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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형제님 반갑습니다. 평안하셨는지요?^^ 위에 글에 써 주신대로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전12:7). 그러나 마치 물처럼 하나님께 돌아간 영들이 섞이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고유의 몸과 혼이 있듯이 영도 그렇기 때문에(신2:30, 시106:33) 가령, 이 사람의 영을 저 사람에게 주어도 상관없다는 등의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구원은 영과 혼과 몸 셋이 다 받습니다.(고전5:5) 영은 강퍅해질 수도 있고(신2:30) 이스라엘 백성이 마실 물이 없으므로 불평하여 모세의 영을 자극해 분별없는 말을 하게 했다는 성경 기록을 보았을 때(시106:32~33) 영이 죄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잠20:27; 요4:24; 롬8:16; 고전14:14-15) 하나님과의 소통하며 믿음, 소망, 경외감, 기도 등의 부분을 담당하는데 어떻게 믿음과 무관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좀 더 자세하게 부연하여 기록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전혀 별개의 일에 대한 기록으로 해석하거나 영적 인간이니 구체적 인간이니 하는 해괴한 주장을 하면 창세기는 물론 성경 전체의 해석이 뒤틀리게 되며 결국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조심해야겠지요.^^ 다음의 조직신학 강의를 참조해 주십시오. *조직신학 40_사람01(영혼육01)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97&cate_name=%EC%A1%B0%EC%A7%81%EC%8B%A0%ED%95%99&page=2 *조직신학 41_사람02(영혼육02)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98&cate_name=%EC%A1%B0%EC%A7%81%EC%8B%A0%ED%95%99&page=2 *영의 구원? (질문과 답변)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656 *성경 바로 보기 PDF 파일 -파일을 다운받아 제7장 '영의 세계'를 참조하세요.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151 형제님께서 며칠 전에 출판사로 문의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킵바이블에서 좋은 교제가 이어지길 기대하며 앞으로도 성경 구매와 기타 문의 사항 있으실 때 032-872-1184로 전화해 주시면 성심껏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6 18:45:16 | 김대용
자매, 형제님들 안녕하세요. 군포에서 사는 강평원 형제라 합니다. 새해에도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은혜와 평안이 늘~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처음으로 글을 써 봅니다. 그동안 몇 번 이런저런 글을 써볼까 하다가 부끄러운 솜씨에 썼다가 지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자의 주치의 지내셨던 김승학 집사님의 강연을 보고 "아~!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출애굽의 경로가 다르구나!" 란 생각이 들었고 여러가지로 찾아보고 연구해 봤는데, 맞다는 가능성이 있어 같이 생각해 보고자 이렇게 "출애굽의 새로운 경로?"란 글을 써 봅니다 글을 쓰기에 앞서.. 어제 목사님께 문의를 하려고 했는데, 바쁘셔서 말씀을 못드렸고 검증이 안된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래 그림과 같은 출애굽의 경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 그림을 보면.. 여러 지명은 물음표로 있거나 다녀오신 분들의 성지순례 후기를 들어보면 성경기록과 조금은 다르다는 내용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승학 형제님의 강연을 들어보고 출애굽의 새로운 경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출애굽이라 하면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말할텐데.. 지금까지 건넜다는 홍해 왼쪽부분(시나이 반도 오른쪽도 홍해임)과 시내산은 시나이반도에 있는 것으로 이집트내에 있는 장소입니다.     위의 사진처럼.. 새롭게 유추해본 출애굽의 경로입니다. "몇일만에 어떻게 그렇게 멀고 먼 경로(약560km)를 몇백만의 사람이 이동할수 있는가?"란 생각이 들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특별한(?) 힘을 쓰신 성경 기록들이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특히 기존 시내산은.. AD527년경 로마카톨릭에서 지정한 것으로 더더욱 믿을 수 없으며 지금의 새로운 경로가 더 확실성을 갖게 합니다.       뉴웨이바 삼각주입니다. 가로 9KM, 넓이 6KM 여의도의 4~5배 면적으로 이정도는 되어야 몇백만명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곳 주변 바다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는 데요. 특히 옛날에 싸움에서 사용하는 병거와 병거 바퀴가 많이 발견된다 합니다.         위 사진 말고도 많은 증거 물품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또 특별한 것은.. 솔로몬 왕이 홍해를 건넌 지점에 기둥을 새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철거해서 바다에 수몰 시켰다고 그분은 증언합니다. 보시는 것과 같이 지금은 푯말 하나만 썰렁하니 세워져 있다 합니다. (이집트 누웨이바 지점에 있는 기둥은 현재 존재함)       위 사진은.. 홍해 건넌지점과 건넌 후의 지점을 보여줍니다. 양쪽 다 특이하게 삼각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넓은 평지로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위 그림은.. 위성에서 찍은 바다의 깊이를 나타내는 사진입니다. 정말 정말 특이하게도 홍해 양쪽 삼각지를 이은 부분만이 깊지 않은 지점이고 그 옆으로는 급격하게 깊은 바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것을 보노라면.. 정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준비하신게 아닌가란 경이로운 느낌마져 듭니다. 