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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수천 년 전의 성경 기록들로 전 시대와 비교하며 정밀한 분석과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에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성경에 관한 각종 오해가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하루속히 풀리기를 바랍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2012-11-01 10:07:45 | 김재욱
독립신문보다 수백 년 전에 한자가 전혀 없이 한글로만 적힌 글이 전해진다는 게 무척 놀랍네요. 물론, 그래도 어차피 지금 우리는 제대로 읽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죄 때문에 한꺼번에 동반 타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언어와 민족을 구분하기도 하셨지만(바벨 탑 사건), 영적 접근성은 말이든 글이든 언어로 차별을 결코 하지 않으시지요.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 언어에 대한 원칙을 생각해 봐도 명확한 사실이며, 이는 성경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여타 이상한 종교들에 그런 관행이 많습니다(염불, 라틴어 주문, 경전의 원어 드립 등등).
2012-11-01 07:23:09 | 김용묵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는 1998년 안동에 있는 고성 이씨(固城 李氏) 이응태(李應台1556~1586)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420년 전에 한 여성이 한글로 기록한 ‘러브레터’이다. 임신 중에 있는 젊은 여인이 31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편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종이 하나 가득 표현했다. 16세기 조선 여인의 가슴 뭉클한 이 사연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도 소개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한글 편지에는 종이 가득 420여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한 여인의 애절한 감정이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지만 21세기 한국인이 이 한글 편지 원문을 살펴보자면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충은 읽고 대충은 이해하겠지만 전문가의 도움이 없다면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기껏해야 400년의 시차가 있을 뿐인데 원이 엄마에게는 일상의 글이고 말이었을 것이 우리에게는 사학과나 국문과 교수님이 다룰 수 있는 전문 지식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고문서를 해독하고 과거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야의 권위자가 따로 있어야 한다.   이것이 언어이고 글이며 말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면서 ‘원이 엄마의 편지’를 읽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그리스어로, 라틴어로 몰려가며 그 언어의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성경을 알 수 있는 최고 권위자로 인정한다.   성경을 믿음이 아닌 학문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   모든 신자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400년 전에 한글 편지를 썼던 원이 엄마는 죽었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편지를 썼던 여성이 죽었기 때문에 그녀가 사용했던 단어와 표현과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400년 전 중세한글을 연구해야 한다. 그런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이 이 분야에서 권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3천 년 전에 히브어로 말씀하시고 2천 년 전에 그리스어로 말씀하신 원저자가 여전히 살아 계신다. 따라서 3천 년 전 언어를 연구하거나 2천 년 전 언어를 공부해야만 그분이 사용한 단어와 표현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에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당신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셔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옛날 성경에 써 있는 것과 동일한 진리를 말씀하고 계신다. 진짜 성경을 읽고 싶다면 고대 언어를 공부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읽을 수 있는 성경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성경인지를 분별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살아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보존이다.   400년 전에는 규방의 여인도 자유롭고 생생하게 사용하던 단어와 말과 글이 지금의 전문가의 영역으로 넘어갔는데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인간을 대하신 적이 없다. (생명 없는 종교는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계시를 특정 언어에다 가뒀다. 라틴어, 아랍어, 산스크리트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면 언제나 그들이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글과 말을 사용하셨다. 3천 년 전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의 언어였다. 그들에게는 일상의 언어였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세의 율법을 누군가 앞에서 읽기만 해도 남자든 여자든 다 알아 들었다. 메모를 했다가 나중에 단어를 찾아가면서 따로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히브리어에만 권위를 두는 사람들 중에서 이 정도 실력을 갖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여성들도 어린아이들도 히브리어를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글과 말로 성경을 주셨다.   2천 년 전 그리스어는 보통 사람의 언어였다. 하나님께서는 저잣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알 수 있는 글과 말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주셨다. 언어의 천재들만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대학 교수들만 그리스어를 이해한 것이 아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셨을 때 누구라도 그분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율법 박사들만 그분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종교 지도자만 그분과 대화할 수 있던 것도 아니다. 어부도 세리도 장애인도 바리새인도 여인들도 어린아이들도 하나님의 아들과 대화했고 그분의 말을 알아들었다. 심지어 죄인과 창녀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다. 평생을 ‘개’같이 살았던 한 강도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그 순간에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그분과 대화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고 알리시는 방법은 단순하다. 그분의 말을 듣고 이해하며 그분과 대화하는 일에서 전문가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저잣거리의 여인이나 뒷골목의 왈패들조차 알 수 있는 글과 말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셨다.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서 믿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언어로만 말씀하셨다. (라틴어 속에만 갇혀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 있는 언어로 전달되기 시작한 사건이 종교개혁이다)   고대 언어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있다면 “지금” 나에게 주신 성경은 아니다. 물론 그 성경에 기록된 언어를 자신의 일상의 글과 말로 소유했던 사람은 존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고대의 언어를 전공하고 중근동 언어를 연구해야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믿고 섬기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한 신이 아닌가?   수천 년 전에 어린아이들과 여인들에게도 말씀하실 수 있던 하나님이라면 지금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 옛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성도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면 우리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고대 언어 전문가들에게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믿음 없이 학문의 대상으로만 성경을 관찰하게 되면 ‘고대 언어와 역본’ 얘기로만 가득 차게 된다.   킹 제임스 성경의 위대함은 살아 있는 언어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히브리어를 들으면서 알았던 바로 그 말씀을,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어를 들으면서 알았던 바로 그 말씀을 오늘날 우리는 킹 제임스 성경을 통해서 정확하게 알게 된다. 킹 제임스 성경의 어휘를 재정의 하거나 재번역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왕과 신실한 일꾼들을 통해서 그 일을 이미 400년 전에 끝마치셨다. 킹 제임스 성경은 지난 400년 동안 온갖 종류의 비난과 공격, 모함에 대항하여 성공적으로 방어해 왔으며 입증되어 왔다.   비슷한 시기의 두 문서가 있는데 하나는(원이 엄마의 편지) 읽기도 힘들지만, 하나는(킹 제임스 성경) 여전히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이것이 세속적 학문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차이다.   고대 언어를 해석하는 사전(원어로 된 성경이라고 주장하지만 대개는 사전이다)에서 찾아낸 단어 몇 개로 신비로운 계시를 깨달은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스타일로 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여기저기서 찾아낸 단어 몇 개 공부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쭉 읽으라고 성경을 주셨다. 지금 내가 아이들과 함께 쭉쭉 읽을 수 있는 성경, 그것이 "지금"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 참고로 다음을 보기 바란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272    루시퍼 간단 정리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25 
2012-10-31 23:45:23 | 김재근
