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질문 전에 늘 우측 상단의 구글 검색으로 찾아보시면 거의 다 답이 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781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1132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263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입니다.
달리 믿는 것은 각 사람의 자유입니다.
샬롬
패스터
2015-04-14 17:23:23 | 관리자
샬롬..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킵바이블을 통해 큰 유익을 얻고 있는 형제입니다..
다른 주석을 찾아봐도 마땅한 의문이 해결되지 않기에 부득불 아시는 분들이 계실까 하고 여쭤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다가 불현듯 의문이 생기게 되었는데요..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두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되 특별히 말씀과 교리로 수고하는 자들에게 그리할지니라.
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1. 디모데전서는 말그대로 1차적으로는 디모데에게 쓴 서신이고,
2. 디모데가 편지를 수신할 당시에는 아마도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었을 것입니다..
3. 그런데 감독인 디모데에게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존경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에베소 교회에는
감독인 디모데 이외에 다수의 장로들과 특히 이 장로들 중에 말씀과 교리로 수고하는 장로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현재 장로교 체계 (목사, 다수의 장로, 집사) 가 오히려 성경에 나와있는 교회의 직분체계와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되어서요..
감사합니다..
2015-04-14 15:37:55 | 유해용
안녕하세요?
봄날의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언행이 덕스러운 성도들의 모임이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5-04-13 18:50:1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제 저는 솔로몬의 배은망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입니다.지혜와 능력이 많아도 자신을 의지하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경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다 안다고 하면서 호언장담하고 남을 무시하면 결국 패망에 이릅니다.
이번 주에는 왕상1-11장을 읽으면서 솔로몬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인터넷은 참으로 좋은 도구입니다. 그런데 잘못 이용하면 패망에 이르기 쉽습니다.
지식의 교만을 드러내며 남을 비하하고 쓸데없는 논쟁을 일삼는 사이트에 들어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좋은 사이트를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문, 검색을 빼고는 인터넷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1주일에 한두 번 ‘이 세대가 가기 전에’라는 블러그에 들어가 세상의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http://blog.naver.com/esedae/
이 블러그는 일반 교회 목사님이 운영하는 것인데 전 세계의 마귀 숭배 추세를 매우 잘 보여 줍니다. 어떤 때는 너무 과한 면도 있지만 성도들이 거를 것은 거르고 가끔씩 보면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세상 욕심이 불현듯 일어나거나 교만한 맘이 생기거나 남을 비하하려는 맘이 생기면 거기의 뉴스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의 징조를 보면 그런 악들을 버리고 제대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들 것입니다. 저도 어제 지난주의 글들을 보고는 더욱더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귀한 정보를 매주 업데이트 해 주는 블러그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푹 빠져 매일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이야기만 하고 다닐까 봐 내심 큰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현명한 킵바이블 독자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을 줄로 믿고 소개하니 가끔씩 보면서 경각심을 갖기 바랍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5-04-13 16:57:30 | 관리자
안녕 하세요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고 영감 주셨으며 보존해주신 성경이 킹제임스 영어성경임을 믿으며, 또한 우리말로는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읽기 쉽고 바르게 번역한 성경임을 믿는 사람들이 진주지역에서 6가정 8명의 형제자매가 아래와 같이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가까운 지역에 살고 계신 관심 있는 분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 예 배 : 매주 주일 11:00
○ 주일 오후모임 : 매주 13:30
○ 성경공부 : 매주 수요일 20시(5월 6일부터)
○ 장소 : 진주시 칠암동 293-2 건물3층(가칭; 진주소망침례교회)
○ 연락처 :
손형오 010 2586 6484, 정구만 010 8972 5878
2015-04-13 10:10:22 | 정구만
다음의 두 글도 참조하기 바랍니다.
왜 둘째 날에는 '좋았더라'가 없을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937
재창조론에 관한 7가지 의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9
2015-04-13 09:41:5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는 1992년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그즈음에 럭크맨(Peter Ruckman)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주석서에는 킹제임스 성경을 옹호하는 내용이 많아서 반가웠습니다. 더구나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성경의 감추어진 보화들을 명석한 두뇌와 포기할 줄 모르는 강철 같은 소신으로 캐내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니 절로 럭크맨의 책에 손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안타깝게도 그분의 책의 3분의 1 정도는 자신의 생각과 성경 해석 및 교리가 다른 이들을 헐뜯고 비방하는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것도 빠짐없이 읽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저에게 영적 양식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독이 됨을 깨닫고 그 후로는 그런 부분이 나오면 통째로 뛰어넘어 읽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저는 럭크맨의 좋은 점은 닮지 않고 독선과 독설 그리고 비방에 심취하여 결국 믿음 생활에서 크게 실족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삶의 추이를 자연스럽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귀국하면서 저는 또한 럭크맨이 지원하는 말씀보존학회(이하 말보회)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안면이 없던 말보회 대표로부터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상스럽고 거친 욕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제가 미국에서 럭크맨을 직접 만나 말보회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어 공인본문으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은 제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 말보회에서 펴낸 성경의 앞부분에 이미 그렇게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지 한국말을 모르는 럭크맨을 만날 기회가 있어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그 뒤 저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던 학생들도 무심코 책을 구매하러 그곳에 갔다가 역시 비슷한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어떻게 저러한 분이 성경을, 그것도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고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며 안타까움과 함께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럭크맨이라는 불굴의 의지(혹은 고집)를 가진 천재로부터 시작된 독물이 가득한 옹달샘은 그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 대해를 건너와 현재까지 말보회에 몸담고 있거나 혹은 과거 한때 몸담았던 여러 사람에게 흘러들어가 대단히 악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랜 세월을 두고 관찰한바 그들은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람을 안하무인의 자세로 대한다는 겁니다. 이들은 자신 혹은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만이 성경을 가장 잘 이해하고 해석하며 그 외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에 동조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인신공격과 함께 거친 말을 쏟아냅니다.
“이러한 언행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과연 성화되는 성도일까?”“도대체 왜 말보회에 연루되기만 하면 이런 악한 현상이 반복되고 확산될까?”
