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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씩 바른 말씀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때마다 참으로 반갑고 감사합니다. 더욱 견고한 믿음 안에서 합력해서 최종권위의 말씀을 지켜나가야겠습니다. 이런 말씀의 진리를 믿는 척 하면서 교묘히 비방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심지어 킹제임스 성경 자체를 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믿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서 말씀을 세우고 굳건히 지켜나가는 성경지킴이와 바이블 빌리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쁨의 소식과 고백에 감사드립니다~.
2014-01-04 11:25:14 | 김재욱
영화 두편(어둠 속의 등불, 세상을 바꾼 책)을 보면서 내면에서 울리는 벅찬 감동과 전율을 느꼈습니다.   구원의 방주에 태워 주신 은혜가 벅찬데...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앞에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사탄의 계략에도 믿음의 선진들이 죽음 앞에서도 지키려 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KJV 흠정역 성경으로 보존되기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오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됨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또한 그 KJV 흠정역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뚫고 하나님 왕국과 뜻을 이루어가시는 KeepBible(성경지킴이)을 통해 무지한 제게도 거저 받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빚진 자로 KJV 흠정역 성경을 열심을 내어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여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 말씀을 품고 기도하고, 말씀을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KJV 흠정역 성경의 말씀 안에서 겸손히 엎드리고, 낮아져서 올바른 성경을 전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3 21:51:23 | 장정수
새해에도 최문선 자매님의 열정은 변함없으시네요. 귀한 전도지를 통해 뉴질랜드에 거하는 한인들이 진리로 돌아오는 복된 일이 풍성하게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항상 꼼꼼하게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01-03 12:16:00 | 김대용
안녕하세요?   새해 벽두에 가격 인상 소식을 드려 죄송합니다.   작은 성경을 제작하는 비용이 인상하여 가격을 2,000원 인상하게 되었습니다(23,000원에서 25,000원으로).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photo2&write_id=77   말씀사 등 모든 서점에서 이렇게 고시되고 있으므로 알려드립니다.   한영대역, 스터디 성경 등은 당분간 가격을 그대로 유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큰글자 성경은 제작비 증가로 몇 달 후 새로 인쇄되는 물량부터는 36,000원으로 오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때에 가서 공지하겠습니다.   좋지 않은 소식 드려 죄송합니다.   2014년에도 저와 출판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 며칠 내로 신실한 한 형제님이 저술한 <합리적 그리스도인으로 살기>가 출간됩니다. 기대하셔도 좋은 책입니다(436쪽).   이 소식도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4-01-02 16:39:16 | 관리자
김서기 형제님 평안하신가요? 새해에도 변함없이 '성경지킴이'에 참여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경륜'의 의미는 간략하게 설명해 드릴 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설명하자면 책 한 권 이상의 분량이 필요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다음의 글들을 읽어 보시면 '경륜' 또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시는 것에 큰 도움을 얻으실 겁니다. *경륜(에스라 성경 사전)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1328 *세대주의(경륜주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0 *경륜주의에 관한 글들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consult&cate_name=%EA%B2%BD%EB%A5%9C%EC%A3%BC%EC%9D%98 사실 질문이 너무 광범위하고 때로 모호하면 어떻게 답변 드리는 것이 좋을지 난감한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킵바이블 상단 오른쪽에 위치한 구글 검색을 활용하시면 금방 찾을 수 있는 자료에 대한 문의는 게시판에 질문하시는 것보다 직접 찾아 공부하시는 것이 훨씬 유익할 줄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결코 답변 드리기가 번거롭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아님을 헤아려 주십시오. 다음의 글은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이용수칙입니다. 킵바이블 자유게시판을 이용하실 때도 참고 하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자유게시판 이용수칙(개정)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4595 2014년도 형제님과 형제님의 가정에 진리의 빛이 더욱 밝게 비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2 14:01:50 | 김대용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요한복음 11장에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음으로 인해 고통당하면서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다가 마침내 우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3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 34 이르시되, 너희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 하매 35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그런데 개역성경을 보는 분들 중에는 잘못 번역된 성경으로 인해 예수님이 우시는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사사로운 해석을 펴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역성경으로 33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역성경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통분하다.’는 말의 사전적 뜻은 '원통하고 분하다.'입니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속으로 억울하고 분해서 화를 내셨다. 또한, '민망하다.'는 말의 뜻은 '답답하고 딱하다.'이므로 '예수님은 이들을 답답하게 여기고 안타까워하셨다.'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성경을 완전히 오역한 것입니다. 