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12404개
    궁금해서 한번 찾아 보았습니다. 위 그림은 원문을 아래아한글로 타이핑 한 것으로 캡쳐해 보았습니다.    원이 엄마 편지 옛글 원문   [외면]워니 아바님? 샹? (주 : 편지 겉면의 제일 왼쪽 가장자리에 이렇게 쓰고는 종이를 뒤집어 본문을 써나갔다. 이렇게 하면,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끝에서부터 접었을 때, 이 부분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편지를 펼쳐보지 않아도 누구에게 쓴 편지인지 알아볼 수가 있다)   [내면]자내 샹해 날?려 닐오? 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 죽쟈 ?시더니 엇디? 야 나? 두고 자내 몬져 가시? 날?고 ?식?며 뉘 긔걸?야 엇디 ?야 살라 ?야 다 더디고 자내 몬져 가시?고 자내 날 향? ??믈 엇디 가지며 나? 자내 향? ??믈 엇디 가지던고 ?양 자내?려 내닐오? ? ? 누어셔 이보소 ?도 우리 ?티 서? 에엿? 녀겨 ?랑?리 ?도 우리 ??가 ?야 자내?려 니?더니 엇디 그런 이? ?각디 아녀 나? ?리고 몬져 가시?고 자내 여?고 아?려 내 살 셰 업?니 수이 자내 ?? 가고져 ?니 날 ? 려 가소 자내 향? ??믈 ?? 니?∨줄리 업?니 아?려 셜운 ?디 ?이 업 ?니 이내 안? 어듸다가 두고 ?식 ?리고 자내? 그려 살려뇨 ?노이 다 이내 유무 보시고 내 ?메 ?셰∨와 니?소 내 ?메 이 보신 말 ?셰 듣고져 ?야 이리 서 년뇌 ?셰 보시고 날?려 니 ?소 자내 내 ? ?식 나거든 보고 사롤 일?고 그리 가시? ? ?식 나거든 누? 아바∨?라 ?시?고 아?려 ?들내 안 ??가 이런 텬디 ?온? 이리 (주 : 여기까지 쓰고는, 쓸 곳이 부족하기에 종이를 돌려 위쪽 여백에 이어서 썼다)   [내면 위쪽 여백]하? 아래 ? 이실가 자내? ?갓 그리 가 겨실 ?거니와 아?려 ?? 내 안 ?티 셜울가 그지그지 ?이 업서 다 몯 서 대강만 뎍뇌 이 유무 ?셰 보시고 내 ?메 ?셰 와 뵈고 ?셰 니?소 나? ?믈 자내 보려 믿고 인뇌이다 몰? 뵈쇼셔 (주 : 여기까지 쓰고는 다시 편지를 돌려, 편지의 첫줄 앞의 여백에 글자가 거꾸로 되게 써나갔다)   [내면 오른쪽 여백에 거꾸로]하 그지그지 업서 이만 뎍뇌이다. (주 : 여기까지 쓰고는 다시 종이를 돌려 맨 우측에 편지를 쓴 날짜와 발신자를 적었다) [내면 오른쪽 여백]병슐 뉴월 초??날 지븨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위글은 원문을 아래아 한글로 타이핑한 것은 일반 텍스트 글로 변형해 보았는데 유니코드엔 맞는 코드가 없어 글자가 변형 되어 따로 캡쳐한 화일을 위에 첨부 하였습니다.---------------------------------------------------------------------------------------------------------- 원이 엄마 편지 원문 (지금 표기할 수 있는 글자로표기) 과 해석. 원이 아바님께 (원이 아버지에게) 병슐 뉴월 초하룻날 집에서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자내 샹해 날드려 닐오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말하기를)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엇디하야 나를 두고 자내 몬져 가시노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날하고 자식하며 뉘긔 걸하야 엇디하야 살라하야 (나와 자식들 누구에게 의지하여 어찌 살라고)다 더디고 자내 몬져 가시는고 (다 던지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자내 날 향해 마음을 엇디 가지며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나는 자내 향해 마음을 엇디 가지런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매양 자내드려 내 닐오되 한데 누어 새기보소  (함께 누우면 언제나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엿비 녀겨 사랑호리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남도 우리 같은가 하야 자내드러 닐렀더니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하며 당신에게 말했지요)엇디 그런 일을 생각지 아녀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나를 버리고 몬져 가시난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자내 여히고 아무려 내 살 셰 업스니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가 없어요)수이 자내한테 가고져 하니 날 데려가소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자내 향해 마음을 차승(此乘)니 찾즐리 업스니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아마래 션운 뜻이 가이 업스니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이 내 안밖은 어데다가 두고 (내 속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자내를 그려 살려뇨 하노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따 이 내 유무(遺墨) 보시고 내 꿈에 자셰 와 니르소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내 꿈에 이 보신 말 자세 듣고져 하야  이리 써녔네 (내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자셰 보시고 날드려 니르소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자내 내 밴 자식 나거든 보고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사뢸 일하고 그리 가시지 (말할 것 있다 해놓고 그렇게 가시니)밴 자식 놓거든 누를 아바 하라 하시논고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겁니까?)아무리 한들 내 안 같을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이런 텬디(天地)같은 한(恨)이라  하늘아래 또 이실가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자내는 한갓 그리 가 겨실 뿐이거니와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아무려 한들 내 안 같이 셜울가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그지그지 가이 업서 다 못 써 대강만 적네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이 유무(遺墨) 자셰 보시고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자셰히 뵈고 자셰 니르소 (내 꿈에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나는 다만 자내 보려 믿고있뇌 이따 (나는 꿈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몰래 뵈쇼셔 (몰래와서 보여주세요)하지 그지 업고 이만 적소이다.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지만 이만 적습니다)     원이엄마 한글 편지 전문 (현대 말 해석)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이런 슬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당신은 한갖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아내 올림   전문가의 해석 없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글이네요. 그야말로 암호문?