지난 20년 동안 제 안에는 이런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현실을 지켜보며 긴 시간이 지난 뒤 결국 이 모든 악한 현상의 뿌리는 극단적 세대주의(Hyper dispensationalism)라는 지식의 교만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럭크맨과 그의 추종자들은 한 마디로 ‘극단적 세대주의’를 가르칩니다. 물론 럭크맨 본인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국내외 많은 선량한 성경 신자들이 그렇게 평가합니다. 또한 럭크맨 추종자들은 대개 그런 지식을 럭크맨에게서 직접 배우지 않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의 극단적 주장이 카세트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처럼 혹은 사람의 말을 따라 하는 앵무새처럼 하나같이 동일하며 결국엔 럭크맨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럭크맨의 책을 읽을 때는 정신을 차리고 조심해서 악한 양식은 걸러내며 읽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럭크맨의 좋은 점뿐만 아니라 그의 거칠고 공격적이며 독선적인 인품까지 절로 독자의 내면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책, 특히 어떤 경건 서적을 읽느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저를 비롯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해석하려는 세대주의자들은 다음의 말씀을 애용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여기의 ‘나누다’는 ‘divide’입니다. 이 말은 말 그대로 쪼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쪼개는 일에 도가 지나쳐서 더는 쪼개지 말아야 할 부분을 쪼개기 시작하면 바로 그것이 ‘극단적 세대주의자’가 되는 길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저는 말씀 강해를 준비할 때 가능한 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봅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편향된 것을 가르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저보다 뛰어난 분들의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멀리 바라보듯이 좋은 목사와 성경 교사는 겸손한 자세로 치우침 없이 여러 믿음의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경우 럭크맨의 주석서도 참조합니다.
http://www.cbck.org/ExpositoryBible1-9/View/23c
지난주부터 저는 야고보서를 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럭크맨은 수신자 부분을 다루면서 약1:1만 인용하며 특별 강조를 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하노라(약1:1).
강조의 내용은 야고보서의 수신자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즉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유대인들 특히 환난기에 들어가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지 지금의 교회 성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성경에서 이런 부분을 가르쳐주지 못했다며 은근히 자기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분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바로 이런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럭크맨의 이 가르침은 맞지 않습니다.야고보서는 교회 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글입니다.
야고보서 2장 1절이 무어라 말합니까?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고서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말라.
물론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에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유대인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형제요 모든 신약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야보고서의 내용은 교회 시대 전체에 두루 적용되는 실생활 교리를 가르쳐주는 대단히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구원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더없이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특히 3장에 있는 대로 자신의 혀를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1-12절을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9 그것(혀)으로 우리가 [하나님] 곧 [아버지]를 찬송하며 또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저주하느니라. 10 같은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거니와, 내 형제들아, 이런 것들이 결코 그래서는 아니 되느니라. 11 샘이 같은 곳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느냐?
어떤 분처럼 거룩한 성경 말씀을 전하는 입으로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고 자기를 섬기다가 잘못된 점과 부패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등을 돌리고 나가면 서슴없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다.”라고 정죄하며 악담을 퍼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따르고 섬기면 구원받은 사람이고 섬기다가 나가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니, 그것은 곧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분은 구원은 잃어버릴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럭크맨은 야고보서뿐만 아니라 히브리서도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므로 교회와는 교리적으로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 18-24절은 분명히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18 너희[히브리서 수신자들]는 만질 수 있는 산과 불이 붙은 산에 이르지 아니하였고 캄캄함과 어둠과 폭풍과(즉 그들은 구약 언약하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22 그러나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 23 총회와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교회와 …24 뿌리는 피에 이르렀느니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구약 성도들이 아니고 신약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럭크맨과 같은 희대의 천재가 아닐지라도 성경을 맑은 정신으로 단순하게 읽으면 히브리서는 교회 시대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시대의 성경 신자들은 럭크맨만을 추종하며 앵무새처럼 그분의 말을 흉내 내는 사람들을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럭크맨의 교리뿐만 아니라 럭크맨의 거친 말까지 본받아 성도의 품행에 결코 합당하지 않은 말을 쏟아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면서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분들의 온라인 공간 등에 들어가거든 가장 먼저 그들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래서 만약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즉각 상대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문맹자’, ‘속임수를 쓰는 사람’ 등의 과격한 인신공격을 하거든 그의 가르침에 전염되기 전에 속히 그곳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런 말의 독은 마치 영적 전염병처럼 옮아서 어느새 독자도 모르는 사이에 독자를 똑같은 사람으로 변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또한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성경의 단어를 쪼개는 데도 명수입니다. 이들에게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 즉 간극들이 잘 보입니다.
요즘 저는 어쩔 수 없이 필요에 의해 ‘창조인가, 재창조인가?’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http://keepbible.com/BQNA01/View/4Nz
http://keepbible.com/BQNA01/View/4O2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19:4, 그분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처음에(at the beginning) 그들을 만드신 분께서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
막10:6, 창조의 시작부터(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독자께서는 여기의 ‘창조’, ‘시작’, ‘처음’이 무어라고 믿으십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이 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되어 2장 1절에 요약된 창조요, 시작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창1: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성경에는 재창조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단 한 번의 창조만 아시며 그 창조가 시작되던 때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창조를 둘로 쪼개어 나눕니다.먼저 그들은 마19:4와 막10:6 등의 창조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창조’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처음’ 혹은 ‘시작’은 ‘원 창조’ 이후 재창조 때의 여섯째 날이 됩니다.이들의 눈에만 이런 것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또한 ‘재창조’가 아니라 ‘창조’로 되어 있으므로 누가 창조라고 이야기하면 창조라는 말에 위압을 느끼고는 여기의 요점은 창조/재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중성체 등이 아닌 남자와 여자로 만든 것을 뜻한다고 교묘하게 합리화를 합니다. 자기의 이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혹은 그 이론에 얽매여서 성경을 상식적으로 보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극단적 세대주의의 가장 무서운 독입니다.