성경을 번역해야 하는 이유   저는 지난 12년 동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번역해서 출간/판매해 오고 있습니다.이 기간에 저는 여러 이유로 성경을 번역하겠다는 분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성경을 번역할 분들이 있을 터이므로 이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로는 제발 번역 작업을 하지 말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스스로 시간을 버리는 일이고 그 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오도될 수 있습니다.   (1) 흠정역 성경은 사역(私譯)이기 때문에 우리가 번역해야 한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대부분의 성경은 사역 성경입니다. 유명한 히브리어 벤카임 마소라 본문,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공인본문, 베자의 공인본문, 루터 성경, 틴데일 성경, 스페인의 라이나 발레라 성경, 프랑스의 올리베땅 성경과 심지어 최근에 나오는 NIV, NASB, NKJV 등이 모두 사역 성경입니다. 저희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저 개인이 홀로 번역한 것이 아니고 제가 번역한 본문을 20여 명의 형제님들이 - 다 바이블 빌리버들임 -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살펴보며 교정하고 또 10여 년의 교정 기간을 통해 여러 독자들이 지적해 준 것을 반영하여 만든 것입니다. 사역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는 역본 역시 사역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공적 성경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모릅니다. 공적인 것은 정부 같은 공적 기관에서 주도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의 유일하게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공적 성경입니다. 이분들이 무엇을 펴내도 그것은 다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을 펴서 성도들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2) 흠정역 성경은 그동안 몇 차례 판을 바꾸었기 때문에 우리가 번역해야 한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도 1611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1380년경부터 영어 성경이 나오면서 약 230년의 교정 기간을 거쳐 1611년에 본문이 고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출간하면 절대로 교정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번역의 빌미로 삼는 분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교정을 해서 바르게 내서 본문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부지런히 교정해서 본문을 정착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리 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3) 흠정역 성경은 판매를 통해 이윤을 내기 때문에 우리가 번역해야 한다.   기드온 협회나 성경 보급 기관의 무료 성경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성경에는 판매 이윤이 붙습니다. 이윤이 생겨야 교정도 더 빠르게 하고 성경 홍보도 하며 선교용으로 값싸게 혹은 무료로 성경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성경 본문 번역과 성경 출판 사업을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보급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희는 가장 좋은 재료를 써서 세상의 다른 성경들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합당한 가격에 성경을 판매해 왔습니다. 저희는 어느 누구의 돈도 갈취하지 않았고 열심히 일해서 빚지지 않고 여기까지 사역을 끌고 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 땅에서 많은 이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는 일을 직접 보았고, 이단에 빠진 분들이 바른 진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국에서도 많은 성도들이 진리 안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성경 판매로 만들어진 이윤으로 저희는 먼저 출판사를 유지하고 또 여러 종류의 책들과 CD, 전도지 등을 만들어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즈니스 차원으로 성경을 만들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저희 성경을 폄하한 뒤 "우리 교회가 공적 성경 번역의 이 중차대한 일을 실수 없이 추진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분들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이윤이 안 나면 결국 누군가 무고한 성도들의 돈이 들어가야 출간 사역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번역을 해야 할까요?   성경을 번역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지금 쓰고 있는 성경의 본문이 왜곡되어 진리를 가리거나 대본은 좋은데 번역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한성서공회의 개역성경(개정판), 표준 새번역, 공동 번역 등이 전자의 경우이고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후자의 경우이므로 저희는 바른 본문에서 바르게 성경을 새로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이 문제가 아닌 한 성경을 다시 출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희가 출간한 흠정역 성경의 본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거든 얼마든지 번역해도 됩니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됩니다.   흠정역 성경의 본문이 탐탁지 않은 경우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자기가 선정한 본문 - 원문이든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든지 - 을 가지고 스스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정직하다면 적어도 몇 년은 번역하고 또 몇 년은 교정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저희에게 고칠 부분을 알려주고 고치게 하는 것입니다. 사이트를 통해 누누이 이야기했듯이 저희는 독자들이 주는 교정 의견이 합당하면 모았다가 적절한 시기에 교정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2011년 9월에 400 주년 기념판을 냈지만 저희는 그 이후에도 독자들이 주는 의견을 귀중하게 모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역에 대한 좋은 의견이 있으면 언제라도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누군가 성경을 번역하려고 하거든 부디 번역의 대본과 질을 이유로 내걸고 새롭게 번역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온 모든 성경들의 번역 이유입니다. 심지어 NIV, NASB 등도 다 같은 이유에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이런 이유 외의 다른 것을 번역의 사유로 내거는 것은 사실 성도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들의 헌금과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부디 성도들도 다시는 그런 이유를 내거는 분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평강을 기원합니다.   2012년 10월 31일(루터의 종교개혁일에)   정동수 드림
2012-10-31 15:59:57 | 관리자
왜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는 이단에 빠져들까요? 기존의 교회들이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번역이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흥종교로 떠오르고 있는 신천지의 실상을 잠시 시간을 내서 살펴보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Y6bAp5xc8ME&feature=player_detailpage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 모두 회개하고 바른 복음, 바른 예수님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왜 이 민족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샬롬  
2012-10-31 12:25:28 | 관리자
어느 자매님의 간증의 글을 올립니다. 제가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잘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와 회심은 가짜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정동수   -------------------------- 회개 없는 구원의 위험이 글을 꼭 쓰고 싶었는데,,거처하는 곳에 PC가 없어 핸드폰으로만 보다가 남의 집에 와서 몇 자 적습니다. 저는 현재 주거지가 외국입니다. 박옥수 목사의 기쁜소식선교회(기소선)의 비리나 썩어빠진 교리 등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나의 연약함만 탓하다가 '기쁜소식선교회를 나온 사람들'이라는 네이버 카페와 쉼터의 자료실을 통해 상당한 사실들을 알았습니다,   그 후 정말 믿기지 않는 이런 비리들의 원인이 뭘까 많이 생각했고올라오는 말씀을 보며킹제임스 성경이란 생소한 성경을 알게 되었고,그 성경을 10여 년에 걸쳐 번역하고 흠정역으로 펴내신 목사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그분의 성경 지식과 교사로서의 간결함그리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 우리에게 오로지 성경만을 가르쳐주는 그 말씀들을 들으며내 마음에 말씀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그 신뢰는 믿음으로 바뀌며기소선에서 연약함으로 치부되었던 나의 믿음이이제 말씀 안에서 회개와 믿음 그리고 진정한 구원의 의미그리고 그 구원이 주는 성화의 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몰라도 저는 이 카페에서 기소선의 비리를 보며 내 구원을 의심했습니다..뿌리가 저러 할진대 그 열매인 나는 어떠한가 하고요. 수리공식적인 구원의 방법, 즉 "예수님 죽음 +죄 없다 = 의인"이것은 깨달았지만성경 말씀을 통해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다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 그 회개에서 나오는 믿음, 그 믿음의 결과는 구원그 구원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 가며,, 구원을 일로(행위로) 드러내는 성화의 과정이 나에게는 없었고그냥 “죄 없다” “의인이다”라는 주문 같은 구원만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자 기소선의 비리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구원 바로 알기" 시리즈 말씀을 일주일을 넘게 반복해서 들으며내 상태를 점검했고그 목사님 말씀처럼 178도, 179도가 아니라세상에서 180도 돌이키는 회개내 마음에 찌꺼기가 남지 않는 회개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끄집어내려도내 마음에 세상 것에 대한 아까움이 없고 내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셔서나를 인도하고, 지키고, 나를 변화시키시며절제를 주시고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기소선은 박옥수 목사가 어느 날 새벽에 스스로 깨달아 얻은 "깨달음의 구원" "죄 없다 구원"만 존재할 뿐 하나님 앞에 근본적인 회개가 빠진 구원을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회개와 믿음" 책을 발간할 때 한동안 유행처럼 "회개"를 외쳤지만전후로도 이미 "죄 없다 구원"은 "회개와 믿음"을 이겨 버리고 독자적인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어설픈 구원을 지키기 위해내 죄가 없어졌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온갖 명세표를 가진 "복음을 위하여"의 세금을 걷어 들이고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구원은 절대 완벽하지 않습니다.