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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말 셀라는 그리스말로 페트라 즉 바위를 뜻하였다. 유다 왕 아마샤는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싸워서 셀라를 점령한 뒤 그곳을 욕드엘이라고 불렀다(왕하14:7). 페트라는 고대의 강한 요새며 상업의 중심지로서 그 지역의 수도나 다름이 없었지만 구약의 대언자들은 페트라의 몰락과 황폐함에 대하여 대언하였다(사34:5-15; 렘49:7-22; 겔35:1-15; 욜3:19; 암1:11-12; 옵3-16).    
2009-07-18 12:18:01 | 관리자
  옷을 빠는 사람. 그가 어떻게 옷을 빨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옷은 세상의 어떤 세탁공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하얗게 변했다(막9:3). 말3:2에는 세탁공의 비누가 나온다. 변화 참조.       
2009-07-18 12:17:30 | 관리자
  I. 기럇여아림 근처에 있던 유다의 산(수15:10). II. 사해 남부에 살던 고대의 호르 족속(창36:20; 신2:12). III. 사해의 최남단과 홍해의 동쪽 만 사이에 있던 산지. 호르 산은 세일의 일부였으며 그곳의 원래 이름을 유지한 유일한 지역이다. 이두매아 참조.    
2009-07-18 12:16:38 | 관리자
  통 이 말은 성도를 세워 주는 것을 뜻하며 이 일은 개인이나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고전14:3-5; 고후12:19; 엡4:29). 특히 고린도 교회처럼 분열과 혼동이 있는 교회에게는 세워 주는 일이 많이 필요했다(고전10:23; 살전5:11).    
2009-07-18 12:16:03 | 관리자
  로마에서 남쪽으로 5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마을(행28:15). 사도 바울의 로마 이송 지도 참조(44). 로마의 크리스천 형제들은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아피이 광장 참조.    
2009-07-18 12:15:39 | 관리자
  이 말은 우리가 거하는 땅(삼상2:8), 거주민(요3:16), 많은 사람(요12:19)을 뜻한다. 여러 구절에서 이 말은 땅 혹은 대륙을 뜻하고 로마 제국의 땅 혹은 유대와 그 근방의 땅을 뜻하기도 한다 (눅2:1; 4:5; 행11:28). 한편 이 말은 시간과 감각에 속한 것들을 가리키기도 한다(갈6:14; 요일2:15).    
2009-07-18 12:14:21 | 관리자
회복을 위해 간구하는 방법 ● 토저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6).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눅18:1-2) 위에 인용한 세 구절에 주목하라. 첫 번째 구절은, 기도의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이 “많은 유익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또 실제로 입증되고 있다. 두 번째 구절은, 기도가 이렇게 영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르게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구절은 약간 다르다. 이 구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도해야 하며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순교자이며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초월해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 그분을 뵙거나 그분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창조물 위로 자신을 들어 올려야 한다. 나는 기도에 대한 이 정의에 공감하며 잠시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요즘은 많은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과거 어느 때보다 복음주의 교회 안팎에서 많은 기도가 드려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 목록을 적어 놓고 그분께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이루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 많은 일들을 그분께서 이루어주시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차라리 기도하며 시간 빼앗기지 말고 산책을 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들어달라는 압력을 받고 계시다. 내가 보기에 기도는 이미 로비 차원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에 로비한다.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일에까지 그분께서 복 주시기를 강요한다. 게다가 빈곤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벌기를 원하며 그러한 저급한 프로젝트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비용으로 여행할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버스나 화물선이 아닌 호화 유람선으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라디오나 편지로 기도를 요청하며 때로는 철야기도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자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에 절대로 응답하지 않으신다.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 신이 응답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밤새면서 졸리는 눈을 비벼가며 분노를 발산하고, 스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했다고 착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방관하실 뿐이다. 시간을 빼앗는 기도 제목도 있다 공식적인 기도 모임에서는 절대로 기도 부탁을 해서는 안 될 사적인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님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종류의 문제들 말이다. 이러한 기도 제목은 듣는 이들을 난처하게 하며 참석자들의 시간을 빼앗을 뿐이다. 내가 젊은 시절 목회할 때 어떤 기도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리더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 “아무개 자매가 기도를 부탁해 왔습니다. 그녀의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모두 그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러자 온 회중이 엄숙하게 무릎을 끓고 눈꺼풀을 위해 기도했다. 미소를 띠거나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꺼풀을 문지르라고 권면하고 싶었다. 나 같으면 그렇게 하리라. 문지르기만 하면 멈출 테니까. 이러 사적인 문제를 기도 모임에 끌어들여 교회 공동체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합심 기도’ 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이것은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합심기도는 영향력이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기도 모임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반드시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단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나 산만하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최우선순위 말씀 속에서 기도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이 시간 나는 기도의 두 가지 목표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여러분 중 몇 사람은 내가 먼저 선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놀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 제목 맨 위에 와야 할 것이다. 이제 순서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활을 쏠 때 조준하는 과녁과 같다. 마치 기도의 불도저로 밀어붙여야 하는 산처럼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있어야 한다. 감히 단언하기는 이 두 가지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다. 이 두 가지 목표가 개인 기도든 합심 기도든 기도의 열정을 자극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구체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반복이나 갈망 또 훈련이나 자기희생에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열렬하게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도 형태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치 군대에서 전략가가 사용 가능한 온갖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첫 번째 목표,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의 회복 이 나라 이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지금 전달하는 메시지는 꾸며낸 말이 아니다. 건전한 신학 사상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에 점검하거나 테스트해 봐도 좋다. 다른 어떤 일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나약한 존재이다. 그분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친구로 교제하다가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보잘것없고 천박하며 무능한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분은 단지 ‘위층’에 사시는 분이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와서 도와주며,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단체에서는 박제가 된 신을 믿고 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언제나 나아가 간구할 수 있는 신 말이다. 라디오 프로에 한 개그맨이 출연하여 “이제 다 같이 기도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익살로 말문을 열 수도 있다. 