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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조금 일찍 다가와 약간 더운 날씨였는데 추석은 행복하게 잘 지내셨는지요?   이곳은 추석이 휴일이 아니라서, 지난 주일에 교회에서 몇몇 가정이 준비해 온 추석음식을 나눠먹고, 윷놀이와 공기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유학생들에게는 특별한 명절이었지요.   지난 번에 1차 모임 안내를 해드렸는데, 이번 2차 모임은 West Auckland에 있는 Kumeu에서 9월 28일 토요일 저녁 6시 30분에 있습니다. 당분간은 매 달 마지막 토요일 저녁에 모이고 있습니다.   지난 1차 모임에서는, '조직신학 1'의 2과  '1.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Bible)'를 갖고 함께 나눴습니다. 이번 2차 모임에서는,  '요한계시록 바로알기' 뒷부분에 있는 참고자료 중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방법(김문수 목사님)'을 가지고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의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휴대폰:027-663-9777   바른 말씀으로 바른 교회를 그리고 올바른 신앙을 바라는 분들의 기도와 열정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이곳의 모임을 위해서도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뉴질랜드 Bible Believers 1차 모임 안내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243          
2013-09-22 07:04:24 | 최문선
다시 보려니 게시물이 이동되어서 한참 찾았습니다. 이 분석은 우리가 성경을 번역하거나 이해할 때 단어의 문법적인 해석보다 우선적인 용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나아가서는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원어나, 원어사전(예 : 스트롱코드)을 찾아가며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용례를 잘 파악하고 번역한영어성경(KJV)을 기준으로 역시 영어의 용례를 잘 파악하여 번역한 킹제임스흠정역 성경이 원어사전을 찾아가며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정확하고, 따라서 유익합니다. 영어 단어의 용례 파악에 있어 국내에 출간된 여타 다른 킹제임스성경 번역판들은 킹제임스흠정역 만큼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09-20 11:34:29 | 류인선
어제 생명의 말씀사에 일을 보러 갔다가 이상한 제목의 책을 보았습니다.    목회, 위험한 소명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278155   안의 내용이 흥미로울 것 같아서 가지고 왔는데 역시 기가 막히게 좋은 책이었습니다.   목사가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목사라고 생각하며 목사 의식을 가지고 살 때 공인으로서의 목사와 남편과 가장으로서 사적인 목사의 삶에 큰 괴리가 생김을 잘 보여 주는 책입니다.   공적인 목사이기 전에 예수님의 은혜를 늘 갈구하는 한 사람의 죄인으로, 성도로 자기를 바라보지 않으면 위선적인 목사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 주는 책입니다.   저와 제 아내가 추구하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위선적인 목사 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희는 좋은 방향을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 같은 한 죄인이,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의 죄를 보여 주고 주님의 위로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목사라 당신들과 다르다"라는 생각이 목사와 사모의 마음에 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끝없는 추락이 시작됩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도 허사임이 분명합니다.   저자는 자기의 경험을 들어가며 현 시대 목사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이렇게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낼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목사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 번씩 보면 좋을 것 같아 강추합니다.   샬롬   DSJ   ---------------책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이 목회자이기 전에 매일 은혜를 필요로 하고, 죄와 싸우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도움을 구하면서 성화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나를 목회자로만 생각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목회자의 직분이 교회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은사와 소명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목회자’, 바로 그 직분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했다. 이제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듯이,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었다. ---「1장」중에서   대중 앞에 비친 내 모습과 개인적인 삶에서의 내 모습이 분리되어 서로 상충되는 현상이 심해질수록 자신의 실상이 겉으로 드러날까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들이 나의 사생활을 알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내게 어떤 태도를 보일까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심지어는 일자리를 잃을까 초조해하기도 한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나를 염려하며 자꾸 의문을 갖는 것을 보면, 두려움에서 비롯하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동료 사역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나의 문제와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이 혹시 나에 대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만 고민하기에 이른다. ---「2장」중에서   어느 날 저녁, 로마서의 한 대목을 주석하는데 무엇인가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복음을 가장 훌륭하고 포괄적으로 설명한 로마서를 수개월 동안 매일 몇 시간씩 연구해 왔으면서도 정작 그 메시지에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복음의 메시지는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문법과 구문, 신학적 개념과 논리적 논증이 전부였다. 거창한 지적 활동이었을 뿐, 영적 능력은 거의 전무했다. 글자가 빼곡히 적힌 페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이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처럼,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멀고 흐릿하게 느껴졌다. 환각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내가 직접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 나의 실생활, 결혼생활, 죄와의 투쟁, 나의 과거와 미래, 나의 가장 깊은 희망과 꿈과 두려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공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동안 이 모든 것이 단지 학점이나 과제나 학위를 위한 것이라면,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장」중에서   그리스도께서 몸의 머리시라면, 그 나머지는 모두 그분의 지체에 해당한다. 