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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래 형제님~!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는데 감기 조심하십시오. 변천기와 사도행전의 기적적인 체험의 상관관계는 다음의 글을 참조해 주십시오. *은사주의 질문(12): 사도행전의 체험은 지금도 있는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35 더불어 다음의 글과 서적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은사주의 질문(10): 지금도 특별계시가 있는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33 *은사주의 질문&답변 모음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cate_name=&sfl=write_subject&stx=%EC%9D%80%EC%82%AC%EC%A3%BC%EC%9D%98+%EC%A7%88%EB%AC%B8&sop=and&x=28&y=13 *오순절 은사운동 바로 알기 PDF 파일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158 질문으로 성경지킴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진리 안에 교제가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2014-01-13 16:27:45 | 김대용
한국 교회의 내노라 하시는 분이 천주교 교황의 방한때 큰 집 형님이 오시는데 마중을 나가야지 했다고 하기에 우리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가지쳐 나온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내막을 알고보니 이건 아니다싶어 천주교에 나가는 처제에게 바른 복음을 전해 하루속히 악마의 소굴에서 뻐져 나오게 하고싶어 자료를 찾던중 '교황 대신 예수님을 택한 49인의 신부들'이라는 책을 구할려고 이터넷 서점에서 찾아보니 절판이라고 합니다. 혹시 이 책의 구입처를 아시는 분이나 소장하고 계신분의 연락을 바랍니다. 천주교의 유래, 천주교의 사상 평가, 천주교 기독교와 어떻게 다른가?외에 천주교인 전도요용으로 좋은 자료를 아시는 분은 연락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2014-01-13 16:19:41 | 박수복
샬롬.평소 강해나 자료를 통해 성경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은혜받고 있습니다.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을 하려구요.밑에 링크는 킵바이블의 지도선도에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그림인데요,표적과 은사들에 대해 변천기 40년안에만 있었던 사건으로 보는 것은 어떤 말씀을근거로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역사적인 근거가 있나요?평소 정동수 목사님 메세지도 많이 듣는데 은사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근데 궁금증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질문을 합니다.형제님들의 좋은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지도선도 - 유대교와 기독교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consult&write_id=103&cate_name=%EA%B2%BD%EB%A5%9C%EC%A3%BC%EC%9D%98
2014-01-13 11:04:44 | 조형래
      안녕하세요?    뉴질랜드 최문선 자매입니다.^^    이제 2014년인가 했는데 벌써 1월 하고도 12일 입니다.    요즘 미국과 캐나다는 이상 저온과 폭설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 곳 뉴질랜드는 한여름이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네요.    아마도 지구 전체가 기온이 낮아진 것 같습니다.        2013년을 은혜가운데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2014년을 또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대가 됩니다.    뉴질랜드 Bible Believers 모임도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올바른 말씀과 바른 교리로 주변을 세워나가는 한 해가 되길 기도 드립니다.    저희 모임을 위하여 기도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제 6차 모임을 <아 래> 와 같이 알려드립니다.    이 안내를 보시고 함께 참여하는 분들이 더해지길 바랍니다.                      <   아      래   >   1.일자와 시간: 2014년 1월 18일 토요일 저녁 7시   2.장   소 : **번지 Smales Rd. East Tamaki, Auckland(East Auckland)   3.내   용 : ‘요한계시록 바로 알기’(김** 형제님 저)   3. 공중강림과 휴거(216쪽~229쪽)   지난번 5차 모임에서 다 하지 못하고 남은 부분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4.연 락 처: 휴대폰 027-779-8877 (최문선)       뉴질랜드를 비롯해서 한국과 또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바른 성경 신자 모임이 날로 흥왕하길 기도 드립니다.       샬롬.  
2014-01-12 17:35:26 | 최문선
올려주신 답글들을 읽을 때 마다 그분들의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에 항상 감사드리는 부족한 형제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끝까지 이 곳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01-11 23:28:28 | 이성길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틀린 것을 알고 바꾸고 실천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 희망적입니다. 이런 소식이 자주 들려오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점점 더 많은 결실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2014-01-11 14:16:41 | 김재욱
새해를 맞이해 너무나 기쁜 소식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평안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기쁨이 풍성하게 부어지길 바랍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영적 피난처와 진리의 둥지로 성장해 가길 마음 깊이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1-11 11:21:58 | 김대용
참고로 이 글은 다음 설교를 김대용 형제님이 녹취한 뒤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444 수고해 주신 김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수고가 결국 주님께 영광이 되리라 믿습니다. 샬롬 패스터 정
2014-01-10 15:05:4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구원만큼은 확실해야 합니다.   부탁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   구원 방정식   문장으로 길게 쓰인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 때 문장을 잘 읽고 분석하여 여러 변수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한 뒤 방정식을 세워서 풀면, 어렵고 복잡해 보이던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을 경험 적이 있을 겁니다. 이와 비슷하게, 복잡해 보이는 인간의 구원 문제도 몇 개의 변수로 나누어 요약/정리하면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1. 구원의 필요성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그것들을 만든 존재 즉 메이커가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펜, 의자, 자동차, 책 등이 모두 메이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모든 메이커는 자기가 만든 물건이 설계대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한 뒤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은 따로 분리하여 폐기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메이커가 있습니다. 물건도 메이커가 있는데 하물며 물건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고등 존재인 사람이 무(無)에서 그냥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만든 메이커 역시 자기가 만든 사람이 자신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는지 여부를 반드시 판단합니다(행17:31; 히9:27). 이 같은 심판에서 부적격자로 드러난 사람은 메이커가 폐기합니다. 성경은 이 같은 메이커를 ‘창조자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사람이 심판 받은 뒤 폐기되는 것을 ‘영원토록 지옥 불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계20:11-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폐기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나를 만든 메이커가 있는가, 없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구원의 방해물 사람과 물건 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곧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자신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부적격자로 판정하시는 근거가 죄라고 말하는데 성경적 의미의 죄란 ‘목표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을 만드시며 사람이 자신의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고의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분의 목적에서 벗어나 그분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를 지었습니다(롬3:23). 첫 사람 아담에게서 시작된 이 죄의 독은 사람의 핏줄을 타고 전 인류에게 퍼졌습니다(창5:3; 롬3:10). 그 결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아담과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에게 육체적 사망이 임했고(롬6:23) 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결국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서 지옥 불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셔서 티끌만큼의 죄도 차마 보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합1:13).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과연 나는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구원 계획 그러면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공장에서 갓 만들어진 펜이 하나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 펜은 쓰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설사 이 펜이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해도 그것이 자기를 고치거나 혹은 그 옆의 펜이 그것을 고칠 수 없습니다. 같은 범주에 속한 것들이 서로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다 해도 고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앓고 있는 죄라는 병 역시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 즉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마더 테레사, 교황, 교주, 목사, 사제 등이 절대 고칠 수 없습니다. 펜을 설계한 메이커만이 펜을 고칠 수 있듯이, 사람과 차원이 다른 외부의 고등 설계자 즉, 사람의 설계자인 하나님만이 사람의 죄의 독을 제거함으로써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행4:12).   4. 구원 방법 사람의 죄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처녀 탄생을 통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죄 없는 삶을 사시고 온 인류를 대신하는 완전한 희생 예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단번에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습니다(마1:23; 고후5:21; 히9:26).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죄가 되셔서 하나님의 뜨거운 지옥 불 심판을 다 감당한 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몸으로 부활하셔서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기나 햇빛같이 사람에게 필수불가결 한 모든 것을 거저 주십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 귀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행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 역시 오직 하나님께서 선물로, 은혜로 거저 주십니다(롬5: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 사역을 믿기만 하면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로, 선물로 공짜로 구원받습니다(엡2:8-9).   5. 구원의 확신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믿습니까? 그 사람의 신실함에 근거해서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 곧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분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말기 바랍니다.