깨달아 알게 된 구원은, 처음엔 기쁠지 몰라도 부작용이 많습니다.혼의 자유가 없이 구원이란 것에 얽매이게 됩니다.그 구원을 깨닫게 해 준 사람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그리고 그 단체의 노예가 되고 자유의지가 사라지고 그리고 좀비가 됩니다.   그들은 살짝 변질된 말씀을 가지고 구원을 설계했고(안수복음)한번 잘못된 설계도는 아직도 수정되지 않았습니다.그 구원은 성령을 상실했고때문에 “성령의 열매는 사치스럽고 육신적이다. 우리는 연약하여 할 수 없으니 생각을 버리고, 생각을 꺾자”로 성령을 대신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갈라디아서를 통해 "육신의 행위들은(5장 18~21)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하였고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인데 이 열매를 대적할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5장 22~23절).   구원받은 자에게 한번 들어온 성령님은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습니다.항상 나를 지키고 내 양심을 선하게 하고그래서 나를 세상을 향해 절제시키고 통제하셔서온유한 맘을 품게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자기감정, 형편을 간증하는 그 찌질한 간증하고는 차원이 다른오로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줍니다.   그러한 것이 성화의 과정이고 (성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있는 것 같이 너희에게 이르렀으며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 날부터 너희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열매를 맺는도다.... 주께 합당하게 걸어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나고" (골1:6, 10)   그런데 기소선의 현실은 절대로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모두 "박옥수 열매"가 주렁주렁 합니다. 그들의 삶에 "성령의 절제"는 없습니다. “박옥수의 통제"만 있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은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절제하게 만듭니다.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삶은 육신의 절제와 함께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그 고요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지게 하고오로지 교회와 함께 행사를 하며 몸으로 처참하게 체험하는 미련한 신앙은 곧 바알을 섬기는 것과 흡사하며 그들이 말하는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흐르는 종(목사)의 말은 위에서 아래로까지 역병과 같이 죄와 사악함과 욕설과, 난폭함과 매정함을 통해성령을 훼방하고 영혼을 죽게 합니다. 차라리 비리만 있다면 좋겠습니다,그 안에서 구원도 아닌 구원을 움켜쥐고 고생 끝에 지옥가면 어쩌겠습니까?정말 무서운 현실입니다.   그 선자자 같은 종의 흐름의 결과가 또별(기소선에서 암, 에이즈 치료제로 선전하는)인 것 같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62&aid=0000004777   제가 지금 잠깐 한국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기소선 교회 자매가 간암 초기였는데 4개월 전 또별 먹고 다 나았다고 간증했습니다.근데 4개월 후인 지금 온몸에 암이 전이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이제는 듣는 것도 희미해져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간암 초기에 수술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어보니 또별 먹으면 나을 거란 믿음으로,, 믿음으로 낫겠다는 욕망, 또별을 믿는 마음, 이미 이 마음을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 같습니다.   어느 말씀인가분별없이 악을 같이 따라가는 자에게도 하나님이 악을 행하는 자와 똑같이 벌하신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교회에 또별로 인해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죽어 감을 보여 줘도그들의 악함은 도를 넘어오히려 죽는 자의 믿음을 탓하며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런 악한 곳에 머물러 있었던 우리들그리고 이제 탈출하여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우리들,,그곳에서 아직도 옳고 그른 것을 구별 못하며 오로지 "종"을 위하는 마음이 믿음이라고 믿고 있는 불쌍한 성도들우리는 그들을 위해바른 말씀을 올리고 사실들을 부지런히 전하여그들의 눈을 뜨게 할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기소선 나오신 분들도 킹제임스 성경을 보시면서 말씀을 듣고고요하게 하나님과 교제하시며 성화의 삶을 사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외국에 거하는 한 자매
2012-10-31 11:49:48 | 관리자
좋은 분석 감사합니다. 요엘서는 7년 환난기와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1-2장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1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닥칠 것을 보여 주고 3장은 주님께서 천년왕국에 들어갈 이방인들을 구분하고 그들과 및 환난기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거주민으로 삼으시고 친히 예루살렘에 거하시면서 다스리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질문의 요점은 2장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대환난에 들어간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yes와 no입니다. 사실 2장의 요점은 대환난에 들어가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그 환난(특히 끝부분)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원받을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부분은 스가랴서 12-13장에 있는 대로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을 가진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수는 매우 작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대환난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적한 대로 맞지 않게 보입니다. 이런 차원에서는 대답이 no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장 다음에 3장이 나오면서 천년왕국이 나오므로 이미 주님의 무서운 진노의 날이 끝나고 평화의 날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주의 날은 7년 환난기부터 1000년 왕국 그리고 그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을 포괄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문맥을 잘 보고 주의 날이 어느 부분을 가리키는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크고 무서운 주의 날은 유대인들의 경우 후반부 3년 반의 대환난기(특히 끝부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환난기가 시작되기 전에 주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을 가진 자들을 구출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7장의 14만 4천명의 유대인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대환난기 중에서도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생깁니다. 이들은 끝까지 견디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을 가지고 남은 유대인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갑니다. 중요한 점은 14만 4천이든 누구든 휴거받지 못하고 환난기에 들어가 환난기에서 구출받은 유대인들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2장을 가지고 유대인들 가운데 얼마는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그들은 구출을 받지만 불속에서 받듯이 받습니다(슥13:8-9). 3장에서 천년왕국이 임하는 것을 보면 이미 2장에서는 주의 날의 진노의 환난이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끝나는 내용이 없이 3장으로 넘어가 곧바로 천년왕국이 임하므로 문맥상 2장에서 주의 무서운 날(특히 끝부분)이 이미 끝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차원에서는 문맥적으로 2장이 이스라엘의 대환난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늘의 변화가 있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곧 유대인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대답은 당연히 yes입니다. 그러므로 2장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대환난에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가 없고 그 전에 구원을 받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1-2장에서 유대인들이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1-3장이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요엘서 인용도 당연히 유대인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부분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하기에 오늘날 방언 등의 오순절 은사운동 같은 비성경적인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샬롬 정동수
2012-10-30 11:43:46 | 관리자