아니면 반쯤 개종한 카우보이가 얼간이 복장을 하고 나와 숫자 카드를 튕긴 후에, “이제 제가 ‘거룩한 숫자’(holy number)를 몸으로 보여 드리지요”라고 말하고는 저급한 노래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님 같으면 누구나 다가갈 수 있기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에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었던 때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이 의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확고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면전에 나아갈 때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분이다. 테니스 복장으로 운동하다 말고 냅다 뛰어 들어가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후에 빠져나갈 수 는 없다. 시카고에 크리스천 남성 사업가들로 구성된 위원회 모임이 있었다. 지금은 이런 위원회뿐 아니라 다른 모임도 많이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며 여러 차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어느 특별한 모임이 열리고 있었는데 위원회의 임원중 한 사람이 갑자기 뛰어나와 연단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지금 막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뉴잉글랜드에서 온 한 멋진 노신사가 일어서더니 “의장!”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의장이 그를 보며 “좋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라고 물었다. 노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뉴잉글랜드에서부터 이곳 시카고까지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경건하게 예배하는 분위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쓸데없는 말이나 들어야 하다니요. 이 자리에 지금 방금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사람이 있다니요.” 곤경에 처한 의장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신사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사실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전능하신 여호와, 성부 하나님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일 가까이 나아가 대화를 나누었던 이사야 대언자는 지존하신 그분을 뵙고 목소리를 높여 “오 하나님, 하나님, 저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며 울부짖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자 엎어져 마치 돌처럼 굳어 그분께서 일으켜 주셔야만 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뵈었을 때 얼굴을 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렸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간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나 엎드려져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저는 티끌이고 재입니다. 부정한 사람이며 감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습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중략... 지금 많은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들이 손으로 만든 값싼 하나님이다. 다양한 신학적 사상과 성가대의 노래 또 설교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혼합물’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은 제일 중요한 명령이며 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회복될 때 더 많은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제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시켜가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시도는 그분이 받으실 영광을 사취하는 행위이며 결국 어떤 영혼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한다. 이 경우는 오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이상한 형태의 변절자를 양산하게 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기도 즉 첫 번째 공동체 기도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첫째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이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이 제일 먼저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제 대부분의 분야에서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복음주의가 타락하여 무늬만 성경적일 뿐 인본주의와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본주의자를 원하지 않는다. 성경적인 기독교를 원한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그 다음 인간에게 관심을 돌린다. 그러나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는 인간을 먼저 찾고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 관심을 돌린다. 우리는 기독교 본래의 자리를 회복해야한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인간에게 쏠려 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말, 인간들을 위한 행동에 빠져 있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제일 우선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오시며”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한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토록 압도적으로 나타나,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고 잘못된 것을 뒤엎으며 인간의 쓸데없는 우스갯소리와 자만심을 사라지게 하리라. 그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짖게 되리라. 이제, 기억하라. 당신이 원하는 모든 계획을 수립할 수 있고, 광고업자들의 도움과 최신 기계들을 활용해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분이 제일 먼저 영광을 받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목표, 바벨론 포로에서 교회가 석방되는 것 반드시, 두 번째로 기도해야 할 목표는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는 것이다. 오늘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는 총체적으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빠져 있다. 오순절교회, 근본주의 교회, 기독교 연합선교회 등 모든 교회가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당신이 속한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뿐이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있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 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셔서 마침내 회복시키실 때까지, 그들은 원래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이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조차 체대로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 즉 다시 태어난 복음주의 교회들 역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다. 거기서 그들의 생활 방식과 도덕관을 배우고 익히며 점차 그들이 파놓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교회가 이 세상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영적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이 작업이 완결되어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원래 있던 거룩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보좌에 앉으신 거룩한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신약 시대의 삶의 표준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복음주의가 아무리 진보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바벨론에서 더 많은 자녀들을 낳는 꼴밖에 안 된다. 개혁과 회복을 통해 우리가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장엄한 영광이 우리 위에 다시 임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태어나는 모든 자녀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바벨론에서 더 많은 유대인을 생산하고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는 셈이 된다. 기억하라! 우리가 회복되고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면 선교 사업조차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결국은 ‘열등한’ 기독교를 해외의 토양에 이식하는 행위가 될 테니까 말이다. 선교사들이여 명심하라! 당신은 당신 자신보다 더 뛰어난 어떤 인물을 결코 키워낼 수 없다. 성경에서도 “각각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싸구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선교사를 택해 선교지로 보내 보라. 그의 머리는 온통 천박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자신을 닮은 기독교인들을 양산할 것이다. 선교사가 하는 일은 고작해야 변질된 기독교를 그 나라에 이식하는 것이리라. 선교 차원을 넘어 전 세계에서 교회 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더 많은 선교사들이 양성되고 그들의 질적 수준 또한 높아져 결과적으로 ‘양질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하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은 “토저 목사님, 저는 그런 말을 처음 듣는데요. 그리스도인이면 다 똑같지 않은가요?” 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30배, 어떤 사람은 60배, 또 어떤 사람은 100배를 거두는 법이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라. 