목회자나 사역의 지도자가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하나의 지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도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행하는 중요한 사역과 그 상호 관계망에 관한 규칙 가운데서 오직 목회자만 예외라고 말하는 성경 구절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덜 중요하게 보이는 지체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목회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목회자가 홀로 동떨어져 고립된 채 살아가는 문화는 영적으로 건강하지도 않을 뿐더러 성경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5장」중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늘 거룩한 것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데 있다. 그게 왜 위험한 것일까? 하나님의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 경외심을 잃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성경을 대하다 보면 광대한 지혜가 깃들어 있는 위대한 구원 이야기에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속죄를 설명하다 보면 십자가 밑에 서 있어도 기쁨도 없고, 눈물도 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제자훈련을 시키다 보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너무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일이 되다 보니 더 이상 마음의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8장」중에서   우리는 공인으로서의 삶과 개인으로서의 삶이 서로 충돌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이 상태에 익숙해질 수 있는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 목회자의 마음속에서는 늘 온갖 우상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아 일종의 예배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치열한 영적 전쟁에 지친 수많은 목회자들이 이중적인 삶과 사역의 우상들에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다. 이런 결과를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오직 은혜만이 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때 다른 곳에서 생명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출 수 있다. ---「14장」중에서
2013-09-19 10:57:5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희는 지금 교회 사이트, KeepBible 사이트, 유튜브 등을 통해 설교와 강해 동영상 및 음성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인터넷 속도가 느리므로 교회 사이트에 접속해서 보고나 듣기가 어려워서 sermonaudio.com이라는 사이트에 음성 설교/강해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미국에서 가장 큰 설교 모음 사이트입니다(물론 거의 다 영어 설교라 대부분의 국내 성도들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스마트폰의 마켓에서 sermonaudio라고 치면 앱이 나옵니다. 거기서 cbck 혹은 Dongsoo Jung이라고 치면 저희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2012년 3월부터 지난 1년 반 동안 이 사이트에서 설교를 듣거나 다운로드한 통계를 올립니다.   총 3,132명이 다녀갔고 약 4만 8천 번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약 3만 번 mp3 설교를 다운로드했고 이중 스마트폰으로 다운 받은 것이 2만 번 정도 됩니다.   앞으로 이런 매체들을 통해 전 세계에 주님의 말씀이 편만하게 전달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DSJ
2013-09-17 14:51:3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난 3주에 걸쳐 성경 신자들이 믿는 교리를 요약/정리하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신자들의 교리 문답 01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478   성경 신자들의 교리 문답 02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480   성경 신자들의 교리 문답 03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481   샬롬
2013-09-17 14:22:35 | 관리자
오래전부터 불러온 많은 찬송가들이 잘못된 번역과 신학을 담고 있다는 것이 참 씁쓸합니다. 이로써 초창기부터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지금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음을 확인하게 되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2013-09-17 09:15:33 | 김재욱
찬송가 261장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1. 어둔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나라 여명이 왔다 ~어~ 계명성 이건 개역성경의 잘못된 단어 선택 루시퍼를 말하는 것 인데?개역성경 대로라면 계명성(루시퍼)가 동쪽에서와 이 나라의 여명이 왔다?잘못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성경의 계보를 따른 개역성경 및 현대 역본은 한결같이 루시퍼(마귀의 원래 명칭)를 제거하고 거기에 계명성을 대치 시켜 놓았다.개역성경에는 유일하게 나오는 단어 사탄의 명칭이 계명성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걸 인지하고 부르지는 않았어도 이걸 부르는 사람은 사탄을 찬양하는 꼴이 되는거 아닌가?참 심각한 일이 아닐 수 가 없다.이 찬송가의 작사자는 김재준(1901 ~ 1987)목사라는 분인데 찬송가에 보면 "자유주의 신학의 기수"이며 "행동하는 신앙인" 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이분은 일제 시대때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가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하는분 이라고 한다.이분의 주장의 일부를 적어 보면.내가 성서 문자무오설을 배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하려는 것인 까닭이다. 성경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무오를 입증해 주지 않는데 불구하고 구차스럽게 그 학설을 고집한다는 것은 ‘경건한 기만’이다. 그러므로 스티언스박사(Dr. Stearns)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이 절대 무오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심히 선하고 경건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시킨 것으로써 선한 것도 없으며 경건한 것도 없는 것이다.’ 또는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또는 문장적 오류가 다소 있다고 말한 데서 무슨 큰일이나 난 것 같이 야단 법석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성경의 절대 무오를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경건한 기만”이라고? 아니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알렉산드리아 계통의 역본은 이사야 14:12절의 루시퍼를 계명성 또는 아침의 아들, 샛별, 새벽별, 여명의 아들 등으로 바꾸어 놓았다.그런데 새벽별 은 예수님을 지칭한다.(o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 나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하늘로부터 나온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들은 것이니라. 