이에 대해 한 독자가 글을 보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전체적인 문맥을 보지 않고 ‘처음에’, ‘입다’, ‘간극이론’ 등 아리송한 이슈들로 마치 추리소설같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가르치고 설교해야 할 사역자가 참 안 됐습니다.”
성경 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추리소설처럼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사람이 계속해서 이런 자세를 취하며 자신의 지식으로 성경을 재단하면 진리는 멀어지고 결국 판타지 소설 같은 교리에만 중독되게 됩니다.
같은 창조를 두고 마19:4, 막10:6의 창조는 ‘사람의 창조’만 가리킨다고 하면 과연 어느 누가 이에 동의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극단적 세대주의입니다. 나누면 안 되는 것까지 무리하게 나누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그 두 구절의 창조는 세상의 창조이며 거기의 ‘시작’(beginning) 혹은 ‘처음’ 역시 창1:1의 ‘처음’입니다.
이렇게 무리한 해석을 하기 위해 그들은 창2:5의 ‘세대들’과 히1:2; 11:3의 ‘세상들’이 두 번 창조를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맥을 따라 성경을 보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편견을 마음대로 성경의 줄과 줄 사이에, 단수와 복수 사이에 넣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황당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더 나아가 우리말 성경이 창세기 1장 1절 다음의 2절에 나오는 첫 글자 ‘And’를 번역하지 않아서 재창조의 교리가 성립이 안 된다고 억지 주장합니다. 창세기 1장 3-31절까지 27절을 제외하면 모두 ‘And’로 시작하는데 그러면 이 모든 구절이 재창조를 이야기합니까? 그러면 도대체 재창조가 몇 번이나 있었다는 말입니까? 히브리 학자/성도, 그리스 학자/성도, 영어 학자/성도, 한국어 학자/성도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왜 이들의 눈에만 보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 극단적 세대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누지 말아야 할 것을 극단적으로 나누면, 오히려 성경을 제대로 나누지 않아 교리적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이상의 폐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런 분들은 자기들만 아는 지식으로 우쭐해져서 대개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성경은 그 안에 ‘내장 사전’(a built-in dictionary)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문맥에서 쓰인 단어들을 조사하여 비교해 보면 한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내장 사전을 가지고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내장 사전이 자기들이 추구하는 뜻과 반대가 되면 교묘하게도 슬그머니 못 본 척하거나 함구합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 22절과 28절을 비교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fill) 날짐승은 땅에서 번성하라, 하시니라(창1:22).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let fowl multiply in the earth.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replenish). 땅을 정복하라(창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이 두 구절은 같은 문맥에서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or replenish)…”라는 동일한 구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22절은 ‘fill’이니까 창조이고 28절은 ‘replenish’이니까 재창조라고 말할 근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똑같은 문맥이며 심지어 히브리어도 두 구절이 동일합니다. 이 같은 성경의 ‘내장 사전’을 통해서도 우리는 28절의 ‘replenish’가 22절의 ‘fill’과 같음을 성경으로 더없이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럭크맨 추종자들이 그토록 즐겨 주장하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주는 ‘내장 사전’(Built-in dictionary) 기능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내장 사전이 자신들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으면 이들은 어쩐 일인지 일언반구도 없이 조용합니다.
그동안 극단적 세대주의자를 파급시킨 말보회는 몇 가지 치명적인 악한 씨앗을 뿌렸습니다.
1. 한글킹제임스 성경이 최종 권위이다.
그들은 심지어 영어 킹제임스 성경보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고인가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고 그들이 출간한 한글킹제임스 성경은 여러 차례 개정되었는데 그러면 최종 권위가 그렇게 자주 바뀝니까? 또한 이들은 실제로는 그리스어 공인본문을 번역해 놓고서 그것이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말하며 명칭까지 킹제임스로 하는 바람에 많은 오해를 불러왔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3절을 보겠습니다.
흠정역: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더라.개역: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한글킹: 이는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음이더라.KJB: For they loved the praise of men more than the praise of God.NIV: for they loved praise from men more than praise from God.ASV: for they loved the glory (that is) of men more than the glory (that is) of God.
영어는 분명히 ‘칭찬’(praise)이라 말하는데 개역과 한글킹제임스는 ‘영광’(glory)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NIV도 칭찬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12절을 보겠습니다.
흠정역: 우리가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 속한 진실함으로 하였고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의 양심이 증언하는 바라.개역: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한글킹: 우리의 자랑이 이것이니KJB: For our rejoicing is this, the testimony of our conscience, that in simplicity and godly sincerity, not with fleshly wisdom, but by the grace of God, we have had our conversation in the world, and more abundantly to you-ward. NIV: Now this is our boast:
바울은 절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역, 한글킹제임스, NIV는 바울이 자랑(boast 혹은 glory)한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2절 다음에 나오는 고후1:14에서는 ‘rejoicing’을 기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외에도 고전15:31, 갈6:4, 빌2:19에서 ‘rejoicing’을 자랑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1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흠정역: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개역: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한글킹: 내가 너희를 고아로 남겨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KJV: I will not leave you comfortless: I will come to you.
킹제임스 성경이라면 반드시 이 구절이 ‘위로 없이’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위로자 성령님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할 터인즉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그분께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고아’로 번역한 것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닙니다(참고로 제가 본 것은 2011년 3월에 나온 한글 킹제임스 한영대역 성경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을 정직하게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구약 시대와 환난기에는 ‘믿음 + 행위’로 구원받는다.
이것은 럭크맨의 가르침으로서 저주받을 이단 교리입니다(갈1:8-9). 어느 시대 사람이든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위를 내세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한 진리가 럭크맨같이 성경을 필요 이상으로 쪼개고 나누려는 천재(?)에게는 실족하게 하는 돌이 되고 맙니다. 자기 행위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자는 어느 시대의 어느 누구든지 결코 하나님 앞에 바른 모습으로 설 수 없습니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극단적 세대주의 교리입니다.
3.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다.
이것 역시 몇몇 성경 교사들을 거쳐 럭크맨이 강조하는 교리입니다. 성경에는 재창조라는 말이나 개념이 없습니다. 처음에(시작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는 한 번밖에 없습니다.