큰 별이 있는가 하면 작은 별도 있고 또 어떤 별은 망원경으로라야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너희 중 어떤 이는 육신에 속한 자이고 어떤 이는 영적인 자이다”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한다.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히5:12)   기독교 신앙은 고급 수준에 머물 수도 있고 적당하거나 평범한 수준 또 낮은 차원에 머물 수도 있다. 오늘 이 시대에 모든 성경학교나 크리스천 대학, 기독교 잡지, 성경연구 모임, 세미나 등을 살펴보라. 거기서 주창하는 기독교 신앙은 삼류 즉 타락한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 선조들이 알고 있었고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간직했던 그런 신앙이 아니다.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체험한 고급스럽고 거룩한 신앙, 하나님을 의식하는 겸손하고 은혜로우며 사랑이 넘치는 신앙 말이다. 명심하라! 우리가 개혁을 완수하기 전에 양산되는 모든 책들과 잡지 또 학교들은 부패한 교회에서 우글거리는 박테리아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기독교 연합선교회에서 출간하는 ‘연합회 증언’이라는 잡지는 책을 발간하는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편집장과 부편집장을 비롯한 모든 편집위원들이 타락한 이류급 기독교인들이라면 그 잡지는 이류급 잡지가 될 것이 뻔하고 또 실제로 그렇다. 만약 우리 모두가 원상태를 회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라디오나 텔레비전, 스포츠, 신문 잡지, 예를 들어 ‘라이프 잡지’나 ‘타임지’와 같은 매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말씀의 정확한 의미대로 성경적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과 나를 포함한 모든 교회와 잡지, 선교사들 또 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어 타락한 환경 속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떤 아이들은 태어날 때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산소를 공급받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또 어떤 아이들은 4.5kg의 몸무게로 마치 저항이라도 하듯 울부짖으며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아무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일을 떠맡게 된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다. 태어날 때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날 때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만 하는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태어나 나기도 전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각자 필요한 단계를 거치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사람들이 하나님을 노리갯감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이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 앞에 머리를 조아리도록, 그분께서 마땅히 전능자가 되시도록, 그렇게 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교회가 신약 교회의 패턴으로 회복되도록 말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위의 두 가지 목표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광인가. 사람의 인정인가? 사람들이 기도하는 동산 정원에는 뱀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자아’(self)라는 뱀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나무 근처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가 독을 발하여 기도를 망쳐 놓는다. 야고보서 4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 일을 하시기를 원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는가? 가령, 내가 무릎을 꿇고 금식까지 해가며 하나님께 “오, 하나님!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고 치자. 그런데 나는 이렇게 기도하며 그분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 보았는가? 이런 식의 기도는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의 일부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은 그분이 받으실 영광의 일정 부분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응답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그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편이 좋다.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느헤미야가 되기를 원하는 일이 가능하다. 바알의 대언자들이 패배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엘리야가 되어 많은 무리 앞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은근히 열망하는 일이 가능하다. 잘못된 것이 개혁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루터가 되어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이제 도우소서”라고 요청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나님의 군대가 승리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지휘관이 되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위 행렬 맨 앞에 서서 행진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교회가 사탄을 물리치기를 기도하며 정작 승리했을 때 우리가 열심히 싸운 덕분에 승리했다고 자랑하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회학교가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탁월한 주일학교 교사로 인정받아 “저분이 부장이셨을 때 숫자가 25명에서 39명으로 늘었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부탁하건데, 수준을 높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를 바란다. “오,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하소서. 나를 통해서든 아니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꼭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메노파 교도’(Mennonite, 16세기에 창시된 기독교 신교의 한 분파)를 사용해 영광을 받으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우리는 마치 내가 속한 단체가 쓰이는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또 진지하게 기도해야만 한다. 내 생각에 아마 여러분 중 몇몇 사람은 이런 관점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심장마비에 걸려 운동장에 나자빠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돼도 좋다.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만약 당신이 “오, 하나님!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아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차라리 ‘메리의 어린 양(Mart's little Lamb)노래의 가사를 거꾸로 부르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을 바꿔 어떤 단체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고 또 그분께서 누군가를 사용해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시면 반드시 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영성인가. 게으름인가? 여러분 중 약간 세련되었다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로 부흥의 물결이 밀려오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성도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실 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보다 영성이 부족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미리 짜놓은 계획에 맞춰 예배를 드리지만 자신들은 지난 수년 동안 최고의 예배를 구상하며 여러 가지 시도와 시행착오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영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성이 아니다. 단지 게으름일 뿐이다. 누군가 예배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설교 준비를 하지도 않으면서 성령님께 의지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그 속에 진리가 있지 않다. 나는 북미대륙에서 큰 교회 중 한 곳에서 설교했던 적이 있다. 교회 이름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혹시 누가 와서 묻는다 해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추측에 맡기고 싶다. 아무튼 그 교회의 주일 아침예배가 어떠했는지 아는가? 노상 집회였다. 약 3,500명이 운집한 길거리 모임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 교회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나와서 성경책 페이지를 홱 넘겨가면서, 그것도 차에 광택을 내거나 긴 낚시 여행을 마음껏 즐긴 후에 예배를 드린다고 나와서 최고의 예배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것을 ‘영성’ 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이 아니다.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나태와 무례함이다. 