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42절: 베드로는 “반석”이 아니라 “작은 돌멩이”
로마 카톨릭교회는 베드로를 교황의 기초, 즉 **"반석(the Rock)"**이라 주장하며 모든 교황직의 정당성을 그에게서 끌어오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를 반석이 아닌 **“작은 돌, 하나의 돌멩이(a stone)”**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 주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1장 42절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Thou shalt be called Cephas, which is by interpretation, A stone.”
“네가 게바라 불리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이름은 **헬라어로 ‘Πέτρος (Petros)’**이며, 이는 “하나의 돌멩이”(a small stone) 라는 뜻입니다.
즉, 시몬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많은 돌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2. NIV와 개역성경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You will be called Cephas” (which, when translated, is Peter).
여기서 “a stone”이라는 번역의 본뜻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단지 **이름(Peter)**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도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라고만 번역하여 그 이름의 의미를 생략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천주교의 교황 수위권 교리를 정당화하려는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단지 “돌멩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는 변개입니다.
3. 성경이 말하는 반석은 누구인가?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반석은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4)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의 터가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 2:20)
따라서 **“작은 돌”(Petros)인 베드로)**는 교회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위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초(반석, Petra)가 아닙니다.
4. 사본 문제: 왜 이런 변개가 생겼는가?
이처럼 이름의 뜻이 분명히 기록된 **공인본문(Textus Receptus)**에는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니라(a stone)”
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역본들이 따르는 **소수사본(Nestle-Aland/UBS)**은 이 의미를 감추고 단순히 “베드로”라고만 번역하여
베드로의 지위가 높아 보이도록 의도된 누락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천주교 사본의 영향 아래에서
교황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는 작은 돌멩이
예수님은 결코 베드로를 반석으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반석이며, 교회의 머리요 기초이십니다.
베드로는 한 사람의 사도, 교회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믿어야 하며,
소수 부패 사본에 따라 조작된 현대역본들의 흐림과 왜곡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게바라 불리리라.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니라.” (요한복음 1:42, KJV)
“다른 터는 아무도 놓을 수 없나니 오직 놓인 그것 외에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전 3:11, KJV)
이 말씀 그대로, 우리의 믿음은 사람 위에 세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2025-05-19 21:24:44 | 관리자
누가복음 1장 28절: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를 삭제한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복음 1장 28절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한 인사말을 기록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마리아가 특별한 은혜를 입었지만, 여자들 중 하나일 뿐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과 NIV 등 현대역본들은 이 중요한 표현을 아예 삭제해 버렸습니다.
1. KJV은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KJV (킹제임스 성경)
"Blessed art thou among women."
“네가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마리아가 특별한 사명을 맡았지만,
그녀가 다른 여인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거나 신성한 존재가 아님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즉, 그녀는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는 한 사람"일 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선택된 여인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NIV와 개역성경은 무엇을 삭제했는가?
NIV:
“Greetings, you who are highly favored! The Lord is with you.”
여기서 “Blessed art thou among women”(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라는 말은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개역성경도 동일하게 이 표현을 누락하고 있습니다.
3. 왜 이 구절이 중요한가?
이 표현은 마리아의 인성을 강조하는 핵심 진술입니다.
성경은 마리아를 "은혜를 입은 자"로 소개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단지 여자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삭제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카톨릭의 마리아 무염 시태설(Mary’s Immaculate Conception), 즉 마리아가 원죄 없이 수태되었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본문이 흐려집니다.
마리아가 일반 여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처럼 보이도록 유도합니다.
결과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마리아에 대한 성경적 균형이 무너지고,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 교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4. 본문 비평과 사본 문제
그리스어 공인본문(Textus Receptus)에는 이 표현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εὐλογημένη σὺ ἐν γυναιξίν”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estle-Aland (UBS) 비평 본문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된 형태로 편집되어 있으며,
이것이 바로 현대역본들이 본문에서 이 구절을 누락시킨 이유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단순한 번역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본문(사본)에 근거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며,
그 기저에는 **로마 카톨릭이 중심이 된 "소수사본의 부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결론: 마리아는 여인들 중 하나일 뿐,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성경은 마리아를 존중하되, 결코 숭배하거나 신격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 사용된 순종하는 한 사람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명을 감당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들 가운데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다른 여인들과 구별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는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현대역본들은
결국 마리아 숭배를 부추기는 카톨릭 교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성경을 흐려놓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리적 변개에 속지 않고,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KJV)**을 신뢰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2025-05-19 21:20:30 | 관리자
고린도전서 10장 28절: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를 지운 현대 성경 – 누구를 위한 삭제인가?
고린도전서 10장 28절은 그리스도인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역본들(NIV, 개역성경 등)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
바로 “우상들(unto idols)”이라는 구절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였습니다.
이 삭제는 단순한 축약이나 의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히 경고하신 "우상 숭배의 죄"를 흐리게 만들고,
그리스도인의 분리된 삶의 원칙을 무력화시키는 중대한 왜곡입니다.
1. KJV의 정확한 번역: 우상에게 바친 희생물
킹제임스 성경(KJV):
“But if any man say unto you, This is offered in sacrifice unto idols, eat not…”
그리스어 원문(TR):
Toῦτο εἰδωλόθυτόν ἐστι – “이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다”
➡️ 여기서 사용된 단어 **εἰδωλόθυτόν (eidolothuton)**은
**'eidolon'(우상) + 'thuo'(희생하다)**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우상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단 10번만 사용되며,
모두 우상 숭배와 관련된 경고의 맥락 안에서 등장합니다.
2. NIV와 개역성경은 어떻게 바꾸었나?
NIV:
“If someone says to you, ‘This has been offered in sacrifice,’ then do not eat it…”
개역성경:
“누가 이것이 제물이라고 말하거든… 먹지 말라”
이 구절들에서는 “우상”이라는 핵심 단어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는 문맥상 ‘희생물’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인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성도는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기준과 신앙적 선을 잃게 되는 셈입니다.
3. 왜 이 삭제가 심각한가?
(1) 로마 카톨릭 교리와의 충돌 회피
로마 카톨릭은 성당 안에 수많은 성상과 형상, 그리고 미사에서 드리는 희생제사 등을 유지합니다.
이러한 이교도적 형상 숭배와 제의적 구조가 신약성경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NIV를 포함한 현대 역본은 이런 불편한 진리를 “순화된 표현”으로 감추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성도들의 경계심을 무디게 함
“우상들에게 바친 것”이란 표현은
명확히 영적 분리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사라짐으로써 세속 문화, 이교 의식, 또는 종교 혼합주의와의 선이 희미해지고,
오늘날 종교 간 통합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논리를 뒷받침하게 됩니다.
4. 사본 증거는 무엇을 말하는가?
