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d의 번역(대상25:8 등)
영어 성경에는 번역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번역이 어려운 데도 있고 문맥을 파악하지 못해서 번역이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대상25:8, 대상26:16에는 ward against ward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ward라는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And they cast lots, ward against ward, as well the small as the great, the teacher as the scholar.
ward라는 단어는 무엇을 뜻할까요?
영한사전을 보면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1. 보호; 감독, 감시; 억류, 연금, a child in ~ 보호〔후견〕받고 있는 아이.
2. 집합적⦘ 보호〔감독〕자들
3. 〖법률학〗 피보호자; 피후견인
4. (교도소의) 감방; (구빈원 따위의) 수용소; (모르몬교의) 지방 분회.
5. 병실, 병동
6. (성·요새의) 안뜰.
7. 구(區)《도시의 행정 구획》.
8. (복수) (열쇠 따위의) 홈; 돌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영어 성경의 이 구절의 ward는 이런 뜻들과는 잘 맞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말이나 영어에서 ward는 1차적으로 파수 보는 사람을 뜻하고 파수 보는 일, 그런 직무를 수행하는 것, 보호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것, 직무 등을 뜻합니다. 그리고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 혹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영어 옥스퍼드 사전을 보면 용례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대상25:8을 보겠습니다.
And they cast lots, ward against ward, as well the small as the great, the teacher as the scholar.
킹제임스 마제스티
그들이 작은 자와 큰 자, 스승과 배우는 자를 막론하고 직무조와 직무조가 대응하게 제비를 뽑았는데
왜 직무조로 번역하였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매튜 풀과 존 길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참고로 매튜 풀(1624-1679)과 존 길(1697-1771)은 킹제임스 성경이 나온 직후에 살았던 분들이라 당시의 영어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들입니다. 현대 신학의 때가 묻지 않은 분들이라 저는 자주 그분들의 주석을 참고합니다.
매튜 풀
존 길
여기의 ward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의 직무조입니다(course). 대상25장 8-31절에는 음악하는 사람들의 24조가 나오고 제사장들도 24조(대상24:1-5), 레위 사람들도 24조로 나뉘어서(24:6-19)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ward against ward란 음악하는 사람들 1조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의 1조, 2조는 2조, 3조는 3조 이런 식으로 세 부류의 사람들이 같은 조끼리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400주년 기념판에서는 이것을 단순히 ‘분반 별로’로 번역하였는데 이것도 비슷한 뜻입니다. 다만 마제스테 에디션에서는 ward를 다 살려서 이런 의미가 되도록 번역하였습니다.
한편 개역성경 등은 이런 부분을 직임을 얻었다고 번역하였습니다.
대상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제비 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이런 원칙에 따라 대상26:18도 이런 식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수빔과 호사는 서쪽을 맡도록 뽑혀서 위로 올라가는 둑길 옆 살레겟 문에서 직무조와 직무조가 대응하며 파수하였더라.
ward의 다른 용례를 보겠습니다.
창40:3, 그들을 호위대장의 집에 감금하여(in ward) 감옥에 두었는데 그곳은 요셉을 묶어 둔 곳이더라.
And he put them in ward in the house of the captain of the guard, into the prison, the place where Joseph was bound.
이런 용례는 창40:4, 7; 41:10 ; 42:17; 레24;12; 민15;34 등에 있습니다.
한편 대상12:29는 다음과 같이 직무로 번역되었습니다.
베냐민 자손 곧 사울의 친족 대다수가 이때까지 사울의 집을 지키는 직무를 지켰으므로 그들 중에서 나온 자들이 삼천 명이요,
And of the children of Benjamin, the kindred of Saul, three thousand: for hitherto the greatest part of them had kept the ward of the house of Saul.
느12;24, 25는 파수 보는 직무를 뜻합니다.
끝으로 렘37:13은 파수대를 뜻합니다.
그가 베냐민 문 안에 있을 때에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미야의 아들로서 이리야라는 이름을 가진 파수대 대장이 거기 있었는데 그가 대언자 예레미야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갈대아 사람들에게 항복하는도다, 하매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화평이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충만히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21-12-18 12:43:42 | 관리자
시편만의 고유한 특징
이 글은 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나온 메인 아이디어 시리즈 주석 중 시편 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메인 아이디어 시리즈 주석
시편만의 고유한 특징
시편은 성경에서 가장 특이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특징들이 많이 있어 특별한 한 권으로도 사실상 손색이 없다. 아래의 몇 가지 특별한 요소들을 주목해서 보라.
• 시편은 150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경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책이다.
• 각 시편을 하나의 장으로 인정할 경우 150개의 시로 이루어진 시편은 성경에서 가장 많은 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사야서(66장)가 그 뒤를 잇지만 시편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으로서 176개의 절로 되어 있고 이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짧은 책들보다 더 많은 수이다.
• 시편 117편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장이며 고작 두 절로 되어 있다.
• 시편 117편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총 1,189장 중 한가운데 위치한 장이다.
• 시편 103편 1,2절은 전체 성경의 총 31,173절 중 가장 중앙에 위치한 절이다.
• 시편은 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많은 저자들이 기록했다. 다윗, 아삽, 고라의 아들들, 솔로몬, 모세, 혜만과 에단, 그 밖의 인물 등 많은 저자들이 공동 저작권을 주장하는 문학 모음집이다.
• 시편은 완성되기까지 약 1000년이 소요된 장기 프로젝트였고 모든 정경들 중 기록되는 데 가장 오래 시간이 걸렸다.
• 시편은 이사야서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구약 성경보다 많은 메시아 예언을 담고 있다.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시 2편), 사람의 아들(시 8편)로 계시하며 그의 순종(시 40:6-8), 배신당함(시 41:9), 십자가 처형(시 22편), 부활(시 16편), 승천(시 68:18), 왕좌에 앉으심(시 110편)에 대해 계시하고 있다.
시편의 저자
대부분의 다른 성경책들은 한 저자가 기록을 했고 그 중 일부는 여러 명의 저자들이 기록했는데 잠언이 그러한 예 중 하나이다. 시편은 성경에서 여러 저자들이 기록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로서 많은 저자들이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기록한 합작품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여러 저자들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며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삼하23:1)인 다윗은 시편의 주된 저자이다. 그는 150편의 시편 중 75편 즉 시편의 정확히 절반을 기록한 인물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다(3-9, 11-32, 34-41, 51-65, 68-70, 86, 101, 103,108-110, 122, 124, 131, 138-145편, 또한 사도행전 4장 25절은 시편 2편을 다윗이 기록했다고 확인하고 있으며 히브리서 4장 7절은 시편 95편도 다윗이 기록한 것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 인도자로 섬긴 제사장인 아삽은 열두 편의 시편을 기록했다(50, 73-83편).
• 가수와 음악 작곡가들의 조합이었던 고라의 아들들은 열 편의 시편을 쓴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42, 44-49, 84, 85, 87편).
•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이며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은 두 편의 시편을 썼다(72, 127편).
• 이스라엘의 대언자이며 출애굽을 주도한 강력한 지도자 모세는 한 편의 시편을 기록했다(90편).
• 현자이며 음악가, 에스라 사람, 고라의 자손이며 고라 찬양대의 창설자(대하 5:12, 35:15)인 헤만은 한 편의 시편을 썼다(88편).
• 현자이며 에스라 사람이자 레위 가수로 추정되는(대상 6:42, 15:17, 19) 에단은 한 편의 시편을 썼다(89편).
• 나머지 마흔여덟 편의 시는 작자 미상이다.
시편의 기본 유형
• 지혜시: 이러한 교훈적인 시들은 경건한 삶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확실한 방향을 제시한다(1, 37,119편).
• 메시아시: 그리스도의 메시아 통치가 도래함을 묘사하는 제왕시들은 그를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확실한 주권적 왕으로 묘사한다(2, 18, 20, 21, 45, 47, 68, 72,89, 101, 110, 118, 132, 144편).
