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12405개
질문: 최고의 사본들이 요즘 나오는 새 역본들을 뒷받침한다고 하는데요?   답변: 아닙니다. 최고의 사본들은 오히려 「킹제임스 성경」을 뒷받침해 줍니다.   요즘 나오는 새 역본들은 5,000개가 넘는 신약성경 필사본 중 단지 다섯 개 정도에 의해서만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킹제임스 성경」 비평 학자들은 이 필사본들이 「흠정역 성경」 역자들이 사용한 필사본들보다 낫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들 중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즉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자산인 ‘바티칸 사본’(Vaticanus)과 ‘시내 사본’(Sinaiticus)은 실수투성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시내 사본’은 10명이나 되는 다른 작가들에 의해 정정되고 변경되었습니다. ‘바티칸 사본’에서는 매우 조잡한 솜씨의 증거가 발견됩니다. 단어들(Words)과 절(Phrase) 전체가 연달아 두 번 반복되거나 완전히 삭제되어 있습니다. ‘바티칸 사본’ 전체는 펜을 들고 글자마다 수정을 가한 어떤 인물 혹은 인물들에 의해 훼손되었고 또한 그런 인물들의 정체를 규명하기조차 매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두 사본 모두 성경에서는 볼 수 없는 책들 즉 성령님께서 영감으로 주시지 않은 비성경적인 책들인 외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수들을 잔뜩 갖고 있지만 이 신뢰할 수 없는 필사본들의 재질은 매우 우수합니다. 그 사본들은 질 좋은 동물 가죽 즉 벨럼으로 만들어졌으며 훌륭하게 제본되어 있습니다. 그 사본들의 본문은 전혀 가치가 없지만 그 외양은 실로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표지로 그 책을 판단할 수 없다.”라는 속담을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 표지들은 매우 아름다우나 그 본문들은 비난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잘 알려진 개악(改惡)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신미국표준역」(NASB)이나 「신국제역」(NIV) 같은 많은 새 역본들의 기반이 되었고 그 결과 이런 역본들은 오류투성이로 신뢰할 수 없는 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킹제임스 성경」에 의해 대표되는 필사본들은 최고의 질을 가진 본문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의 사본들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사용한 사본들임을 알게 됩니다.
2014-12-02 13:31:02 | 관리자
  질문: 1611년 이래로 「킹제임스 성경」도 줄곧 개정되어 오지 않았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개정이 아니라 몇 차례의 교정이 있어 왔을 뿐입니다. 1611년에 탄생된 「흠정역 성경」의 권위를 심하게 흔들려는 비평가들의 최후 배수진 가운데 하나는 소위 개정(改正)이라는 것으로 시비를 삼아 장난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대적들 곧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역사적 사실과 사본학적 증거와 성령님께서 이루신 명백한 증거들을 들이대며 자기들의 빈약한 주장을 뒤엎어 버리자 궁극적인 패배를 맛보지 않으려고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요새로 도피합니다. 일단 이 요새 안에 들어서면 그들은 자기들의 대적들에 대해 자신 만만해 하고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십니까? 1611년 판입니까, 1629년 판입니까? 아니면 1769년 판입니까? 이 같은 공격에 대해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충격을 받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면 그들은 이 혼란한 틈을 타서 재빨리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들의 성안에 들어가 성문을 걸어 닫는 순간 그들은 자기들의 요새가 리건(David F. Reagan) 박사라는 사람에 의해 이미 조직적으로 파괴되어 완전히 허물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리건 박사는 미국 테네시 주 낙스빌에 있는 트리니티 침례교회의 목사입니다.  그는 「1611년 킹제임스 성경, 초기 개정 신화」(THE KING JAMES VERSION OF 1611, THE MYTH OF EARLY REVISIONS)라는 책자를 저술하여 「킹제임스 성경」의 초기 수정판에 얽힌 신화 즉 꾸며낸 이야기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폭로했습니다. 다시 말해 리건 박사는 「흠정역 성경」 비평가들의 마지막 피난처를 파괴시키는 일을 훌륭히 수행해 냈습니다. 이에 필자는 그가 발견한 것을 보다 개선시키려 애써야 할 이유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으므로 그의 허가를 얻어 그의 소책자 전편을 여기에 소개하려 합니다. 영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개정 신화(리건)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20
2014-12-02 13:24:56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의 사도행전 12장 4절에 나오는 ‘이스터’ 즉 ‘부활절’은 ‘파스카’라는 단어를 오역한 것이므로 다른 역본들과 같이 ‘유월절’로 번역해야 옳지 않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사도행전 12장 4절의 ‘파스카’를 ‘부활절’로 번역한 것은 정확한 것입니다. 다음의 글이 그것을 잘 설명해 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4절에서 ‘이스터’(Easter) 즉 ‘부활절’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스카’(Pascha)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29번 나옵니다. 그중 28번은 주 하나님께서 이집트(애굽)를 지나시며 이집트의 처음 난 모든 것들을 죽이시고(출 12:12) 이스라엘 민족을 400년 간의 종살이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날 밤과 연관되어 ‘유월절’(Passover)로 번역되었습니다. “완전한 성경이 있다.”