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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學’의 ‘科’자를 '창세기 한자' 방식으로 생각해 보니 참 흥미롭군요.. 말씀하신 내용을 토대로 저는 조금 다르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斗'는 헤아리다란 의미도 있지만, 무언가 튀어 나왔거나 남 다른 구조로 눈에 띄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科’는 결국 '하나님이 심은 나무 가운데 무언가 남달리 두드러진 것'을 말하며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科人’의 뜻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사람의 결합으로 보다 자연스럽게 '죄인'의 뜻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科學’이라는 용어는 서양에서 온 개념으로 라틴어 'scientia (앎)'이 그 어원이고, 과학이 앞서 발달 하였던 독일에서는 'wissenschaft'라고 불렸는데 그 의미는 '체계적인 지식'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일본에 들어 올 때 그들이 달리 부를 말이 없어 ‘科學’이라는 약간은 모호한 말로 바꿔 불렀는데, ‘科’자는 우리가 오늘날 학과를 분류할 때 무슨 무슨 ‘科’ (예를 들면 數學科 [수학과], 心理學科 [심리학과] 등등)로 나누는 것처럼 무언가를 분류할 때 쓰이는 말이기에 서양의 과학의 특징인 분석적인 방법을 염두에 두고 이리 부른 것으로 이해합니다. 결국 ‘科學’이라는 용어는 동양에는 이전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는 말로서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기 시작한 때에 새로이 생겨난 말이고, 따라서 창세기적 해석으로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한자의기원에 대한 창세기적 해석은 한자 형성 초창기에 생겨난 일부 한자들에 한하여 매우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해 주고는 있으나, 그 후에도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한자들이 생겨졌기에 현재 사용되는 모든 한자들이 '창세기적 해석'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科學’이라는 단어를 창세기 한자 방식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심은 나무 혹은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을 가르친 학문”이라고 해석한 방식은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어 즐거웠고, 차라리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과학'이라는 말의 진짜 본래 뜻이 정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가르치는 학문'이었으면 좋겠다는 즐거운 상상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2012-02-05 01:16:25 | 김정훈
아멘 입니다. 이런 글을 올려도 될까요? ‘科學’에서 ‘科’자는 기원 전부터 사용된 글자인데 ‘창세기한자’ 방식으로 글자 모양을 해석하면 ‘하나님이 심은(丿) 나무를(木= 禾) 헤아리다(헤아릴 두斗)가 됩니다. ‘여기에 사람 인(人)자를 붙인 ‘科人’은 “하나님이 심은 나무를 헤아려 봤드니 사람은 죄인이드라”로 해석할 수 있겠는데 ‘科人’의 사전 해석은 정확히 ‘죄인’입니다. ‘科學’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가르친 학문”에서 비롯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생명나무를(禾) 먹어야(口) 하나님과 화목(和-화목할 화)을 이룰 수 있다’는 것도 가르쳤을 것입니다.
2012-02-04 22:00:35 | 이광국
우상 숭배와 인본주의 진화론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그 기초는 진화론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고 인간을 우연 발생한 동물의 연장으로 이해한다. 진화론의 주장이 결코 성경과 같이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적 방법을 인정하면서 창조도 믿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진화론의 핵심은 목적성 없는 무작위적 자연발생설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절대 그런 목적 없는 분이 아니시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이어지게 됨은 너무도 자명하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리차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의 말처럼 하나의 “망상”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매우 중대한 도전이다.   과학과 신앙   과학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연구하여 그 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주신 문화명령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하여 많은 부분에 있어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그분께서 권능의 말씀으로 떠받치고 계시며 (히 1:3),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골 1:17). 사실,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분의 발끝에도 못 미칠 만큼 아주 적은 것이다. 신앙엔 분명 믿음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신앙이 진리에 관한 문제라면, 그 믿음이란 것이 결단코 무조건 적인 믿음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며, 오히려 과학적 접근을 통해서도 더욱 공고해져야 마땅할 것이다. 진정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분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면, 자연 만물 속에서도 그 분의 존재를 발견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롬 1:19-20).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증거 없이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으신다. 증거는 믿음을 더욱 강화 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부활의 증거가 우리에게 분명히 있듯이, 창조의 증거 또한 우리에게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발견하고 찾기를 원하신다. 과학도 그 분이 허락하신 축복이다. 따라서 그 분 안에서 올바른 과학을 한다면, 반드시 그 연구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고통 받는 욥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이 있거든 밝히 고하라. 누가 그것의 치수들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그것 위에 줄을 팽팽히 쳤느냐? (욥 38:4-5)”, “누가 아무도 없는 땅과 아무도 거하지 않는 광야에 비를 내리게 하며, 연한 채소로 하여금 싹을 내게 하였느냐? (욥 38:26-27)”, “누가 속 중심부에 지혜를 넣어 주었느냐? 혹은 누가 마음에게 명철을 주었느냐? (욥 38:36)” 욥기에 기록된 이 같은 하나님의 많은 질문들은 바로 그분이 우주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과학을 할 수 있는 지혜까지 주신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며,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마음속의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한 자세로 자연세계를 들여다보면, 그곳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올바른 과학은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발견하는 과학자들   실제로 과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발견을 통하여 초월적 설계자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 가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그저 우주의 수많은 평범한 행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어쩌면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일 수 있음을 깨닫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세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수록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 구성물질들의 정교함과 복잡함에 더욱 경탄하며 그 기원에 대한 무작위한 우연 발생적인 설명 방식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많은 물리화학자들이 마치 발견되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듯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자연의 법칙들과 수학적 상수들에 대하여 예사롭지 않은 경이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학은 과연 하나님을 발견했는가? “무신론을 향해 가던 길은 과학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도 그랬다.” 