우리는 마땅히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교파, 성공회나 루터교 성직자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게 하신다 해도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자신은 무시당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전도자가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집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 그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기쁜 소식입니다. 이 지역에서 부흥 운동이 시작되고 있어요.” 그러자 전도자는 급히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제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그 운동을 잠시 중단시키시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나 실상 이것은 비극이다. 복음 전도자가 받을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도자는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당신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오? 어쨌든 영혼을 구원했지 않소?” 그렇다. 그 전도자는 바벨론에서 인큐베이터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다. 만약 그가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았더라면 그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필요조차 없는 몸무게 4.5kg의 건강한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을 것이고 그 아이들은 본래 태어났어야 할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하다. 어떻게 해서든 기독교로 개종만 하게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버리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오, 하나님! 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응답해 주소서. 우리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선교사들을 파송해 주소서. 만약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보다 다른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가 더 많게 하신다 해도 저는 만족합니다. 주님, 교회를 회복시켜 주소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축복하신다 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하기도 하고 다른 교회에 먼저 복을 주셔서 우리가 그 흐름에 따라가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꺼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벽돌 한 장을 놓게 하소서. 저는 그 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 주님께서 저를 도구로 쓰시면 좋고, 쓰지 않으신다 해도 주님께서 쓰시는 자를 적극 후원하겠나이다. 그를 사랑하고 질투하지 않으며 그를 위해 기도하겠나이다. 저는 무대 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겠습니다. 비록 그 일이 무미건조한 일이라 해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이렇게 기도할 자신이 있는가? “오,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걷어차여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자신이 속한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며, 몇몇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가 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정말 몸서리칠 일이다.  “오, 하나님!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교회에 복을 내려 주소서.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 교회 집사들이여, 진정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이다, 혹시 당신이 다른 도시로 이사가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기도에 ‘정가표’를 붙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회복시켜 사도행전에 나타난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쓰신다 해도 불평하지 않으리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몰리노스(1640-1697. 스페인의 신비주의자)가 한 말을 기억하라. “기도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지 못한다. 비록 사탄과 인간의 정욕이 방해한다 해도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잘못된 태도를 바로 잡으며 위축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품고 있는 몇 가지 영적 소신을 제시하였다. 나는 이렇게 믿고 선포한다. 기독교 연합선교회뿐 아니라 장로교회, 침례교회, 메노파교회, 독립교회 어디를 가든 감히 이렇게 외친다. 첫째,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은 소멸되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싸구려 신이 되어버렸고 무릎 꿇을 만한 가치도 없는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옷자락으로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계신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바르게 경배하고 예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교회는 신약 시대의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문제는 여러분께 맡기고 싶다. 만일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계속해서 세속적인 교회를 모방하고 복음주의 교회를 타락케 하며 청년 운동이나 주도한다면 또 이 단체가 세속적인 교회를 따라가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얼마 안 있어 타락한 준(準)자유주의자 계열에 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 우리가 위임받은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게 하리라. 여러분에게 기탄없이 말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21세 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앞으로 이 단체를 떠날 생각도 없다. 만약 떠나 있다면 결코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소속되어 활동하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한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단체가 ‘세속적’인 도구와 방법, 철학 또 관점에 완전히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좀 더 참아야 할지 혹시 내가 너무 인간적인 견지에서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한다. 만약 그분께서 우리 단체가 아닌 다른 단체를 통해 이 일을 수행하신다 해도 나는 “오 하나님! 어쨌든 그렇게 되게 해주소서. 되게 해주소서!”라고 간구하리라.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성령의 불이 내려올 때 불을 받고, 복이 임할 때 복을 받고,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때 회복되며, 에스라나 느헤미야와 같은 대언자가 무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 때 우리가 그 대상자 중에 포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열망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회복시켜 주실지 나는 모른다. 아직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이 시대의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대언자를 보내실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다. 아마 머리카락이 붉고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며 마치 택시의 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큰 귀가 삐죽 튀어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상 외로 소년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이 택한 사람을 예비시켜 놓았다가 그를 일으켜 회복 운동을 일으키시리라. 수십억이 드나드는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지 않고서도 부흥과 회복을 일으키시리라. “오 하나님! 택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쓰시기로 예비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오, 하나님!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복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또 저로 하여금 그 일부분이라도 감당하게 하소서. 그러나 하나님! 혹시 다른 사람을 통해 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 주소서. 오직 회복시켜 주소서.”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이다. 20,30대 많은 젊은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고 성경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영광을 목도한 적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하고 두렵게 나타나 참석자들이 말도 크게 못하는 그런 예배에 참석해 본 경험이 전혀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너무나 존귀하고 높으신 분이라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말하기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분으로 들은 적이 전혀 없다. 기독교 연합 선교회의 창시자인 심슨 목사가 뉴욕 주의 버팔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설교한 적이 있다. 이때 설교가 끝나고 모임을 마쳤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경외감을 느껴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오, 하나님!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자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소서.”