2012-11-01 13:39:25 | 허광무
역으로 지금 우리가 3500년 전에 작성된 문서를 생생히 너무나 쉽고 흔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자체, 성경의 존재 자체가 불신자들에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잘 증명하는 것인데 말이죠. 며칠전 다니엘서 9장을 읽다가 다니엘이 책들을 통하여 예레미야서의 70년을 깨닫는 것과 또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맹세와 저주가 임함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들을 확증하셨다는 고백을 읽으면서 일반적인 문화에서 세월에 따른 언어의 변화로 어떤 문서가 900년이 지난 뒤엔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할텐데 다니엘은 900 년 전의 모세의 책들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보존하시고 전달하신다는 증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나라는 도대체 그 기원전 1450년부터 기원전 5-600년 경에 어떤 역사적 일들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데 말이죠. 컴퓨터는 커녕 종이도 없고 인쇄술도 없었던 시대 우리나라 500백년전 조선시대 글조차 지금 우리는 맘대로 제대로 읽을 수 없지만 히브리어 자음만으로 된 두루마리 성경의 내용이 먼저는 그 옛날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에게 시간의 장벽이 없이 완벽하게 전달되어졌다는 또 하나의 사실 자체가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책이다라고 아이들에게도 말해주었지요.
2012-11-01 13:05:41 | 김선희
종종 수천 년 전의 성경 기록들로 전 시대와 비교하며 정밀한 분석과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에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성경에 관한 각종 오해가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하루속히 풀리기를 바랍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2012-11-01 10:07:45 | 김재욱
독립신문보다 수백 년 전에 한자가 전혀 없이 한글로만 적힌 글이 전해진다는 게 무척 놀랍네요. 물론, 그래도 어차피 지금 우리는 제대로 읽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죄 때문에 한꺼번에 동반 타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언어와 민족을 구분하기도 하셨지만(바벨 탑 사건), 영적 접근성은 말이든 글이든 언어로 차별을 결코 하지 않으시지요.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 언어에 대한 원칙을 생각해 봐도 명확한 사실이며, 이는 성경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여타 이상한 종교들에 그런 관행이 많습니다(염불, 라틴어 주문, 경전의 원어 드립 등등).
2012-11-01 07:23:09 | 김용묵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는 1998년 안동에 있는 고성 이씨(固城 李氏) 이응태(李應台1556~1586)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420년 전에 한 여성이 한글로 기록한 ‘러브레터’이다. 임신 중에 있는 젊은 여인이 31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종이 하나 가득 표현했다. 16세기 조선 여인의 가슴 뭉클한 이 사연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도 소개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한글 편지에는 종이 가득 420여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한 여인의 애절한 감정이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지만 21세기 한국인이 이 한글 편지 원문을 살펴보자면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충은 읽고 대충은 이해하겠지만 전문가의 도움이 없다면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기껏해야 400년의 시차가 있을 뿐인데 원이 엄마에게는 일상의 글이고 말이었을 것이 우리에게는 사학과나 국문과 교수님이 다룰 수 있는 전문 지식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고문서를 해독하고 과거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야의 권위자가 따로 있어야 한다.   이것이 언어이고 글이며 말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면서 ‘원이 엄마의 편지’를 읽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그리스어로, 라틴어로 몰려가며 그 언어의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성경을 알 수 있는 최고 권위자로 인정한다.   성경을 믿음이 아닌 학문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   모든 신자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400년 전에 한글 편지를 썼던 원이 엄마는 죽었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편지를 썼던 여성이 죽었기 때문에 그녀가 사용했던 단어와 표현과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400년 전 중세한글을 연구해야 한다. 그런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이 이 분야에서 권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3천 년 전에 히브어로 말씀하시고 2천 년 전에 그리스어로 말씀하신 원저자가 여전히 살아 계신다. 따라서 3천 년 전 언어를 연구하거나 2천 년 전 언어를 공부해야만 그분이 사용한 단어와 표현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에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당신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셔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옛날 성경에 써 있는 것과 동일한 진리를 말씀하고 계신다. 진짜 성경을 읽고 싶다면 고대 언어를 공부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읽을 수 있는 성경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성경인지를 분별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살아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보존이다.   400년 전에는 규방의 여인도 자유롭고 생생하게 사용하던 단어와 말과 글이 지금의 전문가의 영역으로 넘어갔는데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인간을 대하신 적이 없다. (생명 없는 종교는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계시를 특정 언어에다 가뒀다. 라틴어,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면 언제나 그들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글과 말을 사용하셨다. 3천 년 전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의 언어였다. 그들에게는 일상의 언어였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세의 율법을 누군가 앞에서 읽기만 해도 남자든 여자든 다 알아 들었다. 메모를 했다가 나중에 단어를 찾아가면서 따로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히브리어에만 권위를 두는 사람들 중에서 이 정도 실력을 갖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여성들도 어린아이들도 히브리어를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글과 말로 성경을 주셨다.   2천 년 전 그리스어는 보통 사람의 언어였다. 하나님께서는 저잣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알 수 있는 글과 말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주셨다. 언어의 천재들만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대학 교수들만 그리스어를 이해한 것이 아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셨을 때 누구라도 그분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율법 박사들만 그분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종교 지도자만 그분과 대화할 수 있던 것도 아니다. 어부도 세리도 장애인도 바리새인도 여인들도 어린아이들도 하나님의 아들과 대화했고 그분의 말을 알아들었다. 심지어 죄인과 창녀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다. 평생을 ‘개’같이 살았던 한 강도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그 순간에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그분과 대화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고 알리시는 방법은 단순하다. 그분의 말을 듣고 이해하며 그분과 대화하는 일에서 전문가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저잣거리의 여인이나 뒷골목의 왈패들조차 알 수 있는 글과 말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셨다.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서 믿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언어로만 말씀하셨다. (라틴어 속에만 갇혀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 있는 언어로 전달되기 시작한 사건이 종교개혁이다)   고대 언어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있다면 “지금” 나에게 주신 성경은 아니다. 물론 그 성경에 기록된 언어를 자신의 일상의 글과 말로 소유했던 사람은 존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고대의 언어를 전공하고 중근동 언어를 연구해야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믿고 섬기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한 신이 아닌가?   