또한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은 결코 어떤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벧후1:16-21)o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o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안에서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후손이요 빛나는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계22:16))     역설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자인 김재준씨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런 찬송시를 섰는지 모르겠으나......하나님은 1611년도에 제임스왕의 명령으로 제정된 완전한 성경 KJV성경을 보존해 주셨다. 성경 역본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마귀를 찬양하는 꼴이 되고, 개역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마귀를 혼돈 할 수 박에 없는 실정이다.바른 성경으로 돌아가자! 개역성경으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경의 기본 목적을 달성하기에 어려움이 있다.참고 :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63루시퍼인가, 계명성인가?http://blog.daum.net/7gnak/157166213.2 1930년대 이후 성경관 대립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472루시퍼의 존재
2013-09-16 16:11:27 | 허광무
영감과 보존: 원본, 사본, 역본의 관계   오늘은 영감과 보존과 번역, 그리고 원본, 사본, 역본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영감이란 무엇인가?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성경대로 믿는 신자라면 누구나 성경의 영감을 믿을 것입니다. 영감이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문자들을 써서 단어들로 기록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리스말로 영감(inspiration)은 ‘숨을 불어 내어 쉬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감’은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내어 쉬셨음’을 뜻합니다.    영어 ‘inspiration’에서 중간에 있는 ‘spir’는 영을 뜻하는 ‘spirit’에서 나왔습니다. 또 앞의 ‘in’은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감은 ‘하나님의 영(숨)이 들어갔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에 숨(혹은 영)을 불어 넣으셨을까요? 그분은 ‘모든 성경기록’에 그리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완전한 성경기록의 모든 단어에 자신의 숨을 불어 내심으로써 그 단어들이 살아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이것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단어)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히4:12-13).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단어)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영감은 몇 차례 있었나?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영감 과정이 과거에 몇 차례 있었느냐, 또 지금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감이 과거에 한 차례만 있었을까요, 여러 차례 있었을까요?   즉, 원본의 단어들만 단 한 차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을까요? 아니면 사본의 단어들도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을까요? 혹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나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어떤가요? 그것들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을까요?   이 영감 과정이 과거에만 있었을까요, 아니면 현재에도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여러 사람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여기서 잘못 나가면 럭크만주의의 킹제임스 성경 이중 영감설이 나옵니다.    일단 분명한 것은 딤후3:16에 나오는 영감이 자필 원본의 단어들을 기록할 때에 사용된 영감이라는 점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히브리말(약간의 아람어)로, 신약 성경은 그리스말로 나왔습니다. 그 단어들을 인간 기록자들이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기록의 대언은 결코 어떤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에 의해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벧후1:20-21).   분명히 처음에 원본 성경기록들이 주어질 때 영어나 우리말로 단어들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단 한 차례 자필 원본의 단어들만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다(기록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을 보존하십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완벽하게 보존되면 그 성경은 사본이든 역본이든 자필 원본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하나님의 숨(염감)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읽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이해하지 않거나 잘 표현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잘 아는 영어와 한국어를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입에서 영어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나와서 인간 기록자가 완벽하게 기록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필 원본: I am a boy.   자, 시간이 지나면서 ‘I am a boy.’가 담긴 자필 원본이 해어져서 어쩔 수 없이 사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이것을 정확하게 다른 사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본: I am a boy(필사자와 필체는 다르지만 네 단어는 정확하게 같음).   비유로 말하자면 자필 원본의 ‘I am a boy.’는 딤전3:16의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그 이후에 자필 원본의 모든 단어를 정확하게 그대로 옮겨놓은 사본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보존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다만 둘이 정확히 일치하므로 원본과 사본은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하나님의 숨(영감)이 동일하게 살아서 움직입니다.   과거의 유대인들은 피땀흘려가며 구약의 히브리 성경을 처음의 원본과 동일하게 기록하였습니다.   1960년, 밀러(H. S. Miller)가 지은 「일반 성경 입문」(General Biblical Introduction)에는 유대인들이 구약시대 회당에 있던 두루마리들을 복사하면서 지킨 여덟 가지 준수 사항이 있습니다.   (1) 양피지는 정결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되 오직 유대인만이 만들 수 있으며 정결한 짐승으로부터 만든 끈으로 묶어야만 한다.   (2) 두루마리의 각 난에는 48줄에서 60줄이 들어가야만 한다.   (3) 잉크는 반드시 검은 색이어야만 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제조해야만 한다.   (4) 어떤 단어나 글자도 머리로 외워 적어서는 안 된다. 서기관은 반드시 자기 앞에 정통 복사본을 놓고 기록하기 전에 먼저 각 단어를 큰소리로 읽고 발음해야 한다.   (5)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 전에 그는 반드시 두려운 마음으로 펜을 닦아야만 하며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을 적기 전에는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온 몸을 씻어야만 한다. 