삭제한 번역이 감추려 한 진실   예수님께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신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지옥’**입니다. 불이 꺼지지 않고 벌레도 죽지 않는 곳,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교회가 주로 사용하는 개역성경은 이 지옥의 개념을 반복적으로 흐리거나 삭제해 왔습니다. 무엇이 지워졌고, 무엇이 가려졌는지 성경과 영어 사도신경을 통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지옥”은 예수님의 경고였다 – 그런데 번역이 삭제했다? 마가복음 9장 45절을 비교해 봅시다. 개역성경: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흠정역은 지옥이 꺼지지 않는 불의 장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개역은 단순히 ‘지옥에 던져진다’고만 번역하여 지옥의 형벌성과 영원성을 제거해버렸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44절과 46절이 개역성경에서 완전히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흠정역 (막 9:44, 46, 48):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은 동일한 구절을 세 번 반복하심으로써 지옥의 실체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이를 생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내용을 사람의 판단으로 삭제한 셈입니다. ‘음부’, ‘스올’… 번역이 만든 지옥의 실종 지옥을 가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번역어의 변조입니다. 사도행전 2장 31절을 보십시오. 흠정역: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개역성경: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지옥’이라는 분명한 단어가, 알 수 없는 ‘음부’로 바뀐 것입니다. 비슷한 예는 구약에도 존재합니다. 지옥을 뜻하는 히브리어 **“스올”**이 등장할 때마다 개역은 일관되게 이를 **‘스올’ 혹은 ‘음부’**로 번역하여, 일반 독자들이 지옥의 실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 셈입니다. 영어 사도신경이 증언하는 지옥의 존재   우리는 종종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한국어 사도신경에는 없는 구절이 영어 원문에는 있습니다: H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시며, 지옥에 내려가셨다.) 이 문장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지옥 즉 누가복음 16장에서 아브라함의 품이라 불리는 지하 세계에 가셨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사도신경에서는 이 구절이 삭제되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번역자들이 ‘지옥’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과 교회 전통 모두에서 지옥의 존재는 명확하지만, 그 실체는 점점 번역을 통해 지워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옥의 어원과 위치 – 성경과 언어가 일치하다   ‘지옥’을 뜻하는 영어 단어 **“hell”**은 앵글로색슨어 helan에서 왔으며, **‘감추다’, ‘덮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지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The abode of the dead; the infernal regions or lower world regarded as a place of existence after death.” 즉, 지하 세계에 존재하는 죽은 자의 처소, 특히 악한 자들이 고통받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한국어 **‘지옥’(地獄)**이라는 단어는 **‘땅의 감옥’**이라는 뜻으로, 성경의 묘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는 바벨탑 이후 언어가 혼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말에 정확한 개념을 허락하신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땅의 중심부’에 내려가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40 (흠정역):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땅속 깊은 지옥, 즉 지하 세계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곳에 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분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행 2:31).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대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과학적 세계관에 따라 이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지옥의 실재를 선포합니다. 최후의 형벌: 불로 가득한 호수 마지막으로, 성경은 모든 불신자들이 향할 최종 목적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시록 20:14: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이 **불 호수(lake of fire)**는 지옥보다도 더욱 무서운 장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이 영원히 고통받게 될 마지막 형벌의 장소입니다. 결론: 지옥은 실재하며, 그것을 숨기는 번역은 죄다 지옥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실체이며, 예수님 자신이 강조하신 경고의 대상이다.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 ‘스올’로 대체하며 그 실체를 가렸다. 영어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지옥 강하’를 분명히 언급하지만, 한국어 사도신경은 이를 삭제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만이 지옥의 실체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9:48 우리는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믿어야 한다. 지옥은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곳에 가지 않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2025-05-06 15:27:15 | 관리자
지옥인가, 음부인가? – 지옥의 실체를 숨기려는 번역의 덫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단어에 점점 둔감해지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의 실체는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번역의 잘못은 이 중요한 진리를 가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역본인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나 ‘스올’로 대체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고, 그 결과 지옥 교리에 심각한 왜곡이 생겨났다. 1. 예수님은 ‘지옥’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표적인 구절을 보자: 흠정역 (막 9:45): “지옥에,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흠정역 (막 9:44, 46, 48):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처럼 지옥은 불이 꺼지지 않고, 벌레도 죽지 않는, 영원한 고통의 장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구절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며 그 심각성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막 9:44, 46을 아예 생략해버렸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부분을 번역자가 스스로 판단해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2. 