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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처음 시조새라는 말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과학 교과서에 시조새는 공룡과 새의 중간형이다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중간에 교회를 잠깐 다닌 적은 있지만, 창조와 진화의 차이도 잘 몰랐고 제가 공부하는 책상 앞에 어머니께서 주신 성경책이 먼지만 뽀얗게 쌓여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었거든요. 대학을 입학하여 한 학기 다닌 후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군대 가서 훈련병 때 아무 생각 없이 세례 받으라니까 받았습니다. 군대에서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니까 그랬을까요? 그 때 만약 세례 받은 채로 죽었으면... 아, 지옥으로 직행했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종교 행사가 있으면, 신병 때는 초코파이도 먹고 목사님 앞에서 말씀 전하실 때 뒤에서 조용히 잘 수 있는 아주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제게는 기독교는 종교일 뿐이었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회심한 후,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참 기뻤습니다. 제대한 후 복학해 보니 머리는 참 나빠졌는데, 전공 공부는 힘들기만 했습니다. 이걸 계속 따라가야 되나? 어느 날 기독교 서점에서 ‘신비한 인체 창조 섭리’(김종배 글/국민일보사)를 읽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도 창조하셨구나. 조금 지나서 하나님께서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교수님께서 인류의 진화 과정에 대해 리포트를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에렉투스, 사피엔스 등등까지였지요. 저는 진화가 아니라 창조가 믿어졌기 때문에 창조와 진화를 비교해서 리포트를 제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발하죠? 에구구, 참, 리포트를 내주시는 교수님의 의도도 잘 모르면서 정신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 교수님께서는 교회에서 말씀도 전하시면서 진화론을 믿으시는 장로님이셨습니다. 어쨌든 두 권 정도의 책들을 참조해 진화와 창조를 비교해서 리포트를 제출했습니다. 그렇다면, 학점은? 보기 좋게 D학점이었나? 점수는 낮았죠. 그 때 리포트를 제출하면서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창조든 진화든 믿음에 불과하다’ 류의 내용이었습니다.   믿음 생활하면서 시간이 조금 흘렀습니다. 지금은 대학 다니면서 리포트 쓰며 내린 결론이 맞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나중에 읽게 된 ‘진화론은 새빨간 거짓말이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내 믿음이 맞았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관찰한 사실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창조론이든 진화론이든 믿음에 기반하게 되는 것이죠.   요즘 교과서개정추진회에서 시도하는 교과서에서의 시조새 삭제 운동을 보면서 착잡함을 느낍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라는 사실을 믿고, 한국 창조과학회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교개추 소속의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일을 진행하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우선 순위를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고2 대상의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 교재를 정리하여 쓰면서 느끼는 것은 이전과 달리 진화론이 교묘한 형태로 널리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 문제는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생물, 인간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입니다. 예를 들면, 물리에서는 빅뱅(대폭발) 우주론이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우주가 폭발해서 시작되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식어 왔다. 화학에서는 불이 처음에 등장하면서 교과서에 원시인 그림(우가우가! 하는 듯한)이 등장합니다. 오히려 2학년 생명 과학1 에는 시조새 얘기 없습니다. 3학년 생명과학2에 가야 진화가 나오거든요. 지구과학에서는 원시 태양계, 지구가 어떻게 불바다(!)에서부터 만들어졌는지가 앞 부분에 나옵니다. 그리고, 가장 핵심인 몇 억년 이야기는 중간중간 감초처럼 등장하죠. 교묘하게.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벧후 3:5)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벧후 3:10)   오히려 학교 과학 교과서에서는 성경에서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 불타는 일들을 오히려 과거의 일로 써 놓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섬찟합니다. 사람들이 은연중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듯해서요.   오히려 진화론의 핵심은 연대기의 길이가 길다는 것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부터 있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 되느니라, 하리니”(벧후 3:4) 위의 성경 말씀을 과학 내용으로 보면 영국의 허턴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동일 과정설’입니다. 찰스 다윈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이지요.   시조새를 교과서에서 끌어내고 싶다면, 빅뱅도 끌어내고, 원시인도 끌어내고, 원시 태양계, 지구, 지질 연대에 관한 문제도 모두 공립학교 교과서에서 끌어내야 할 것입니다. 창조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진화라는 종교적인 믿음은 결코 타협을 볼 수 없는 지점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맡겨 주신 아이들의 영혼이 걱정스럽습니다. 진화론으로 도배되어 있는 공립학교를 다니면서 믿음을 잘 지킬 수 있을까? 힘을 얻어서 잘 살 수 있을까? 현재 한국의 공립학교들은 이미 무신론과 진화론으로 바뀌었습니다. 증거가 무엇이냐고요? 다윈이 주장한 자연 선택설 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Survival of the fittest(적자 생존)’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산업 혁명 사회를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의 장으로 본 것입니다. 