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어제 ‘영어로 원어를 고칠 수 있다고요?’와 ‘'킹제임스 온리'의 정의’를 올린 뒤 밤에 한 형제님으로부터 이메일이 와서 소개합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5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6
이 글을 쓰신 형제님은 영어로만 모든 것(해석/번역 등)을 확실히 할 수 있다는 분들의 설교와 글 등을 읽고 마음속에 어려움을 느끼던 차에 제가 올린 글을 보고 자신의 느낌을 적어 주셨습니다. 아마 영어를 잘 하지 못해 우리말 흠정역 성경을 보시는 분들의 감정을 잘 표현해 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정립해야 함을 보여 주는 글로서 여러 성도들에게 유익이 될 것 같아 소개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과도기 현상이라고 생각되지만 혹시 영어로 인해 주눅 들린 분들에게는 소망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영어를 못해도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바르게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의 우리말로도 자신의 말씀들을 보존해 주십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믿음 생활하기 어렵지요.
조용한 이 아침에 우리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간구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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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오랜 기간 장로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킹제임스 성경과 바른 교리에 대해 깨닫게 된 중년의 형제입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성경대로 믿는 성경 신자로서의 삶을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목사님께서 킵바이블을 통해 올리신 ‘영어로 원어를 고칠 수 있다고요?’와 ‘'킹제임스 온리'의 정의’를 읽고 평소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일치함에 심히 기쁘고 공감이 되어 제 생각을 몇 자 적어 메일로 보내드리게 되었습니다.
과거 저는 장로교회에 출석하던 시절, 신학대학원 등에서 성경 원어(히브리어/헬라어)를 배우고 설교 때마다 그것을 인용하며 성경 해석에 활용하는 목사님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그 목사님들이 공부도 많이 하시고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암호처럼 생긴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하셔서 감히 평신도(?)가 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성경 해석을 하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 문맥과 전혀 상관이 없었고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말씀의 뜻과도 배치되는 터무니없는 말 그대로 영해라는 것을 킹제임스 성경과 바른 교리를 접하게 된 뒤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깨달음으로 인해 기쁨으로 살던 중 참으로 묘한 일이 킹제임스 진영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차츰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수년에 걸쳐 검증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흠정역 성경을 강단 위에 펼쳐 놓고도 여전히 설교 시간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자주 거론하며 그것만을 성경 해석의 중요한 열쇠로 삼는 목사님들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설교와 성경 강해를 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흠정역 성경이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꾸 제가 장로교회를 다니던 시절에 무언가 자신만의 독특한 성경 해석을 세우기 위해 자주 원어를 들먹이던 목사님들이 겹쳐져서 연상되었습니다.
1611년 출간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신실하게 번역한 흠정역 성경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검증되어 읽히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 해석의 중요한 길목마다 흠정역 성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렇게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마도 킹제임스 성경을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오래전부터 알아 왔다는 것과 영어에 능통하다는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지 못한 대다수의 성경 신자들은 계속해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믿음과 성경 해석이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신구약 성경은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양과 목(양)자’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그래서 양 떼는 목자를 따라가며 말씀의 꼴을 먹이는 목자의 인도와 양육을 받아야 함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목자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바르고 선한 목자요 양 떼를 해롭게 하지 않고 좋은 말씀의 꼴을 먹이는지는 누가 분별해 줍니다. 그것은 오직 양들 스스로가 분별해 내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성경에 아래와 같은 경고의 말씀들을 기록해 주셨나 봅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마7:15).
내가 이것을 아노니 곧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왜곡된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리라.(행20:29~30)
개들을 조심하고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며 살을 베어 내는 자들을 조심하라.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니라.(빌3:2~3)
이런 말씀들을 읽어보면 결국 개들과 거짓 대언자와 사나운 이리와 악한 일꾼과 삯꾼 목자와 거짓 형제와 거짓 교사들과 또 그들과는 구별된 하나님께서 보내신 신실한 참 목자를 구별해 내는 일은 모두 성도 개개인의 몫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신실하게 번역한 흠정역 성경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수시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돌아가 살펴야 어떤 목사의 설교가 바른지 그른지 또, 어떤 성경 교사의 가르침이 바른지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양들 즉 성도들은 사실상 그런 능력이 없는 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에 제가 인용한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구원받고 바르게 믿음 생활을 하려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인데 그렇다면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존해주신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 후에도 킹제임스 성경을 남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접했고 영어에도 능통한 (혹은 능통하다고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믿음과 성경 해석을 의존해야 한다면 평범한 성도들이 목사와 성경 교사들의 설교와 가르침을 듣고 자기 스스로 그들의 참됨과 거짓됨 여부를 분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흠정역 성경의 완전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내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돌아가 버리는 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주장대로 흠정역 성경에 그렇게 수천 가지 이상 오역이 존재한다면,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그렇게도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고 영어도 잘 알고 모든 능력을 갖춘 여러분이 목숨을 걸고라도 모든 것을 투자해서 바르게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새로운 우리말 성경을 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여러분의 말이 맞는다면 그렇게 외곽에서 한가하게 흠정역 성경을 공격하고 잘못을 지적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왜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토록 비판하는 흠정역 번역자처럼 오랜 세월을 기꺼이 골방에 틀어 앉아 성경 번역에 매진하지 못하십니까?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인내심이 부족해서인가요? 그도 아니면 열정이 부족해서인가요?”
말하지 않아도 저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과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어 킹제임스 성경의 새로운 우리말 번역을 내놓아도 흠정역 성경과 견주어 세상의 인정을 받을 자신도 없고 엄두도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말과 글로 흠정역 성경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힘겹게 쌓아가는 이 성경의 신뢰와 권위를 조금씩 갉아먹으면 과연 누구에게 유익이 있을까요?
저는 앞으로 누가 뭐라 해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신실하게 번역한 흠정역 성경이 영적으로 매우 혼탁하고 타락한 이 마지막 때 저와 제 가족을 지켜줄 영적 등대가 되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우리말 성경임을 확고히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이 성경으로써 보통의 평범한 대다수의 한국인 성경 신자들이 거짓 목자와 참된 목자를 구별해 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영어를 잘 몰라도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부하는 일부 형제·자매들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사람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실천하고 하늘의 보상을 쌓으며 탁월하게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부디 대다수의 선량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독자들을 위해서 힘내시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선한 사역을 더욱 힘있게 끌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5-13 09:19:30 | 관리자
킹제임스 온리(유일주의)의 정의
요즘 미국 등에서는 ‘킹제임스 성경만 성경이다’라는 의미의 ‘킹제임스 온리이즘’(King James Onlyism)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이것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숭배하려는 경향을 지닌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대적들이 붙이는 이름입니다. 그러다 보니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레 ‘킹제임스 온리’라는 라벨이 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말로는 ‘킹제임스 유일주의’ 정도로 부를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출간/배포하고 킹제임스 성경만을 읽고 그것만 사용하여 강해/설교하므로 자연히 ‘킹제임스 온리’라는 라벨이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온리’에 대한 바른 정의 없이 ‘킹제임스 온리’라는 라벨이 붙으면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크므로 오늘은 저와 또 함께 믿음의 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견지하는 ‘킹제임스 온리’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자 합니다.