개역성경은 왜 ‘지옥’을 숨겼는가? 성경에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총 54회 등장한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구약에 등장하는 31회의 ‘지옥’ → 모두 ‘스올’로 번역 신약의 23회 중 13회만 ‘지옥’으로 번역, 나머지는 ‘음부’로 대체 결과적으로, ‘지옥’이라는 명확한 단어는 대부분 제거되었고, 대신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음부’나 ‘스올’이라는 애매한 단어가 채워졌다. 이는 번역자들의 샤머니즘적 세계관과 종교 혼합주의의 흔적이며, 불교 개념인 ‘저승’, ‘구천’, ‘유명’ 같은 개념과도 쉽게 연결된다. 예를 들면: 개역 (잠 15:11):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 앞에 드러나거든…” 흠정역: “지옥과 멸망도 주 앞에 있거늘…” 개역 (잠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흠정역: “지옥과 멸망은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느니라…” 이처럼 **‘지옥’과 ‘멸망’**이라는 강력하고 분명한 개념을 **‘음부’와 ‘유명’**이라는 이교적 이미지로 바꿔 버린 것이다. 3. 예수님도 지옥에 가셨다? 믿기 어렵겠지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기록한다. 사도행전 2:31 (흠정역):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러나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로 번역하여, 이 중요한 사실을 흐려 놓았다. 개역: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사실은 사도신경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He descended into hell.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으며…” 하지만 한국어 사도신경에는 이 문장이 빠져 있다. 번역자들이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제거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주문처럼 신조를 외우지 않지만, 지옥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문장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다. 4. 예수님의 죽음 이후, 죽은 자의 행방은? 예수님 부활 이전에는 죽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품’(낙원)**과 지옥으로 나뉘어 갔다(눅 16:19–31). 예수님의 부활 이후, 낙원은 천국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죽는 즉시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간다(엡 4:8–10; 고후 5:8; 히 11:40). 따라서 ‘스올’, ‘음부’, 혹은 ‘유명’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지옥과 천국이라는 두 장소만이 남아 있다. 5.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은 지옥이 ‘땅의 중심부’에 있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12:40 (흠정역):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행 2:31 (흠정역): “그리스도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지옥(hell)’이라는 영어 단어도 ‘감추다’, ‘덮다’는 의미를 가진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되었다. 즉, ‘지하에 감춰진 장소’라는 개념이 내포된 것이다. 이에 비해 한자 ‘지옥’(地獄)은 ‘땅의 감옥’, 성경적 의미를 정확히 반영한 놀라운 표현이다. 6. 최후의 심판 후, 영원한 형벌의 장소는? 성경은 지옥은 최종적인 장소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불 호수(lake of fire)’**로 던져질 것이라고 말한다. 계시록 20:14: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이 불 호수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이 영원히 고통받게 될 장소다. 그 위치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지옥보다 더 무서운 곳임은 분명하다.  결론: 지옥은 실재하며, 그것을 흐리는 번역은 심각한 문제다 지옥은 영원한 불의 형벌의 장소다.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 ‘스올’ 등으로 바꾸어 그 실체를 가렸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만이 정확히 ‘지옥(hell)’이라는 표현을 유지하고 있다. 지옥은 상징도 아니고 비유도 아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영원히 떨어질 실제 장소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왜곡하거나 흐리는 번역은 성도들의 영혼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2025-05-06 15:16:43 | 관리자
마귀인가, 귀신인가? – 성경은 ‘귀신’을 말하는가, 아니면 ‘마귀’를 말하는가?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귀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할아버지 귀신, 처녀 귀신, 혹은 억울하게 죽어 이 땅을 떠도는 존재들 말이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이러한 존재들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개념인가? 1. 개역성경의 혼란스러운 번역 – 귀신은 누구인가?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을 보자: 개역성경: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이 구절만 보면, 조상귀신에게 제사하는 한국적 전통이 성경적으로도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조상신을 불러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전통과 이 표현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정말 성경이 그런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단 말인가?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오히려 나는 이것을 말하노라. 즉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들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리느니라.” 핵심은 ‘귀신’이 아니라 ‘마귀(devils)’다.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는 단순한 헌금이나 예배가 아니라, 구약적 개념의 **희생물(sacrifice)**을 뜻한다. 조상신을 섬기기 위해 드리는 제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구약의 번제, 소제, 화목제 등은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철저히 **희생을 동반한 헌물(offering)**이었다. 2. 죽은 자의 혼, 즉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죽은 자는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나 ‘이승에 머무는 원혼’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죽은 자의 행방이 뚜렷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뉨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9장: 변화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을 때, 이들이 결코 구천에 떠도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에는 ‘죽은 사람의 혼’이 이 땅을 떠돈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3. ‘귀신(demon)’과 ‘마귀(devil)’의 명확한 차이 웹스터 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귀신(demon): 고대 이교도들이 말하던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 존재. 