진화론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조새 한 마리를 가지고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 난무하고 배려가 없는 서바이벌 진화론으로 가득찬 학교로 변하고 있는 중이라면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도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그런 존재 밖에 안 됩니까?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기 위한 길은 기도하며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조새 논쟁과 같은 소모적이고 끝이 없는 투쟁보다는 저희들에게 맡겨진 어린 영혼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부지런히 가르치고 무신론적 공립학교 시스템의 해악에서 건져내며, 가르침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경 변개, 진화론, 유신론적 진화론 등으로 타협하는 사람들과 과감히 분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밖에 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안에 있는 자들은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나니 그러므로 그 사악한 자를 너희 가운데서 내쫓으라.”(고전 5:12-13)   그런 면에서 미국의 홈스쿨링 부모들과 기독교 학교 운영자들은 현명했습니다. 영어를 잘 해서 현명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분리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영어가 아닌, 성경 중심으로 모든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킹 제임스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앞으로 NIV나 NKJV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듭니다만, 한국의 기독교 대안학교에서는 밥 존스 교재를 쓴다 하면서 영어 성경을 NIV나 NKJV로 쓰는 정신 사나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중심이 아니라 영어가 중심이 되고 유학 가는 것이 중심이 되는 볼썽 사나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혹시나 유학을 준비하시거나 유학생 분들께서는 혹시나 마음 상하시지 않으시기를 원합니다. 제 의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것보다는 영어, 외모, 스펙, 엘리트주의에만 마음을 쏟는 것을 많이 봐 와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에 불과한 시조새에 우리의 정신을 쏟기보다는, 저부터 우리 주변들의 영혼들과 어린 영혼들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그들에게 정신을 쏟기 원합니다. 중고등부 교사인 제가 먼저 더욱 정신 차리도록 같이 기도해 주시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네 젊은 시절에 네 창조자를 기억하라. 곧 재난의 날들이 이르기 전에 혹은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 해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하는 그런 해들이 가까이 이르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혹은 비가 온 뒤에 구름들이 되돌아오기 전에 기억하라.”(전도서 12:1-2)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46:49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2-06-22 18:00:52 | 송호
한마디로 있을 때 잘하고, 있을 때 살려야 한다는 교훈이 있네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전하기는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복음 자체도 그렇고, 바른 진리도 그렇고요... 상대의 반응에 따라 달라지기보다는 사랑과 인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경 문제도 의외로 많은 분들이 가족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을 텐데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6-22 09:44:51 | 김재욱
알고보니 위의 내용을 교회에서는 "가족과 가까운 이웃을 늦기전에 전도하자"는 전도 세미나용으로 보험사에서는 "늦기전에 생명보험에 가입시키자"는 영업사원 교육용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2012-06-22 08:36:59 | 양희석
1979년 어느 봄날 어머님 손잡고, 가슴에는 코수건을 달고 국민학교 입학하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운동회 때에 어머니께서 저를 업으시고 운동장을 달리시던, 다리에 힘이 있으셨던 건강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지금 제가 벌써 1979년 당시 어머님의 나이를 한 참이나 지나온 나이가 되었네요.   부모님 살아계실 때에 봉양하고, 가족을 돌봐야 하는데.... 어릴적 부모님께서 제게 하셨던 것만큼 저도 하고 살아야 도리인데... 부모님 죄송합니다.   아래의 가져온 글은 지인으로부터 받은 메일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읽으면서 아내와 어머니가 생각나 많이 울었습니다.   특히 아내에게는 성경교리를 가르치고, 한가지 길만을 고집하는 저의 모습에 많이 미안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온화함과 사랑으로 대하여야겠다고 반성합니다.   킵바이블 지체들께서도 아래 글을 읽으시고, 인간의 나약함과 하나님의 주권, 생명주신 예수님을 더욱 생각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소개합니다.      ♥ 여보 사랑해.... 미안해.....♥ 저만치서 허름한 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방걸레질을 하는 아내... “여보, 점심 먹고 나서 베란다 청소 좀 같이 하자.” “나, 점심 약속 있어.” 해외 출장가 있는 친구를 팔아 한가로운 일요일, 아내와 집으로부터 탈출하려 집을 나서는데 양푼에 비빔밥을 숟가락 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아내가 나를 본다. 무릎나온 바지에 한쪽 다리를 식탁에 올려 놓은 모양이 영락없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줌마 품새다. “언제 들어올거야?” “나가봐야 알지.” 시무룩해 있는 아내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가서, 친구들을 끌어 모아 술을 마셨다. 밤 12시가 될 때까지 그렇게 노는 동안, 아내에게서 몇 번의 전화가 왔다. 받지 않고 몇 번을 버티다 마침내 베터리를 빼 버렸다. 그리고 새벽 ·1시쯤 난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욕실로 향하는데 힘없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갔다 이제 와?” “어, 친구들이랑 술 한잔...