흥미롭게도 이 구절은 비평 본문인 네슬레-알란트(UBS)조차도
고대 사본 29개가 “우상에게 바친 것”이라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시내 사본조차 해당 표현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번역자들은 이 내용을 고의적으로 삭제한 것입니다.
결론: “우상”을 지운 성경은 경건한 경계심을 제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정보 전달이 아니라,
성도를 죄로부터 분리시키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 숭배로부터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령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우상들과 아무 상관도 말라.” (고전 10:14)
성경에서 ‘우상’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성도들은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올바른 본문에 근거한 올바른 성경 번역,
즉 **킹제임스 성경(KJV)**과 같은 정확하고 보존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분하고,
참된 거룩함 안에서 살게 하는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2025-05-19 21:15:43 | 관리자
마태복음 25장 31절: “거룩한”을 삭제한 현대 역본들 –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들, 성령님, 대언자들, 성도들도 그분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로서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NIV, 개역성경 등)은 이 거룩함의 표현을 곳곳에서 삭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과 존재들의 영적 위상을 낮추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 전체에 대한 경외심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1. 거룩한 천사들이 그냥 ‘천사들’이 되다 (마태복음 25:31)
KJV: “사람의 아들이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NIV/개역: “모든 천사들”
천사들조차 ‘거룩함’을 빼앗김으로써,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과의 구별이 모호해집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과 함께 오실 하늘의 순결한 군대에 대한 묘사를 약화시킵니다.
2. 성령님이 ‘영’으로 격하되다 (요7:39, 행8:18, 고전2:13)
KJV: “Holy Ghost(거룩한 영)”
NIV/개역: 단순히 “영”
성령님을 단순한 비인격적 개념처럼 만들며,
삼위일체 중 제3위 하나님이심을 약화시키는 위험한 번역입니다.
NIV는 총 3군데에서 “Holy”를 생략하여 성령님의 신성과 구별성을 훼손합니다.
3. 집사들에서 성령 충만이 삭제되다 (사도행전 6:3)
KJV: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이 충만한 일곱 사람”
NIV/개역: “영이 충만한 일곱 사람”
KJV는 성령님의 거룩함과 신성을 드러내지만,
현대 역본은 애매한 ‘영적 태도’ 정도로 축소하여 성령의 인격성과 구별성을 흐립니다.
4. 과부들이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는 점이 무시됨 (고전 7:34)
KJV: “그녀는 거룩하게 주를 위해 자신을 구별하려 하며”
NIV/개역: “주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려 하며” (거룩 누락)
여기서도 ‘거룩함’이라는 성도 개인의 삶의 방향성이 사라지고,
단순한 ‘헌신’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대체되어 성화의 핵심 개념이 약화됩니다.
5. 형제들이 거룩하지 않게 되다 (살전 5:27)
KJV: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 이 편지를 읽게 하라”
NIV/개역: “모든 형제들에게”
이는 교회 공동체 안의 구별된 성도들이라는 인식 자체를 지워버리고,
단순히 ‘같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 수준으로 격하시킵니다.
6. 성경 저자들의 신적 사명을 희석시킴 (벧후 1:21)
KJV: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말함”
NIV/개역: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말함” (거룩 삭제)
이로써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사용하신 영감 받은 사람들에 대한 표현이 사라지며,
결과적으로 성경 무오성과 신적 기원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7. 거룩한 대언자들이 그냥 ‘대언자들’이 됨 (계22:6)
KJV: “그분께서 거룩한 대언자들의 영들에게 보내셨느니라”
NIV/개역: “대언자들”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에 부름 받은 자들의 거룩함과 위임받은 권위가 희석됩니다.
8. 왜 “거룩함”을 싫어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즉, 거룩한 성도들, 거룩한 대언자들, 거룩한 천사들—이 존재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며, 사탄은 그 속성을 지운 성경을 좋아합니다.
결론: 거룩함이 없는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반영하지 못한다
성경은 말합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벧전 1:16)
“너희는 진리로 너희 자신을 거룩히 하라.” (요 17:17)
“거룩함”을 반복적으로 지운 성경은 성도들에게 ‘거룩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조차 흐리게 합니다.
이는 단지 단어 몇 개의 삭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부르신 자들에 대한 전체적 관점을 뒤흔드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KJV)처럼 거룩함을 온전히 보존한 성경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함 없는 신앙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2025-05-19 21:11:46 | 관리자
마태복음 15장 19절: 신성모독을 비방 혹은 훼방으로 바꿈
신성 모독을 “비방” 혹은 훼방으로 바꾸는 것이 왜 심각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NIV, 개역성경 등의 현대 역본들은,
성경에서 가장 무겁게 다뤄지는 죄 중 하나인 **“신성 모독(blasphemy)”**을
단순한 “비방(slander)” 혹은 **“모욕(insult)”**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런 번역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성 모독”은 사람에 대한 비난이나 중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엄청난 죄이기 때문입니다.
1. “비방”(훼방)과 “신성 모독”은 완전히 다르다
**비방(slander)**은 사람을 향한 악의적 언어나 모욕입니다.
예: “그는 나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신성 모독(blasphemy)**은 하나님에 대한 조롱,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과 행동,
또는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 서거나 하나님의 속성을 침범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신성 모독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악한 말을 하거나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2. 현대 역본들은 왜 “신성 모독”을 삭제하거나 바꾸는가?
현대 역본, 특히 NIV와 개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신성 모독”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비방” 혹은 “욕”**으로 변개하고 있습니다:
구절KJVNIV / 개역성경
마 15:19blasphemies (신성 모독)slander (비방)
막 7:22blasphemy (신성 모독)slander (비방)
골 3:8blasphemy (신성 모독)slander (비방)
딤후 3:2blasphemers (신성 모독하는 자들)abusive (학대하는 자들)
딛 2:5that the word of God be not blasphemedthat the word of God be not maligned (비방 받지 않게)
계 2:9I know the blasphemyI know the slander
이 외에도 총 58회 등장하는 “blasphemy”라는 단어가 NIV에는 39회로 줄어들며,
나머지는 모두 비방(훼방), 욕, 모욕, 중상, 험담 등으로 바뀌어 본래 의미를 약화시킵니다.
3. 왜 “신성 모독”이라는 단어가 중요할까?
성경은 신성 모독을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 (막 3:29)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라” (레 24:16)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며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 16:9)
이처럼 신성 모독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도 묘사되며,
성경 전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외하라는 명령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은 이를 단순한 인간관계의 말싸움처럼 축소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무너뜨리고, 죄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4. 왜 KJV는 신성 모독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가?
킹제임스 성경(KJV)은 ‘blasphemy’라는 단어를 모든 구절에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그 죄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악행임을 명백히 합니다.
KJV는 신성 모독을 죄로 여기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NIV는 그에 반해, 신성 모독이라는 죄의 개념을 사람들 눈에 사라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를 사람들과 동등하게 다루는 방향으로 번역해 갑니다.