선한 귀신과 악한 귀신이 있으며, 죽은 자의 혼이 귀신이 된다고 믿음. 마귀(devil): 기독교에서 말하는 타락한 천사들. 하나님께 대적하여 하늘에서 쫓겨난 존재이며, 그 우두머리는 ‘the devil’, 즉 사탄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지혜를 인도하는 귀신(demon)’이 있다고 말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귀신이 반신반인이라 믿었다. 이런 이방의 개념이 오늘날에도 ‘귀신’이라는 단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4. 원어 논쟁의 오류 –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문제 일부 원어 옹호자들은 "신약에서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은 ‘demon’이고,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는 ‘devil’이므로 둘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같은 논리를 구약에 적용하면 모순이 생긴다. 레위기 17:7, 신명기 32:17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shed’(7700)과 ‘sair’(8163)는 NASB 등의 현대 역본들에서 모두 그냥 **‘demon’(귀신)**으로 번역되었다. 즉, 구약과 신약,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논리를 바꾸는 것은 정직한 성경 해석이 아니다. 원어는 해석의 도구이지 권위가 아니다. 5. ‘사신에게 제사’? – 이해하기 어려운 개역성경 개역성경 (시편 106:37):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 ‘사신’이 누구인가? 이 단어로는 현대 독자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흠정역: “참으로 그들이 자기 아들딸들을 마귀들에게 희생물로 바쳤으며” 어떤 번역이 더 명확하고 성경적인가? 개역성경은 시대를 지나며 고어와 불명확한 표현들로 인해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심지어 같은 히브리어 단어(shed)를 시편에서는 ‘사신’으로, 신명기에서는 ‘마귀’로 번역한 것도 일관성 결여를 보여준다. 6. 복수 개념의 중요성 – '들'로 번역하라 개역 (신명기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흠정역: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렸으니…” 복수형을 단수로 번역하면 오해가 생긴다. 성경은 ‘많은 마귀들(devils)’이 있다고 말한다. 유일한 사탄(the devil) 외에도 수많은 타락한 영들이 존재한다. 7. 정리하며 – 귀신은 없다, 마귀는 있다 성경은 죽은 자의 혼이 이 세상을 떠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귀신(demon)**이 아니라 마귀(devil) 혹은 **타락한 영들(evil spirits)**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개역성경은 불명확한 번역과 시대착오적 표현으로 인해 오히려 이방 사상과 뒤섞인 해석을 낳고 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단어 하나까지 정확하며, 성경의 교리를 바르게 전달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
2025-05-06 15:09:20 | 관리자
 성경적 삼위일체: “세 인격, 하나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삼위일체(Trinity)**는 성경이 계시한 하나님의 본질이며, 구원의 복음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교리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무지로 인해 양태론(모달리즘)과 같은 이단 사상이 자주 등장하였고, 심지어 복음적인 교단 내부에서도 잘못된 비유나 설명이 통용되곤 한다. 양태론의 위험성   양태론이란 하나님께서 시대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나타나신다고 가르치는 이단 교리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에게는 아버지고, 아내에게는 남편이며, 교회에선 목사다” “물은 얼음, 물, 수증기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이런 설명은 표면상 이해를 돕는 듯 보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가 아닌 ‘하나님 한 분이 세 역할을 번갈아 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명백히 양태론이다.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구별되는 인격체로 존재하시며, 서로 교제하시는 세 위격,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한다.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의 핵심 진리   삼위일체 교리는 다음 세 가지 명제를 모두 포함한다: 1.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one LORD)시니…” (신명기 6:4, 킹제임스 흠정역)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하나이시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one)'는 본질적 단일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시며, 동일한 신성을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세 인격체가 공유하신다. 2. 성부, 성자, 성령님은 각각 하나님이시다 성부: 고린도전서 8:6 성자: 요한복음 1:1, 요한일서 5:20 성령님: 사도행전 5:3–4 3. 이 세 위격은 서로 구별된다 예: 예수님이 침례받으실 때(마 3:16–17) — 아버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은 비둘기처럼 임하시며, 예수님은 물속에서 올라오셨다. 자연계에 반영된 삼위일체의 그림자   하나님께서는 창조물 속에 삼위일체의 흔적을 두셨다: 1. 시간 과거, 현재, 미래: 서로 구별되지만 함께 시간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이룸. 어느 하나만 있어도 시간은 온전하지 않음. 2. 공간 길이(x), 너비(y), 높이(z): 이 셋은 모두 물체의 실재성을 구성함.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음. 이 예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구별되면서도 결코 나뉘지 않는 단일성—을 제한적으로 반영한다. 바른 삼위일체 신앙을 위하여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지만, 믿음으로 받아야 할 계시의 진리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또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고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 — 요한일서 5:20 정리: 성경적 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신명기 6:4) → 이는 수적 개념이 아니라 **본질의 단일성(one in essence)**을 의미한다. 세 위격이 존재하신다 →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인격이시며, 각각 참 하나님이시다. 세 분이 함께 한 하나님을 이루신다 → 세 인격은 동시에 존재하며, 동일한 신성을 공유하시며, 분리되지 않고, 혼동되지 않으며, **하나의 하나님(one God)**을 이루신다. 양태론은 이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 하나님을 한 인격의 세 역할로만 보는 주장은 성경적 계시를 부정한다.