교회는 대환란을 통과하는가? 라는 글을 읽고 덧글을 통해 이미 간단하게 질문을 드렸듯이, 박참하 목사님의 글을 다운받아 여러 번 읽어보는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하나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겪게 될 대환란에 대해서 반복해서 선포하셨습니다. 자, 다 같이 요엘서 2:31-32를 보십시오.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니 주가 말한 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구출이 있으며 또 주가 부를 남은 자들에게도 구출이 있으리라.](욜 2:31,32). 대환란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입니다. 대환란은 주의 날로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들에게 “크고 두려운 날”이 분명합니다.“   위 내용은 박목사님의 글의 일부분입니다. 제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과연 요엘서 2:31-32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이 대환란을 겪게된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얼핏 보면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라는 말이 등장하기에 근거구절이 되는 것 같지만 저의 판단으로는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우선 본문(31-31절) 자체에는 결코 이스라엘이 대환란을 겪는다는 직접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엘서 2장 전체를 읽어봐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요엘서 2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내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내어 이 땅의 모든 거주민들로 하여금 떨게 할지니 이는 주의 날이 이르기 때문이니라. 그 날이 매우 가까우니”(1절)   “....주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그 날을 견디어 내리요?”(11절 하반절)   “주께서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슬피 울고 애곡하며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시나니”(12절)   요엘서 2장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2장의 요점은, 앞으로 올 주의 날에 대해 경고 하며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결코 이스라엘이 대환란을 통과하며 겪는 고통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31,32절로 돌아가서, 그 구절들을 2장 전체의 흐름의 문맥에 놓고 보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31절의 시작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성경은 분명히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2절의 시작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어지는 32절의 내용은 “이는 주가 말한 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구원이 있을 것이며 또 주께서 부르실 남은 자들에게도 구원이 있을 것임이라”   31절과 32절은 2장 전체의 결론으로서, 2장 전체의 내용과 아주 잘 부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올 것을 경고하여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그 전에 회개하고 돌아오길 촉구하셨습니다. 또한 분명하게 31절과 32절을 통해,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자기 백성들이 회개하고(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돌아 올 것을 미리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이는 주가 말한 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구원이 있을 것이며” “남은 자들에게도 구원이 있을 것임이라”   2장 전체뿐 아니라 31절과 32절의 중심 내용은 이스라엘이 7년 대환란을 겪는다는 직접적인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두 구절에는 대환란을 통과하는 중에 구원을 받는 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대환란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글이 앞으로 이 땅에 7년 대환란이 있을 때, 그 당시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요엘서 2장 31절과 32절을 제시하며 이스라엘이 겪게 될 대환란에 대한 근거 구절로 설명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왜냐면 본문자체가 그러한 설명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구절을 근거로 성경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은 옳지만, 그에 앞서 그 구절 자체의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11-02 12:28:5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10-29 23:44:45 | 김세배
종말론에 관심이 있어서 목사님의 글을 다운받아 읽다가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대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겪게 될 대환란에 대해서 반복해서 선포하셨습니다. 자, 다 같이 요엘서 2:31-32를 보십시오.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니 주가 말한 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구출이 있으며 또 주가 부를 남은 자들에게도 구출이 있으리라.](욜 2:31,32). 대환란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입니다. 대환란은 주의 날로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들에게 “크고 두려운 날”이 분명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상을 보십시오.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구출이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자 그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입니다. ‘또 주가 부를 남은 자들에게도 구출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이방인들 중에서도 구원받을 자들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계7:9)." 위 내용은 목사님의 글의 일부분입니다. 제가 바르게 이해했다면,목사님의 설명의 요점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은 바로 '대환란'(7년 대환란)인데 그 진노를 받는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라는 것과 이어지는 내용에서 계시록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대환란을 통과하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목사님께서 인용하신 욜2:31,32절에서는, 유대인들과 남은 자들(저도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의 구원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이루어 진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환란 전에(before)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기록(욜2:31)은 분명히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before)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부분에 있어서는 성경기록과 목사님의 주장이 서로 맞지 않다고 여겨지기에 이렇게 질문을 드려봅니다. 물론 이 말씀의 대상이 구원받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2-10-27 22:54:19 | 김세배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관되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성경의 하나님은 철저하게, 너무 재미없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로 “세상에 공짜란 없다. 심은 대로 거둔다. (사람에게) 자유 의지는 철저히 존중하고 보장되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은 져야 한다”라는 f(x) → y식의 인과응보 사고방식의 신봉자라는 것이다. 오로지 복음과 구원만이 공짜이다. 물론 인간이 만든 세상 제도는 합리적이지 못하며 부정부패와 비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이를 일시적으로 허락도 하시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언뜻 보기에 잠시 통용되지 않는 것 같은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전 9:11). 그러나 하나님의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결국 인과응보가 성립하게 된다. (1)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리라. (갈 6:7) 하나님께서 결코 조롱 당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아, 성경을 보니 A를 하지 말라고? 그럼 B에 대한 언급은 없으니 A 대신 B처럼 하면 되겠네?”라든가,“지금까지 나쁜짓을 좀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 보니,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해 먹어도 되겠군? ㅋㅋ” 같은 패턴으로 요리조리 잔머리를 굴리는 게 하나님 앞에서 안 통할 거라는 말이다. 성경을 어떻게든 삐딱하게 해석하고 자기 식대로 갖다 붙이려 하는 불순분자의 심리와 의도를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으니 말이다.그리고 문장 뒷부분의 의미는 말 그대로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속담이다. (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여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살후 3:10) 성경은 단호하다. 일을 해서 스스로 돈을 벌지 않을려거들랑 밥도 먹지 말라고 그런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유야 어쨌든 다 큰 성인이 백수나 니트족으로 있다거나, 정상적인 근로 의욕마저 상실시킬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퍼 주기식 '무상' 복지 포퓰리즘 같은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삭 줍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 성경이 말하는 복지는 복지 수혜자라 해도 최대한 일은 하고서 먹을 것을 얻는 구도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건전한 근로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사람마다 사유 재산과 빈부 격차를 명백히 인정하는 논조이며, 통념과는 달리 심지어 돈으로 돈을 버는 것조차도 전면 금기시하지는 않는다(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이 게으른 종에게 왜 이자놀이라도 안 했냐고 책망을..). 탐욕을 그렇게도 정죄하고 싫어하는 성경이 한편으로 그런 자유주의 경제관도 지지한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성경적인 사고방식과 공산주의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들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성경에 '불신자만도 못한 자'라는 표현이 있을까, 없을까? 성경에서 쓰이기에는 다소 강하고 자극적인 비하 표현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성경에 나온다. 출처는 바로 딤전 5:8. 성경이 규정한 책망 대상이란 바로 '자기 힘으로 일해서 돈 벌어서 가정을 부양하지 않는 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성경의 모든 법칙에는 예외도 있다. 저건 다치거나 아파서 정말 타당한 이유 때문에 일을 못 하는 사람들까지 쫄쫄 굶으라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또한, 잘못된 사회 제도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성경은 공산주의가 생길 빌미를 제공한 악덕 자본가나 기업주, 지주, 탐관오리들을 야고보서 5장에서 신랄하게 디스해 주고 있다. 그러니 성경의 논조가 특정 이념 편향적이라는 오해는 없기 바란다. (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출 21:24; 레 24:20; 신 19:21) 갈수록 점점 더 중요하고 진지한 주제가 나온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조는 함무라비 법전이 아니라 성경(모세 율법)이다!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구약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표현에 대해서 안타깝지만 오해가 엄청 많다. 