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무리는 새끼 양육을 매우 중시합니다. 무리 중에서 새끼를 생산할 수 있는 늑대는 오직 수컷 알파와 암컷 알파만이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우수한 종자의 생산과 효율적인 관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암컷 알파늑대는 적게는 3마리에서 많게는 9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게 됩니다. 암컷알파는 새끼를 낳으면 10주 동안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며 보살피다가 그 이후에는 무리에게 새끼 양육을 맡깁니다.(무리가 있을 경우) 이때 ‘베이비시터’의 역할은 주로 조직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늑대이거나 늙은 늑대가 담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꼭 그들에게만 새끼 양육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파 늑대를 비롯하여 모든 늑대가 새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후 6개월 까지 공동으로 보호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해주는 등 그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왜, 늑대 무리는 새끼양육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음 세대가 잘 성장해야 조직이 건재해지고 조직이 건재해져야 다른 늑대 무리나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늙어도 무리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험용도라고나 할까요? 이처럼 늑대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자신들의 무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꿉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은 다름 아닌 바로 새끼늑대 즉, ‘다음 세대’ 입니다.
한 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이 땅에 무죄한 피를 흘려가며 신앙을 모범으로 전수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아야 했고, 칼에 자신들의 목을 내놓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거꾸로 박혀진 못 위를 걸어가면서까지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주님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니, 오히려 세상을 능가하는 흉내를 내며 기복주의와 권위주의를 도구삼아 ‘샤머니즘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은 스스로가 샤만(무당)이 되어, 예수님은 단지 천국티켓을 자비로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성령님은 복 빌어주고 귀신 쫓고 병이나 고쳐주면 되는 그런 싸구려 신(神)정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우리 기독교의 ‘구원’ 설교는 구원파에게, ‘재림’ 설교는 다미선이나 제칠일안식교 등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죄’는 도덕설교로, ‘의’는 윤리 설교로 대체시키고 있으며, ‘심판’은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 극단 종말주의자들의 전유물로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성령님의 가르침을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 다 빼앗겨 버린 채 교회들은 교리가 아닌 비전이라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상 속에서 허망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롬 1:21> 교회를 세우기에 급급하며, 혹시 이단으로 오해나 받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 성도들을 다른 교회에 빼앗기지나 않으까? 하면서 잔뜩 주눅이 든 전당포가게 쯤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동성애’ 뿐만 아니라, ‘종교일치운동’까지도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실정이며, 자신들의 능력 과시를 위해서는 성도들의 형편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을 미혹하여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교회(바벨탑) 건축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 <요 16:8-11>
이처럼 지금의 기독교는 탐욕이라는 우상을 숭배<골 3:5>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일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말씀보다 전통을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어 그 전통이 말씀보다 위에 있게 함으로써 전통이 마치 진정한 신앙의 유산인양 두 눈에 힘을 주며 전수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은 전통이 진리인줄로 착각하며 더 이상 온전한 하나님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다음 세대들은 더 이상 무엇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 할 턱이 없습니다. 오직 이 화려한 세상에서 그들에게는 물질주의가 제공해주는 쾌락만이 유일한 삶의 낙(樂)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함과 같으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며 또 그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을 행하느니라.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잘 저버리는도다.<막 7:7-9>
며칠 전에 아내로부터 자녀 교육에 열정이 남다른 고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의 푸념에 관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지극정성으로 아이는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외출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앞에 벌어져 숨이 턱하니 막혔다고 합니다. 전교 1등을 한다는 자신의 아이가 여자애를 집으로 데려와서 학생신분으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아이를 보내고 나서 아들에게 너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야단을 쳤는데, 아이의 변명이 더 숨이 막힐 일입니다. “엄마, 저 전교 1등이에요. 저도 스트레스는 풀어야죠.”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서 말하는 우등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공부만 잘 하면 우등생일까요? 