• 탄식시: 감정이 아주 고조되어 있는 탄식시들은 저자가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건져주심을 바라며 부르짖는 마음을 담고 있다(3-7, 12-13, 22, 25-28, 35,38-40, 42-44, 51, 54-57, 59-61, 63-64, 69-71, 74, 79-80, 83, 85-86, 88, 90, 102, 109,120, 123, 130, 140-143편).
• 저주시: 하나님의 영광에 맹렬하게 열심을 내며 도전적이고 때로는 논쟁적이기까지 한 이 시들은 하나님의 원수이자 저자의 적인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간구한다. 저자는 주 여호와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박해자들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다(7, 35, 40, 55, 58-59, 69,79, 109, 137, 139, 144편).
• 감사시: 개인적이든, 민족적이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풍성한 축복에 대한 심오한 자각과 깊은 감사를 표현하는 시들이다(8, 18, 19, 29, 30, 32-34, 36, 40, 41, 66,103-106, 111, 113, 117, 124, 129, 135-136, 138-139, 146-148, 150편).
• 순례시: 이 절기 시편들은 이스라엘이 연중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회상할 때 그분을 찬양하도록 축제분위기를 내고 있다(43, 46, 48, 76, 84, 87, 120-134편).
• 즉위(통치)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장엄한 시들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장엄함과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유지하고 통제하며 인도하는 섭리적 돌보심을 묘사하고 있다(48, 93, 96-99편).
2021-12-17 16:40:37 | 관리자
원본에 없는 것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역대기상 25장 3절, 5명인가, 6명인가?
오늘 한 분이 역대기상 25장 3절에 대해 질문이 있다고 하며 글을 보내 주었습니다.
역대기상 25장에는 다윗 시대에 악기를 잡고 대언한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의 조상들로는 2절의 아삽, 3절의 여두둔, 4절의 헤만이 있고 이들에게서 나온 자들이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3절에 보면 여두둔의 아들들이 5명인데 왜 6명이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3절 여두둔에게서는 여두둔의 아들들인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비야와 맛디디야, 이렇게 여섯 사람인데 이들이 자기들의 아버지 여두둔의 손 밑에서 하프를 연주하며 대언을 하고 주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렸고
Of Jeduthun: the sons of Jeduthun; Gedaliah, and Zeri, and Jeshaiah, Hashabiah, and Mattithiah, six, under the hands of their father Jeduthun, who prophesied with a harp, to give thanks and to praise the LORD.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은 개역성경, NIV 등에는 네 번째 인물로 시므이가 들어가서 총 6명이 되어 명단의 6명과 여섯 사람이라는 말이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개역: 여두둔에게 이르러서는 그의 아들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시므이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의 아버지 여두둔의 지휘 아래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NIV: As for Jeduthun, from his sons: Gedaliah, Zeri, Jeshaiah, Shimei, Hashabiah and Mattithiah, six in all, under the supervision of their father Jeduthun, who prophesied, using the harp in thanking and praising the LORD
즉 킹제임스 성경에는 명단에 5명이 있고 그 뒤에 6명이라고 하고 개역성경과 NIV에는 명단에 6명이 있고 그 뒤에 6명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킹제임스 성경이 틀리고 개역성경 등이 맞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어떤 성경의 번역이 맞을까요?
여러 사람들의 주석을 보면 답이 우스울 정도로 간단합니다.
역대기상 25장 3절 주석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명단에 5명이 있고 그 뒤에 6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명단에 5명밖에 없는데 6명이냐고 물으니까 후대에 70인역과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만든 자들이 친철하게 독자들을 위해 시므이를 추가하여 6명, 6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시므이는 어디서 나올까요? 밑에 있는 17절을 보면 시므이가 나옵니다.
25장 8-31절에는 음악하는 사람들의 24조가 나옵니다. 아시는 것처럼 제사장들도 24조(대상24:1-5), 레위 사람들도 24조로 나뉘어서(24:6-19) 주님을 섬겼습니다.
1. 아삽의 아들들과 친척들(2, 9절 상반절, 10-11, 14), 24개 중 4개
2. 여두둔의 아들들과 친척들(2절, 9절 하반절, 11, 15, 17, 19, 21), 24개 중 6개
3. 헤만의 아들들과 친척들(4절, 13, 16, 18), 24개 중 10개
그러면 왜 명단에 5명만 있는데 6명이라고 했을까요?
시므이는 계수될 당시 어려서 노래를 할 수 없었지만 그 조의 우두머리로 선택이 되었고 마침내 성장하여 그 일을 맡게 되었기 때문에 명단에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존 길 등은 유대인 학자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말합니다.
결론은 무엇일까요?
히브리 성경 3절에 5명, 6명으로 되어 있고 시므이의 이름이 없으므로 있는 그대로 명단을 5명으로 두고 총 6명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명단에 5명, 실제 6명, 이렇게 다른 것은 목사나 교사가 대상25:17을 가지고 설명을 해 주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임의로 시므이를 넣어 명단에 6명, 총 6명으로 하면 이것은 성경을 변개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역대기상에는 여러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대상2:8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단의 아들들은 아사랴더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들들인데 명단에는 아사랴 하나밖에 없습니다.
영어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 sons of Ethan; Azariah.
즉 원어와 영어는 에단은 아들이 여럿인데 아사랴 하나만 성경에 기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영어는 이것을 세미콜론으로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은 세미콜론 등으로 처리가 안 되므로 지금처럼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이 히브리말을 정직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히브리말은 분명히 아들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개역성경은 에단의 아들은 아사랴더라라고 단수로 처리하였습니다. NIV, NKJV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역대상에는 이런 부분이 10여 군데는 더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을 위해 번역자가 친절하게 사람의 말을 집어넣거나 이해가 안 된다고 복수를 단수로 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조금 어색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들(단어들)만 성경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번역자가 취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또 이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영원히 높이는 일일 것입니다.
샬롬
2021-12-17 14:18:04 | 관리자
여러 해석이 가능한 구절들의 번역(골로새서 2장 23절 등)
어떤 분들은 영어 성경과 영한사전만 있으면 번역이 되는 줄로 압니다.
그리고는 어떤 성경을 보다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리 번역된 한두 군데를 지적하고는 의분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참으로 묘한 구절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뛰어난 성경학자들, 목사들, 주석자들도 의견을 달리할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영어나 원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문맥적으로 살펴보고 그런 분들의 여러 가지 의견을 고려해서 최종적으로 한 가지 번역으로 확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A, B, C를 추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자기 스스로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D와 E가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자가 앞뒤 문맥과 역사적 상황 등을 고려해서 C가 설명한 대로 번역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A나 B의 주장을 따르는 분들과 D나 E처럼 자기 해석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C의 설명이 번역으로 채택되었다는 이유로 그 성경 전체를 폄훼합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여러 주석을 읽어 보면 의견이 분분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런 주석가들은 평생을 성경만 읽은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같은 구절을 놓고 해석을 달리 합니다.
따라서 이런 어려움이 있는 구절들이 성경에 다수가 있으니 성경의 어떤 구절 번역이 나와 의견이나 생각과 달라도 이것을 오역이라고 폄하하지 말고 이역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 중 하나가 골로새서 2장 23절입니다.
22 이것들은 다 사용함에 따라 없어질 것들이며 사람들의 명령들과 교리들에 따른 것들이니라.
23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참으로 지혜가 있는 것같이 보이나 아무 가치가 없으며 육체를 만족시킬 뿐이니라.
23 Which things have indeed a shew of wisdom in will worship, and humility, and neglecting of the body: not in any honour to the satisfying of the flesh.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붙잡고 있는 초보적 규례들(예를 들어 18절의 천사 숭배, 꾸며낸 겸손)을 언급하며 23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견이 분분한 부분은 맨 뒤 즉 ‘아무 가치가 없으며 육체를 만족시킬 뿐이니라’입니다.
2021년에 나온 킹제임스 흠정역 마제스티 에디션과 달리 2011년 400 주년 기념판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
기존의 개역성경,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성경 등도 이와 비슷하게 번역하였습니다.