4.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로서 합당한 거룩하고 품위 있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들과 조금만 다르면 럭크맨을 따라 성도에게 결코 합당치 않은 거친 말을 쏟아 붓습니다.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롭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마땅히 대답해야 할지 알게 되리라(골4:6).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신앙심이 있어 보이되 자기 혀를 제어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 행위는 헛것이니라(약1:26).
대부분의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오래전부터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말보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누르고 킹제임스 성경 독자들의 주류 성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자 급기야 저들은 저에 대한 인신공격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흠정역 정동수 목사에 대해 아십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E03_jKFst-8
이런 비디오를 만든 분은 시작부터 바이블 빌리버(성경 신자) 운운하며 자기 말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지금도 이분은 구약시대에는 ‘믿음+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극단적 세대주의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이 있는 분들은 한번 동영상 전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이분의 주장을 듣고 그쪽으로 기울어질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면 핵심을 집어서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할만한 정확한 증거를 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 분별이 너무 없는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 이분의 동영상은 뜻밖에 역화(backfire) 작용을 일으켜 오히려 이것을 보고는 흠정역 성경으로 돌아오는 분들이 많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분의 동영상 클릭 수가 늘면 늘수록 흠정역 성경 판매가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판매 기록을 보시면 알지만 실제 출판 시장은 이분들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돌아갑니다. 말보회 성경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흠정역 성경이 가장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동영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짝퉁성경에 속지말라] 흠xx에 속지말라https://www.youtube.com/watch?v=ccSnKKfEyGQ
누가 보기에도 이분의 언행은 비신사적이며 어두침침하여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진리를 찾을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터넷이든 책이든 그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말고 마음대로 가서 찾아보고 진리를 분별하며 탐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단 한 번도 이런 자유를 구속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를 포함해서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이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려 하거든 경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영혼의 자유를 따라 마음대로 하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책이나 사이트에서 오가는 대화가 지저분하고 고상하지 않으며 또 저자나 운영자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최종 심판자로 앉아서 보통 사람들의 판단에도 극단적이고 비합리적인 주장을 펴면 속히 그런 데서 나와야 합니다. 럭크맨 같은 분들을 통해 그런 분들에게 전달된 ‘극단적 세대주의’의 독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곧장 독자에게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라킨(Clarence Larkin), 럭크맨(Peter Ruckman), 낙스(James Knox)의 잘못된 부분을 집요하게 관철하기 위해 성경을 인위적으로 비틀고 왜곡하는 분의 글이나 말에 속아 넘어가면 결국 그런 분을 추종하는 독자들만 골탕을 먹고 실족하게 됩니다.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내 생각이 성경과 대조해서 맞지 않으면 추호도 미련을 두거나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내다 버리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성경 신자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맑은 정신과 바른 지각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기만을 간절히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내가 말하노니 각 사람은 자기가 마땅히 생각할 것보다 더 높이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신대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라(롬12:3).
------------ 참고 링크(재창조 반박 글 모음) --------------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간극 이론, 갭 이론)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Nz 재창조 간극 이론 사실인가, 허구인가?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2 스코필드 성경의 창세기 재해석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0 히11:3에서 말하는 '세상들'이란?http://www.keepbible.com/Cmn1/View/42t 재창조론에 관한 7가지 의문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1 And’를 살려 창세기 1장 읽기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H 왜 둘째날에는 '좋았더라'가 없을까?http://www.keepbible.com/Cmn1/View/42u 누가 화석더미를 말했는가?http://keepbible.com/Cmn1/View/43L#c_14090 제가 알아본 replenish의 뜻http://www.keepbible.com/Cmn1/View/43G 작금의 논쟁 배경 설명
http://www.keepbible.com/Cmn2/View/4CW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을 동시에 들으면서
http://www.keepbible.com/Study5/View/3Zr
'replenish’의 진실과 성경의 창조 정리(재창조 반박 글 모음)
http://keepbible.com/Cmn2/View/4CX?page=2
2015-04-11 14:13:56 | 관리자
형제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중요한 주제를 잘 정리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4-10 23:41:17 | 김대용
형제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중요한 주제를 잘 정리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4-10 23:41:17 | 김대용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 킵바이블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익히는 모든 형제/자매님 평안하신지요.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세상은 재창조된 것이라고 믿는 분들의 글과 강의를 접하며 그동안 생각했던 몇 가지를 소박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재창조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세상’이 아니고 ‘세상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된 것을 두고는 너무나도 단호히 이것들이 ‘멸망 당한 이전 세상’과 ‘재창조된 현 세상’을 가리킨다고 하며, 그 주장의 토대 위에서 계속해서 다른 성경 기록들까지도 자신들의 믿음에 짜 맞추다가 크게 실족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Through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
히브리서 11장 3절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11장 1절과 2절에 나와 있으며, 3절을 포함하여 뒤따르는 11장의 나머지 구절들 전체가 이 두 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확증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히11:1-2)
이제 이 말씀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3. 믿음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은 위의 내용 중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와 연관된 구절입니다.
3절을 읽어 보면, 두 개의 문장이 나란히 세 가지 내용을 대비하면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비된 부분을 손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아래에 도표화해 보았습니다.
이 구절은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에 의해 지어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을 통해 깨닫는” 것임을 먼저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우리가 알고 기억해야 할 원리, 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온 우주의 모든 것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ings which are seen’이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말하기 전에 쓴 바로 앞의 문장에서 등장한 ‘세상들이’라는 단어는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세상들이’에 ‘현 세상’ 외에 (재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옛 세상’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멸망 당해 없어졌기 때문에 현재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보이는 것들’이라고 표현한 사도 바울의 의도와는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여기 나오는 ‘세상들’은 지금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결국 재창조를 믿는 분들이 주장하는 허구의 공간인 ‘옛 세상’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3절에서 ‘세상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뜻은 이미 히브리서 1장 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아들 하나님께서 친히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라고 번역된 영어 단어 ‘world’는 1차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 외에도 동물, 식물, 물고기, 곤충, 별들이 거하는 세상들도 다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려면 세상(world)을 세계(world)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위에 수많은 세계들이 있음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즉, 크게는 은하계, 태양계, 자연계, 해저 세계 등으로부터, 인간 세계, 동물 세계, 식물 세계, 광물계 등등 얼마든지 총칭적 용어인 ‘세계’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구분해 표현하고 있지요.