정말로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갈수록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12년 4월에 전국 16개 시․도에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면서, 학생들이 임신ㆍ출산ㆍ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5조), 복장ㆍ두발 등 용모에 있어 개성을 실현할 권리(12조) 등이 시행됨에 따라 중고등학생들이 임신을 해도, 건전치 못한 옷을 입어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 강요 금지(16조) 조항도 마련되어 있어서 부모들이 교회를 가자고 강조해서도 안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학문은 철학(philosophy, 哲學) 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문의 목표는 ‘의(義), 정(正), 지(知)’ 즉, 신(神)에 대한 의로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바르게 사는 도(道)에 대하여, 인간(人)의 본질에 대한 지식(知識)을 가르치는 철학 교육이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도 그러한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생산자(경제), 군인(국방), 철인(정치)를 만들기 위해 ‘플라톤주의’에서 기인한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에 노동자 생산을 위한 교육제도를 이식시켰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교육은 ‘의(義), 정(正), 지(知)’라는 이념 대신에,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나타내는 ‘지정의(知情意)’에 대한 교육철학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특히, 여기에서 정(情)은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를 강조하는 개념으로써 즉, 인본주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1910년에 지정의(知情意)론에 의해 비판 받았던 ‘지덕체(智德體)’ 이론이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의 교육 이념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의 세대들은 ‘정의(正義)’가 무엇인지조차 배울 수도 없고 강조되지 않은 비본질적인 교육 즉, 지식만을 위한 교육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우월주의’가 우리 사회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면서 아이들은 더 이상 신에 대한 두려움도, 바르게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질서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실체 없는 교육의 늪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생각하는 사고력의 단절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듯함). 그래서 앞에서 전술한 학생(전교 1등 한다는 고등학생)처럼 ‘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없는 세대들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소년 범죄율이 전체 범죄의 6.8%를 넘어선 적이 없었으나 2012년에 이르러 8.3%를 넘어섰고 그 중에서 강력 범죄 발생 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더욱 악해져 가는 사회 환경)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다음세대(자녀)들을 양육해야 할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적만 좋은 우등생 자녀로 만들든지 아니면, 비록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말씀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돕든지 말입니다. 물론, 학교 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우등생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출발선상에서 만큼은 이 둘 중 어느 한 가지에 분명한 목표(우선순위)를 두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부모들의 몫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된 성도들이라면, 선택이라는 자율성을 뛰어 넘어 의무감으로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속성이 ‘거룩’이시기 때문입니다<수 24:19, 삼상 2:2, 6:20, 욥 6:10, 시 71:22, 잠 9:10, 30:3, 사 5:16, 5:24, 10,20, 호 11:12, 요 17:11, 딤후 1:9, 요일 2:20, 계 4:8, 6: 10, 15: 4 ..,>.
늑대들은 더 나은 늑대가 되기 위해서 교육을 시킵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더 사회적이고, 더 조직에 충성하고, 더 무리들을 아끼고, 더 질서를 존중하고, 더 사냥을 잘 하는 등.., 한 마디로 ‘더 늑대다운 늑대’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지요. 모든 동물이 그렇듯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늑대들은 사냥만 잘 한다고 해서 우등생으로 인정해주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늑대는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 핵심은 ‘헌신’이고, ‘배려’입니다.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늑대는 절대로 높은 서열에 이르지 못하며 오래지 않아 무리에서 퇴출을 당하고 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늑대는 아주 철저하고 냉정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육도,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통해서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히 6:1>. 그 첫 걸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성품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의 구별됨. 즉, 거룩함을 겸비한 사람의 예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요 4:24>, 그러한 사람을 다윗처럼 마음에 맞는 자<행 13:22>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많은 늑대들이 살았지만, 인간들의 왜곡된 지식으로 모두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도 왜곡된 교리와 전통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전수된다면 다시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들과 같이 올바른 크리스천을 찾아볼 수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나마 이 땅에 신앙의 양심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들과 선조들의 피.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다던 이 인천 땅에 다시금 바른 성경 『1611 킹제임스흠정역』을 허락해주셨고, 이를 통해서 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교리를 전수해줄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그러나 더 이상 감격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올바른 성경을 통해 올바른 교리를 할머니/할아버지가 그리고 부모들이 듣고, 읽고, 깨달아 삶과 가정에서 다음 세대(자녀, 손자)들에게 바르게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사명이므로 하루 이틀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오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의 선조들처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천 명이 우리 가운데서 불 일듯 일어날 것 이라고 확신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시간은 바로 ‘오늘’ 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바른 교리의 복음이 가정에서 삶에서 다시 되살아나 ‘다음 세대가 이 세대보다 주님을 더 잘 믿는 세대’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니라, 하시니라.” <열왕기상 19:18>
2014-01-18 23:48:09 | 김상진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내일은 주일이고 모두 바쁜 날이니 평일날 전화로 신청하겠습니다.