사실 광대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요.       하나님이 강림하신 시내산을 보고 계십니다. 산이 정말 다른 곳에 비하여 조금은 검게 보이네요. 출애굽기 19장 16~25절을 보면.. 강림하시는 모습과.. 보기 위하여 더 가까이 나와 죽을까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산입니다. 열왕기상 19장 8~18절을 보면 대언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있는 동굴에서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림에는 없지만 동굴 사진도 있습니다. 요즘 3일 동안.. 구글 어스를 통해 여러 장소를 탐험(?)을 해봤는데.. 이것말고도 정말 놀라운 흔적들(장막친 흔적 등등)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출애굽의 경로는 많은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위에 있는 장소가 조금은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요? 만약 이 장소가 사실이라면.. 그동안 이슬람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폐쇄되어 볼 수 없었고, 어찌보면 그로 인하여 보존 되었던 증거들을,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믿지 않는 시대에.. 눈에 보이는 증거들 까지도 보여주시며 은혜를 주시려는 것은 아닐까요?  형제 자매님들 생각은 어떠세요?   김승학 형제님의 강연 동영상을 찾아서 보시고요.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14-01-06 14:54:50 | 강평원
  안녕하십니까?       사람은 영 혼 육으로 되어있고 영은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께로 간다고 이곳의 동영상에서 본것 같습니다.     그러면 각사람의 영이 하나님께로 가면 그것이 끝인지요? 즉 더 이상 영의 역할이나 기능은 없는지요?     그렇다면 각 사람의 영은 그 사람의 생존 시의 죄나 믿음과 무관한 그 무엇인지요?     다시 말씀드려서 각 사람의 영은 각 사람이 죄악을 행하거나 선행을 해도 아무런 차별이 없는지요?     어떤 글을 보면  창세기 1장 26절은 아직 영적인 인간창조이고     창세기 2장 7절에서 구체적인 인간창조를 했다고 합니다(제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읍니다)     창세기 1장 26절과 창세기 2장 7절을 연관지여 인간창조를 가르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곳의 참된 가르침이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6 12:22:07 | 이성호
  어느 날 인간관계에서 회의감을 느끼면서, 문득 ‘인간이나 동물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인간에게서 지능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과연, 동물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측면에서 동물이 인간보다 더 나은 점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나름 비교해보니, 첫째, 동물은 그들의 본능을 꾸밈없이 자신들의 삶속에 투영시키면서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최소한 인간보다 ‘정직’합니다. 둘째, 인간은 지능을 탐욕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동물은 자신이 가진 탁월한 능력을 생존을 위한 유일한 도구로 여길 뿐 자랑삼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인간보다 ‘겸손’합니다. 셋째, 인간의 본성은 교만하고 이기적이어서 화려하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만, 동물은 자연의 법칙을 거슬리지 않고 소박하게 자신들의 삶에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인간보다 ‘순리적인 존재’입니다. 넷째, 인간은 탐욕에 눈이 멀어 합리적이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우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동물은 생존을 위한 기초욕구 이외에는 욕심이 없어 인간보다 균형감이 있다는 측면에서 ‘중용(中庸)의 미학’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많은 동물들에 대해 관심으로 가지고  다큐나 자료들을 즐겨 보는 가운데, 인간과 가장 흡사하게 사회구조를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물은 다름 아닌 ‘늑대’라는 맹수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늑대라는 동물은 친숙한 동물이 아닙니다. 매우 사납고, 잔인하며, 음흉한 맹수로 각인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음흉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을 가르켜 늑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동화나 영화, 음악 속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어져 있으며, 심지어는 성경에서도 사납거나 약탈하는 사람을 늑대(이리)로 비유하기도 합니다(합1:8, 렘5:6, 마7:15. 요10:12, 욥 30:29).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늑대의 습성에서 기인된 비유일 뿐이지 늑대 자체가 부정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비유는 늑대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칭찬인 셈입니다.     늑대를 11년간 직접 추적하며 연구한 생물학자 ‘팔리 모왓’은 자신의 저서「울지않는 늑대」라는 책의 서문을 통하여 늑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 했습니다.  「오히려 늑대는 먹이가 되는 생물종(種)의 장기적인 안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인류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며, 가축에게 입히는 손해는 아주 적은 정도이며, 대개의 경우 인간의 거주지나 농업 시설 가까이에는 살려고 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문제의 ‘진실’이다. 