개역개정: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말씀드린 대로 이 부분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마제스티 에디션처럼 번역해야 옳다고 하고 몇몇 분들은 기존 성경들처럼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2장 23절 주석
마제스티 에디션을 따르면 이런 초보적인 것들은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기존 성경들을 따르면 이런 초보적인 것들은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얼핏보면 이 둘이 서로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하튼 초보적인 그런 일들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주석을 보면 아시겠지만 반즈 주석과 스코필드 주석을 보면 마제스티 에디션처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영어는 다음과 같이 but이 추가된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not in any honour but to the satisfying of the flesh.
즉 맨 뒤의 문장을 not...but의 용례로 보면 마제스티 에디션 같은 번역이 나오게 됩니다.
반즈의 해설을 보면 무슨 말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반즈는 [Not in any honour]와 [To the satisfying of the flesh]를 따로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not...but으로
[Not in any honour] That is, there is no real honor in these things; there is nothing to ennoble and elevate the soul; nothing that is to be commended.
[To the satisfying of the flesh] The only effect is, to satisfy or please the flesh; that is, the carnal and corrupt nature, for so the word "flesh" is often used in the Scriptures. The effect of these observances, on which so much stress is laid as if they would promote piety, is merely to gratify pride, self-righteousness, the love of distinction, and the other carnal propensities of our nature. There seems to be a great deal of humility and piety in them; there is really little else than pride, selfishness, and ambition.
매튜 풀, 존 길 등 유명한 주석가들도 이와 비슷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스코필드도 비슷하게 적고 있습니다.
: which do not really honour God, but only satisfy the flesh" (i.e. by creating a reputation for superior sanctity).
즉 이런 초보적인 것들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지 않고 자기를 높임으로써 자기의 명성을 드높여서 자기 육체를 만족시킬 뿐이다.
물론 어떤 분들은 honour와 to가 붙어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 경우 기존의 번역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하고 여러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이번에 나온 마제스티 에디션의 번역을 택하였습니다.
즉 “이런 초보적인 것들은 하나님께 전혀 영광과 존귀를 돌리지 않고 (혹은 그 사람의 몸에 전혀 존귀가 되지 않고) 자기를 높임으로써 자기의 명성을 드높여서 자기 육체를 만족시켜줄 뿐이다.”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요점이라고 믿습니다.
전자든 후자든 여러분이 판단해서 번역을 취하면 됩니다.
우리는 전자만 옳고 후자는 그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맥과 여러 사례를 볼 때 전자가 조금 더 문맥에 맞는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더욱이 이런 것은 성경의 완전성이나 충분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둘 다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화평을 기원합니다.
샬롬
2021-12-16 15:01:30 | 관리자
구약 성경 인용 시 현재 시제 사용 사례(로마서 10장 19-21 등)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 기록자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바를 확증하려고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0장 19-21절을 보겠습니다.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리라, 하며
20 더욱이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하되
21 이스라엘에게는 이르기를, 내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종일토록 내 손을 내밀었노라, 하느니라.
19 But I say, Did not Israel know? First Moses saith, I will provoke you to jealousy by them that are no people, and by a foolish nation I will anger you.
20 But Esaias is very bold, and saith, I was found of them that sought me not; I was made manifest unto them that asked not after me.
21 But to Israel he saith, All day long I have stretched forth my hands unto a disobedient and gainsaying people.
이 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은 19절에서는 모세의 말을, 21절에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세와 이사야는 여기서 인용된 말을 700-1500년 전에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어, 영어 성경은 이 두 사람이 지금도 말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현재 시제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9, 20, 21절의 saith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은 이것을 그대로 살려 이런 데를 다 현재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야 그 두 사람이 지금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개역 개정,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등 거의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은 이런 것들을 다 과거로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개정 등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신약성경에는 구약 성경을 인용할 때 현재 시제로 인용하는 데가 의외로 매우 많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이런 것들을 살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고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은 이런 인용 부분을 가능한 한 다 현재로 번역하였습니다.
NIV 등도 현재로 하였습니다.
19 Again I ask: Did Israel not understand? First, Moses says, "I will make you envious by those who are not a nation; I will make you angry by a nation that has no understanding."
20 And Isaiah boldly says, "I was found by those who did not seek me; I revealed myself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21 But concerning Israel he says, "All day long I have held out my hands to a disobedient and obstinate people."
NIV의 19, 20, 21절의 says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영어 성경들은 원어대로 이런 시제를 현재로 표현하고 잇습니다.
우리말로 조금 어색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신약성경에는 성경기록이 직접 말하는 데가 몇 군데 있습니다.
요19:37; 롬9:17, 10:11, 11;2; 딤전5:18; 약4:5
또 다른 성경기록이 다시 이르되, 그들이 자기들이 찌른 자를 보리라, 하느니라.
KJV: And again another scripture saith, They shall look on him whom they pierced.
NIV: and, as another scripture says, "They will look on the one they have pierced."
그런데 개역 개정 등 거의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은 이런 것들을 다 과거로 번역하였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영어 성경, 그리스어 성경, 킹제임스 마제스티 성경처럼 이런 부분을 현재로 번역해야 그 성경 말씀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런 것을 이해하고 성경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샬롬
2021-12-16 11:35:01 | 관리자
성경 번역에서 시제의 어려움(갈라디아서 2장 20절 등)
그리스어나 영어는 우리말과 달리 시제가 복잡하고 다양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은 이런 다양한 것들을 그대로 다 담을 수 없으므로 성경 번역 시 가능한 한 우리말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바르게 번역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I am come이라는 말이 10번 정도 나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의 글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러 오지 아니하고 성취하러 왔노라
Think not that I am come to destroy the law, or the prophets: I am no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
요9:39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으니 이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눈멀게 하려 함이라, 하시매
And Jesus said, For judgment I am come into this world, that they which see not might see; and that they which see might be made blind.
우리말로 ‘내가 왔다’고 하면 영어로는 ‘I came’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런 부분이 그리스말과 영어 모두 ‘I am come’으로 되어 있는 데가 더러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직역하면 ‘내가 와 있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뜻을 살리기 위해 ‘내가 와 있다’로 번역 하면 이미 우리말로는 어색함을 금세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은 우리말 성경에서 ‘내가 왔다’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해도 뜻에 큰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명확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는 데도 있습니다.
갈2:20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킹제임스 성경으로 이 절의 앞부분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로 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을 포함하여 다른 성경들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번역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말의 한도 내에서 어떤 것이 더 기록자의 의도를 잘 반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번역자의 의중이 무엇이냐에 따라 전자로 해도 되고 후자로 해도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로 하면 과거에 못 박혀서 지금도 그대로 그 상태가 유지가 되고 있다는 것이 표현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로 하면 과거에 못 박혔다는 사실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구원 받은 뒤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 주려 하므로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로 하였을 뿐입니다.
갈6:14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개역 성경,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등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렇게 ‘못박히고’로 하면 뜻이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적어도 공동번역이나 바른 성경처럼 해야 합니다.
공동: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5절과 6절을 보면 이런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5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할 준비가 되신 분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
6 이런 까닭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5 Who shall give account to him that is read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6 For for this cause was the gospel preached also to them that are dead, that they might be judged according to men in the flesh, but live according to God in the spirit.
5절의 죽은 자들은 단순히 the dead이고 6절의 죽어 있는 자들은 them that are dead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6절도 죽은 자들로 번역되어야 하고 이러면 5절과 6절의 죽은 자들과 죽어 있는 자들이 동일한 사람들이 되어 독자가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다음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장 5-6절
그래서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I am come, I am crucified 같은 표현을 과거로 번역하기도 하고 필요한 때에는 과거에 이루어졌지만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형태로도 번역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더 미묘한 차이는 영어 성경이나 원어 성경을 보고 각자 판단하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큰 은혜와 화평을 기원합니다.
샬롬
2021-12-16 10:50:04 | 관리자
창세기 33장 18절은 ‘평안히’와 ‘살렘’ 중 어떤 번역이 맞는가?
창세기 33장은 야곱이 자기 외삼촌 라반과 함께 밧단아람에서 살다가 가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먼저 세겜이라는 사람의 도시 중 하나인 살렘 앞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올 때에 가나안 땅에 있는 세겜의 도시 살렘에 이르러 그 도시 앞에 자기 장막을 쳤고
And Jacob came to Shalem, a city of Shechem, which is in the land of Canaan, when he came from Padan-aram; and pitched his tent before the city.