오늘도 저희 교회의 한 집사님에게 KJB흠정역을 소개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분이고 아끼는 분인데 저와 함께 바른 성경을 읽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용기를 내었습니다.
오늘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과 눈을 열어 주시기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가 운영하는 영어성경학교의 텍스트가 NIV입니다.
이 성경의 정체를 모를 때 교회에 들여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정목사님과 상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 주일을 사모하는 평안한 밤 되소서~~
2014-01-18 22:48:26 | 전소영
네~~글로 올려주신 그 마음을
킵바이블을 오가는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겁니다.
저 또한, 과거 그런 마음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누구든지 주저하지 마시고 킵바이블 전반에 대한 문의나
성경, 도서 구매와 소책자&설교 CD를 받아 보기 원하시면
032-872-1184로 전화 주십시오.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가 진리를 찾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01-18 10:59:44 | 김대용
반갑습니다. 글 올리실 때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간혹 당황스럽게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요...ㅎㅎ
자료 받으시고 앞으로 더 자주 오셔서 바른 말씀을 공유하시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2014-01-18 10:38:43 | 김재욱
샬롬!
여기로 연락 주세요.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940
2014-01-18 10:04:17 | 오광일
처음 인사드려요. 이곳에 이런 글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동영상 설교와 자료들을 도움만 받다가 용기내어 글을 올립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며칠전 사랑침례교회로 전화를 걸어 무작정 정동수목사님과 통화하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어요.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셨는데 그분께 말씀만 전달드리고 끊었습니다.
후에라도 정동수목사님과 꼭꼭꼭 대화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결교단의 한 교회에 남편이 부목사로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사모이자 유초등부전도사, 그리고 영어성경학교 강사입니다.
제가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천주교와 기독교는 다르다'(?제목이 맞나요) 소책자를 받고 싶습니다.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지금 꽤 오랜 시간동안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제 글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몰라서 참 조심스럽네요.
오늘도 평안하시고 답글 기다리겠습니다~~^^
2014-01-18 01:53:35 | 전소영
안녕하세요.♥
2절에, 그리스도의 날과 3절에 그 날이 다른 거군요.
그리고 먼저 떨어져 나감 = 두 방향의 떠나감 (배교와 휴거)
정리가 됩니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샬롬.
2014-01-18 01:32:48 | 조형래
올해는 작년보다 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읽어야 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샬롬!
2014-01-17 23:28:15 | 박성원
형제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에 절로 미소가 납니다.
반성도 되고요~.
항상 건강하시고 말씀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2014-01-17 12:29:37 | 김재욱
안녕하세요~?
2절의 그리스도의 날은 주의 날(지상강림, 현현)과 대비되는 것으로 공중강림(휴거)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 당시나 우리 같은 성도들이 기다리는 때는 공중강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절부터는 지상강림의 날, 그리고 넓게는 주의 날(주님이 돌아와 통치하시는 기간. 환난기+천년왕국까지)
전체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자주 경고되었던 ‘그 날’은 거의 지상강림, 마지막에 있을 민족적 회개의 때를 나타냅니다.
가능하시면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글도 참고하세요.
휴거 & 재림, 시기와 대상 총정리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027
2014-01-17 12:26:07 | 김재욱
네 형제님 도움이 되시길 바라고요.
'그 날'은 3절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 후에 옵니다.
다음의 글을 참조하세요.
*두 방향으로의 떠나감(휴거/배교)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1675
평안하십시오.^^
2014-01-17 11:50:42 | 김대용
네. 그 날(그리스도의 날)을 주께서 이루신다는 전체적 입장으로 보니 조금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귀한 답변 감사드려요.^^
샬롬.
2014-01-17 00:56:31 | 조형래
'아 달다 하나님 말씀'
형제님의 고백으로 인해 눈물이 나고
가슴이 떨리고 영에 충전이 일어나는 듯 합니다.
마치 멈춰 있던 기계에 전원을 넣는 것처럼 말이죠.
귀한 도전을 받고 갑니다.
무엇보다 귀한 말씀이
한 영혼을 회복하고
구원하는 일들을 더욱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꾸벅!