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창조자 하나님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기에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믿습니다(요14:6).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6. 구원 초청 인생은 마치 기차역을 향해 달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단 몇 시간을 아끼려고 열차 시간에 늦지 않게 부지런히 역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이라는 무궁한 시간을 아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은 언제 당신에게 닥칠지 모릅니다(히3:13). 나이와 직업과 성별과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오늘 그 시간이 당신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서 베푸시는 방법을 그대로 믿고 수용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태어나는 기적이 당신에게 일어납니다(벧전1:23). 오직 그분의 말씀만을 신뢰하십시오. 그분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값없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미루지 말고 오늘 주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7. 구원 방정식의 요소들 설명 1.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온 세상 만물은 다 만들어졌습니다. 즉, 창조자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가장 고등한 생명체 역시 그냥 우연히 생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메바 같은 단순한 생명체에서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진화론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꾸며낸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크기를 제대로 측량하기조차 어려운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지구가 그냥 생기는 것은 열역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든 창조자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첫머리에서 그 창조자를 ‘하나님’(God)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당연히 우주보다 더 크고 권능이 월등하게 넘치는 분이어야 합니다. 또한 온 세상 만물보다 훨씬 더 고등한 존재여야 합니다. 또한,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스스로 계신 이(I AM)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출3:14).   이 말씀이 보여 주듯이,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자시요, 만들어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분이십니다. 이 온 우주 공간에 “나는 I AM이다.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영원 전에도 I AM이시요, 지금 이 순간도 I AM이시요, 영원한 미래 속에서도 I AM이신 분 즉, 변함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권능과 위대함과 전능함을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무한대의 지혜와 능력과 위엄과 영광과 공의와 사랑과 진노를 지닌, 측량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가 영원토록 무한하듯이,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와 심판 역시 영원토록 무한합니다.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다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이렇듯 무한한 권능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구는 먼지보다도 작고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은 먼지의 100만 분의 일도 안 되는 매우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거룩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은 창조자 하나님은 창조물과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님이시요, 창조자이시고 사람을 포함한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다 만들어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자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2. 사람 (1) 사람의 창조와 타락 사탄 마귀는 원래 하나님의 왕좌가 있는 셋째 하늘에서 주님을 섬기던 존재였습니다. 사실 그는 매우 특별한 창조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는 천상의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겔28:14).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마음속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불법이 생겨나자 그는 자신을 따르는 악한 천사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결국 하나님의 왕좌가 있는 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마귀는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다가 마침내 이브에게 접근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였고 또 이브는 그것을 아담에게 먹게 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심연(深淵)의 간격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에서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금지 항목을 두셨는데 그것은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주신 가장 값진 선물인 자유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하나님의 장치였습니다. 이 제약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하여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를 따르게 되었고 그 결과 죄가 그에게 들어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였습니다(창1:26-27).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고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 중 일부만을 유지한 채 본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뒤 아담의 후손들은 다 아담의 형상에 따라 죄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백삼십 년을 살며 자기 모양대로 자기 형상에 따라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창5:3).   죄로 인해 사람은 다 결국 늙고 병들어 육신적으로 죽게 되었고(창5:5) 또 죽는 날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사람 즉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 곁을 떠나 사탄과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지옥 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 사람의 상태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걸었느니라.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 안에서 생활하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엡2:1-3)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 즉, 죄 가운데 태어나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이제 막 새로 구매했지만 아직 개통되지 않은 스마트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통신사에 가입되지 않아도 이 스마트폰은 거의 모든 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전화기로서의 본연의 역할 즉 의사소통은 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개통되지 않은 스마트폰처럼 거의 모든 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인간 본연의 존재 목적 즉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은 할 수 없습니다. 통신사에 가입해야 통화할 수 있듯이 사람도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가입해야 그분과 의사소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구원받아 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최신 스마트폰이라 할지라도 통화할 수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전화기라 할 수 없습니다. 구형 전화기라도 깨끗한 음질로 통화가 가능하다면 전화기로서의 자격을 충족시킵니다. 전화기의 생명이 통신사와의 연결에 달린 것처럼,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과의 연결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명예와 권세와 학식이 높다 해도 통화가 안 되는 전화기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성경대로 그는 마귀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입니다(요일3:10; 엡2:3). 또한, 아무리 선행을 열심히 하여 하나님께 도달하려 한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의 선행과 의로운 행위는 다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합니다(사64:6).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과 같이 달리고 그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 그분과 같이 부활하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구원받은 사람은 즉시 천국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앉아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이란 이처럼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복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속에서 보여 주려 하심이라(엡2:4-7).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이토록 놀라운 ‘인간 구원 드라마’를 천사들과 하늘의 영적 존재들에게까지 드러내 보이시고자 하십니다(엡3:10). 이로써 하나님의 친절과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은 다가오는 영원한 시대 속에서 무궁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람 안에는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만한 요소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구원에서 사람의 행위가 이바지하는 것은 0%이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는 100%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행위는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받은 이후에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말씀으로 자신을 갈고닦아 시간이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뒤에는 반드시 선한 행위의 열매가 드러나야 합니다.   (3) 사람의 구속(救贖) 성경에서 ‘죄’란 근본적으로 ‘설계자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조물이 창조자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곧 죄이며 이 죄의 뿌리에서 나오는 열매가 바로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동성연애, 시기, 질투 등의 ‘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에 이르도록 즉 자신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는 성경 기록대로 죄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나 마치 설계대로 나오지 않은 불량제품이 폐기되듯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극히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의 창건 이전에 한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가 무한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신 분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이 두 성품 중 어느 하나를 양보하거나 완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한 공의와 무한한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키시며 사람을 구원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온 우주 공간 어디에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를 충족시킬 완전한 희생 예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죄가 되어 죽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완전한 공의의 심판을 그분에게 쏟아 부으셨고 이로써 자신의 거룩함과 공의를 완전히 충족시키셨습니다(고후5:21). 