야곱에게는 많은 가축들이 있어서 그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 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30:43).
그런데 개역성경 등은 살렘이라는 도시를 밝히지 않고 그가 '평안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원래 살렘이라는 말은 스트롱 번호 8003에서 나왔는데 이 말은 스트롱 번호 7999에서 유래된 말로 형용사로 보면 평화롭다는 말이 되고 명사로 보면 살렘이라는 말이 됩니다.
매튜 풀, 존 길 등은 여기의 살렘이 요3:23의 살림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많은 물이 있었으므로 요한도 거기에서 침례를 주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았으니(요3:23)
즉 살렘 혹은 살림 근처에는 많은 물이 있어서 야곱이 자기의 많은 가축들을 키우기에 적합하였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의 살렘(Shalem)은 멜기세덱의 출신지 살렘(Salem)과는 다른 곳입니다.
세겜의 도시라는 말에서 세겜은 하몰이 건축한 도시이고 그의 아들 세겜의 이름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이 세겜이 요4:5의 수가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은 요르단 강 서쪽에 있습니다.
여하튼 세겜과 살렘 그리고 살림과 수가는 다 같은 곳(거의 같은 지역)이 아닐까 여러 사람들이 추측합니다.
성경의 여러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여기의 살렘은 세겜에 있는 살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평안히'라고 번역하면 신구약성경 전체의 윤곽을 잡기에 부족합니다.
창세기 33장 18절 주석
2021-12-15 14:56:58 | 관리자
창세기 36장 24절에서 아나는 정말로 온천을 발견했나?
창세기 36장은 야곱의 형 에서의 계보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킹제임스 성경은 아나라는 사람이 노새들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등은 노새들이 아니라 온천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시브온의 아이들은 이러하니 곧 아야와 아나인데 이 아나는 자기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들을 먹일 때에 광야에서 노새들을 발견한 그 아나더라.
And these are the children of Zibeon; both Ajah, and Anah: this was that Anah that found the mules in the wilderness, as he fed the asses of Zibeon his father.
개역개정 등
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비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여기서 노새들로 번역된 말은 스트롱 번호 3222(남성 복수)이고 원어 사전에 가서 보면 분명하게 노새들로 되어 있습니다.
3222 !yE yem {yame}
3117의 동형에서 유래;‘따뜻함’봄 :- 노새
존 길, 매튜 플 등의 주석을 보면 여기의 아나는 자기 아버지의 나귀들을 먹이다가 수나귀와 암말과의 잡종인 노새를 만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24절에서 노새로 번역된 말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 한 군데만 나오는데 이 말이 새 역본들에서 온천으로 번역되는 이유는 엘리콧 등의 주석이 말해 주듯이 라틴어 카톨릭 성경을 만들어 준 제롬이라는 천주교 학자가 그렇게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중히 여기는 노새가 이때에 아나에 의해 (교배되어) 발견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맥이 나귀, 노새로 이어지는 것이 마귀와 온천으로 이어지는 것보다 당연히 월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NKJV도 마찬가지로 노새들로 번역하였습니다.
창세기 36장 24절 주석 참조
2021-12-15 14:08:10 | 관리자
창세기 42장 24절에서 왜 요셉은 시므온을 가두었을까?
창세기 42장 24절을 보면 요셉이 자기 형들을 가나안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두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그들을 떠나 돌아서서 울고 그들에게 다시 돌아와 그들과 대화하다가 그들로부터 시므온을 취해 그들의 눈앞에서 결박하였더라.
왜 요셉은 여러 형들 중에서 그를 인질로 잡아두었을까요?
여러 주석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시므온이 그의 형들 가운데 가장 성격이 포악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4장 25절 이하를 보면 시므온과 레위가 잔인하게 세겜과 그의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25 셋째 날 그들이 아플 때에 야곱의 아들들 중 두 아들 곧 디나의 오라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각각 자기 칼을 취한 뒤 담대하게 그 도시를 습격하여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26 칼날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며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더라.
또 창세기 49장 5-6절을 보면 그의 아버지 야곱도 그가 잔인한 자임을 인정합니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들이며 잔인한 도구들이 그들의 거처에 있도다.
6 오 내 혼아, 너는 그들의 은밀한 모임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내 존귀야, 너는 그들의 모임에 연합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이 분노하여 사람을 죽이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벽을 파 내려갔기 때문이라.
창세기 37장 18절 이하에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려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19 서로에게 이르되, 보라, 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그러므로 이제 오라. 우리가 그를 죽여 어떤 구덩이에 던지고 말하기를, 어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보리라, 하매
여기서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자고 말한 장본인이 아마도 시므온일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인한 자가 인질로 남겨지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덜 고통스러워하지 않을까 라고 요셉이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일을 통해 시므온은 크게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창세기 42장 24절 매튜 풀 등의 주석
Simeon, partly, because next to Reuben he was the eldest, and, as it may be probably gathered from his bloody disposition, Genesis 34:25 49:6, the most fierce and forward against Joseph, when Reuben was for milder counsels, as we see here, Genesis 42:22 38:29; and partly, because the detainment of one of so perverse and furious a temper would least afflict his father, and most secure Benjamin, who was to come with his brethren. He bound him before their eyes, that it might make deeper impression upon their hard hearts, and make their repentance more effectual.
2021-12-15 12:19:49 | 관리자
창세기 46장 34절의 가증한 목자들
창세기 46장 34절에 보면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파라오를 만나면 해야 할 말을 일러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끝에는 ‘모든 목자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가증한 존재’라는 조금 이상한 표현이 나옵니다.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의 생업은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가축을 치는 것이었는데 우리와 또한 우리 조상들이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그러면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리니 이는 모든 목자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가증한 존재이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
That ye shall say, Thy servants' trade hath been about cattle from our youth even until now, both we, and also our fathers: that ye may dwell in the land of Goshen; for every shepherd is an abomination unto the Egyptians.
존 길(John Gill) 등의 주석을 보면 그 이유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1. 목자들이 자기들이 기르는 짐승들의 젖이나 고기를 먹어서가 아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당시에 고기를 먹었다(창43:16).
2. 이집트 사람들이 신들로 여기는 짐승들을 목자들이 먹어서도 아니다. 당시에는 그런 우상 숭배가 편만하지 않았다.
당시 이집트에는 왕 밑에 세 부류의 사람들 즉 제사장, 군인, 그리고 목자들이 있었으므로 목자들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과 역사적 증언들을 종합해서 볼 때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페니키아, 에티오피아 등에서 쳐들어오는 외국인 목자들 부대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이런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의 형들 역시 외국인 목자였으므로 아마도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큰 미움이 대상이었을 것이므로 요셉은 신중하게 형들에게 이런 조언을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Every shepherd is an abomination unto the Egyptians
영어에서 every shepherd로 표현된 것은 '목자들은 모조리'를 뜻하는 매우 강력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아마 외국인 목자들에 대한 심한 거부감이 이런 표현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46장 34절 주석 존 길 등
for every shepherd is an abomination unto the Egyptians; not because shepherds ate of the milk and flesh of the creatures they fed, which the Egyptians abstained from; for the Egyptians in those times did eat the flesh of slain beasts, see Genesis 43:16; nor because they fed, and slew, and ate those creatures, which the Egyptians worshipped as gods, as Jarchi; for it does not appear that the Egyptians were so early worshippers of such creatures; nor is this phrase, "every shepherd", to be understood of any other than foreign shepherds; for one of the three sorts of the people of Egypt, as distinct from, and under the king, priests, and soldiers, according to Diodorus Siculus (d), were shepherds, and were not despised on that account; for, as the same writer says, all the Egyptians were reckoned equally noble and honourable (e); and such it is plain there were in Egypt, in the times of Joseph, see Genesis 47:6; and goat herds were had in esteem and honour by those about Mendes, though swine herds were not (f): wherefore this must be understood of foreign shepherds, the Egyptians having been greatly distressed by such, who either came out of Ethiopia, and lived by plunder and robbery (g), or out of Phoenicia or Arabia; for, according to Manetho (h), it was said that they were Arabians or Phoenicians who entered into Egypt, burnt their cities, &c. and set up kings of their own, called their Hycsi, or pastor kings: and therefore Joseph might the rather fear his brethren and father's family would be the more contemptible in that they came from Canaan, which was near to Arabia and Phoenicia; but Dr. Lightfoot (i) is of opinion, that the Egyptians, being plagued for Abraham's and Sarah's sake, made a law, that for the future none should converse with Hebrews, nor with foreign shepherds, so familiarly as to eat or drink with them.