우리는 특대의 유죄를 선고할 때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적인 잘못된 인식에 근거를 두면서, 포악하며 무자비한 킬러라는 신화화된 이미지는 사실상 우리가 던진 우리 스스로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희생 늑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팔리 모앗의 글이 사실일까? 하며 실제로 늑대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니, 늑대는 실제로 ‘잔인한 킬러’ 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동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전한 동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 여러 문헌들과 자료들을 통해서 알게 된 늑대의 특징을 살펴보니, 늑대는 한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 하는 몇 안 되는 동물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암컷과 새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유일한 포유류입니다. 거기다 언제나 자신의 새끼에게 먹이를 양보하며, 독립하고 나면 자신들의 영역에 접근하는 새끼를 적으로 간주하는 다른 맹수들과는 달리, 새끼들은 종종 부모늑대에게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게다가 늑대는 매우 조직적으로 사냥을 하고, 용맹하며, 절대로 비굴하게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동물 중에서 가장 탁월한 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효율적인 소통능력으로 조직을 보존하며, 자신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즉시해가면서 앞날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동물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늑대’라는 맹수는 매우 매력적이고 호기심을 갖게 할 만큼 충분한 동물입니다. 최소한 저에게는 말이지요.     최근 이와 같은 늑대에 대한 오해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늑대와 관련된 서적들이 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는 달리 조금 엉뚱한 것 같지만, 인간의 본성과 배치되는 늑대의 습성을 가지고 신앙과 접목을 시켜 보면 나름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전술한 바와 같이 동물이 인간보다 분명이 나은 면도 있다는 전제 하에서 늑대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무런 죄가 없는 늑대는 인간이 만든 오해와 편견이라는 올가미로 인해서 무참히 학살을 당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는 아직도 잔인한 킬러로 묘사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진실의 왜곡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통해 우리 기독교 역사에 위로와 교훈을 리뷰해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셋째, 늑대의 습성들 가운데서 인간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그들만의 특유의 행태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매우 규칙적이고 철저해서 우리 신앙과 비교해보면 그들에게서 얻어 낼만한 몇몇의 반성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판단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늑대(동물)를 통해서 신앙에 접목시켜보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동물을 재물로 삼은 것은 동물이 인간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죄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랬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떤 동물보다 인간을 가장 사랑하시지만 인간은 동물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인 이른바, ‘죄 덩어리’라는 부분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동물보다 낫다고 단언하는 교만과 만용을 결코 즐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 동안 인간을 대신해서 죽은 동물에게서 우리가 배워야할 신앙적인 교훈은 어쩌면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리라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는 속죄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도덕과 윤리라는 잣대를 절대 선(善)인 것처럼 들먹이며 자신들의 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 병이라는 죄의 열매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동물과 비교만 해봐도 인간은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는 단지 그 대상이 늑대라는 맹수가 가장 적절하다고 발견했을 뿐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생물학자도 아닌 반쪽짜리 지식의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늑대라는 동물의 특성만을 가지고 감히 신앙에 접근해보겠다는 것이 다소 억지적이고, 모순적인 한계가 드러날 수도 있지만 나름의 생각의 깊이를 정리하고 나누어 보고자 이렇게 용기를 내어 <신앙에 대한 늑대와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몇 차례에 걸쳐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글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물론, 사실에 기초해서 말입니다. 다소 글이 부족하더라도 늑대라는 동물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해본다는 사실에 흥미로 여겨주시고 기대 없이 읽어봐 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왜, 늑대인가?’에 대한 글을 줄이고자 합니다.