또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속죄의 희생물로 죽임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시면서 사람의 모든 죄를 깨끗이 제거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세상의 창건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히9:26).   3. 믿음: 구원의 핵심 요소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아 구원받으려는 사람에게 단 하나만을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곧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종교는 하나같이 사람의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들은 악행을 극복하기 위해 선행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주인에게 귀여운 강아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강아지가 길에서 놀다가 갈비뼈다귀를 발견하였습니다. 강아지는 그것이 먹고 싶었지만 자기를 아끼고 보호해 주는 주인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그것을 먹지 않고 물어다가 주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 뼈다귀를 보자마자 즉시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오히려 강아지를 나무라며 더러워진 강아지의 몸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마. 네가 가져온 이 뼈다귀가 오히려 집안을 더럽게 하지 않니? 너는 그저 나만 바라보고 나를 믿고 기뻐하며 내 품 안에서 마음껏 뛰놀면 돼.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다야.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의 모든 행위가 바로 이 쓸모없는 갈비뼈다귀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선행, 위대한 업적, 찬란한 지식, 고매한 철학, 각종 종교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뼈다귀 즉,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더러운 뼈다귀에 불과합니다.   믿음이란 마치 강아지가 제 주인을 알아보고 그의 보호를 확실히 믿으며 그의 품에서 기뻐 뛰어놀 듯이, 사람이 자신을 만든 창조자 하나님을 알아보고 믿으며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의 품 안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것입니다. 즉, 창조자 하나님 외에 나를 보호하고 나를 온전하게 해 주실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며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기뻐하는 단순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입니다.   4. 은혜: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람의 선한 행위나 재물, 노력, 학식, 지혜 등이 구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까요? 아니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일까요?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사람의 생명과 관련해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요소인 공기나 햇빛 등은 사람의 공로나 행위와 상관없이 거저 주어집니다. 이것들은 그 가치가 너무 커서 감히 어느 누구도 그 값을 지불하고 누릴 수 없습니다.   70-80년의 인생에서 누리는 모든 자연환경도 사람이 그 값을 지불할 수 없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사는 삶을 과연 사람이 자기 힘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공짜로 즉,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 100%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엡2:8-9).   5.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거대한 개미집이 있습니다. 선량한 사람이 지나가다 그것을 발견했는데 공교롭게도 저 멀리 홍수가 나서 잠시 후에는 사나운 물길이 개미집을 온통 집어삼킬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량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개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 수많은 개미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이 개미가 되어 개미들 가운데로 들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 즉, 지금 빨리 개미집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으면 잠시 후 홍수로 몰살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성자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직접 사람의 육신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물인 사람들이 그분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무지하던 때를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한 날을 정하사 그 날에 자신이 정하신 그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터이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그 사람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일에 대한 확신을 주셨느니라(행17:30-31).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 누구에게나 회개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소망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증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에 심판자로 이 세상에 임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친히 구원의 길을 여시고 사람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렇듯 오직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으므로 기독교는 타종교와 달리 절대적으로 배타적입니다. 그러므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와 WCC 종교통합운동 등은 모두 하나님과 상관없는, 진리를 떠난 사람들의 어리석은 종교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희 모두와 이스라엘 온 백성은 이것을 알라, 곧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곧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이 온전하게 여기 너희 앞에 서 있느니라. 이분은 너희 건축자들이 업신여긴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느니라.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행4:10-12).   6. 선한 행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의 구원에는 사람의 그 어떤 행위도 일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에 따라 구원받은 이후의 성도는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누구나 다 구원받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훈련하며 나날이 영적으로 성장하여 장성한 분량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선한 행위를 하며 자신을 희생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는 구원에는 어떤 차등도 두지 않지만, 본래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구원 이후에는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상을 달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운동선수가 상을 바라보고 결승점까지 전력을 다해 달리듯이,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며 복음을 알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는 선한 믿음의 행위를 신실하게 행해야 합니다(히11:6).   7. 불신자에 대한 최후의 심판   보상에만 하나님의 공의가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형벌에도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가 적용됩니다. 생전에 심히 악한 죄를 저지르고 믿음의 사람들을 핍박하며 하나님께 대항한 사람들, 복음을 증언하는 크리스천들의 경고를 수없이 받고도 이를 무시하고 경멸한 사람들은 유황으로 타는 불 호수에서 더욱 뜨거운 형벌의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엄중한 공의를 영원토록 쉼 없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계20:11-12).   이 말씀은 구원받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자들이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 다 불려 나와 크고 흰 왕좌 심판석 앞에서 심판받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 뒤에 불신자들은 사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지옥 불 속에 들어가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8. 구원 초청 아침 출근 시간에 밖으로 나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면 그야말로 분주하게 단 몇 초를 아끼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지나가는 시간은 양초가 불꽃을 내며 연소하여 없어지듯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입니다.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 속에 사는 사람에게 절실하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장성해서 결혼하면 자녀를 낳고 행복한 삶을 위해 땀을 흘리며 일합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누구나 안정되고 행복한 노년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행복한 노년을 맞이하기도 힘든 세상이기만 그런 노년은 고작해야 20년에서 길면 30년 정도입니다. 그 이후에 펼쳐지는 끝없는 시공간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요즘처럼 각종 보험이 넘쳐나는 때에도 죽은 후에 삶을 보호해 줄 보험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험이 제공하는 안전장치라고는 고작해야 죽은 후에 유가족들에게 지급되는 사망보험금 정도뿐입니다. 이것 외에는 그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는 것이 언젠가는 꼭 죽어야 하는 사람이 맞이할 냉정한 현실입니다.   당신은 죽은 뒤의 삶을 어떻게 대비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창조자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시간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언제 당신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이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며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셨다면 그 문제를 더는 뒤로 미루지 말고 바로 오늘 이 시간에 당장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중의 아무도 죄의 속임수를 통해 강퍅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하라(히3:13).   기회는 항상 당신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특히 구원의 기회를 놓쳤을 때 감당해야 할 대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한대의 영역에 계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무궁토록 바로 당신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맹렬한 속도로 날카롭게 돌아가는 원형의 칼날 바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칼날이 닿기 직전까지 당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칼날과 당신이 아직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당신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그 날카로운 칼날에 당신은 결국 파멸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당신 앞에 놓인 날카로운 칼날을 저 멀리 치워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누구든지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값없이, 거저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놀라운 특권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세상 우주 만물을 공동으로 상속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무지와 교만과 고집을 내려놓고 지금 바로 당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끝끝내 진리를 거부하고 마지막 기회마저 소진하며 이 세상을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처럼 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으십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지금 당장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벧후3:9-10).