이런 정의는 사실 오래전에 네팔의 선교사로 있는 데이비드 클라우드 형제님이 내린 적이 있는데 저 역시 그 형제님과 비슷하게 제가 믿는 정의를 내리고자 합니다.
http://www.wayoflife.org/database/kjo.html
저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킹제임스 온리’가 정의된다면 그러한 라벨이 저에게 붙는 것을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입으로 불어내신(영감 과정) 완전한 말씀들(단어들)을 히브리어/그리스어로 주셨고 모든 시대를 통해 섭리로 이 말씀들(단어들)을 보존해 주셨다.
2. 하나님께서는 친히 보존하신 단어들(원어들)을 한 점의 오류 없이 수용 언어인 영어를 통해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담아 주셨다.
3. 그러므로 모든 원어의 뜻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번역된 것만이 참되고 바르다. 이 말은 원어 단어마다 여러 뜻이 있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반영된 뜻만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른 뜻이라는 의미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하는 현시대의 본문 비평은 마귀의 이단 교리이다. 현대 본문 비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보존되지 않았고 성경본문 비평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발견되어 성경에 추가, 삭제, 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5. 하나님의 참된 본문은 천주교 도서관, 수도원, 동굴 등에 비밀리에 숨겨지지 않았고 시대를 거치며 신실한 성도들의 손으로 필사되어 보편적으로 온 세상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의미로 ‘킹제임스 온리’를 주장한다면 저는 그러한 의미의 ‘킹제임스 온리’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1.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을 받았다. ---- 아니다. 오직 영감은 1차적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원어에만 해당된다. 킹제임스 성경이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성경이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들을 정확하게 번역했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1611년의 영어 번역본에 다시 한 번 영감, 즉 숨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이 아니다.
2.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그것의 모체가 된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본문보다 우수하다. ---- 이 말은 그 자체가 난센스이다. 이것은 1611년 전에는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이 없었고, 완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
3.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그리스어 본문의 향상된 계시이다. ---- 이 말은 킹제임스 성경의 영어로 원어를 고치고 향상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역시 난센스이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를 정확하게 번역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5
4.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있으면 원어 공부를 할 필요가 없고 번역 등에 필요한 원어 도구들도 사용할 필요가 없다. ---- 이런 주장은 성경 번역/해석 등에 영한사전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의미이며 결국 자기만 옳다는 자가당착으로 귀결된다.
5.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만 보존되었다. ---- 아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에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들(단어들)이 우리말로도 보존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읽어야 하고 영어를 할 수 있는 해석자의 지도를 받아야만 바르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극단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218
6. 오직 킹제임스 성경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으며 개역성경 등의 현대 역본은 사탄의 성경이다. ---- 우리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으며(롬1:16) 개역/개정/NIV 등의 현대 역본에도 복음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다.
7.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로 정죄 받거나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다. ---- 우리는 개역/개정/NIV 등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도 우리의 형제요, 자매인 그리스도인들이 많다고 믿는다. 다만 그들은 완전한 말씀 전달에 대한 지식이 없어 전통에 매인 채 바른 말씀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 참음으로 설득하여 성경 말씀의 완전성과 보존의 실재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대상이다.
2015-05-12 18:41:52 | 관리자
영어로 원어를 고칠 수 있다고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함에 대한 균형 잡힌 사고와 바른 이해가 없으면 성경 신자라는 우리도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극단적 주장을 펼 수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 주장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원어를 향상시키거나 교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엉뚱하게 믿는 것도 개인의 자유지만 이런 믿음의 소유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거나 정죄하는 지경에 이르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일로 성경 신자가 될 수 있는 많은 이들의 오해를 사는 요소이며, 결과적으로 킹제임스 성경 사역에 큰 방해가 되는 일입니다.
1611년에 반포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를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정확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이 성경을 손에 들면 원어의 여러 뜻을 두고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신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여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뜻이 많이 달라진 원어의 의도를 잘 알기 어려운 이 시대의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 보존에 대한 약속의 성취입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37
다음의 예를 살펴봅시다.
아모스 4장 4절에는 십일조를 드리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성경은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흠정역: 벧엘에 가서 죄를 짓고 길갈에서 범법을 크게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물을, 삼년 뒤에 너희 십일조를 가져오고
KJB: Come to Bethel, and transgress; at Gilgal multiply transgressions; and bring your sacrifices every morning, and your tithes after three years.
개역: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 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NASB: Enter Bethel and transgress; in Gilgal multiply transgression; Bring your sacrifices every morning, your tithes every three days
킹제임스 성경은 ‘3년’이라고 하고 개역성경은 ‘3일’이라고 합니다. 물론 현대역본 지지자들은 KJB가 히브리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3일’을 ‘3년’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합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되는 히브리 단어를 살펴보면 ‘욤’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스트롱 번호가 3117이고 구약성경에 2,300회 이상 나옵니다. 욤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거의 대부분 ‘날’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역본 지지자들은 암4:4에서도 욤은 ‘3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대해 킹제임스 성경 지지자들은 두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어가 원어를 교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의 지지자들은 비록 욤이 날을 가리키는 것이 맞지만 이런 경우는 신명기 등의 예를 볼 때 3일이 아니라 3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면서 영어가 원어를 향상시키거나 교정할 수 있다고 우기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독보적 우수성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주장에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3일이 아니라 3년이 맞는 이유는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영어가 원어보다 정확하거나 우수해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아무 근거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욤이라는 단어를 ‘년’으로 번역한 셈이 됩니다. 이런 식의 주장을 펴면, 킹제임스 성경 반대자들이 우리를 어리석다고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3일이 아니라 3년이 맞는다고 주장할까요? 그 이유는 욤이라는 히브리 단어에 ‘년’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5장 29절에 가보니 이 단어가 ‘년’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흠정역: 어떤 사람이 성벽을 두른 도시 안에 있는 거주하는 집을 팔았으면 그 집을 판 지 한 해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만 한 해 안에 그것을 무르려니와
KJB: And if a man sell a dwelling house in a walled city, then he may redeem it within a whole year after it is sold; within a full year may he redeem it.
여기에도 분명히 동일한 히브리어 ‘욤’이 쓰였지만 그 단어를 ‘날’로 하면 안 되기에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그 단어의 또 다른 의미인 ‘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현대역본들은 어떠할까요?
개역: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지 만 일 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
NIV: If a man sells a house in a walled city, he retains the right of redemption a full year after its sale. During that time he may redeem it.
NASB: Likewise, if a man sells a dwelling house in a walled city, then his redemption right remains valid until a full year from its sale; his right of redemption lasts a full year.