이런 오역을 가지고 성경을 무리하게 풀자면 할 수 없이 영해(靈解)를 해야만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화를 내고 답답히 여기셨을까?”(개역성경)   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11-15절에 있는 말씀 즉 예수님이 죽어 있는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께서 분을 내고 답답해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오역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사로운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11~15절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고 말씀하셨지 마리아의 집에 온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기 위해 그의 집에 온 유대인들은(19절) 사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화를 내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우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억지 주장을 펴는 목사들과 그들의 말을 따르면서 올바로 된 해석 즉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죽음의 고통과 아픔으로 보시고 괴로워하시고는 우셨다는 해석을 오히려 사적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오셔서 인간의 모든 연약한 감정을 몸소 느끼신 분이라는 진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5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우시는 모습이 기록된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이 천지 만물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사람으로서 사람의 모든 연약함을 친히 경험하신 분이라는, 하늘의 천사들도 심히 놀랄 만한 진리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이런 심오한 의미가 담긴 말씀을 대단히 잘못된 해석으로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주장을 강요하는 것은 자신과 함께 다른 사람까지도 실족하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시되,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둘 다 도랑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눅6:39)   올바른 해석을 오히려 영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사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아서 예수님이 화를 내고 답답해했다는 해석이 바로 영해입니다. 이런 문제는 다 개역성경의 오역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오역이 영해를 생산해 냅니다.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바른 성경을 가지고 앞뒤 문맥을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요11장에서 예수님이 우신 유일한 이유는 인간들이 죽음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괴로워하셨기 때문입니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부디 바른 성경을 맑고 깨끗한 정신과 마음으로 바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더욱 많아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3-12-31 18:29:48 | 관리자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 (요3:1~15)   김대용 형제님께서 다음 설교를 녹취하여 이 글을 작성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437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창조하신 여러 창조물 중에서도 인간에게만 부여해 주신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체의 발화기관(發話器官)을 통해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매우 독특하고 월등한 능력입니다.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견이나 생각이나 사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은 말을 통해 타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원한 멸망의 길에 갇혀 있게 만드는 등 엄청난 일들을 하게 됩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이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개역성경은 문장이 수려하고 간결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더불어 고풍스러운 웅장함은 읽는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의 치명적 약점 중 하나가 성경의 진리를 나타내는 용어를 잘못 선택해서 그 잘못 선정된 말들로 인해 사람을 오히려 타락의 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 중에 하나가 ‘거듭나다’라는 동사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많이 들어 보았을 ‘거듭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나다. : 지금까지의 방식이나 태도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다.   이를 우리가 흔히 쓰는 다른 말로 바꾸어 보자면 ‘개혁하다’와 비슷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다.’의 예문을 들어 보겠습니다.   “검찰총장은 대한민국 검찰을 일류 검찰로 거듭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김 아무개 군은 지금까지의 부랑아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다면 ‘거듭’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 :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이렇게 어떤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을 표현할 때 ‘거듭’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런 잘못된 말이 개역성경에 기록되다 보니 구원받은 이후에도 교회에 나아와 자꾸 거듭나고 또 거듭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한자어로는 ‘중생’(重生)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구원은 단 한 번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 여러 번 거듭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이런 모호한 말을 전부 물리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로 구원의 진리를 확고히 하였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개혁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미국 3대 성인잡지 중 하나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래리 플린트(Larry Claxton Flynt)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한때 “저는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났습니다.”