이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주(主) 즉 전체가 대문자로 된 ‘LORD’로 번역되었는데 따라서 그는 필사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이 몸을 씻어야만 했다.   (6) 글자의 형태, 글자와 단어 사이의 간격, 펜을 사용하는 방법, 양피지 색깔 등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규례들이 있었다.   (7) 두루마리를 수정하려면 그것이 완성된 후 30일이 지나기 전에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두루마리는 무효가 된다. 또한 한 장에 단 한 개의 실수라도 있으면 그 장은 버려야만 했으며 전체 필사본에서 세 개의 실수가 발견되면 전체를 버려야만 했다. 다시 말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다 기록했는데 그중에 단 세 개의 실수가 나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창세기부터 필사해야 한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어느 정도 신중을 기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필사하는 말씀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들임을 믿었으며 따라서 이런 철저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들을 완전하게 보존해 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본문에서 빼거나 본문에다 첨가하거나 본문을 바꾸거나 하는 NIV, NASB, NKJV 등의 현대 역본 기록관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런 치밀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완전하게 보존해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친히 읽으신 말씀이 자필 원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성경이라고 부르셨다.   (8) 그들은 글자와 단어 수를 세었으며, 만일 글자가 삭제 혹은 첨가되었거나 다른 글자와 붙어 있으면 필사한 사본 전체를 버렸다.   이 같은 규칙들을 소개한 뒤 밀러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이런 규칙들이 좀 부조리하거나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거룩하게 여겼는지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읽으셨던 성경, 즉 처음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성경을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손 안에 가지고 있다고 확신해도 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이 읽은 성경 말씀이 비록 자필 원본의 말씀이 아니고 필사본의 말씀이었지만 그것을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시며 기록된 필사본에 권위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단 한 번도 우리 주님은 사본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손에 있는 필사본 두루마리가 곧 원본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every word)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분명히 위 구절 안에 있는 구약 성경 말씀은 주전 1500년경에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록된 바’(it is written)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모세의 자필 원본이 아니고 모세로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약 1500년 동안 필사되어 보존된 성경(사본)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원본만 옳았다면 ‘it was written’으로 과거 시제로 기록되었어야 합니다.    참고로 여기의 현재형은 예수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뜻하는 현재형입니다.   또한 ‘모든 말씀’(every word)이란 것은 말 그대로 모든 말씀이(단어가) 보존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손 안에 들어 있는 필사본 성경이 자필 원본과 똑같음을 증명해 주셨으며 그 필사본에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려면 이 외에도 다른 구절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마5:17-18; 눅24:27; 눅24:44 등). 번역본의 영감 문제 자, 그러면 번역본은 어떨까요? 자필 원본을 그대로 동일하게 베껴 쓴 사본의 ‘I am a boy.’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번역본: 나는 소년입니다(참고로 우리말은 존칭이 있으므로 ‘나는 소년이다’, ‘저는 소년입니다’도 다 맞는 번역임).   하나님의 입에서는 분명히 처음에 ‘I am a boy.’가 나왔고 인간 기록자는 그것을 원본에 기록하였으며 이 네 단어는 사본에 그대로 정확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이 보존된 사본에서 정확하게 ‘나는 소년입니다.’라는 역본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 역본도 최초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원본과 동일한 효력을 지닐까요? 물론입니다. 정확하게 번역된 역본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100%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영감이 보존되어 있음). 그래서 이 역본의 단어들 역시 사람을 살리며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 신약 성경이 완성된 뒤로 실제로 이방 사람들을 구원한 것은 다 역본이었습니다. 즉 AD 100년 이후에는 원본이나 사본의 시대가 아니라 역본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리고 역본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손에 들린 성경(역본)에 하나님의 숨(염감)이 없다면 그것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번역 성경의 단어들이 딤후3:16의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영감은 단 한 차례, 자필 원본이 기록될 때만 하나님이 사용하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자필 원본의 단어들만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원본이 정확하게 필사되었고 그 필사본에서 지금의 역본이 정확하게 나왔으면, 지금의 역본에도 하나님의 모든 단어가 동일한 효력을 갖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자, 이제 원본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비교해 봅시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모든 단어는 원본을 정확하게 보존한 사본의 원어들에서 나왔습니다. 신약 성경의 경우 이러한 사본에는 성경기록 필사본, 성경기록을 담고 있는 성구집 등이 포함됩니다. 물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사본의 모든 단어를 가능하면 1 대 1 대응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심지어 원어의 문장의 구조까지도 영어로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당연히 언어의 차이로 인해 무언가를 첨가해야만 합니다. 번역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것을 잘 압니다.   예를 들어 다시 딤후3:16을 보도록 합시다.