라는 생각에 반대하는 많은 이들도 ‘Pascha’를 이렇게 번역해 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여하신 「흠정역 성경」에서 ‘이스터’라 번역된 단어를 발견하고는 「흠정역 성경」도 완전하지 않다는 증거를 포착했노라고 상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을 위해 참으로 좋은 소식이 있는데 그것은 이 문제에서도 그들이 또 틀렸다는 사실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스터’는 고대 이교도들의 ‘아스타르테’(Astarte) 축제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쉬타르’(Ishtar)로도 알려져 있고 ‘이스터’(Easter)로도 발음됩니다. 이 축제는 항상 4월 하순경에 개최되었는데 사실 초기의 ‘이스터’ 축제는 겨울철이 지난 뒤 땅이 다시 부활하는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축제에는 다산과 번식을 기념하는 의식도 수반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음란 잡지인 「플레이보이」의 상징인 토끼와 달걀 등이 ‘이스터’ 축제일의 상징물로 쓰였는데 그것은 이것들이 번식력 즉 다산으로 매우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스터’ 축제의 주인공은 여신 ‘아스타르테’였습니다. 이 여신은 성경에서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 렘 7:18; 44:17-25)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담무스(Tammuz, 겔 8:14)의 어미이자 또한 그의 아내였습니다! 이 가증한 축제 의식은 ‘이스터’ 아침에 동틀 녘에 행해지곤 했습니다(겔 8:13-16).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의 기록에서 우리는 이교도들의 ‘이스터’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 제기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4월 중순(14일)에 개최되었고 이교도들의 축제였던 ‘이스터’는 같은 달에 좀 더 늦게 개최되었는데 그렇다면 사도행전 12장 4절에서 헤롯이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아닌 이교도들의 ‘이스터’를 언급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일 헤롯이 구체적으로 유월절을 언급했다면 ‘Pascha’를 ‘이스터’ 즉 ‘이교도들의 부활절’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은 틀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정말로 이교도들의 축제 절기인 ‘이스터’를 언급했다면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은 오늘날 인쇄되고 있는 성경 중에서 이 부분을 가장 정확히 번역한 유일한 성경이기에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4절에 있는 ‘이스터’(Easter)에 관한 혼란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으로부터 조언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수수께끼의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열쇠는 4절에서 발견되지 않고 3절에서 발견됩니다. 또 그가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였는데 (그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교절과 유월절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베드로가 ‘무교절 기간’(days of unleavened bread)에 붙잡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행 12:3).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첫째 유월절로부터 조사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절기는 주님께서 이집트의 처음 난 모든 것을 치셨던 밤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 밤 이스라엘 민족은 양을 죽여서 좌우 문기둥과 인방에 그 피를 바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출 12:4-5). 자, 이제 성경이 첫 유월절과 무교절 즉 ‘누룩 없는 빵을 먹는 기간의 날들’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지 살펴봅시다(출 12:13-18). 13  그 피가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있어 너희를 위해 표가 되게 할지니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이 날은 너희에게 기념일이 될지니 너희가 이 날을 너희 대대로 주를 위한 명절로 지키고 규례에 따라 그것을 영원토록 명절로 지킬지니라. 15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16  첫째 날에 거룩한 집회가 있으며 일곱째 날에도 너희에게 거룩한 집회가 있으리니 이 두 날에는 각 사람이 먹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너희 중에서 오직 그 일만 할지니라. 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킬지니 이는 바로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대대로 이 날을 지키되 규례에 따라 영원토록 지킬지니라. 18  첫째 달 곧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그 달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출애굽기 12장 13절에서 우리는 유월절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유래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의 피가 문에 표시되어 있는 모든 집을 ‘넘어가시리라’(pass over)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Passover’는 ‘넘어감’을 의미하며 따라서 ‘유월절’은 ‘넘어간 날’입니다. 