2014-01-10 11:35:42 | 관리자
가끔은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인간, 또는 천년왕국이 도래했을 때의 미래의 인간을 그려볼 때가 많습니다. 인간과 너무도 닮은 늑대. 그러나 죄가 없는 그들. 그들 속에서 혹시나 죄 없는 인간을 발견해 볼수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같은 글을 써보게 되었네요. 부족한 글 읽어봐주셔서 감사해요~^^
2014-01-10 01:19:40 | 김상진
오광일 형제님의 댓글로 많은 분들이 이해의 폭을 더 깊게 할 줄로 생각됩니다. 저도 좋은 성경 공부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다 의문이 들 때 항상 믿음의 눈으로 평온하게 지혜를 구하면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영적 눈을 밝게 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9 22:57:26 | 김대용
샬롬! 위에 아주 자세하게 달린 덧글로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추가 설명을 달아 봅니다. 복음서를 보실 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정확한 교리적 이해와 믿음을 바탕으로 성령님의 조명하심 아래 문맥에 맞게 읽고 생각하신다면 무리 없이 말씀을 잘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1.본문 이해를 위한 배경지식 장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회상하며 약속된 메시야의 왕국을 바라보는 절기로서 유월절(과월절) 및 칠칠절(맥추절, 초실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이다(출애굽기 34:22). 절기를 축하하는 동안 장막집에서 살던 그들의 습관에서 나왔으며, 선조들이 40년 동안 장막에서 살며 방랑하던 유목생활을 기억하여 기념하는 절기이다. 티쉬리얼(9~10월) 15일(추분일에 가까운 보름달)부터 1주간 지켜졌는데,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가 열렸습니다. 한마디로 백성들이 환희와 축제를 즐기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은 예수님의 반대세력들(종교 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했기에 예수님께는 무척이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장막절도 지켜야 하고 자신의 반대 세력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 사면초가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역을 완수하기 까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았고,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불신앙 상태의 형제들의 제안 요7:3~4 그분의 형제들(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생활로 태어난 동생들-가족)이 그분께(예수님께) 이르되, “여기를 떠나 유대로 들어가 당신이 행하는 일을 당신의 제자들도 보게 하소서. 은밀히 일을 행하면서 드러나게 알려지기를 스스로 바라는 사람은 없나이다. 당신이 이것들을 행하시거든 당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봐 왔을 형제들인데도,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믿음이 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시편69:8 참조하세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명 가량의 사람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자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떠난 사건을 기억하면서 이들은 예수님을 약간은 조롱하는 투로, 불신앙의 상태로, 세상적인 관점으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요7:5) 스스로 높아지려 하는 자들은 군중들의 박수 갈채 위에서 성공의 척도를 가늠하지만 하나님의 종들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압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대중적인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기뻐하는 장막절 축제 기간에 다시 한 번 기적을 행함으로 군중들에게 드러나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나타내며, 적대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 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사역을 망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3.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뤄짐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에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사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2:4(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7:6(자신을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요7:8...“나는 내 때가 아직 충만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적을 지키러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7:30(예수님을 잡으려 하는 사람들이 손대지 못함)...“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요8:20...“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요12:23 “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요13:1 (유월절 전에)...“자기 때가 이르러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줄을 아시고...” 요17:1...“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4. 왜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에게 명절 지키러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하시고 나중에 올라가셨나? 요7:6-10을 성령님의 조명하심 아래 여러 번 정독해보면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행동을 조심히 하셨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세상”의 일부이기도 했기에 그런 책망의 당사자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형제들에게는 먼저 올라가라고 말씀하시고 요6:6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요6:8 ...“나는 내 때가 아직 충만히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명절을 지키러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6절과 8절을 잘 비교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거짓말을 하거나 대충 말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신게 아니라 자신의 때가 충만히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아직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지요.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의 때가 충만히 이르면 올라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비밀히, 은밀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5. 정리 예수님께서는 공생애기간동안에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사셨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위한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장막절 참석을 억지로 하여 하나님의 때에 맞지 않게 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도 않으셨고, 참석할 때가 되었는데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시자 완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한 모습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14-01-09 22:27:55 | 오광일
  동물 가운데 늑대만큼 억울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이전의 글 ‘왜, 늑대인가?’에서 잠시 다루었듯이, 늑대는 인간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동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사람들로부터 학살을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끊임없이 테러(terror: 공포, 그리스어 ‘terrior’에서 파생된 됨. ‘terrorism’은 공포의 확산의 뜻을 지님.)를 당해온 셈입니다. 그런 피해자인 늑대를 두고, 우리 사회는 단독테러를 자행하는 범행을 일컬어 일명, ‘론 울프테러(lone wolfe terror)’라고까지 명명합니다. 늑대가 들으면 억울해서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crime)와 테러리즘(terrorism)이라는 용어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팁(tip)을 드리자면, 그것은 범법동기에 의해서 구분됩니다. 범죄는, 가해자 자신(들)의 이익이 동기가 되어 자행하는 범법행위이지만, 테러리즘이란 정치․종교․이념 간의 갈등이 동기가 되어 자행되는 범법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테러(terror)의 개념이 바라보는 각도(입장)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 일제치하로부터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윤봉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의로운 순국열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를 정치적인 테러분자로 여기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한 편에서는 영웅, 다른 편에서는 잔인한 킬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도가 인간과 늑대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15c 이후 인류는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면서 늑대들의 구역을 찬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자신들의 영역과 무리(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목숨을 내놓고 다투는 그들만의 습성이 있는데, 그러한 늑대의 습성을 알리 만무했던 우리 인간과의 갈등은 그때부터 불가피하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를 찬탈당한 늑대들은 전처럼 사냥감을 찾기가 어려워져 새끼들의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개간한 농가의 양, 염소, 말들을 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한 과정에서, 늑대는 인간을 습격하는 ‘잔인한 킬러’라는 오명이 생겼고, 그 이후로 사람들은 늑대를 총, 덪 등으로 사냥하기 시작 했으며 심지어는 현상금까지 걸어가며 마구잡이로 죽여 댔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결과로 사람들은 늑대의 방해가 없이 땅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지만, 늑대의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기는 시국을 맞게 되었습니다.(참고로 늑대는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중간 포식자의 위치를 담당합니다.)     이처럼 ‘오해와 편견’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늑대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봤을 때, ‘오해와 편견’이 만들어지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정확한 지식이나 정보가 결여된 ‘선입견’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익관계에 따른 타협(탐욕)’입니다.     