수천 년 전에 어린아이들과 여인들에게도 말씀하실 수 있던 하나님이라면 지금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 옛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성도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면 우리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고대 언어 전문가들에게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믿음 없이 학문의 대상으로만 성경을 관찰하게 되면 ‘고대 언어와 역본’ 얘기로만 가득 차게 된다.   킹 제임스 성경의 위대함은 살아 있는 언어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히브리어를 들으면서 알았던 바로 그 말씀을,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어를 들으면서 알았던 바로 그 말씀을 오늘날 우리는 킹 제임스 성경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게 된다. 킹 제임스 성경의 어휘를 재정의 하거나 재번역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왕과 신실한 일꾼들을 통해서 그 일을 이미 400년 전에 끝마치셨다. 킹 제임스 성경은 지난 400년 동안 온갖 종류의 비난과 공격, 모함에 대항하여 성공적으로 방어해 왔으며 입증되어 왔다.   비슷한 시기의 두 문서가 있는데 하나는(원이 엄마의 편지) 읽기도 힘들지만, 하나는(킹 제임스 성경) 여전히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이것이 세속적 학문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차이다.   고대 언어를 해석하는 사전(원어로 된 성경이라고 주장하지만 대개는 사전이다)에서 찾아낸 단어 몇 개로 신비로운 계시를 깨달은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스타일로 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여기저기서 찾아낸 단어 몇 개 공부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쭉 읽으라고 성경을 주셨다. 지금 내가 아이들과 함께 쭉쭉 읽을 수 있는 성경, 그것이 "지금"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 참고로 다음을 보기 바란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272    루시퍼 간단 정리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25 
2012-10-31 23:45:23 | 김재근
성경을 번역해야 하는 이유   저는 지난 12년 동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번역해서 출간/판매해 오고 있습니다.이 기간에 저는 여러 이유로 성경을 번역하겠다는 분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성경을 번역할 분들이 있을 터이므로 이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로는 제발 번역 작업을 하지 말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스스로 시간을 버리는 일이고 그 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오도될 수 있습니다.   (1) 흠정역 성경은 사역(私譯)이기 때문에 우리가 번역해야 한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대부분의 성경은 사역 성경입니다. 유명한 히브리어 벤카임 마소라 본문,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공인본문, 베자의 공인본문, 루터 성경, 틴데일 성경, 스페인의 라이나 발레라 성경, 프랑스의 올리베땅 성경과 심지어 최근에 나오는 NIV, NASB, NKJV 등이 모두 사역 성경입니다. 저희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저 개인이 홀로 번역한 것이 아니고 제가 번역한 본문을 20여 명의 형제님들이 - 다 바이블 빌리버들임 -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살펴보며 교정하고 또 10여 년의 교정 기간을 통해 여러 독자들이 지적해 준 것을 반영하여 만든 것입니다. 사역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는 역본 역시 사역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공적 성경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모릅니다. 공적인 것은 정부 같은 공적 기관에서 주도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의 유일하게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공적 성경입니다. 이분들이 무엇을 펴내도 그것은 다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을 펴서 성도들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2) 흠정역 성경은 그동안 몇 차례 판을 바꾸었기 때문에 우리가 번역해야 한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도 1611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1380년경부터 영어 성경이 나오면서 약 230년의 교정 기간을 거쳐 1611년에 본문이 고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출간하면 절대로 교정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번역의 빌미로 삼는 분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교정을 해서 바르게 내서 본문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부지런히 교정해서 본문을 정착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리 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3) 흠정역 성경은 판매를 통해 이윤을 내기 때문에 우리가 번역해야 한다.   기드온 협회나 성경 보급 기관의 무료 성경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성경에는 판매 이윤이 붙습니다. 이윤이 생겨야 교정도 더 빠르게 하고 성경 홍보도 하며 선교용으로 값싸게 혹은 무료로 성경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성경 본문 번역과 성경 출판 사업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보급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희는 가장 좋은 재료를 써서 세상의 다른 성경들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합당한 가격에 성경을 판매해 왔습니다. 저희는 어느 누구의 돈도 갈취하지 않았고 열심히 일해서 빚지지 않고 여기까지 사역을 끌고 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 땅에서 많은 이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는 일을 직접 보았고, 이단에 빠진 분들이 바른 진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국에서도 많은 성도들이 진리 안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성경 판매로 만들어진 이윤으로 저희는 먼저 출판사를 유지하고 또 여러 종류의 책들과 CD, 전도지 등을 만들어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즈니스 차원으로 성경을 만들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저희 성경을 폄하한 뒤 "우리 교회가 공적 성경 번역의 이 중차대한 일을 실수 없이 추진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분들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이윤이 안 나면 결국 누군가 무고한 성도들의 돈이 들어가야 출간 사역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번역을 해야 할까요?   성경을 번역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지금 쓰고 있는 성경의 본문이 왜곡되어 진리를 가리거나 대본은 좋은데 번역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한성서공회의 개역성경(개정판), 표준 새번역, 공동 번역 등이 전자의 경우이고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후자의 경우이므로 저희는 바른 본문에서 바르게 성경을 새로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이 문제가 아닌 한 성경을 다시 출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희가 출간한 흠정역 성경의 본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거든 얼마든지 번역해도 됩니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됩니다.   흠정역 성경의 본문이 탐탁지 않은 경우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자기가 선정한 본문 - 원문이든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든지 - 을 가지고 스스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정직하다면 적어도 몇 년은 번역하고 또 몇 년은 교정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저희에게 고칠 부분을 알려주고 고치게 하는 것입니다. 사이트를 통해 누누이 이야기했듯이 저희는 독자들이 주는 교정 의견이 합당하면 모았다가 적절한 시기에 교정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2011년 9월에 400 주년 기념판을 냈지만 저희는 그 이후에도 독자들이 주는 의견을 귀중하게 모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역에 대한 좋은 의견이 있으면 언제라도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누군가 성경을 번역하려고 하거든 부디 번역의 대본과 질을 이유로 내걸고 새롭게 번역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온 모든 성경들의 번역 이유입니다. 심지어 NIV, NASB 등도 다 같은 이유에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이런 이유 외의 다른 것을 번역의 사유로 내거는 것은 사실 성도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들의 헌금과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부디 성도들도 다시는 그런 이유를 내거는 분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평강을 기원합니다.   2012년 10월 31일(루터의 종교개혁일에)   정동수 드림