2009-07-17 14:33:23 | 관리자
신앙은? ● 토저 신앙은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덕이 아니다. 신앙은 검은 것은 희다고 믿도록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면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도록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능력이 아니다.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신앙은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대로 바꾸지 않으신다. 그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을 그 거룩한 지식에 조화 되도록 변화시킬 때 우리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선다.   토저의 ‘나는 가짜인가 진짜인가’ 책 중에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9:2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17 14:30:40 | 관리자
시간 문제가 아니라 변화   ● 토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오해 중에서 가장 유해한 것은 인간성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시간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혜롭지 못한 젊은이를 볼 때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저 사람이 지혜로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그가 성숙하게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자면 공간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 힘을 갖고 있지 않듯이 시간도 그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실로 시간은 우리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바보를 현인으로 죄인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 아니고 변화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것이다.   - 토저의 나는 가짜인가 진짜인가 중에서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9:2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17 14:29:47 | 관리자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 ● 김재근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의 언어가 아니라, 듣는 자의 언어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게 됨이 어찌된 일이냐?” [사도행전 2:7-8]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사도행전 2:11].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꾼들이 반드시 실행해야 할 좋은 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읽으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 군대 대장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진 후에, 바울 사도가 성난 군중 앞에서 히브리말로 설교하자, 그들은 한 동안 바울의 설교에 경청했습니다.  “그가 히브리말로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더욱 잠잠 하거늘…” [행 22:2]. 이것이 바로 듣는 자의 언어로 진리를 전파할 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한국에 온 지 8개월째를 접어드는 앳된 몰몬교 선교사와 짧은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혼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한 그의 ‘열정’과 ‘헌신’ 앞에 내 자신이 오히려 분노와 함께 비장함을 느꼈습니다. 그의 열정은 서투른 한국말로 이야기하기를 힘들어하지 않는 모습에 흠뻑 묻어났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도 자신의 확신을 전파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사실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만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순수한 교회의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주께서 맡기신 말씀을 주께서 보여주신 방법대로 전파하고자 전 생애를 걸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주님을 위한 삶이야말로 최고의 인생임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열정과 헌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 그는 버마에서 사역한 선교사로서 영어-버마어 사전 편찬에 힘썼고, 버마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버마에서 죽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 그는 중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중국말을 하며, 중국옷을 입고서 중국식으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머리를 밀고 ‘변발’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죽었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 그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 조선에 왔습니다. 그는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영어 문법책을 출판했으며,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왔던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을 향해서 병원 짓고, 학교만 세웠다고 비방하지만 그들을 능가하는 열정과 헌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윌리암 케리 : 그는 인도에서 사역한 인도선교의 아버지로서 수많은 인도 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 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지역 언어 문법책과 사전 편찬 작업에 수고 했습니다. 윌리암 카메룬 타운젠 :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현지인의 언어로 쓰인 성경이다. 성경은 선교사들처럼 안식년도 필요 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 받는 일도 없다.” 이와 같은 명언을 남긴 그는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중미 과테말라 지역의 한 인디언의 한 마디가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신네 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우리말도 모릅니까?” 많은 신자들이 존경하는 충성스러운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관심을 가졌고,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이 현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과 함께 현지 언어 사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말과 글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혼이 담겨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들은 선교 현장에 있는 영혼들을 향한 자신들의 사랑을 그들이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언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자기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헌신한 사람들을 잘 새겨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고린도전서 9:20]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7:59:2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7-17 14:25:49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8 ● 스콧 휴즈 지금까지 우리는 약 1년 반에 걸쳐 무신론적 진화론이나 균일론보다는 성경적 창조론이나 대격변론이 과학적 사실들을 훨씬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을 보았다. 우주의 무한한 변화, 복잡성, 그리고 질서는 놀라우신 설계자/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으며 그분의 존재를 입증해 주고 있다. 참된 과학은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설명을 지지하며 확증하고 있고 생물체 진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신론적 진화론 사상과 관련된 성경적 사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조차도 온 세상에 넓게 퍼져있는 진화론 사상에 의해 협박을 당하고 있으며 또 이에 현혹되어 자기들의 크리스천 믿음과 진화론을 타협하고 비성경적인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인 성경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성경적 설명과 진화론 사이에는 현저한 모순이 매우 많다는 것을 인식한 채, 하나님께 헌신한 성경 신자들은 진화론 사상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개념은 서로 호환될 수 없으며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다. 다음의 표는 성경의 창조와 진화론이 서로 타협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성경적 창조론 인본주의적 진화론 1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다(창1). 자연적이며 우연한 선택 과정이 모든 것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2 세상은 지금부터 6,000년 전에 문자 그대로 6일 간에 창조되었다(창1). 세상은 매우 긴 시간(약 40 ~100억 년)에 걸쳐 진화되었다. 3 창조는 완전히 이루어졌으며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창2:3). 창조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4 바다가 땅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2). 