라고 세상에 공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는 이후에도 변함없이 사악한 음란잡지를 발행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또한, NIV성경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몰렌코트 박사(Virginia Mollencotte)는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 “동성연애는 나의 일부분이 되어 왔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세상에 공개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절체절명의 모든 것이 걸린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님보다 더 잘 설명할 이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의 치리자더라. 바로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께 이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기적들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하매(요3:1-2)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더위가 물러가고 산들바람이 불 던 중동의 어느 날 밤,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던 바리새파 사람 니고데모는 이제 갓 서른 살의 청년 랍비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홀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많은 사람이 머리를 조아릴만한 권세와 명성을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자신만이 알고 있는 마음속의 의문과 갈증을 풀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는 한밤에 청년 랍비인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함께 당시 유대인의 3대 당파 중 하나였던 바리새파는 그 명칭에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하고 엄격한 종교인이었으며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현시대의 크리스천들은 흔히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위선자를 연상합니다. 물론 많은 바리새인들이 위선자이고 탐욕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위선자요,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중에는 성경에 명시된 율법 외에도 무려 600가지나 되는 전통들을 지키며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니고데모의 마음속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의 한계에 대한 종교적 갈등이 극심했습니다. 더불어 요한복음 3장의 예수님과 대화 속에서 나타난 그의 영적 무지는 자신의 사회적, 종교적 위치와 비교해 너무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권력가이자 종교적 열심과 지식으로는 최고의 경지에 있다는 바리새파의 핵심인물이었지만 구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 지식도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서 행한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요2:23) 급기야 자신의 내면에 해결되지 않는 신앙의 갈등과 고민을 들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겉은 그럴듯하지만, 갈등과 무지함 속에서 방황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요3:3).   니고데모의 입장에서는 마치 동문서답과도 같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회적 명망가였던 그의 고름 가득한 부패한 내면을 가르는 날카로운 수술용 칼과도 같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람의 출생이라는 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서 니고데모에게 구원의 장중한 원리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첫 출생이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탯줄을 끊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경험하는 둘째 출생 곧 다시 태어남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신비한 영적 출생임을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자로서 성경과 율법에 정통하다는 니고데모는 계속해서 하늘의 관점이 아닌 육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노력하며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게 됩니다.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그가 자기 어머니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하매(요3:4)   지금 우리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출생, 초자연적인 출생, 하늘로부터 임하는 출생,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신비한 출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소경인 니고데모는 오히려 엉뚱하게도 눈에 보이는 육적 출생만을 이야기하며 예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존경받는 학자들,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는 정치가,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는 재력가,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인기인, 삶의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노련한 지혜자 등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부와 능력과 지식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영적으로 무지하다면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니고데모처럼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로 착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고 집사요, 장로요, 심지어 목사라고 하며 자신이 몇 대째 믿음의 명문가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또한, 자신은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아끼지 않고 교회의 일이라면 두 팔 걷고 충성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사람들 중에는 다시 태어난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제 이처럼 답답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임하는 신비한 출생 곧, 다시 태어남에 대해 다시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 (요3:5~7).   