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같은 창조를 두고 마19:4, 막10:6의 창조는 ‘사람의 창조’만 가리킨다고 하면 과연 어느 누가 이에 동의하겠습니까? 이것이 전형적인 극단적 세대주의입니다. 나누면 안 되는 것을 무리하게 나누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그 두 구절의 창조는 세상의 창조지요. 물론 거기의 ‘시작’(beginning) 혹은 ‘처음’ 역시 창1:1의 ‘처음’이지요.
성경대로 믿겠다고 하고 또 성경의 내장 사전대로 해석하겠다고 공언했으면 그리해야 합니다. 라킨, 럭크맨, 낙스의 생각을 집요하게 관철시키기 위해 이렇게 성경을 비틀면 그런 분을 추종하는 사람들만 결국 골탕 먹습니다.
명백한 것을 명백하게 받아들이며 내 생각이 성경과 대조해 틀리면 과감하게 내다버리는 사람이 성경 신자입니다.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한 이런 사람이 되자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샬롬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87
2015-03-31 17:41:21 | 관리자
현재 흠정역 성경으로 사역하고 계시다는 어떤 분께서 마태복음 19장 4절과 마가복음 10장 6절의 두 구절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해당 구절들의 문맥상 본래 의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시작부터(from the beginning)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다는 뜻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이분의 주장에 따르면 얼핏 위 구절들은 재창조론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감히 귀한 분께 이렇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위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 글을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정독해 주십시오.
제가 윗글에 논란이 된 부분만 아래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위에 있는 막10:6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이 [재창조의 시작이 아니라] 창조의 시작부터 즉 창조가 시작되며 여섯째 날에 지어졌다고 하십니다. 마19:4도 동일합니다.”
자 보십시오.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 글이 말하고자 하는 본 취지는 예수님께서 친히 마 19: 4와 막 10:6에 사람의 창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왜 '재창조'가 아닌 '창조'라고 명시하여 말씀하셨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조의 시작부터(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는 물론 맨 첫 사람인 아담과 이브가 창조된 바로 그 시점(시작)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두 번째 창조(재창조)가 아닌 ‘(단 한 번 있는 첫 번째) 창조의 시작부터’ 5일이 지나고 그 후 여섯 번째 날을 의미합니다(창1;27).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서도 간극 이론과 재창조론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사람의 창조를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사이든 혹은 창조의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 사이의 어디에든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시작과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세상이 창조되고 맨 처음 칠일 동안의 여섯 번째 날은 같은 날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윗글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나 문제를 제기하는 그분이나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글을 찬찬히 읽으면 그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 왜 동문서답식의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인가요? 답답하기 이를 때가 없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영어를 잘 안다는 그분의 주장대로 마 19: 4와 막 10:6 등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시작부터’만을 의미하고 그래서 재창조가 맞다고 가정해도 왜 예수님께서 두 번째 다시 창조된 사람, 즉 재창조된 사람을 재창조의 시작부터가 아닌 창조의 시작부터라고 명시하셨나 하는 겁니다. 물론 해당 구절에서는 사람의 창조의 시작만을 의미하기에 굳이 재창조를 거론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한다면 일단은 정말 그런가 생각해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자! 그런데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타당성을 가지려면 복음서 어디에서든 예수님께서 재창조에 대해 직접 언급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신 기록이 있어야 말이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의 세상이 다시 창조되었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와 관점을 다시 조정해야 할 만큼 대단히 큰 사안임이 분명합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가장 역점을 두어 중요하게 행하신 일이 바로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마4:23,마5:2,마7:29,막6:2,막10:1, 눅5:3,눅13:10.......).
하나님의 말씀 안에 감추어진 모든 신비와 바른 교리에 대해 누구보다 정통하신 말씀 자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과연 럭크맨이나 낙스 목사님보다 지혜가 부족하고 아는 것이 적어 많은 시간과 엄청난 열정을 가르치시는 일에 쏟으셨음에도 재창조에 대해 단 한 번도 거론하고 가르치시지 못한 것일까요? 단순하고 명쾌하게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성경 기록을 살피면 너무도 분명히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재창조에 대해 일절 거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지금의 사람이 재창조되었다는 것을 명시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실 수 있는 기회인 마 19: 4와 막 10:6 등에서조차 재창조를 전혀 거론하시지 않으시고 지나치셨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과연 이것이 재창조론을 지지하는 정황입니까?
이러한 성경 기록들을 보았을 때 단순한 진리를 믿는 맑은 정신의 성경 신자들은 간극과 재창조론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주장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억지로 꿰어 맞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간극과 재창조를 주장하거나 두둔하고 싶은 분들은 제발 지금 즉시 두 손을 지금 바로 가슴에 얻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한국 사람이라면 우선 기본적인 국어 독해능력이 갖추어져야 좋은 성경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원리를 부디 잘 헤아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5-03-31 13:59:38 | 김대용
Jay Bolan의 글을 PDF 파일로 올렸습니다.
샬롬
2015-03-31 13:50:36 | 관리자
참고로 흠정역 성경에는 복수의 경우 같은 말인데도 '들'을 붙인 경우도 있고 안 붙인 경우도 있습니다. 위에서 든 예처럼 '모든 사람', '모든 사람들'이 다 쓰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읽힘성 등을 고려한 번역자의 의도가 있음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꼭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으로 해야겠다는 의견이 우세하면 추후에 그렇게 교정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요점은 이런 것이 번역의 오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연약한 성도들을 요동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샬롬
2015-03-31 13:07:35 | 관리자
1회 강해를 올렸습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745
2015-03-31 13:02:0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난 주 금요일 저녁부터 야고보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교리 서신이 아니라 실행 서신입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매우 유용한 책입니다.
구원받은 분은 언행이 선해야 합니다.
말이 거칠고 행동이 난폭하면 정말로 구원받았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를 통해 몇 달 동안 좋은 강해와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31 13:01:34 | 관리자
재창조 간극 이론 사실인가, 허구인가?
세미트라와 보우(H. B. Cemitara and G. D. Bouw),이정원 번역, 정동수 편집
(*) 이 글은 세미트라와 보우가 지은 ‘간극 이론’(Gap theories of creation)의 주요 골자를 번역하고 편집한 것입니다. 제대로 편집된 글(각주 포함)을 보시려면 같이 올리는 PDF 파일을 다운받기 바랍니다. 성경을 사용한 간단한 반박은 다음을 참조하기 보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2
도입
우리는 모두 창조론자와 진화론자 간의 논쟁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며 그들 간에 불꽃 튀는 법적 전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창조론자들은 창조와 진화의 두 모델을 가르치는 것을 합법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진화론자들은 진화만이 유일한 모델로 제시되고 배우며 믿도록 허용하는 법의 제정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물론 창조론자들의 시도는 출발부터 불리했는데 이는 그들의 주장에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처음부터 창조론 모델만이 법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모델이 되도록 노력했다면 이 시도에서 더 큰 성공을 이룰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치열한 논쟁 끝에 중도에서 타협할 수 있는 여지 즉 두 모델 접근법으로 타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크리스천들과 무신론자들 양쪽 모두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간극 이론 즉 ‘파괴-재창조’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자기 입맛대로 성경의 권위와 과학을 혼합하기 원하는 집단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몇 가지의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 대부분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을 문자 그대로 취하며 많은 수가 여호수아기 10장 13절도 문자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되었다’(created)와 같은 단어들에 관한 한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 망설이며 창조 대신에 ‘재창조되었다’(recreated)와 같은 애매모호한 말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성경과 과학이 무리하게 혼합된 일종의 돌연변이라 할 수 있는 간극 이론은 지난 세월 결과적으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성경을 오해하며 진리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성경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확실한 돌연변이 이론 즉 20세기 초반부터 70-80년 동안 크리스천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이론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소수만이 선호하며 믿고 따르는 간극 이론을 다루려고 합니다.
간극 이론이란 무엇인가?
간극 이론 신봉자들은 물론 격렬하게 부인하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 이론은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의 한 형태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이 창조의 6일은 ‘6개의 임의의 긴 시’간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생물들의 진화를 위한 긴 시간을 임의대로 성경에 삽입합니다. 반면에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진화에 필요한 모든 시간을 창세기 1장에서 창조가 다시 시작되기 전인 ‘아담 이전 세상’(pre-Adamic world)으로 역시 자기들의 입맛에 맞추어 임의대로 밀어 넣습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어떤 직접적이고 명확한 증거도 없이,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긴 시간을 성경 기사에 삽입합니다. 이런 점에서 간극 이론은 유신론적 진화론의 교묘한 변종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간극 이론에는 대략 몇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극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간극 이론을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하나의 간극을 인정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창세기 1장에서 날들은 문자 그대로 취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도 할 것입니다. 후자 가운데는 20세기 초반 간극 이론을 널리 알린 스코필드(C. I. Scofield)가 있습니다. 스코필드는 창세기 1장, 예레미야 4장, 이사야 14, 24, 45장, 에스겔 28장, 35장에서 스스로 뽑은 단어나 구절들을 조합해서 그것에 근거해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한편 현대 간극 지지자들은 스코필드 모델을 기본 바탕으로 사용하며 거기에 창세기 6장, 베드로후서 2, 3장, 고린도후서 4장, 마태복음 13장에서 나온 구절들을 더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태의 간극 이론이든 대개는 동일하게 무한대로 긴 시간의 간극이 창세기 1장의 첫 두 절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 무한대의 긴 기간이 어디 위치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개의 주요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견해는 그 기간을 성경이 시작되기 전인 창세기 1장 1절 앞에 놓습니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교묘하게 표면적으로는 간극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간극이 있습니다. 둘째 견해는 그 기간을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삽입합니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창세기 1장 1절이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기간 전에 존재했던 ‘원래 지구’(혹은 원시 지구)에 대해 말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2절은 원래 지구의 멸망을 묘사하며 1장 3절부터는 재창조를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1장의 1절과 2절 사이에 긴 기간의 간극이 있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간극 이론’(Gap theory)이라 불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1절과 2절 사이 가상의 기간은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현대 지질학이나 생물학 이론과 맞추기 위해 사람들이 고안한 것입니다. 이러한 ‘간극 이론 출생의 비밀’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 수월하고 정확하게 이 돌연변이 이론의 정체에 대해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의 간극을 어느 지점에 놓든지 간에 간극 이론은 그때 존재했던 세상(지구)이 하나님의 천사들과 사탄의 천사들 간에 있었던 전쟁으로 끝났다고 가정합니다. 그 전쟁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사탄의 천사들을 천국에서 추방하시고 지옥에서 그들을 사슬로 묶은 다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지구의 표면을 멸망시킨 홍수를 보내셔서 그 당시 이상적이고 죄가 없던 세상에 거주하던 모든 짐승들과 사람들 - 혹은 지금의 사람과는 다른 어떤 인류들 - 을 죽이심으로써 끝이 났습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화석의 기록들이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그때의 원래 세상을 멸망시켰던 홍수를 보여 준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진화론자들의 균일론 원리(Uniformitarian principle) 즉 ‘세상과 우주의 모든 것이 균일하게 변하다’는 원리를 적용하면서 화석 기록의 일부나 혹은 전부가 아담 이전의 이상적이던 세상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한대의 시간을 입증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히 어떻게 죽음이 그 세상으로 들어왔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는 이론에 대해 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스코필드, 라킨(Clararene Larkin), 럭크맨(Peter Ruckman), 낙스(James Knox) 등의 유명한 분들이 이런 이론을 지지하며 국내에도 이들의 영향으로 ‘파괴-재창조’를 성경 해석의 근간으로 삼으려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역자가 먼저 한 가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재창조 이론과 몇몇 극단적 주장을 제외하고는 스코필드, 라킨, 럭크맨, 낙스 등이 모두 훌륭한 성경 신자들이며 참으로 많은 좋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는 다만 그들이 주장하는 재창조 이론이 인간이 만들어 낸 구시대의 유물로서 성경과 맞지 않음을 보여 드리려 합니다.