2014-01-05 01:59:20 | 김상진
저도 가끔 생각날 때 다시 보곤 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새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형제님 처럼 올바른 교리로 세상을 향해 전진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나길 소망합니다. 형제님의 글에 그 소망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14-01-05 01:54:56 | 김상진
형제님의 진한 간증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킹제임스 성경 사역과 바른 교리를 전하는 미디어 선교 사역을 통해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고 마음속의 샘솟는 감동을 전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절실히 느낍니다. 부디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여전히 우리의 믿음을 외면하고 오히려 비웃는다 해도 털끝만큼도 굴하지 않고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로 작정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한국 땅 곳곳에서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진솔한 감동이 담긴 글에 감사합니다.
2014-01-04 12:33:07 | 김대용
한 분씩 바른 말씀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때마다 참으로 반갑고 감사합니다. 더욱 견고한 믿음 안에서 합력해서 최종권위의 말씀을 지켜나가야겠습니다. 이런 말씀의 진리를 믿는 척 하면서 교묘히 비방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심지어 킹제임스 성경 자체를 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믿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서 말씀을 세우고 굳건히 지켜나가는 성경지킴이와 바이블 빌리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쁨의 소식과 고백에 감사드립니다~.
2014-01-04 11:25:14 | 김재욱
영화 두편(어둠 속의 등불, 세상을 바꾼 책)을 보면서 내면에서 울리는 벅찬 감동과 전율을 느꼈습니다.   구원의 방주에 태워 주신 은혜가 벅찬데...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앞에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사탄의 계략에도 믿음의 선진들이 죽음 앞에서도 지키려 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KJV 흠정역 성경으로 보존되기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오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됨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또한 그 KJV 흠정역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뚫고 하나님 왕국과 뜻을 이루어가시는 KeepBible(성경지킴이)을 통해 무지한 제게도 거저 받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빚진 자로 KJV 흠정역 성경을 열심을 내어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여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 말씀을 품고 기도하고, 말씀을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KJV 흠정역 성경의 말씀 안에서 겸손히 엎드리고, 낮아져서 올바른 성경을 전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3 21:51:23 | 장정수
새해에도 최문선 자매님의 열정은 변함없으시네요. 귀한 전도지를 통해 뉴질랜드에 거하는 한인들이 진리로 돌아오는 복된 일이 풍성하게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항상 꼼꼼하게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01-03 12:16:00 | 김대용
안녕하세요?   새해 벽두에 가격 인상 소식을 드려 죄송합니다.   작은 성경을 제작하는 비용이 인상하여 가격을 2,000원 인상하게 되었습니다(23,000원에서 25,000원으로).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photo2&write_id=77   말씀사 등 모든 서점에서 이렇게 고시되고 있으므로 알려드립니다.   한영대역, 스터디 성경 등은 당분간 가격을 그대로 유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큰글자 성경은 제작비 증가로 몇 달 후 새로 인쇄되는 물량부터는 36,000원으로 오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때에 가서 공지하겠습니다.   좋지 않은 소식 드려 죄송합니다.   2014년에도 저와 출판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 며칠 내로 신실한 한 형제님이 저술한 <합리적 그리스도인으로 살기>가 출간됩니다. 기대하셔도 좋은 책입니다(436쪽).   이 소식도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4-01-02 16:39:16 | 관리자
김서기 형제님 평안하신가요? 새해에도 변함없이 '성경지킴이'에 참여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경륜'의 의미는 간략하게 설명해 드릴 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설명하자면 책 한 권 이상의 분량이 필요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다음의 글들을 읽어 보시면 '경륜' 또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시는 것에 큰 도움을 얻으실 겁니다. *경륜(에스라 성경 사전)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1328 *세대주의(경륜주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0 *경륜주의에 관한 글들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consult&cate_name=%EA%B2%BD%EB%A5%9C%EC%A3%BC%EC%9D%98 사실 질문이 너무 광범위하고 때로 모호하면 어떻게 답변 드리는 것이 좋을지 난감한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킵바이블 상단 오른쪽에 위치한 구글 검색을 활용하시면 금방 찾을 수 있는 자료에 대한 문의는 게시판에 질문하시는 것보다 직접 찾아 공부하시는 것이 훨씬 유익할 줄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결코 답변 드리기가 번거롭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아님을 헤아려 주십시오. 다음의 글은 사랑침례교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이용수칙입니다. 