2021-12-15 12:01:11 | 관리자
베드로전서 4장 5-6절의 죽은 자들과 죽어 있는 자들
베드로는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당시 로마 제국에서 큰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베드로전후서 편지를 기록하였습니다.
4장 1-3절에서 그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1 그런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가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니
2 그러므로 그는 육체 안에 거할 자기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리라.
3 이는 우리가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한 우상 숭배 속에서 걸어 이방인들의 뜻을 이룬 것이 우리 삶의 지나간 때로 우리에게 족하기 때문이라.
1절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그쳤다고 하는데 이 말은 의도적으로 죄 짓는 것을 그쳤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2-3절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4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뀌면 이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4절 이 점에서 그들이 너희가 자기들과 함께 달음질하여 동일하게 과도한 방탕에 이르지 아니함을 이상히 여기며 너희를 비방하나
그러나 5절에서 보듯이 그런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해야 합니다.
5절: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할 준비가 되신 분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
5절에서 살아 있는 자들은 구원받는 자들이고 죽은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전자는 휴거 이후 곧바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결정하기 위한 회계 보고를 하고(고전3:11-15) 후자는 그 뒤 약 1007년(7년 환난기+1000년 왕국) 쯤 지나서 크고 흰 왕좌 앞에서 회계 보고를 합니다(계20:11-15).
그런데 6절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6절 이런 까닭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런 까닭으로’는 ‘모든 것을 회계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를 뜻합니다.
죽어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결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짐을 뜻하지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9:27).
6절의 죽어 있는 자들과 5절의 죽은 자들은 영어를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5 Who shall give account to him that is read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6 For for this cause was the gospel preached also to them that are dead, that they might be judged according to men in the flesh, but live according to God in the spirit.
즉 5절의 죽은 자들과 6절의 죽어 있는 자들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5절과 6절의 죽은 자들(The dead)과 죽어 있는 자들(them that are dead)을 달리 바르게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역,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등 거의 모든 성경들은 둘 다를 그냥 죽은 자들이라고 번역하여 제대로 성경을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개역 5.6절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그들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게 될 그 분께 설명하게 되리라.
이런 연유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과 일치하여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과 일치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한번 읽어 보기 바랍니다.
이런 식의 번역으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직고하다, 설명하다, 사람과 일치하여, 하나님과 일치하여 등 번역 자체가 난해합니다.
6절의 죽어 있는 자들은 베드로 당시에 이미 구원받고 죽어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육신으로는 사람들의 판단을 받고 고난을 당했지만 영으로는 살아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3절과 비교해 보시면 대비가 쉽게 될 것입니다.
6절을 말하면서 베드로는 지금 살아 있는 성도들이 6절의 성도들처럼 지금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것들을 상속받을 것을 말하며 이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7절의 시작이 조금 이상합니다.
7절 그러나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7절에 ‘그러나’가 나온 것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지만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니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 등 그 당시 사도들은 다 자기들 시대에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지고 핍박을 견디며 믿음 생활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베드로전서 4장 1-7절을 이해하면 전체를 이해하는 일이 조금 쉬워질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6절 등 주석: 반즈 주석 좋음
샬롬
2021-12-15 10:57:21 | 관리자
히브리서 6장 9절의 바른 번역
히브리서 6장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말씀입니다.
6장 15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5절 이런 식으로 그(아브라함)가 끈기 있게 견딘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얻었느니라.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5절의 그 약속하신 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끈기 있게 견뎌야 구원을 받는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13-14절을 보면 여기의 약속은 구원이 아닙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구원은 이미 오래 전에(약 50년 전에) 확고하게 이루어졌고 그는 이삭을 이미 낳았습니다.
14절의 약속은 이삭을 바침으로써 그가 번성하게 됨을 보여 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이삭을 바친 뒤 그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창22:16-18절을 보기 바랍니다.
16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나를 두고 이것을 맹세하였노라. 즉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을 바치기를 마다하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내가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 하니라.
10-12절을 보면 여기의 주제가 구원이 아니라 성도들이 누릴 복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10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온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11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우리가 바라노니
12 이것은 너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인내를 통해 약속들을 상속받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13-15절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10-12절을 설명합니다. 즉 여기의 주제는 구원이 아니라 구원 뒤에 따라오는 복입니다.
7장뿐만 아니라 10장도 다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 받게 될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꾸준히 견딘 자들(예를 들어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복을 누렸지만 나머지는 구원은 받았어도(이집트 탈출 시 믿음으로) 광야에서 멸절되어 가나안의 복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믿게 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이제 구원받았지만 여러 가지 핍박과 환난을 견지디 않고 중도에 미끄러지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이집트를 떠난 구약 시대 이스라엘 성도들같이, 성도가 누릴 가나안의 복을 잃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누릴 복을 잃는 것입니다.
6장에서 사도는 이것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또다시 기초적인 교리를 놓는 일을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4-8절에서 사도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구원을 잃었다가 다시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8절을 보면 사도는 구원을 받고 나서 심각한 배도의 길을 가면 목숨을 잃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전5장에서 심각한 음행을 범한 자(성도)를 죽음에 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또 이것은 요일5:16-17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그는 간구할 것이요, 그러면 그분께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그에게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데 나는 그가 그것으로 인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아니하노라. 모든 불의가 죄이지만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느니라.
바울은 이렇게 강력하게 경고를 주고 나서 9절에서 히브리 성도들에게는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을 확신 있게 말합니다.
9절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9절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 관하여는 더 좋은 것들과 또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But, beloved, we are persuaded better things of you, and things that accompany salvation, though we thus speak.
9절이 바르게 번역되지 않으면 구원 상실 교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개역 등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제대로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바울의 말 즉 9절은 그들에게 구원의 증거 있다고 말합니다. 구원에 동반되는 선한 행위가 그들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10절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10절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온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러므로 6장은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보여 주고 다만 구원받는 자가 심각한 배도의 길로 들어서면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런 중요한 부분에서 개역 성경은 9절을 이상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처럼 그들에게 구원에 가까운 것이 있다고 하면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여 이집트(세상)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다만 지금 광야에서(세상에서)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가나안의 복을 누리느냐, 누리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10장 26-39절도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나 순종하지 않다가 광야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문맥을 잘 보고 성경을 읽으면 영원한 구원의 의미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2021-12-14 10:52:42 | 관리자
히브리서 4장 12-13절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12-13절을 보겠습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13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
위에서 보듯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12절을 번역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분이라고 하였고 연이어 13절은 그분의 눈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이 이것에 대해 의아해하기에 잠시 설명을 드립니다.
이를 위해서는 영어를 보아야 합니다.
12 For the word of God is quick, and powerful, and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iercing even to the dividing asunder of soul and spirit, and of the joints and marrow, an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
13 Neither is there any creature that is not manifest in his sight: but all things are naked and opened unto the eyes of him with whom we have to do.
영어로 12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e word of God is quick, and powerfu... an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
이 부분의 뒤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discerner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discerner(분별하는 자 혹은 분별하는 분)로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13절이 나오며 앞부분에 in his sight가 나옵니다. 여기의 his 역시 의인화된 discerner를 가리킵니다(물론 하나님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영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인화한 것을 따라 형식적 일치를 위해 그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영어 성경은 왜 의인화를 했을까요?