간극 이론의 역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극 이론이 18세기 초반에 찰머스(Thomas Chalmers 1780-1847)에서 유래되었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이 이론은 라이엘(Charles Lyell)의 정치학 논문인 「지질학 원리」(The Principles of Geology)라는 책으로 인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책은 영국의 왕권을 전복시키려고 계획된 책략이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팔리(William Paley 1743-1805)의 논쟁에 대항하려고 쓴 책으로 왕권신수설을 찬성하는 자연 철학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는 허턴의 생각을 발전시켜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지질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한 뒤 지구에서는 과거에도 현재와 같은 자연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동일과정설(균일론)에 입각하여 그때까지의 6,000년 창조설을 대적하며 그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의 부제(副題)는 ‘지구 표면의 과거의 변화를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여러 원인에 의해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책은 다윈이 비글호의 항해 중에 지참했을 만큼 다윈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었습니다. 결국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은 현대 지질학 연구(사실은 현대 진화론)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신학자들은 라이엘의 진화론적 사고의 교묘한 속임수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분명하게 어떤 과학적 논쟁을 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간극 이론이 라이엘에 대한 대답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즉 균일론 원리가 기독교를 대적하며 성난 파도같이 몰아닥치자 그 당시 이를 두고 고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과학과의 화해를 위해 간극 이론으로 돌아섰던 것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우주의 나이가 약 6,000년 정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의 긴 연대와 타협하려면 성경 기록을 억지로 비틀어 수십만 년 혹은 수십억 년의 기간을 성경 어딘가에 끼어 넣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가장 적게 훼손시키는 방법은 성경이 본래 침묵하고 있는 곳에 그것을 삽입하는 것이었습니다.
1859년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생물 진화론을 출판한 뒤 신학자들은 이제 생물학적 진화와도 투쟁해야 했습니다. 대개 그들은 무시하는 방법을 더 좋아했지만, 심하게 압박을 받을 경우에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따란 긴 기간을 창세기 1장의 간극이라는 ‘어떤 특정하지 않은 시간’으로 끼워 맞추곤 하였습니다.
특히 간극 이론은 1909년에 나와 1917년에 개정된 ‘스코필드 주석 성경’에 의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약 70년 동안 전 세계 거의 모든 근본주의 성도들의 독점적인 진화론 퇴치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오는 개정판 스코필드 성경은 더 이상 간극 이론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론을 배격하는 특별 창조를 먼저 말한 뒤 간극 이론을 말합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6
사실 간극 이론은 특히 과학을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기원에 대한 성경 기록이 권위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학을 수용해야 한다고 느낀 사람들에게 특별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간극 이론과 지질주상도
원래 간극 이론의 임무는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증거로 제시하는 지질주상도((geologic column)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질주상도는 진화론자들이 추정해서 만든 가설의 암석층 즉 수십억 년 이상 쌓였던 암석층에 대한 가설적 순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질주상도: 어떤 지역의 지층에 대하여 퇴적암과 화산암, 관입암 등이 겹쳐진 차례, 즉 층서를 여러 가지 기호와 색으로 표시한 그래프를 말한다. 지역 전체의 층서를 나타내는 것을 종합 주상도라고 하는데, 보통은 수직의 직사각형에 오래된 지층부터 새로운 지층의 순서대로 지층을 겹쳐 그려서, 각 지층의 시대나 암질의 특징, 화석의 생성위치, 지형의 접촉면의 위치 등을 나타낸다. 지질조사를 할 때 인접지역의 지층과 비교하여, 같은 지층을 발견하거나 같은 시대의 지층의 두께나 암질의 변화를 조사하는 데 유용하다.
사실 진화론자들의 지질주상도 가설이 주장하는 순서대로 암석이 존재하는 곳은 지구상에서 오직 두 지역뿐이며 그 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암석층의 순서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 완성한 이 엉터리 지질주상도 하나로 이후에 발견되는 모든 화석은 그것에 대입시켜 연대를 자동 결정해 버립니다. 어떤 화석이 언제 것이냐 하면 지질주상도에 맞춰 보라고 하고, 지질 주상도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면 거기서 그 화석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순환논리의 맹점을 지녔지만 진화론자들에게는 아주 편리한 도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지질주상도가 간극 이론과 합치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현대 간극 이론에서는 ‘화석의 증거’ 즉 ‘화석의 기록’을 아담 이전 지구에서 진행된 과정들이나 하나님의 천사들과 사탄의 반역하는 천사들 간에 일어났던 전쟁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주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첫째 문제는, 화석들이 지금의 세상 이전에 존재하던 세상을 파괴시킨 대홍수에 다 묻히게 되었다면 왜 도대체 화석들이 지금도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석들이 아담 이전의 세상이 존재하던 기간에 지층에 쌓였다면 그 세상을 파멸시킨 홍수가 그렇게 큰 손상을 입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창1:2의 ‘형태가 없다’(formless)는 단어를 지금 세상 이전의 홍수를 통한 결과로 땅(지구)이 형태가 없게 되었다는 데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지구의 형태가 없어질 정도의 홍수를 통한 대격변이 실제 있었다면 그때 존재했던 동식물들이 죽어 화석이 되어 지층에 쌓이고 오늘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화석들이 그 전쟁을 끝나게 한 홍수가 진행되는 동안 형성되었고 그 전쟁이 창세기 1장 2절이 말하는 것 같이 지구를 ‘형태가 없게’ 만들었다면 암석들에 있는 화석들도 다 그 형태를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존재하는 화석들은 다 형태가 있습니다.
둘째 문제는 화석들이 현재 땅의 바로 표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수백 미터, 수천 미터 밑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만약 간극 이론이 역사의 진실이라면 지구는 얼마나 깊은 밑 부분까지 형태가 없고 비어 있게 되었을까요? 만일 지구 표면이 밑으로 수천 미터까지 형태가 없이 비게 되었다면, 지구가 다시 굳어지면서 화석들이 암석에 묻힐 때까지 그 화석들이 허공에 둥둥 떠 있거나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이론의 문제는 지구가 셋째 날이 되기까지는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는 점 때문에 발생합니다. 도대체 그 무엇이 암석들을 텅 빈 허공에 매달려 있게 했을까요? 그러한 무엇이 없었다면 - 당연히 성경은 그런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 당연히 암석들은 가라앉고 화석들의 모체인 동식물의 시체는 위로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화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셋째 문제는 노아 홍수에 대한 증거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지구 표면에서 두 개의 퇴적층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첫째 것은 아담 창조 이전 세상의 대파괴와 첫째 홍수에서 나온 것으로 당연히 깊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둘째 것은 그것보다는 덜 격렬했던 둘째 홍수 즉 노아 홍수의 흔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그러한 화석 기록을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떤 화석 기록도 두 개의 홍수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성경에서 명료하게 언급된 유일한 홍수이기 때문에 오늘날 발견되는 화석의 증거는 당연히 두 개의 홍수가 아니라 하나의 홍수를 지지합니다.