하나님이 세우신 준엄한 원칙은, 뭔가 사고가 발생하고 안 좋은 결과가 야기되었다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상황을 모조리 수습하고 원래대로 복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거 아닌가?) 가끔은 위자료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이 배상을 n배로 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형법은 현대의 법보다 처벌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엄하다. 그리고, 뭔가 영구적인 손해를 입혀서 복구가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그 피해를 가해자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 사형 제도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법규이다! 고의성이 있었는지 같은 변수가 참작되긴 하지만, 대원칙은 이러하다. 이런 법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높은 공의만이 담겨 있을 뿐, 오늘날 같이 죄인의 무슨 교화 가능성이 어떻고, 가해자의 불우한 성장 배경 운운하는 배부른 변수 따윈 없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오늘날은 이게 완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법칙으로 인식되어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지금도 이슬람권 국가에는 여자 얼굴에다 염산을 끼얹은 남자에게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으라는 판결이 이따금씩 나는가 보다. 이슬람 국가들이 다른 데서는 좀 꼴통 같은 짓을 하지만, 저런 일부 윤리 규범은 성경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아서 아주 바람직하게 잘하고 있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여자의 인생을 이것 말고 무슨 방법으로 아쉽게나마 보상하냐 말이다. 그리고 사실은 인간에게 내재된 보복 심리에 비해서 성경의 원칙이 오히려 훨씬 더 자비롭다고 볼 수 있다. 정확히 당한 만큼만 갚으라고 명령하니까 말이다. 원래 인간이란 나쁜 일을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주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깽판 칠 때 공갈을 어떻게 하던가? “도발 시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겠다”고 절대로 안 그런다. “천 배, 만 배로 보복하겠다”고 그런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했다가는 지구는 헬게이트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국민을 대표해 보복이라는 걸 딱 당한 만큼만 집행해 주는 공권력을 제정하신 것이다. 아, 물론 성경에는 마 5:38-39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명령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돌려대라는 구절도 있다. 그런데 그건 구원받은 예수쟁이라 해도 정말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아니면 지킬 엄두를 못 내는 엄청난 명령이다. 진짜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친아들을 흉악범에게 잃고 나서는 그 흉악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을 자신 있겠는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이 세상에서 왼뺨 맞고 나서는 오른뺨 돌려대고, 강도가 웃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내어 줄 참인가? 그건 그저 적당한 연기, 가식, 위선 떠는 구실로 인용하라고 있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법이라는 건 그런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worst를 기준으로 삼고 만들어야 한다. 구약 율법이 뉴턴 고전 역학이라면, 천년왕국 헌법 내지 신약 계명은 상대성 이론 정도의 위치에 대응한다 하겠다. 시간이 가는 속도가 차이가 생기고 질량이 그대로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상대성 이론은, 고전 역학보다 더 고차원적인 자연 법칙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전 역학을 바탕으로 아주 극단적인 문맥에서 물리학의 영역을 확장한 것일 뿐, 기존 고전 역학의 영역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지간한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게임 물리 엔진 정도를 만드는 데 상대성 이론이 동원되지는 않는단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4)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우리 속담 중에서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가 성경 말씀과 정확히 같은 문맥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심상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준엄한 말씀이 정확히 적용되어 패가망신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았을까?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데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죄의 결실은 사망이니, 연역법에 따라 사람은 누구나 죽고 더 나아가 지옥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5)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 (마 12:36) (6)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5) 위의 두 구절은 우리의 말과 관련하여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심은 대로 거둔다”를 설파하는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이 세상의 저명한 개독안티들이 남긴 신성모독 발언과 독설들.. 다 자기가 했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날이 온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적인 동기로 남긴 실언이나 폭언, 남에게 덕이 되지 않는 말이나 심지어 음담패설 같은 것은 결국 자기에게 올무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혀를 상대로 심하게 디스를 거는 야고보서 3장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만약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당장 기도로 '온라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과 미리 정산하는 게 좋다. 마치 경찰서 정모를 당하듯 훗날 하나님을 오프라인으로 대면하여 정산을 하게 되면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 우리는 지금까지 신구약 성경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심은 대로 거둔다” 원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은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는 원칙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은 좋아하지만, 참혹한 죄의 결과물을 거두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심상에 대한 대리 만족을 시켜 주는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에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고, 형벌도 가능하면 곧이곧대로 엄하게 집행하지 않고 어지간한 결과 수습은 그냥 세금으로 다 때우려 한다. 이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안일한 사고방식의 폐단은 결국은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세금으로 도저히 감당을 못 할 정도로 교도소 운영 비용이 증가하고 있으며(지금 미국처럼), 흉악 범죄는 갈수록 증가한다.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교도소나 가고 싶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까지 생긴다. 그 반면, 흉악 범죄 피해자의 인권은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가해자에게 너무 가벼운 형벌이 부과되는 걸 보며 통곡하고 울부짖는다. 난 구체적인 물증이 없기 때문에 논쟁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사형 집행이 흉악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이 범죄율 증가와 무관하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런 식으로 “성경적으로 단순한 원론적인 인과응보”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몇 가지 예를 열거하자면, - 무단횡단을 하다가 누가 차에 치였다면, 지금 현행법보다 보행자의 과실을 훨씬 더 높게 잡아야 한다.- 정당방위도 지금보다 훨씬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 젊은 여자가 만취 상태로 심야에 혼자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로부터 성추행/성폭행을 당했다면, 물론 기사는 크게 처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여자도 잘한 게 없으며 어느 정도 지탄받아야 한다.   이런 식.물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저런 원칙을 곧이곧대로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법학자나 그쪽 계층에서 변명을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능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 주제만 더 다루고 글을 맺겠다.여러분은 노예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성경이 노예 제도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가? 노예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대동소이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보통은 어떤 사람이나 국가 백성이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됐을 때, 죽지 않는 대신 신분을 박탈당하여 노동으로 빚을 갚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제도가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이 쫄딱 망했거나, 아니면 국가적으로는 국가가 전쟁에서 져서 패전국의 백성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나눠 갚아야 할 때 말이다. 노예를 상대로 발생하는 가혹한 인권 유린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몸으로라도 안 때우면 그 빚은 누가 상환하며, 전쟁 때문에 국가가 쑥대밭이 된 건 누가 복구하고 수습하는가? 노예 제도가 있기에 앞서 죄가 있었고 그로부터 파생된 전쟁 같은 참혹한 행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역시 “심은 대로 거둔다”로 귀착될 뿐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구원받기 전까지는 어차피 영적으로 죄의 노예이기도 하고. 성경이 과거의 그런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이라고 딴지를 거는 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짓이다.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율법은 노예를 영원무궁토록 부려먹지 말고(정확히는 노예도 아니고 그냥 종 servant이지만), 주기적으로 풀어 주라고 명시한다. 게다가 거의 반세기 간격으로 국가 경제와 국민 신분을 아예 전부 reset시키는 아주 파격적인 제도를 통해, 부의 세습과 지나친 양극화를 막고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12-10-24 18:59:10 | 김용묵