땅이 바다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5 두 수권들(hydrospheres) 사이에 대기가 있었다(창1:7). 대기와 수권이 접해 있었다.   6 최초의 생명체는 땅에 있었다(창 1:11). 생명체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7 최초의 생물은 육상 식물이었다(창1:11). 수생 유기체가 처음으로 진화되었다. 8 지구가 태양과 별들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14~19). 태양과 별들이 지구보다 먼저 있었다. 9 과수(果樹)가 물고기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11, 20-21). 물고기가 과수보다 먼저 있었다. 10 모든 별이 넷째 날에 창조되었다(창1:16). 별들은 각각 다른 시대에 진화되었다. 11 새들과 물고기들은 다섯째 날에 창조되었다(창1:20~21). 물고기는 새가 나타나기 수백만 년 전에 진화되었다. 12 새들이 곤충보다 먼저 있었다(창1:20-31; 레11장). 곤충이 새보다 먼저 진화되었다.     성경적 창조론 인본주의적 진화론 13 고래가 파충류보다 먼저 창조되었다(창1:20-31). 파충류가 고래보다 먼저 진화되었다. 14 조류 다음에 파충류가 있었다(창1:20-31). 파충류 다음에 조류가 있었다. 15 사람이 창조된 후에 비가 내렸다(창2:5). 비가 사람보다 먼저 있었다. 16 남자 다음에 여자가 창조되었다(창2:21~22). 유전학에 따르자면, 여자 다음에 남자가 생겼다. 17 빛이 창조되고 그 뒤에 태양이 만들어졌다(창1:3~19). 태양이 만들어진 후 빛이 나왔다. 18 식물이 창조된 후 태양이 창조되었다(창1:11~19). 태양이 형성된 후 식물이 나타났다. 19 풍부하고 다양한 수생식물이 일시에 모두 창조되었다(창1:20~21). 수생물체는 초기의 단일 유기체로부터 점차로 진화되었다. 20 사람의 몸이 땅의 흙으로부터 창조되었다(창2:9).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 21 사람에게는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는 권리가 있다(창1:28). 대부분의 생명체는 인간이 진화되기 이전에 멸종되었다. 22 인간의 식성은 본래 초식이었다(창1:29). 인간의 식성은 본래 육식이었다. 23 완전히 결정되어 구별되는 종류들이 있었다(창1:11-12, 21, 24-25; 고전 15:38~39). 생명체의 형태는 계속해서 변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24 인간의 원죄는 죽음을 가져왔다(롬5:12). 투쟁과 죽음은 인간이 진화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이 같이 직접적으로 모순이 되는 것들 외에도, 무신론적 진화론과 성경적 기독교 사이에는 일반적 원리에 있어서도 확실한 차이점들이 있다.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8). 진화론의 열매는 마귀가 주관하는 이 세상 시스템에서 여러 가지 믿음과 행위로 나타났다. 진화론은 히틀러의 나치즘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지적/철학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 암처럼 널리 퍼져있는 상대주의윤리를 위한 기초를 확립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도, 무신론, 세속적 인본주의, 그리고 성도덕상의 자유주의를 촉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로 인류의 일반적 복지와 정신문화는 이러한 자연주의/인본주의 철학이 생산한 결과로 인해 큰 피해를 받아 왔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책임 있는 창조물이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동기에 대하여 창조주 앞에서 답변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아무런 목적도 없는 진화 과정에 의해 생긴 생산물로 간주하게 되면 사람은 모든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면제받게 되며, 이 경우에 사람은 단순히 자연에서 우연히 생겨난 한 생산물이 되며 기껏 해 봐야 지적 동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악한 행동이, 그가 예전에 동물이었으며 아직도 그 속성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온 인류가 계속해서 이러한 논리로 치닫는다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그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 곧 그 자신만이 소유한 유일한 능력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도덕적 개혁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람의 본성은 사람이 만든 어떤 외부적인 것에 의해 바뀔 수 없으며, 오직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바로잡아 줄 내면의 변화가 있어야만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요3:3-7) 진화론은 특히 윤리와 도덕이라는 영역에서 사람의 마음을 타락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에서 잘 드러난 성경적 윤리는 틀림없이 모든 윤리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 그러나 우연함/무질서의 진화 과정이 우리의 창조주라면 윤리의 절대성에 대해 전 우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시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신윤리(新倫理), 좀 더 정확하게 이름을 붙이자면 ‘윤리 부재’는 생명체의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사상/철학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현대 윤리의 타락이 진화론 사상의 출현과 때를 같이하여 발생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오늘날 온 세상에 널리 파급되고 있는 윤리 붕괴 현상은 모든 윤리 기준을 휩쓸어버리고 있는 체계, 즉 진화론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같이 한탄할 수밖에 없는 악한 추세를 해결할 수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순수와 회개와 성경적 표준과 원리로 되돌아가려는 진정한 마음 자세를 갖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진화론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많은 난제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깊이 생각해 본 문제들만으로도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모든 형태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거절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무신론적 진화론과 타협하고자 하여 개발된 유신론적 진화론은 결코 성경적 기독교와 화해할 수도 없으며 화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최종 결론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모든 생물체가 우연의 과정 속에서 진화했다는 관점과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한 설계에 의해 종류마다 독특하게 창조되었다는 관점이 있으며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철학적/신학적 개념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생명의 기원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관찰이나 실험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진화론과 성경적 창조론은 둘 다 과학적 실험에 의해서 그 사실 여부를 증명할 수 없는 그런 개념들이다. 이 두 개념은 한결 같이 믿음의 문제이지 결코 과학의 문제가 아니며 종의 기원에 대한 종교적 철학이며, 따라서 믿음을 요구한다. 사실 진화론의 경우에는 ‘믿음’이라는 말보다 ‘쉽사리 믿는 성질’(경신, 輕信)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와이송 박사가 관찰한 바와 같이, 이 같은 정의는 특별히 진화론에 더 적합하다. 실로 진화론은 많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우연에 의해 무엇인가가 형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타파해 버리는 L-단백질이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믿음, 자연적으로 발생하게 내버려두었더라면 대혼란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을 DNA 암호들이 진화에 유리하게 형성되었다는 믿음, 진화론자들이 모든 생명체의 화학적 조상으로 여기고 있는 아미노산 등을 마구잡이로 파괴시키고 말았을 초기의 불리한 지구 환경이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믿음, 자연적으로 생물이 발생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열역학의 법칙들을 포함한 대자연계의 법칙들이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믿음, 실제로 진화론자들에게 항상 더 많은 문제만 가져다주는 과학의 진보들이 이제는 진화에 유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 무자비하게도 오직 두 개의 이야기, 곧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확신시켜주는 이야기만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확률이 이번에는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믿음, 고정된 종류들이 시간에 따라 변해서 진화론을 확증해 줄 것이라는 믿음, 진화론자들에게 이중의 부정 효과를 가져다주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이번에는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믿음, 시대를 통해 동식물의 종류들이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음을 잘 보여 주며 또한 과도기 중간연결고리를 전혀 보여 주지 않고 오직 전 세계적 대홍수가 있었음을 잘 증언하고 있는 화석들이 언젠가는 진화에 대해 유리한 증언을 하리라는 믿음, 언제나 파멸과 붕괴만을 가져오는 시간이라는 인자가 언젠가는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라는 믿음 등. 중고등학교 교과서 등에서 과학적이며 확고히 정립된 사실로 묘사되어 온 것과는 달리, 실제로 진화론은 비이성적이며 셀 수 없이 많은 과학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가설이다. 반면에 성경적 창조론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과학적 사실들과 일치하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성경적 기독교에 대한 지적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인상적이고도 확실한 과학적 증거는 참으로 많다. 