한 때 무신론자였다가 회심하여 지금은 목사가 된 리 스트로벨 (Lee Strobel)의 말이다. “내게 있어 지적 능력을 갖춘 신의 존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강력해 보이는데, 그것은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로부터 온다.” 오랫동안 인본주의 무신론 진영의 최고 리더였던 안토니 플루 (Antony Flew)의 말이다. 과연 그들의 고백처럼 오늘날 과학은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냄 (시 19:1)” 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마치 미세 조정된 다이얼이 가득 찬 것과 같은 모습의 이 우주를 움직이는 뛰어난 지성의 존재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과 기독교   분명히 우리는 다윈 시대보다 앞선 과학적 지식 속에 살고 있다. 한 때 소위 ‘과학’의 이름으로 우리의 의식 가운데 ‘하나님’을 몰아내고 무신론의 강력한 토대를 세운 다윈의 진화론이 이제는 동일한 ‘과학’에 의하여 상당수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부정되어 지는 사실을 목도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손에 갖고 있는 기독교는 ‘기원’ 문제에 있어서 항상 명쾌하고 분명한 답을 갖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진화론은 일부 신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어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 내지 ‘점진적 창조론’ 등의 타협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은 교회 내에서 확고한 “성경적 창조론”을 세우고 가르치는 일을 매우 등한시 하였다. 만약 인간이 정말 우주 진화의 부산물로서 우연 발생한 존재라면, 죄의 문제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고, 도대체 복음을 사실로 받아드릴 논리적 이유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복음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진화론의 주장은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조화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결국은 기독교의 토대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 찬란했던 유럽의 교회들이 썰물처럼 젊은이들이 빠져 나가고 오늘날 텅 비게 된 이유는 바로 진화론의 출현이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교회여, 창조주를 선포하라!   하지만, 진화론이 어떤 절대적인 과학적 증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최신 과학 정보들을 볼 때 설계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걸 보면, 성경을 떠나 진화론과 타협을 시도하려는 신학적 노력은 언젠가 또다시 그 이론의 수정을 요구할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이제 답은 분명하다. 교회는 성경에 기술된 분명한 창조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선포 하고 전하는데 조금도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일부 교회가 진화론 과학자들의 눈치를 적당히 보면서 이론적 타협을 하고 있는 동안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진화론을 잉태한 동일한 과학의 이름으로 이제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고 계시다. 과학자들의 입을 통하여 창조 사실을 증거 하게 함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하신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전도할 때 창조의 메시지를 들고 복음을 전하였던 것처럼 (행 14:15, 17:24-25),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초가 들어갈 마음의 밭을 준비케 하는데 창조과학적 내용이 도구로 사용되어 질 수 있다. 기록된 바, 말세에 천사가 전할 ‘영존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7)” 바로 그 분이 창조주 되심을 새삼 선포하는 것이며, 동일한 그 분께서 이제 곧 심판주로 오실 것이란 뜻이 아닌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 하나님께서는 그 분께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요 4:23). 우리들이 입을 열어 그 분을 창조주라고 인정하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분을 믿을 만한 확신을 주셨다 (행 17:31). 올바른 과학은 참 신앙과 대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의 말씀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한다. (고후 10:5)”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5: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4 18:58:16 | 김정훈
윤리적 부패 때문에 개신교인 수가 감소하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편로는 천주교의 배도와 세속성, 모호함이 사람을 끌어모으는 요인이라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사람을 끌어모으는 데는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과 개인의 사욕을 채워주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근본적이고 성경적인 믿음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항상 소수일 수 박에 없습니다.
2012-02-04 13:45:56 | 류인선
우리교회는 흠정역 귀한 말씀을 보고 있읍니다, 그런데 귀한 진리의 말씀을 알리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현수막을 걸려고 하는데 글귀을 알려주시면 감사 하겠읍니다, 김문수님께서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분들도 좋은 의견 있으면 알려주시고요 감사합니다.
2012-02-04 08:35:50 | 김삼일
우리가 믿는 바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일이요, 그냥 교양 수준에서 적당히 믿고마는 그런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처절한 결단이 요구되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면, 비록 마음이 여린 성도라 할지라도 그 깜짝 놀란 값을 할 수 있겠다 말 할수 있겠지요..!
2012-02-04 01:10:41 | 김정훈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흠정역을 선택하거나 추천하는구나! 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봐주십사해서 올린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서달석 목사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만 김재근 목사님이 적어놓은 댓글을 보았을때 크게 우려가 되는 사안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2012-02-04 01:01:26 | 노영기
형제님의 견해에 공감합니다. 저도 모든 사람들이 형제님이 말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아울러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경륜이 세대별로 다르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무슨 무슨 주의자 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번 해외여행을 한적이 있는데 그때 몇분의 목사님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는지 침례교인하면 세대주의자들이라고 단정짓는 경험들을 했습니다. 그 분들의 머리속에는 그렇게 고정되었나 봅니다.
2012-02-04 00:54:19 | 노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