마지막으로 간극 이론이 화석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도 주지 않음을 인식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진화론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친히 화석들을 암석 속에 만드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는 과학과 성경 기록 둘 다에 어긋납니다. 그 이유는 창조 세상이 합리적인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사1:18) 창조 세상은 합리적이라고 성경 기록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스코필드는 화석 기록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로 간극 이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석들을 원시 창조(지금 세상 이전의 창조)로 밀어버리십시오. 그러면 과학과 창세기 우주 창조와의 어떤 갈등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분자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진화 이론과 간극 이론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여전히 있다고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화석의 여러 층들이 서로 다른 시대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지질주상도에 있는 한 층은 그 충에서 발견된 화석 종류에 의해 결정되는 그것 자체의 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어떤 화석이 더 단순하거나 더 원시적인 것으로 판정되면 그것은 ‘더 오래된 화석’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것은 덜 진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뼈가 없는 무척추동물들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다음으로 어류가 나오고 진화가 되면서 양서류, 파충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진화된 포유류 화석이 나옵니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의 이런 연대 추정은 곧장 스코필드의 주장과 부합됩니다. 따라서 간극 이론은 스스로 진화를 비난하면서도 지질주상도와 그것이 지지하는 시대들을 받아들이므로 사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초자연적인 파괴와 대격변을 수반하는 간극이 성경과 진화론자들의 지질주상도를 화해시킨다고 해도 현재 지질학자들은 그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전 세계적인 재난이 지질 주상도를 만드는 암석과 화석들을 형성했다는 견해에 반대를 표명합니다. 그런 대격변은 오늘날까지도 지질학에서 신성불가침의 원리로 알려진 균일론 원리(홍수 격변론에 반대하는 균일 변화 원리)에 직접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반역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 때문에 화석들이 형성되었다면 현대 지질학의 견해와는 반대로 지질주상도는 급속도로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파멸-재창조’의 간극 이론은 우리가 오늘날 바위나 화석들에서 보는 것에 대해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고 입증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주장하듯이 지구가 창세기 1장 2절에서 형태가 없게 되었다면 암석층들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암석들에는 그 어떤 (온전한) 화석들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형태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소필드(Jack Sofield)는 간극 이론을 ‘자살 개념’이라고 부릅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질학적 시대 이전이나 이후에 루시퍼를 벌하기 위해 사용된 징벌/재앙에 관해 간극 이론이 무어라고 논리를 펴든지 간에 간극은 자기 부정적입니다. 즉 그 이론을 만들어낸 바로 그 개념 자체가 그것에 의해 소멸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살 개념’으로 언급될 수 있습니다. 논리 면에서의 이러한 어려움과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딜레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극 이론이 성경 말씀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라고 말씀하시는 이성적인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간극 이론과 넷째 날의 창조
스코필드는 세 가지 창조 행위를 허용합니다. (1) 하늘들과 땅의 창조, (2) 동물 생명의 창조, (3) 인간의 창조. 즉 그는 첫째 창조는 연대가 없는 무한대의 시간 속 과거로 넘겨버렸고, 나머지 두 개는 자기가 창세기 1장 3절부터 시작된다고 추정한 지구(땅)의 창조로 넘겼습니다. 그는 출애굽기 20장 11절이 하나님께서 창조의 6일 동안 하늘들과 땅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을 거부하고 빛, 궁창, 해, 달, 별들과 식물들이 이전 세상에서 창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출20:11)
그는 그때의 파괴가 완벽해서 어떤 빛도 지구의 표면에 다다를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수증기층이 지구를 덮어 태양이나 달로부터 오는 빛을 막았으며, 넷째 날이 될 때까지 그 빛들이 지구를 관통하지 못하게 했다고 가정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사실 넷째 날에 아무것도 창조하시거나 만들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제기되는 질문들
성경 기록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임의대로 화석들이 간극이나 무한대의 긴 기간 동안 형성되었다고 자동으로 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식물, 동물, 사람은 셋째 날, 다섯째 날, 그리고 여섯째 날이 되어서야 창조되었으며 그전에는 창조되지 않았음을 창세기 1장이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현시대 퇴적암들 내의 화석들이 가상의 ‘첫째 창조’ 즉 아담 이전의 창조 세상에서 살던 모든 생명 형태들의 화석들이 맞는다면 이것은 과거 무한대의 시간에서 고통과 죽음이라는 비극이 지속하였음을 증언해 줍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면 과연 그 세상에 사망이 들어오게 한 원인 제공자 즉 첫째 창조 세상에서 과연 처음 죄를 지은 존재는 누구일까요? 루시퍼의 반역이 심판의 징벌을 불러일으키기 전에 왜 수억 년의 시간이 지나갔을까요? 그렇다면 그 징벌도 루시퍼의 반역 때문인가요, 아니면 이름도 알지 못하고 성경에 기록도 없는 그 첫째 죄인 때문인가요? 그러면 성경의 첫 사람 아담은 죽음이 불러온 화석 무덤 위를 걸어 다녔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한 사람 아담에 의해 죄가 임하고 그 결과 사람과 창조 세상에 사망이 임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또 온 창조 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롬8:22)그러므로 아담 이전에 심판으로 인해 사망이 임하고 화석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성경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간극 이론과 성경 기록들
이제부터 우리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애용하는 몇 구절들을 설명하려고 합니다.이런 구절들을 설명하기 전에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보통 잘못 사용하고 있는 두 개의 영어 단어에 대해 잠시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세상’(world)이란 단어는 지난 200년 동안 의미 면에서 크게 변했습니다. 1933년 이전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발견되는 세상에 대한 첫째 정의는 ‘인간의 존재: 이것의 기간’(human existence; a period of this)입니다. 둘째 정의는 ‘지구 또는 그것의 영역: 우주 또는 그것의 일부분’입니다. 셋째 정의 즉 마지막 정의는 ‘지구의 거주민들 또는 그들의 한 부분’입니다. 1933년 판을 보면 첫째 정의는 네 단을 차지하고, 둘째 정의는 세 단과 삼분의 이를 차지하며, 셋째 정의는 여덟 단을 차지합니다. 그것은 1933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첫째 정의가 ‘지구’입니다. 그 이유는 현대 사전들이 더 이상 한 단어가 의미하는 여러 가지의 뜻 전부를 말하지 않고 가장 보편적인 용례만을 기술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행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첫째 정의는 지표면에 살던 사람들 혹은 사람들의 시대를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는 이제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성경 기록에서 ‘세상’의 첫 용례는 사무엘상 2장 8절에 나옵니다.
그분께서 가난한 자를 먼지에서 일으키시며 거지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사 통치자들 가운데 앉게 하시고 또 그들이 영광의 왕좌를 상속받게 하시나니 이는 땅의 기둥들이 주의 것이요, 또 그분께서 그것들 위에 세상을 세우셨기 때문이라.
분명히 ‘세상’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땅의 표면 즉 땅의 기둥들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 기록이 세상에 대한 정의를 땅의 사람과 창조 세계로 그 뜻을 확대시키지만 세상은 결코 땅과 하늘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의 정의에 의하면 ‘아담 이전 세상’을 주장하는 것은 곧 아담 이전에 땅에 사람이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땅 위에 사람이 없었다면 아담 이전의 ‘세상’이 아니라 ‘땅’(지구)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따라서 간극 이론은 성경적 세상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replenish’라는 동사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신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의 원래 의미는 ‘완전히 혹은 충만하게 사물, 동물 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입니다. 덧붙이자면 replenish에 대한 이 정의는 1533-1660년 즉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되던 당시의 언어생활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의미였습니다. 아담 이전 세상 옹호자들이 1700년대 후반에 이 말을 ‘다시 채우다’(refill)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까지 replenish라는 단어는 ‘다시 채우다’라는 단어의 동의어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기 바랍니다.
http://keepbible.com/Cmn2/View/4CX?page=2
창세기 1장 28절의 경우 그 배경은 주님께서 사람을 위해, 사람 전에 창조하셨던 환경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9장 1절에서 그 단어의 같은 용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그곳에서도 식물들은, 창세기 8장 11절에서 비둘기가 되돌아 올 때 가지고 온 올리브 나무 잎사귀가 입증해 주는 것처럼, 방주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 준비가 되어 회복되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땅을 충만히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창1:28과 9:1을 보면 replenish가 거주자들을 위해 준비된 환경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에 간극 지지자들은 결코 그 단어를 아담 이전 지구의 창조를 위한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영어와 히브리어 자체가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간극 이론에 사용된 증거 본문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어떤 사람들은 자기만의 편향된 애완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묘하게 왜곡해서 해석합니다. 그리하는 이유는 그의 애완 이론을 지지해 주는 명백한 성경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애완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심지어 성경 본문이 잘못되었다거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이론을 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 역시 자기들의 애완 이론을 위해 창세기 1장 전체의 번역 혹은 특별히 창세기 1장 1-2절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1절을 봅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언어학자, 인류학자, 그리고 간극 이론 지지자인 커스탄스(Arthur Custance)는 이 절에 대해 “이 절은 당연히 지금처럼 ‘처음에’로 번역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커스탄스는 히브리어 모음 표시가 ‘원어’에는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더불어 커스탄스는 적절한 번역은 ‘최초로’(In first) 또는 ‘우선은’(To begin with)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초기 번역이나 권위도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는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느낌을 제외하고는 현재 본문 즉 ‘처음에’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 권위는 없다.
여기서 핵심은 창세기 1장 1-2절에 대한 비평이 하나의 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느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could be’와 ‘may be’를 주로 사용하며 26페이지까지 자기 의견을 개진한 뒤 커스탄스는 조심스럽게 창세기 1장 1-2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전 상태에서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을 완벽하게 하셨다. 그러나 땅은 폐허가 되었고 황량해 졌으며 심판의 어둠이 그 표면 위에 있었다.