여기서 5절 ‘물에서 나고~’는 절대 물 침례나 세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물은 사람이면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자궁 안에 차 있는 양수(羊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 침례나 세례를 말하는 것이라면 구약의 성도들은 모두가 물에서 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또한,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강도도 마찬가지가 되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현될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 출생 즉 육적 출생을 위해서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출생 즉 하늘로부터 임하는 거룩한 영적 출생도 이처럼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진리로서 선포되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그 마음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렇게 두 부분이 결합하여 한 사람 안에서 작용할 때 비로소 사람이 다시 태어나며 구원받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째 출생을 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본성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성격이나 식성, 외모 등이 부모와 저절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둘째 출생을 현실로 경험하는 사람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이 그의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옛 본성(옛사람)과 새 본성(새사람)이 공존하게 되는 신비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은 육적인 본성에 의해서 식성(食性)이 달라집니다. 부모가 육식을 좋아하면 자녀도 그렇게 되고 부모가 채식을 많이 하면 자녀도 자연스럽게 채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둘째 출생 즉 거룩하게 다시 태어남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입어 그 사람이 추구하는 영적인 식성이 달라집니다. 과거 세상의 유흥과 불경건한 오락을 즐기던 자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것들을 찾고 누리며 즐기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걷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영적 식성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난 신자는 영적으로 성장하며 점진적으로 장성한 분량까지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께서 은혜로우신 것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3).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도 첫째 육적 출생처럼 성장의 단계를 거칩니다. 아기가 성장하면서 젖을 먹다가 이유식을 먹고 나중에 밥을 먹게 되듯이 다시 태어난 영적 아기들은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고 찾게 되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영적으로 성장하여 후에는 장성한 사람의 음식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기가 혼자의 힘으로 출생하지 못하고 외부의 힘이 작용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아기인 구원받은 신자도 혼자서는 둘째 출생을 할 수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함께 일하심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과거의 기억도 경험도 또한, 그것으로 인한 고민과 걱정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기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면 과거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잊히고 아버지께서 기억조차 안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중요한 것은 어떤 특정한 방법이나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특정 훈련 프로그램이나 혹은 특정 목사가 꼭 있어야 다시 태어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출생은 오직 모든 인간들의 조건을 초월해 바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것의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하시니라(요3:8).   바람이 불면 사람이 그것을 느끼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mystery)입니다. 실제 사람의 아기가 태어나는 것도 신비이듯이 주님 안에서 영적 아기로 태어나는 것도 사람이 그 현실을 일일이 규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요한복음 3장의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지식인 중 한사람인 니고데모의 반응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영적 소경이요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많은 지식과 높은 명성을 소유하였으나 오직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어 다시 태어난다는 영적 원리는 전혀 알지 못했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땅의 것들로 설명해도 진리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가엽게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해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 뱀과 놋 뱀 사건’을 통해 다시 태어남과 구원의 진리를 이해시키시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4~15).   니고데모에게 구약의 민수기 21장(4~9절)을 상기시키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불 뱀에 물렸던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라는 뱀에게 물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불 뱀에게 물려 그 독으로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이들은 동일한 뱀인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것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처럼 죄는 죄로 퇴치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롬8: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놋 뱀처럼 땅 위로 솟아오르신 뒤에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에 그분은 스스로 죄가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바로 예수님께서 죄 많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직접 죄 덩어리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의 죄 문제를 깨끗하게 영원히 해결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모두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5).   