2025-05-06 11:44:44 | 관리자
신령과 진정이 아니라 영과 진리입니다 ― 요한복음 4장 24절과 바른 예배의 기준 우리는 종종 예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요한복음 4장 24절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지만 과연 이 표현이 성경 원문에 충실한 번역일까요? 그리고 이 표현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방향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아니오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정확히 번역하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가 맞습니다. 개역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의 차이   과거 개역성경은 요한복음 4:24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지만 개정판(개역개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KJV)은 처음부터 이렇게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왜 “신령과 진정”은 잘못된 번역인가?   원문 헬라어는 “en pneumati kai aletheiai(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입니다. 이것은 직역하면 “**영(spirit)**과 진리(truth) 안에서”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의 “신령과 진정”은 그 의미를 크게 왜곡시켰습니다. “신령(神靈)”은 ‘영적인’이라는 뜻보다는 신비롭고 신기한 느낌을 주며, 마치 영묘하고 환상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진정(眞情)”은 원래의 ‘진리(truth)’가 아닌 감정적 진심이나 정성 정도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되면 예배는 ‘신기한 느낌이 있는 예배’ 혹은 ‘감정이 진실한 예배’로 축소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참된 예배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잘못된 예배의 위험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감정적 체험 중심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물, 전율, 방언, 쓰러짐, 환상 등 외적인 반응이 곧 “신령한 예배”라고 오해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르쳐 주신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 말씀하시며 장소, 의식, 느낌이 아닌 본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느니라.” (요 4:24, KJV) 즉, 예배는 거듭난 자의 영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바른 이유   킹제임스 성경은 이 구절을 원문 그대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in spirit and in truth”는 외적인 느낌이나 태도가 아니라, 내적인 새 영과 진리의 말씀에 입각한 예배를 강조합니다. 또한 영어 성경들 중에서도 KJV를 포함한 모든 전통 역본들은 예외 없이 **“spirit and truth”**를 사용합니다. 대문자 Spirit이 아닌 소문자 spirit으로 기록한 이유는 이것이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난 후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 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배는 감정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서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진정성 있게’ 예배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가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감정, 분위기, 감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정확한 예배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는 오직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며, 그것을 가장 정확히 가르쳐주는 성경은 바로 KJV이다.”
2025-05-05 16:21:10 | 관리자
마태복음 1장 6절: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는 왜 중요한가? 성경은 단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의도와 진리를 담고 있는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번역에서 단어 하나의 차이가 교리적으로도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대표적인 예로 마태복음 1장 6절을 살펴보며, 왜 킹제임스 성경(KJV)이 옳은 성경인지, 그리고 개역성경이나 NIV와 같은 현대역본들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   먼저 킹제임스 성경(KJV)의 마태복음 1장 6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Jesse begat David the king; and David the king begat Solomon of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구절의 핵심은 바로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라는 표현입니다. 단순히 “우리야의 아내”가 아니라, “한때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다윗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를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바세바와 간음을 저질렀고, 그 결과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으며, 그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여인은 이후 다윗의 정식 아내가 되었고, 그 관계 안에서 솔로몬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의 합법적인 아들입니다.   KJV는 이 여인을 단지 “우리야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그 전에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 “우리야의 아내”라고만 기록함   하지만 개역성경, NIV 등 현대역본들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개역성경: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NIV: “David was the father of Solomon, whose mother had been Uriah’s wife” 겉으로 보기엔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야의 아내”라는 표현은 마치 지금도 그 여인이 우리야의 아내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간음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와 용서를 무시하고, 다윗의 죄가 끝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는 왜곡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윗은 분명히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를 받으시고, 그 여인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야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가 맞는 표현입니다. 이런 번역은 솔로몬을 다윗의 불법적인 아들로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올바로 반영한 성경은 KJV 이처럼 KJV는 하나님의 눈으로 본 사실과 구속의 역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죄의 관계로 시작했지만,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다윗의 정식 아내가 되었고,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해 메시아의 계보가 이어지게 됩니다. 반면, 개역성경이나 현대역본들은 단어를 단순화하거나 의미를 흐려,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 속의 회개와 용서, 구속의 흐름을 놓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론: 단어 하나가 교리를 바꾼다 성경에서 단어 하나는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의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는 단지 과거형 표현 하나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공의, 다윗의 회개, 하나님의 은혜, 구속의 역사가 다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온전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현대역본들이 놓치고 있는 진리의 핵심을, 우리는 KJV를 통해 다시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지금도 보존하고 계신다.”