자신의 논문을 통해 커스탄스는 성경 사본과 과거 문헌에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음을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2절에서 번역 오류를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지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성경 기록의 보존 교리(시12:7)가 내포하고 있는 연속성을 만족하게 할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기에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 - 봐브(vau)성경 기록에 아담 이전 세상에 대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세기 1장 2절을 시작하는 히브리어 접속사 ‘봐브’(vau)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을 합니다. 일단 여기서 봐브는 접속사이거나 이접 접속사이며 따라서 ‘그리고’ 혹은 ‘그러나’를 의미합니다. 봐브는 히브리 알파벳에서 여섯째 글자이며 구약성경에서 약 28,000번 나오는데 그중에서 25,000번은 접속사인 ‘그리고’로, 3,000번은 이접 접속사인 ‘그러나’로 번역됩니다. 성경의 이런 용례를 보면 봐브는 이접 접속사보다는 접속사로 8배나 넘게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논문을 쓰면서 우리가 자문을 구한 대다수의 히브리 학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봐브는 ‘그러나’가 아니라 ‘그리고’가 정확한 번역이라고 말합니다. 오리겐의 부패한 ‘70인역’(Septuagint)을 제외한 모든 고대 번역도 이와 같습니다. 2절 시작 부분을 ‘그러나’라고 번역한 70인역(LXX)은 오리겐이 좋아했던 ‘이전 세상 모델’(pre-world model)을 따라 그렇게 번역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 기록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던 그리스 신화를 반영하여 이 단어를 ‘그러나’로 번역하기를 원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 - Was or Became?창세기 1장 2절의 첫 글자가 ‘그리고’냐 ‘그러나’냐 하는 논쟁은 그 절의 넷째 단어인 ‘was’와 비교하면 그리 영향이 크지 않습니다.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대부분의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이것을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로 읽으려 하지 않고 여기의 ‘was’를 ‘became’으로 바꾸고는 “그러나 땅은 형태가 없게 되고 비게 되었다”로 읽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상태를 나타내는 was를 사용하면서 결코 땅의 상태의 변화를 나타내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믿으려면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로 믿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 ‘창조하였다’(Created)와 ‘만들었다’(Made)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여러 논문을 써서 히브리 단어 바라(bara)는 무에서부터 유를 창조한다는 의미이고, 히브리어 아사(asah)는 ‘만들다’ 또는 ‘형성하다’는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두 개의 다른 단어들이며 완전히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창세기 1장 26절에서 말씀하시고 다음 절에서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일한 행위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개의 단어들이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들을 지적해서 보여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꼭 지적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지구를 만들기 위해 이미 파괴된 이전 땅의 물질을 사용하셨다면 하늘과 땅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가 아니고 기존에 있던 물질로부터 나온 개혁이어야 하고 그래서 창세기 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모두가 ‘창조하다’ 대신 ‘만들다’로 기술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 앞에 간극을 두려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1절에 ‘창조하셨다’(created)를 사용하는 것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의 주장이 성경과 부합하려면 1절은 ‘만드셨다’(made)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또 1절과 2절 사이에 간극을 두려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창세기 1장 3절 이후에 나오는 ‘창조하다’라는 단어를 모두 ‘만들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 전체가 이전에 창조된 것에 대한 재창조나 회복을 설명한다면 왜 성경은 ‘create’와 ‘make’를 다 사용할까요? 계시록 10장 6절은 ‘창조하셨다’라는 단어로 창세기 1장 전체의 창조를 총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 곧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을 두고 맹세하기를 더 이상 시간이 있지 아니하려니와
간극 이론 지지자들의 탁월한 정신은 ‘원본’은 말할 것도 없고 킹제임스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개혁 성경 번역에서 create와 make의 ‘오류들’을 수정하려는 열정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정이 커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창세기 1장 - 해와 달과 별들그다음으로 해와 달과 별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처럼 이러한 천체들이 아담 이전 지구의 멸망 이전에 이미 창조되어 존재했다고 가정한다면 당연히 그것들은 넷째 날에 창조되지도, 만들어지지도, 형성되지도 않았어야 합니다(창1:14-19). 그런데 창세기 본문은 이런 천체들이 넷째 날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창조되었다’는 말은 사용되지는 않았는데 이 말은 25절의 짐승과 26절의 사람에게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짐승과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을까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물로 된 덮개나 구름이 땅의 표면으로부터 이러한 천체들을 숨겼으며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그 장애물을 제거하셨다는 황당한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둘째 날의 궁창은 대기권의 재창조를 말하며, 흐릿하게 보이도록 만든 그 장애물은 궁창 위에 있는 물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창조부터 홍수까지 수증기나 얼음 덮개가 계속해서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그 덮개가 넷째 날에 투명하게 되거나 반투명하게 만들어졌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 주는 간단명료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천체들을 하늘의 궁창 위가 아니라 궁창 속에 두셨다”(17절)는 점입니다. 또한 간극 이론을 주장하려면 ‘드러내셨다’를 포함하도록 ‘만드셨다’(Made)는 말의 의미를 수정해야 합니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Without Form, and Void) 창세기 1장 2절에서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라는 말은(히브리어 ‘토후(tohuw)와 ’보우‘(bohuw)) 성경 기록의 다른 두 곳에서도 나옵니다.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이사야 24장 1절에 이 말이 섞여 나오지만 히브리어 토후와 보우는 이곳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형태가 없고 비어 있다’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보라, 주께서 땅을 텅 비게 하시며 피폐하게 하시고 뒤집어엎으시며 땅의 거주민들을 널리 흩으시리니
대신에 ‘바카크’(baqaq)와 ‘바라크’(balaq)라는 히브리어가 이사야 24장 1절에서는 각각 ‘텅 비다’와 ‘피폐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넓은 맥락에서 보면 이사야 24장 1절은 미래 사건이지 아담 이전 땅에 대한 회상 장면이 아닙니다.
또한 창세기 1장 2절의 ‘토후’와 ‘바후’는 예레미야 4장 23절과 이사야 34장 11절에 함께 나옵니다.
내가 땅을 보니 보라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으며 하늘들을 보니 그것들에는 빛이 없었고(렘4:23)다만 가마우지와 해오라기가 그것을 차지하며 또 올빼미와 까마귀가 그것 안에 거하리니 그분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돌들을 팽팽히 드리우실 터인즉(사34:11)
이 둘 중에서 예레미야 4장 23절만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로 번역되었고 이사야서의 구절은 ‘혼란’과 ‘공허’로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만 제외하고 다른 두 구절이 심판과 파멸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창세기 1장 2절도 심판의 결과를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맥락에서 볼 때 다른 두 절들이 미래 일들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예레미야 4장 23절이 창세기 1장 2절과 가장 비슷하게 번역되었지만 예레미야서에서 표현된 파괴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파괴가 아닙니다. 간극 이론이 말하는 창세기의 파괴는 예레미야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홍수(큰 물)를 포함하며 이 물은 아담 이전의 사람들이 거주했던 땅과 모든 도시들을 완전히 소멸시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4장 23절은 이사야 24장의 사건들처럼 미래에 있을 심판을 말합니다. 즉 거기의 상황은 오래전 과거에 발생했던 창세기 이전의 어떤 기록이라기보다는 계시록에서 묘사된 미래의 사건들입니다.
예레미야와 이사야서의 심판의 대상들은 이스라엘과 에돔이며, 온 세상이나 특히 아담 이전의 종족은 더욱 아닙니다. 그 책들에서 언급된 심판들은 특정 민족이나 특정 장소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그 땅(the land) 즉 이스라엘 땅의 생존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27절에서 “내가 완전히 끝을 내지는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이러한 절들은 창조 이전의 세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창세기 1장 2절과 이런 구절들을 연관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또한 이사야 45장 18절로부터 또 하나의 불필요한 논쟁을 끄집어냅니다.
하늘들을 창조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하나님은 친히 땅을 조성하고 만들며 견고하게 하였으되 땅을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거주하도록 조성하였느니라. 나는 주니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간극 지지자들은 여기서 ‘헛되이 창조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이 이전 세상을 가리키며 이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창세기 1장 2절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처럼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18절의 ‘조성하였다’(formed)는 단어를 무시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맥에서 보면 ‘조성하였다’는 단어는 창세기 1장 2절을 가리키지 않고 창세기 1장 9-13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그 단어는 첫째 날에 지구(땅)가 형성된 것을 가리키지 않고 셋째 날에 마른 육지와 식물들이 형성된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은 그 성경 구절 자체가 바로 그것을 의도한다는 점입니다. 즉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즉 헛되이 땅을 창조하지 않으셨고 완성된 그 땅(지구)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거주자를 수용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앞뒤 문맥상 그 거주자는 아담 이전의 어떤 종족이 아니라 사람 더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생성 세대들(generations)국내의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창세기 2장 4-5절을 가지고 논리를 폅니다.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 들의 모든 초목이 땅에 있기 전에 초목을 만들며 들의 모든 채소가 자라기 전에 채소를 만드신 날에 하늘들과 땅의 생성 세대들이 이러하니라.
영어로는 이 부분의 4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이들의 요지는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그것들의 생성 세대들의 ‘세대들’이 복수로 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이 창1:1과 창2:1에 의거하여 두 번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가서 ‘generations’를 검색해 보면 성경에 총 118회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 118회는 다 두 번 생성된 것을 뜻할까요? 창2:4 다음에는 5:1이 나옵니다.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시되 여기도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세대들’이라는 복수가 나오므로 아담도 두 번 창조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말로 세대라고 번역된 단어는 ‘생성되다’(generate)에서 나온 ‘생성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세대들은 그에게서 생성된 후대 자손을 말하며 하늘들과 땅의 생성 세대들은 하늘들과 땅의 생성된 것들(products)을 뜻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세대’라는 말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성 세대’라고 하여 뜻이 덜 명확하게 되어 있어 조금 유감입니다. 나머지 117회도 살펴보면 다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를 가지고 재창조를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구차한 일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5절이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 비유로 내 입을 열어 세상의 창건 이후로 은밀히 간직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의 주제는 세상의 창건(기초를 놓음)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을 여기의 그리스어 ‘카타볼레’(katabole)의 정확한 번역은 ‘세상의 창건’ 즉 ‘세상의 기초를 놓는 것’(foundation of the world)이 아니라 ‘세상을 아래로 내던지는 것’(casting down of the world)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카타볼레는 명사로 단 한 번도 ‘아래로 내던지는 것’이란 뜻으로 번역된 적이 없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1번 나오는데 그중 열 번은 ‘창건’ 즉 ‘기초를 놓음’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세상의 창건 즉 기초들을 놓은 것이 아담 이전 세상의 파괴를 말한다면 누가복음 11장 50-51절의 의미를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1장 50-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세상의 창건 이후로 흘린 모든 대언자들의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니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한 ‘이 세대’는 특별히 그분의 이적과 표적들을 보고 그분을 거절한 세대, 즉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만약 간극 이론 지지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주님께서는 타락한 천사들의 죄를 포함한 아담 이전 세상의 죄들 역시 그 세대에게 요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 문맥상 황당하고도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이것은 다소 미묘한 논쟁입니다.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이 구절이 해, 달, 별들의 빛이 넷째 날에 드러난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은 또한 첫째 날 창조된 빛은 하나님의 빛으로서 영원하며 따라서 그것은 창조되지 않은 빛이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딜레마를 해결해 줍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죄를 지은 아담 이전의 세상이 어둠 속에 삼켜졌고 새로운 세상이 빛에 노출되었듯이 본성에 속한 자연인의 아담에게 물려받은 부패한 속성은 복음의 빛이 들어오기까지 어둠에 갇혀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첫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은 그분의 빛과 같은 빛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분의 빛은 너무 밝아서 순식간에 우리를 소멸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대신에 그런 문제를 피할 정도의 약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오직 영적인 몸만이 하나님 자신의 순수한 빛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발하고 있는 빛은 영적으로 인식되며 7절이 보여 주듯이 사람의 몸이라는 질그릇 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입니다.’