우리 모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면 바로 그 순간 누구든지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경험이 반드시 있어야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구원받은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럴 때에도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는 삶 속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도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더더욱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기 전의 옛 본성(옛사람)과 구원받은 이후에 생긴 새 본성(새사람) 사이에 계속해서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죄에 대한 민감함이 점점 늘어나게 되고 이전에 아무렇지 않게 짓던 죄들을 점차로 멀리하고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와 같은 특징이 있는 사람들을 성경은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래의 특징들을 잘 참고하십시오.   구원받은 사람의 본성과 영적 식성(食性)의 변화   1.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애타게 구한다(벧전2:2-3).2. 두 본성으로 인해 심한 갈등이 생긴다.3.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해진다(롬6:1-2).4. 그래서 구별된 삶을 사랑한다(요일2:15-16; 5:4).5.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믿음의 모임에 나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 원한다(요일3:14).6.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혼을 사랑한다(롬9:1-3; 10:1; 고후5:14).   자! 이제 지금까지 읽은 모든 내용을 생각하며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나는 아직 다시 태어난 경험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복음 3장을 통해 알게 된 진리를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봅니다. 이제 내가 나의 인간적인 행위나 치적이나 공로나 어떤 좋은 장점이나 강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깨닫고 영접하게 될 때 내가 다시 태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나아가기 원하시는 분은 지금 이 시간 마음속으로 “주여, 저를 구원해주소서.”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노라,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2013-12-31 13:09:57 | 관리자
사진과 파일을 같이 올리려했는데 용량이 많아서 그런지 잘 안돼서 1,2로 나눠서 올립니다. 필요할 때 프린트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jpg파일을 따로 올리고 싶었는데 사진처럼 올라오네요. jpg파일이 필요하신 분은 저에게 요청하시면 이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메일은 icut4u@hanmail.net 입니다. 지금 올라온 순서는, 1 &3 inside -> 1 &3 outside -> 2 &5 inside -> 2 &5 outside ->4 &6 inside -> 4 &6 outside 순 입니다. 참고로 6은 비어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31 03:58:08 | 최문선
       안녕하세요? 2013년이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것 같고 느낌으로는 이제 5월쯤 되었나 싶은데 벌써 한 해가 다 갔네요.  제가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에서 사용하려고 김** 형제님께서 올려놓으신 전도지 중 다섯 가지를 사용하여 저희 집 딸의 도움을 받아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봤습니다.  지난 번 원주에 사시는 형제님께서 그곳에서 사용할 전도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것들도 살펴봐주시고 혹시 원주에서도 필요하시면 사용해주시길 바랍니다.  각 교회에서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저희 교회 주소를 적었던 난에 ‘교회 사용 란’이라 고 연하게 표시했습니다.    전도지 파일들과 전도지를 프린트 후 접은 모양을 사진 찍어 올렸습니다. 1.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2.     나비의 삶은…. 3.     ??? 이 세가지는 내용이 짧아 A4용지 3분의 1 사이즈로 한 번만 접어서 사용합니다. 4.     윌버와 샬롯의 거미줄 이야기 5.     왜 예수님을 믿고… 이 두가지는  내용이 길어서 A4용지 3분의 2 사이즈로 가로로 한번 세로로 한번 접어서 사용합니다.  더 자세하기 설명해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A4용지에 프린트 해보시고 모양대로 접어보시길 바랍니다. 속 안이 잘 보이도록 모서리를 일부 접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손에 잡기 편한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잘 이용되어 기쁜 소식이 전해지길 기대해 봅니다.   새해에도 KeepBible 을 통해 반가운 만남이 더해지길 기도 드립니다.   샬롬!      
2013-12-31 03:47:41 | 최문선
         안녕하세요?   2013년이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것 같고 느낌으로는 이제 5월쯤 되었나 싶은데 벌써 한 해가 다 갔네요.    제가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에서 사용하려고 김** 형제님께서 올려놓으신 전도지 중 다섯 가지를 사용하여 저희 집 딸의 도움을 받아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봤습니다.    지난 번 원주에 사시는 형제님께서 그곳에서 사용할 전도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것들도 살펴봐주시고 혹시 원주에서도 필요하시면 사용해주시길 바랍니다.    각 교회에서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저희 교회 주소를 적었던 난에 ‘교회 사용 란’이라 고 연하게 표시했습니다.        전도지 파일들과 전도지를 프린트 후 접은 모양을 사진 찍어 올렸습니다.     @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2번)   @   나비의 삶은…. (3번)   @     ??? (5번)   이 세가지는 내용이 짧아 A4용지 3분의 1 사이즈로 한 번만 접어서 사용합니다.       @   왜 예수님을 믿고… (4번) @    윌버와 샬롯의 거미줄 이야기 (1번)   이 두가지는  내용이 길어서 A4용지 3분의 2 사이즈로 가로로 한번 세로로 한번 접어서 사용합니다.      더 자세하기 설명해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A4용지에 프린트 해보시고 모양대로 접어보시길 바랍니다.   속 안이 잘 보이도록 모서리를 일부 접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손에 잡기 편한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잘 이용되어 기쁜 소식이 전해지길 기대해 봅니다.       새해에도 KeepBible 을 통해 반가운 만남이 더해지길 기도 드립니다.       샬롬!                  