우리는 유월절 이후에(출 12:13-14) 유대인들이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이 기간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이며 그래서 무교절이라 부릅니다! 18절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무교절을 준수해야 하는 기간이 4월 14일부터 21일까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1) 이 종교적인 절기들은 민수기 28장 16-18절에 더욱더 명백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달 십사일은 주의 유월절이며 또 이 달 십오일은 명절이니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며 첫째 날에는 거룩한 집회로 모일 것이요, 너희는 그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16절에서 우리는 유월절이 그 달의 14일만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즉 15일부터는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이 시작됩니다(신 16:1-8). 1  아빕 월을 준수하여 주 네 하나님께 유월절을 지키라. 아빕 월에 주 네 하나님께서 밤에 너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느니라. 2  그러므로 너는 양과 염소 떼나 소 떼에서 취하여 주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주 네 하나님께 유월절 희생물을 드리되 3  그것과 아울러 누룩 있는 빵을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누룩 없는 빵 곧 고난의 빵을 그것과 아울러 먹을지니라. 이는 네가 이집트 땅에서 급히 나왔기 때문이니 이로써 네 평생 동안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4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내에서 누룩 있는 빵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첫째 날 저녁때에 네가 희생물로 드린 고기 중 조금이라도 온 밤이 지나도록 남겨 두어 아침까지 이르게 하지 말며 5  또 유월절 희생물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모든 성문 안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주 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네가 이집트에서 나오던 때 곧 저녁에 해 질 때에 거기서 드리며 7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실 곳에서 그것을 구워 먹고 아침에 돌이켜서 네 장막으로 갈 것이니라. 8  너는 엿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주 네 하나님께 엄숙한 집회로 모이며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라. 1절의 아빕 월은 지금의 태양력으로 4월인데 원래는 히브리 민간력으로 7월이었지만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기 위해 종교력의 1월로 삼은 달입니다(출 12:2). 위의 신명기 구절에서 우리는 유월절 양이 그 첫날밤에 희생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신 16:1). 동틀 녘(겔 8:13-16)이 아니고 해질 때(신 16:6)에 유월절을 기념했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실입니다. 역대기하 8장 13절에서 우리는 무교절이 연중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3대 절기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명령에 따라 날마다 정한 비율로 안식일과 월삭과 한 해에 세 번 지키는 엄숙한 명절들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 드렸더라. 유월절은 항상 무교절 전에 있었습니다. 역대기하 30장에서 보면 정월에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이월에 지키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날짜는 항상 같았습니다. 그때에 둘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으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고 번제 헌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이르러 … 예루살렘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주를 찬양하며 큰 소리 나는 악기로 주께 노래하였고 (대하 30:15, 21) 포로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켰으니 … 이레 동안 기쁘게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주께서 그들을 기쁘게 하시고 또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리사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의 공사를 할 때에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하셨기 때문이더라. (스 6:19, 22)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조사한 결과 사건의 순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첫째, 4월 14일에 양을 잡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입니다. 14일 이후에 행하는 그 어떤 사건도 유월절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둘째, 4월 15일 아침부터 무교절로 알려진 기간 즉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이 시작됩니다.따라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유월절이 언급될 때마다 이 명절이 4월 14일 저녁에 ― 결코 한 주간 내내가 아님 ― 먹어야 하는 음식 즉 유월절 어린양과 관련된 명절임에 주의해야 합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 ‘기간’(days)이 유월절(day)로 언급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의 천사가 하룻밤 동안에 이집트를 넘어갔지 결코 잇따라서 7일 밤 동안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자! 