안녕하세요?   요즘 영어 킹제임스 성경 본문이 어느 것이 순수한지 알려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주로 미국의 토마스 넬슨 출판사에서 자기들의 뉴킹제임스 성경을 내면서 고의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의 대문자, 소문자 등을 바꾸는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이에 순수 영어 킹제임스 성경 본문을 구할 수 있는 호주의 사이트를 알려드리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bibleprotector.com/index.htm   이곳에서의 사역은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rAhkSYs7L0U   2011년에 출간한 저희 흠정역 성경의 한영대역 성경의 영어 본문은 이 사이트의 Pure text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만든 551쪽의 안내문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450쪽 이하에 본문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샬롬  
2012-10-23 16:31:40 | 관리자
스크리브너의 TR 이야기   어떤 분이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는 자랑스럽게 여기저기 다니며 자기 학교(펜사콜라 크리스천 칼리지(Pensacola Christian College, PCC)의 신학 대학원(Pensacola Theological Seminary, PTS))가 믿는 바를 알리고 있습니다. 자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믿으며 자기도 그렇게 확신한다고 주장합니다.   ----------------------------- 그 학교 원어 교수의 주장   보존된 성경으로는 히브리어 전통 사본과 헬라어 사본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그 종류를 공식적으로는 밝히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학교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 교과서는 벤카임 맛소라 사본(1525년판)과 TR(스크리브너 TR)이다. 스크리브너는 킹제임스 성경의 대본이 되었던 헬라어 사본, 즉 에라스무스 판과 스테파누스 판과 베자 판을 모두 검토하여 현대인들이 읽기 쉽게 TR을 최종 정리하여 1894년에 세상에 내놓았다. 일반인들에게는 스크리브너는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사본학에 있어서 TR계열을 정리한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이런 주장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의도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확신을 깨는 일을 하고 다니는 이 형제는 과연 무엇을 최종 권위로 믿고 있을까요? 이분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완벽함을 믿으며 킹제임스 성경은 단지 역본이므로 여러 가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일은 드러나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은밀히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분이 내세우는 그리스어 최종 권위는 자기 교수가 교과서로 삼은 스크리브너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스크리브너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더불어 영어개역성경(RV)을 편찬하는 일에 가담한 인물입니다. 물론 저는 그분이 훌륭한 성도요 학자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의든 타의든 킹제임스 성경을 개정하는 일에 가담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원어를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그리스어 공인본문(TR)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에라스무스, 베자, 스테파누스, 엘지버 형제의 TR 등).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베자의 TR을 본문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베자의 TR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여러 군데서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베자의 TR을 기본 본문으로 택하고 과거의 여러 역본들(시리아, 라틴 역본 등)과 교부들의 증언, 기도문 같은 증거들을 충분히 살펴보고 최종적인 번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과 베자의 TR은 다릅니다. 사실 우리는 편의상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어 TR을 번역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러면 이분이 최종 권위로 믿고 있는 스크리브너의 TR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 학교 교수의 말대로 1894년에 나온 그리스어 성경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1894년에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스크리브너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본문으로 해서 역으로 베자의 TR이 영어 성경과 다른 부분을 일일이 확인하여 베자의 TR을 교정해서 킹제임스 성경과 똑 같이 일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스크리브너의 TR은 베자의 TR과 달리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100% 똑같습니다.   오호통재라! 이분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본이라 최종 권위가 될 수 없고 그리스어 원어 성경이 최종 권위라고 주장하는데 그가 최종 교과서로 인정하는 그리스어 TR이 킹제임스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니 이 무슨 변고입니까?   그러면 어느 것이 최종 권위일까요?이분은 역본을 가리켜 최종 권위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교수가 그렇게 가르쳐서 자기도 그렇게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요. 이분들이 최종 권위로 믿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성경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최종 권위일까요? 이분들은 최종 권위라는 말을 싫어하니까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거기서 나온 스크리브너의 신약성경은 어느 것이 더 권위가 있을까요?”   우리는 솔직한 답을 듣고 싶습니다.   스크리브너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그리스어 과목의 교과서로 삼은 것은 참으로 칭찬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제대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모든 사람이 쉽게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원어, 대단히 중요합니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의 권위와 신뢰를 원어 성경에 두어야 합니다.지금도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번역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번역본 중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들(단어들)을 그대로 정확하게 담고 있는 성경이 곧 영어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그래서 웨이트 박사님처럼 저명한 원어 학자도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은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서슴없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학식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믿음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최종 권위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 신자가 어떤 성경을 들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이미 그 성경이 최종 권위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가 퇴색되어, 또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이 과거에 없었으므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이것이 최종 권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원본의 최종 권위를 주장하는 이들도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들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제 이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성경에 대한 성도들의 확신을 깨지 말고 스스로 원어 성경의 영역을 확장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하게 여기시는 사역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부디 학식에서 머물지 말고 그것 이상의 확신을 소유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충만히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참고로 스크리브너의 TR은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http://www.amazon.com/Scriveners-Annotated-Greek-New-Testament/dp/1888328053/ref=sr_1_3?s=books&ie=UTF8&qid=1350973069&sr=1-3&keywords=scrivener+greek   (*) 참고로 이 글을 적은 저도 펜사콜라 크리스천 칼리지(Pensacola Christian College)의 신학 대학원(Pensacola Theological Seminary)을 다녔습니다.   위키 백과를 보면 PCC는 오직 TR만을 지지하며 학교와 교회에서 모든 수업과 예배에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을 사용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ensacola_Christian_College
2012-10-23 15:15:15 | 관리자