심리학에서 ‘초두효과(primacy effect)’라고 불리 우는 용어가 있습니다, 초두효과란, ‘초기의 정보 즉, 첫인상이 나중의 정보보다 그 사람에 대한 인상형성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선입견은 이러한 초두효과로 인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문제점은 한 번 뇌리에 고착되면 좀처럼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좋지 않은 선입견은 자기방어 기재로 작용하기 때문에 객관성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누구나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믿고 싶어 하는 타협성이 강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한비자(韓非子)는 "사람들은 뱀을 보면 놀라고, 뽕나무 벌레를 보면 소름끼쳐 하지만 어부들은 손으로 뱀장어를 잡고 부녀자들은 누에를 친다." 라며 이익이 있는 일 앞에서는 누구나 용사처럼 용감해진다는 인간의 본성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선입견과 이익관계가 하나로 결합하게 되면 선입견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더 없이 좋은 구실이 되어줍니다. 설령 선입견이 이익관계에 결부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또 다른 구실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정당화시키기도 합니다. 마치 이브가 뱀의 말에 꼬임당해 선악과를 탐하기 위한 구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켰듯이 말입니다.<창 3:3> 다시 말해서, 이익을 넘어 탐욕이 되어버리면 기존의 좋은 선입견도 더 이상 귀찮은 것이라고 치부하게 되어버립니다. 이쯤 되면 명확한 기준이 되는 법(法)도 무시하게 되어 탐욕을 위한 타협에 우정을 싹티우며 손잡을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그런 유의 사람에게는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 예로, 자살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들이 이러한 유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한 가지 예를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테러집단은 이슬람교의 부흥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12살 전후의 어린 소년 병사들을 모집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입시키는 내용은, 이슬람 외에는 구원이 없으며 이슬람 교리를 핍박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강하게 응징해야 한다<꾸란 8:39, 9:123, 47:4>는 거짓 교리 입니다. 더 나아가 특히, 기독교인들과 싸울 때는 가차 없이 벌하라<꾸란 8:57>고 합니다(그 방법으로는 목을 베는 것인데, 김선일 사건이 그와 같은 사례입니다). 그 같은 교육을 받은 소년병들에게는, 이슬람을 반대하는 모든 종교는 응징의 대상이 되는데 그들에게 특히 기독교는 가장 나쁜 종교이면서 그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닌 오히려 알라의 뜻이라는 정당성이 선입견으로 뇌리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면 행동적인 것을 요구하게 되는데, 행동적인 실천을 요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구원관과 관련하여 내세에 주어지는 인본주의적 상급(이익)을 가르칩니다. 그 내용은, ‘모두가 죽으면 연옥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다가 죄의 정도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 때에 갈라지게 되는데, 단지 직통으로 천국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알라를 위해서 순교(테러행위)를 당하는 것이다<꾸란, 4:74, 9:89>. 그리고 그 순교자(테러분자)는 포상으로 천국 가는 첫날 72명의 미인들과 성관계를 즐길 수 있는 정력이 부여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어이없는 비상식적인 교리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목숨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자신의 몸을 폭탄과 함께 내던지는 어리석은 일을 자행합니다. 이처럼 ‘선입견’과 ‘이익관계의 조화’는 상식을 뛰어넘는 ‘사탄의 절묘한 계략’으로 활용 됩니다. 그런데, 사탄의 이러한 계략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인가? 답은 아닙니다. 현재 기독교에도 사탄의 탐욕스러운 인본주의 교리가 우리의 신앙 가운데 ‘오해와 편견’이라는 열매로 탐스럽게 무르익고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짜 신도들도 넘쳐 납니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가짜 성도는 자신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은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이 되어주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해하고 사랑한다고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을 향한 지독한 사랑까지도 흉내 내는 일도 가능하며, 심지어는 인류애도 품어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에게는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가짜 성도처럼 장기적으로 흉내 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물론 가끔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남들에게 좋게 보이려하는 그릇된 일도 하지만 그 때마다 성령님의 자극으로 자신들이 곧바로 알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은 결국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기독교는 소위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폄하할 때 표현하는 개독교가 되어 버렸다고 사람들이 종종 표현하는데,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참으로 씁쓸할 뿐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탐욕으로 마귀와 손을 잡은 이 땅의 기독교는 온통 ‘오해와 편견’으로 조장된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가짜의 정체는, 인본주의적 산물인 복(福) 사상의 주체가 되는 맘몬입니다. 맘몬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인양 믿고 있는 가짜 성도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제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바른 교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른말을 하는 그들을 교세라는 뒷배를 이용하여 이단으로 매도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가짜 하나님(실상은 맘몬)이 뭔가 더 직접적으로 해줄 수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맘몬이 하나님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맘몬의 능력으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소위 성령님의 열매라고 착각하면서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만의 확증이라고까지 너스레를 떱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대가를 주님 오신 날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슬피 우며 이를 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자신들이 주님을 오해했다고 변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마태복음 7:21~23> 우리 손 안에 쥐어져 있는 진정한 말씀(KJB)만이 그들의 심판자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작금의 기독교의 행태에 대하여 알파늑대(우두머리)에게 소감을 묻는다면, 알파늑대는 이렇게 말을 할을 할 것 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은 있어. 우리 신의 이름은 대자연(大自然)이지. 자연은 여태까지 우리 늑대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락하고 제공해 주었어. 우리가 뭘 잘해서 그렇게 허락해 준 것이 아니라, 자연은 원래 그런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을 대상으로 너희들처럼 감히 거래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해. 우리에게 자연은 오직 경배의 대상일 뿐이지. 자연은 우리가 있기 이전에 스스로 존재<출 3:14>하고 있었어. 그래서 자연 앞에서는 우리 늑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굴복할 수밖에 없지. 우리는 자존심이 강해서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대자연 앞에서 만큼은 굴복할 뿐만 아니라 자연이 정해놓은 규칙(순리)대로 순종하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며 살지. 우리는 그것이 우리 늑대가 오랫동안 멸종당하지 않고 살아온 지혜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어<잠 1:7>. 우리는 너희들이 믿는 신(神)을 잘 몰라. 하지만, 우리도 우리에게 부여해준 모든 대자연을 보면서 자연이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는 신성을 모른 척 변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롬 1:20>.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자연은 잔인하고 사악한 너희 인간을 존중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그것도 많은 권위를 부여해주면서 말이야. 너희가 잔인하다는 소문은 조상 때부터 전해져 내려왔는데 듣자하니, 너희들은 너희들이 믿고 싶은 대로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 내는데 능숙하다지?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조상(늑대)들을 죽여 왔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진정으로 믿는 신(神)까지도 너희 손으로 잡아 죽였다며? 그런데도 너희 신(神)은 너희를 용서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야? 우리는 단지 자연이 너희들에게 부여해준 권위 때문에 너희들에게 복수를 하지 못했지만, 너희 신(神)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너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하여 기꺼히 목숨을 내놓으셨다고 하던데? 아니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게 구원을 위한 계획이었다? 이런 스토리는 소설에서도 듣도 보지도 못한 믿겨지지 않는 일인데 말이야! 만일 그 이야기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너희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너희들을 부러워하지 않아, 왜냐고? 우리는 너희처럼 잘못된 선입견과 탐욕에 가득 찬 추악한 냄새를 풍기면서까지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거든. 우리가 너희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냄새 때문이야.“     인류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한 번도 이성적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수 많은 오해와 편견속에서 인류는 지금까지 흘러왔고, 여전히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해답을 늑대로부터 찾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늑대가 제시해준 비결이라고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침묵’이라는 단어 였습니다. 늑대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라는 듯 권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찬 한 세상. 그리고 이 새대. 이제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수 많은 오해와 편견으로 시험이 찾아 오지만, 어쩔 수 없는 죄 많은 인간이라서 용서를 못한다는 핑계는 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물을 찾지 않고도 죄 없는 늑대처럼 상대를 용서할 수 있음이 가능해 졌기 때문입니다.   <요 13: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2014-01-09 01:40:07 | 김상진