이제 사도행전 12장 3-4절을 봅시다. 또 그가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였는데 (그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 그가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군사가 넷씩인 네 소대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것은 이스터가 지난 뒤에 그를 백성에게로 끌어내려 함이더라. 3절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무교절 기간(4월 15-21일 사이)에 체포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때는 이미 유월절(4월 14일)이 지난 뒤였습니다. 헤롯이 이 구절에서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을 언급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번 유월절은 일 년 후에야 오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1년 동안 베드로를 감옥에 넣어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며칠 있으면 이교도들의 축제 성일인 ‘이스터’가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헤롯은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던 이교도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킬 까닭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유대인들을 화나게 할까 봐 유월절이 끝나길 기다렸을 것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두 가지 큰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더 이상 유대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교와 절교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헤롯의 행동에 화를 낼 까닭이 없었습니다. 둘째, 헤롯이 유대인들이 종교적 축제일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원치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므로 유월절이 지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유월절 기간 중에 예수님을 죽인 바 있습니다(마 26:17-19, 47). 그들은 또한 헤롯이 야고보를 죽인 것을 보고 흥분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중들은 종교적 축제 기간 중에 ― 축제 이후에가 아니라 ― 얼마든지 난폭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로마인으로서 헤롯의 위치를 생각해 보아야만 하며 또한 헤롯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날을 기념하는 일로 매우 유명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마 14:6-11). 사실 마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헤롯이 자기의 생일 축하 기간 중에 하나님의 사람을 기꺼이 죽이려 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이 유월절이 이미 지난 뒤인 무교절 기간에 베드로를 체포했음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 기간은 4월 21일에 끝났을 것이고 그 즉시 이교도 헤롯이 지키던 이교도들의 축제 즉 ‘이스터’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이스터’까지 기다리기 원했기 때문에 베드로를 무교절 기간 중에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마 26:17-47)이나 로마인(마 14:6-11)이나 다 종교적 축제 기간 중에 사람을 죽이려고 했으므로, 헤롯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축제 기간 중에 ‘베드로를 죽이는 즐거움’을 갖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대신에 그는 자기 자신이 지키던 이교도의 축제일인 ‘이스터’까지 기다려서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베드로가 죽는 것을 보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령 충만한 우리의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파스카’를 ‘이스터’ 즉 ‘이교도들의 부활절’로 바르게 번역한 것이 하나님의 큰 섭리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확실하게 유대인들의 유월절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경에서 사도행전 12장의 ‘이스터’를 ‘유월절’로 바꾼 것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며 동시에 그 당시 상황의 진실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2014-12-02 13:08:43 | 관리자
답글 감사합니다. 이미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책을 빌려드린 분에게서 당장에 좋은 반응이 나오긴 아마도 어려울 겁니다. 세상이 참으로 점점 악해져 가지만 그래도 실망하거나 지치지 마시고 지혜롭게 진리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2014-12-01 14:57:00 | 김대용
시간 내어 답변해 주신 것 참 고맙습니다. 진리의 말씀에 서 있으면 참으로 분별력이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는 책이 무조건 읽히지 않으니까요.^^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일반 성도들은 세계적인 영적 추세와 흐름을 알지 못하고 나타난 현상이나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에 십상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전 '하나님의 대사'란 책을 권해 준 구역장님에게 블룸필드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 를 빌려드렸답니다. 이번 주 어떤 반응이 나올지 자못 궁금합니다.