모든 현대 역본들도 여기만큼은 동일한 히브리어를 ‘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여기서 자의적인 번역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히브리어 욤의 뜻 가운데 ‘년’이 있음을 알았기에 여기서 정확하게 ‘년’이라 번역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37
다시 말씀드립니다. 히브리어 욤에는 극히 드물게 사용되긴 하지만 ‘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이런 용례를 알기에 이 구절들의 욤을 정확하게 ‘년’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이든, 히브리 문학 작품이든 본래 욤에 ‘년’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는데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욤을 ‘년’으로 번역했다면 그것은 번역자들이 실수를 범하였거나 심한 경우 독자들을 기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성경과 히브리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욤의 용례들을 폭넓게 연구한 뒤 대개 날을 의미하는 욤을 이런 경우에는 ‘년’으로 바르게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단어를 다르게 번역할 수 있다는 점은 영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도 적용되는 번역의 보편적 원리입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12
성경에는 용례가 단 한 번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다음이 그런 예의 하나입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는데,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1:14).
I have seen all the works that are done under the sun; and, behold, all [is] vanity and vexation of spirit.
이 구절의 vexation은 오직 전도서에만 10차례 나옵니다(전1:14; 17; 2:11, 17, 22, 26; 4:4, 6, 16; 6:9). 성경에 이 단어의 다른 용례가 없으므로 우리는 vexation에 상응하는 히브리어(스트롱 번호 7469, 7475)가 어떤 뜻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개역/NIV 등의 현대 역본들은 한결같이 ‘vexation of spirit’을 ‘바람을 잡는 것’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자, 이 경우에도 영어 성경 번역자들이 원어를 향상시키거나 교정해서 아무도 뜻을 알 수 없는 그 히브리어를 ‘영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번역했을까요?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열면 맨 앞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들은 원어뿐만 아니라 이전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하고 수정하여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과 그 이전 역본들의 역자들은 어떻게 이리 번역하였을까요? 히브리어에 능통했던 그분들은 히브리 사람들의 작품(대개는 성경 관련 작품)을 읽고 그런 단어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문맥에 의거하여 바르게 성경에 도입하였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04
다시 말해 영어 성경을 번역하는 누군가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다른 데서는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단어의 정의를 스스로 내려 성경을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 번역된 것은 원어 자체가 그런 뜻을 품고 있고 히브리 사람들의 저작에서 그리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히브리어는 오직 ‘괴롭게 하는 것’으로 번역해야만 정확한 번역이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성경들 가운데 유일하게 킹제임스 성경만 그렇게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심지어 뉴킹제임스 성경도 ‘바람을 잡는 것’으로 번역하여 불교 사상을 반영하였습니다.
중요한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절대로 원어를 향상시키거나 교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주장은 난센스이며 오류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혹시 주위에 누군가가 이런 주장을 펴거든 속히 그에게서 멀리 도망가야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성경과 히브리어/그리스어 용례를 샅샅이 살핀 뒤 모든 원어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대로 정확하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손에 들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단어들)이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번역되어 보존되어 있는 성경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당시 번역 과정을 통해 성경과 히브리어/그리스어 용례를 폭넓게 샅샅이 살핀 뒤 모든 원어를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번역하였습니다. 이 킹제임스 성경 위에 모든 건전하고 바른 신학이 정립되었고 이 성경으로 오대양 육대주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이런 좋은 성경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이 성경이 원어를 향상시키거나 교정할 수 있다는 극단적 주장을 펴는 것은 오히려 킹제임스 성경의 보급과 확산에 방해가 됩니다. 제아무리 동기가 좋더라도 사실을 왜곡한 비뚤어진 그릇에는 진리를 담을 수 없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을 그것이 있을 본래의 자리에 그대로 두고 정직한 마음과 맑은 정신으로 바르게 보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 숭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7
지극히 바르고 당연한 것도 그것을 주장하고 알리는 사람이 바른 논리와 상식을 가지고 주장해야 상대방에게 바르게 들립니다. 단순히 영한사전에서 뽑아낸 지식으로 영어만을 가지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만약 성경 번역/해석 등이 그리 쉽게 기계적으로 다 될 것 같으면 구글 번역기로 전체 영어 성경을 하루 만에 번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보물인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행로가 과격하거나 비상식적이며 비논리적인 주장에 의해 가로 막히지 않도록 우리 모두 맑은 정신을 가지고 바르게 생각하고 말하며 행해야겠습니다.
형제들아, 이해하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너희가 오직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될지라도 이해하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고전14:20).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5-05-12 18:28:32 | 관리자
참 이와 관련해서 어떤 분이 friends를 왜 ‘친구들’로 번역하지 않고 몇 군데서는 ‘친지들’로 번역했느냐고 묻기에 잠시 답을 드립니다.
그분의 친지들이 그것을 듣고 그분을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제정신이 아니다, 하였기 때문이더라(막3:21).
And when his friends heard [of it], they went out to lay hold on him: for they said, He is beside himself.
신약성경에 가서 friends를 찾으면 그리스어는 딱 두 개로 나옵니다(스트롱 번호 3588, 5384). 저희는 전자는 친지로 후자는 친구로 번역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문맥이 그리 말하기 때문입니다.
영어 사전에 가서 friends를 찾아봅시다.
⁂friend [frend] n.
벗, 친구.
(복수.) 근친, 육친.
복수로 쓰일 때는 친지로 볼 수 있다고 일반 사전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하게 friends를 ‘친지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정확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이런 데서 friends를 ‘친구들’이라고 해도 됩니다. 다만 ‘친지들’이 틀렸다고는 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이 경우 친지들이 영어, 원어, 우리말에 맞게 정확히 번역되었다고 믿습니다.
샬롬
2015-05-11 11:19:3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성경 번역 후 출판사를 운영하다 보니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이메일을 보냅니다. 지난 며칠 사이에도 서너 개가 왔습니다. 지난주에는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한 형제님께서 몇 군데 교정할 곳이 있다고 이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미국인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 다닙니다. 그래서 늘 흠정역 한영대역 성경을 보시다가 발견한 몇 가지 의견을 모아서 이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의견들을 보면서 영어를 그대로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보내 주신 교정 요청 의견을 일단 살펴보았습니다.우선 열정에 감사드립니다.주신 의견 중에는 반영에 어려움이 많은 것도 있습니다.제 고민이 늘어갑니다.영어식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요.그래서 다 그만두고 죽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여하튼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그 형제님은 그 뒤에 자기 의견을 다 반영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면서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따뜻한 위로와 함께 이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알면 알수록 하면 할수록 번역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서문에서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문을 남겼습니다.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번역은, 야곱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고 물을 길어 그것으로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주었던 것처럼(창29:10), 우물의 뚜껑을 열어 우리가 물로 나가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이나 물길을 그릇이 없이(요4:12) 야곱의 그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고 이사야서에 언급된 사람, 즉 봉인된 책을 넘겨받아 읽을 것을 요구받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원하건대 이것을 읽으라, 하면 그가 이르기를, 그것이 봉인되었으므로 내가 읽을 수 없노라, 할 것이요’(사29:11).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98
이처럼 번역은 글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번역을 통해 글에 생명력을 넣으려면 문맥에 따라 단어들의 뜻을 잘 고려해서 합당하고 적절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히브리어든 그리스어든 영어든 한 단어가 여러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단어 자체의 기본적인 뜻이 있지만 거기서 파생된 의미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1880년경에 나온 영국 개역성경(ERV)의 실패에 대해 <Manuscript evidence>를 기록한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ERV는 본문도 문제지만 기계적으로 번역해서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글이든 말이든 살아 있으려면 문맥에 맞게 같은 단어라도 잘 번역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독자들이 번역된 글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한국인 모두가 영어를 배우다 보니 흠정역 한영대역 성경을 보시고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잠시 번역의 방법을 소개하려 합니다.