2012-10-31 15:59:57 | 관리자
왜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는 이단에 빠져들까요? 기존의 교회들이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번역이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흥종교로 떠오르고 있는 신천지의 실상을 잠시 시간을 내서 살펴보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Y6bAp5xc8ME&feature=player_detailpage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모두 회개하고 바른 복음, 바른 예수님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왜 이 민족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샬롬  
2012-10-31 12:25:28 | 관리자
어느 자매님의 간증의 글을 올립니다. 제가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잘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와 회심은 가짜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정동수   -------------------------- 회개 없는 구원의 위험이 글을 꼭 쓰고 싶었는데,,거처하는 곳에 PC가 없어 핸드폰으로만 보다가 남의 집에 와서 몇 자 적습니다. 저는 현재 주거지가 외국입니다. 박옥수 목사의 기쁜소식선교회(기소선)의 비리나 썩어빠진 교리 등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나의 연약함만 탓하다가 '기쁜소식선교회를 나온 사람들'이라는 네이버 카페와 쉼터의 자료실을 통해 상당한 사실들을 알았습니다,   그 후 정말 믿기지 않는 이런 비리들의 원인이 뭘까 많이 생각했고올라오는 말씀을 보며킹제임스 성경이란 생소한 성경을 알게 되었고,그 성경을 10여 년에 걸쳐 번역하고 흠정역으로 펴내신 목사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그분의 성경 지식과 교사로서의 간결함그리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 우리에게 오로지 성경만을 가르쳐주는 그 말씀들을 들으며내 마음에 말씀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그 신뢰는 믿음으로 바뀌며기소선에서 연약함으로 치부되었던 나의 믿음이이제 말씀 안에서 회개와 믿음 그리고 진정한 구원의 의미그리고 그 구원이 주는 성화의 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몰라도 저는 이 카페에서 기소선의 비리를 보며 내 구원을 의심했습니다..뿌리가 저러 할진대 그 열매인 나는 어떠한가 하고요. 수리공식적인 구원의 방법, 즉 "예수님 죽음 +죄 없다 = 의인"이것은 깨달았지만성경 말씀을 통해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 그 회개에서 나오는 믿음, 그 믿음의 결과는 구원그 구원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 가며,, 구원을 일로(행위로) 드러내는 성화의 과정이 나에게는 없었고그냥 “죄 없다” “의인이다”라는 주문 같은 구원만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자 기소선의 비리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구원 바로 알기" 시리즈 말씀을 일주일을 넘게 반복해서 들으며내 상태를 점검했고그 목사님 말씀처럼 178도, 179도가 아니라세상에서 180도 돌이키는 회개내 마음에 찌꺼기가 남지 않는 회개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끄집어내려도내 마음에 세상 것에 대한 아까움이 없고 내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셔서나를 인도하고, 지키고, 나를 변화시키시며절제를 주시고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기소선은 박옥수 목사가 어느 날 새벽에 스스로 깨달아 얻은 "깨달음의 구원" "죄 없다 구원"만 존재할 뿐 하나님 앞에 근본적인 회개가 빠진 구원을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회개와 믿음" 책을 발간할 때 한동안 유행처럼 "회개"를 외쳤지만전후로도 이미 "죄 없다 구원"은 "회개와 믿음"을 이겨 버리고 독자적인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어설픈 구원을 지키기 위해내 죄가 없어졌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온갖 명세표를 가진 "복음을 위하여"의 세금을 걷어 들이고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구원은 절대 완벽하지 않습니다.깨달아 알게 된 구원은, 처음엔 기쁠지 몰라도 부작용이 많습니다.혼의 자유가 없이 구원이란 것에 얽매이게 됩니다.그 구원을 깨닫게 해 준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그리고 그 단체의 노예가 되고 자유의지가 사라지고 그리고 좀비가 됩니다.   그들은 살짝 변질된 말씀을 가지고 구원을 설계했고(안수복음)한번 잘못된 설계도는 아직도 수정되지 않았습니다.그 구원은 성령을 상실했고때문에 “성령의 열매는 사치스럽고 육신적이다. 우리는 연약하여 할 수 없으니 생각을 버리고, 생각을 꺾자”로 성령을 대신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갈라디아서를 통해 "육신의 행위들은(5장 18~21)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하였고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인데 이 열매를 대적할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5장 22~23절).   구원받은 자에게 한번 들어온 성령님은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습니다.항상 나를 지키고 내 양심을 선하게 하고그래서 나를 세상을 향해 절제시키고 통제하셔서온유한 맘을 품게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자기감정, 형편을 간증하는 그 찌질한 간증하고는 차원이 다른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줍니다.   그러한 것이 성화의 과정이고 (성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있는 것 같이 너희에게 이르렀으며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 날부터 너희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열매를 맺는도다.... 주께 합당하게 걸어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나고" (골1:6, 10)   그런데 기소선의 현실은 절대로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모두 "박옥수 열매"가 주렁주렁 합니다. 그들의 삶에 "성령의 절제"는 없습니다. “박옥수의 통제"만 있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은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절제하게 만듭니다.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삶은 육신의 절제와 함께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그 고요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지게 하고오로지 교회와 함께 행사를 하며 몸으로 처참하게 체험하는 미련한 신앙은 곧 바알을 섬기는 것과 흡사하며 그들이 말하는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흐르는 종(목사)의 말은 위에서 아래로까지 역병과 같이 죄와 사악함과 욕설과, 난폭함과 매정함을 통해성령을 훼방하고 영혼을 죽게 합니다. 차라리 비리만 있다면 좋겠습니다,그 안에서 구원도 아닌 구원을 움켜쥐고 고생 끝에 지옥가면 어쩌겠습니까?정말 무서운 현실입니다.   그 선자자 같은 종의 흐름의 결과가 또별(기소선에서 암, 에이즈 치료제로 선전하는)인 것 같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62&aid=0000004777   제가 지금 잠깐 한국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기소선 교회 자매가 간암 초기였는데 4개월 전 또별 먹고 다 나았다고 간증했습니다.근데 4개월 후인 지금 온몸에 암이 전이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이제는 듣는 것도 희미해져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간암 초기에 수술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어보니 또별 먹으면 나을 거란 믿음으로,, 믿음으로 낫겠다는 욕망, 또별을 믿는 마음, 이미 이 마음을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 같습니다.   어느 말씀인가분별없이 악을 같이 따라가는 자에게도 하나님이 악을 행하는 자와 똑같이 벌하신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교회에 또별로 인해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죽어 감을 보여 줘도그들의 악함은 도를 넘어오히려 죽는 자의 믿음을 탓하며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런 악한 곳에 머물러 있었던 우리들그리고 이제 탈출하여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우리들,,그곳에서 아직도 옳고 그른 것을 구별 못하며 오로지 "종"을 위하는 마음이 믿음이라고 믿고 있는 불쌍한 성도들우리는 그들을 위해바른 말씀을 올리고 사실들을 부지런히 전하여그들의 눈을 뜨게 할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기소선 나오신 분들도 킹제임스 성경을 보시면서 말씀을 듣고고요하게 하나님과 교제하시며 성화의 삶을 사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외국에 거하는 한 자매
2012-10-31 11:49:48 | 관리자