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is가 이탤릭체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자들이 번역을 위해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is가 없어도 말이 되지만, 영어에서는 is가 없으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역자들이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역자들은 정직하게 이것을 이탤릭체로 표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것은 원래 원본에 없었으나 번역을 위해 첨가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두 개의 is를 제외하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본(사본)을 있는 그대로 영어의 구조 안에서 가능한 한 1 대 1 대응이 되게 정확하게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형식적 일치’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번역되었기에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온전히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해서 이 성경을 들고 “이것은 하나님의 ‘오류가 없는 완전한 말씀’입니다.”라고 외칩니다.   세상에 수많은 성경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거의 완벽한 형식적 일치를 보이는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611년 이래로 이 성경에 복을 주셔서 이 세상 모든 교회와 신학교의 교리, 신앙신조 등을 정리하며 5대양 6대주에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성경을 쓰셨습니다. 온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여러 나라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수백 개 나라 성경의 번역 대본으로, 표준 잣대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럭크만주의자들 - 무조건 피터 럭크만을 따르는 자즐 - 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우수성을 너무 과장한 나머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본에서 향상된 계시’ 혹은 ‘원본보다 더 좋은 계시’ 혹은 ‘영감을 받은 성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원본보다 더 좋은 역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향상된 계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들(단어들)을 형식적 일치를 통해 정확하게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향상된 계시’나 ‘영감을 받은’ 성경이 아니고 ‘정확하게 보존된 성경’입니다.   1647년에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1조 성경 편’의 8항을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1. 하나님께서 원어 성경기록들을 영감으로 주시고, 2. 사상 유례없는 보호와 섭리로 순수하게 보존하셨음을 믿으며 3. 또한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도록 바르게 예배드리기 위해 정확하게 원어 성경기록들을 번역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세계 모든 성경 신자들은 이런 고백에 따라 영감과 보존, 그리고 정확한 번역을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온전하게 보존된 사본들에서 정확하게 영어로 번역된 완벽한 영어 성경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원본이 아니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라고 부를까요? 다음의 예를 보겠습니다. ‘ 향상된 계시’의 한 예로 행12:4를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군사가 넷씩인 네 소대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것은 이스터가 지난 뒤에 그를 백성에게로 끌어내려 함이더라(행12:4).   And when he had apprehended him, he put [him] in prison, and delivered [him] to four quaternions of soldiers to keep him; intending after Easter to bring him forth to the people.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다른 성경들은 여기의 ‘이스터’를 유월절로 번역하였습니다. 루터 성경같이 바른 본문에서 나온 성경들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 성경 중에 유일하게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이것을 ‘이스터’라고 바르게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우수하므로 이 성경은 원본을 뛰어넘으며 그래서 ‘향상된 계시’라고 주장하거나 영어 성경의 단어들도 딤후3:16의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다는 ‘이중 영감설’을 펴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의 대표적인 사람이 피터 럭크맨(Peter Ruckman)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이거나 이중 영감을 받으려면, 원본에 없던 무언인가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있어야만 합니다.   자, 그러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이스터’라고 번역한 그리스말이 원어에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것이 없는데 영어 성경이 그것을 번역해서 집어넣었다면 그것은 첨가이고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터’에 해당하는 그리스말은 ‘파스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말 파스카는 명절의 경우 크게 둘을 뜻합니다.    하나는 유월절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터’(이교도들의 부활절 축제)입니다. 파스카는 Oxford English Dictionary에도 정확하게 이 두 개의 명절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파스카는 이 둘 중 하나로 번역될 수 있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행12장의 때가 이미 무교절 기간이라 유월절은 지났으므로 무교절 다음에 오는 이교도들의 부활절인 ‘이스터’로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없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향상된 계시’나 딤후3:16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100% 보존된 바른 사본의 단어들을 정확하게 번역한 성경입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처음에 원본이 주어졌을 때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진리가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영감이 그대로 살아 있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 중 원어들을 담은 사본에서 나오지 않은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향상된 계시나 이중 영감을 받은 성경이 아닙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선포자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흠정역: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노니,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1:14).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것이 헛되어 영을 괴롭게 한다.”(vexation of spirit)고 전도서에서 무려 10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 NIV를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 역본은 이것을 전적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역: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영을 괴롭게 하는 것’과 ‘바람을 잡는 것’(grasping of the wind)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 혹은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루아흐’입니다. 