2014-12-01 12:45:44 | 박혜영
이렇게 성경지킴이 사이트에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저 이해하셔야 할 것은 고린도전서가 기록될 당시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아 완벽한 다른 나라 말(타언어)로 복음을 선포하고 기도할 수 있던 시대입니다. 이제 고린도전서14장 13~17절을 주해하면 이렇습니다. ------- 알지 못하는 언어(완벽한 다른 나라 말)로 말하는 사람은 항상 그것을 본인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통역할 수 있기를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본인의 영은 기도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물론이고 그 기도를 듣는 다른 사람도 이해해서 어떤 깨달음과 영적 유익을 얻는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기도하고 노래할 때 그것을 하는 당사자나 듣는 타인이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구사하는 완벽한 다른 나라 말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내가 무슨 말로 기도하고 노래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진리의 선포와 거룩하고 경건한 찬송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아멘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하는 기도와 찬송을 통해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영적 유익을 끼치고 교회를 굳건히 세우는데 아무 일조도 하지 못하는 무익한 일이 될 뿐입니다. ------- 여기서 “영은 기도하거니와”나 “영과 함께 기도하고”라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람의 영과 혼과 몸 중에 영(Pneuma)이 하나님과 소통, 믿음, 소망, 경외함, 기도의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고전3:1). 아래의 글과 선도도 참조하십시오. *영, 혼, 몸에 대한 이해와 성경비교분석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315 *사람의 세 가지 본질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consult&write_id=76&cate_name=%EC%84%B1%EA%B2%BD+%EA%B5%90%EB%A6%AC 이런 부분들을 살펴볼 때 성경에 의하면 혼으로 기도한다고 하기보다 '영으로 기도한다.', '영과 함께 기도한다.' 등의 표현이 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저는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은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사람들의 자료들을 보면 이 책의 저자는 공공연하게 강연에서 사악한 신사도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신디 제이콥스’를 지지하고 추켜세우는 발언을 하는 등 경계해야 할 부분이 많은 사람임을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도 참조하세요.(단, 해당 글이 실린 블로그의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보증하지 못합니다.) *신'사도' 신디 제이콥스를 추어올리는 "하나님의 대사" http://blog.naver.com/yoochinw/130096114061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12-01 11:00:57 | 김대용
성경의 모든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꿰어 맞추는 무리한 추측을 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라는 말씀만이 우리의 푯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수년 전 모세의 홍해 기적도 강풍 때문이라는 주장과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물 위를 걷는 성경의 기사가 물위를 걸은 것이 아니라 얼음 위를 걸은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본 적도 있습니다. 참고 모세 :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100923153006 물위 :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604/200604050086.html 과학은 인간이 학습하고 연구해온 불완전한 도구일 뿐 성경의 모든 현상을 과학으로 대치 시켜 설명하려는 것은 인간의 교만이라고 생각 됩니다.
2014-12-01 09:48:07 | 허광무
주 안에서 모든 분들께 평강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제가 이 사이트를 안 지 일천하여 올려진 모든 자료를 섭렵치 못해 중복된 질문을 올리는 건지 조심스럽습니다만 양해해 주시길 바라며.   요즘 지인이 빌려준 김하중씨의 '하나님의 대사'란  책을 읽고 있는데 예전 같으면 감탄사를  연발하며 감동을 느꼈을 텐데, 이제 읽으면서 기도 열심히 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기본적인 메시지에는 동의가 가면서도 세부적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든지 하나님의 메시지를 형제들에게 전달해 준다든지 깊이 기도하고 많이 기도하고 방언으로 기도한다든지 혼으로가 아니고 영으로 기도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에는 그 결과의 간증이 아무리 좋다 해도 선뜻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제가 여쭙고자 하는 것은 고전 14장에 나와 있는 표현 '영으로 기도한다 혹은 영과 함께 기도한다  영과 함께 노래한다'는 진술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 하는 점입니다. 덧붙여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이해가 가는데 혼으로 기도한다는 앞서 책의 저자의 표현은 제가 아직 성경에서 찾아보지 못한 표현인 것 같은데 맞는지요? 선뜻 무슨 뚯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기쁨이 충만한 주일이시길! 마라나타!