결론: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는 자는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지 않는다
현대 역본들이 “신성 모독”을 애매한 “비방”으로 바꾸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고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경각심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들은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 (약 2:7)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딛 2:5)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믿음,
그분의 속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번역,
이 모든 것을 보존하고 있는 성경은 바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2025-05-19 21:07:01 | 관리자
디모데후서 3장 17절: NIV는 완전함을 제거한다.
왜 현대 성경들은 성도들의 "완전함"을 가로막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진리입니다.
특히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은 성경의 목적을 명확하게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성경은 교리와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perfect)”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읽는 현대 역본, 예를 들어 NIV, 공동번역, 가톨릭 성경 등은 **“perfect”(완전하게)**라는 단어를 삭제하거나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1. 성도들이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막는 성경?
킹제임스 성경(KJV)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That 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디모데후서 3: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NIV와 공동번역은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 “하나님의 사람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도록”
(단, “perfect”라는 핵심 단어는 생략됨)
즉,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성경의 의도가,
현대 역본들에서는 삭제되어 버린 것입니다.
2. 왜 "perfect"는 중요한가?
그리스어 원문에서 "perfect"로 번역된 단어는 **“ἄρτιος (artios)”**로,
‘완전하게, 온전하게, 충분하게 갖추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단지 기술적 능력만 갖춘 상태가 아니라,
영적 성숙, 도덕적 온전함,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한 자로 자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현대 역본들은 이 단어를 일부러 생략하거나,
단순히 “준비됨”이나 “훈련됨” 정도로 약화시켜버립니다.
이것은 신약 전체가 강조하는 **“완전함을 향한 성도의 성장”**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3.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명령한다
성경은 명백히, 성도들이 “완전하게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마 5:48)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어…” (엡 4:13)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하게 제시하고자 하노라.” (골 1:28)
이처럼, “완전함(perfection)”은 단지 이상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실제 목표입니다.
성경의 목적은 단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4. 왜 현대 역본들은 “완전함”을 싫어하는가?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네슬레/알란트 사본들, 그리고 그것을 따른 NIV·공동번역·가톨릭 성경은 성도들의 **성화(聖化)**와 **성숙(成熟)**이라는 교리를 점점 모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완전함”이 요구되면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
말씀을 통한 꾸짖음과 순종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복음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뉴에이지 흐름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성숙보다는 심리적 안정,
순종보다는 자존감,
거룩함보다는 행복을 추구합니다.
결론: “완전함”이 제거된 성경은 불완전한 성경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역본들은 이 중요한 목표를 축소하고 삭제함으로써
성도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7, KJV)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은, 온전한 말씀을 통해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킹제임스 성경(KJV)**이야말로 온전한 본문을 보존하고 있다는 확증이 됩니다.
2025-05-19 21:00:47 | 관리자
스펄전 목사와 영국개역성경(1881): 성경을 훼손하는 시대를 향한 예언적 경고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복음주의 설교자요, 개혁신학에 뿌리를 둔 침례교 신학자입니다.
그는 단순히 강해 설교가로만 머물지 않고, 당시 진리의 변개와 교리의 약화에 대하여 거룩한 분노와 영적 통찰로 저항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남긴 “최후 선언(1891년 4월)”은, 당시 새롭게 출판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개정본인 **영국 개역성경(1881)**에 대한 신랄한 경고이며, 오늘날 NIV, NASB, 개역성경 등 현대 역본들의 뿌리를 지적하는 예언적 외침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1. “성경의 언어를 격하시킨 시대의 슬픔”
스펄전은 성경 본문에 말씀을 더하거나 빼거나, 그 단어의 거룩함과 정확성을 깎아내리는 행위가 목회자들 사이에서 보편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나타냅니다.
그는 단호히 외칩니다:
“우리가 성경의 위대한 저자이신 분을 경외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훼손시키는 것을 금지해야 합니다.”
즉,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증거이며, 성경의 권위를 인간이 침해하는 불경한 행위입니다.
2. “무오성을 빼앗긴 성경은 어디에 권위를 둘 수 있는가?”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책이 무오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서 무오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는 당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주장한 성경 비평 이론들(텍스트 비평, ‘가장 오래된 사본이 최고’라는 가설 등)에 대해 신랄한 풍자를 가합니다.
신학교를 막 졸업한 소위 ‘작은 교황’ 같은 학자들이 전통적인 성경 본문을 버리고 새롭게 추정된 본문을 내세우는 것을 매우 위험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틀렸고, 자신들의 비평 이론이 옳다고 주장했지만, 스펄전은 그것을 **“영적이지도 않고 빛도 없는 사람들의 교만한 추정”**이라고 단언합니다.
3. “우리는 학문을 경멸하지 않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은 아니다”
스펄전은 “학문” 자체는 경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학문이 성경보다 더 우위에 놓이고, 신학 박사들의 이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검열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학자적 교양이나 비평에 대해서는 결코
‘오 이스라엘아, 이것들이 네 신들이니라.’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비판한 것은 성경 본문을 결정하는 권한이 학계에 넘어가고, 신자들이 그 결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권위를 따른다는 종교개혁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었습니다.
4. “왜 사람들이 영감의 권위를 낮추려 하는가?”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축자 영감(verbal inspiration)**과 **성경 무오성(infallibility)**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 말씀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목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밝은 빛 아래에서는 쉽게 쓸 수 없는 속임수를 쓰기 위해,
먼저 축자 영감과 성경 무오성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본문 비평적 신학”, “편집 비평”, “형식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킨 다음, 그 빈자리를 인간의 주관과 추정으로 채우는 작업이 오늘날의 현대신학의 핵심입니다.
5. “하나님은 신중한 학자가 아니라, 어린 아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스펄전은 끝으로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폭력의 지배’를 참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기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 성도’,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결코 비평학자들의 손에서만 보관되고 해석되는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 결론: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사본학은 성경을 약화시키는 속임수다
스펄전 목사님의 이 예언적 외침은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사본이 현대 역본(NIV, NASB, ESV, 개역성경 등)의 뿌리가 되고 있고,
그들은 거룩한 본문을 삭제하고, 교리를 약화시키며, 신자들의 믿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바꾸거나 보완할 수 없다.
성경은 무오하고, 완전하며, 보존되었다.
이 보존된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KJV)**이며,
그 그리스어 원문은 **다수사본(Textus Receptus)**이다.
현대 비평학은 빛 가운데서 행할 수 없는 속임수다.
“성경 무오성과 축자 영감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단 1시간도 굴복할 수 없습니다!” – C. H. 스펄전
이 외침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깨어 있을 것과 킹제임스 성경을 지킬 것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5-05-19 20:54:17 | 관리자
고린도후서 1장 12절: 자랑이 아니라 기쁨이다.