이 경우 킹제임스 성경이나 개역성경의 대본이 된 원어 성경의 원어가 동일하므로 이 같은 차이가 생긴 데 대해 원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자가 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어떻게 번역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전도서의 문맥상 어느 번역이 맞을까요? 우리는 전도서 기자가 말하려는 요점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번역한 대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어 우리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결국 전도서 기자는 마무리를 하면서 12장 13절에서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영의 문제지 결코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바람을 붙잡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번역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주는 번역이라고 믿으며 이런 의미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이것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임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까? 아닙니다. 다만 킹제임스 성경이 원어를 정확하게 번역했음을 보여 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결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원본보다 낫다는 주장을 펴서는 안 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보존해 주신 사본들의 모든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해서 하나님의 이 단어들을 이방인들의 공통 언어인 영어로 보존한 성경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런 진술을 수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대편 진영에서 무식하다고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원어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원어가 최종 권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간에 우리가 원본의 모든 단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들이 바르게 번역되지 않으면 최종 권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파스카’, ‘루아흐’, ‘하데스’ 등의 원어들은 다 여러 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의도대로 번역되지 않으면 원어들만으로는 최종적인 표준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섭리(providence)라는 돌보심을 통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을 인도하셔서 각각의 원어 단어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영어로 번역하게 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본의 모든 단어들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번역되어야만 맞는다고 믿습니다.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를 택하셔서 지난 400년 동안 하나님이 하신 일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대 역본들의 역자들은 원본의 원어들의 뜻을 이 세상 문학가나 철학자의 글을 통해 전달하려고 합니다. 원어 사전들의 저자들 가운데는 불신자가 많으며, 심지어 쎄이어(J. H. Thayer) 같은 유니테리안 이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언어는 성경의 언어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지금의 번역본 시대에 하나님의 원어 단어들을 100% 정확하게 영어로 옮긴 보존된 성경입니다.   그러면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어떨까요?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1 대 1 대응이 되게 형식적 일치를 유지하면서 정직하게 번역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모든 교리와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말 흠정역 성경에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고 당연히 주장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딤후3:17의 진리가 흠정역 성경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7).   우리말 번역의 문제   한편 ‘I am a boy.’를 ‘나는 소년입니다.’로 하지 않고 ‘나는 아이입니다.’로 하면 반만 맞습니다. 아이에는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1 대 1 대응을 시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나는 한 소년입니다.’로 하면 우스운 번역이 됩니다. 한국 사람은 아무도 이런 말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들은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earth’(창1:1)라는 말씀을 ‘그 시작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번역하고는 이 외의 다른 번역은 다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만용입니다.   ‘In the beginning’은 관용구로서 ‘처음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그 처음(시작) 안에서’로 번역하는 것은 영어와 우리말을 망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머릿속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향상된 계시’이므로 그 안에 있는 정관사, 부정관사, 하이픈, 세미콜론, 콜론, 콤마를 번역할 때 수용 언어(한국어)의 용례를 무시하고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향상된 계시’가 아니며, 이중 영감을 받은 성경이 아닙니다. 원본의 모든 단어들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대로 형식적 일치를 취하면서 정확하게 번역하여 그대로 보존한 성경, 이것이 바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처음에 원본이 주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100% 그대로 살아 있는 성경입니다.    결코 100%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원본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비유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7-11절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분을 알고 또 보았느니라, 하시니라.    8 빌립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그러면 우리에게 족하겠나이다, 하니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네가 아직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들은 내가 스스로 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 곧 그분께서 그 일들을 하시느니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내 말을 믿으라. 그러지 못하겠거든 바로 그 일들로 인해 나를 믿으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빌립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그러자 우리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인격체이지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 행동, 생각이 아버지 하나님과 100%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알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은 다 거짓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우리는 원본과 킹제임스 성경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원본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혹은 원본이 우월하다고 하거나 그런 주장에 세뇌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을 통해 보거나 아는 아버지만이 참 하나님이듯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보는 원어의 뜻만이 옳은 뜻입니다. 