2014-11-30 10:31:02 | 박혜영
가장 먼저, '과학(Science)'에 대한 정의 부터 집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과학은 사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질서를 여러번의 실험적인 관찰이나 조사, 그러한 현상을 규명하는 논리적인 방법들이나 행위,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의 통해 얻어진 지식등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의 정의를 먼저 확인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라보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꽃씨를 심으면 꽃이 되는 것을 관찰과 소위'과학'적인 실험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고 주장을 하는게 바로 '과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초자연적인 것들 모두를 우리의 스케일의 '과학'으로 모든 것들을 짜맞추려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또 다른 진화론과 같은 믿음의 '종교'에 지나지 않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4-11-30 08:50:39 | 조민수
우리 Bible Believer들은 올바른 말씀 King James 성경의 창세기 1장 1절 말씀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의 끝 말씀 “아멘”까지를 믿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불신자들과 믿음에 약한 자들이 억지로 견강부회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려는 그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4:16~17)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11:3)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을 운행하시며, 우주만물을 잡고 계시기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인데 이것을 믿지 않으니 이상한 이론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잡고 계신 것을 놓으시면 우주만물은 해체되어 흩어져버리게 되겠지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양합니다. 귀하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4-11-30 07:51:28 | 홍성인
저도 이 동영상을 보고 나름대로 성경과 비교해가며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보기에 주님의 탄생과 합치시키고 싶은 유혹을 받기에 충분히 흥미로운 현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맞지 않거나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① 교부 터툴리안과 클레멘토의 진술에 의지해서, 주님의 탄생시점을 BC 6년 5월14일로 보고 있었읍니다. --> 이 진술 자체의 신빙성도 의문이지만, 눅3:1과 눅3:23을 보면 티베리우스 황제 제15년(AD28년)에 주님이 30세 즈음이라고 기록한 성경기록과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 년도입니다. ② 마2:2의 ‘주님의 별’을 목성으로 보는 것도 문제입니다. -->오히려 금성으로 본다면 계22:16을 참고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우스(쥬피트-목성)를 주님과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③ 마2:9은 별의 인도 기록임에도, 천문학적인 현상에 무리하게 맞추다 보니, 성경기록의 문자적 의미와 너무 동떨어진 해석을 한다는 점입니다. 창조과학회와 김명현 교수님의 많은 연구와 활동은 성경을 구체적인 사실로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익한 내용이 많아서 저는 개인적으로 호의와 존경을 갖고서 계속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만 이 동영상과 같이 비판의 여지를 많이 포함하는 것들은 오히려 창조과학회의 다른 유익한 내용들까지 의문을 갖게 하는 빌미가 될까 우려됩니다.
2014-11-30 07:40:56 | 임원섭
두 가지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1. 구성원 중에서 열심은 있으나 능력이 부족한 자가 자신의 능력과 주어진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우에 그 집단은 매우 힘든 경우에 직면하게 될 것 입니다. 2. 같은 편인 거 같지만 내부의 누룩일 수 있다고 봅니다.