이 주제는 창세기 1장 2절의 어둠이 악 즉 하나님을 반대하는 상황을 묘사한다는 일부 간극 이론 지지자들의 주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그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둠을 만드셨고(시104:20) 이 어둠 역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창1:31).
주께서 어둠을 만드사 밤이 되게 하시오니 숲의 모든 짐승이 밤에 기어 나오나이다(시104:20).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더라(창1:31).
여기에서 전체 논쟁의 핵심은 앞뒤 문맥을 살펴보았을 때 창세기의 첫 절들과 상관이 전혀 없는 구절들을 창세기의 첫 절들과 억지로 연결하여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들과 거인들우리가 지금까지 검증한 모든 것들은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평을 포함합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들을 변개시키고는 순수한 말씀이 아닌 자신의 견해를 본문이라고 읽는 실수를 범합니다. 성경 기록의 무오성과 하나님의 섭리에 말씀 보존을 믿는 사람들 즉 시편 12장 7절에서처럼 그분의 말씀들을 보존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비평적 논평들은 오리의 등에 있는 물처럼 붙어있지 못하고 곧바로 떨어져 나갑니다. 하나님 말씀의 보존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런 비평적 주제들이 그들의 믿음을 둔하게 하고 영을 화나게 할 뿐입니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7).
이제 우리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애용하는 창세기 6장과 베드로후서 2장과 3장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4-5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아니하사 지옥에 던지시고 어둠의 사슬에 넘겨주어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으며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째 사람 노아를 구원하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고
맑은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5절에서 언급된 ‘옛 세상’이 ‘노아의 홍수 이전 세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위에서 살펴본 대로 ‘세상’은 인간의 영역을 말하며 이것은 ‘세상’이라는 단어에 관한 성경의 첫째 용례로부터 나온 정의입니다. 또한 죄를 지은 천사들은 그 홍수 즉 노아의 홍수 전까지는 아직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유다서 6절에서 말하고 있는 천사들과 같은 천사들입니다.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는데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욥기 38장 7절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의 모퉁이 돌을 놓을 때 즉 창조의 셋째 날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경건한 셋의 후예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구는 셋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130살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창5:3). 따라서 이 존재들은 어떤 영적인 창조물 즉 천사들입니다. 유다서 6절의 유일한 짝은 창세기 6장 2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을 섬기도록 창조된 천사들이며 그들이 긴밀하게 연합하여 탐욕으로 유혹을 받아 자신들의 처음 처소 즉 근무지를 떠났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성경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2절과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그들이 저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즉 명성 있는 자들이 되었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과거에 명성 있는 강력한 자들 즉 거인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 거인들이 4절의 아이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우리는 이스라엘이 골리앗 같은 거인들로 인해 직면한 문제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역사 역시 그 땅에 살던 거인들의 땅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마지막 참고 구절은 베드로후서 3장 5-7절입니다.
5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6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때 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여 간직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예비해 두셨느니라.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지구의 파괴와 그것에 따른 재창조 전 지구(땅)의 상태를 언급하기 위해 6절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베드로후서 3장 5절은 창세기 1장 9절절에 나오는 지구의 상태를 설명하지 결코 창세기 1장 2절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 아래 물들은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육지는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9).
창세기 1장 9절 이후의 상황은 노아의 홍수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2장 5절에서 ‘옛 세상’이라고 불린 그때는 노아의 홍수 이전 즉 아담과 이브와 그 후손들이 살던 때의 세상을 말하며 그들은 노아의 때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5절에서 언급된 ‘하늘들’이 6절에서 멸망한 것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6절에서는 세상 즉 사람들이 멸망하였습니다. 그래서 5절에 기록된 하늘들은 7절에서 언급된 대로 재창조됨 없이 이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그 하늘들 역시 멸망되었다고 가정하고는 노아의 홍수 때에 하늘들의 멸망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6절의 물의 넘침은 노아의 홍수를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옛 하늘들 역시 파괴되었다는 간극 이론의 가정에서 출발한 이런 추정은 분명히 성경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특히 여기서 하늘들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은 대기권의 첫째 하늘과 우주 공간의 둘째 하늘을 말합니다. 따라서 간극 이론에 따르자면 그때의 창1:1과 1:2의 홍수는 둘째 하늘인 우주 공간도 파괴했음이 틀림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지구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주장들의 신빙성을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것들은 성경은 물론이요, 인간의 과학으로도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허무한 이론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이 나오던 1850년경에 결국 과학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무능함과 창조 과학에 대한 소양 부족 때문에 일부 신학자들이 진화론의 시간들을 맞추기 위해 간극 이론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전혀 뜻밖에도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수렁에 빠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보통 수준의 교양을 가지고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간극 이론의 근거로 내세우는 대부분의 성경 구절들이 앞뒤 문맥 보았을 때 미래의 심판을 언급하는 구절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간극 이론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억지로 맞추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들을 결정적으로 변개했다고 봅니다. 또한 간극 이론의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들을 성경의 문맥 밖에서 임의대로 해석하고 제시했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아담 이전 세상의 파멸과 그 이후의 재건 이론은 성경과 심지어 인간의 과학, 그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역사의 진실을 가리는 인간의 허망한 산물일 뿐입니다.마지막으로 우리는 재창조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코필드, 라킨, 럭크맨,낙스 등의 훌륭한 성경 신자들의 재창조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재창조등의 특이 사항을 제외한 이분들의 글의 대부분은 나무랄 데 없이 좋습니다. 또한우리는 이 주제가 성경 신자들 간의 교제를 막는 심각한 이단 교리는 아니라고 믿습니다.따라서 성경 신자들이 이 문제로 심각하게 분열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 참고 링크(재창조 반박 글 모음) -------------- 럭크맨의 극단적 세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a
2015-03-31 12:07:41 | 관리자
목사님!
중요한 주제에 대해 더없이 명쾌하게 논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맑은 정신과 바른 지각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길 소망합니다.
2015-03-31 12:02:01 | 김대용
다음 글도 참고하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동전 찾기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3925
2015-03-31 00:04:26 | 관리자
킹 제임스 성경에서 동전 몇 개를 찾아서 그것으로 성경을 거부하는데 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할 귀한 시간에 아이들처럼 동전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간단히 정리하려고 합니다.
고대 화폐 단위를 어떻게 번역할지는 성경 번역사에서 큰 과제입니다. 물론 무게와 길이와 부피의 단위에서도 마찬가지죠. 이러한 주제는 많은 논쟁과 의혹을 주고 있지만 사실 답은 간단합니다. 둘 중의 하나이거든요.
화폐 단위나 무게, 길이, 부피의 단어를 번역할 때 첫 번째 방법으로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용어를 그대로 유지할지 아니면 두 번째 방법으로 당대의 동일한 가치에 해당하는 용어로 바꿀지는 번역과정에서 선택과 결정의 문제입니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단위를 모두 그대로 유지하면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게 되고, 동일한 가치를 의미하는 단위를 찾아서 모든 용어를 다 바꾸게 되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가 쉽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그렇다면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화폐 단위와 무게, 길이, 부피의 단어들이 나올 때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단위를 그대로 사용했고 어떤 경우에는 동일한 가치를 가진 당대의 단위로 대체해서 번역했습니다. 나는 화폐 단위 같은 어휘들을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번역한 킹 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의 선택과 결정을 신뢰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합니다. 화폐 단위를 원어 그대로 가지고 왔든지 가치를 비교해서 수용 언어 단위로 번역했든지 모두 최선 최상의 결과입니다.
구약성경에 들어있는 화폐 관련된 단어들은 대부분 히브리어를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세겔, 게라, 베가, 다릭)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그리스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도 있습니다. (달란트) 또 가치를 따져서 당대 단위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한 예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서 당대 단위로 번역한 가장 대표적인 단어는 “페니(penny)”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데나리온(δηναριον)”입니다.
로마의 데나리온은 주전(主前) 211년경부터 사용되었는데 3.7그램 정도의 무게였다고 합니다. 데나리온은 복음서 시대에 가장 널리 유통된 은전(銀錢)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로마 시대 데나리온을 잉글랜드 페니로 대체하여 번역하였습니다. 8세기부터 사용된 은전(銀錢)인 잉글랜드 페니야 말로 데나리온을 번역하기 위한 가장 정확한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들도 잉글랜드 페니가 로마의 데나리온에서 유래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1971년까지도 사용되었던 잉글랜드 페니는 “d”라는 화폐단위 약자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페니가 데나리온과 같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서 동전 찾기에 바쁜 사람들은 페니와 더불어서 마이트(mite), 파딩(farthing), 펜스(pence), 파운드(pound) 같은 화폐 단위를 가지고 나와서 성경이 틀렸다고 광고하느라 그 동전을 다 써버립니다. 오류 있는 여러 단어들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1611년 당대의 잉글랜드의 화폐 체계에서 페니가 기본단위입니다. 페니보다 커지면 펜스, 파운드가 되고 페니보다 작아지면 마이트, 파딩이 됩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동전에서 데나리온이 기본 단위이고 가치의 크기에 따라서 렙돈, 앗사리온, 데나리온, 므나 등으로 바뀐다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한국은 동전을 10원, 50원, 100원, 500원으로만 구분하지만 고대 로마나 잉글랜드는 우리와 다릅니다. 현재 미국 달러도 하나의 화폐 체제이지만 동전의 가치로 보자면 페니(1센트), 니켈(5센트), 다임(10센트), 쿼터(25센트), 하프달러(50센트)와 같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동전 몇 개 찾아서 기껏해야 참고서적 하나쯤 비교하며 킹 제임스 성경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류에게 완전한 성경을 주시기 위해서 수고하신 성령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누군가 그리스어 성경의 화폐 단위와 킹 제임스 성경의 화폐 단위가 다른 것을 몇 개 지적하며 성경이 틀렸다고 말한다면 화폐 단위를 번역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적용되었음을 잘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둘 중 어느 방법으로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를 성령님께서 온전히 도와주셨습니다.
2015-03-30 22:16:46 | 김재근
그것은 고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항상 우측 상단의 구글 검색을 이용하세요.