좋은 분석 감사합니다. 요엘서는 7년 환난기와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1-2장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1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닥칠 것을 보여 주고 3장은 주님께서 천년왕국에 들어갈 이방인들을 구분하고 그들과 및 환난기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거주민으로 삼으시고 친히 예루살렘에 거하시면서 다스리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질문의 요점은 2장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대환난에 들어간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yes와 no입니다. 사실 2장의 요점은 대환난에 들어가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그 환난(특히 끝부분)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원받을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부분은 스가랴서 12-13장에 있는 대로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을 가진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수는 매우 작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대환난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적한 대로 맞지 않게 보입니다. 이런 차원에서는 대답이 no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장 다음에 3장이 나오면서 천년왕국이 나오므로 이미 주님의 무서운 진노의 날이 끝나고 평화의 날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주의 날은 7년 환난기부터 1000년 왕국 그리고 그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을 포괄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문맥을 잘 보고 주의 날이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크고 무서운 주의 날은 유대인들의 경우 후반부 3년 반의 대환난기(특히 끝부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환난기가 시작되기 전에 주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을 가진 자들을 구출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7장의 14만 4천명의 유대인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대환난기 중에서도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생깁니다. 이들은 끝까지 견디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을 가지고 남은 유대인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갑니다. 중요한 점은 14만 4천이든 누구든 휴거받지 못하고 환난기에 들어가 환난기에서 구출받은 유대인들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2장을 가지고 유대인들 가운데 얼마는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그들은 구출을 받지만 불속에서 받듯이 받습니다(슥13:8-9). 3장에서 천년왕국이 임하는 것을 보면 이미 2장에서는 주의 날의 진노의 환난이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끝나는 내용이 없이 3장으로 넘어가 곧바로 천년왕국이 임하므로 문맥상 2장에서 주의 무서운 날(특히 끝부분)이 이미 끝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차원에서는 문맥적으로 2장이 이스라엘의 대환난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늘의 변화가 있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곧 유대인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대답은 당연히 yes입니다. 그러므로 2장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대환난에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가 없고 그 전에 구원을 받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1-2장에서 유대인들이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1-3장이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요엘서 인용도 당연히 유대인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부분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하기에 오늘날 방언 등의 오순절 은사운동 같은 비성경적인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샬롬 정동수
2012-10-30 11:43:46 | 관리자
교회는 대환란을 통과하는가? 라는 글을 읽고 덧글을 통해 이미 간단하게 질문을 드렸듯이, 박참하 목사님의 글을 다운받아 여러 번 읽어보는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하나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겪게 될 대환란에 대해서 반복해서 선포하셨습니다. 자, 다 같이 요엘서 2:31-32를 보십시오.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니 주가 말한 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구출이 있으며 또 주가 부를 남은 자들에게도 구출이 있으리라.](욜 2:31,32). 대환란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입니다. 대환란은 주의 날로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들에게 “크고 두려운 날”이 분명합니다.“   위 내용은 박목사님의 글의 일부분입니다. 제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과연 요엘서 2:31-32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이 대환란을 겪게된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얼핏 보면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라는 말이 등장하기에 근거구절이 되는 것 같지만 저의 판단으로는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우선 본문(31-31절) 자체에는 결코 이스라엘이 대환란을 겪는다는 직접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엘서 2장 전체를 읽어봐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요엘서 2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내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내어 이 땅의 모든 거주민들로 하여금 떨게 할지니 이는 주의 날이 이르기 때문이니라. 그 날이 매우 가까우니”(1절)   “....주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그 날을 견디어 내리요?”(11절 하반절)   “주께서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슬피 울고 애곡하며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시나니”(12절)   요엘서 2장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2장의 요점은, 앞으로 올 주의 날에 대해 경고 하며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결코 이스라엘이 대환란을 통과하며 겪는 고통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31,32절로 돌아가서, 그 구절들을 2장 전체의 흐름의 문맥에 놓고 보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31절의 시작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성경은 분명히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2절의 시작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어지는 32절의 내용은 “이는 주가 말한 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구원이 있을 것이며 또 주께서 부르실 남은 자들에게도 구원이 있을 것임이라”   31절과 32절은 2장 전체의 결론으로서, 2장 전체의 내용과 아주 잘 부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올 것을 경고하여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그 전에 회개하고 돌아오길 촉구하셨습니다. 또한 분명하게 31절과 32절을 통해,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자기 백성들이 회개하고(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돌아 올 것을 미리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이는 주가 말한 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구원이 있을 것이며” “남은 자들에게도 구원이 있을 것임이라”   2장 전체뿐 아니라 31절과 32절의 중심 내용은 이스라엘이 7년 대환란을 겪는다는 직접적인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두 구절에는 대환란을 통과하는 중에 구원을 받는 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대환란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글이 앞으로 이 땅에 7년 대환란이 있을 때, 그 당시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요엘서 2장 31절과 32절을 제시하며 이스라엘이 겪게 될 대환란에 대한 근거 구절로 설명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왜냐면 본문자체가 그러한 설명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구절을 근거로 성경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은 옳지만, 그에 앞서 그 구절 자체의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11-02 12:28:5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10-29 23:44:45 | 김세배