우리는 “자랑”이 아니라 “기쁨”과 “온유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 성경은 절대 ‘자랑(교만) 복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현대 성경 역본들, 특히 개역성경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사람의 내면을 고양시키는 듯 보이지만, 결국 교만을 미화하고 조장하는 번역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등에 나오는 “rejoicing”(기쁨), “glorying”(영광을 돌림) 같은 말들을 **“pride”(자랑, 자랑)**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태도”를 인간 중심의 자기 자랑으로 왜곡합니다.
1. 성경은 자랑(교만)을 칭찬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pride”는 결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교만한 태도로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약 4:6, 벧전 5:5)
“그가 교만으로 높아져서 마귀의 정죄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딤전 3:6)
“이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지 아니하고 세상으로부터 나기 때문이라.” (요일 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본들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라고 격려하는 듯한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중심의 겸손에서 사람 중심의 자기 고양으로 복음의 방향을 전환시킵니다.
2. 현대 역본들은 어떻게 번역을 왜곡하는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고후 1:12
KJV: “우리의 기쁨(rejoicing)은 이것이니…”
NIV: “우리의 자랑(boast)은 이것이니…”
갈 6:4
KJV: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 안에서 기쁨을 가질 것이요…”
NIV: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pride)을 가질 수 있다.”
약 1:9-10
KJV: “낮은 자는 기뻐할지니… 부자는 낮아진 것을 기뻐할지니…”
NIV: “형제는 자신에 대해 자랑을 가져야 하며… 부자는 자신이 낮아진 것을 자랑해야 한다.”
☞ ※ 주: "should take pride"는 어떤 그리스어 사본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 따르면 여기 사용된 단어들은 kauchaomai (자랑하다), kauchema (기쁨), glory (영광을 돌리다)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pride” 혹은 “자랑”**을 뜻하는 huperephanos나 alazon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즉, 단어의 의미를 조작하여 인본주의적 자기 긍정 신학으로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뉴에이지와 “자기 사랑 복음”의 연결
NIV는 “pride”라는 단어를 정당화하고 확산시키는 데에 기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 수용(self-acceptance), 자아 사랑(self-love), 자랑(self-pride)”을 영적 덕목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D. 헌트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성경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자기 수용, 자아 사랑, 자기 신뢰, 자랑, 혹은 자기와 관련된 것들을 추구하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랑 혹은 자기 사랑 복음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 유명한 목회자들에 의해 많이 선포되고 있다.”
오늘날 널리 퍼진 **자기 사랑 복음(Self-Love Gospel)**은 결국 회개와 십자가 없는, 자기 위로와 자기 치유에만 머무는 복음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명하십니다(눅 9:23).
4. “온유”가 사라지는 성경, 어떤 결과를 낳는가?
KJV는 “온유”(meek, meekness)를 31번 사용하고 있지만,
NIV는 고작 4번만 등장시킵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미덕 대신, 자신을 높이라는 메시지로 가득 찬 성경은 결국 교만한 세대, 자기 중심의 신앙, 순종보다는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교회를 만들어 냅니다.
결론: 우리는 겸손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마 11:29)**라 하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 역시 자랑이 아니라 겸손과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현대 역본들이 만들어 내는 왜곡된 단어 하나하나가
성도들의 신앙 태도를 바꾸고, 교회 전체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붙들기 위해,
정확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믿고, 가르쳐야 합니다.
2025-05-19 20:47:21 | 관리자
잠언 8장 18절: “의”를 “번영”으로 바꾼 NIV –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 성경 역본들, 특히 개역성경과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킹제임스 성경(KJV)과 달리 “의(righteousness)”라는 단어를 점점 덜 사용하고, 대신 “번영(prosperity)”이나 “좋은 것(good things)” 같은 표현으로 바꾸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언어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대한 왜곡이며 탐욕과 세속적 물질주의를 영적인 가치로 위장하는 위험한 방향이다.
1. 잠언 8:18 – “의”가 “번영”으로 바뀐 구절
KJV: “Riches and righteousness are with me”
(재물과 의가 나와 함께하느니라.)
NIV: “With me are wealth and prosperity”
(재물과 번영이 나와 함께 있다.)
여기서 **righteousness(의)**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지혜가 동반하는 도덕적 정직함이다. 하지만 NIV는 이를 **“번영”**으로 바꿔버려, 마치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가장 귀한 유익이 부요와 성공인 것처럼 읽히게 한다.
2. 잠언 21:21 – “의”를 “번영”으로 대체
KJV: “He that followeth after righteousness and mercy findeth life, righteousness, and honour.”
(의를 따르는 자는 생명과 의와 명예를 얻느니라.)
NIV: “He who pursues righteousness and love finds life, prosperity, and honour.”
(의와 사랑을 따르는 자는 생명과 번영과 명예를 얻는다.)
두 번이나 등장하는 “의”가, NIV에서는 단 한 번 등장하고, 그 자리에 **“번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이로 인해 구절의 중심 개념이 하나님의 성품과 도덕적 순결에서 세상적 성공과 부요로 전환된다.
3. 로마서 9:28 – 의의 삭제
KJV: “…cut it short in righteousness.”
(…의 안에서 그것을 단축하시리니)
NIV: 해당 부분 삭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공의롭고 의로운 기준에 따라 일을 마치신다는 선언인데, NIV에서는 아예 “의(righteousness)”라는 말 자체가 삭제되었다.
이처럼 “의”가 사라지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모호해지고 인간 중심의 해석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4. “의”와 “번영”은 절대로 동일하지 않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의로운 자가 항상 세상적으로 번영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악인이 잘되고 번성할 수도 있다.
시편 73편: 악인들이 형통함을 누리는 것에 대해 시편 기자가 괴로워하며 질문한다.
라오디게아 교회(계3:17):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였다.
“번영”은 외적인 형편이고,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복음은 기복주의 신학으로 전락하게 된다.
5. 결론: 왜 “의”를 지켜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은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나니…” (롬 3:22)
그러므로 성경에서 “의”가 사라진다는 것은,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이며, 인간의 구원 문제 자체가 희미해지는 심각한 영적 손상이다.
우리는 반드시 올바른 사본, 올바른 성경을 붙들어야 한다
NIV, 개역성경, 공동번역 등 현대 역본들은 여러 구절에서 “의”를 삭제하거나 “번영” 같은 단어로 대체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을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로 오용하게 만드는 위험한 사본들, 즉 천주교 소수사본에서 비롯된 변개된 성경들 때문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하나님의 “의”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구원도, 삶도, 판단도 “의”로 기준 삼는 말씀 위에 서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며, 그것이 진리이다.
2025-05-19 20:42:20 | 관리자
로마서 12장 17절: 왜 “정직”이라는 말이 사라졌는가?