글의 분량만 보아도 얼마나 심혈을 짜내어 답글을 작성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성준 형제님~! 귀한 답글에 대단히 감사하고 앞으로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가끔이라도 좋은 댓글과 글로 킵바이블에서 함께 해 주세요. 성경 해석에서 앞뒤 문맥을 중요시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문맥은 성경 해석의 왕도다.’라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많은 주석서도 이런 해석방법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물론 주석서들이 절대적이지도 않고 성경 해석에 있어 매번 꼭 보아야 한다고만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어떤 자세로 성경을 보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런 문맥을 살피는 해석법을 무시하고 뭔가 새롭고 명확한 것을 찾다가는 자기 꾀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기가 십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풀려 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도랑으로 빠질 수 있고 신천지처럼 모든 성경을 비유로 풀어야 한다는 영적 괴수마저 탄생하게 됩니다. 질문을 올리시는 분들은 그야말로 단 몇 분 만에 자신이 궁금증을 올리시지만, 답글을 작성하는 수고는 최소한 그의 몇 배 이상이 들어갑니다. 질문하시기 전에 과연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의문인지, 좀 더 스스로 찾고 공부하는 노력을 할 수는 없는 것인지,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지속해서 성경을 찾고 공부함으로써 스스로 해결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한 것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보심이 진정한 영적 유익을 취하는 길이라 감히 생각합니다. 다만 소박한 바람은 질문하시는 분이나 답글 올리는 지체들이나 온라인상이지만 겸손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든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격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 무한한 감사의 마음은 당연히 주님께서 보혈로 대속하여 영적 지체가 되게 하신 형제/자매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마땅합니다. 당장 저부터 겸손히 섬기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문맥을 세세히 살피고 여러 주석서를 상고하며 성실하게 작성해 주신 정성이 가득 들어간 답글을 올려 주시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이성준 형제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성경지킴이를 오가는 모든 분들의 평안함을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1-08 18:00:13 | 김대용
안녕하세요 오정근 형제님~!! 한참 고민하다가 답글을 달아봅니다. 제가 제대로 된 답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올려봅니다 답글은 처음이라 미숙해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저는 성경을 이런 관점에서 봅니다. 성경이 옳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신실한 분이라는 출발이면 ‘왜 이렇게 기록해주셨을까’ 에서 출발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이미 ‘난 이렇게 생각이 들고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성경은 내 생각과 다를까’ 라는 생각은 출발부터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시작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I. 그럼 첫 번째 질문부터 제가 아는 선에서 답변 달아봅니다. 답변보다는 그냥 구절들 해석이라 보는 게 맞겠네요. ∘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 1.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산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출 24:18) -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 부분에서 조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달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 모세를 두고 1절에서 나오듯이 “이 모세 곧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사람에 관하여는 그가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1절)에서 보듯이 모세가 돌아오지 않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조급함과 인내가 깊지 못해 아론을 다그쳐서 새로운 우상, 즉 형상을 만들어서 우리를 좀 인도해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2. 4절에 ‘새기는 도구로 그것의 모양을 내매...’ 아론이 우상에 참여한 얘기가 나옵니다. 더욱이 섬세하게 만들었다는 구절도 있네요 • 소의 형상에 대한 얘기는 “그러나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들이 각각 자기 눈의 가증한 것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이집트의 우상들을 버리지도 아니하였으므로...”(겔 20:8) “자기들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모습으로 바꾸었도다.” (시 106:20) 이집트의 신인 소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체하는 신성모독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정확히는 십계명 중 제 2계명을 범했다고 많은 학자들이 봅니다. 3.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기 전 아론과 훌을 백성들의 치리자로 모세의 부재로 인한 백성의 치리 문제를 해결하고 갔습니다. (출 24:14) 그러나 백성들이 지도자의 부재와 하나님 임재의 사라짐, 광야에서의 남겨진 상황 등에 격분하자 아론은 너무 두려워서 그 죄를 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1절, 22절-24절) •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아론의 동료이자 가족이던 훌(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아론과 함께 모세의 팔을 들어 승리로 이끈(출17:10-12))이 백성들의 요구를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죽자(그러므로 이후 성경에서 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이에 놀란 아론이 그들의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임재가 떠난 주님과 눈에 보이는 형상을 봐왔던 애굽땅에서의 풍습에서 아론에게 부탁했다는 학설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종교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산에 나무나 하늘의 해와 달과 별에 비는 모습, 돌을 쌓는 종교심 등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4. 다만 4-6절에서 볼 수 있듯이 형상은 만들었지만 그 대상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을 위한 절기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신 새로운 신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도록 형상화했다는 설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아닌 우리 뜻대로 우리 마음대로 드리는 예배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5. 7-10절 • 모세에게 상세히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시며 ‘스스로 부패하고, 주님이 명령한 길에서도 속히 떠났다’ 는 표현을 하십니다. •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는 표현도 쓰시며 진노하사 그들 모두를 소멸시키시고자 하셨습니다. (느9:18) • 아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소멸시키고 모세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6. 11-14절 • 모세의 간구함으로(중보) 인해 아론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위기를 모면함. 7. 19-20절 •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했지만 모습이 엄연히 우상숭배며 이교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주관 아래 모세가 백성을 심판함. 8. 21-24절 • 아론의 변명 : 내 주여(모세에게) 맹렬히 분노하지 마소서. 그들은 해악에 빠진 자들이니이다. --> 죄인의 공통된 특징이 나타난다. 죄인은 본인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 죄를 고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세에게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 이브가 뱀에게 죄를 책임 전가했던 것처럼, 아담이 이브에게 책임을 전가했던 것처럼 아론 역시 백성들에게 죄를 전가시킨다. 본인은 죄가 없다는 듯 변명을 합니다 . -->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 라는 아까 4절에 ‘새기는 도구로 그것의 모양을 내매...’ 라는 구절을 숨기고 거짓말을 합니다. • 이브는 속고 아담은 죄를 알고 지은 것을 아신 하나님 --> 이 경우와 비슷한 전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딤2:14) • 아론의 주도로 이루어진 우상숭배가 아닌 백성들의 무리중에 불안함과 강퍅함에서 시작된 우상숭배였다는 사실 --> 35절에서 나타나 듯 주도했던 백성에게 심판(징벌)이 내려졌지만 아론에게는 징벌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 허나 아론은 아들들이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징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요? 그리고 아론은 자신을 징계에서 구해준 모세를 미리암과 함께 대적하다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땅에는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모세의 중보가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9. 26-28절 • 3000명 가량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음 이와 대조적인 신약의 구절 오순절 사건 이후 베드로에게 설교를 들은 3000 혼 가량 구원받음 (행2:41) --> 킹제임스 성경의 재밌는 표현입니다. 구약 율법 아래 3000명 가량 징계신약 성령 침례 안의 3000혼 가량 구원 10. 레10:1 •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8장에서 제사장 직분으로 거룩히 구별됩니다. 그리고 9장에서 나오듯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게 됩니다. --> 9:24절에서 나타나듯이 주님의 영광과 임재의 시청각 교육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 10장 1-2절이 되면서 바로 나답과 아비후가 죽습니다. --> 이상한 불로 거룩히 구별을 못했다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 3절 : 아들들이 죽었음에도 애도하지 못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8-9절에서 성막에서의 금주를 말씀하십니다. 위에 1-2절에는 이상한 불 얘기만 있었지만 많은 학자들이 8-9절이 바로 나옴에 따라 아론의 아들들이 술을 마시고 이상한 불을 드리지 않았겠냐라는 학설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금주에 관한 율법이 바로 이때 처음 등장 했기 떄문입니다. 사28:7 • 신약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 ※ 그러면 왜 아론의 아들들이 죽었을 때는 모세의 중보도 없었고 하나님께서 직접 바로 죽이셨을까요? -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아론은 백성들의 반 강제적인 협박에 못이겨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이 있고 아론의 아들들은 본인들이 자행해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성막에서의 거룩함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왜 성막의 거룩함을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육체를 멸하심을 아끼지 않으시는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알리고 싶으신 계획이 성경을 통해서 있으신거죠 • 쭈욱 나열만 하겠습니다(유대인을 위한 프로그램과, 이방인을 위한 프로그램,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대인 이방인 구분없는 프로그램) 1. 