진화론은 최근 몇 해 동안 우리 사회에 큰 문젯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도덕적 타락과 실로 깊은 관련이 있다. 무신론적 진화론을 추종하는 믿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창조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거부했으며 또한 성경 자체의 메시지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었다. 여기에 바로 사탄의 속임수라는 아주 심각한 위협이 놓여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주의적 진화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구상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불필요한 존재임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혀 소망 없는 미래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6:25) 그러나 성경이 전해주는 소식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된 소식이다. 바로 이 복음 안에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 그리고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확실한 영생의 약속들이 들어 있다(요3:6). 이제 진화론의 붕괴는 엄연한 사실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크리스천들의 연구 조사를 통해 과학적인 것으로 입증된 성경적 사실들은 마침내 생명체의 진화라는 마귀의 피상적 속임수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이 시점에서 사실에 입각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적 기독교의 타당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올바른 변명 거리가 되지 못한다. 성경적 창조와 대격변론을 지지하는 증거는 너무나 풍부하다. 따라서 이런 사실들을 거부하는 것은 잘 알지 못해서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를 따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로 많은 이들이 “나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믿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 성경적 기독교에 여러 가지 지적 난제들이 많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항하려 하는 그들의 도덕적 반항을 감추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글을 맺기 전에 나는 ‘벌거벗은 임금님’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려 한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그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경쟁을 해가면서 그 재단사가 임금님의 옷을 참으로 훌륭하게 만들었다고 격찬만 했다. 그러나 한 순진한 어린아이는 “임금님은 벌거벗고 있어요.”라고 단순하게 사실을 말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님이 바로 진화론과 비슷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 격찬을 늘어놓지만 실제로 진화론은 아무 것도 없이 벌거벗은 채 우리 눈앞에 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사람들이 진화론의 붕괴를 알리지 않으면 짐승들이 이를 알릴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짐승들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너를 가르치리라. 공중의 날짐승들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일러주리라. 혹은 땅에게 말하라. 땅이 너를 가르치리라. 바다의 물고기들도 네게 밝히 알려주리라. 이 모든 것 중에 어느 것이 주의 손이 이 일을 이루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호흡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욥12:7-10) 이 글을 끝내면서, 파스칼의 ‘유명한 내기’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한 수학자요, 물리학자였던 파스칼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든지 혹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만일 당신이 이 내기에서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쪽에 당신의 삶 전체를 건다면, 그리고 당신이 옳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혹시라도 당신이 틀린다 해도 당신은 결코 아무 것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즉, 밑져야 본전인 셈이다. 한편 당신이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만일 당신이 옳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더욱이 당신이 옳지 않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즉, 이 경우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손해인 경우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지금도 당신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잃고자 하는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기 바란다.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실수투성이 개념들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안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바로 오늘 이 시간에 독자께서 시간과 그 외의 모든 것을 초월하시며 변치 아니하시는 여러분의 창조주/구원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자로 맞아들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13:8).
2009-07-17 14:19:30 | 관리자
진화론의 붕괴 17 ● 스콧 휴즈 과학자들은 모두 진화론을 믿는가?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생물체의 진화를 믿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또한 학위나 지위 등과 상관없이 진화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진짜 과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진화론자들은 창조주의 그 자체를 모순이 가득한 자가당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같이 오만하고 편견이 심한 견해는 완전히 거짓이며 누구나 쉽게 논박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과거의 위대한 선구자적 과학자들이 성경을 믿는 창조론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위대한 사람들의 명단을 일부만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아가씨즈(Louis Agassiz), 베이컨(Francis Bacon), 보일(Robert Boyle), 쿠비어(George Cuvier), 파브르(Henri Fabre), 패러데이(Michael Faraday), 플레밍(John Ambrose Flemming), 허쉘(William Herschel), 주울(James Joule), 켈빈(Lord Kelvin), 케플러(Johannes Kepler), 린네(Carolus Linnaeus), 리스터(Joseph Lister), 맥스웰(James Maxwell), 멘델(Gregor Mendal), 모오스(Samuel F.B.Morse), 뉴턴(Isaac Newton), 파스칼(Blaise Pascal), 파스퇴르(Louis Pasteur), 레일레이(Lord Rayleigh), 다빈치(Leonardo Davinci) 등. 오늘날에도 성경적 창조론을 믿으면서도 과학의 여러 영역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과학자들이 수없이 많다. 이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많은 수의 창조과학 연구회가 전 세계적으로 발족되어 큰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오늘날에는 크게 촉망받는 과학자들의 상당수가 생물체의 진화론을 완전히 내버리고 성경적 창조론을 선호하고 있다. 다우화학회사(Dow Chemical Company)에서 기초 연구와 핵 연구 책임자로 일하는 그레베(John Grebe) 박사는 진화를 증명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를 단 하나만이라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상금으로 1,000달러를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레베 박사의 도전은 결코 경솔하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다. 그에 대한 신용장은 실로 굉장히 인상적이다. 그는 100개 이상의 특허와 스타이로폼, 합성 고무, 합성 섬유 그리고 ‘사란 랩’(Saran Wrap) 등의 개발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물론 이에 대해 반응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페니실린을 개발하여 1945년에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았던 체인 경(Sir Ernest Chain)은 최근에 이렇게 진술했다. “적자의 생존과 발전이 전적으로 우연한 돌연변이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전혀 증거가 없는 주장이며 사실과도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진화론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미묘한 사실들의 많은 부분을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오랫동안 수많은 과학자들이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런 이론들을 쉽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나는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971년에 과학 부분에서 노벨상을 받은 게이버(Dennis Gabor)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이 무작위 돌연변이에 의해 진보되었다는 것을 결코 믿을 수 없다.” 