2025-05-05 14:50:10 | 관리자
마태복음 1장 25절 “firstborn”의 삭제는 왜곡이다, 1. 서론: 성경 말씀 한 단어의 중요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단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며, 시대를 초월하여 보존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시편 12편 6~7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약속의 성취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영어 성경이다.  특히 마태복음 1장 25절에서 “her firstborn son(그녀의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이 단어가 사라지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존재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는 천주교의 비성경적인 교리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2. 본문 분석: KJV와 현대 역본의 차이 마태복음 1:25 (킹제임스 흠정역): “그녀가 그녀의 맏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를 알지 아니하다가 낳으매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KJV: “And knew her not till she had brought forth her firstborn son: and he called his name JESUS.” 개역개정: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나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개역개정, NIV, NRSV 등 현대역본들 다수는 이 구절에서 “firstborn”이라는 단어를 삭제하였다.  이 차이는 단순한 문체 차이가 아니다. 교리의 기초가 되는 단어를 없앤 심각한 훼손이다. “firstborn”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첫 번째 아들임을 명백히 선언한다. 만약 예수님이 유일한 아들이었다면, 성령께서 굳이 ‘첫 번째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3. 천주교 교리와 사본 왜곡의 의도 천주교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Virgin Mary)였다고 주장한다. 이 교리는 예수님 이후에도 마리아가 요셉과 동침하지 않았고 자녀도 낳지 않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여럿 있었다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마13:55-56, 막6:3). “이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니냐? 그의 누이들은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그분으로 인해 걸려 넘어지니라.”(막6:3) 하지만 천주교는 이를 사촌 형제 또는 요셉의 전처의 자녀 등으로 억지 해석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25의 firstborn이라는 단어가 남아있으면, 그들의 교리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바티칸 사본(B), 시내 사본(ℵ) 등 소수 사본에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생략하였다. 이로 인해 그 사본을 기반으로 만든 현대역본들도 이 단어를 제거하였다. 만약 예수님이 유일한 아들이었다면, 성경은 "her only son"이라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2:7과 마태복음 1:25은 모두 예수님이 첫 번째 아들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이후 자녀들도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4. KJV는 하나님의 완전한 보존된 말씀 우리는 성경을 선택할 때 감정이나 전통, 편의성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양식이다(마 4:4). KJV는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공인본문)을 바탕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 번역된 유일무이한 영어 성경이다. KJV에는 “firstborn”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으며, 교리적으로도 왜곡이 없다. 현대 역본들은 오류 가득한 알렉산드리아 계열 소수 사본을 기반으로 하여, 중요한 단어들을 빼거나 바꾸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1:25의 “firstborn”이다. 이 단어 하나의 삭제로 인해 마리아의 평생 동정녀 교리가 힘을 얻고, 일반 성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 5. 결론: 한 단어의 삭제가 진리를 무너뜨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하나까지 중요하다. 마태복음 1장 25절에서 “firstborn”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예수님이 첫째 아들이었음을 부정하게 되고, 이는 마리아가 다른 자녀가 없었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옹호하게 만든다. 이는 명백한 교리적 왜곡이며, 사본의 조작을 통해 진리를 훼손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영어 말씀이며, 모든 교리와 구절이 온전하게 들어 있는 성경이다. 성도들이 KJV를 버릴 때, 진리를 잃어버리고 사람의 전통에 빠지게 된다. “firstborn”은 단어 하나지만, 진리의 기둥을 세우는 핵심이다.