2013-12-31 03:40:23 | 최문선
구약시대이건 신약시대이건 오직 하나님(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대마다 하나님의 경륜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는 이들은 구원받았고 죽은 후에 지하세계에 있는 낙원(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직후에 낙원으로 가셔서 낙원에 있던 구약시대 구원받은 자들을 모두 데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구약시대 구원받은 자가 예수님의 대속을 모르고 죽게 된다면 그 혼은 어디로 가게 될까요? 성경적으로 갈 데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구약시대 구원받은 자들에게 새로운 경륜(예수님의 대속)을 전하고 침례를 주고 성령침례를 받아 죽음 후 즉시 그들의 혼이 하늘나라로 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제자들이나 이디오피아 내시도 이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은 상태이므로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믿고 아무 꺼리낌 없이 침례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신약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즉시 구원받아서 성령님께서 친히 봉인을 하시지만 구약성도가 하나님을 믿었다면 이미 구원은 받은 것이므로 즉시 봉인은 경륜상 어려운바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한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이므로 구약시대 하나님을 믿는 구원받은 자들은 스스럼 없이 당연히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분위기상 구원받지 않은 자들도 불안감에서든 남의 눈을 의식해서든 요한의 침례를 받으려고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침례를 받으러 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들의 세대라며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약성도로서의 구원은 받은 상태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구원의 효력이 변경(낙원에서 하늘나라로)되었기에 사도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복음을 선포하고 안수를 통해 성령님께서 임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2013-12-31 00:34:55 | 윤찬수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앞뒤 문맥도 봐야 하지만 일단 해당 두 부분을 올려 드립니다. 14만 4천은 누구인가? (7장, 삽입된 괄호 장) 계시록 7장에는 그 유명한 14만 4천명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내용은 여섯째 봉인이 끝나고 이어지는 장에 나옵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이 부분도 시간의 추이에 따라 등장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환난기의 끝에 이어지는 일로 혼동할 수 있습니다. 7장의 14만 4천에 관한 기록은 일종의 괄호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중간에 끼워 넣은 부분이며 연극의 막간이라고 이해하면 되고, 잡지를 읽다가 나오는 박스 기사처럼 생각하면 됩니다. 요한은 물론 이 부분을 여섯째 봉인 이후에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일들 후에 내가 보니’라고 했지요.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고 일어서는 이 대목은 계시록 그림에 있듯이 시기상 전반기 3년 반의 일입니다. 이 일들 뒤에 내가 보니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아 바람이 땅에나 바다에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내가 보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동쪽으로부터 올라와 땅과 바다를 해할 권능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외치며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 안에 인을 찍어 그들을 봉인할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 (계7:1~4) 자, 14만 4천은 몰몬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등 정말 많은 이단에서 활용하는 숫자입니다. 이 숫자가 자기네 종교에 모이면 끝이 온다든지, 신성한 숫자라든지 하는 주장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개신교의 대체신학 주장 학자들은 이들을 가리켜 교회, 성도라고도 하고, 숫자 자체는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마지막 날에 복음을 전파할 세계 각 나라 선교사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이라는 안경을 벗고 말씀 자체를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그냥 이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라고 너무나 명백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더 해석할 것이 없는 이 대목을 용케 잘도 풀어가는 이들의 종교적 상상력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들은 그냥 유대인입니다. 교회는 더 이상 땅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마지막의 역사와 성경 자체에서 자꾸 제외시키려 하는 것일까요? 신천지와 같이 자신들이 14만 4천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어느 지파 출신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시되어도 좋을까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신학도 그 유대인들의 각 지파가 누구로 대체됐는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고 특정한 인간이나 교단의 해석에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구원과 천국과 종말에 대한 믿음에서 어느 것 하나 견고하게 보장받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환난기의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회복하려 하는 것도 메시아를 끝까지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극심한 환난, 즉 야곱의 고난을 다 겪고 나서야 비로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며 두 손을 들고 예수님을 인정할 것입니다(마23:39). 그런데 여기 14만 4천은 유대인이지만 일찍 회개하고 깨달아 주님의 사역자로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봉인되었기 때문에 죽기까지 굽히지 않고 환난의 시기에 활동할 것입니다. 이들이 받은 봉인은 성령님의 봉인이 아니라 천사의 봉인입니다. 한편 모방의 천재 마귀는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666 짐승의 표로 봉인을 할 것입니다(계13:14~18). 14만 4천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를 보이듯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도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짐승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환난기에 이 두 세력은 서로 사람들을 얻기 위해 크게 힘을 쓸 것입니다. 이 14만 4천의 유대인이 환난 시기에 왕국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는 성경적입니다(마24:13~14). 이들의 등장 이후 환난에서 나온 큰 무리가 나타납니다. 이들은 이방인들로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그 수를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이 일 뒤에 내가 보니, 보라,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큰 무리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구원이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하더라. (계7:9~10) 하늘의 14만 4천 (14장) 14장에서는 시작부터 14만 4천이 다시 등장합니다. 