다음을 참조하세요.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2&write_id=534
이 강해의 첫 부분에도 친절한 설명이 나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EjzjgoZ7SM&feature=youtu.be
2015-03-30 15:43:28 | 관리자
안녕하세요..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있습니다.
창세기 2장 1절에서 " ~ 그것들의 모든 군대가 ( all the host of them.)" 로 해석되어 있는데요.. 고어체로 번역되어서 그런건지 창조되는 모든 것을 군대로 표현하는 건지..왜 군대인지 알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3-30 15:18:52 | 양용백
이 주제를 포함해, 이런 논쟁에 대해 주제넘지만 한 말씀 적습니다.
저는 아무리 읽어봐도 입다가 자기 딸을 불태웠다고 안 읽히는데,
왜 꼭 그렇게 봐야 한다는 것인지 타당한 근거를 잘 모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믿는 것과 문자만 보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보면,
한 예로 바울은 모든 성도에게 독신을 가르친 것이 됩니다.
그럴 때 바울이 자기 말보다 더 큰 전제, 즉 다산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주장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두루 살펴서 결론을 내야지,
한두 마디만 가지고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지요.
명확하게 불태우는 번제의 실행이 묘사되지도 않는데
하나님께서 원칙을 어기고 인신제사를...?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다음 해석을 고민해야죠.
이 부분은 그런 전제가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때에 하신 명령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극진히 사랑하시는 인간을 불에 태우게
할 정도의 엄청난 예외적 사건을 용납하셨다면
이보다 명확하게 기록해주셨을 거라고 보고, 그렇게 룰을 깬 이유도
나와야 하지 않나요...
최소한 우리가 아는 성경이 그렇게 허술한 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번제로 바쳐졌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몇몇 불리한 구절은 설명을 건너뛰더군요.
상식적으로, 입다는 처음 나오는 ‘그것’을 생각했지만
불에 태울 수 없는 것이 나오면
그 서원을 이룰 수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 정답 아닌가요?
예를 들어 “난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뭐든 다 먹을 수 있어!” 이랬다 해서
짬뽕의 홍합 껍데기와 그릇까지 먹어치우지는 않지요.
어떤 유흥업자 조폭이 회개하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제 재산을
모두 선교사업에 바치기로 서원합니다!” 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부정하게 빼앗은 재산이나 유흥업소 등은 다 나눠주거나
다르게 처리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히 바치는 것이지,
말한 대로 다 바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만일 입다가 가족도 예외 없이 다 태워서 바치겠다고 생각했더라도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식/기준은 다른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 쳐도 이것이 구원의 중대한 교리도 아닌데,
그냥 저 사람은 다르게 봤나 보다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흠정역을 알고, 흠정역을 읽고,
이것을 통해 먼저 걸어간 훌륭하신 형제님들에게 공짜로 배운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입다인지 벗다(?)인지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고, 그저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보존하려 하는 사람들은 다 한 편입니다.
‘나는 쇠하고 성경이 흥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일이 되는 쪽으로 노력을 기울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 단순히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우리 밖에는 거대한 세력이 있고, 바른 성경을 모르는 수많은 교인들과
성도가 있습니다. 성경을 알리고 이 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오류들로
각 교회에 억류된 혼들을 깨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흠정역 진영이라는 곳에서 이런 문제로 다투지만,
저는 오늘도 개신교의 한 예배당에서 개신교스러운 이야기들을
듣고 왔습니다. 중대한 본문을 개역성경으로 읽고,
그에 대한 강해가 아닌 에세이를 듣는 것, 그게 어떤 건지
여러분 잘 아시죠?
그래서 이런 논쟁을 보면 배부른 소리 같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저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따져서 얻는 유익과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 못하는 군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과 피에 맞붙어 싸우는 것이 아님을 늘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런 논쟁이 다 나쁘다는 것도,
그런 사람은 다른 중요한 일은 안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충분히 최선을 다해
성경을 증거하며 좋은 일들을 하고 있음을 압니다.
바울도 여러 동역자들과 다투고 갈라서기도 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다만 조금 더 우리의 시간을 아껴 큰 목표, 큰 뜻에 맞게
힘을 합치고 성숙하게 행동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2015-03-29 15:14:43 | 김재욱
입다의 딸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성경 질문을 받아 보면 여러 사람들이 사사기 11장에 나오는 입다의 딸 이야기를 가장 많이 꺼냅니다.
다음 글에서 보듯이 많은 성도들이 개역성경의 영향으로 입다의 딸은 번제 헌물로 주님께 바쳐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한 여러 목사님들은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고 평생을 처녀로 지냈다고 믿습니다.
http://keepbible.com/BQNA07/View/4IM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위의 두 견해 중 하나를 지지하며 그 근거를 대 왔습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다 그럴듯하고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오늘은 목사로서 성경의 해석 문제를 잠시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로서 성경 해석 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지 않는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결코 인신 제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69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 헌물로 바치라고 했으니 입다의 딸도 그의 서원대로 반드시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 인신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기대했을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그것을 시험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곧 단련시킨다는 말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였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서 내보내셨을 것입니다(히11:11-19). 그러므로 이런 단회적 시험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를 요구하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인신 제사에 대해 얼마나 많이 분명하게 말합니까? 그것은 마귀를 섬기는 가나안 족속들의 사악한 행위입니다. 므낫세는 인신 제사를 드린 결과 유다의 패망을 불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입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입다가 알 수 없는 결과에 대해 자기 임의대로 예상해 버리고 너무 경솔하게 서원했다는 것입니다.
입다는 분명하게 11장 31절에 있듯이 무엇이 자기를 맞으러 나오면 그것(it)을 헌물로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절대 사람을 예상하고 서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근본 속성을 파괴하는 해석을 하면 치명적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입다의 딸이 두 달 동안 산에 올라가 자기의 '처녀 생활' 혹은 '처녀 상태' 혹은 '처녀 됨'(virginity)으로 인해 애곡하였다고 말합니다.
곧이어 성경은 이에 대해 39절에서 분명하게 그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합니다.
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39절을 잘 보십시오.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입다는 자기 서원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 '그가(입다)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딸) 행하였으니 그 때에 혹은 그 때까지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입다가 자기 서원대로 행함으로써 그 딸이 죽지 않고 처녀로 일생을 보냈다는 것은 문맥을 그대로 따라 나가면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다음에 보면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인이 시집을 가지 않는 것은 그 당시에 부끄러운 일이었으므로 여자들이 입다의 딸을 위해 같이 울어 주었습니다.
자, 이 구절들은 그의 딸이 번제 헌물로 바쳐졌다고 생각하고 해석해도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입다는 드디어 그녀를 죽여서 바쳤습니다. 이로써 그의 딸은 처녀로 죽게 되었고 결국 여인들이 매해 그녀를 위해 울어주었습니다.
일단 이렇게 두 가지의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저는 오늘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합당할까 묻고 싶습니다.
입다는 사람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경솔하게 서원하였습니다.그런데 뜻밖에도 딸이 나왔습니다.그렇다고 그가 하나님과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그분께서 극도로 미워하시는 인신 제사를 드렸을까요?과연 이런 해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해석이며 사람을 살리는 해석일까요?
그런 무자비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 맞을까요?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소개하면 다른 사람들이 설득될까요?
저는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을 선포하는 목사로서 이런 말씀을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 해석은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사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려주시는 은혜를 나타내도록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분들이 입다의 딸에 관한 기록 등 몇몇 난해 구절에 대한 확신에 찬 답을 얻는 원천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터 럭크맨(Peter Ruckman)입니다. 저 역시 럭크맨 목사를 성경 교사로서 존경하지만 그의 말 전체를 믿지는 않습니다. 저처럼 미천한 사람이 봐도 그분은 틀린 데가 많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와 환난기에는 사람이 ‘믿음 +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국내에서도 이분의 그런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이단 교리입니다. 그런 교리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또 또 구시대의 유물인 재창조를 주장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럭크맨을 떠나 훨씬 온건하다고 평가되는 제임스 낙스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낙스도 사람인지라 틀린 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낙스가 훌륭해도 여과없이 틀린 것까지 그의 모든 가르침을 수입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미국 사람의 글이나 말도 각자가 스스로 잘 분별해서 들어야 합니다.
성경 해석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에 럭크맨과 낙스 그리고 라킨을 무조건 추종하면 필패하게 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판단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해석, 사람을 살리는 해석을 취해야 합니다.
묘하게도 대개 뛰어난 사람들은 보통사람이 이상하게 혹은 신기하게 여길 만한 성경 해석을 종종 내놓습니다.
1년 전쯤에 제가 요한복음 11장 33-35절을 가지고 “성도가 울면 예수님도 우신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write_id=438 3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
34 이르시되, 너희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 하매
35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보라, 그분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고
33-36절을 읽어보시면 누구라도 그 성도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도 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튜 헨리 등의 주석을 보면 다 그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보시고 같이 울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그래서 그분을 믿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이 정상적인 해석입니다.
그런데 럭크맨 추종자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럭크맨은 예수님이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등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의 고통을 보고 우신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누가복음 19장 41-42절로 독자를 끌고 갑니다.
41 그분께서 가까이 오사 그 도시를 보시고 그 도시로 인해 슬피 우시며 42 이르시되, 적어도 이 날 즉 네 날에만이라도 너 곧 네가 네 화평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리요! 그러나 지금 그 일들이 네 눈에 숨겨졌도다.
그는 지금 나사로의 무덤에 있는 그 유대인들이 자기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예수님이 슬퍼서 우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이런 사실을 설명하면서 AD 90년부터 1990년까지 1,500명의 주석가와 교사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분개해 합니다.
한번 독자들께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심지어 '성경 해석의 왕도(王道)는 문맥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과 전혀 동떨어진 누가복음 19장을 연결하는 파격적이고 대담한 해석은 럭크맨 혹은 낙스 같은 천재(?)나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데서 위대한 영해 즉 비유 해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독자들은 럭크맨의 학식에 넘어갑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럭크맨 추종자들이 그것이 럭크맨의 해석이 아니라 자기 해석인 양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독자들은 그 추종자들이 엄청난 지적 괴력의 소유자로 알게 됩니다.