영국 박물관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석학자인 에더리지(Dr. Etheridge)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화론자가 주장하는 내용 중의 십중팔구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며, 관찰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사실들에 의해 지지를 받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이 박물관은 그들의 관점이 터무니없음을 증명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이 큰 박물관 안에는 여러 종이 상호간에 돌연변이 과정을 겪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단 한 개도 없다.” 엘란겐 대학의 플라이쉬만(Albert Fleischmann)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진화론을 이미 한물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1830년 이래로 어렵게 성취된 해부학, 조직학, 세포학, 그리고 발생학에 대한 지식이 진화론의 기본 개념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 근거 없는 환상적 건축물인 진화론의 이론들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고 있는 본능 곧 헛된 신화를 사랑하는 본능이 없었더라면 이미 오래 전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 미국 우주 항공 연구소(NASA)에서 우주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폰 브라운 박사(Dr. Wernher von Braun)는 1972년 9월 14일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교육 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그로스 씨: 저는 온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의 기원에 대한 창조론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인가에 대해 제 의견을 진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저는 다음과 같은 점을 기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창조라는 것이 어느 누군가가 설계하지 않았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법칙과 질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모든 것 뒤에 반드시 설계와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는 질서 정연하며 잘 짜인 계획이나 록은 설계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식물의 각 종류가 살아남으려 하며 계속해서 퍼져나가려 하는 것을 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 볼 수도 없을 정도의 규모로 역사하고 있는 강력한 힘 앞에 겸손해 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조그만 씨를 아름다운 꽃으로 발전하게 해 주는 질서 즉 대자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목적으로 가득한 질서에 의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주와 그 안에 거하는 만물의 기묘함을 더 많이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모든 것 밑에 깔려 있는 내적 설계를 보고 더욱더 놀라게 됩니다. 온 우주가 처음부터 설계되어 창조되었다는 생각을 정리해보면, 결국 우리는 과학의 영역 밖에 어떤 설계자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과학적 방법은, 온 우주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처음부터 어떤 설계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는 자료들을 우리가 배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겼다.” 라는 단 하나의 결론만을 믿도록 강요하는 것은 과학 그 자체의 객관성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온 우주가 어떤 비규칙적 과정으로부터 진화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의 뇌나 눈과 같이 고도로 정밀한 기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비규칙적 과정은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우주의 설계자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발견하는 많은 기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과학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많은 해답을 주었으므로 언젠가는 그 위대한 설계자의 의도나 목적이 없이도 대자연의 기본적 법칙들에 대한 창조를 우리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과학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나 있는 태양을 보기 위해서 촛불을 켜야만 한단 말입니까? 지적이며 훌륭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설계자를 그려 보여 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과연 물리학자가 전자를 그려낼 수 있단 말입니까? 전자는 너무나 작아서 물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는 그 효과를 이용해서 불을 밝히기도 하고 밤중에 비행기를 안내하기도 하며 매우 정확한 것을 측정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우주에 설계자가 존재함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창조주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물리학자가 있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아무도 생각해 볼 수 없는 전자들이 실제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전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들이 다른 분야로부터 매우 제한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와서 전자에 대한 참으로 엉성한 기계적 모델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한된 자료로 전자에 대한 엉성한 모델을 만들어온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모델 즉 창조론 같은 모델에 대해서는 알려고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위에서 설계자라는 측면에 대해 조금 길게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실 사람들이 - 혹은 과학자들이 - ‘설계에 의한 창조’를 현재 유행하고 있는 ‘우연에 의한 진화’에 대한 과학적 대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요 이유는 그들이 마음속에서 그 설계자/창조자를 생각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한계를 초월하는 어떤 최종적인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지금까지 우리가 관찰한 자료들간의 상호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고 저는 생각하며 그래서 매우 유용하게 무엇인가를 예측하게 해 주는 어떤 이론을 배제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NASA -미국 우주항공국- 에 근무하는 우리는 달에 보낸 아폴로 우주선이 그토록 놀랍게 성공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변해 줄 것을 종종 요청 받곤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변이란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간과하려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가장 적절한 대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이 같은 과학적 정직성의 관점에서, 저는 학생들이 과학 시간에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기원에 대한 다른 이론들 즉 진화론과는 전혀 다른 이론들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 우주가 우연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계획에 의해 생겼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참으로 큰 실수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재배(再拜)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28권으로 구성된 「동물학의 속성」이라는 책을 편집했고,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회장을 역임했던 그래스(Pierre P. Grasse)는 프랑스 동물학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살아 있는 세계에 대한 그의 지식은 참으로 백과사전처럼 많았는데 그는 진화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생물학적 진화에 관한 주석 및 교리들은 날카로운 비평 앞에 살아남을 수 없다.”(「살아있는 생명체의 진화」) 프랑스 지질학회의 회장이며 한 백과사전의 편집자이고 파리 자연사 박물관 원장이기도 한 레모인(P. Lemoine)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심각한 속임수에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진화론은 이 세상이 계속해서 가르쳐온 인본주의적 교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전문분야에서, 식물학자든 동물학자든, 어느 누구도 생물체 진화에 대한 어떤 이론도 적합하지 못함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화론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는 진화론의 사상을 완전히 거부하는 현시대의 다른 과학자들을 더 많이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으로도 성경을 믿는 과학자들이 거짓 과학을 유포하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논박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획기적 진보, 발견, 그리고 발명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과서 등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위대한 과학적 지성인들의 상당수가 성경을 믿는 창조론자들이었고, 지금도 이들은 과학적으로 이미 붕괴된 진화론의 사상을 완전히 거부하며 조롱하고 있다.
2009-07-17 14:16:2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