아담과 이브의 결혼(최초의 명령이신 가정) 둘이 결합해 하나가 됨을 알려주심(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됨의 예표) 2. 애굽에서 이끌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청각으로 보여주신 거룩한 성소 3. 솔로몬 때 지어진 거룩한 성전 4.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성전을 허물고 3일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던 그 성전. 5. 십자가 사건 이후에 건물로서의 성전은 의미가 없어지고 (실제로 AD70년에 무너짐) 오순절 사건 이후에 성령침례 받은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또는 성령님 안에 거하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칭해주시고 교회라고도 칭해주십니다. 6. 사도 바울은 이 교회를 정결한 한 처녀로 또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몸단장을 시켜줍니다. 7. 바로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서 자격을 갖도록 말이죠. 8.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결합해서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 교회(건물 아님)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하나님의 프로그램입니다. ※ 자, 보이시나요? 하나님의 경륜이...? 특히나 이 중요한 프로그램에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함이 손상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엄격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아론은 모세의 중보도 있었지만 아론의 아들들은 이런 중요한 문제가 있었음을 생각해봅니다. ∘ 참고 문헌 : 매튜 헨리 주석, 헤세드 레마, 랑게 주석, IVP주석 II.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은 성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100% 인간의 모습과 100% 신의 모습이 공존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 사건으로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모습 보다는 공생애 기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메시아로서 큰 표적과 이적들을 행하고 계신데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사역에 위기를 느끼시고 모습을 나타내셔야 할 곳을 제외하고는 조심하시는 모습이 성경에 나옵니다. 1. 7장 8절보다 우선적으로 문맥을 따라 6장에서 실족해서 떨어져 나간 제자들이 많은 걸 보실 겁니다. • 요6:61 이것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 64절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며 또 자기를 배반하여 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셨기 때문이라. •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고자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 (요5:18) • 성전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을 때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할려고 했습니다 - 20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성전 보고에서 이 말씀들을 하셨으나 아무도 그분께 손을 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 8장 56-59절 : 그때에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 하거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숨기시고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렇게 나가시니라. •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지 못하나 나는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에 대해 증언하되 곧 세상의 행위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라. (요7:7) -->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2. 예수님은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표적과 이적들을 계속 보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로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데요 제일 중요한 십자가 사역을 방해할려고 하는 무리들이 늘어나자 은밀히 이동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죽일려고 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중에는 이 메시아를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할 일과 은밀히 해야하는 십자가 사역의 길이 달랐음을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7:1-10절과 같은 구절들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제자들의 무리에 섞여서 올라가면 사람들 눈에 금방 들키고 마니 은밀히 올라갔다는 얘기를 합니다. 글고 예수님 본인을 원래 이 땅에 온 의미로 보지 않고 자꾸 인간들의 욕심으로 채울려고 하여 때로는 제자들과 뜻을 달리하여 은밀히 사역을 행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3. 여기서 참고하고 넘어갈 부분이 예수님의 인성입니다. 신성과 달리 인성의 모습이 묻어 나오는 구절들이 무언인가 알아보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A. 여자에게서 태어남(눅1:31; 갈4:4). B. 영과 혼과 몸을 가지고 있었다: 몸(마26:12), 혼(마26:38; 요12:27), 영(마2:8; 눅23:46) C. 사람(유대인)처럼 생기셨다(요4:9; 8:57; 20:15). D. 살과 피를 가지셨다(히2:14). E. 성장하셨다(눅2:52). F. 물으셨다(눅2:46). G. 지혜가 자라셨다(눅2:52). H. 아는 것에서 제약이 있으셨다. 이것은 스스로 취하신 것이다(빌2:5-8).막5:30; 막13:32;요11:34 I. 기도하셨다(막1:35; 눅11:1). J. 시험을 받으셨다(마4:1; 히2:18; 4:15). K. 순종하기를 배우셨다(히5:8). L. 시장하셨다(마4:2; 21:18). M. 갈증을 느끼셨다(요4:7; 19:28). N. 피곤을 느끼셨다(요4:6). O. 주무셨다(마8:24). P. 사랑하셨다(막10:21). Q. 불쌍히 여기셨다(마9:36). R. 노하시고 슬퍼하셨다(막3:5). S. 우셨다(요11:35; 눅19:41). T. 기쁨을 느끼셨다(눅10:21; 히12:2). U. 고통을 받으셨다(요11:33; 12:27; 13:21; 막14:33-34). V. 피 같은 땀을 흘리셨다(눅22:44). W. 고난을 당하셨다(벧전4:1). X. 피를 흘리셨다(요19:34). Y. 죽으셨다(마27:50; 고전15:3). Z. 묻히셨다(마27:59-60). ∘ 참고 문헌 : 메튜헨리, 헤세드 레마, nic신약주석, 캐논 4복음 주석, 에메트 신학 주해, 웨슬리안 주석
2014-01-08 16:57:59 | 이성준
안녕하세요? 2014년에는 여러 가지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뉴질랜드의 최문선 자매님께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365일 동안 매일 낭독해서 유튜브에 올리기로 하셨습니다.앞으로 최 자매님의 성경 읽기 스케줄에 따라 성경을 읽거나 들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링침례교회 사이트에서 상단의 녹색 메뉴 중 설교와말씀 메뉴에서 시리즈말씀 안에 성경낭독 메뉴를 추가하였습니다.앞으로 사이트 담당자가 링크를 걸어놓을 것입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3&cate_name=성경낭독 하나님의 말씀이 큰 영광을 받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킹제임스 흠정역 연대기 성경 낭독.1월 1일(창세기 1장-3장)http://www.youtube.com/watch?v=KNKyrvo-kEo **킹제임스 흠정역 연대기 성경 낭독.1월 2일(창세기 4장-7장)http://www.youtube.com/watch?v=8ccSMwDxkVA
2014-01-08 14:42:37 | 관리자
위선(僞善)은 참으로 집요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집요함이 마치 그림자와 같습니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달음질을 해도 전혀 거리가 벌어지지 않고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아옵니다. 잠시 마음의 긴장을 풀면 어느덧 위선은 사람의 내면 깊숙이 둥지를 틀고 곧바로 증식을 위한 세포분열을 시작합니다. 위선과 관련된 성경 구절은 신구약을 통틀어 모두 42번 등장합니다. 위선, 위선자들에 해당하는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는 hypocrite, hypocrites, hypocritical, hypocrisy, hypocrisies, dissemblers, dissembled, dissimulation 등이며 특히, 신약성경에 27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위선(僞善) 관련 구절들 중에 마태복음 7장 1~5절과 누가복음 6장 41~42절에 기록된 동일한 예수님의 교훈을 중심으로 성경이 위선과 위선자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으며 위선이 사람의 내면에 파놓은 은밀한 함정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위선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기 중에도 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중화기에 속합니다. 매우 선한 사람조차도 한순간에 위선의 늪에 빠질 수 있고 복음 사역에 매진하던 교회나 단체가 위선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거나 심지어 와해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치 누룩과 바이러스처럼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기에(눅12:1) 삽시간에 대중들을 선동해 위선적 사고와 행동 아래로 헤쳐 모이게 만들어 한 시대를 타락하게 하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합니다. 먼저 위선의 독특한 기능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심리적 좌절을 경험하게 될 때 또는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하게 될 때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타인과 단체 그리고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찾게 합니다. 그런 후에 외부로부터 포착한 문제를 자신의 내면에서 확대 재생산하고 왜곡시켜 집착하게 만듭니다. 41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 네 형제에게 이르기를, 형제여,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겠노라, 할 수 있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 뒤에야 네가 분명하게 보고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리라. (눅6:41~42)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가 빠져버린 함정의 특징이 타인의 잘못과 부정적인 면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정확하게 잡아내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는 보지 못하는 모순의 극치임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위선자가 집중하는 타인은 우선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가까이에 있는 동역하는 형제/자매일 경우가 많다는 것도 중요한 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아주 작은 먼지로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생활하는데 큰 지장이 없고 사실 시간이 지나면 눈물 등에 의해 저절로 제거되어 해결될 수 있는 정도의 사안입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속담을 적용해도 무방할 정도의 것으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지만 크게 걱정하거나 공론화할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위선자의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어떤가요? 