어디 아파?” “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혀 약 좀 사오라고 전화 했는데...” “어, 배터리가 떨어졌어, 손 이리 내 봐.” 여러번 혼자 땄는지 아내의 손끝은 상처 투성이였다. “이거 왜 이래? 당신이 손 땄어?” “어, 너무 답답해서...” “이 사람아 병원을 갔어야지! 왜 이렇게 미련하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느 때 같으면 마누라는 미련하냐가 뭐냐며 대들만도 한데, 아내는 그럴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냥 엎드린 채 가뿐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는 응급실 진료비가 아깝다며 이제 말짱해졌다고 애써 웃으 보이며 검사 받으라는 내 권유를 물리치고 병원을 나갔다. 다음날 출근하는데 아내가 이번 추석 때 친정부터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노발대발 하실 어머니 얘기를 꺼내며 안된다고 했더니 “30년 동안 그 만큼 이기적으로 부려 먹었으면 됐잖아. 그럼 당신은 당신 집 가, 난 우리 집 갈테니까.” 큰 소리 친 대로 아내는 추석이 되자 짐을 몽땅 싸서 친정으로 가버렸다. 나 혼자 고향집으로 내려가자 어머니는 세상천지에 며느리가 이러는 법은 없다고 호통을 치셨다. 결혼하고 처음, 아내가 없는 명절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태연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고 말이다. “당신 지금 제 정신이야?” “......” “여보, 만약 내가 지금 없어져 당신도 애들도 어머님도 사는데 아무 지장없을거야. 나 명절때 친정에 가 있었던 거 아니야.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받았어. 당신이 한번 전화만 해 봤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랐어.” 아내의 병은 가벼운 위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 의사의 입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아내가 위암이라고 전이 될 대로 전이가 돼서 더 이상 손을 쓸수가 없다고, 3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맑았다. 집까지 오는 동안 서로에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아내를 보며, 앞으로 나 혼자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문을 열었을때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아내가 없다면, 방 걸레질을 하는 아내가 없다면, 양푼에 밥을 비벼먹는 아내가 없다면,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해주는 아내가 없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아내는 함께 아이들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은 갑자기 찾아온 부모가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살가와 하지도 않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부에 관해, 건강에 관해, 수없이 해 온 말들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한데도, 아내는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만 있다. 나는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여보, 집에 내려 가기 전에...어디 코스모스 많이 펴 있는데 들렀다 갈까?” “코스모스?” “그냥, 그러고 싶네. 꽃 많이 펴 있는데 가서 꽃도 보고, 당신이랑 걷기도 하고...”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이런 걸 해보고 싶었나 보다. 비싼 걸 먹고, 비싼 걸 입어 보는 대신, 그냥 아이들 얼굴을 보고, 꽃이 피어있는 길을 나와 함께 걷고... “당신 바쁘면 그냥 가고...?” “아니야, 가자.” 코스모스가 들판 가득 피어 있는 곳으로 왔다. 아내에게 조금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보,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우리 적금 올 말에 타는 것 말고 또 있어. 3년 부은거야, 통장, 싱크대 두 번째 서랍 안에 있어. 그리고 나 생명보험도 들었거든, 재작년에 친구가 하도 들라고 해서 들었는데, 잘했지 뭐, 그거 꼭 확인해보고...” “당신, 정말 왜 그래?” “그리고 부탁 하나만 할게, 올해 적금타면 울 엄마 한 이백만원만 드려, 엄마 이가 안 좋으신데 틀니를 하셔야 되거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오빠가 능력이 안 되잖아, 부탁해.”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고 말았다. 아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걸 알면서도 소리내어 엉, 엉...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 이런 아내를 떠나 보내고... 어떻게 살아갈까.... 아내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요즘들어 아내는 내 손을 잡는걸 좋아한다. “여보, 30년 전에 당신이 프로포즈하면서 했던말 생각나?” “내가 뭐라 그랬는데?” “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 닭살 맞아서 질색이라 그랬잖아?” “그랬나?”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당신이 나보고 사랑한다 그런 적 한번도 없는데, 그거 알지? 어쩔 땐 그런 소리 듣고 싶기도 하더라.”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도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커튼이 뜯어진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보, 우리 오늘 장모님 뵈러 갈까? 장모님 틀니 연말까지 미룰 것 없이 오늘 가서 해드리자.” “.........” “여보, 장모님이 나 가면 좋아하실텐데...여보, 안 일어나면 안간다. 여보? 여보?” 좋아하며 일어나야 할 아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난 떨리는 손으로 아내를 흔들었다. 이제 아내는 웃지도, 기뻐하지도, 잔소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난 아내위로 무너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어젯밤...이 얘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2012-06-21 16:42:19 | 양희석
안녕하세요?   무언가를 묻고 있는 분에게 "구원 받았느냐?"고 되받아 질문하는 일이 여기서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대개의 경우 무례한 일입니다.   그리고 20세 정도 된 형제 자매들은 가능하면 읽고 듣기만 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 사람들에게 오랫 동안 부탁하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가르치려 하다가 그게 버릇이 되면 믿음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20세 정도 된 분들은 그저 조용히 읽고 듣는 연습을 10년 정도 하기 바랍니다. 나이 드신 형제 자매들이 대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중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배웠듯이 영어에서는 so that 다음에는 may 혹은 might이 자동으로 옵니다. 여기의 may 등은 허락이 아니에요. 그냥 붙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번역에 관한 것은 webmaster@KeepBible.com으로 보내 주세요.   감사합니다.     