종말론에 관심이 있어서 목사님의 글을 다운받아 읽다가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겪게 될 대환란에 대해서 반복해서 선포하셨습니다. 자, 다 같이 요엘서 2:31-32를 보십시오.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니 주가 말한 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구출이 있으며 또 주가 부를 남은 자들에게도 구출이 있으리라.](욜 2:31,32). 대환란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입니다. 대환란은 주의 날로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들에게 “크고 두려운 날”이 분명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상을 보십시오.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구출이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자 그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입니다. ‘또 주가 부를 남은 자들에게도 구출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이방인들 중에서도 구원받을 자들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계7:9)." 위 내용은 목사님의 글의 일부분입니다. 제가 바르게 이해했다면,목사님의 설명의 요점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은 바로 '대환란'(7년 대환란)인데 그 진노를 받는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라는 것과 이어지는 내용에서 계시록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대환란을 통과하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목사님께서 인용하신 욜2:31,32절에서는, 유대인들과 남은 자들(저도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의 구원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이루어 진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환란 전에(before)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기록(욜2:31)은 분명히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before)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부분에 있어서는 성경기록과 목사님의 주장이 서로 맞지 않다고 여겨지기에 이렇게 질문을 드려봅니다. 물론 이 말씀의 대상이 구원받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2-10-27 22:54:19 | 김세배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관되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성경의 하나님은 철저하게, 너무 재미없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로 “세상에 공짜란 없다. 심은 대로 거둔다. (사람에게) 자유 의지는 철저히 존중하고 보장되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은 져야 한다”라는 f(x) → y식의 인과응보 사고방식의 신봉자라는 것이다. 오로지 복음과 구원만이 공짜이다. 물론 인간이 만든 세상 제도는 합리적이지 못하며 부정부패와 비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이를 일시적으로 허락도 하시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언뜻 보기에 잠시 통용되지 않는 것 같은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전 9:11). 그러나 하나님의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결국 인과응보가 성립하게 된다. (1)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리라. (갈 6:7) 하나님께서 결코 조롱 당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아, 성경을 보니 A를 하지 말라고? 그럼 B에 대한 언급은 없으니 A 대신 B처럼 하면 되겠네?”라든가,“지금까지 나쁜짓을 좀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 보니,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해 먹어도 되겠군? ㅋㅋ” 같은 패턴으로 요리조리 잔머리를 굴리는 게 하나님 앞에서 안 통할 거라는 말이다. 성경을 어떻게든 삐딱하게 해석하고 자기 식대로 갖다 붙이려 하는 불순분자의 심리와 의도를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으니 말이다.그리고 문장 뒷부분의 의미는 말 그대로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속담이다. (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여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살후 3:10) 성경은 단호하다. 일을 해서 스스로 돈을 벌지 않을려거들랑 밥도 먹지 말라고 그런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유야 어쨌든 다 큰 성인이 백수나 니트족으로 있다거나, 정상적인 근로 의욕마저 상실시킬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퍼 주기식 '무상' 복지 포퓰리즘 같은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삭 줍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 성경이 말하는 복지는 복지 수혜자라 해도 최대한 일은 하고서 먹을 것을 얻는 구도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건전한 근로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사람마다 사유 재산과 빈부 격차를 명백히 인정하는 논조이며, 통념과는 달리 심지어 돈으로 돈을 버는 것조차도 전면 금기시하지는 않는다(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이 게으른 종에게 왜 이자놀이라도 안 했냐고 책망을..). 탐욕을 그렇게도 정죄하고 싫어하는 성경이 한편으로 그런 자유주의 경제관도 지지한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성경적인 사고방식과 공산주의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들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성경에 '불신자만도 못한 자'라는 표현이 있을까, 없을까? 성경에서 쓰이기에는 다소 강하고 자극적인 비하 표현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성경에 나온다. 출처는 바로 딤전 5:8. 성경이 규정한 책망 대상이란 바로 '자기 힘으로 일해서 돈 벌어서 가정을 부양하지 않는 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성경의 모든 법칙에는 예외도 있다. 저건 다치거나 아파서 정말 타당한 이유 때문에 일을 못 하는 사람들까지 쫄쫄 굶으라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또한, 잘못된 사회 제도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성경은 공산주의가 생길 빌미를 제공한 악덕 자본가나 기업주, 지주, 탐관오리들을 야고보서 5장에서 신랄하게 디스해 주고 있다. 그러니 성경의 논조가 특정 이념 편향적이라는 오해는 없기 바란다. (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출 21:24; 레 24:20; 신 19:21) 갈수록 점점 더 중요하고 진지한 주제가 나온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조는 함무라비 법전이 아니라 성경(모세 율법)이다!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구약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표현에 대해서 안타깝지만 오해가 엄청 많다. 하나님이 세우신 준엄한 원칙은, 뭔가 사고가 발생하고 안 좋은 결과가 야기되었다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상황을 모조리 수습하고 원래대로 복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거 아닌가?) 가끔은 위자료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이 배상을 n배로 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형법은 현대의 법보다 처벌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엄하다. 그리고, 뭔가 영구적인 손해를 입혀서 복구가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그 피해를 가해자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 사형 제도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법규이다! 고의성이 있었는지 같은 변수가 참작되긴 하지만, 대원칙은 이러하다. 이런 법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높은 공의만이 담겨 있을 뿐, 오늘날 같이 죄인의 무슨 교화 가능성이 어떻고, 가해자의 불우한 성장 배경 운운하는 배부른 변수 따윈 없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오늘날은 이게 완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법칙으로 인식되어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지금도 이슬람권 국가에는 여자 얼굴에다 염산을 끼얹은 남자에게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으라는 판결이 이따금씩 나는가 보다. 이슬람 국가들이 다른 데서는 좀 꼴통 같은 짓을 하지만, 저런 일부 윤리 규범은 성경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아서 아주 바람직하게 잘하고 있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여자의 인생을 이것 말고 무슨 방법으로 아쉽게나마 보상하냐 말이다. 그리고 사실은 인간에게 내재된 보복 심리에 비해서 성경의 원칙이 오히려 훨씬 더 자비롭다고 볼 수 있다. 정확히 당한 만큼만 갚으라고 명령하니까 말이다. 