진리의 순교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과 틴데일 제임스 왕(King James)이 제정한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으며 특히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없이는 킹제임스 성경의 출간이 매우 어려웠거나 지연되었을 것이다. 이에 본 부록에서는 「폭스의 순교사화」(Foxe’s Book of Martyrs)의 틴데일 편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영어 성경의 역사와 틴데일의 일생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를 통해 성경을 보통 사람들의 손에 쥐여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는지 기억하고자 한다. 영국과 영어의 역사 영어 성경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영국 민족과 영어의 역사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후 5세기에 로마가 영국 남부에서 군대를 철수하자 브리튼족은 색슨족의 도움을 받아 픽트족과 스코트족의 침략을 막아 냈다. 색슨족은 북부지방에서 승리를 거둔 뒤 돌아갔지만 그 뒤에 영국 남부를 차지하려 했다. 이런 싸움은 거의 150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 동안에 앵글로족, 색슨족, 여러 이교도 등이 고대 영국을 일곱 개의 왕국으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영국 전체에 복음의 등불이 꺼진 상태였고 6세기 후반에 켄트의 왕이었던 에델베르트(King Ethelbert, 560-616)가 회심한 뒤에야 비로소 다시 복음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 뒤 여러 왕국들은 주변의 좀 더 강한 왕국으로 합병되었고 마침내 주후 827년에 에그베르트(King Egbert, 771-839)는 이 모든 왕국을 하나로 통일하여 통치하였다.    색슨족이 다스리던 시절에는 덴마크족이 계속해서 영국을 침략했고 여러 지역을 다스렸다. 그러다가 주후 878년에 앨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849-899)은 에딩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기독교 신앙을 전하게 되었다. 그 뒤 150년 동안 영국인들과 덴마크족 사이에는 계속해서 전쟁이 있었고 영국 교회는 캔터베리 대주교인 란프랑코(Lanfranc of Canterbury, 1010-1089)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6-7세기부터 영국에서는 앵글로‧색슨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백성에게 전해 주려는 시도가 있었고 8세기 초반에는 시편과 복음서를 번역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번역본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후 735년에 비디(Bede, 672-735)는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앨프레드 대왕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기를 원하여 스스로 시편을 번역하기도 했다. 10세기 후반에는 앨프릭 대주교(Aelfric of Abingdon)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교회에서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번역했고 이로써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뒤 약 400년 동안은 영어 역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주후 1066년에서 1150년까지는 색슨족의 언어와 노르만 프랑스어가 같이 쓰였다. 그러다가 1150년 이후에 이 두 개의 언어는 병합되기 시작했고 결국 고대 색슨어가 아니라 절반만 색슨어라는 의미의 ‘반-색슨’(semi-Saxon) 언어로 귀착되었고 그 뒤 1382년에 어느 정도 영어가 정형화된 상태에서 위클리프의 영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순교자 위클리프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전혀 알지 못했고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공통으로 사용하던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성경’을 본문으로 영어 번역 성경 출간을 시도했다. 그가 번역한 성경은 잘못된 원본으로 인해 완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번역한 성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 말씀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정죄를 받고 출회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1384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성경을 번역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번역한 성경은 사람들이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야만 했다.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 데 열 달 정도가 걸렸고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성경 한 권의 가격이 당시 도서관 사서의 일 년치 봉급 정도나 되었다. 그런데도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마침내 영국 국회는 법령을 제정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영국의 아룬델 대주교는 교황에게 ‘저 사악한 위클리프’를 처치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 뒤 1408년에 그의 지휘하에 옥스퍼드 회의가 열려 “어떤 형식으로든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서는 안 되며 아무도 그런 책을 읽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결정했고 이 결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약 100년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로 위클리프의 성경을 목에 매단 채 화형을 당하며 순교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와 롤러드파(Lollards)라 불리던 그의 동역자들의 수고로 많은 성경이 필사되어 아직까지 170권이나 남아 있음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성경을 번역하고 필사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 영어 성경이 평민들의 손에 들어가자 큰 위협을 느낀 교황 요한 23세는 콘스탄스 공회를 열어 위클리프의 성경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미 죽어 무덤에 안치된 위클리프의 유골을 캐내어 불사를 것을 결의했다. 그 뒤 13년이 지나서 이들은 실제로 위클리프의 무덤을 열고 그의 뼈를 캐내어 불사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런 박해를 겪으면서도 성경을 보통 사람들의 손에 쥐여 주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손으로 일일이 필사해야만 하는 제약 때문에 원하는 대로 성경을 널리 보급할 수는 없었다. 구텐베르크와 인쇄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약 100년 전에 독일의 멘즈라는 오래된 마을에 요한 구스플레쉬(John Gooseflesh, 1397-1468)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천주교 사제들이 글을 쓰기 위해 사용하는 양피지를 만들어 어려운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요한은 어린 시절부터 칼로 조각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불 옆에서 자기 어머니가 끓이고 있는 자주색 염색 냄비를 지켜보며 나무에다 자기 이름을 조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글씨를 새긴 나무 조각들 가운데 하나가 염색 냄비 속으로 들어갔다. 얼른 그것을 꺼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그 옆에 놓여 있던 양피지에 떨어졌다. 그가 나뭇조각을 집어 올리자 그 양피지에 ‘h’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멘즈의 이 소년은 자기가 살던 옛집에서 그날 일어난 일을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손으로 책을 필사하던 그 당시의 방법보다 더 쉬운 방법으로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나무 조각을 깎아 그 위에 글씨를 새기고 염색용 잉크를 묻혀 여러 가지 형태로 배열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드디어 서양에서 처음으로 인쇄기를 발명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는  누구나 다 아는 ‘최초의 인쇄기 발명가’로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이 일에도 성경을 널리 보급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참으로 묘하게도 주후 1450년에서 1455년 사이에 서양에서 처음으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은 다름 아닌 라틴어 성경책이었다.  그리스 문화의 복원 서양에서 인쇄술이 발명되던 당시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그리스도인들과 터키 사람들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대부분의 훌륭한 학교들이 몰려 있던 그 도시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어 학자들은 유럽의 각처로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고 이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리스어 신약 성경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읽어 오던 ‘구(舊) 라틴 벌게이트’라는 번역 성경 대신 원어인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로 인해 점차 사람들은 성경을 모든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참으로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내 원어에 대한 연구와 인쇄기의 발명 그리고 영어의 정형화 등으로 인해 이런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순교자 틴데일 이 같은 변혁의 시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들이 변개한 사본을 단호히 물리치고 개혁자들과 함께 순교하면서까지 영국의 평민들에게 영어 성경을 전해 주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헌신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평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읽는 일이 훨씬 더 늦추어졌을 것이며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KJV)과 같은 걸출한 역본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성경을 볼 때마다 성경을 보존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엔 자기 목숨까지 바친 틴데일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었던 틴데일은 주후 1494년, 영국 웨일스 지방의 글로스터셔주의 노스니블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는 어학과 다른 문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고 특히 성경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 마그달렌 홀에서 지내며 마그달렌 대학의 몇몇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몰래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를 들려주었으며 성경의 지식과 진리에 관해 교훈을 주었다. 