2012-06-21 15:33:13 | 관리자
흠정역만 in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옳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꼭 원문성경을 보셔야 합니다. in으로 쓰이는 전치사는 "엔"인데 계13:16은 on,upon의개념인 "에피"로 기록되었습니다. 계7:3,9:4,13:16,14:1,14:9,22:4은 "에피"를 in으로 해석하고, 17:5,20:4은 upon과 in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엔과에피의 사용 예는 계14:14를 보시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도 흠정역을 사랑하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오심이 임박한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는 본문이 민감한 사안이기에 좁은 소견을 올려보았고, 우는 사자같이 먹이를 두루 찾는 사탄앞에 당당히 서기 위해서도 목회자들이 원문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함께힘냅시다.
2012-06-21 14:09:34 | 정봉길
구원에 관한 교리는 사람에게 그야말로 가장 기본적이고 시급하며 중대한 교리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교회들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알면 알수록 이 중대한 교리가 매우 혼탁해져 있음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십 대에 구원받은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잘못된 선생들의 가르침에 고민과 갈등의 나날을 보낸 경험이 있습니다.노골적인 행위구원론도 심각한 문제지만 거듭난 자의 징표를 요구하며 눈에 보이는 행위에 집착하는 교묘한 가면을 뒤집어쓴 Lordship Salvation(주재권 구원)이란 행위구원론도 매우 많은 교인을 포로로 붙잡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주재권 구원론자인 존 맥아더는 자신의 저서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가 나중에 분명히 부인하고 돌아선다면, 그는 처음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이 말이 맞는 말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도(마16:16) 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도 베드로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난 후 비로소 언제인가 회개하고 진실로 거듭났다고 봐야 하고 예수님은 거듭나지도 않은 베드로의 가식적인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살과 피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라고 말씀하시며 인정하고 칭찬하셨다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또한, 존 맥아더는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에서 일단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들 중에 삶의 아무 변화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다시 침례를 행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주재권 구원론자들의 관심은 ‘오직 믿음’ 자체가 아니라 행위에 있을 뿐이며 교묘한 변종 행위구원론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들은 칼빈주의 특히, 청교도들의 신념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많은 청교도는 사람이 거듭나고 구원받은 후에는 즉시로 마음과 본성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 그의 신앙과 행위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사상을 물려받아 체계화한 이들이 현대의 주재권 구원론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과실수의 묘목을 심으면 열매를 거두는 나무가 되기까지 대체로 수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나무에 따라 성장 속도도 다 제각각입니다. 이제 막 심은 묘목에서 바로 열매를 풍성히 거두길 바라는 사람들이 바로 주재권 구원론자들입니다. 구원받고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 본 분들이라면 자신과 여러 크리스천의 모습을 대면한 임상적 경험을 통해 구원받은 이후 즉각적으로 삶의 거의 전 부분을 신앙과 일치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수년 이상의 상당히 오랜 세월을 신앙성장의 정체기(암흑기)에서 방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느 모로 살펴보아도 Lordship Salvation은 어떻게든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는 과정에 자신의 공로를 세워보려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교묘하게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복음을 혼탁하게 만드는 악한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칼빈주의 장로교가 대세인 한국에도 Lordship Salvation의 구원관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념에 감염된 사람들에게 구원받은 사람은 자살해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거나 구원받은 이후에 설사 자신의 신앙을 부인해도 그 행위로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거나 만약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소영웅주의나 극도의 감정주의로 인해 기독교를 위한 순교의 행위를 이룰지라도 그 행위로는 절대 사람이 구원받게 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매우 낯설고 거북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이미 이런 담론들은 “존 맥아더의 두 가지 오류” 등을 통해 성경지킴이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지금 사랑침례교회에서 진행되는 연속설교 ‘구원의 영원한 안전보장’을 통해서도 잘못된 구원론에 발목이 잡혀있는 많은 이들이 바른 진리로 자유를 얻게 되길 소망합니다.성령님과 구원에 대한 귀한 깨달음을 나누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에도 느꼈지만, 형제님의 설교와 오늘의 글에는 식지 않은 뜨거운 열정과 익숙해지지 않은 순수함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또한, 흔히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놓치는 부분을 붙잡아 밝히 보여줍니다. 그 덕분에 저 자신의 감춰진 잘못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저에게 큰 기쁨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귀한 유익을 많이 나누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12-06-20 23:00:06 | 김대용