1-11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히브리 성도들 가운데 아무도 불신이라는 죄의 본을 따라 넘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12절은 원래 ‘왜냐하면’의 for로 시작합니다. 바울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말씀 앞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맥을 고려하고 의인화된 discerner를 생각하면서 이 부분을 읽으면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주석
2021-12-14 10:15:09 | 관리자
히브리서 13장 10-16절의 이해
히브리서 13장 10-16절은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읽으면 앞뒤 문맥상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10절이 왜 갑자기 나오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13:9-16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9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에 끌려다니지 말라. 음식이 아니라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함이 선한 일이니 음식에 전념한 자들에게 음식이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성막을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나오는 것을 먹을 권리가 없느니라.
11 그 짐승들의 피는 죄로 인해 대제사장이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고 그것들의 몸은 진영 밖에서 불사르나니
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기 위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13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자.
14 여기에는 우리에게 영구한 도시가 없고 오히려 우리가 다가올 도시를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곧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16 더욱이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느니라.
잘 아시는 것처럼 히브리서는 사도 바울이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면서, 유대인들 가운데 주님을 믿게 된 자들에게 그리스도와 신약의 우월성을 보여 주어 그들이 배도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도록 하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10-16절에서 사도는 히브리서를 마감하면서 또다시 구약과 신약의 비교를 통해 신약 성도들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사도는 신약 성도들에게 특별한 제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막을 섬기는 자들 즉 구약 시대 제사장들이나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그 제단에서 나오는 것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다. 즉 신약 성도들은 그 제단에서 나오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구약식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갑자기 먹는 이야기가 나올까요?
9절에서 음식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신약 및 구약 성도들의 차이를 먹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의 제단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갈보리 십자가로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로 보는 견해입니다.
여하튼 구약식으로 경배하는 자들은 우리가 가진 제단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이 음식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영적 음식으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11절은 10절에 대한 설명입니다. 즉 구약 시대 제사장들이 제단에서 나오는 것을 먹지 못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12절은 11절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13절 역시 12절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14절에서 사도는 당시 핍박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함을 촉구합니다.
15절은 신약 시대에는 구약식 짐승의 희생이 아니라 우리 입으로 드리는 찬양의 희생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16절은 신약 시대 성도들의 선행의 희생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이해하고 이 부분을 읽으면 이해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10절이 갑자기 나오는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0절 주석
2021-12-14 09:49:33 | 관리자
욥36:5, 딤후4:1의 the+형용사 단수 및 복수 문제
우리말은 단수 복수 구분이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원어, 영어 성경 등을 읽으면 단수 복수가 명확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발간한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가능한 한 단수 복수를 명확히 구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단수 복수 관련해서 먼저 우리말의 문제와 한계를 보겠습니다.
복수를 지칭하는 형용사와 연결되면 그 다음 단어가 단수든 복수든 모두 복수가 됩니다.
1. 모든 사람이 왔다. 모든 사람들이 왔다.
국어 연구원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모든 사람’이나 ‘모든 사람들’이나 둘 다 사용 가능합니다.
2. 저기 아름다운 꽃 다섯 송이가 있다. 꽃들 다섯 송이들이 있다.
‘꽃들 다섯 송이들이 있다’ 식으로는 아무도 쓰지 않습니다. 사실 정확성을 기한다고 하면서 후자처럼 번역하면 졸역이 됩니다.
여하튼 우리말의 용례와 한계 안에서 단수 복수 구분이 되면 좋으므로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가능하면 복수를 복수로 처리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원어, 영어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the+형용사’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말이 성경에는 자주, 많이 나옵니다.
The rich, the poor, the wicked, the just, the living, the dead, the sick
사실 이런 말들이 단수인지 복수인지 영어로는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히브리서 12장 the firstborn 문제
그런데 원어를 보면 단수인지 복수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의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the+형용사’ 표현 수 백 군데를 다 원어를 참조하여 이것들의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공인 본문을 사용하는 슈퍼바이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에를 들어 욥36:15를 보겠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He delivereth the poor in his affliction, and openeth their ears in oppression.
이 구절에서 앞의 the poor는 단수이고(바로 뒤의 his 참조), 뒤는 복수(their)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자가 고난당할 때 그를 구출하시며 압제당할 때 그들의 귀를 여시나니
욥36:6을 보겠습니다.
He preserveth not the life of the wicked: but giveth right to the poor.
이런 구절의 the wicked, the poor는 영어로만 보면 단수 복수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슈퍼 바이블을 사용해서 원어의 단수 복수를 고려하면 번역이 다음과 같이 됩니다.
그분께서는 사악한 자(단수)의 생명을 보존하지 아니하시고 가난한 자들(복수)에게 정당한 것을 주시며
이런 문제는 시가서에 특히 많습니다.
물론 신약 성경에도 매우 많습니다. 다음은 한 예입니다.
딤후4:1을 보겠습니다.
I charge thee therefore before God, and the Lord Jesus Christ, who shall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at his appearing and his kingdom;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또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기존 성경들은 대부분 the living과 the dead를 산 자와 죽은 자로 단수 처리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보겠습니다.
For Christ also hath once suffered for sins, the just(단수) for the unjust(복수), that he might bring us to God, being put to death in the flesh, but quickened by the Spirit: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해 한 번 고난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해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려 하심이라.
이런 식으로 이번의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the+형용사’를 다 찾아서 가능한 한 다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여 표기하였습니다.
2021-12-13 15:50:59 | 관리자
디모데전서 3장 16절, 시편 1편, 로마서 1장 등에 나오는 godly, ungodly 등의 번역
성경을 번역할 때 참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 중 하나가 godly 혹은 ungodly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들의 사용 빈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godly:15회(시4:3-요삼6), godliness 15회(딤전2:2-벧후3:11), 총 30회
ungodly: 27회(삼하22:5-유18), ungodliness 4회(롬1:18-딛2:12), 31회
godly 혹은 ungodly 총 61회
개역성경 등에는 이 말이 주로 경건하다, 불경건하다, 악인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옥스퍼드 사전과 한영사전에서 godly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OED: Of or pertaining to God; coming from God; divine; spiritual. Obs. exc. arch.
한영사전: 신을 공경하는, 고어: 하나님에게 속한, 신성한
그러니까 원래대로 하면 godly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등의 뜻입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2011년 400주념 기념판까지 이미 61회의 반 수 이상을 그렇게 번역하였고 개역성경도 피치 못하게 몇 군데는 그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후7:10을 보겠습니다.
For godly sorrow worketh repentance to salvation not to be repented of: but the sorrow of the world worketh death.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
개역성경도 마찬가지 이 부분은 마찬가지입니다.
딤전3:16을 보겠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And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 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justified in the Spirit, seen of angels, preached unto the Gentiles, believed on in the world, received up into glory.
킹제임스 마제스티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사람들이 믿는 분이 되시고 들려서 영광으로 들어가셨느니라.
개역개정 등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16절 후반부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처녀탄생, 인성과 신성의 존재, 믿음의 대상, 승천 등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 전에 나오는 Godliness입니다.
이런 데 나오는 godly를 경건으로 번역되면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도무지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품은 성질이나 됨됨이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런 데의 godliness는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신비 등으로 번역되어야만 합니다.
한편 시1:1, 1:4, 1:6 등에는 godly가 잘 번역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Blessed is the man that walketh not in the counsel of the ungodly, nor standeth in the way of sinners, nor sitteth in the seat of the scornful.
킹제임스 400주년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계획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개역성경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개역성경은 등은 이 단어를 악인들로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나 악인들은 둘 다 원래 뜻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있는 그대로 번역하기로 하고 이런 데를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ungodly)로 번역하였습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1:1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계획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1:4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그렇지 아니하며 오직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도다.
1:6 의로운 자들의 길은 {주}께서 아시나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기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단순히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겨와 같고 (1:4) 이들의 길은 결국 망한다고(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말합니다.
아마도 사울과 같은 사람이 이런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도 이와 비슷합니다.
For the wrath of God is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all 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who hold the truth in unrighteousness;
킹제임스 400주년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붙잡아 두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나니
킹제임스 마제스티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붙잡아 두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모든 것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나니
이렇게 해야 1장 19절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물론 godly, ungodly를 번역할 때는 하나님을 명조체로 번역하였습니다. God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성경 전체의 godly, ungodly를 번역하여 원래의 뜻을 그대로 반영하였습니다.