아닙니다. 그런 추종자의 이상한 해석의 뿌리는 대부분은 럭크맨이나 낙스, 혹은 라킨입니다. 다만 그 출처를 솔직하고 당당하게 밝히지 않기에 독자들은 자 그 사람이 큰 능력자인줄 알 뿐입니다.
저 역시 부족한 사람이지만 사람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이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의 말과 글을 판단해서 합당한 것들만 취하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목사들의 글이나 설교를 접할 때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해석이 나오거든 럭크맨의 것일 가능성이 많음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럭크맨은 훌륭한 분입니다.
저는 럭크맨의 주석을 다 아마존에서 구매해 전자책 킨들에 담아 늘 봅니다.
그런데 그분은 많은 진리를 보여주면서도 과도하고 이상한 해석도 많이 합니다.
라킨도 마찬가집니다. 그의 재창조 등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의 글이 다 성령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낙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천재들의 글을 보고 읽게 되면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대개 크리스천 천재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탁월한 지적 능력으로 좋은 열매를 수확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에 때로 자기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도가 지나친 상상력과 파격적 사고로 매우 엉뚱한 성경 해석과 가르침을 내놓기도 합니다.
감히 보통 사람은 이런 용기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재이기에 이런 대담함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때로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참 감사하게도 이러한 극단적 파격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보면 그 옳고 그름을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다가 그만 도를 넘어 그릇된 성경 해석에 빠지는 천재 그리스도인이나 그 천재의 지적 능력에 매료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건전한 판단력까지 상실한 추종자들이나 모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집중했기에 이런 일들이 생깁니다.
또한, 이런 분들에게서 얻은 소스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기 스스로 굉장한 해석을 하는 것처럼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럭크맨 추종자를 늘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물론이요,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디 목사들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사람을 살리는 성경 해석을 하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더
2015-03-28 17:52:02 | 관리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단위를 잘못 표기한 오류가 있지 않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몇 개월 전에 어떤 분이 한 형제를 만나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누가복음 19장 13절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흠정역: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십 므나를 건네주며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올 때까지 관리하라, 하니라.
KJB: And he called his ten servants, and delivered them ten pounds, and said unto them, Occupy till I come.
그분의 질문 요지는 “왜 KJB는 여기에서 므나를 파운드(pound)로 표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복음서에서 KJB는 달란트, 드라크마 등을 영국 단위로 표기했으니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므로 오류가 있는 성경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제게 보내면서 그 형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고 하기에, 저도 참는 데 지쳐서 그런 쓸데없는 질문에는 답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니 이제는 단위를 가지고 오류 시비를 거는 분들이 있네요.
이런 쓸데없는 질문에 매번 답변을 해야 하나 싶지만, 한편으로 목사는 오래 참고 가르쳐야 하기에 결국 간단히 답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것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제가 생각하는 바를 적습니다.
영어 위키 백과에 가서 pound를 치면 무게 단위인 파운드의 유래가 나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Pound_(mass)
영어 단어 파운드는 로마 단어 즉 라틴어 ‘libra’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파운드를 표기할 때는 ‘lb’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로마 사람들의 단위는 그리스 사람들의 단위에서 나왔습니다. 다음 기사의 첫째 줄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ncient_Roman_units_of_measurement
그러면 영어 파운드와 라틴어 리브라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므나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단위를 보여 주는 다음 기사에서 무게(weight) 부분을 보기 바랍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ncient_Greek_units_of_measurement
므나는 100드라크마이고 표준에 따라 431-630그램입니다.영국에서 1파운드는 약 450그램입니다.
그러므로 1611년 당시의 영어 성경 번역자들은 므나에서 리브라로, 그리고 리브라에서 파운드로 무게, 혹은 화폐 단위의 이름이 바뀌었기에 보통의 영국 사람들을 위해 므나를 그대로 파운드로 번역하였습니다. 즉 영국의 문화는 많은 면에서 그리스, 로마(라틴) 문화의 연장선에 있어서 심지어 화폐/무게도 이름만 바뀌었지 내용은 같습니다. 사실 파운드 자체는 지금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단위를 접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번역을 할 때 원어를 그대로 살려서 화폐 파운드의 경우 므나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교사가 므나의 무게 혹은 가치를 가르쳐 주면 됩니다.
한편 요한복음 19장 39절의 경우 같은 파운드라 해도 무게를 나타내는 경우는 '근'이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 원어는 리트라(litra)이고 파운드 무게와 같습니다.
흠정역: 또 처음에 예수님께 밤에 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알로에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오니라.
KJB: And there came also Nicodemus, which at the first came to Jesus by night, and brought a mixture of myrrh and aloes, about an hundred pound [weight].
NIV 등을 포함한 모든 메이저 영어 성경이 100 파운드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은 채소의 경우 375그램, 고기의 경우 600그램이므로 영어 파운드를 이와 비슷한 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단위는 성경의 오류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름 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Jesus’를 예수라고 표기합니다. 그런데 영어를 조금 안다고 하는 분은 꼭 ‘예수스’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다 님 자를 붙이면 ‘예수스님’(잘못 읽으면 예수 스님)이 되지요. 참으로 난감합니다. 이런 분들은 성령님도 성숨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Paris’를 우리는 파리 혹은 빠리라고 하고, 미국 사람들은 패리스라고 합니다.
‘Thomas’를 우리는 도마라고 하고, 미국 사람들은 토머스라고 합니다. 토머스 에디슨 아시지요?
그러면 ‘스’를 붙이고 안 붙이고가 오류의 유무를 결정합니까?
결코 아닙니다.
갈렙(Calep)은 여분네(Jephunneh)의 아들입니다.그런데 이름이 틀렸다고 ‘칼렙’, ‘예푼네’로 쓴 성경도 있습니다(표지에는 킹제임스라는 단어가 붙어 있음).
‘예푼네’가 ‘여편네’로 들리지 않습니까?
‘예푼네’가 정말로 맞나요? 끝의 h는 어디로 갔나요? Jesus의 s는 어디로 갔나요?
누구보다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준에도 미달입니다.
단위나 이름 같은 문제로 양심이 연약한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면 안 됩니다.
파운드라고 하든 므나라고 하든 근이라고 하든,우리나라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하든 미국 사람이 지이저스라고 하든 하나님은 다 같은 것으로 여기십니다.
그분은 각 나라 문화와 언어의 특수성을 반영해야 하는 단위나 이름 표기 문제로 성경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성경 안의 단어들이 있는 그대로 가능한 일대일 대응이 되게, 정직하게 수용 언어로 번역되면 그 성경을 인정하십니다.
흠정역 성경은 바로 그런 성경입니다. 제가 오늘 이 글을 쓴 것은 이런 무익한 질문을 통해 성경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려는 사람을 설득하려 함이 아닙니다. 이런 분은 이미 믿지 않기로 마음에 굳게 작정하였으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것을 가져옵니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들과 비슷합니다. 이런 불신의 악순환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를 접하고 고민하는 그 형제를 위로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늘의 큰 평강이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28 16:24:37 | 관리자
흠정역 성경은 복수도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면서요?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비방하면 안 됩니다.
몇 달 전에 어떤 분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진영의 한 목사님이 흠정역 성경이 복수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요한복음 1장 12절이었습니다.
흠정역: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KJV: But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power to become th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영어로 보면 ‘the sons of God’이 복수인데 왜 흠정역은 ‘하나님의 아들’로 단수 처리했느냐는 것이 질문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번역자가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번역할까요?
우리말은 특별히 접미사 '-들' 등을 사용해 복수를 부각하지 않아도 의미상 복수가 되면 복수로 쓰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교양 있는 표현이 될 때가 많습니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할 때 어떻게 말합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입니까? 아니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들’입니까?
이 경우 영어식 문법에 맞게 복수를 써야 한다고 ‘여러분들’이라 하면 자연스럽지 못한 번역 투의 문장이 되며 연설이 조잡해집니다.
우리말은 특히 ‘모든’, ‘여러’ 등과 같이 수 개념의 형용사가 앞에 붙으면 뒤에 오는 명사는 복수라도 대개 단수로 표현합니다.
모든 국민, 모든 사람, 여러 사람, 꽃 세 송이, 네 마리 개 등
물론 이런 데서 영어처럼 하려고 ‘들’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국민들, 모든 사람들, 여러 사람들, 꽃 세 송이들, 네 마리 개들 등
그리해도 ‘모든 국민들’, ‘모든 사람들’, ‘여러 사람들’처럼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고 ‘꽃 세 송이들, 네 마리 개들’처럼 전혀 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번역자는 앞뒤 문맥과 특히 읽힘성을 보고 판단하여 복수의 경우 ‘-들’을 넣을 수도 있고 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번역한 뒤 많이 읽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대화를 봅시다.
아들: “아버지, 저기 있는 꽃들은 다 뭐예요?”아버지: “그것들은 다 장미란다.”(They are all roses).
아버지의 대답이 “그것들은 다 장미들이란다.”로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다 장미란다.”가 훨씬 더 우리말처럼 느껴집니다. 즉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에 굳이 '-들'을 넣으면 번역 투의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됩니다.
이전에는 이런 것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영어가 보편화하다 보니 복수 등에 신경 쓰는 사례가 날이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그것들은 다 장미란다.”로 하는 경우 장미는 물론 단수이고 영어로는 복수인 ‘roses’이므로 단편적으로 비교하면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것들은 다 장미란다.”라고 말하거나 써도 장미가 복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즉, '-들'을 생략하는 것이 우리말로서는 더 자연스럽고 교양 있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장미를 단수로 표현해도 앞에 ‘그것들’과 ‘다’가 모두 여러 개를 표현하므로 그 말을 복수로 듣거나 읽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분 중에 그래도 '-들'을 붙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여러 번역자가 번역 작업에서 우리말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적절하지 못하게 '-들'을 사용한 책과 글이 이미 세상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은 1장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흠정역: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우리 주님은 성도들에게 다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 경우 ‘아들들’이라 해도 문제가 없지만 단수 아들로 하는 것이 우리말에서는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부분을 영어와 비교하고는 기계적으로 복수 처리하려 하면 교양 있는 우리말 번역이 아닌 번역 투의 조악한 번역이 됩니다.