또 내가 바라보니, 보라, 어린양께서 시온 산 위에 서 계시고 그분과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 안에는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더라. (계14:1) 이 부분의 14만 4천을 7장에 나오는 유대인 선교사들과 다른 새로운 존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해석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같다른 무리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7장의 14만 4천이 순교하여 하늘에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계시록 7장 3절에 천사들이 14만 4천의 사람들을 두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 안에 인을 찍어 그들을 봉인할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억하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14장 3절에서 이들은 ‘새 노래’ 같은 것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시대가 바뀌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대라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이 드러나는 기간으로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동일하지만 계시의 내용은 다른 때로 볼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 시대는 휴거로 끝이 나고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는 환난 시대가 왔기 때문에 ‘새 노래’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니 그들은 처녀들이니라. 이들은 어린양께서 가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며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자들이더라. (계14:4) 또 계시록 14장 4절의 ‘첫 열매’라는 표현은 ‘새 노래’와 마찬가지로 역시 교회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인 환난 시대가 왔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환난 시대의 첫 열매’입니다. 위 말씀에서 14만 4천은 ‘처녀들’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교회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정혼한 ‘한 처녀’로서 7년 환난기에 하늘에서 신랑과 결혼 예식을 하는데 반해, 환난 성도인 14만 4천은 ‘처녀들’입니다. 이들은 결혼 예식의 들러리로 볼 수 있습니다. 결혼 예식을 마치고 신랑이 돌아왔을 때 기름을 예비한 처녀들과 예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바로 이들 유대인들입니다.
2013-12-30 17:59:25 | 김재욱
계시록 7장4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 인맞은 자들이 144,000명으로 명시가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단지 인장으로 이마에 표시만 받았다고 표기되어있고 그다음 휴거가 되었는지 구원을 받았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데 제가보기엔 구원받은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다음14장1절부터 해서 144,000명이 등장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땅이 아니라 어린양이 계신 시온산 계속 읽어 3절까지 가보니 보좌와 장로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니 하늘로 보여 집니다 그렇다면 이 십사만 사천명도 같은 무리로 이해 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견해가 있는지 답변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와 함께 천년왕국에서 함께 거하는 무리들도 함께 답변해 주세요.
2013-12-30 15:43:30 | 김서기
오광일 형제님의 귀한 답변에 조금 보충을 해 볼까 합니다. 먼저, 사도행전 19장을 살펴볼 때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어떤 제자들은 그들의 고백이나 침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시는 표징이 나타난 것을 볼 때 구원받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더불어 다른 부분을 좀 더 살펴봄으로써 성경을 읽는 깊이를 더해 보는 것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했던 침례자 요한의 침례는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였습니다(막1:2~4, 행19:4). 즉 요한의 가르침은 당시 형식적인 종교 생활에 빠져 참된 믿음과 그에 따른 믿음의 행위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종교 생활을 탈피하여 회개하고 참된 믿음을 회복하라는 진리의 선포였습니다. 당시 침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구약 시대의 관점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보아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는 에베소의 제자들이 여기에 해당할까요? 일단 그렇게 볼 여지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침례자 요한은 이미 자신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했던 사람입니다(요1:26~27). 만약 이들이 온전히 구원받은 제자들이라면 비록 요한의 침례만 받았더라도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인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거의 전혀 없고 침례자 요한의 가르침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들은 이들의 구원을 의심해 볼 대목이기도 하겠지요. 문맥을 살펴볼 때, 바로 전 장인 18장에 등장하는 아볼로 또한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행19:25). 그러나 그는 주의 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 이미 영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 침례를 받고 타언어로 말했다는 기록이 없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하게 설명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후에 그가 복음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볼 때(고전 3:6, 딛3:13) 비록 ‘요한의 침례’만 알았지만 아볼로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구약식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무효화 되고 신약식 구원으로 갱신되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일생에 단 한 번만 받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구약 시대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으로 구원받는 시대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으면 바로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 되고(전2:9, 계1:6) 상속 유업(엡1:11~12)을 받을 수 있는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신약 교회(마16:18)의 성도가(롬1:7, 고전12:13) 되는 것입니다. 침례자 요한의 침례만 알고도 이미 구원받은 아볼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전한 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길을 완전하게 이해했고 동일하게 요한의 침례만 알았던 에베소에서 바울을 만난 제자들은 침례자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을 믿어야 함을 확실하게 깨닫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바울의 안수를 받아 성령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19장의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은 바울의 복음 전파로 진리 안에 확실하게 거하고 성령의 침례를 받고 신약교회의 성도가 된 것입니다. 문맥의 흐름이 아볼로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변천기(중간기)의 시기에 이미 구원받았던 유대인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원자시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신약 교회의 성도가 됨을 보여주시는 사례들도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의 글을 참조해 주십시오.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889 *성도란 누구인가?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271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3-12-30 14:56:46 | 김대용