영어로 peac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성경에 429회 나오는 이 단어는 흠정역 성경에 화평, 평화, 평안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왜 모두 평화로 번역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는 사례가 너무 많습니다. 영어로는 peace 하나로 화평, 평화, 평안 등이 다 표현되지만 우리말로는 안 되므로 각각의 문맥에 맞게 구분해서 번역해야 합니다. 그래야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듯이 합당하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으로 독자들을 이해하게 하고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peac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그리스어도 10여 개나 됩니다. 이것을 영어는 peace 하나로 번역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6장에서 대언자는 거짓 대언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얼마 있다가 바빌론 포로 생활을 해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실제로 평안 즉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이 없는데도 거짓 대언자들은 그들이 평안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런 경우의 peace는 당연히 불안에 대비되는 평안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거짓 대언자들]이 또한 내 백성의 딸의 상처를 조금 고쳐 주고는 평안(peace)이 없는데도 이르기를, 평안하다(peace), 평안하다(peace), 하였도다(렘6:14).
이런 식으로 같은 영어 단어라도 어떤 경우에는 미묘한 차이를 살려 달리 번역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번역이 살아납니다. 사실 예레미야도 그런 의미로 peace라는 단어를 사용했지 ‘평화 협정’을 말할 때의 ‘평화’처럼 ‘전쟁과 대비되는 peace’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영어만 가지고 번역하면 졸역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people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은 사람들도 되고 한 나라 백성도 됩니다. 특히 히브리어/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people과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인 people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사람들과 백성을 모두 완전하게 people로 번역하였습니다. 미국/영국 사람들은 앞뒤 문맥을 보고 people이 사람들인지 백성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로는 구분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문맥과 더불어 English men's concordance 등을 사용해서 바르게 수행될 수 있습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런 과정을 통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바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최종권위를 무시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저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무결함을 믿고 그 뜻대로 바르게 번역했을 뿐입니다.
이제 다음의 몇몇 사례를 통해 번역의 미묘함을 살펴보겠습니다.
1. 신10:13 등의 good 과 goodness
12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
여기의 답이 13절입니다.
“내가 이 날 네 행복을 위해 네게 명령하는 {주}의 명령들과 그분의 법규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냐?”
우리말로만 읽으면 여기의 ‘행복’은 ‘happiness’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영어로 가서 보시면 ‘good’으로 되어 있습니다.
To keep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 and his statutes, which I command thee this day for thy good
제게 이메일을 보내신 분은 아마도 이것을 오역이라고 생각하고 제게 알려주신 것 같습니다. 즉 핵심은 good을 왜 선 혹은 선함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일단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구절을 ‘네 선을 위하여’ 혹은 ‘네 선함을 위하여’라고 번역하면 말이 될까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는 good이지 goodness가 아닙니다. 즉 good 자체가 명확히 명사로 쓰였습니다.
그러면 good이라는 명사의 뜻을 사전에서 보시기 바랍니다.제 스마트폰에 뉴에이스 영한사전이 있어서 good의 뜻을 보았습니다.
good(명사): 1. 이익, 복리, 이로운 것, 2. 탁월한 점, 장점, 3. 선
즉 명사 good은 좋은 것, 복된 것, 유익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goo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베(스트롱 번호 2896)를 보니 이 말은 영어 KJB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beautiful, best, better, bountiful, cheerful, at ease, X fair (word), (be in) favour, fine, glad, good (deed, -lier, -liest, -ly, -ness, -s), graciously, joyful, kindly, kindness, liketh (best), loving, merry, X most, pleasant, + pleaseth, pleasure, precious, prosperity(번영), ready, sweet, wealth(재물), welfare(복지), (be) well ([-favoured]).
명사형의 경우 영한사전처럼 영어 KJB의 good은 prosperity(번영), wealth(재물), welfare(복지)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10:13의 경우 ‘네 행복을 위해’, ‘네 복을 위해’, ‘네 번영을 위해’, ‘네 복지를 위해’로 번역하면 우리말로 바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네 선을 위해’ 혹은 ‘네 선함을 위해’는 졸역(심하게 말하면 오역)입니다.
욥기 5장 27절, 시편 122편 9절의 good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것을 보라. 우리가 그것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이 사실이니 너는 그것을 듣고 네 유익을 위해(for thy good) 그것을 알라, 하니라(욥5:27).
{주} 우리 [하나님]의 집으로 인해 내가 네 복을(thy good) 구하리로다(시122:9).
good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을 ‘선함들’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상품으로 번역됩니다.
2. full, fill 등
친구끼리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너 배고파?” “아니, 나 배불러.”
이런데 우리말 ‘배’가 나온다고 영어 belly, stomach를 생각하면 영어가 안 되지요.
“Are you hungry?", "No, I am full."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번역했더니 어떤 분이 ‘full’을 “찼어”라고 번역하지 않아 오역이라고 한다면 맞는 지적일까요?
full, fill 등은 물론 ‘차다‘가 1차 의미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대화가 오가는 문맥에 따라 그것은 배부름을 뜻합니다. 영한사전에도 당연히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fill: ∼+목/ +목+전+명』 가득하게 하다, 채우다; ┅에 (잔뜩) 채워 넣다; ┅에 내용을 채(아무를) 배부르게 하다; 만족시키다, 흡족케 하다.
마태복음 5장 6절을 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요,Blessed [are] they which do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아마도 끝의 filled를 “그들이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요”로 하지 않아 유감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나 봅니다.
그런데 여기의 문맥은 먹고 마시는 것이므로 ‘배부르다’로 해야 맞는 번역입니다.
동일한 말이 마14:20에도 있습니다.
그들이 다 먹고 배불렀으며 남아 있는 조각들을 저들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거두었는데(마14:20)And they did all eat, and were filled: and they took up of the fragments that remained twelve baskets full.
물론 여기서도 fill은 ‘배부르다’의 의미입니다.이런 경우 fill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코르타조, 스트롱 번호 5526)는 음식을 먹는 데만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채우다’로 해야만 하는 fill이 있습니다.
또 아무도 새 옷감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그것을 메운 새 조각이 낡은 옷을 당기어 그 찢어짐이 더 심하게 되느니라(막2:21).No man also seweth a piece of new cloth on an old garment: else the new piece that filled it up taketh away from the old, and the rent is made worse.
이 경우 그리스말은 ‘플레이쏘’(스트롱 번호 4130 혹은 4138)이며 뜻은 ‘빈 공간을 채우다, 메우다, 성령님으로 혹은 지혜로 채우다’ 등입니다(눅1:67; 2;40 등 다수 구절).