이 외에는 다른 데서 옳은 뜻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버지보다 우월하지 못합니다. 요10:30에서 아들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듯이 원본과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온전히 전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원본의 원어들을 정확하게 번역한 ‘완전한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을 본문으로 해서 지난 400년간 수백 개의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바른 교리를 깨달으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배도의 때에 마귀가 세상 무대에 등장해서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는 뜻이나 단어가 변경된 성경의 등장이 필수 요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귀라 해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에 무언가 변경을 가져오는 일일 것입니다. 마귀는 과거에 이집트에서부터 이 사악한 일을 주도하였고 주후 200년을 넘기면서 그 일은 카톨릭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역본들은 한결같이 카톨릭 교회의 사본들만을 번역의 대본으로 쓰고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36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감과 보존, 원본과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바른 개념을 정립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비방의 빌미를 주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바른 성경을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성경 신자들을 많이 불러주시고 이들로 하여금 바른 교회를 세우게 하셔서 많은 혼들을 수확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3-09-14 14:05:35 | 관리자
Replenish 설명   replenish (ed) - (7x) –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처음 받은 수준대로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의 시작 부분에 있는 ‘re’는 ‘re’라는 접두어를 가진 대부분의 영어 단어들처럼 ‘다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단어의 뿌리는 중세 영어 ‘replenisshen’에서 나오고 이것은 중세 불어인 ‘repleniss’에서 나온다. 이 불어 단어는 ‘replenir’의 가지에서 나왔으며 단순히 “채우다; 사람이나 짐승으로 채우다; 저장하다”를 뜻한다. 이것은 어근 ‘re’와 ‘plenus’라는 단어를 합쳐서 만든 라틴어에서 나온 게 아니다.   예레미야 31장 25절에서 replenish는 ‘흡족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satiate’라는 단어와 평행 단어로 쓰였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반복 용례로서 ‘satiate’와 ‘replenish’가 같은 뜻임을 명백히 보여 준다.   내가 피곤한 혼을 흡족하게 하며 모든 슬퍼하는 혼을 채워 주었노라, 하시니라(렘31:25).For I have satiated the weary soul, and I have replenished every sorrowful soul.   한편 에스겔서 26장 2절에서는 ‘replenish’는 ‘피폐하게 되었다’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 역시 두 단어의 대조를 보여 주는 히브리어의 용례이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즉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 하였도다(겔26;2). I shall be replenished, [now] she is laid waste:   창세기 1장 28절은 자원들을 사용해서 - 정복하고 복종시켜서 - 처음에 받은 수준으로 땅을 가득 채우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부분이 그분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물 중 어떤 것도 멸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시19; 롬1). 1.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아담과 이브는 많은 아이의 출생을 통해서 스스로 번성해야만 하였다(하나님의 명령이었으니까). 그런데 땅의 경우 그들은 땅의 자원들을 사용하거나 복종시켜 처음에 하나님이 주신 상태로 땅을 가득 채워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동물과 식물의 수를 임의대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다(시19:1-4; 롬1:20). 어떤 생물 종을 없애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도록 하는 것을 -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창조하셨다는 증거를 - 없애는 것이다.   2. 창세기 9장 1절-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노아는 모든 동물과 식물의 종들을 지켜야 했다. 홍수 이후에는 많은 동물들이 이제 2마리만 남았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 쉽게 없어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노아는 어떤 종도 사라지지 않도록 채우고 지켜야 했다. 3. 이사야 2장 5-7절- 오 야곱의 집이여,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걷자.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의 집을 버리셨나이다. 그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것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쟁이가 되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나이다. 그들의 땅에는 또한 은과 금이 가득하여 그들의 보물은 끝이 없고 그들의 땅에는 또한 말이 가득하여 그들의 병거가 끝이 없으며   여기서 이사야는 야곱의 집을 불러 주의 빛 안에서 걸을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에게서가 난 것이 아니라 동쪽에서 온 것들을 생계 유지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을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스스로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공급하셨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했으나 그들은 낯선 자들의 자손들에 의해 가득 채워졌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가 난 것이 아니라 낯선 자들로부터 난 것들을 가지고 이전처럼 동일한 수준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4. 이사야 23장 2절- 섬의 거주민들아, 너희는 잠잠할지어다. 바다를 넘나드는 시돈의 상인들이 너를 가득히 채웠도다.   섬의 거주민들은 그들이 매일 필요로 한 것을 시돈 상인들로부터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생계를 매일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하려 했다.  5. 예레미야 31장25절- 내가 피곤한 혼을 흡족하게 하며 모든 슬퍼하는 혼을 채워 주었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replenish는 ‘충분히 만족시키다’(satiate)와 평행을 이루는 단어로서 그 의미는 혼을 흡족하게 하여 한때 그 혼이 피곤하지 않았던 그 지점으로 완전히 되돌린다는 것(이전과 동일한 수준으로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 시편23편...