그럼 왜 간단히 ‘세상’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을 ‘세상들’이라고 했을까요? 재창조를 믿고 싶은 분들은 “단수를 썼더라면 재창조에 관한 추측이 없었을 텐데 복수를 쓴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또 다른 근거를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세상들’이라는 단어는 그 다음 문장에서 쓸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과 연계(대비)되어 사용된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총체적이고 개념적인데 반해 ‘세상들’은 구분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므로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다 더 시각화해 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은하계’ 하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습니까? 따라서 ‘세상들’이라고 복수형 단어를 사용한 것이 그 문장이 의도한 의미에 더 적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세상들’이란 단어를 하나 보았다고 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 세상’ 외에도 ‘옛 세상’이 있었는데 멸망 당했다고 생각하면서 성경 말씀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자기 확신 가운데 주장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주석가들이 있었지만 단 한 사람도 이런 곳에 나오는 ‘세상들’을 재창조와 연관시켜 ’옛 세상’, ‘현 세상’ 등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우주 공간의 모든 것들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고 그 일을 예수님이 직접 하셨으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일을 안다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성경기록자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성경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주석은 요한복음 1장: 2-3절에 있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우리 예수님은 재창조를 알지 못하십니다.
사람을 지은 일 자체가 창조가 시작될 때, 우주 공간과 땅이 만들어진 그때, 즉 창세기 1장 1절에서 6일째 되는 날에 이루어진 것이지 재창조 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막10:6)
여기도 시작(beginning)을 창세기처럼 처음으로 바꾸어서 이해하시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처음부터 즉 창조를 시작하시는 그 처음에 사람들을 만드셨습니다.
재창조 같은 것은 우리 주님의 머릿속에 없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2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87
(*) 다음은, 재창조가 킹제임스 성경의 진리이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어 거기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기록된 대로 믿는 이들만 알 수 있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글에 대한 반박입니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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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재창조론자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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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아는 이들에게 주는 보너스
지금 있는 현 세상을 셋으로 나누면 노아의 홍수를 기준으로 옛 세상, 천년 왕국으로 기준으로 오는 세상(마12:32)이 된다. 천년 왕국을 기준으로 이 세상(천년 왕국 전)과 저 세상(천년 왕국)으로 구분한다(눅20:34,35). 옛 세상, 이 세상, 저 세상 이 셋이 현 세상이며 천년 왕국이 끝날 때 "현 세상"은 불로 멸망한다(벧후3:10-12).
-------------------
이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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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이 이상해서 정확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지만, 불의 멸망 이후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므로 땅은 영원하다. 노아의 홍수 이전 세상도 물로 멸하셨지만 일정 기간을 거쳐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세상을 여러 개로 나눈다 해서 완전 멸망과 재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재창조를 합리화하기 위한 속임수다.
홍수 이전과 이후, 천년왕국 이전과 이후는 거주민이 다르고 환경이 다를 뿐 같은 세상이다. 노아에게 “모든 것이 죽으리라.” 하신 말씀도 정말 '모든 것'인가? ‘방주 속 생명들과 코로 숨 쉬지 않는 모든 것’을 제외한 심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세상을 멸하신 것이며(창6:13, 17), 노아가 맞은 세상이 새로운 세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명령을 다시 주신다(창9:1, 7). 그러므로 <물의 넘침으로 인한 멸망 = 노아의 홍수>의 공식이 성립된다.
천년왕국에 갈 때도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었다고 주장되는 재창조 수준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1. 홍수 이전 세상
2. 지금 세상
3. 다가올 세상
굳이 세상을 나눌 필요도 없지만 재창조를 주장하는 모든 구절을 이렇게 보아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자연스럽다. 근거 없이 지금의 세상은 하나의 세상이고 그때의 세상은 재창조 이전의 세상이라고 우길 아무 근거가 없다.
━━━━━━━
부디 우리 모두가 편견과 왜곡 없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읽고 해석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성화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참고 링크(재창조 반박 글 모음) --------------
럭크맨의 극단적 세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http://new.keepbible.com/Cmn2/View/4CU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간극 이론, 갭 이론)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Nz 재창조 간극 이론 사실인가, 허구인가?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2 스코필드 성경의 창세기 재해석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0 재창조론에 관한 7가지 의문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1 And’를 살려 창세기 1장 읽기 http://www.keepbible.com/BQNA01/View/4OH 왜 둘째날에는 '좋았더라'가 없을까?http://www.keepbible.com/Cmn1/View/42u 누가 화석더미를 말했는가?http://keepbible.com/Cmn1/View/43L#c_14090 제가 알아본 replenish의 뜻http://www.keepbible.com/Cmn1/View/43G 작금의 논쟁 배경 설명
http://www.keepbible.com/Cmn2/View/4CW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을 동시에 들으면서
http://www.keepbible.com/Study5/View/3Zr
'replenish’의 진실과 성경의 창조 정리(재창조 반박 글 모음)
http://keepbible.com/Cmn2/View/4CX?page=2
2015-04-10 16:56:14 | 최상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 킵바이블을 통해 진리를 배우고 익히는 모든 형제/자매님 평안하신지요.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세상은 재창조된 것이라고 믿는 분들의 글과 강의를 접하며 그동안 생각했던 몇 가지를 소박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재창조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세상’이 아니고 ‘세상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된 것을 두고는 너무나도 단호히 이것들이 ‘멸망 당한 이전 세상’과 ‘재창조된 현 세상’을 가리킨다고 하며, 그 주장의 토대 위에서 계속해서 다른 성경 기록들까지도 자신들의 믿음에 짜 맞추다가 크게 실족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Through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
히브리서 11장 3절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11장 1절과 2절에 나와 있으며, 3절을 포함하여 뒤따르는 11장의 나머지 구절들 전체가 이 두 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확증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히11:1-2)
이제 이 말씀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3. 믿음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은 위의 내용 중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와 연관된 구절입니다.