원래 인간이란 나쁜 일을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주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깽판 칠 때 공갈을 어떻게 하던가? “도발 시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겠다”고 절대로 안 그런다. “천 배, 만 배로 보복하겠다”고 그런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했다가는 지구는 헬게이트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국민을 대표해 보복이라는 걸 딱 당한 만큼만 집행해 주는 공권력을 제정하신 것이다. 아, 물론 성경에는 마 5:38-39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명령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돌려대라는 구절도 있다. 그런데 그건 구원받은 예수쟁이라 해도 정말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아니면 지킬 엄두를 못 내는 엄청난 명령이다. 진짜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친아들을 흉악범에게 잃고 나서는 그 흉악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을 자신 있겠는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이 세상에서 왼뺨 맞고 나서는 오른뺨 돌려대고, 강도가 웃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내어 줄 참인가? 그건 그저 적당한 연기, 가식, 위선 떠는 구실로 인용하라고 있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법이라는 건 그런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worst를 기준으로 삼고 만들어야 한다. 구약 율법이 뉴턴 고전 역학이라면, 천년왕국 헌법 내지 신약 계명은 상대성 이론 정도의 위치에 대응한다 하겠다. 시간이 가는 속도가 차이가 생기고 질량이 그대로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상대성 이론은, 고전 역학보다 더 고차원적인 자연 법칙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전 역학을 바탕으로 아주 극단적인 문맥에서 물리학의 영역을 확장한 것일 뿐, 기존 고전 역학의 영역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지간한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게임 물리 엔진 정도를 만드는 데 상대성 이론이 동원되지는 않는단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4)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우리 속담 중에서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가 성경 말씀과 정확히 같은 문맥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심상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준엄한 말씀이 정확히 적용되어 패가망신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았을까?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데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죄의 결실은 사망이니, 연역법에 따라 사람은 누구나 죽고 더 나아가 지옥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5)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 (마 12:36) (6)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5) 위의 두 구절은 우리의 말과 관련하여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심은 대로 거둔다”를 설파하는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이 세상의 저명한 개독안티들이 남긴 신성모독 발언과 독설들.. 다 자기가 했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날이 온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적인 동기로 남긴 실언이나 폭언, 남에게 덕이 되지 않는 말이나 심지어 음담패설 같은 것은 결국 자기에게 올무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혀를 상대로 심하게 디스를 거는 야고보서 3장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만약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당장 기도로 '온라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과 미리 정산하는 게 좋다. 마치 경찰서 정모를 당하듯 훗날 하나님을 오프라인으로 대면하여 정산을 하게 되면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 우리는 지금까지 신구약 성경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심은 대로 거둔다” 원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은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는 원칙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은 좋아하지만, 참혹한 죄의 결과물을 거두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심상에 대한 대리 만족을 시켜 주는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에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고, 형벌도 가능하면 곧이곧대로 엄하게 집행하지 않고 어지간한 결과 수습은 그냥 세금으로 다 때우려 한다. 이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안일한 사고방식의 폐단은 결국은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세금으로 도저히 감당을 못 할 정도로 교도소 운영 비용이 증가하고 있으며(지금 미국처럼), 흉악 범죄는 갈수록 증가한다.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교도소나 가고 싶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까지 생긴다. 그 반면, 흉악 범죄 피해자의 인권은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가해자에게 너무 가벼운 형벌이 부과되는 걸 보며 통곡하고 울부짖는다. 난 구체적인 물증이 없기 때문에 논쟁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사형 집행이 흉악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이 범죄율 증가와 무관하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런 식으로 “성경적으로 단순한 원론적인 인과응보”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몇 가지 예를 열거하자면, - 무단횡단을 하다가 누가 차에 치였다면, 지금 현행법보다 보행자의 과실을 훨씬 더 높게 잡아야 한다.- 정당방위도 지금보다 훨씬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 젊은 여자가 만취 상태로 심야에 혼자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로부터 성추행/성폭행을 당했다면, 물론 기사는 크게 처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여자도 잘한 게 없으며 어느 정도 지탄받아야 한다.   이런 식.물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저런 원칙을 곧이곧대로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법학자나 그쪽 계층에서 변명을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능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 주제만 더 다루고 글을 맺겠다.여러분은 노예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성경이 노예 제도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가? 노예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대동소이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보통은 어떤 사람이나 국가 백성이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됐을 때, 죽지 않는 대신 신분을 박탈당하여 노동으로 빚을 갚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제도가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이 쫄딱 망했거나, 아니면 국가적으로는 국가가 전쟁에서 져서 패전국의 백성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나눠 갚아야 할 때 말이다. 노예를 상대로 발생하는 가혹한 인권 유린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몸으로라도 안 때우면 그 빚은 누가 상환하며, 전쟁 때문에 국가가 쑥대밭이 된 건 누가 복구하고 수습하는가? 노예 제도가 있기에 앞서 죄가 있었고 그로부터 파생된 전쟁 같은 참혹한 행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역시 “심은 대로 거둔다”로 귀착될 뿐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구원받기 전까지는 어차피 영적으로 죄의 노예이기도 하고. 성경이 과거의 그런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이라고 딴지를 거는 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짓이다.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율법은 노예를 영원무궁토록 부려먹지 말고(정확히는 노예도 아니고 그냥 종 servant이지만), 주기적으로 풀어 주라고 명시한다. 게다가 거의 반세기 간격으로 국가 경제와 국민 신분을 아예 전부 reset시키는 아주 파격적인 제도를 통해, 부의 세습과 지나친 양극화를 막고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12-10-24 18:59:10 | 김용묵