물론 물리적으로 눈 속에 기둥만큼이나 큰 나무인 들보가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비유이기에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들보는 눈의 모든 기능을 영구히 상실시키고도 남을 치명적이고 위급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선자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감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생길 수 있는 부산물과 같은 형제의 눈 속에 작은 티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때는 온유하게 문제에 대한 권면의 말을 건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진 사람은 절체절명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형제를 몰아붙이고 공격하며 급기야 공동체 전체를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할 일은 형제의 눈 속에 미세한 티끌을 놓치지 않는 극도의 예민함이 자신을 성찰하는 것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내면은 이미 파국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데 아직은 그냥 두어도 괜찮은 형제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이 어리석음은 결국 심각한 위기로부터 방치된 자기 자신과 무모한 위선자의 비판의 칼날을 감내해야 하는 형제/자매와 공동체 모두를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맙니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할 수 없고 눈 속에 거대한 들보로 막혀 있는 자가 어찌 티끌이 들어간 사람의 눈 속에 바람을 집어넣어 그 부스러기를 제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누가복음 6장의 위선자는 그런 명백한 자신의 모순과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내겠다고 소리를 칩니다. 내 의견과 관점이 정확하니 내 말을 듣고 내가 제시한 해결책을 따르라고 호언장담하는 위선자는 교회 안의 지체들과 공동체에 커다란 짐이 될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위선자가 발견한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당장은 그냥 두어도 되지만 제거해 버린다면 좋을 것이고 분명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커다란 들보를 눈 속에 간직한 위선자가 그 티를 제거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눈 속에 있는 들보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코가 눈인지 입이 눈인지 분간조차 못하는 위선자의 손은 치료하고 해결하는 손이 아니라 흉기로 돌변할 것이 뻔합니다. 문제를 발견한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위선자의 좌충우돌하는 일련의 행동은 사사건건 지체들과 공동체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주 작은 위선이라도 사람의 내면에서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에게 진리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해결책을 꺼내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치명적 문제인 들보에 대해 집중하고 깊이 생각하라는 교훈입니다(마7:3). 자기 내면의 어떤 굽어진 요소들이 거대한 들보라는 문제를 키웠나를 차분하게 생각하고 돌아보는 것이 묵직한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위선자의 눈 속에 들보를 빼내는 첫 시작은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정확하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눅6:42) 눈 속의 티가 점점 커져 시야를 가리는 들보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또한,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들보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부지런히 자신을 말씀의 거울로 비춰보고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속속들이 성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급한 행동보다 먼저 깊이 자신의 속 중심까지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이 위선의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치료제입니다.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6장에 나타난 위선자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위선자 그룹이었으며 종교 시스템의 전도사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도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도다. 그것은 겉으로는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마23:27)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곤경에 빠트릴 함정을 파는 행위가 정당하고 선한 것이라 여겼기에 자신들의 악행을 절대로 고침 받지 못했습니다. 자! 오늘날 교회 안에 널리 퍼지고 있는 배교의 물결을 보십시오. 이 가증한 물결의 최전방에 서 있는 타락한 기독교계의 리더들은 자신들이 이런 악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렇게 행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날 밤 베개를 베고 누워 잠들기 전 저절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그 짧은 몇 분의 시간조차 두려워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져 항구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스스로 장애를 입힌 사람들입니다. 1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2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딤전4:1~2) 이 시대가 더욱 빠르게 극악한 배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것은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만이 위선의 독주에 취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이런 심각한 배교현상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하기만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은 성경에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는 '위선의 역사'가 주는 뼈아픈 교훈을 깊이 되새기지 않았기에 발생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착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적어도 현시대의 기독교는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교보다 당연히 하나님 앞에 선하며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오늘의 목사와 신학자들은 월등하고 바르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이 무모한 믿음은 성경의 교훈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미 있던 것 즉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전혀 없도다. (전1:9)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벧후2:1) 은사주의로 교인들을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자들로 전락시키고 WCC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도 자신을 복음주의자라 외치며 만담가와 개그맨처럼 우스갯소리로 설교시간을 장식하는 타락한 목사들도 강단에서만큼은 다들 한국교회는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 위기는 도대체 누가 불러온 것일까요? 각자 다 선한 선생이 되어 한국교회의 위기와 해법을 논하는데 과연 그 위기를 만든 장본인은 누구란 말입니까? 독주에 진탕 취하고 싶은 알콜중독자도 처음엔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딱 한 잔 만!!'이라는 위선의 구호를 외칩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만든 배교의 장본인들이 하나같이 강단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를 걱정하고 위기라고 떠드는 것은 자신의 배교행위에 면죄부를 발행하기 위한 일종의 위선입니다. 가증함으로 가득한 이런 위선적 설교에 취해 교인들은 '그래 아직 우리 교회는 괜찮은 교회야.' '아직 우리 교회는 살아있어.' '그래도 우리 목사님은 이 시대의 모순과 문제를 분별하는 제대로 된 분이군.'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깊은 늪 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위선으로 가득 찬 거짓 대언자, 거짓 선생을 구별하는 간단명료한 기준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하고 번지르르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행위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쌓인 구체적인 행동들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진리의 길을 택한 행동들이 그의 세월의 앨범 속에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15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16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남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마7:15~18) 위선자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겁니다. 더불어 위선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모순은 자신의 치명적 문제는 제쳐 두고 타인의 작은 잘못과 문제를 교정해보려 달려드는 무모함입니다. 정리하면, 위선이라는 모순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마7:3)”와 “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눅7:42)”의 말씀처럼 먼저 자신의 문제를 감지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실체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 장애를 겪게 하는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야 형제/자매의 영적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고 교회와 공동체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 원리입니다. 성경은 많이 선생이 되길 권장하지 않고(야3:1)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밝혀내는 논박의 전문가가 되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마7:1~2, 눅6:37). 물론 한편으로 성도는 시대를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성경을 기준으로 바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고전6:2).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반드시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허물은 없는가, 나에게 부족함은 없는가, 내 생각에 잘못된 부분은 없는가를 항상 먼저 살피는 사람이 지혜롭게 위선의 은밀한 함정을 피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논쟁과 논박에서 승리한 사람보다 한참이나 성숙한 주님 보시기에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한없이 부족한 사람인 저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엄격하고 빈틈없이 자신을 살피고 온유하게 지체를 섬길 수 있는 지혜와 명철함이 임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갈6:1)
2014-01-08 14:36:13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