2025-05-05 14:35:4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번에 저희는 성경 바로 보기 책의 2부를 따로 편집하여 <세대 주의 바로 알기>라는 제목으로 출간합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무료로 다운받기 바랍니다.   2025년 5월 8일(목)부터 이 책을 바탕으로 정동수 목사의 강해가 오후 6시에 사랑침례교회 유튜브 채널로 올라갑니다.       목차   세대주의 바로 알기 역자 서문 6 제1장 세대주의 바로 알기 11 제2장 세대주의는 무엇인가? 29 제3장 세대주의자는 누구인가? 47 제4장 무죄 경륜 57 제5장 양심 경륜 63 제6장 인간 정부 경륜 71 제7장 약속 경륜 79 제8장 율법 경륜 87 제9장 율법의 역할과 목적 95 제10장 은혜 경륜 103 제11장 교회 113 제12장 환난기 125 제13장 왕국 경륜 134 제14장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145 제15장 세대주의 요약 154 부 록 성경 연대기 158 구원의 원리 165    
2025-05-05 10:45:25 | 관리자
열왕기하 6장 33절의 그는 누구인가요? 성경을 읽다 보면 대명사가 많이 나오고 어떤 경우에는 그 대명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왕하6:33의 그가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아직 그들과 이야기할 때에, 보라, 그 사자가 엘리사에게 내려왔는데 그가 이르기를, 보라, 이 해악이 주에게서 나왔으니 어찌 내가 주를 더 기다려야 하겠느냐? 하였더라. KJV: And while he yet talked with them, behold, the messenger came down unto him: and he said, Behold, this evil is of the LORD; what should I wait for the LORD any longer? 대다수 주석들은 여기의 he가 왕이 보낸 사자나 왕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길(John Gill)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썼습니다. he said; either the messenger in the king's name, or rather the king, who was at his heels, and came to the door before the messenger was let in, who was detained; and therefore it is most probable the king went in first; for that was the intention of Elisha in holding the messenger, not to save his own life, but that the king, who was following, might hear what he had to say; and whom he advised to wait for the Lord, and his appearance, for deliverance: in answer to which he said: 길 주석   여기의 그는 왕의 이름으로 온 사자이거나 혹은 그의 뒤를 따라와서 먼저 들어간 왕일 가능성이 높다. 앞 절을 보면 그 사자는 문에서 붙잡혀 있었다. 따라서 왕이 먼저 들어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엘리사가 사자를 붙잡은 이유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를 따라온 왕이 그가 말하려는 것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왕에게 주님을 기다리라고 조언했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왕은 “이 해악이 주에게서 나왔으니 어찌 내가 주를 더 기다려야 하겠느냐?” 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32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32 한편 엘리사는 자기 집에 앉아 있었고 장로들도 그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왕이 자기 앞에 선 자들 중에서 한 사람을 보내니 그 사자가 엘리사에게 오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살인자의 이 아들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낸 것을 너희가 보느냐? 보라,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그를 문에서 굳게 잡아 두라.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33 아직 그들과 이야기할 때에, 보라, 그 사자가 엘리사에게 내려왔는데 그가 이르기를, 보라, 이 해악이 주에게서 나왔으니 어찌 내가 주를 더 기다려야 하겠느냐? 하였더라. 여기의 사악한 왕은 여호람인데 그는 위기를 맞이하자 엘리사를 향해 31절처럼 위협의 말을 하였지만 곧바로 회개하고 사자의 뒤를 따라가서 33절처럼 말을 하며 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31절: 그때에 그가 이르되, 이날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그에게 붙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그 뒤에  7장에서는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을 돕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의 그를 사자로 보든지 왕으로 보든지 앞뒤 문맥을 보고 성도 여러분이 판단하기 바랍니다. 샬롬
2025-05-02 14:00:18 | 관리자
개역성경 사사기 1-2장의 명백한 오역: 안 하다와 못하다   ■ 서론: 본문의 문제의식   사사기 1장과 2장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사건을 다룬다. 개역 성경과 흠정역 성경을 비교하면, ‘쫓아내지 못하였다’(무능)와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불순종)라는 번역의 차이가 존재한다. 겉보기에는 유사해 보이지만, 이 차이는 하나님의 책망 이유와 이스라엘의 책임 수준을 결정짓는 중대한 의미 차이를 내포한다. ■ 본론   1. 번역의 차이: “못하였다” vs. “아니하였다”   개역 성경은 대부분의 구절에서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번역하며, 이스라엘의 무능을 강조한다(삿1:21, 27, 30, 32 등). 반면에 흠정역 성경은 일관되게 “쫓아내지 아니하였다”고 번역하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드러낸다. 개역 성경도 사사기 1:28에서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의지적 불순종을 시인하고 있다. 2. 역사적 맥락과 성경적 분석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철저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으며(삿2:2), 공물이나 노동을 조건으로 남겨두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는 대신, 공물을 받으며 함께 거주했고(삿1:28, 30, 33), 이는 명백한 불순종이다. 