3절을 읽어 보면, 두 개의 문장이 나란히 세 가지 내용을 대비하면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비된 부분을 손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아래에 도표화해 보았습니다.
이 구절은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에 의해 지어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을 통해 깨닫는” 것임을 먼저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우리가 알고 기억해야 할 원리, 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온 우주의 모든 것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ings which are seen’이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말하기 전에 쓴 바로 앞의 문장에서 등장한 ‘세상들이’라는 단어는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세상들이’에 ‘현 세상’ 외에 (재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옛 세상’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이미 멸망 당해 없어졌기 때문에 현재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보이는 것들’이라고 표현한 사도 바울의 의도와는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여기 나오는 ‘세상들’은 지금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결국 재창조를 믿는 분들이 주장하는 허구의 공간인 ‘옛 세상’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3절에서 ‘세상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뜻은 이미 히브리서 1장 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아들 하나님께서 친히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라고 번역된 영어 단어 ‘world’는 1차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 외에도 동물, 식물, 물고기, 곤충, 별들이 거하는 세상들도 다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려면 세상(world)을 세계(world)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위에 수많은 세계들이 있음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즉, 크게는 은하계, 태양계, 자연계, 해저 세계 등으로부터, 인간 세계, 동물 세계, 식물 세계, 광물계 등등 얼마든지 총칭적 용어인 ‘세계’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구분해 표현하고 있지요.
그럼 왜 간단히 ‘세상’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을 ‘세상들’이라고 했을까요? 재창조를 믿고 싶은 분들은 “단수를 썼더라면 재창조에 관한 추측이 없었을 텐데 복수를 쓴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또 다른 근거를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세상들’이라는 단어는 그 다음 문장에서 쓸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과 연계(대비)되어 사용된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총체적이고 개념적인데 반해 ‘세상들’은 구분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므로 ‘보이는 것들’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다 더 시각화해 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은하계’ 하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습니까? 따라서 ‘세상들’이라고 복수형 단어를 사용한 것이 그 문장이 의도한 의미에 더 적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세상들’이란 단어를 하나 보았다고 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 세상’ 외에도 ‘옛 세상’이 있었는데 멸망 당했다고 생각하면서 성경 말씀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자기 확신 가운데 주장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주석가들이 있었지만 단 한 사람도 이런 곳에 나오는 ‘세상들’을 재창조와 연관시켜 ’옛 세상’, ‘현 세상’ 등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우주 공간의 모든 것들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고 그 일을 예수님이 직접 하셨으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일을 안다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성경기록자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성경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주석은 요한복음 1장: 2-3절에 있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우리 예수님은 재창조를 알지 못하십니다.
사람을 지은 일 자체가 창조가 시작될 때, 우주 공간과 땅이 만들어진 그때, 즉 창세기 1장 1절에서 6일째 되는 날에 이루어진 것이지 재창조 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막10:6)
여기도 시작(beginning)을 창세기처럼 처음으로 바꾸어서 이해하시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처음부터 즉 창조를 시작하시는 그 처음에 사람들을 만드셨습니다.
재창조 같은 것은 우리 주님의 머릿속에 없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2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87
(*) 다음은, 재창조가 킹제임스 성경의 진리이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어 거기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기록된 대로 믿는 이들만 알 수 있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글에 대한 반박입니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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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재창조론자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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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아는 이들에게 주는 보너스
지금 있는 현 세상을 셋으로 나누면 노아의 홍수를 기준으로 옛 세상, 천년 왕국으로 기준으로 오는 세상(마12:32)이 된다. 천년 왕국을 기준으로 이 세상(천년 왕국 전)과 저 세상(천년 왕국)으로 구분한다(눅20:34,35). 옛 세상, 이 세상, 저 세상 이 셋이 현 세상이며 천년 왕국이 끝날 때 "현 세상"은 불로 멸망한다(벧후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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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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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이 이상해서 정확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지만, 불의 멸망 이후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므로 땅은 영원하다. 노아의 홍수 이전 세상도 물로 멸하셨지만 일정 기간을 거쳐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세상을 여러 개로 나눈다 해서 완전 멸망과 재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재창조를 합리화하기 위한 속임수다.
홍수 이전과 이후, 천년왕국 이전과 이후는 거주민이 다르고 환경이 다를 뿐 같은 세상이다. 노아에게 “모든 것이 죽으리라.” 하신 말씀도 정말 '모든 것'인가? ‘방주 속 생명들과 코로 숨 쉬지 않는 모든 것’을 제외한 심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세상을 멸하신 것이며(창6:13, 17), 노아가 맞은 세상이 새로운 세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명령을 다시 주신다(창9:1, 7). 그러므로 <물의 넘침으로 인한 멸망 = 노아의 홍수>의 공식이 성립된다.
천년왕국에 갈 때도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었다고 주장되는 재창조 수준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1. 홍수 이전 세상
2. 지금 세상
3. 다가올 세상
굳이 세상을 나눌 필요도 없지만 재창조를 주장하는 모든 구절을 이렇게 보아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자연스럽다. 근거 없이 지금의 세상은 하나의 세상이고 그때의 세상은 재창조 이전의 세상이라고 우길 아무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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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우리 모두가 편견과 왜곡 없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읽고 해석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성화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5-15 18:23:2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5-04-10 16:56:14 | 최상만
안녕하세요?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저는 계시록을 강해하며 계3:5의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는’ 것의 의미를 성실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기는 자 곧 그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 시절 강해한 내용을 되돌아보니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뒤 다시 글을 썼지만 역시 전체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 데 조금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999
이런 가운데 요즘 저희 교회에서 성경 Q & A를 오후에 진행하는데 성도들 중 이것을 궁금해하는 분이 다시 질문을 올려 주셨습니다. 이분의 질문의 핵심은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으면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고 구원이 취소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여기저기를 찾아보며 이 말씀에 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팀 라헤이(Tim LaHaye) 목사님이 설명해 놓은 것이 성경 전체를 아우르며 조화를 이루는 바른 해석인 것 같아 소개합니다. 라헤이 목사님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며 환난 전 휴거를 설명하는 분입니다. 환난 전 휴거에 대한 그분의 소설 <Left Behind>는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http://www.gnfi.org/articles/teachings-pdf-downloads/103-the-book-of-life
(다음 글은 라헤이 목사님이 지은 <Prophecy Study Bible>에 있는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런 글을 통해 성경을 통합적으로 보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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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생명책(book of life)을 살펴봅시다.