안녕하세요?   요즘 영어 킹제임스 성경 본문이 어느 것이 순수한지 알려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주로 미국의 토마스 넬슨 출판사에서 자기들의 뉴킹제임스 성경을 내면서 고의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의 대문자, 소문자 등을 바꾸는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이에 순수 영어 킹제임스 성경 본문을 구할 수 있는 호주의 사이트를 알려드리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bibleprotector.com/index.htm   이곳에서의 사역은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rAhkSYs7L0U   2011년에 출간한 저희 흠정역 성경의 한영대역 성경의 영어 본문은 이 사이트의 Pure text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만든 551쪽의 안내문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450쪽 이하에 본문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샬롬  
2012-10-23 16:31:40 | 관리자
스크리브너의 TR 이야기   어떤 분이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는 자랑스럽게 여기저기 다니며 자기 학교(펜사콜라 크리스천 칼리지(Pensacola Christian College, PCC)의 신학 대학원(Pensacola Theological Seminary, PTS))가 믿는 바를 알리고 있습니다. 자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믿으며 자기도 그렇게 확신한다고 주장합니다.   ----------------------------- 그 학교 원어 교수의 주장   보존된 성경으로는 히브리어 전통 사본과 헬라어 사본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그 종류를 공식적으로는 밝히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학교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교과서는 벤카임 맛소라 사본(1525년판)과 TR(스크리브너 TR)이다. 스크리브너는 킹제임스 성경의 대본이 되었던 헬라어 사본, 즉 에라스무스 판과 스테파누스 판과 베자 판을 모두 검토하여 현대인들이 읽기 쉽게 TR을 최종 정리하여 1894년에 세상에 내놓았다. 일반인들에게는 스크리브너는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사본학에 있어서 TR계열을 정리한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이런 주장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의도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확신을 깨는 일을 하고 다니는 이 형제는 과연 무엇을 최종 권위로 믿고 있을까요? 이분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완벽함을 믿으며 킹제임스 성경은 단지 역본이므로 여러 가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일은 드러나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은밀히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분이 내세우는 그리스어 최종 권위는 자기 교수가 교과서로 삼은 스크리브너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스크리브너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더불어 영어개역성경(RV)을 편찬하는 일에 가담한 인물입니다. 물론 저는 그분이 훌륭한 성도요 학자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의든 타의든 킹제임스 성경을 개정하는 일에 가담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원어를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그리스어 공인본문(TR)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에라스무스, 베자, 스테파누스, 엘지버 형제의 TR 등).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베자의 TR을 본문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베자의 TR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여러 군데서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베자의 TR을 기본 본문으로 택하고 과거의 여러 역본들(시리아, 라틴 역본 등)과 교부들의 증언, 기도문 같은 증거들을 충분히 살펴보고 최종적인 번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과 베자의 TR은 다릅니다. 사실 우리는 편의상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어 TR을 번역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러면 이분이 최종 권위로 믿고 있는 스크리브너의 TR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 학교 교수의 말대로 1894년에 나온 그리스어 성경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1894년에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스크리브너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본문으로 해서 역으로 베자의 TR이 영어 성경과 다른 부분을 일일이 확인하여 베자의 TR을 교정해서 킹제임스 성경과 똑 같이 일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스크리브너의 TR은 베자의 TR과 달리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100% 똑같습니다.   오호통재라! 이분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본이라 최종 권위가 될 수 없고 그리스어 원어 성경이 최종 권위라고 주장하는데 그가 최종 교과서로 인정하는 그리스어 TR이 킹제임스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니 이 무슨 변고입니까?   그러면 어느 것이 최종 권위일까요?이분은 역본을 가리켜 최종 권위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교수가 그렇게 가르쳐서 자기도 그렇게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요. 이분들이 최종 권위로 믿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성경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최종 권위일까요? 이분들은 최종 권위라는 말을 싫어하니까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거기서 나온 스크리브너의 신약성경은 어느 것이 더 권위가 있을까요?”   우리는 솔직한 답을 듣고 싶습니다.   스크리브너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그리스어 과목의 교과서로 삼은 것은 참으로 칭찬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제대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모든 사람이 쉽게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원어, 대단히 중요합니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의 권위와 신뢰를 원어 성경에 두어야 합니다.지금도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번역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번역본 중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들(단어들)을 그대로 정확하게 담고 있는 성경이 곧 영어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그래서 웨이트 박사님처럼 저명한 원어 학자도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은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서슴없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학식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믿음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최종 권위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 신자가 어떤 성경을 들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이미 그 성경이 최종 권위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가 퇴색되어, 또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이 과거에 없었으므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이것이 최종 권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원본의 최종 권위를 주장하는 이들도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들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제 이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성경에 대한 성도들의 확신을 깨지 말고 스스로 원어 성경의 영역을 확장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하게 여기시는 사역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부디 학식에서 머물지 말고 그것 이상의 확신을 소유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충만히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참고로 스크리브너의 TR은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http://www.amazon.com/Scriveners-Annotated-Greek-New-Testament/dp/1888328053/ref=sr_1_3?s=books&ie=UTF8&qid=1350973069&sr=1-3&keywords=scrivener+greek   (*) 참고로 이 글을 적은 저도 펜사콜라 크리스천 칼리지(Pensacola Christian College)의 신학 대학원(Pensacola Theological Seminary)을 다녔습니다.   위키 백과를 보면 PCC는 오직 TR만을 지지하며 학교와 교회에서 모든 수업과 예배에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을 사용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ensacola_Christian_College
2012-10-23 15:15:15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