양심있는 참 성도라면 알아차릴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인데도 너무나 이런 문제들에 무관심한 것을 보면 참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저 자신도 구원에 대한 많은 오류를 안고 있었기에 이런 사실을 접하게 되면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없기도 하군요. 그런 분들이 있다면 다시 주님의 긍휼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구원에 관한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힘을 더 내어서 시간 있을 때에 더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되겠습니다. 샬롬.
2012-06-19 23:22:25 | 소범준
요한복음 14장 16절 : 내가 아버지께 구할 터인즉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그분께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라   갈라디아서 3장 2절: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   고린도전서 1장 30-31절: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 31 이것은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 후서 1장 21-22절: 21 이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세우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22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봉인하시고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10절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시편 51편 11절 :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마태복음 7장 21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만나기전에 개역 성경의 마태복음 7장 22,23절 말씀으로 구원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개역 성경 하나뿐이며 다른 성경이 있더라도 내용이 다 똑같고 오류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주입식 교육으로 무장된 신앙 탓에 주여, 주여 불러도 예수님이 모른 체 하실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 또, 개역 성경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할 정도면 내가 감히 따라 갈 수도 없는 보통 내공의 주의 종들이 아닌데, 아버지 뜻대로 하지 않으면 결국에 “꽝”이라니 ......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보고 이런 의문들은 속 시원하게 사라졌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구원에 관한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중요한 만큼 마귀는 지금도 혼돈스럽게 하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여기저기서 서로 다른 소리들을 하니 어떤 분의 표현에 따르면 너무 혼란스러워 기절할 정도라고 합니다.   오늘 저는 구원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후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령님이라는 거룩하신 영께서 죄인인 우리 안에 거하신 다는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내려오신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성경은 신약 시대에 와서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신 이상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아마도 대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구약인 시편 51편 11절, 범죄한 다윗의 기도인 주의 거룩한 영을 거두지 마소서 라는 구절을 따서 복음 성가를 지어 열심히 부르기도 하고 성령님이 떠나지 마시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다르게 성경에서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신약성도 그 누구도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성령님이 결코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심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알았고 이 사실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하심은 구약과 다르게 내 행위가 아닌, 내 의로운 상태가 아닌, 내 자신의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새 언약에 기초합니다.   어떤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부인에게 “여보, 당신이 내 곁에 있음을 믿고 인정 합니다” 말하고, 저녁에도 “여보, 나는 당신이 지금 내 곁에 있음을 믿고 인정합니다. 여보를 인정하고 모셔 들입니다” 말하고, 또 하나님께는 “주님, 내 마누라를 주십시오, 뜨겁게 주십시오”하고 기도한다면 그 말을 들은 부인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여보, 지금 무슨 말 하는 겁니까? 나, 두 눈 멀쩡히 뜨고 여기 있어요. 내가 언제 당신을 떠난다고 했어요? 지금 나보고 집 나가란 말입니까?” 이러지 않을 까요?   성령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내 안에 거하시므로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모셔들이고 환영해야 밖에서 들어오시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 한 번에 영원히 드려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 문제를 단 한 번에 영원히 해결하시고 구속하셨습니다. 이미 완료된 상태입니다. 