따라서 번역자는 같은 영어 단어 fill이라도 각각의 문맥에 맞게 ‘배부르다, 채우다, 메우다’ 등으로 구분해서 번역해 주어야 합니다. fill을 다 ‘채우다’로 해도 뜻은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졸역이 됩니다.
비교적 영어에 능숙해 영어 성경을 즐겨 보시는 분들이 간혹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영어는 절대 원어를 넘지 못합니다. 영어는 원어를 정확하게 번역했을 뿐입니다. 혹시 여러분 주위에 어떤 사람이 영어로 원어를 교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거든 속히 그에게서 도망가야 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영어만능주의 사고에 빠져 있는 사람은 마치 성경 해석에 있어 항상 원어를 들먹이며 자기 마음대로 영해를 일삼는 신학자와 목사들 못지않게 오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어의 역할은 성경의 단어, 시제, 단복수 등을 원어의 단어, 시제, 단복수 그대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표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절대 영어로 원어를 고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지극히 합당한 원칙에 관련된 모든 질문에 그때그때 일일이 답하지 못하는 저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같은 영어 단어라도 원래 뜻이 다르면(이것은 문맥을 보면 알 수 있음) 구분해 주어야 바른 번역임을 이번 기회에 분명하게 인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즉 여러 원어(배부르다, 채우다, 메우다)가 하나의 영어 단어(flll)로 쓰였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길 때는 각각 문맥에 맞게 서로 다른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해 주십시오.
이런 것을 파악하지 못한 채 흠정역 성경에 (이런 식의) 오류가 수천 개나 된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합당한지는 현명한 독자들이 판단할 것입니다.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하나의 영어 단어를 두 개의 우리말 단어로 번역한 경우입니다. 이 경우 역시 번역자는 그 단어의 본래의 뜻을 온전히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가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레위기 27장을 보겠습니다.
맹세로 봉헌된 자 곧 사람들 중에서 맹세로 봉헌될 자는 결코 속량하지 못할 것이며 반드시 죽일지니라(29).
None devoted, which shall be devoted of men, shall be redeemed; [but] shall surely be put to death.
‘맹세로 봉헌된’에 해당하는 영어를 보시면 단순히 devoted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자가 ‘맹세로’를 자기 마음대로 집어넣었다고 항의하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번역자라면 계시록 22장 18절의 저주를 잘 알고 있으므로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단어를 첨가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22:18),
그렇다면 왜 ‘맹세로’가 들어갔을까요? 영어 devoted와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맹세로’의 뜻을 내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devoted는 영어 성경에서 단 7회 사용됩니다(레27:21, 28 2회, 29 2회, 민18:14, 시11:38). 옥스퍼드 사전을 보면 devoted는 ‘Vowed; appropriated or set apart by a vow’(맹세에 의해 할당된 혹은 구분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맹세로 봉헌된’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감을 가지고 성경을 기록한 모세의 의도가 전혀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도 ‘아주 바친 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참고로 21절을 보시면 devoted의 용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밭이 희년이 되어 나갈 때에는 맹세로 봉헌된 밭으로서 {주}께 거룩할 것이므로 그 밭의 소유권이 제사장의 것이 되리라.
여기서 devoted된 밭은 ‘주님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맹세로 봉헌된 밭’이며 그래서 그것은 거룩한 밭 즉 거룩하게 구별된 밭입니다. 2절이 이를 설명합니다.
29절 같은 경우도 이를 강조하기 위해 맨 앞에 none이라는 강세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28절에는 every라는 강세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즉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데서 ‘맹세로’를 빼면 이 성경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본래 주시고자 하는 의미를 살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봉헌된 것은 얼마든지 있지만 이 경우는 특별하게 전적으로 주님을 위한 용도로만 봉헌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살리기 위해 ‘전적으로’가 들어가는데 이것은 절대 번역자가 임의대로 첨가한 것이 아니라 영어 devoted와 히브리말 케렘(스트롱 번호 2764) 즉 ‘맹세로 운명이 정해졌음’을 나타내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번역입니다.
오늘은 잠시 번역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부디 이 글을 통해 흠정역 성경 번역의 원칙을 잘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은혜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합당하고 적확하게 번역해 나갈 수 있는지 그 이해를 깊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희는 흠정역 성경이 결코 무오하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218
번역을 잘못하면 반역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저희는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사이트 공지를 통해 부탁드렸듯이 앞으로 성경을 보시다가 교정 의견이 생기면 언제라도 기탄없이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이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추후에 교정판이 필요한 시점이 되면 주신 의견들 가운데 합당한 것들은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흠정역 성경 번역에 관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사이트에 올려 논쟁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연약한 지체들의 믿음을 파괴시키는 일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원해서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이러한 성원이 지금의 흠정역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http://lifebook.co.kr/final/bibles/bible_best.asp
이에 대해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앞으로도 하나님과 모든 성경 신자들 앞에서 더욱더 겸손한 자세로 이 사역을 유지해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5-05-11 10:11:07 | 관리자
여담으로 대전의 천복 순대국이 그렇게 맛있다고 합니다...(웃음)
2015-05-06 16:09:48 | 장윤석
안녕하세요?
아마도 이것은 의 2부에 나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M. R. 디한 박사님이 지은 것(피의 화학적 성질)입니다.
디한 박사님의 글에 따르면 선지 해장국 등은 신약시대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 중에도 그런 이유로 선지 해장국을 들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즐겨 먹지는 않지만 일 년에 한두 차례 선지 해장국을 먹을 기회가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먹습니다. 음식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해석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판단의 자유에 따라 잘 생각하시고 먹든지 먹지 않든지 정해서 실행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곰, 사슴 등에서 산 피를 빼서 먹는 것은 저는 반대합니다.
그것은 음식 차원의 일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믿음대로 잘 행하고 실족하지 않는 지혜를 주시기 원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 말이 다 옳은 것이 아니니 영혼의 자유에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22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너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허용하는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행복하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를 받나니 이는 그가 믿음을 따라 먹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롬14:22-23).
샬롬
패스터
2015-05-05 14:39:31 | 관리자
지금이 얼마나 위급한 시대인가 다시금 돌아보고
영적 옷깃을 여밀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바르게 인식하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하며 할 수 있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길 소원합니다.
2015-05-05 00:07:30 | 김대용
안녕하세요?
이미 다른 회원들을 통해 답변이 다 됐는데 처음부터 알 레이시의 책 등
궁금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고 세 번의 단계를 거쳐 글을 올리시는 이유가
바로 이 질문을 꺼내기 위한 과정이었나요?
결국 뭔가 정동수 목사님 설교가 출판사의 책과 안 맞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알 레이시가 우리에게 생피를 먹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금해야 할 규율이라고 한 것입니까?
음식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덕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요.
안식일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7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그조차 우리에게 율법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능하면 지키는 것이 좋은 것과 안 지키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자꾸 따져서 무엇하겠습니까?