사사기 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고 명확히 지적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무능이 아닌, 의지적 거부였다. 3. 전쟁의 논리로 본 해석   만약 이스라엘이 진정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면, 역공을 받아 쫓겨났어야 한다. 이는 1:34에서 단 지파가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난 사례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과 동맹을 맺고, 공존했으며, 심지어 통혼과 우상숭배까지 하게 되었다. 이는 “쫓아내지 못했다”는 표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며, 불순종이라는 설명만이 전체 맥락을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게 한다. 4. 신학적 함의: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   하나님은 단순한 무능을 책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무능할 때는 도우시는 분이다. 그러나 명백한 명령 앞에서 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은 행위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분노는 부당한 책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쫓아내지 아니한 불순종이었기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책망이 성립된다. ■ 결론   ‘쫓아내지 못한 것’은 무능이지만, ‘쫓아내지 아니한 것’은 불순종이다. 하나님은 무능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지만, 불순종한 자는 엄히 책망하신다. 사사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사기 본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기록한 것이며,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합리화 없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2025-05-02 10:36:19 | 관리자
일천 번제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   ■ 서론: 일천 번제의 유행과 문제 제기   한국 교회 일부에서는 ‘일천 번제’라는 이름의 헌금 또는 종교 의식이 오랫동안 시행되어 왔다. 이는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후 지혜를 얻었다는 구절(왕상 3:4)을 근거로 하여, 신자들이 천 번의 헌금이나 예배, 기도 등을 드리면 하나님이 감동하여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행위가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 본론   1. ‘일천 번제’의 성경적 의미는 무엇인가?   ‘일천 번제’란 ‘천 마리의 번제 희생물을 한 번에 드린 것’이지, ‘천 번의 제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열왕기상 3:4의 원문과 영어 KJV(“a thousand burnt offerings”)는 ‘천 번의 제사’가 아닌 ‘한 번에 천 마리의 제물’을 뜻함. 역대기하 1:6 역시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반복 횟수가 아닌 제물의 수량임을 분명히 함.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1,000번 헌금 또는 예배’를 성경에 적용하는 것은 왜곡된 해석이다.   2. 솔로몬은 ‘일천 번제’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일천 번제가 하나님의 감동을 불러와 솔로몬이 지혜를 얻었다고 주장하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바친 희생제물에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백성을 잘 다스릴 지혜를 구한 기도에 기뻐하셨다(왕상 3:9-10). 성경은 솔로몬이 ‘최상의 것’을 드렸다고 평가하지 않으며, 솔로몬의 재력과 비교할 때 천 마리 제물은 적은 규모였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찾아오신 이유는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지, 제물의 감동 때문이 아니다.   3. 신약 성경은 구약의 번제를 폐지했다   히브리서 1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으로 구약의 제사 제도를 폐지하셨음을 강조한다. 번제 헌물이나 외적 행위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수단이 아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구약의 제사 의식을 반복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는 시도는 신학적으로 오류이다.   4. 기도 응답은 제물이나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고 말씀한다(요일 5:14, 롬 12:2). 응답받는 기도는 정성의 정도나 헌금의 횟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과 동기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잘못된 신앙 태도를 조장한다.   5. 왜 일천 번제가 한국 교회에서 유행하는가?   경제적 유익: 교회 수입을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는 수단이 되어버림. 미신적 신앙 구조: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동양적 기복사상과 융합됨. 자기 의의 강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고 싶어함. 기복 신앙의 영향: 헌금을 복 받는 수단으로 왜곡하는 교리가 만연해 있음.   ■ 결론: 성경적 기도와 예배로 돌아가야   ‘일천 번제’는 성경적 근거가 없음에도, 교회 내에서 기복 신앙과 자기 의를 조장하며, 헌금을 거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하나님은 인간의 헌금이나 외적 행위에 감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 복은 인간의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신자는 일천 번제와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 적용: 바른 신앙을 위한 제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기도하라(롬12:2). 외적 행위보다 마음의 순종을 우선하라(삼상15:22). 복은 헌금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다(약1:17). 성경은 기도의 조건으로 정성이나 금액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도는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히4:16).