2021-12-13 15:29:19 | 관리자
군대들의 주, 만군의 주, 만군의 여호와(Lord of Hosts) 설명
우리가 약 30년 동안 성경 단어들을 바르게 번역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성경의 영향, 비기독교 세상의 한계 등으로 2011년 400주년 기념판까지 제대로 고치지 못한 단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만군의 주’(기존 성경의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성경에는 군대를 나타내는 말 host가 단수와 복수로 총 491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Host(192), hosts(299), 총 491회
이 host는 LORD of hosts의 용례를 빼고는 모두 군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LORD of hosts는 구약성경에 삼상1:3-말4:3까지 245회 나오고 기존 성경에서는 만군의 여호와(하나님), 킹제임스 성경 400주년 판에서는 만군의 주로 번역되었습니다.
한편 이 표현은 신약성경 롬9:29와 약5:4에도 두 번 나오고 모두 만군의 여호와 혹은 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대다수 성도들은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만군의 하나님, 만군의 주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읽어 왔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만군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의 만군은 무엇을 뜻할까요? 만군은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한 번도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 어른들도 어려운데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데 여기의 hosts를 만군으로 하고 다른 데는 군대로 하면 성경 해석이 어려워지거나 불가능해집니다.
이제 Host라는 단어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창2:1에 처음 나옵니다.
영어 킹제임스
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host of them.
킹제임스 마제스티
이같이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니라.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그리하여 하늘들과 땅이 완성되었고 하늘들의 군상들도 그러하니라.
개역 개정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일단 개역 개정의 문제점을 보겠습니다. 2장 1절은 단순히 천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늘들이라는 복수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그저 만물이 아닙니다.
1장에서 하나님은 6일 동안 우주 공간(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지구, 그리고 이것들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십니다.
이 모든 창조 행위의 결론이 창2:1-2입니다.
원어 사전으로 가서 host라는 말을 찾아보면 이 말은 전쟁을 위해서 조직된 무리 즉 군대를 뜻합니다.
우리말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 많은 떼, 다수《of》; 《고어》 군세, 군대
분명히 고어로는 군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옥스퍼드 사전 역시 이 말이 군대임을 보여 줍니다.
OED: An armed company or multitude of men; an army. Now arch. and poet.
그러므로 host는 군대를 뜻합니다. 이것이 창2:1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말씀보존학회처럼 이 말을 군상으로 처리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말씀 보존이 안됩니다.
원어 사전의 용례 역시 이를 지지합니다.
(Sabaoth, 쌔베요스) 군대들. ‘여호와 사바오쓰’(Jehovah Sabaoth)는 ‘군대들의 주’(The LORD of hosts)이며 기존 성경에서는 이를 ‘만군의 여호와’로 표현하였다. 이 말의 ‘군대들’에는 하늘의 군대인 천사들과 일월성신 군대 즉 천체들과 땅의 군대들과 심지어 메뚜기, 까마귀, 메추라기, 자벌레 같은 창조물 군대도 모두 포함한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군대를 치리하며 조절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또한 주님께서는 신약과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군대의 대장이시다(삼하6:2; 시24:10; 롬9:29; 약5:4).
군대들의 주는 삼상1:3에 처음 나오며 연이어 한나의 기도에 나옵니다(1:11). 여기의 군대들의 주는 우리의 어려움을 모든 군대들로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아들의 수태가 불가능한 한나의 경우 아들을 수태하게 해 주는 권능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사야서와 계시록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밤낮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군대들의 주여!”라고 외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사6:3; 계4:8).
즉 하나님은 온 세상과 우주 공간의 모든 군대들을 치리하는 분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 장면의 대화를 보겠습니다(삼상17:45).
이에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방패를 가지고 내게 오지만 나는 네가 도전한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군대들의 주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Then said David to the Philistine, Thou comest to me with a sword, and with a spear, and with a shield: but I come to thee in the name of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thou hast defied.
여기서 army와 host가 같은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하여 이번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285회에 걸쳐 나오는 만군의 주, 만군의 하나님을 모두 군대들의 주, 군대들의 하나님으로 교정하였습니다.
기존 용어에 사람들이 익숙해 있어도 익숙함보다는 정확함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참으로 이해하기에 쉽습니다.
2021-12-13 14:09:3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사랑침례교회에서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처음 접하고 이것을 읽거나 참조하기 원하는 목회자들을 위해 무료로 성경을 보내 드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료 성경 증정 대상: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처음 접하는 개 교회 목사, 전도사 그리고 신학대학원 재학생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처음 접한 뒤 이것을 무료로 받아 읽고 참조하기 원하시는 목회자 및 신학대학원 학생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서 받으실분의 성함,핸드폰 전화번호(반드시 핸드폰 번호),주소를 입력해주시고 주보, 학생증 등 증빙 자료를 사진으로 찍은 뒤 첨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 킹제임스 흠정역 신청 링크
(*) 교회로 직접 전화하는 것은 사양합니다.
(*) 배송은 1주일 내로 완료할 것입니다.
(*) 한 교회나 집 주소로 여러 명이 신청하면 보내지 않습니다.
이번 무료 증정 프로그램은 누구에게나 주는 프로그램이 아니며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처음 접하는 목회자들과 예비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니 대상자만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프로그램 시행 이후 대상이 아닌 분들이 계속 신청을 하거나 이 프로그램을 악용하는 분들이 있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반드시 적합한 대상자만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우리의 선한 의도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악용되지 않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스터디 오픈 성경 혹은 지퍼 성경 무작위로 보냄(정가 53,000원): 지퍼는 블랙과 버건디가 있고 역시 무작위로 보냄
(*) 성경 연구를 위해서는 스터디 바이블이 목회자들에게 훨씬 더 유용함
2 한영대역 오픈 성경 혹은 지퍼 성경 무작위로 보냄(정가 53,000원: 지퍼는 블랙과 버건디가 있고 역시 무작위로 보냄
이 성경들에 대한 안내는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킹제임스 오픈 및 지퍼 성경
이 성경들은 현재 생명의 말씀사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스터디 오픈 성경 판매
생명의 말씀사 스터디 지퍼 성경
(*) 이 프로그램은 사랑침례교회에서 책정한 예산이 소진될 때까지만 진행합니다.
(*) 또한 국내에 계시는 분들에게만 저희가 직접 보내 드립니다. 외국에 계시는 분들은 해당되지 않으니 국내 분이 대신 받아서 보내는 것 등은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 구체적인 번역 사례, 차이 등은 킵바이블 사이트를 통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킵바이블 사이트
2021-12-10 12:06:57 | 관리자
히브리서 12장 23절의 firstborn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단수복수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특별히 영어만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석하는 분들에게서 발견되는 오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히12:23
영어 KJV
To the general assembly and church of the firstborn, which are written in heaven, and to God the Judge of all, and to the spirits of just men made perfect,
킹제임스 마제스티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모든 자들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이 부분은 신약 시대 성도들이 도달한 곳을 말하며 23절은 그곳 중 하나가 처음 난 자들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23절을 보면 firstbor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최종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firstborn이 처음나신 분이신 예수님이라고 말하며 따라서 단수를 써서 처음난 자의 총회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무식한 주장입니다. 구절의 단어들 구성과 시제 단수복수 면에서 영어는 원어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근간이 된 그리스어 공인 본문은 여기의 firstborn이 분명하게 남성 복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firstborn은 복수로 번역되어야만 합니다. 단수로 번역되면 명백한 오역입니다. 다음은 슈퍼 바이블의 내용입니다.