KJV만이 정직한 성도를 만든다
1. 정직은 성도의 삶에서 핵심이다
성경은 믿는 자가 세상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함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정직(honesty)은 단지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성화된 삶의 열매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점검하는 필수적인 성품이다.
그런데 현대 역본들(NIV, 개역개정 등)은 ‘정직(honest)’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무려 13회 이상 제거하고, 그 자리에 ‘고상한(noble), 단정한(decent), 선한(good)’ 같은 애매하고 윤리적일 뿐인 말들을 끼워 넣었다.
이것은 단순한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명확한 도덕 기준을 흐려버리는 심각한 변개다.
2. “정직”을 제거한 대표적 구절들
(1) 눅 8:15)
KJV: 정직하고 선한 마음
NIV/개역: 고상하고 좋은 마음
(2) 행 6:3)
KJV: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NIV/개역: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정직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짐)
(3) 롬 12:17)
KJV: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라
NIV: 모든 사람 앞에서 바른 일을 도모하라 (정직함 → 일반적 도덕성)
(4) 고후 8:21)
KJV: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노라
NIV: 사람 앞에서도 바른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정직 → 추상적 표현)
(5) 빌 4:8)
KJV: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
NIV: 무엇이든지 고상한 것 (윤리적 가치로 대체)
(6) 살전 4:12)
KJV: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 정직하게 걷게 하려 함이요
NIV: 외인들의 존경심을 얻기 위함이라 (내면의 성품 → 외적 평판으로 바뀜)
(7) 딤전 2:2)
KJV: 정직한 가운데 평안하고 조용한 삶
NIV/개역: 경건하고 단정한 삶
이 외에도 고후 4:2, 롬 13:13, 히 13:18, 벧전 2:12 등 다수의 구절에서 ‘정직’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그 뜻을 희석시키는 번역이 채택되었다.
3. 왜 이처럼 “정직”이 사라졌는가?
이것은 단순한 번역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뉴에이지 사상이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 ‘윤리적 상대주의’를 반영한 결과이다. 정직은 절대적 기준이 있는 성품이다. 하지만 “고상함”, “단정함”, “바른 일” 등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주관적 표현이다.
더욱이 뉴에이지적 사고 속에는 ‘정직(honesty)’이라는 단어 자체가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뉴에이지는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면 그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정직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면,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비추기보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 하게 된다.
4. 왜 킹제임스 성경은 정직함을 지켜냈는가?
KJV는 “정직(honest)”이라는 단어를 일관되게 유지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도덕적, 영적 기준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는 우리가 외적인 평판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태도와 내면의 정직함을 지켜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KJV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직함, 곧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의 투명한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5. 결론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자들”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확실히 그들은 내 백성이요, 거짓을 말하지 아니할 자녀들이라, 하시며 이렇게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이사야 63:8)
그러나 현대 역본들은 의도적으로 “정직”이라는 단어를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도의 기본 성품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한 성도, 정직한 교회, 정직한 말씀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KJV)**을 붙잡아야 한다.
2025-05-19 20:37:59 | 관리자
안녕하세요?
<크리스천의 결혼과 가정> PDF 책을 올리니 다운받아 읽으시기 바랍니다.
크리스천의 결혼과 가정
목차
1. 결혼과 가정은 영적 싸움이다
2. 가정의 기원
3. 가정의 목적
4. 아내의 복종의 의미
5. 남편의 사랑의 의미
6. 남편과 아내의 행동 지침
7. 결혼의 성공 요소: 오래 참음
8. 친밀함의 일곱 단계
머리말
‘결혼과 가정’이라는 주제를 주일 대예배 시간에 한두 번도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강해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주제 자체가 개개인의 사생활과도 관련되기도 하고 또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요소가 부족한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미 40-50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해 오신 분들은 “지금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 배우자가 어떤 이유로 인해 세상을 떠나거나 다른 사정으로 인해 현재 독신으로 살아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느끼시는 분들도 있고 아직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 입장에서 결혼과 가정을 이야기하면서 “결혼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이건 나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 같다.’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이미 이혼하신 분들도 계시고 이혼했다가 재혼하신 분들도 계시며 별거 중이신 분도 있고 또는 이혼을 계획하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경우의 수가 이처럼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이 모든 분들의 사정을 제가 다 고려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는 목사로서 특별히 아직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을 준비 중인 분들, 또 중·고등학생으로서 이성에 대해 눈을 뜨고 결혼에 대해 조금씩 생각해 보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마지막 때가 되다 보니 결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기에, 이런 모든 분들에게 공통분모가 될 수 있는 주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특히 아직 결혼하지 않았거나 갓 결혼한 분들에게는 결혼과 가정 시리즈의 메시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직장을 갖기 위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12년, 그리고 대학까지 더해 최소 16년에서 18년 정도는 공부를 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해서 세상에 나가 직업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결혼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 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들어 본 적이 과연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대부분 없으실 겁니다. 그만큼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에 대해 배운 적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모든 사람을 성경적인 인간으로 바르게 세우기 위해 성경이 결혼과 가정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를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에 확신이 들어 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목사님이 나를 지목해서 이야기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특정인을 지목하거나 부끄럽게 하거나 책임을 묻기 위해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와 있듯이 우리 “각 사람은 자기가 부르심을 받은 때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면 되는”(고전 7:24)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전하면서 제가 특별히 뭔가를 잘하고 있어서, “여러분도 저처럼 잘해야 합니다.”라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역시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고,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가 계시기에 더 좋은 아들이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여러분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면서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니 혹시라도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책을 통해 결혼과 가정은 영적 싸움이라는 것, 가정의 기원과 목적, 남편과 아내의 의무 및 행동 지침, 그리고 결혼의 성공 요소인 오래 참음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남녀의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보여 주는 예표라는 것도 기억하면 좋을 것입니다.
결혼과 가정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도록 40년 이상을 함께하며 귀한 조언들을 준 아내에게 감사하고 8편의 설교를 글로 정리해 준 김지훈 형제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은혜와 화평이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까닭으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것은 큰 신비니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각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듯 개별적으로 그렇게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주의하여 자기 남편을 존경할지니라. (엡 5:31-33)
2025-05-19 20:17:26 | 관리자
주님의 만찬은 아무렇게나 참여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1장 29절: “합당하지 않게”를 삭제한 NIV는 무엇을 숨기려 하는가?
1. 성경은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고린도전서 11장 29절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경고를 주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며 자기가 받을 정죄를 먹고 마시기 때문이라.” (고전 11:29, KJV)
그러나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에서는 이 핵심 표현인 **‘합당하지 않게(unworthily)’**를 삭제하였다. 그 결과 구절의 의미가 매우 흐려지고 말았다. NIV는 단지 “[주의]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신다”고만 기록하여, 행위의 ‘태도’와 ‘자기 점검’의 중요성을 완전히 희석시켰다.
2. 왜 “합당하지 않게”가 중요한가?