샬롬!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의 강해 내용을 참조하여 덧글을 답니다. 1.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왔을 때, 어떤 제자들(12명) 만났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던진 첫 질문이 아주 중요합니다. “ 너희가 믿은 이래로 성령님을 받은 적이 있느냐? ” 왜냐하면, 성령님을 받았다라는 것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확증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롬8:9,16) 또한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뒤에 성령님으로 봉인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대답은 그들의 믿음의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드러내보였습니다. 그들이 요한의 제자였다면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어느날 오셔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실 것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우리가 성령님이 계신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노라”라고 했습니다. 2. 그래서 바울이 두 번째 질문 합니다. “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 한 사람의 침례의 경험은 그 사람의 영적 경험을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10:43-48을 보면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즉시 성령님을 받고 침례에 순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경험이 없었습니다. 이는 이들이 성령님과 함께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결국 결코 다시 태어난 적이 없다는 증거가 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단지 성령충만한 삶이 안된 것이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본문에서 성령충만한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들이 그들의 삶 가운데 성령님의 증거를 받은 것이 없으니 결국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요한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항이 빠진 것이지요. 이런 모습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서 침례 혹은 세례를 받은 경험은 있지만, 진정으로 다시 태어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억해야할 사실은 침례자 요한은 율법경륜 아래 사역을 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은 요한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하시고 끝을 내신 일입니다. 요한의 침례가 구약의 경륜 즉 앞으로 오실 약속한 메시야를 바라보는 회개의 침례이고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했지만, 교회시대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일을 돌아보며 침례를 받는 것이기에 시대가 변한 이상 요한의 침례가 아무리 훌륭했어도 그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합니다. 3. 이제 사도행전 19장4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참된 복음에 대해서 그들에게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5절을 보세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세요. 6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므로 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고 대언하니라. 하나님께서 왜 바울이 안수했을 때 성령님이 임하게 하였을까요? 이는 바울이 사도로서 인정 받았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행10:18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님이 주어지는 것을... 또한 성령님이 임한 증거로 타언어(오늘날 말하는 괴상한 소리의 방언이 아니라 진짜 외국어입니다.)를 말함으로 성령님이 확실하다는 확증을 해줍니다. 이로서 에베소교회가 회심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성령님안에서 하나가 될수 있는 계가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일련의 과정은 오직 변천기였던 사도행전에서만 존재합니다. 오늘날 누가 안수해서 성령님이 임한다든지, 구원받았다고 하여 타언어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지 못하셔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4. 정리해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까지 구약에 속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무리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요한의 침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육신이 살아있는 한 변천기에 있기에 성령님으로 침례 받는 즉,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좀 더 실질적으로 말해보면, 만약 예수님 공생애 당시 십자가 사건 전에 죽은 성도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믿었던 성도였다면 구원받아 낙원으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살아 남아 믿음 생활을 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진정한 증거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성령님으로 침례 받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일을 예수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고 약속대로 성령님께서도 오셔서 누구든지 믿는자 속에 내주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고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여서 율법을 잘 준수하고 요한의 침례를 받았어도 구원받지 못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9장 1-10절의 내용은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억지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리 내용은 전적인 저의 의견이니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얘기해 주세요.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추구하는 기쁨이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30 13:40:39 | 오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