4416 prwtotovko" prototokos {pro-tot-ok'-os}
4413과 5088의 대체어에서 유래; 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먼저 태어남’(일반적으로 명사로서), 처음난 <롬 8:29; 골 1:15>형. firstborn;
형용사, 형용대명사, 소유격, 남성 복수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 글을 쓰면서 보니 참으로 이상하게도 말씀보존학회는 이 단어를 단수로 번역하였습니다.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하늘에 기록된 첫째로 난 자의 총회와 교회, 모든 것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에게와,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에게와,
그들이 무슨 이유로 명백한 복수를 단수로 번역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들이 열렬히 추종하는 럭크맨 박사의 히브리서 주석을 보니 여기의 firstborn이 단수도 되고 복수도 되며 단수복수에 따라 여기의 총회가 교회도 되고 이스라엘도 된다는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교리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것이므로 단수로 하면 결코 안 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사람들, 특히 럭크맨같이 여러 중요한 경우에 사적 해석으로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면 안 됩니다.
단수 복수 문제
이와 관련해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럭크맨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서가 신약시대 교회와는 상관이 없고 환난기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인 히브리 크리스천들이 교회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들 역시 주님의 교회에 속한 자들이며 따라서 히브리서의 모든 내용은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바르게 나눈다고 하면서 극단적인 세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중요한 말씀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등의 일반 서신도 모두 현 시대 교회의 크리스천들을 향한 주님의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런 보화를 빼앗아가려는 마귀의 계략들에 대해 우리는 무지하지 않습니다(고후2:11).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는 신약 시대 크리스천들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큰 평안을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21-12-09 12:37:10 | 관리자
창세기 22장 8절의 provide oneself는 어떻게 번역해야 합니까?
안녕하세요?
갑자기 한 분이 창세기 22장 8절 번역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해서 글을 올립니다.
설명을 위해 먼저 여러 번역을 소개하겠습니다.
영어 KJV
And Abraham said, My son, 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 for a burnt offering: so they went both of them together.
킹제임스 마제스티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하고 이렇게 그들 두 사람이 함께 가서
개역개정, 공동, 바른 성경 등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영어 NIV
Abraham answered, "God himself will provide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my son." And the two of them went on together.
영어 NASB
And Abraham said, "God will provide for Himself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my son." So the two of them walked on together.
보시는 바와 같이 세상의 모든 성경들은 ‘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을 ‘하나님이 친히 어린양을 예비하시리라’ 혹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어린양을 예비하시리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분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말씀보존학회의 번역 때문입니다.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 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
말씀보존학회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린 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의 himself를 목적어로 취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30년 전부터 동일합니다.
우리는 영어 provide의 사전적 용례와 성경의 용례에 따라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영어 원문은 “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으로 되어 있습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비롯한 여러 사전에서 ‘provide’를 살펴보면 우리의 본문 용례 즉 “provide oneself something”의 구체적인 용례가 없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이 자기 자신이, 자기를 위해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사례들이 더러 나와 있습니다.
To equip or prepare oneself, to make oneself ready, prepare (to do something, for or against something). Cf. 3 and 4. Obs.
여하튼 여러 개의 영어 사전들을 살펴보았지만 provide oneself의 oneself를 목적어로 취하는 사례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다 다 그것을 재귀 대명사로 보고 ‘친히, 자기를 위하여’ 등의 의미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영어 성경들이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성경으로 푼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또한 킹제임스 성경의 내장 사전이 최종적인 권위라고 믿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에서 ‘provide’를 포함하는 구절 중에 “provide oneself something”의 용례를 찾아서 어느 것이 맞는지 성경으로 비교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경우 다행히도 창세기를 포함해서 성경에 두 번 그 용례가 나와 있습니다. 눅12:33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Sell that ye have, and give alms; provide yourselves bags which wax not old, a treasure in the heavens that faileth not, where no thief approacheth, neither moth corrupteth.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며 너희 자신을 위해 낡지 않는 가방들 곧 하늘들에서 없어지지 않는 보물을 예비하라. 거기서는 도둑도 가까이 오지 못하고 좀도 부패시키지 못하느니라.
이 구절은 정확하게 provide oneself something의 구조 즉 provide yourselves bags의 용례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보존학회가 일관성 있게 번역하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며 너희 자신을 낡지 않는 가방들로 예비하라.
그런데 이런 번역은 말이 안 됩니다.
심지어 말씀보존학회도 다음과 같이 이 부분을 ‘너희 자신을 위하여’로 번역하였습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고,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어지지 않는 돈주머니를 만들라. 고갈되지 아니하는 하늘들의 보물이니, 거기에는 도둑도 접근하지 못하고 좀도 손상시키지 못하느니라.
동일한 provide oneself something의 oneself를 한 구절에서는 ‘자기를’로 번역하고 다른 데서는 ‘자기를 위하여’로 번역하면 안 됩니다. 1611년 당시 동일한 영어 성경 번역자들이 provide의 동일한 용례를 사용하여 일관성 있게 번역하였기 때문입니다.
너희 자신을 가방들로 예비하라가 말이 될까요? 이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는 provide oneself something의 oneself가 재귀 대명사로서 '자기가 직접' 혹은 '자기를 위하여'로 번역되어야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과 영어 사전의 용례를 따라 지금 있는 것처럼 창22:8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말씀보존학회는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요?
럭크맨, 리플링거, 사무엘 깁 등 킹제임스 성경을 옹호하는 분들이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 예비해 주신 것은 어린양이 아니라 13절에 있듯이 숫양이기 때문에 창22:8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어린양이 되실 것을 보여 주는 예언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레이시 목사님도 이렇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생각을 번역에 넣으려는 것이지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것을 주장하면 주변의 동료들에게 단순한 영어 문장을 왜곡해서 보는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기 쉽습니다.
이 구절이 아니라도 하나님이 성육신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절은 많습니다. 그러므로 영어 문법 자체와 성경의 용례가 지지하지 않는 구절들을 근거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다른 영어 성경보다 우수하다거나 원문보다 향상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냥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오히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것을 알면 좋겠습니다.
굳이 이 구절을 말씀보존학회처럼 번역하여 이해하려고 한다면 앞으로 창22:8을 논할 때 우리 성경을 오역(誤譯)이라 하지 말고 이역(異譯)이라 하기 바랍니다.
참고로 영어만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석하는 분들에게서 발견되는, 이와 비슷한 오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히12:23
영어 KJV
To the general assembly and church of the firstborn, which are written in heaven, and to God the Judge of all, and to the spirits of just men made perfect,
킹제임스 마제스티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모든 자들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이 부분은 신약 시대 성도들이 도달한 곳을 말하며 23절은 그곳 중 하나가 처음 난 자들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23절을 보면 firstbor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최종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firstborn이 처음나신 분이신 예수님이라고 말하며 따라서 단수를 써서 처음난 자의 총회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무지한 주장입니다. 구절의 단어들 구성과 시제 단수복수 면에서 영어는 원어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근간이 된 그리스어 공인 본문은 여기의 firstborn이 분명하게 남성 복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firstborn은 복수로 번역되어야만 합니다. 단수로 번역되면 명백한 오역입니다. 다음은 슈퍼 바이블의 내용입니다.
4416 prwtotovko" prototokos {pro-tot-ok'-os}
4413과 5088의 대체어에서 유래; 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먼저 태어남’(일반적으로 명사로서), 처음난 <롬 8:29; 골 1:15>형. firstborn;
형용사, 형용대명사, 소유격, 남성 복수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 글을 쓰면서 보니 참으로 이상하게도 말씀보존학회는 이 단어를 단수로 번역하였습니다.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하늘에 기록된 첫째로 난 자의 총회와 교회, 모든 것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에게와,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에게와,
그들이 무슨 이유로 명백한 복수를 단수로 번역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열렬히 추종하는 럭크맨 박사의 히브리서 주석을 보니 여기의 firstborn이 단수도 되고 복수도 되며 단수복수에 따라 여기의 총회가 교회도 되고 이스라엘도 된다는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교리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것이므로 단수로 하면 결코 안 됩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사람들, 특히 럭크맨같이 여러 중요한 경우에 사적 해석으로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창22:8의 번역이 이렇게 되어야 함을 한영대역 성경 부록에 밝혔습니다(부록 70쪽, 한글성경 용어 설명)
이렇게 설명해도 럭크맨을 추종하는 말씀보존학회의 번역과 주장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믿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마음껏 누릴 자유입니다.
큰 평안을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21-12-09 12:32:2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