또한 알 레이시는 생피를 먹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문명화가 덜 된 사람들이 주로 행하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그런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알 레이시가 다소 강경하게 말했지만 그의 이야기가 성경의 규례가 될 수 없고,
그가 반드시 금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므로 큰 줄기에서 결국 같은 것이지만
어떤 측면을 강조한 정도의 이야기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서니까 번역은 그대로 하지만, 평소 정동수 목사님이 밝히신 것처럼
레이시도 낙스, 로이드 존스, 웨이트 등등 누구도 100% 맞는 말만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은 정동수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보되 성경에 비추어 가장 큰 개념과 줄기를 먼저 이해한 후에
나머지는 거기에 맞추어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약 성도의 규례는 바울 서신을 통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고전 10:23)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적절하지는 아니하며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세워 주지는 아니하나니
이 말씀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각자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되고
그것을 율법주의적으로 남을 정죄하거나 또 다른 법을 만드는 일에 쓸 필요는 없습니다.
레이시는 자기 견해와 자기 양심을 밝힌 것으로 봅니다.
다만 책에 기록하니 마치 법처럼 보는 이들에게 짐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의 말이 법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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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관리자 형제가 알아보니 다른 사람의 정보로 가입하셨더군요.
이 사이트에는 게시판 정책이 있습니다.
본인 실명으로 가입하고 오직 가입한 사람만이 자신의 아이디로 글을 올리는 것은
사이트의 운영 원칙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자신을 숨긴 상태에서 올린 글로 어떻게 진솔한 믿음의 교제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또한, 이 곳은 질문용 게시판도 아닙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이 있어 이 글을 삭제하지는 않지만 자기 이름과 정보로 가입하시기 전까지는
더 이상 글을 쓰실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교제를 위해 사이트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예의와 품격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2015-05-04 23:27:15 | 김재욱
2015년 5월 3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gRX77yK9o1s
2015-05-04 22:44:25 | 관리자
2015년 5월 3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M9GMpKFXTWQ
2015-05-04 22:30:45 | 관리자
제가 의문이 생기는 부분은 저도 성도님 말씀대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예수안에 에서 출판한 예수님의 피 바로알기(알 레이시지음- 정동수 역) 235p 에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아래 있으며 그 명령은 율법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대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 있지 않았던 노아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 천년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보다 더욱 의미가 있는 사실은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은혜의 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법칙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하셨다는 점 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유효합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중략
236P
비록 우리 크리스챤들이 율법 아래 있지는 않으나 아직 까지도 피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규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리스챤들이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생명인 피가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있기 천년전에 즉 은혜시대에 벌써 노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는 율법시대에도 효과를 발생했고 율법시대가 지난 지금의 은혜시대에도 계속해서 효력을 내고 있습니다"
237p
"...피와 함께 그 육체를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왜냐면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피를 먹는 것이 믿음의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정동수목사님께서 적극 추천하고 있는 책으로 그 내용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내용과 동일한데 단지 이부분은
전혀 다른 주장이네요...
맞는 주장인가요? 아니면 번역이 잘못 된 것인가요?
아니면 알 레이시의 주장이 잘못된 것인가요?
2015-05-04 21:53:45 | 송성규
원격의료, 베리칩, 킹스맨(月刊 건강과 생명 2015년 5월호 건생時論)
차 한
사상 처음으로 내과 전공의 지원자가 미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한병원협회가 공개한 ‘2015년도 전공의 모집현황 자료’를 보면 성형외과, 피부과 등 비급여 과목 선호도는 여전히 높은 반면 내과와 가정의학과는 정원 미달 사태를 보였다. 그 주된 이유는 원격의료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경우 만성질환자를 주로 보게 되는 내과, 가정의학과의 위상이 하락하게 되리라 예측되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삼십여 년 의사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접하는 이러한 현상은 마치 쓰나미가 오기 전 발생하는 전조증상 중의 하나와 같다고 여겨진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겠지만 내과 전공의 지원자 미달 사태가 발생한 두 달 뒤 보건복지부는 현재 의료취약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원격의료 사업 대상을 2015년 말까지 140곳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농어촌 병원, 원양어선 선원, 거동이 불편한 고혈압·당뇨병 환자의 가정, 군 경계초소(GP), 교도소, 구치소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가 시행하고자 하는 원격의료의 명분은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아무리 의료계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외치며 원격의료를 결사반대 하더라도 원격의료는 (시기가 언제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지만) 시행되고야 말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IT 최강국이기 때문에 여론조성만 잘 되면 ‘미래 먹거리’라는 미명하에 놀라운 속도로 원격의료가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원격의료 시스템’이란 인터넷 망과 최첨단의 IT 기술을 이용한 획기적인 진료 시스템이다. 원격의료 시스템이 정착이 되면 지금 정부에서 시범적으로 하고 있는 원격의료 곧 환자의 건강을 실시간으로 체크하여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수준을 넘어 해외에 있는 환자들을 직접 수술하는 것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원격의료 시스템 구축에 핵심이 되는 기술이 ‘베리칩’(verichip)이다. 이것은 ‘확인용 칩’(verification chip)의 약어로 미국의 어플라이드 디지털 솔루션사에서 지난 2001년에 공개한 상품명이다. ‘무선 송수신 식별장치’(RFID)를 내장한 쌀알 크기의 이 칩은 애완용 동물이나 가축들의 관리를 위한 전자 인식표로 사용되었는데 200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인간의 몸속에도 심을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그리고 2010년 3월 소위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미국의 ‘건강보험개혁법’이 통과됨으로써 (건강보험제도를 강하게 추진하기 위한 방편으로) 모든 미국시민에게 베리칩을 이식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이 되었다. 2013년까지 준비기간을 갖고 2016년까지 유예기간을 거쳐 2017년부터 강제로 실시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지각 있는 이들은 세계 정부가 일반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오바마케어’를 통해 베리칩의 확산을 도모한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베리칩이 인간의 몸속에 들어올 때 어떠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요즈음 장안의 화제인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가 그 답을 잘 제시해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었듯이 사람의 호르몬 또는 신경전달물질을 자극해 폭력적으로 만들어 서로 살육하게 하는 등 사람의 생각과 육체를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베리칩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가 아니다. 킹스맨의 주요한 두 장면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고 하였지만 그 뜻은 영화의 결말과 달리 현실에서는 베리칩을 통해 온 인류가 통제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애완견에 베리칩을 주입하고 있다. 베리칩의 전신일 수밖에 없는 스마트 워치도 어느 덧 우리 삶의 일부가 되고 있다. 언젠가는 미국에서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원격의료 정착’과 ‘IoT(사물인터넷) 산업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베리칩 이식이 강행될 것이다. 아마도 송도 신도시가 세계적인 시범 지역이 될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 베리칩을 심어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신세계질서(NWO; New World Order)는 바야흐로 우리의 목전에 와 있다. 그야말로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말세지말(末世之末)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계13:16-18).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에게 그들의 오른손 안에나 이마 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수를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더라. 여기에 지혜가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볼지니라. 그것은 어떤 사람의 수요,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계13:16-18)
2015-05-04 10:40:47 | 관리자
몸통의 글을 이해하고 있으면 논란의 소지가 있는 꼬리의 글들의 오해가 풀립니다.