킵바이블 자유게시판을 이용하실 때도 참고 하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자유게시판 이용수칙(개정)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4595 2014년도 형제님과 형제님의 가정에 진리의 빛이 더욱 밝게 비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2 14:01:50 | 김대용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요한복음 11장에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음으로 인해 고통당하면서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다가 마침내 우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3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 34 이르시되, 너희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 하매 35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그런데 개역성경을 보는 분들 중에는 잘못 번역된 성경으로 인해 예수님이 우시는 이유가 다른 데 있다고 사사로운 해석을 펴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역성경으로 33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역성경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통분하다.’는 말의 사전적 뜻은 '원통하고 분하다.'입니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속으로 억울하고 분해서 화를 내셨다. 또한, '민망하다.'는 말의 뜻은 '답답하고 딱하다.'이므로 '예수님은 이들을 답답하게 여기고 안타까워하셨다.'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성경을 완전히 오역한 것입니다. 이런 오역을 가지고 성경을 무리하게 풀자면 할 수 없이 영해(靈解)를 해야만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화를 내고 답답히 여기셨을까?”(개역성경)   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11-15절에 있는 말씀 즉 예수님이 죽어 있는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께서 분을 내고 답답해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오역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사로운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11~15절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고 말씀하셨지 마리아의 집에 온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기 위해 그의 집에 온 유대인들은(19절) 사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화를 내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우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억지 주장을 펴는 목사들과 그들의 말을 따르면서 올바로 된 해석 즉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죽음의 고통과 아픔으로 보시고 괴로워하시고는 우셨다는 해석을 오히려 사적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오셔서 인간의 모든 연약한 감정을 몸소 느끼신 분이라는 진리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5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우시는 모습이 기록된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이 천지 만물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사람으로서 사람의 모든 연약함을 친히 경험하신 분이라는, 하늘의 천사들도 심히 놀랄 만한 진리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이런 심오한 의미가 담긴 말씀을 대단히 잘못된 해석으로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주장을 강요하는 것은 자신과 함께 다른 사람까지도 실족하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시되,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둘 다 도랑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눅6:39)   올바른 해석을 오히려 영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사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아서 예수님이 화를 내고 답답해했다는 해석이 바로 영해입니다. 이런 문제는 다 개역성경의 오역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오역이 영해를 생산해 냅니다.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바른 성경을 가지고 앞뒤 문맥을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요11장에서 예수님이 우신 유일한 이유는 인간들이 죽음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괴로워하셨기 때문입니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부디 바른 성경을 맑고 깨끗한 정신과 마음으로 바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더욱 많아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3-12-31 18:29:48 | 관리자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 (요3:1~15)   김대용 형제님께서 다음 설교를 녹취하여 이 글을 작성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437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창조하신 여러 창조물 중에서도 인간에게만 부여해 주신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체의 발화기관(發話器官)을 통해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매우 독특하고 월등한 능력입니다.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견이나 생각이나 사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은 말을 통해 타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원한 멸망의 길에 갇혀 있게 만드는 등 엄청난 일들을 하게 됩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이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개역성경은 문장이 수려하고 간결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더불어 고풍스러운 웅장함은 읽는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의 치명적 약점 중 하나가 성경의 진리를 나타내는 용어를 잘못 선택해서 그 잘못 선정된 말들로 인해 사람을 오히려 타락의 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 중에 하나가 ‘거듭나다’라는 동사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많이 들어 보았을 ‘거듭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나다. : 지금까지의 방식이나 태도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다.   이를 우리가 흔히 쓰는 다른 말로 바꾸어 보자면 ‘개혁하다’와 비슷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다.’의 예문을 들어 보겠습니다.   “검찰총장은 대한민국 검찰을 일류 검찰로 거듭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김 아무개 군은 지금까지의 부랑아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다면 ‘거듭’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 :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이렇게 어떤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을 표현할 때 ‘거듭’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런 잘못된 말이 개역성경에 기록되다 보니 구원받은 이후에도 교회에 나아와 자꾸 거듭나고 또 거듭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한자어로는 ‘중생’(重生)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구원은 단 한 번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 여러 번 거듭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이런 모호한 말을 전부 물리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로 구원의 진리를 확고히 하였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개혁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미국 3대 성인잡지 중 하나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래리 플린트(Larry Claxton Flynt)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한때 “저는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났습니다.”라고 세상에 공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는 이후에도 변함없이 사악한 음란잡지를 발행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또한, NIV성경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몰렌코트 박사(Virginia Mollencotte)는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 “동성연애는 나의 일부분이 되어 왔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세상에 공개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절체절명의 모든 것이 걸린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님보다 더 잘 설명할 이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의 치리자더라. 바로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께 이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기적들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하매(요3:1-2)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더위가 물러가고 산들바람이 불 던 중동의 어느 날 밤,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던 바리새파 사람 니고데모는 이제 갓 서른 살의 청년 랍비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홀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많은 사람이 머리를 조아릴만한 권세와 명성을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자신만이 알고 있는 마음속의 의문과 갈증을 풀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는 한밤에 청년 랍비인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함께 당시 유대인의 3대 당파 중 하나였던 바리새파는 그 명칭에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하고 엄격한 종교인이었으며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현시대의 크리스천들은 흔히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위선자를 연상합니다. 물론 많은 바리새인들이 위선자이고 탐욕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위선자요,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중에는 성경에 명시된 율법 외에도 무려 600가지나 되는 전통들을 지키며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니고데모의 마음속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의 한계에 대한 종교적 갈등이 극심했습니다. 더불어 요한복음 3장의 예수님과 대화 속에서 나타난 그의 영적 무지는 자신의 사회적, 종교적 위치와 비교해 너무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권력가이자 종교적 열심과 지식으로는 최고의 경지에 있다는 바리새파의 핵심인물이었지만 구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 지식도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서 행한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요2:23) 급기야 자신의 내면에 해결되지 않는 신앙의 갈등과 고민을 들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겉은 그럴듯하지만, 갈등과 무지함 속에서 방황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요3:3).   니고데모의 입장에서는 마치 동문서답과도 같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회적 명망가였던 그의 고름 가득한 부패한 내면을 가르는 날카로운 수술용 칼과도 같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람의 출생이라는 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서 니고데모에게 구원의 장중한 원리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첫 출생이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탯줄을 끊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경험하는 둘째 출생 곧 다시 태어남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신비한 영적 출생임을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자로서 성경과 율법에 정통하다는 니고데모는 계속해서 하늘의 관점이 아닌 육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노력하며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게 됩니다.