KJV는 이 구절을 통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가 먼저 스스로를 살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고전 11:28도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을 살펴보고 그 빵을 먹으며 그 잔을 마실지니…” (고전 11:28, KJV)
이와 같은 구조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회개와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성경적 원칙을 확립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30절에서 경고하는 것처럼 병이 들거나 죽음에 이르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고전 11:30).
하지만 NIV는 이러한 경고의 맥락을 삭제된 한 단어로 흐려 놓았다.
3. 로마 카톨릭의 미사 교리와의 충돌
로마 카톨릭은 미사를 구원에 이르는 필수적인 종교 행위로 가르친다. 그들은 미사를 통해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야만 하나님과 합당한 관계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즉:
죄는 고해성사로 해결되고,
미사를 통해 다시 하나님의 은총에 들어가며,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와 정반대의 질서를 말한다.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BEFORE) 회개하고 자기를 판단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성찬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증표이며 감사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 11:29에서 “합당하지 않게”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천주교 미사 교리처럼 아무 준비 없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신자 개인의 영적 상태나 자백, 회개 없이도 성례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를 성경이 뒷받침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4. 사본 증거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합성서공회(UBS)의 주석에 따르면, “ἀναξίως(합당하지 않게)”라는 단어를 포함한 사본이 53개, 이를 삭제한 사본은 14개에 불과하다. 약 4:1의 비율로 다수 사본이 이 단어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Nestle-Aland/바티칸 계열)을 따라 이를 삭제해 버렸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사본 문제는 결국 교리 문제로 이어진다. 삭제된 말씀 한 구절이 전체 신학 체계와 예배 관행을 바꿔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주의 만찬은 아무 준비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믿는 자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회개한 후, 겸손히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며 감사함으로 참여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합당하지 않게(unworthily)”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신자의 자세, 회개, 경건한 삶을 요구하는 거룩한 기준이다. 이 중요한 단어를 사본에서 삭제하고, 그 결과가 교리를 왜곡시키는 역본(NIV, 개역성경 등)은 결코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이 될 수 없다.
오직 킹제임스 성경(KJV)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 있으며, 이 진리는 사본과 교리의 일치 속에 분명히 드러난다.
2025-05-18 19:24:29 | 관리자
로마서 13장 9절: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 왜 삭제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천주교 사본의 대조를 통해 본 교리의 왜곡
1. 삭제된 여덟 번째 계명 – “거짓 증언하지 말라”
로마서 13장 9절은 십계명 중 몇 가지를 열거하면서 이웃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롬 13:9, KJV)
그러나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에서는 이 중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이 통째로 빠져 있다. 이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의도적 삭제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요약하는 십계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2. 왜 이 계명이 문제시되는가?
이 삭제는 그 자체로 “거짓 증언”에 해당한다. 말씀을 의도적으로 변개하고 감추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대한 죄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너는 내가 네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며 주 네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2)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그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요한계시록 22:19)
즉, 말씀을 삭제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속과 영생에서도 삭제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다.
3. 천주교는 왜 이 구절이 불편한가?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은 천주교 교리와 전통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씀이다. 천주교는 오랜 세월 동안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이고 거짓된 교리들을 가르쳐 왔다:
성직자 독신제: 성경은 “베드로가 장모가 있었다”(마8:14)고 기록함으로써 사도들의 결혼을 허용하고 있음.
미사(제사적 성찬):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을 반복하는 것은 “한 영원한 제사”를 부인하는 것(히10:12).
연옥: 성경 어디에도 “연옥”이라는 개념은 없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히9:27).
종부성사: 죽기 전 의식을 통해 죄를 씻을 수 있다는 교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대체하는 이단적 주장.
마리아 및 성인 숭배: 마리아를 “공동 구속자”로 높이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이심을 부정(딤전2:5).
면죄부, 고해성사, 유아세례, 행위로 받는 구원 등: 이 모든 교리는 은혜에 더해 사람의 행위를 요구하는 복음 변개이다.
이 모든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의 전통과 거짓 증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교리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만든 소수사본(예: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은 자신들의 교리에 불편한 말씀을 삭제하거나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4.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본의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개역성경, NIV 등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Westcott & Hort)의 소수사본 계열을 따른다. 이들은 천주교 사본과 일치하는 텍스트를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본문에서 중요한 교리를 드러내는 구절들을 지속적으로 삭제하거나 축소하였다.
특히 다음과 같은 본문들은 천주교적 전통을 보호하거나, 성경의 핵심 진리를 흐리기 위해 변개되었다:
로마서 13:9 – “거짓 증언하지 말라” 삭제 → 거짓 교리를 합리화
골로새서 1:14 –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삭제 → 피의 속죄 은폐
디모데전서 3:16 – “하나님이 육체로 나타나셨다”를 “그가”로 변경 → 그리스도의 신성 축소
요한일서 5:7 – 삼위일체 명확한 본문 삭제
5. 결론: 올바른 사본만이 올바른 교리를 지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세세하게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12:7)
그러나 부패한 소수사본들은 천주교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삭제하고 거짓 증언으로 치환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단순한 학술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과 직접 연결된 중대한 영적 전쟁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성경, 킹제임스 성경(흠정역)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다수 사본에 기반한 말씀을 붙들어야 하며, 거짓 증언과 인본적 교리를 과감히 버려야 한다.
2025-05-18 19:19:16 | 관리자
로마서 14장 1절을 중심으로: 올바른 사본이 올바른 교리를 만든다 –
1. 성경 본문은 교리의 기초이다
기독교 교리는 결코 인간의 철학이나 문화적 흐름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교리는 “기록된 말씀”(It is written)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성경 원문이 훼손되면, 반드시 그 결과로 신학과 교리가 왜곡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로마서 14장 1절이다.
2. KJV와 올바른 본문: 의심에 찬 논쟁은 거부하라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이는 교회 안에서 불확실한 문제나 개인적 확신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모든 행동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3. 개역성경과 NIV: 비판을 하지 말라는 위험한 명령
그러나 개역성경과 NIV는 이렇게 말한다:
“그를 비판하지 말라.”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포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죄를 지적하지 말고, 무엇을 믿든 간섭하지 말라는 식의 윤리 상대주의로 연결된다. 즉, 잘못된 것을 보고도 침묵하라는 가르침이다.
4. 이 구절이 무너뜨리는 교회 내 질서
이 구절이 잘못 번역되면, 교회 안으로 모든 죄와 잘못된 신학, 이단 사상이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된다. 누군가가 “나는 다른 복음을 믿는다”고 해도, “비판하지 말라”는 논리로 그를 제지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올바른 분별과 경고의 사역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5.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죄를 분명히 지적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셨고(마23장),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죄인을 출교하라고 명확히 지시했다(고전5장). 사도 바울은 "죄를 꾸짖으라"(딤전5:20)고 명백히 말한다. 이런 교훈은 “비판하지 말라”는 부정확한 번역과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6. 결론: 변개된 사본은 진리를 흐린다
로마서 14장 1절에 대한 NIV와 개역성경의 번역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계열의 소수 사본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올바른 교리를 훼손하는 첫 단추이다. 올바른 성경은 죄와 의를 분명히 구분하며, 의심에 찬 논쟁은 거절하되 진리 안에서는 판단하고 지적해야 함을 분명히 한다.