2014-01-16 20:21:50 | 허충식
조형래 형제님 반갑습니다.^^
문맥을 조그만 주의 깊게 보면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3절의 ‘그 날’은 2절의 ‘그리스도의 날’을 의미하고
2절 그리스도의 날은 1절의 내용을 살피면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 날’ 또는 '그리스도의 날'(빌1:6 등) 즉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1절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을 통해 휴거가 일어나는
미래의 어느 특정한 하루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는 재림은 예수님의 공중 강림으로
지상의 성도들이 휴거되는 그 순간부터
7년 환난의 기간 후 예수님께서 지상에 강림하시기까지의
모든 총체적인 사건과 기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 날을 적그리스도의 출현 시점과 연관해
이해해 보십시오.
제 답변의 미흡함은 다른 분들이 보충해 주시길 기대하면서
평안하시고 앞으로 귀한 댓글로도 함께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4-01-16 15:59:04 | 김대용
주머니에 꼬깃꼬깃 모은 돈으로,(성경책이 너덜너덜해져서) 400주년 기념판을 구입했습니다.
이번에 고린도전서부터 다시 읽으면 흠정역으로 3독째네요! 3독!
아- 너무 기뻐요- 종종 일에 지치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른답니다.
"아- 말씀이 먹고 싶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에 완전한 말씀은, 인생의 사막길을 걷는 모든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오아시스 같은
존재인 것 같아요- 또 항상, 킵바이블에 오면 좋은 글들이 많아 프린트해서 집에 가서 읽곤 한답니다.
전, 지금 동성애 반대소설을- 4년간에 걸쳐 쓰고 있는데요-
킵바이블에 있는 글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흠정역은- 제 글 실력을, 많이 높여주었고요-
소설 쓸 때- 흠정역에서 문장을 가져와 응용하여 쓰거든요-
아- 저는 정말 하나님 말씀 없인- 못 사는 사람이에요- 육신의 고픔보다 영에 고픔을, 채우는 것이
어느새 제겐 더 큰 기쁨이 되었으니까요-
2014-01-16 15:04:50 | 신진성
좋은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읽고 가요! 정말 이런건 저에게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던 문제인것 같아요- 늘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지만 늘 같은것에 걸려넘어지네요- 하나님께 더욱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14-01-16 14:48:31 | 신진성
안녕하세요.
몇일 전에도 질문을 했었는데, 게시판에 질문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또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서신서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적그리스도에 대해 명확히 나오는데,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예수님께로 함께 모이는 것(개역개정에는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대해 쉽게 미혹되지 말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 그 날(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이르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멸망의 아들 적그리스도는 대환난 후 3년 반 시작 때 본색을 드러내는데,
그렇다면 3절에 그 날(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예수님께로 함께 모이는 것)은 언제를 말씀하는 것인가요?
핍박 받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오심,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을 것에 대해 참 소망의 메세지를 주는데요,
그 날이 모두가 볼 수있게 오시는 예수님의 오심인가요? 아니면 휴거를 말하는 것인가요?
휴거는 7년 환난 전에 일어난다고 공부했는데...
제가 많이 부족하여 형제님들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지혜롭게 봐야 하는지 형제님들의 답변을 부탁드려요.
1
형제들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2
너희는 영으로나 말로나 혹은 우리에게서 왔다는 편지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
3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4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
5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이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너희가 기억하지 못하느냐?
2014-01-16 12:59:59 | 조형래
안녕하세요.
아래 링크된 '로마서 강해 1'을 클릭하셔서 강해 노트 PDF 파일을 다운받으세요~!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261
2014-01-15 21:07:30 | 김대용
로마서 강해노트가32강 까지만 있는데 나머지는 어딨죠?
2014-01-15 16:00:24 | 이장복
안녕하세요?
받아들이는 분의 믿음 수준, 또 평소 생각에 따라 책을 잘 결정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또 개신교를 바라보는 입장이나 참된 복음을 아는 수준 등을 고려하셔야 할 듯합니다.
저도 천주교의 유래 등을 천주교인에게 전달해 봤지만 오히려 싸움만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의 경우는 흠정역 성경만 드려도 그 차이를 깨닫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어떤 경우는 알베르토 시리즈처럼 강한 내용이 오히려 충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종말론이나 세상의 징조에 관심있는 분들 같은 경우 신세계 질서에 관한 책으로도
그 음모가 천주교와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많은 책보다는 바른 복음을 알리면 그 능력에서 참된 빛을 발견하지 않을까요?
내용으로는 말씀하신 책들만으로도 충분하고 명명백백히 드러난다고 생각됩니다.
잘 선택하시고 기도로 준비해 좋은 결과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2014-01-14 10:36:58 | 김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