이 약속으로 성령님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으므로 성령님이 내 안에 단 한번 오셔서 영원히 거하심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영원히 죄인으로 보지 않고 깨끗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님이 떠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무효화 시킨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정면 도전하는 것입니다. 오해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나는 죄를 짓는 죄인이지만,하나님께서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죄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정죄를 당하지 않으므로 죄를 지어도 괜챦다고 생각한다면, 글쎄요..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품고 행할 수 있을까요?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죄라고 말하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당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위한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믿을까요?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심판을 받았습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인생의 자랑이 전부인 이 세상왕국의 통치자가 끝장났습니다. 그런 것 바라보지 말고 이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라고 전하면 세상이 받아들일까요?   저에게 성령님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령님의 조명을 받은 말씀을 통하여 제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말은 이렇게 죄인이라고 해도 교만하여 남보다 낫다고 하는 생각이 싹트고 죄인줄 알고도 죄를 지으니  지금은 더 큰 죄인입니다. 제 생각이 공개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 머릿속에서 죽어나갔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없도록 하신 것이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에서는 죄가 없고 숨길게 없으므로 서로의 생각이 공개 되도 상관이 없겠죠. 성령님은 저에게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저에게 나의 의는 예수님 밖에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저에게 이 세상에 소망이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3절에서 개역 성경과 뚜렷이 구별되는 단어가 “못하노라"와 "못하였노라”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빠져버린 단어 “였”!!! 이 단어가 빠져서 ‘엿’을 숱하게 먹었습니다. 한마디로 엿 먹었죠... 킹제임스 흠정역을 읽고 이 단어를 발견함으로 모든 게 정상이 되었습니다. 내공이 뛰어나다고 생각한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처음부터 모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예수를 안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고 해서 다 같은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불법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불법을 행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대언하고 마귀들을 내쫓고 놀라운 일들을 행한 것은 성령님과 상관이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어떤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까요?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소개하신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곧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이 나오질 않습니다. 다, 주의 이름으로 했습니다, 했습니다, 했습니다하고 주장합니다. 이 안타까운 장면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의 능력 있는 종으로 인정받던 많은 사람에게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이 될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안에 영원히 거하시고 구원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이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을 잃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이신데도 성도들의 구원을 보증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진짜 구원 받은 사람도 지옥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같이 지옥 간다는 말입니까?   저는 성도가 지옥에 간다면 창조물인 지옥이 창조주인 성령님의 성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로마서 8장 38 ~ 39)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을까요? 첫째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입니다.          자기 의에 기초한  신앙이 대부분이라고 생각 됩니다 둘째로 잘못 번역된 성경과 잘못된 인용과 잘못 해석된 구절들 때문입니다. 셋째로 설교자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강단에서 복음을 외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처음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저도 이 사이트를 통해 배웠으며 또 배워가는 입장이므로,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통해 서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4:46:49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2-06-19 17:10:06 | 한재석
폴워셔 단순 팬을 넘어 추종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아주 다른 부류지만, 토마스 주남이나 데이비드 오워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다른 주장이면 다 헛된 사람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일부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안전보장이 아주 많이 훼손 될 염려가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하나이지 여럿일 수는 없겠지요. 우리가 늘 진리안에서 서로 도와가며 잘 분별했으면 합니다.
2012-06-18 12:37:10 | 이상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