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restoreth) 6. 에스겔 26장 2절- 사람의 아들아, 두로가 예루살렘을 대적하며 말하기를, 아하, 백성들의 문이던 그녀가 부서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 즉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 하였도다.   여기서 ‘replenish’는 ‘피폐하게 되었다’(laid waste) - 완전히 텅 빈 상태 - 와 대조를 이룬다. 두로는 예루살렘에서 두로 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통해 예루살렘의 부의 손실이 이제 자신의 것이 될 것을 자랑하고 있다. 즉 예루살렘의 손실은 두로의 이득이 되어 두로가 원래의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 에스겔 27장 25절- 다시스의 배들이 네 시장에서 너에 대하여 노래하였으며 너는 충만히 채워져서 바다들의 한 가운데서 심히 영화롭게 되었도다.   에스겔은 계속해서 두로에 대한 대언을 한다. 두로는 다시스의 배들을 통해서 자기들의 매일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받고 있다고 선언한다.   결론 1) 사람은 스스로 수를 늘려 번성해야 했지만 땅의 식물과 동물들은 처음 받은 상태로 가득 채워야 했다. 이것은 신명기 22장 7절 말씀을 설명한다.    신22:7- 어미 새는 반드시 놓아주고 새끼를 취할지니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네 날들을 길게 하리라.    만약 히브리 사람들이 어미와 새끼를 모두 죽였다면 그 종들은 곧 멸종했을 것이다.   2) 켄달(이 글의 저자, Dr. Bob Kendall)의 식품 저장 방의 예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만든 예가 있다. 나는 3개월 동안 출장 갈 예정이어서 당신에게 우리 집에 와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사용하면 아주 편하게 지낼 것을 요청한다. 내가 식품 저장 방을 열자 거기에는 땅콩버터가 담긴 5개의 병이 있기에 즉시 물어본다. “땅콩버터가 왜 이리 많아요? 혹시 세일했나요? 어째서 당신은 5병이나 가지고 있나요?” 나는 대답합니다, “아니요, 그건 그냥 켄달 가족의 것이에요. 모두 다 켄달의 것이지요. 내 남동생들(Mr. Kendalls), 내 어머니(Mrs. Kendall), 사촌들(Mr and Mrs. Kendalls)은 식품 저장 방에 5개의 땅콩버터 병을 보관하고 있어요. 그것은 우리 가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심지어 땅콩버터를 다 먹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돌아왔을 때 5개의 땅콩버터 병이 있으면 좋겠어요. 식탁에 이전 수준으로 가득 채워서요. 그래야 내 식품 저장 방이 계속해서 켄달 네 집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3) 또 다른 예시만약 내가 당신을 불러 내 냉장고를 replenish 하라고 부탁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만 할까요?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만약 처음에 냉장고 안에 얼마만큼의 우유가 있었고 몇 개의 버터 조각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코 냉장고를 replenish 할 수 없습니다.           4) ‘replenish’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기 훨씬 이전에 원래 지구가 있었고 그 안에 동물과 식물이 살았다고 주장하는 이론 - ‘재창조 이론’ 혹은 ‘갭 이론’ - 이 잘못된 가르침임을 보여 줍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 가정(재창조이론)이 사실이라 해도 아담과 이브가 이전의 지구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땅을 다시 채울 수(re-fill)있겠습니까?   5) 간단히 말해서, ‘replenish’는 당신이 ‘어떤 것을 발견한 수준으로 그것을 충만히 채워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과 영어 사전의 용례가 이것을 지지합니다.   (*) 17세기 초 KJB가 기록된 때에 ‘replenish’라는 단어는 현대 사전의 용례처럼 ‘다시 채우다’의 의미로 결코 쓰이지 않았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1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29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9-14 16:54:2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3-09-12 15:14:31 | 오광일
평안하신지요? 김규태 형제님과 오광일 형제님의 귀한 답변에 조금 덧붙여 보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죽어있는 성도들의 영화로운 부활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5장 35절~49절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독하시고 다음의 설교를 들으시면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부활의 모든 것- 정동수 목사님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401 휴거의 나팔이 울리면 먼저 예수님 안에서 죽었던 성도들이 썩지 아니할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고 당시 살아있는 성도들도 순식간에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됩니다.(고전15:51~54) 즉, 지금 셋째 하늘에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혼이 순식간에 살아있을 때 입고 있던 몸이 영화롭게 변화된 부활의 몸을 입게 되고 살아있는 우리의 몸도 순식간에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망이 승리 가운데 삼켜졌도다.(사25:8, 고전15:54)”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죽어 땅에 묻힌 성도들 중 불행한 사고, 전쟁, 화장 등으로 살아 있을 때 입고 있던 몸이 먼지가 되어 흩어진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온 우주 공간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원소들을 녹이시는(벧후3:10)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들의 몸의 흩어진 각각의 원소들을 모으시고 명령하셔서 부활의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해서 우리가 입게 될 영화로운 몸에 대해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엠마오 길의 두 제자 앞에 나타나셨다가 홀연히 사라진 사건(눅24:31), 문이 닫힌 다락방의 제자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신 사건(요20:19; 눅24:36-48),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눈앞에 승천하신 일 등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한 성경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제자들이 만질 수 있는 몸(요20:27~28)이었지만 시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몸이었습니다. 다음의 글들을 읽어 보시는 것도 성도의 부활과 휴거에 대해 이해하시는 것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도 여전히 몸이 있는가(혹은 몸을 입고 있는가)?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63 *부활 개념 정리 https://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1904 *마지막 나팔 소리- 레날드 샤우어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412&page=4 *몸의 부활이 있는가, 없는가? (욥 19:25-26)- 김문수 목사님 https://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30&page=11 요즘 답변해 주시는 신실한 형제님들이 함께 있어 성경지킴이가 더욱 훈훈해 졌습니다. 성경지킴이를 오가는 모든 분께 영적 결실이 풍성한 복된 가을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3-09-10 12:44:17 |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