구약에는 생명책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사악한 자들)을 산 자들의 책에서 지우사 의로운 자들과 함께 기록하지 마소서(시69:28).
이 책은 하나님의 책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32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하지 아니하시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 하니
33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출32:32-33).
이 책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책이며 여기에는 우리의 몸이 모태에서 형성되는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눈이 아직 불완전한 나의 실체를 보셨으며 계속해서 형성된 나의 모든 지체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되 그것들 중에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 기록되었나이다(시139:16).
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죄를 짓고 용서받지 못한 자(출32:33), 즉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얻지 못한 자
2. 이기지 못한 자(계3:5), 여기서 ‘이기는 자’는 행위를 많이 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 즉 모든 성도를 말합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3. 성경 말씀을 고의로 변개한 자(계22:19)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대개 우리는 사람이 구원받을 때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것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면 누구든지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가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 있는 한 신자든 불신자든 그의 이름은 여전히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자 즉 불신자와 성경 변개자 같은 죄인들의 이름은 거기서 지워집니다.
한편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책이 등장합니다. 이 책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그 이름이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책의 이름은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계13:8).
여기의 어린양은 물론 세상 죄를 제거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요1:29).
‘어린양의 생명책’에는 그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일단 이름이 오르면, 즉 구원받으면 어린양께서 끝까지 그를 구원하실 수 있으므로 이름이 지워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심을 보건대 그분은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느니라(히7:25).
그러므로 ‘생명책’과 ‘어린양의 생명책’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책으로 생각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더럽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또 무엇이든지 가증한 것을 이루게 하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경우 그 이름은 처음부터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그의 이름은 살아있는 동안 기록되어 있던 ‘생명책’에서 제거됩니다.
--------- 결론 ---------
비록 구약 시대 이야기지만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를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 땅에서 이름이 있었지만 죽은 뒤에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모르십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아브라함과 나사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도 비슷한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안 뒤에 혹은 [하나님]께 알려진 뒤에 어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 속박 당하려 하느냐?
여기의 ‘너희’는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을 때 하나님에게 알려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구원받기 전에도 그를 아시지만(생명책으로), 구원받아야 비로소 그를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으로 아십니다. 갈4:9는 구원받지 않으면 그 사람을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말합니다. 즉 ‘어린양의 생명책’의 이름으로는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럭크맨의 영향을 받아 재창조를 굳게 지지하는 리건(David Reagan) 목사도 이에 대해서는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learnthebible.org/blotting-out-of-names-the-book-of-life.html
그의 마지막 권고가 인상적입니다. 영어로 그대로 적습니다.
If all men are in the book of life, then there is hope for them as long as they live. We need to strive to make sure that more of them continue to live--even when they have left the land of the living. We need to take to them "all the words of this life" (Acts 5:20) about how to trust in "the Prince of life" (Acts 3:15) so that their names will not be blotted from the book of life.
참, 질문을 주신 분에게 답을 드립니다.
어린양의 피로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토록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이름이 삭제되지 않습니다.한편,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이름은 살아있는 동안 기록되어 있던 ‘생명책’에서 지워집니다.
제가 처음부터 조금 더 잘 연구해서 알려드렸으면 혼동이 조금 덜 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세심하고 성실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 럭크맨이든 리건이든 라헤이든 그 누구든 극단적 세대주의 해석을 하지 않고 누가 봐도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온전한 의견을 제시하면 언제라도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가진 우리는 다만 그들의 몇몇 극단적인 주장만 피하면 됩니다.
2015-04-10 15:43:28 | 관리자
안녕하세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 메일 드립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seventy times seven’이라고 나와 있고 흠정역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Jesus saith unto him, I say not unto thee,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개역성경에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나와 있는데 개역성경과 함께 배열된 NIV에는 ‘seventy-seven times’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일흔일곱 번을 뜻하는데 작년에 교황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77번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또 같은 ‘seventy times seven’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 맞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로 주신 말씀이 이렇듯 달리 표현되기에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킹제임스 성경신자로써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혹시 이 문제에 대해서 킵바이블 사이트에 정확하게 정리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렇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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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질문자께서 지적하신 대로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70 x 7)까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7이 완전수이므로 이 말은 보통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영어로 된 다른 역본들을 살펴보았는데 유독 NIV만 77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NIV는 '곱하기'(times)를 '더하기'(plus)로 바꾼 셈이 됩니다. 이러고는 조금 미안했던지 각주에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우리 성경 그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보시면 됩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어, 영어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5-04-10 12:26:33 | 관리자
성경 Q&A 02 (입다의 딸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94
들어 보시면 아주 명쾌합니다.
저는 반대 입장에도 약간의 여지는 있으니 각자 믿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정동수 목사님의 이 강해를 듣고 그런 생각을 다 버리게 됐습니다.
성경의 사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회색지대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하나님이 명백히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속성 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한 가지 추가로 말씀드리면,
유대 전승문학 등을 보면 대개 입다가 딸을 죽인 것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세비우스 등 예수님 당대와 후대 정도의 기록들은
입다가 번제를 드린 것으로 알고 있으니 거의 진실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고, 그런 것들도 충분히 참고자료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록을 남긴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신약을 믿은 크리스천일까요?
대부분은 유대교인이며 예수님과 바울 등에 적대적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탈무드가 얼마나 신약과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딸을 죽였다고 하는 분들도
하나님이 인신제사를 불허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입다는 잘못된 서원을 회개했어야 했는데
고집을 부려 딸을 불태워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위의 강해에도 나오듯이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에
입다의 이름이 왜 기록되었을까요?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불법인 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서원을 이룰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그가 믿음의 선진일까요?