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그가 자기 어머니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하매(요3:4)   지금 우리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출생, 초자연적인 출생, 하늘로부터 임하는 출생,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신비한 출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소경인 니고데모는 오히려 엉뚱하게도 눈에 보이는 육적 출생만을 이야기하며 예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존경받는 학자들,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는 정치가,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는 재력가,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인기인, 삶의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노련한 지혜자 등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부와 능력과 지식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영적으로 무지하다면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니고데모처럼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로 착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고 집사요, 장로요, 심지어 목사라고 하며 자신이 몇 대째 믿음의 명문가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또한, 자신은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아끼지 않고 교회의 일이라면 두 팔 걷고 충성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사람들 중에는 다시 태어난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제 이처럼 답답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임하는 신비한 출생 곧, 다시 태어남에 대해 다시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 (요3:5~7).   여기서 5절 ‘물에서 나고~’는 절대 물 침례나 세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물은 사람이면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자궁 안에 차 있는 양수(羊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 침례나 세례를 말하는 것이라면 구약의 성도들은 모두가 물에서 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또한,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강도도 마찬가지가 되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현될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 출생 즉 육적 출생을 위해서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출생 즉 하늘로부터 임하는 거룩한 영적 출생도 이처럼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진리로서 선포되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그 마음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렇게 두 부분이 결합하여 한 사람 안에서 작용할 때 비로소 사람이 다시 태어나며 구원받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째 출생을 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본성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성격이나 식성, 외모 등이 부모와 저절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둘째 출생을 현실로 경험하는 사람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이 그의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옛 본성(옛사람)과 새 본성(새사람)이 공존하게 되는 신비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은 육적인 본성에 의해서 식성(食性)이 달라집니다. 부모가 육식을 좋아하면 자녀도 그렇게 되고 부모가 채식을 많이 하면 자녀도 자연스럽게 채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둘째 출생 즉 거룩하게 다시 태어남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입어 그 사람이 추구하는 영적인 식성이 달라집니다. 과거 세상의 유흥과 불경건한 오락을 즐기던 자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것들을 찾고 누리며 즐기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걷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영적 식성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난 신자는 영적으로 성장하며 점진적으로 장성한 분량까지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께서 은혜로우신 것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3).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도 첫째 육적 출생처럼 성장의 단계를 거칩니다. 아기가 성장하면서 젖을 먹다가 이유식을 먹고 나중에 밥을 먹게 되듯이 다시 태어난 영적 아기들은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고 찾게 되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영적으로 성장하여 후에는 장성한 사람의 음식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기가 혼자의 힘으로 출생하지 못하고 외부의 힘이 작용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아기인 구원받은 신자도 혼자서는 둘째 출생을 할 수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함께 일하심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과거의 기억도 경험도 또한, 그것으로 인한 고민과 걱정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기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면 과거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잊히고 아버지께서 기억조차 안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중요한 것은 어떤 특정한 방법이나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특정 훈련 프로그램이나 혹은 특정 목사가 꼭 있어야 다시 태어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출생은 오직 모든 인간들의 조건을 초월해 바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것의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하시니라(요3:8).   바람이 불면 사람이 그것을 느끼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mystery)입니다. 실제 사람의 아기가 태어나는 것도 신비이듯이 주님 안에서 영적 아기로 태어나는 것도 사람이 그 현실을 일일이 규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요한복음 3장의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지식인 중 한사람인 니고데모의 반응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영적 소경이요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많은 지식과 높은 명성을 소유하였으나 오직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어 다시 태어난다는 영적 원리는 전혀 알지 못했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땅의 것들로 설명해도 진리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가엽게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해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 뱀과 놋 뱀 사건’을 통해 다시 태어남과 구원의 진리를 이해시키시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4~15).   