말씀 요약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롬 14:1, KJV)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개역성경)
“Accept the one whose faith is weak, without quarreling over disputable matters.” (NIV)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 말씀은 인간의 입맛에 맞추어 수정하거나 약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하셨으며(시12:6), 그것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신다”고 약속하셨다(시12:7, 흠정역).
2025-05-18 19:15:37 | 관리자
마가복음 10장 21절 십자가 없는 복음?
부패한 사본이 빚어낸 심각한 왜곡
1.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삭제되다
마가복음 10장 21절은 예수님께서 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너라, 나를 따르라, 십자가를 지고.”
(KJV, “Come, take up the cross, and follow me.”)
그러나 NIV와 개역성경, 그리고 그 근간이 되는 **천주교 계열 소수사본(Nestle-Aland, UBS 본문)**에서는 **“십자가를 지고”(take up the cross)**라는 결정적인 구절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마치 예수님께서 고난과 자기부인을 요구하시지 않은 것처럼, 본문이 크게 약화되어 버렸습니다.
2. 왜 십자가가 중요한가?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자기부인과 헌신,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입니다.
바울 역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2:20)
3. 왜 소수사본은 십자가를 지우려 하는가?
이 삭제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주교 알렉산드리아 계열 소수사본들의 일관된 경향입니다. 이들 사본은 예수님의 신성, 피, 부활, 그리고 십자가와 같은 희생 중심의 복음 진리를 지속적으로 삭제하거나 약화시켜 왔습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결국 다른 복음입니다(갈1:6–9). 이것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왕관만 주겠다고 했던 제안(마4장)**과 똑같습니다. 고난은 없이 영광만 누리려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4.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이 구절을 외면하는가?
오늘날 “새 기독교(New Christianity)” 혹은 현대 기독교 문화는 십자가보다 왕관을, 고난보다 번영을, 거룩함보다 행복을 선택합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밀려나고, 대신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길 원하십니다”라는 표면적인 메시지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라.” (딤후2:12)
십자가 없이는 왕관도 없습니다.
5. 결론: 부패한 사본이 만든 십자가 없는 복음
마가복음 10장 21절에서 십자가에 대한 언급을 삭제한 것은 단순한 문장 축약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공격하는 사탄의 전략이며, 그 근원은 천주교 계열의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일한 방식이며, 진정한 제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킹제임스 성경(KJV)의 본문을 붙들고, 어떤 사본이라도 복음의 본질인 **십자가의 도를 훼손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2025-05-18 19:12:02 | 관리자
로마서 1장 16절: 그리스도의 복음
단순한 ‘복음’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1. 복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것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KJV)
그런데 개역 성경이나 NIV를 포함한 현대 역본들은 **“그리스도의”**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복음”**만 남겨놓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NIV, 개역)
이렇게 되면 어떤 복음인지가 모호해집니다. 성경에는 “다른 복음”(고후 11:4), “사람의 복음”(갈1:11), “영원한 복음”(계14:6) 등 다양한 표현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자 한 복음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복음”,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복음입니다.
2.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복음의 본질을 명확히 정의합니다. 그 복음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로 인해 피를 흘리시며 죽으셨고,
성경 기록대로 장사되셨으며,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아니면 다른 것은 모두 거짓된 복음입니다.
“너희가 받아들인 것 외에 다른 어떤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9)
3. 현대역본은 왜 ‘그리스도의’라는 핵심 단어를 빼는가?
이 삭제의 원인은 다시 “4번 사본 문제,” 즉 천주교 계열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 있습니다. 이 사본들은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역을 흐리거나 삭제하는 경향이 반복됩니다.
로마서 1:16에서 **“그리스도의”**라는 단어가 빠지면, 바울이 말한 복음이 **불특정한 ‘좋은 소식’**처럼 바뀌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뉴에이지, 사회복음, 인본주의적 메시지 등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4. 단어 하나의 삭제가 어떻게 복음 전체를 흔드는가?
복음은 단지 ‘기쁜 소식’이라는 느낌적인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죽으심, 장사됨, 부활하심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영적 능력에 기초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를 뺀 복음은 그리스도의 피 없는 복음, 그리스도의 부활 없는 복음, 구원이 없는 복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
성경은 정확해야 하고, 복음은 명확해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단어 앞에 반드시 “그리스도의”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정체성이 분명해집니다.
삭제된 단어 하나가 복음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면, 우리는 단어 하나까지도 보존하신 **하나님의 말씀(KJV)**을 붙들어야 합니다.
2025-05-18 19:06:41 | 관리자
베드로전서 2장 2절: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의 오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 – 잘못된 번역이 만든 구원론의 오해
1. 구원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본질
성경 전체는 구원(salvation)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건임을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즉 구원은 진행형 상태나 점진적 과정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8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흠정역)
여기서 구원은 받았던(past tense) 사건이며, 자라가야 할 것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신앙과 말씀 안에서의 성숙입니다.
2. 벧전 2:2에서 벌어진 번역의 왜곡
킹제임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KJV)
반면 개역성경과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갓난 아이들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현대 역본들은 구원을 ‘성장’의 결과로 둠으로써 성경의 구원 개념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3. 왜 이런 오역이 발생했는가? – 4번 사본(Textus Criticus)의 영향
킹제임스 성경의 근거가 되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에는 **“구원에 이르도록”(εἰς σωτηρίαν)**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연합성서공회(UBS)와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 등의 **소수 사본 계열(=4번 사본)**은 여기에 **"εἰς σωτηρίαν"**을 임의로 추가해 버렸고, 개역성경과 NIV는 그에 따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간다”**는 오역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로 인해 마치 구원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가톨릭의 점진적 구원론이나 행위 구원론, 혹은 뉴에이지의 자아성장 사상과도 맞닿게 됩니다.
4. 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출생 이후의 영적 양육’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신자들은 태어난 이후 자라나는 것이지, 자라나야 구원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벧후 3:18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 또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 가라.” (흠정역)
여기서 성장은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logikon)**을 통해 영적으로 양육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이미 구원받은 상태여야 합니다.
결론
구원은 성장이 아닙니다. 구원은 새로운 탄생이며, 그 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자라갑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식의 번역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즉시성과 은혜의 본질을 흐리는 위험한 오역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결국 **4번 사본 계열(소수 본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보존하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흠정역)**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의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2025-05-18 19:02:47 | 관리자
로마서 11장 6절의 삭제는 왜 심각한가?