꼬리의 글들로 몸통을 흔들려고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관점에서 글을 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논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건전한
나의 논리를 정립해 나갔으면 합니다. 뒷풀이 글도 기대가 됩니다.
2015-05-04 09:09:16 | 조양교
부족하지만 제가 깨달은 것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를 먹는 것을 엄중하게 금지한것은 바로 속죄제사에 담긴 의미 때문입니다. 속죄제사를 할 때 제물의 피를 보면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제물을 통한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회개해야 하는데 평소에 피를 음식처럼 먹는 습관이 있다면 대속을 통한 회개와 은혜보다는 피로 만든 음식의 맛을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피에 대한 용도는 딱 하나 대속인 것입니다, 아울러 더 중요한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하고 그 속에 담긴 영생을 깨닫고 믿게끔 하기위해 피를 속죄의 용도외에 다른 것으로의 용도는 엄중히 금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성취하신 후에는 피에 관련된 율법의 조항들은 더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성취하셨기 때문이지요. 사도행전 예루살렘 회의에서 멀리하라고 한 이유는 바로 15장 21절에 있습니다. 각성에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전하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놓고 피를 먹고 하면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될수 있기에 삼가라고 한것입니다. 율법처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끊어지는 게 아니고, 또 절대 먹지 마라 한것도 아니고 다만 멀리하라 한것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지금 가장 민감한 시기에 유대인들과 충돌하면 결코 좋을것이 없기 때문에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멀리하자고 의견을 제시한 것일 뿐이죠
사실, 현재 우리 주변에 유대인 회당도 없거니와 우리나라는 선지해장국과 순대 등등 피가 섞인 음식 문화가 많으니 위에 사항은 문제될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지내면서 어떻게 피로 만든 음식을 먹고 그리스도인일수 있냐고 항변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뿐이였습니다. 이 때문에 수혈도 거부하는 그들의 교리가 있지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오히려 지금 우리가 피에 대한 계명 때문에 먹는 것이 꺼림직하거나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에 생명이 있으니 먹지 말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제대로 깨닫게 해주려고 만드신 율법인데 그 보혈을 믿고 깨달은 우리가 본질을 못보고 자꾸 먹지 마라는 계명에 얽매이게 되는 부작용이 생길수 있기 때문이죠..뭐 비본질적으로 다른 것들이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한다면 우리의 자유를 스스로 절제하며 그사람들을 잘 섬겨줘야 하지만 적어도 피에 관련된것은 이 속에 담긴 바른 의미를 전달해 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원에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공로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더이상 피에 대한 계명을 꺼림직하게 받아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증거하기 위한 그림자이자 이정표였을 뿐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선지 해장국이랑 순대국 참 좋아합니다! 무지 맛있어요 괜히 꺼림직하게 생각않하셔도 됩니다 맘껏 드세요~ 아주 맛있어요 ㅎㅎ
2015-05-02 21:37:50 | 이성일
그러면, 각 전치사가 사용된 문맥을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36절)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신 아버지 입다를 만나자마자, 딸은 참담한 마음으로 탄식하시는 아버지를 봅니다.
- 35절과 36절 사이에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즉, 탄식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딸은 영문을 몰라 그 이유를 묻습니다. 입다는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해 줍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서원하고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왔는데 그만 네가 나왔구나. 아버지는 너를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 비로소 영문을 알게 된 딸은 먼저 ‘내 아버지여’라고 아버지를 부르고는 말을 잇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서원을 들으시고 암몬 족속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셨으니까 서원을 제게 행하셔요라고 동의하고 권해 드립니다. 이때 딸이 아버지에게 즉답으로 한 말은 단순히 내게(to me)입니다.
-
(37절)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 입다는 이제 자기에게 생긴 커다란 운명의 변화를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위해 ‘{주}를 위하여 드린 자’가 되는구나. 내가 원해서 택하는 삶은 아니지만 ‘{주}를 위하여 드린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나도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지. 다만, 처녀로 평생을 살면서 여자로 태어나 메시야를 수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너무 애통한 일이구나.”
- -그래서, 딸은 아버지에게 그 애통함을 풀기 위해 아버지에게 두 달간의 말미를 구합니다. “내게(for me) 이 일을 행하시되”라고.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쓰심으로써 우리는 입다의 딸의 마음이 어떠함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for me)’라는 것이 딸의 마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 이때까지는 입다의 마음이 자기 실수로 인한 비참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39절)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 두 달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딸은 친구들과 함께 산에서 실컷 애곡하고 마음의 정리와 준비를 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헌신의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 왔습니다.
- 입다도 처음에는 예기치 못하게 딸을 하나님께 드려 헌신하게 될 줄 몰라서 참담한 심정이었으나, 두 달의 기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겠습니다.
-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전쟁을 이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내 딸을 거룩히 구별해서 받으시겠다고 딸이 그때 집 문에서 나를 맞이하게 하셨겠지.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딸에게 선하게 해 주심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자. 딸에게도 이것이 더 나은 일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 그래서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with her)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쓰심으로써, 우리는 입다가 딸과 함께(with her) 마음을 합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딸은 자신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주}를 위하여 드린 자’로 드리는 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 다른 전치사가 동일한 문맥에서 사용된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중의법을 사용하여 입다의 딸의 마음과 입다의 마음을 각각 37절과 39절에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중의법이라는 수사법이 황진이도 알고 춘향전 작가도 알고 또 저까지도 알고 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수천 년동안 말씀해오신 하나님께서 그런 걸 모르고 그냥 아니면 어휘 자랑하시려고 그렇게 다른 전치사들을 동원하셨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기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짐짓 그렇게 다른 단어로 우리에게 성경 기록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여 보았고,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뒷풀이)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입다를 포함한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하려면 자기에게 시간이 부족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야기할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그런데, 과연 우리는 입다에 대해 믿음의 본이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개역(개정) 성경을 쓰는 한국 교계에서는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죽었다고 버젓이 죽은 사실을 추가해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게 믿고, 따라서 ‘입다’와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를 연결시켜 생각하기에 심히 곤란을 느낍니다. 단지 서원해서 전쟁 승리하고 돌아온 것 하나죠. 거기다 잘못된 서원으로 딸을 번제 헌물로 바친 비운의 사나이 정도. 인터넷에서 입다란 검색어로 찾아보면, 내용 소개는 나와 있어도 어느 한 사람 제대로 입다를 본받을 믿음의 사람으로 실질적인 내용을 소상하게 거론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 분은 솔직히 입다가 믿음의 본으로 히브리서에 올라 있지만 자기는 별로 찾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작고하신 박윤선 목사의 주석에는 입다의 딸이 죽지 않고 처녀로 살아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나실인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입다가 동생들에 의해 집을 쫒겨나서 돕 지방에 거하는 동안 허영심 많은 자들이 찾아와서 나다녔다는 기록을 통해 입다의 마음 속에 이복 동생들에 대한 미움의 골이 깊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쫒겨나기 전까지는 길르앗 지방의 머리인 아버지 길르앗의 슬하에서 교육도 잘 받고,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장남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지만, 아마도 아버지 별세 후에 집을 쫒겨나서 바깥으로 나다니면서 자신의 믿음과는 반하는 방황하는 세월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입다가 장남이라고 쓴 것은 단지 저의 추정이며, 몇째 아들인지는 성경 기록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딸을 사랑하였고 집안에서는 바깥에서처럼 행동하지 않았나 봅니다. 입다의 딸이 한 말을 볼 때, 1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그 나이에 딸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잘 교육된 순종하는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을 고려하여 자신의 운명을 주저하지 않고 바꾸겠다고 작정하었습니다. 39절을 읽으면서 저는 산에서 애곡하고 돌아온 딸과 함께 서원 의식을 행하는 입다의 모습을 그려 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애달프고 또 한편으로는 어쩌면 저렇게 딸을 훌륭하게 믿음으로 키웠을까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입다가 믿음의 본이 되는 장로 중에 한 사람으로 등재된 것은,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승리하게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미움의 골이 패인 동생들에 대해서 자기가 길르앗의 머리가 된 후에도 아무런 복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처럼 자신만 믿음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외동딸까지 믿음의 선한 교육을 시켰다는 점에서 좋은 평판을 후세에서까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가 승리하고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입다의 딸이 나오게 하심으로써, 이전에 이방신들을 섬기다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간구하는 이스라엘을 돌아보셔서, 입다가 비천한 삶을 살다가 전쟁 승리로 일약 길르앗의 머리가 됨으로써 교만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사사로서 올바로 행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이런 일들이 생기도록 하셨을 것으로도 저는 생각합니다.