영어에는 ‘children of Israel’이 640여 회 나옵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성경들은 이것을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원래대로 하자면 ‘이스라엘의 자손들’ 혹은 ‘이스라엘의 아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야곱의 후손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에서는 일단 ‘의’를 빼도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자손’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집합 명사로 복수로 이해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매번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하면 오히려 성경의 자연스러운 읽힘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막혀 독자가 수월하게 읽지 못한다는 겁니다.
분명하게 야곱의 자손들이 아니라 그의 12 아들을 표현할 때는 '이스라엘의 아이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말로는 ‘이스라엘 자손’이라 해도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는 좋은 짐승입니다.”의 경우에 어떤 특정한 개, 즉 개를 단수로 본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Dogs are good animal.”로 해야 합니다. 우리말이 단수라고 ‘A dog'이라고 하면 촌스러운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sons, children 등의 복수는 앞뒤 문맥을 보고 아들들이나 아들, 자손들이나 아이들이나 자손 등으로 자연스럽게 번역하면 됩니다.
독자 여러분!
이제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 그리고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와 반대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차이를 잘 이해해야 좋은 번역이 된다는 점을 이해하셨습니까?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들은 바로 이런 점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아들들’로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쉬움과 불만을 토로하면 결국 성도들의 성경 신뢰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말 등 명백하고 단순한 것에 대한 교양이 부족해 설익은 주장이나 가르침을 양산하거나 그것에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말 용법을 잘 이해하면서 이런 주장을 지속해서 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의 의도가 순수한지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말에서는 복수를 쓰면 자연스럽지 않지만 교리적으로 꼭 써야만 하는 경우 저희는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포기하고 모두 복수 처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들’(heavens)과 ‘죄들’(sins)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런 단어들은 교리적으로 반드시 단복수 구분이 되어야 하므로 자연스럽지 않아도 복수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고민을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이나, 혹은 한국어의 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성도들 앞에서 자기자랑을 하기 위해 흠정역 성경이 단수와 복수도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 결국 킹제임스 성경의 위상이 약화되며, 자신의 목회와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목사나 교사는 이런 일을 하면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며 성경 사역에 큰 방해가 됩니다.
흠정역 성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부디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먼저 제게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이메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28 15:15:45 | 관리자
흠정역 성경은 시제도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면서요?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문제를 제기하려거든 먼저 사실관계부터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고 있는 흠정역 성경을 비판하면 그것은 성경 신자들을 특히 연약한 신자들을 넘어뜨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흠정역 성경을 보는 분들 가운데 시제를 문제로 삼아 혼란을 일으키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4절을 보겠습니다.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시니라. 3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이런 분들은 1절의 ‘창조하시니라’, 2절의 ‘움직이시니라’, 그리고 5절의 ‘부르시니라’가 영어로는 ‘created’, ‘moved’, ‘called’로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는데 왜 흠정역은 이것들을 현재로 번역했느냐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것으로 흠정역 성경의 번역을 비난하는 분들은 한국말을 쓰는 성경 신자 중에 자기만 독보적으로 영어를 잘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런 설익은 주장에 미혹되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우, 번역의 의도와 사실을 잘 알고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위의 세 단어를 현재로 표현하려면 각각 ‘창조하시느니라’, ‘움직이시느니라’, ‘부르시느니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흠정역은 각각 ‘창조하시니라’, ‘움직이시니라’, ‘부르시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다르지요?
왜 그럴까요?
흠정역 성경은 ‘하느니라’체라는 고어체의 예스러운 표현을 수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문체를 웅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면으로만 보자면 개역성경은 뛰어난 번역입니다. 우리말의 웅장한 표현을 성경에 잘 녹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을 현대인에게 익숙한 문체로 바꾸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얼마나 조잡하고 가볍게 읽힐까요?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다.
물론 시중에는 이미 이런 식의 번역으로 출간된 성경이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이 당장 읽기에는 친숙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심과 장중한 경륜으로써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바로 그 놀라운 성경 기록의 격이 현저하게 낮아집니다. 더불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 불가한 최고의 경전이라는 성경의 독보적 위상과 가치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번역은 일단 현대인에게 친숙하고 또 어법상 틀린 번역은 아니겠지만, 성경 번역으로는 합당하다 할 수 없습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초등학교 아이들이 읽는 창작 동화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이제 독자 스스로 두 번역을 비교하며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거 시제를 잘 살려야겠다고 다음과 같이 번역하면 어떨까요?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더라.2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으며 어둠은 깊음의 표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셨더라…5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더라.
이렇게 모든 구절을 ‘하셨더라’로 해 놓으면 웅장하게 선언하는 분위기가 전혀 살아나지 않고 그 표현이 조잡해집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독자께서 스스로 읽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는 예스러운 표현인 ‘하느니라’체를 도입하여 웅장하게 선언하는 표현기법을 써야 합니다. 개역성경은 이런 것을 잘 표현하였고 개역개정을 내면서도 이런 부분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다음은 개역개정 위원회의 번역 원칙입니다.
개역 성경의 옛 문체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하다’체를 사용하여 현대화하지 않고, ‘하느니라’체를 그대로 사용하여 고어체를 유지하였다. 이것은 아직도 경전의 권위를 고어체 활용과 연관시키는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1-4절에서 보듯이 ‘하시니라’ ‘좋았더라’ 등의 표현을 ‘하셨다’ ‘좋았다’ 등으로 고치지 않았다. http://www.bskorea.or.kr/kbs_gae/change/change2.htmlhttp://pcouncil.net/jboard/?code=ilban-aa002&id=1781&p=detail&page=48(번역의 원칙만 참조하기 바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아직도 경전의 권위를 고어체 활용과 연관시키는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의 뜻은 현재 평균적인 교양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현시대에 쓰고 있는 말이 아닌 지금 실생활에서 쓰고 있지 않은 예스러운 고어체의 글에서 경전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흠정역 성경 창세기 1장 1절은 과거를 현재로 오역한 것이 아니라 ‘하느니라’체로 과거의 사건을 웅장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즉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어체로 유려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굳이 이 부분을 집요하게 따지는 이유는 1장 1절은 오래전에 마친 일이고, 2절부터는 재창조임이 나타나게 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면서도 흠정역 성경은 3, 4, 5절 끝에는 ‘빛이 있었고’, ‘좋았더라’, ‘첫째 날이더라.’라는 말로 과거 시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조합을 거쳐서 성경이 웅장한 경전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입다의 이야기를 하나 더 예로 들겠습니다.
사사기 11장 34-40절을 읽으시면서 각 절의 어미 처리를 유심히 보시면 ‘하느니라’와 ‘하였더라’가 조합으로 나옴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9절의 ‘돌아오니라’와 ‘아니하니라’는 현재 시제가 아니라 고어체로 과거 시제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현재로 표현하려면 ‘돌아오느니라’와 ‘아니하느니라’가 되어야 합니다.
34 ¶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작은북을 잡고 춤추며 나아와 그를 맞이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유일한 아이로 그녀 외에는 그에게 아들딸이 없었더라. 35 그가 그녀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네가 나를 심히 참담하게 하였으며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도다. 내가 {주}를 향해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매 36 그녀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주}를 향해 입을 여셨을진대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원수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37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하였더라.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지적한 뒤 줄을 긋고는 흠정역이 오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역자가 번역 과정에서 시제도 못 맞추었다거나 혹은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해 억지로 시제를 고쳤다고 한다면, 그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단언컨대 저는 흠정역 성경에서 제가 알면서 고의적으로 시제 등을 고친 곳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미처 알지 못한 채 시제 등이 잘못 표기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 데를 발견하시면 언제라도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이메일을 보내 주십시오.
이런 고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이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마치 제가 성경을 의도적으로 오역한 것으로 개인 블로그 등에 발표하면 결국 킹제임스 성경 자체의 위상이 약화됩니다. 특히 목사나 교사가 이런 일을 하면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며 성경 사역에 큰 방해가 됩니다.
더불어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한국말을 쓰는 한국 사람에게 목회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려면 한국어와 영어 중에 어느 언어를 우선해서 잘 이해하고 구사해야 할까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한국어입니다. 물론 목회자나 성경 교사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입니다. 아직도 많은 자료와 좋은 책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못합니다. 또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것도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먼저 한국어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깊고 품위 있게 구사할 줄 알아야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신장이 크지 않은, 즉 다리가 길지 않아 큰 보폭으로 움직일 수 없는 육상 선수와 한쪽 다리만 비정상적으로 긴 육상 선수가 있다면 실제 경기에서 누가 더 유리할까요? 물어볼 것도 없이 비록 짧지만, 정상적인 다리를 지니고 있는 선수입니다. 이처럼 영어에 관해서는 비교적 정통하지만 정작 한국어에 대한 교양과 이해가 부족하면 앞서 소개한 것처럼 설익은 문제를 제기하고 어설픈 주장을 하게도 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영어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랑하면서도 한편으로 우리말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면 우리말로 된 흠정역 성경과 기타 자료들만 충실하게 공부하고 연구한 그리스도인보다 어느 부분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끝으로 독자 여러분!
흠정역 성경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거든 아직 양심이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먼저 제게 이메일 등을 통해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지체들을 위한 이러한 배려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을 잘 헤아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28 14:26:01 | 관리자
글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9&page=&cate_name=&sfl=&stx=&sst=&sod=&spt=&page=
2015-03-28 08:44:0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일반 서적을 읽기 위해서라면 네이버 사전도 훌륭합니다.
단, 독해는 사전이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를 이해해야 가능합니다.
1. 기초 문법을 공부하시고,
2. 무한 반복을 통해 문장 구조의 패턴을 익히시기 바랍니다.
일반인이 번역해 놓은 예문은 조심하세요. 오역이 많습니다.
샬롬
2015-03-27 21:19:51 | 김항수
참고로 게인스 존슨의 다소 과한 주장은 재창조론을 믿는 분들도 다 받아들이지 않는데,
특히 지질학적인 부분에서 대개의 성경 신자들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연히 재창조론 자체도 유신론적 진화론과 일치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과학적 주장보다는 성경의 단 한 구절이라도 놓치고 무시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취지임을
한 회원님이 피력하셨으며, 저 역시 글에서 여러 번 썼듯이 그런 오해와 선입견을
바탕으로 이 글을 쓴 것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2015-03-27 15:59:11 | 김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