구원은 오직 은혜로, 행위는 배제된다 —
1. 성경은 명백하게 구원을 ‘오직 은혜’로만 주어진다고 선언한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구원의 원천과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KJV, 흠정역)
이 말씀은 구원이 사람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전혀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며, 어떤 행위도 그 안에 섞일 수 없습니다.
2. 로마서 11장 6절은 이 진리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결정적 구절이다
로마서 11장 6절은 은혜와 행위가 절대적으로 양립 불가능함을 논증적 구조로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또한 만일 행위에서 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KJV)
즉 은혜와 행위를 섞는 것은 수학 공식에 모순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는 철저히 공로 없는 선물이기에, 행위가 개입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게 됩니다.
3. 그런데 이 중요한 후반부를 개역성경과 NIV는 삭제했다
현대역본들은 대부분 로마서 11장 6절의 후반부를 삭제하거나 각주로 처리합니다. 예를 들어 개역성경과 NIV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끝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그 다음, “행위로 된 것이면 은혜가 아니다”는 후반부는 빠져 있음)
이로 인해 은혜와 행위가 양립 불가능하다는 이중 논증 구조가 절반만 전달되고 나머지는 소거되어버립니다. 그 결과, 독자는 “어느 정도 행위가 있어도 되는 게 아닌가?”라는 혼동에 빠질 수 있습니다.
4.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4번 사본”에 있다
이 구절을 훼손한 배후에는 항상 등장하는 4번 사본 문제, 즉 **천주교 계열의 알렉산드리아 사본군(Textus Criticus, Nestle-Aland 본문)**이 있습니다. 해당 사본군은 고의적으로 로마서 11:6의 후반부를 삭제하여, 구원의 은혜를 논리적으로 증명해주는 핵심 문장을 없애버렸습니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이 근거한 **공인본문(Textus Receptus)**과 **대다수 사본들(다수본문, Majority Text)**은 이 구절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 구조야말로 구원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론
성경은 구원에 있어 은혜와 행위를 절대적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은 이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일부 삭제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은혜가 은혜이기 위해서는 행위가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
이 단순한 진리를 흐리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담고 있는 성경을 붙들어야 하며, 삭제되거나 왜곡된 사본들로부터는 멀어져야 합니다.
2025-05-18 19:00:53 | 관리자
요한계시록 21:24의 번역 논쟁과 진리의 수호
누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가?
요한계시록 21장은 성경 전체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장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요, 구속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도성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도시에 누가 들어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성경 번역에 따라 전혀 다르게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언어 문제를 넘어, 복음의 본질과 연결된 심각한 문제입니다.
1. 킹제임스 성경(KJV)의 명확한 선언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요한계시록 21:24,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이 구절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자들은 단순히 민족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구원의 조건을 충족한 자들만이 어린양의 신부로서 그 도성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표현입니다.
2.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의 위험한 생략
개역성경과 NIV는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개역성경)
“The nations will walk by its light…” (NIV)
여기서 문제는,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핵심 문구가 완전히 삭제되었다는 점입니다. 마치 구원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민족이 자동적으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교리적 왜곡이며, **보편적 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이라는 이단 사상의 기반이 됩니다.
3. 원문에 따르면 KJV가 정확하다
Textus Receptus 그리스어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 있습니다:
τὰ ἔθνη τῶν σωζομένων
(the nations of them which are saved)
즉,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그리스어 원문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Nestle-Aland 소수 본문에서는 이 표현이 제거되어, 단지 “모든 민족들”로 남아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구원과 무관하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처럼 해석될 여지가 생긴 것입니다.
4. 보편적 구원론으로 이어지는 신학적 위험
이 구절의 생략은 단순한 문구 조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혼란을 초래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암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구원 조건의 희석
“모든 종교, 모든 인간은 결국 구원받는다”는 뉴에이지적 사고와 연결
하지만 성경은 명백히 말합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요 3:3)
결론: 오직 구원받은 자들만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
요한계시록 21:24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천국의 입장 조건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흐리거나 삭제하는 현대 역본들은 독자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진리를 떠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정확히 보존하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지켜야 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이 유일한 천국의 길임을 분명히 선포해야 합니다.
2025-05-18 17:52:01 | 관리자
골로새서 1장 14절: 예수님의 피 삭제
예수님의 피는 구원의 핵심입니다 – 그 피를 삭제하면 복음이 무너집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며, 그 중심에는 ‘그분의 피’가 있습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면이 없느니라”(히 9:22). 그런데도 오늘날 개역성경, NIV를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예수님의 보혈을 직접 언급하는 구절들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골로새서 1장 14절입니다.
비교: 킹제임스 vs 현대 역본
킹제임스 성경(KJV):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even the forgiveness of sins.”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느니라.”
개역성경 / NIV 등 현대역본:
“그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피”라는 단어는 아예 사라져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 역본들은 가장 중요한 단어, 곧 '그분의 피'를 본문에서 삭제하고, 그 삭제에 대해 각주조차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삭제는 단순한 문장 생략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에 대한 공격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하려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왜 예수님의 피가 중요한가?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구원은 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에서 보호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레위기 17:11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로마서 5:9는 말합니다: “그분의 피를 통해 의롭게 되었으니...”
에베소서 1:7도 증언합니다: “그분의 피를 통해... 죄들의 용서가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2:11은 명확히 말합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마귀를 이기었도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한 가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피 없이 구원은 없습니다.
사탄은 왜 예수님의 피를 싫어하는가?
마귀는 예수님의 피를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그 피가 성도들을 정죄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은 그 진리를 폭로합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말로 마귀를 이기었으니...”
마귀는 이기지 못할 무기, 곧 예수님의 피를 성경에서 빼내려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현대 역본들은 그의 이 계략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사본의 차이인가? – 아니면 의도된 왜곡인가?
NIV 등 현대역본이 따르는 **네슬레-알란트 비평 본문(UBS)**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계열의 소수 사본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 그리스도의 신성, 삼위일체, 왕국 복음, 부활, 하늘의 통치권과 같은 교리 핵심 구절들에서 중요한 표현들을 계속 삭제해왔습니다.
골로새서 1:14의 경우, Textus Receptus(다수 사본 기반)는 "그분의 피로"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지만, 네슬레-알란트 본문은 이 문구를 완전히 삭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현대 역본은 “죄 사함”의 도구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복음의 중심을 빈 껍데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론: 그리스도의 피 없이는 복음도, 구원도 없다
골로새서 1:14은 복음의 핵심을 단 한 절로 요약한 구절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느니라.” (KJV)
이 ‘피’를 성경에서 삭제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잃습니다.
복음을 잃으면, 구원의 길도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삭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단어, 특히 ‘피’ 한 단어의 삭제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확고히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2025-05-18 17:44:4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