니고데모에게 구약의 민수기 21장(4~9절)을 상기시키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불 뱀에 물렸던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라는 뱀에게 물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불 뱀에게 물려 그 독으로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이들은 동일한 뱀인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것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처럼 죄는 죄로 퇴치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롬8: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놋 뱀처럼 땅 위로 솟아오르신 뒤에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에 그분은 스스로 죄가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바로 예수님께서 죄 많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직접 죄 덩어리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의 죄 문제를 깨끗하게 영원히 해결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모두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5).   우리 모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면 바로 그 순간 누구든지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경험이 반드시 있어야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구원받은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럴 때에도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는 삶 속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도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더더욱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기 전의 옛 본성(옛사람)과 구원받은 이후에 생긴 새 본성(새사람) 사이에 계속해서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죄에 대한 민감함이 점점 늘어나게 되고 이전에 아무렇지 않게 짓던 죄들을 점차로 멀리하고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와 같은 특징이 있는 사람들을 성경은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래의 특징들을 잘 참고하십시오.   구원받은 사람의 본성과 영적 식성(食性)의 변화   1.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애타게 구한다(벧전2:2-3).2. 두 본성으로 인해 심한 갈등이 생긴다.3.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해진다(롬6:1-2).4. 그래서 구별된 삶을 사랑한다(요일2:15-16; 5:4).5.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믿음의 모임에 나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 원한다(요일3:14).6.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혼을 사랑한다(롬9:1-3; 10:1; 고후5:14).   자! 이제 지금까지 읽은 모든 내용을 생각하며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나는 아직 다시 태어난 경험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복음 3장을 통해 알게 된 진리를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봅니다. 이제 내가 나의 인간적인 행위나 치적이나 공로나 어떤 좋은 장점이나 강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깨닫고 영접하게 될 때 내가 다시 태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나아가기 원하시는 분은 지금 이 시간 마음속으로 “주여, 저를 구원해주소서.”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노라,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2013-12-31 13:09:57 | 관리자
사진과 파일을 같이 올리려했는데 용량이 많아서 그런지 잘 안돼서 1,2로 나눠서 올립니다. 필요할 때 프린트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jpg파일을 따로 올리고 싶었는데 사진처럼 올라오네요. jpg파일이 필요하신 분은 저에게 요청하시면 이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메일은 icut4u@hanmail.net 입니다. 지금 올라온 순서는, 1 &3 inside -> 1 &3 outside -> 2 &5 inside -> 2 &5 outside ->4 &6 inside -> 4 &6 outside 순 입니다. 참고로 6은 비어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31 03:58:08 | 최문선
       안녕하세요? 2013년이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것 같고 느낌으로는 이제 5월쯤 되었나 싶은데 벌써 한 해가 다 갔네요.  제가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에서 사용하려고 김** 형제님께서 올려놓으신 전도지 중 다섯 가지를 사용하여 저희 집 딸의 도움을 받아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봤습니다.  지난 번 원주에 사시는 형제님께서 그곳에서 사용할 전도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것들도 살펴봐주시고 혹시 원주에서도 필요하시면 사용해주시길 바랍니다.  각 교회에서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저희 교회 주소를 적었던 난에 ‘교회 사용 란’이라 고 연하게 표시했습니다.    전도지 파일들과 전도지를 프린트 후 접은 모양을 사진 찍어 올렸습니다. 1.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2.     나비의 삶은…. 3.     ??? 이 세가지는 내용이 짧아 A4용지 3분의 1 사이즈로 한 번만 접어서 사용합니다. 4.     윌버와 샬롯의 거미줄 이야기 5.     왜 예수님을 믿고… 이 두가지는  내용이 길어서 A4용지 3분의 2 사이즈로 가로로 한번 세로로 한번 접어서 사용합니다.  더 자세하기 설명해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A4용지에 프린트 해보시고 모양대로 접어보시길 바랍니다. 속 안이 잘 보이도록 모서리를 일부 접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손에 잡기 편한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잘 이용되어 기쁜 소식이 전해지길 기대해 봅니다.   새해에도 KeepBible 을 통해 반가운 만남이 더해지길 기도 드립니다.   샬롬!      
2013-12-31 03:47:41 | 최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