2014-11-30 07:06:06 | 차대식
성경기록은 진리 그자체이므로 그 어떤 것으로 부터 역으로 검증받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들의 흔한 오류가 나름대로 근사치의 답을 정해놓고 답을 지지해 줄수 있는 것들을 찾아 다니다가 합당한 것이 나타나면 마치 새로운 사실을 반견한 냥 발표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베들레햄의 별에 대한 컴퓨터 자료도 동방의 지혜자들이 상당한 기간을 두고 여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목성과 토성의 공전주기가 일치하면서 어린 예수님위를 비취었다고 보기에는 헛점투성이의 끼워맞춘듯한 가공된 자료로 보입니다. 나름대로 성경을 증명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성경기록을 불신하는 자리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과학적인 영역에 대해 창조과학으로는 검증될 수 없으므로 과학의 한계안에서 성경기록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성경신자로서 과학자들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분별해야 할 지를 깨우쳐주는 좋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2014-11-30 01:52:33 | 조양교
좋은 글을 균형감있게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자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경을 대할 때 성경이 말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들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제 아무리 과학이라는 지적능력으로 새로운 것들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성경이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연관짓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만약 과학이라는 지식으로 성경보다 더 자세하게 입증해내려고 시도를 한다면 그것은 과학이 곧 하나님보다 위에 있는 종교가 될 수 있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하려고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과학으로 하나님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자만심은 충분히 그러한 소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도구로 활용되어지고 있고 또 앞으로도 충분히 활용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지적 우월성'이라는 늪에 빠져 '지적 신비주의'를 창출해냄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거짓 된 분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을 대할 때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말씀이 멈추라면 멈출 수 있는 절제와 균형감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자신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한 번 더 묵상하고, 뒤돌아 보는 기회를 갖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11-30 01:34:30 | 김상진
예수님을 믿으면서 성경 신자라는 단어 만큼 영예로운 호칭이 있을 까 생각해 봅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나는 성경대로 믿는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자유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아닌 여러가지 글을 따라 본인 신앙이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지요. 전문가적인 지식을 배경으로 성경의 사실을 입증하려는 글을 대하고 의문속에 묻힌 성경속의 궁금증이 확 풀린듯이 다가오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유익하지만, 때로 커다란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입증되는 것은 확실히 믿어지지만 입증되지 않는 것은 의문속에 묻어두며 의심의 여지를 남겨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신자는 입증 여부와 아무런 상관 없이 기록된 말씀 그대로 믿을 따름입니다. 성경을 옹호하고자 한다는 나름 전문가라고 하는 분의 견해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 신자로서 위와 같은 글로 지적할 수 있는 자세는 부러울 따름입니다. 다시한번, 성경에 확고한 바탕을 둔 신앙을 갖고자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
2014-11-30 00:48:03 | 한재석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네요. 사실은 너무나 슬픈 소식이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고, 진리를 가장한 거짓이 드러나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요. 이 집단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은 수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임을 깨닫고 부디 바른 길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2014-11-30 00:20:14 | 김재욱
차분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성경이 정확히 알려주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몰라도 되는 것을 알려고 할 때 무리수를 둘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은 과학적인 책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 과학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학보다 훨씬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은 지엽적인 도구임을 알고, 주객을 전도시키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2014-11-30 00:17:01 | 김재욱
1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3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믿음을 명료하게 정의하는 저 위대한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은 믿음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며 증거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가끔 과학적 방법으로 논증하고 사람들이 모르는 전문 지식으로 밝혀 보려는 시도가 꼭 다 나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업으로 삼고 자꾸 중독되어 쫓아다니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체질을 약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한 자세로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소유할 수도 큰 믿음으로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꼭 과학적 지식에 대한 중독현상만 문제는 아닙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고 하고 누구보다 확실한 성경 신자라고 하면서도 세상의 권세와 학위와 명성 등 눈에 보이는 것에 티가 안 나게 은근하지만, 너무나 명확하게 압도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사실 이런 분들은 어떤 면에서는 일반 교회 성도들보다 더 세속적입니다. 또 대부분 자신을 잘 위장하기에 오랜 세월 함께 있어도 구분해 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접할 때마다 저는 작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좋아 보이고 남 보기에 그럴듯해 보여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일 없이 품에 안고 있어도 되지만 결국 나에게 영적으로 큰 해악을 끼치는 것들이 우리 주위에는 널려있습니다. 왜, 무엇을 위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다시금 돌아보게 해 주시는 귀한 글에 감사합니다.
2014-11-29 23:52:28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