불법으로 인해 반드시 죽임 당해야 하는 죄인인데
멀쩡히 살아서 아브라함과 노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 기록들을 남긴 이들이 예수님을 인정하는 유대인들이라 해도
유대 전승문학보다도 우리는 신약성경을 믿습니다.
비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실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저지른 입다가
그 뒤에 회개한 사실도 없는데 바울이 저렇게 기록을 했을까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또한 유대문학에서는 재창조론 등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유대문학 이야기를 채택하지 않겠죠?
필요할 때만 가져오면 안 됩니다.
성경도 필요한 것만 가져오면 안 되겠습니다.
2015-04-08 09:37:24 | 김재욱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가 아닌가요?
다음은 어느 분이 질문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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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성경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태복음 기록자는 이 구절을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실상 이것은 스가랴서 11장 1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필시 마태의 실수나 킹제임스 성경의 모태가 된 공인 본문 즉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오류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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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이 구절은 흠정역이나 개역이나 다 같습니다.
흠정역: 이에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니라. 일렀으되, 그들이 값을 매긴 자의 가격 곧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자들이 값을 매긴 자의 가격인 은 서른 개를 취하여 [주]께서 내게 정하신 바와 같이 그것들을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도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성경 기록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기록 해석의 문제입니다. 차대식, 김대용 형제님께서 잘 답변해 주셔서 그대로 올립니다.
----- 차대식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마태복음 강해설교 74과 43:30 정도에서 설교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195
아래 내용은 강해설교 노트에서 발췌했습니다.
9-10절: 대언자 예레미야가 기록한 말씀이 아니다. 슥11:13 예레미야가 기록한 말씀과 그가 외친 말씀이 있다. 여기는 후자이다(슥7:7).
----- 김대용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차대식 형제님께서 너무나 명쾌하게 잘 설명해 주셨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첨언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9~10절은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레미야서에 가서 해당하는 말씀을 찾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스가랴서 7장 7절을 읽어보십시오.
예루살렘과 그것의 사방의 도시들에 사람들이 거주하며 형통하게 지낼 때에 또 남쪽과 평야에도 사람들이 거주할 때에 주가 이전의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그 말씀들을 너희가 들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서 ‘대언자들을 통해 외친 그 말씀들’이란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약 시대 활동했던 대언자들의 모든 대언 중에는 외침으로만 끝난 것이 있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경 기록으로 남겨주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일들도 낱낱이 모두 성경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확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요21:25).
그러므로 마태복음 27장 9~10절의 기록은 예레미야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레미야가 대언자로 활동하던 당시 외쳤던 말씀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스가랴 이전에 예레미야의 대언으로 마태에게 기록하게 하신 겁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문제가 없는 것을 의심과 불신의 눈으로 보기에 성경이 오류가 있는 책으로 여겨지고 걸림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악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다음의 글도 참조해 주십시오. *킹제임스 성경의 영광 8장: 본문 문제 2, 마가복음 1장 2절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30
윗글 중간에 보시면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 9절은 마가복음처럼 “기록된바”(As it is written)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었다.’고 진술한다. 성경 기록의 저자인 하나님은 누가 무엇을 기록하고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고 계신다. 간단히 말해 스가랴가 그 구절을 기록했다는 것은 결코 예레미야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스가랴는 이전의 대언자들이 말한 것에 주목하라고 이스라엘에 경고했다(슥7:7). 고대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의 영이 스가랴 안에 있었다.”고 말했다. 스가랴가 받았던 많은 것은 실제로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또 스가랴 이전의 대언자인 예레미야로부터 받은 것이다.”
도움이 되시기 바라며 봄볕으로 인해 화사하게 피어 미소 짓는 벚꽃처럼
진리의 말씀으로 기쁨과 평안을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5-04-07 13:52:01 | 관리자
2015년 4월 5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QIGaAd7xE5c
2015-04-07 11:07:57 | 관리자
2015년 4월 5일 (주일 오후)
https://youtu.be/-ay4HA3OS6w
2015-04-06 23:49:25 | 관리자
2015년 3월에도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최우수 성경으로 선정되었네요.
월간 베스트 1위, 주간 베스트 1위가 다 우리 성경입니다.
성도님들의 사랑과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http://lifebook.co.kr/final/bibles/bible_best.asp
2015-04-04 15:01:1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07
샬롬
2015-04-04 14:51:1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느 분이 “창25장의 팥죽은 콩 스프인가요?”라고 질문해 주셨습니다.
답: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창세기 25장 34절에는 야곱이 에서에게 빵과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사는 기록이 있습니다.여기서 팥죽은 영어로 ‘pottage of lentiles’입니다.
지금은 lentil이라 하지만 과거에는 lentile이라 하였습니다.네이버에 가서 렌틸이라고 치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옵니다.
렌틸 콩은 그 색상에 따라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갈색, 회색, 검은색 등으로 구분되며, 종종 반점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성경의 용례를 보면 렌틸은 콩 종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콩과(삼하17:28) wheat, and barley, and flour, and parched corn, and beans, and lentiles, and parched pulse,
역시 네이버에서 팥을 쳐 보면 팥은 빨간 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흠정역에서는 콩과 구분하기 위해 렌틸은 다 ‘붉은색 렌틸 콩’의 의미로 팥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역시 네이버 사전에서 죽을 치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국어사전, 죽: 곡식을 오래 끓여 알갱이가 흠씬 무르게 만든 음식.영어사전, 죽 1. porridge, gruel, pap
그래서 우리는 ‘pottage of lentiles’을 팥죽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을 고치지는 말고 원하시면 ‘렌즈 콩 스프’라고 보셔도 됩니다.
참고로 또 다른 콩 종류는 삼하17:18에 있는 것처럼 pulse가 있습니다. 다니엘이 먹은 것이 바로 pulse입니다(단1:12).
사전에 가서 보면 펄스는 콩 종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냥 콩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샬롬
2015-04-04 11:16:01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