(또 뒷풀이 예고)
이 글을 읽으시고 전혀 감흥이 없으시거나, 아직도 딸이 번제 헌물로 불태워졌다고 믿으시기 때문에 마음이 열리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해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에 대한 문법적 설명을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선하신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생활을 해 나가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15-05-02 21:17:29 | 최상만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히 1: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은 정말 다양합니다.
처음에는 말(말씀)으로만 하셨습니다. (“……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네가 어디 있느냐?”)
환상으로도 꿈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는 입에서 입으로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천둥소리, 비, 우박,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와 고멜을 사용하여 시청각 교육을 통한 말씀으로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신 후에는 하늘로부터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더 놀라운 방식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기록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성경 기록은 또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해 주십니까?
율법서로, 역사서로, 잠언, 시가, 서신, 예언서로……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을 구사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다양한 방식 중 제가 착안하게 된 또 하나의 방식을 소개드립니다. 다만, 하나님을 선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믿으시는 분들은 동의하실 수 있으나, 하나님을 악하다고 믿으시는 분들은 결코 이해되지 않을 또 하나의 방식입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황진이의 시입니다.
이 시의 내용 자체로는 “숲이 우거진 아무도 없는 산 위에 높이 떠 온통 산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과, 그 아래 계곡을 따라 맑고 푸른 물이 거침없이 흘러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쉬임없이 흘러 가는 우리 인생은 다시금 되돌이켜 살 수 없음을 알고 여유를 내어 잠시 인생을 즐겨 보라.”는 뜻을 담은 시이며, 수학학에서는 “중의법”의 예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 시에서 벽계수는 계곡을 타고 흘러 내리는 맑고 푸른 물이지만, 이 시를 듣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또 명월은 밝은 달이지만 이 시(시조)를 지어서 들려주는 기생의 이름(기명)이기도 합니다. 한 단어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맑고 푸른 시냇물과 밝은 달로 시의 내용을 이어가는 것이지만, 속으로 정작 나타내고자 하는 말은 벽계수와 명월이란 사람 이름들입니다.
제가 보기로, 하나님께서도 이런 중의법을 사용했다고 생각되는 성경 기록이 있습니다. 사사기 11장입니다.
(11:30) 입다가 {주}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암몬 자손을 틀림없이 내 손에 넘겨주시면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떠나 평안히 돌아올 때에 무엇이든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확실히 {주}의 것이 되리니 내가 그것을 번제 헌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
(11:34)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이로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딸이 없었더라.
(11:35) 그가 그녀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네가 나를 심히 참담하게 하였으며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도다.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매
(11:36) 그녀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11:37)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11: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11:39)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위의 글을 읽어 보시면, 어디에 그런 것이 있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번역의 특성상 우리말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해당 구절들을 뽑아 보았습니다.
(11:36) And she said unto him, My father, if thou hast opened thy mouth unto the LORD, do to me according to that which hath proceeded out of thy mouth; …………………
내게 행하소서
(11:37) And she said unto her father, Let this thing be done for me: ………………
내게 행하시되
(11:39) And it came to pass at the end of two months, that she returned unto her father, who did with her according to his vow which he had vowed: and she knew no man.
그녀에게 행하니
우리말로는 모두 ‘내게’, ’내게’, ’그녀에게’로 번역된 말들이 영어로는 ’to me’, ’for me’, ’with me’로 각각 다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to’, ’for’, ’with’ 모두 ‘~에게’란 의미가 있으며, 우리말 번역처럼 ‘~에게’로 읽어서 자연스럽게 의미가 통합니다.
다만, 왜 동사가 동일한 ‘do’인데, 하나님께서는 세 개의 다른 전치사들을 사용하셨느냐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의법을 사용하셔서 숨은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 전치사의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to
전치사
1. (이동 방향을 나타내어) …로[에], …쪽으로
8. 어떤 행동의 영향을 받는 대상을 나타냄
What have you done to your hair?
for
전치사
2. (…을 돕기) 위해
What can I do for you?
3. …에 대해
They are anxious for her safety.
with
전치사
1. …와 함께
3. …로, …을 써서[이용하여]
Cut it with a knife.
6. …에 대해, …에(게)
With these students it's pronunciation that's the problem. 이들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발음이
문제이다.
위에서 보듯이 세 가지 다른 전치사가 모두 우리말로 ‘~에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for와 with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중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for는 ‘~을 위하여’, with는 ‘~와 함께’라는 뜻도 가지고 있죠.
2015-05-02 21:15:25 | 최상만
네~ 그렇습니다.
3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
4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나니
5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느니라.(딤전4:3~5)
디모데전서 4장에 하나님의 창조물로 만들어진 음식 중에 감사함으로 받아서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피를 유독 특별하게 생각하시는데 여러 나라에서 피 또한 하나의 음식이 된 지 오래입니다.
우리도 선지와 순대 등을 먹습니다.
다음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 영상을 시청해 보세요.
*기독교의 권리장전 (행 15:1~31)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330
설교 영상이 시작되고 33분 정도 지난 후에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참조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5-05-02 20:55:02 | 김대용
답변 갑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음식에 관하여는 이견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따르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피는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피에 대한 것도 음식과 똑같이 적용해도 될까요?
2015-05-02 19:08:34 | 송성규
송성규 형제님 안녕하세요^^
문의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신약 시대 음식에 관한 바른 기준은 무엇입니까?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om&write_id=4592
지혜가 부족한 사람의 답변이나마 도움을 얻으시기 원하며
진리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5-02 18:59:50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