2025-05-02 10:28:12 | 관리자
입다의 딸은 번제 헌물로 죽었는가? 1. 사사기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 사사기에는 도덕과 영적 타락이 심했던 사사 시대의 혼란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우상 숭배, 첩을 둠, 동성애, 살인 등 극악한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입다가 자기 딸을 ‘번제로 드렸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개역 성경을 읽으며 입다의 서원을 보고, 입다의 경솔함과 무자비함만을 탓한 채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사실 자체에 혼란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으로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입다의 딸은 번제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헌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이다. 2. 번역의 문제: 오해를 낳은 개역 성경   (1) 서원의 표현: ‘그는’ vs ‘그것을’   개역 성경 (삿 11:31): “나를 영접하는 그는...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KJV: “Whatsoever cometh forth... I will offer it up for a burnt offering.” KJV과 흠정역은 모두 ‘whatsoever(무엇이든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입다가 짐승이든 물건이든 하나님의 것으로 삼겠다는 의미이며, 사람이 나올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개역은 ‘그는’, ‘그를’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입다가 애초에 사람을 번제로 바치려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2) 제사냐, 헌물이냐?   흠정역과 KJV은 '번제 헌물'로 표현하지만, 개역은 단순히 ‘번제’라고 번역함으로써 짐승을 죽이고 불에 태우는 종교적 제사 의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원문의 의도는 ‘제물’보다는 ‘헌물’에 가깝다. 이는 하나님께 소유로 드리는 행위이지, 반드시 죽음을 수반하는 제사는 아니다. (3) ‘처녀로 죽음’이라는 말은 원문에 없다   개역 성경: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KJV: “bewail my virginity”   개역 성경은 원문에 없는 ‘죽음’을 삽입해 독자들이 입다의 딸이 처녀로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virginity는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며, 딸이 결혼 없이 평생 주님께 헌신하게 됨을 슬퍼한 것이다. 3. 입다의 서원은 어떻게 이행되었는가?   입다는 전쟁에서 돌아온 후, 자신을 맞이한 딸을 보고 충격을 받지만 자신의 서원을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하며 지키겠다고 한다. 딸도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라고 순종한다.   (1) 하나님은 사람을 번제로 받으시는가? 레18:21, 신12:31, 렘7:31: 하나님은 인신 제사를 가증하게 여기시며 명하지도 않으셨다. 아브라함-이삭 사건도 시험이었으며, 실제로는 양이 제물로 바쳐짐.   (2) 번제 헌물로 드리는 다양한 방식 여리고 성 전체를 불태우며 바침 (수6:24) 레위인들은 살아 있는 헌물로 바쳐져 하나님을 섬김 (민8:11) 사람은 죽여서 바칠 수 없으므로 입다의 딸 역시 살아 있는 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졌고, 주의 집에서 헌신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4. 입다의 딸이 된 살아 있는 헌물   딸은 두 달간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 자신의 처녀 생활(virginity)을 애곡하며 결혼하지 않고 살아야 할 삶에 대한 아쉬움을 나눈다. 이후 돌아와 아버지의 서원을 따라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되어 살게 된다. 이는 민수기 30장에 따라 유효한 서원이며, 그에 따라 지켜졌다.   5. 신약시대의 적용: 우리도 살아 있는 헌물로   롬12:1: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히13:15: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자들이 자신을 헌신된 삶으로 드리길 원하신다. 입다의 딸처럼,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참된 헌물이다.   6. 결론: 오해에서 바른 해석으로   입다와 그의 딸, 그리고 하나님은 잘못 해석되어 왔다. 번역의 오류와 제사 개념의 오해로 인해 입다의 딸은 불태워진 희생자로 여겨졌으나, 킹제임스 성경에 비추어 보면 그녀는 살아 있는 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졌고, 평생을 주님께 헌신한 믿음의 여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도 날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운다.
2025-05-02 10:17:15 | 관리자
안녕하세요?   공지한 대로 오늘 마제스티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큰글자 성경 PDF 책을 올립니다. 갤럭시탭이나 아이패드 등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PC로 보시는 분들은 PDF 파일에 책갈피가 있으므로 성경 66권 중 원하는 책을 직접 누르고 가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그리고 부록이 인쇄되는 순서대로 한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부록의 32쪽 컬러 지도를 원하는 분들(그리고 스터디 성경의 96쪽 컬러 지도/선도를 원하는 분들)은 다음에서 다운받기 바랍니다.   스터디 바이블_큰글자 성경 컬러 지도/선도 무료 PDF   이 외에 무료 PDF 책들을 원하시는 분들은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무료 PDF 책 다운 링크   그리고 아직 킹제임스 성경을 접하지 못한 분들은 다음에서 무료 성경을 받을 수 있으니 자격이 되는지 확인하고 주문하기 바랍니다.   무료 스터디 바이블 하드커버 주문 링크    우리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자유로운 행로를 갖고 한국말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25-04-28 15:23:37 | 관리자
안녕하세요?   킵바이블 사이트의 상단 중앙에는 성경 공부 메뉴가 있습니다. 이것을 누르면 성경 검색및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검색 링크   2025년 4월 28일(월)부터 킹제임스 성경 마제스티 판으로 바뀌었으니 설교 등을 준비하며 인용하기 원하는 분들은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큰글자 성경 무료 PDF는 다음에서 다운받기 바랍니다.   큰글자 성경 무료 PDF 다운 링크   그리고 무료 스마트폰 앱(안드로이드 폰과 애플 폰)은 다음에서 다운받기 바랍니다.   무료 스마트폰 앱(안드로이드 폰과 애플 폰) 다운 링크    이 외에 무료 PDF 책들을 원하시는 분들은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무료 PDF 책 다운 링크   그리고 아직 킹제임스 성경을 접하지 못한 분들은 다음에서 무료 성경을 받을 수 있으니 자격이 되는지 확인하고 주문하기 바랍니다.   무료 스터디 바이블 하드커버 주문 링크    우리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자유로운 행로를 갖고 한국말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샬롬   
2025-04-28 15:12:3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