그의 예의범절과 행동 등이 성경 말씀과 일치했기 때문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덕스러운 성품의 소유자이며 흠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틈틈이 시간을 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그 학교의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152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옮겨 가서 강사로서 몇 년간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늘린 그는 그 대학을 떠나 자기 고향인 글로스터셔주로 가서 마스터 웰치(Master Welch)라는 기사(騎士)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웰치의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주인인 웰치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웰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식탁을 같이하곤 했으므로 대수도원장, 집사, 집사장, 그리고 여러 분야의 의사 및 교회의 녹을 먹는 성직자 등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이들은 틴데일과 함께 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특히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같이 학식이 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거리와 질문 등에 대해서도 서로 견해를 나누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해 온 틴데일은 이때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기 견해를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곤 했다. 그들의 의견이 자기 의견과 다를 때면 그는 언제든지 성경을 펴서 그들 앞에서 명백한 성경 구절을 보여 주곤 했으며 이로써 그들의 오류를 논박하고 자기 말을 확증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얼마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서로 의견을 제시하고 논쟁을 하다가 마침내 지쳐서 마음속으로 틴데일에 대한 불평을 품기 시작했다. 일이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진행되자 그 지역의 사제들은 선술집이나 다른 곳에서 함께 모여 틴데일에 대해 비난과 폭설을 퍼붓기 시작했고 그의 말이 이단 교리임을 확증하려 했으며 또 비밀리에 그를 주교의 종교법 고문 및 주교의 관리들 중 몇몇 사람들에게 고소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주교의 종교법 고문이 새로 임명을 받고는 여러 사제들에게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틴데일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틴데일이 그들의 위협에 대해 미심쩍어했는지 혹은 그들이 자기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음을 그가 알고 있었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밝히 드러낸 바와 같이 그는 그들의 은밀한 고소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그래서 거기로 가는 길에서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자기에게 힘을 주실 것을 간구했다.   틴데일이 종교법 고문 앞에 설 날이 오자 그 고문은 그를 심하게 위협하였고 마치 그를 개처럼 취급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아무도 고소한 적이 없는 일들에 대해서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 지역의 사제들이 거기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고소하지 않았으므로 간신히 그들의 손에서 벗어난 틴데일은 그 길로 집을 떠나서 다시 자기 주인에게 돌아갔다.   거기에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당시 주교의 고문으로 지내던 한 의사가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틴데일과 잘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틴데일은 그에게 가서 자기 마음을 열고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의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황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당신은 알지 못하는가? 그러나 말조심하게. 당신이 그런 의견을 가진 것이 알려지면 목숨이 달아날 걸세.”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틴데일은 우연히 어떤 신학자와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매우 학식이 깊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논쟁을 하다가 마침내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대해 그의 견해를 물었다. 그러자 그 위대한 박사는 다음과 같은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였다.   “성경이란 필요 없소. 보통 사람들이 읽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교황뿐이오. 교황의 법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사는 게 훨씬 더 낫소.”    이 말을 들은 틴데일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충만한 채 이 같은 신성모독 발언을 참지 못하고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에 도전하며, 만일 하나님께서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앞으로 몇 년 내에 쟁기를 끄는 소년이 교황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할 것이오.”   틴데일에 대한 사제들의 불평은 점점 더해 갔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틴데일을 향해 원성을 토로하고 욕했으며 그를 가리켜 이단이라 하면서 그가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로부터 많은 시달림과 괴롭힘을 당한 그는 결국 그 지역을 떠나 다른 장소를 찾아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 웰치에게 가서 그의 곁을 떠나도 좋다는 호의를 입게 되기를 간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인이시여, 제 생각으로는 이제 제가 더 이상 이 지역에 머무를 수 없으며 비록 주인께서 그들의 손에서 저를 보호하시려 해도 저를 보호하는 것으로 인해 많은 불명예를 당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주인의 호의를 입게 된 틴데일은 곧바로 런던으로 오게 되었으며, 거기에서도 이전 지방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얼마 동안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 런던의 주교였던 턴스탈(Cuthbert Tunstall, 1474-1559)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또한 턴스탈의 학식을 매우 높이 평가한 에라스무스의 추천의 말을 숙고하면서 만일 자기가 그의 일을 도울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틴데일은 왕의 감사관인 길포드 경에게 자기가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소크라테스의 연설문을 가지고 가면서 그가 자기를 위해 런던의 주교인 턴스탈에게 이야기해 줄 것을 고대했다. 그런데 그는 틴데일을 위해 그 주교에게 편지를 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주교를 방문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써서 헬비스웨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그 주교의 종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뜻대로 세상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틴데일에게나 자신의 교회에게나 최상의 것이 되지 않음을 보시고 그가 그 주교의 눈에 큰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다. 그 주교는 현재 자기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 틴데일을 위해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런던의 주교에게 거절당한 틴데일은 런던의 부시장 뭄무스의 집에 가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는 틴데일을 자기 집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집에서 틴데일은 매우 착실한 사제로서 밤낮으로 연구하며 지내게 되었고 주인의 호의를 입어 잘 익힌 음식만을 먹게 되었다.   이처럼 1년 정도를 런던에 머물면서 틴데일은 이 세상의 행로가 무엇인지 차츰 깨닫게 되었으며 특히 복음 선포자라 불리는 자들의 행실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그들은 교만했고 스스로 권위를 내세웠으며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겉치레는 그들의 다른 행실들과 함께 그에게 큰 불쾌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주교의 집에서 신약 성경을 번역할 수도 없고 또한 영국에서도 그 일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뭄무스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 지역에서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독일로 떠났다. 거기에서 이 선한 사람 틴데일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에 불타서 어떤 힘든 일이나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그 확실성에 대한 깨달음을 자신의 영국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자기 친구 프리스와 의논하는 가운데 그는 성경이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가난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명쾌히 읽게 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성경이 보통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평이하게 주어져서 그들 스스로 본문의 뜻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진리 안에 굳게 설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으면 그들에게 어떤 진리를 가르친다 해도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궤변이나 자기들이 고안한 전통 등으로 이 진리를 저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보통 사람들이 성경 본문의 올바른 의미를 찾아낸 경우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본문을 조작하여 본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틴데일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 가려진 것, 바로 그것이 교회 내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오랫동안 바리새인들 같은 성직자들이 가증한 행위와 우상 숭배를 행해 왔지만 보통 사람들은 성경이 없었으므로 그것들을 찾아내어 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부패한 성직자들은 전력을 다해 성경 말씀을 짓누르려고 애를 썼으며 사람들이 말씀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그들이 읽는다 해도 여러 가지 궤변으로 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흐리게 했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각종 가증한 것들을 경멸하는 자들을 위협하고 속박했다. 게다가 그들은 본문의 의미와는 다르게 성경을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 마구 뜯어고쳤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것이 다 거짓임을 알고 있다 해도 그들의 교묘한 술책을 이길 방도가 없었다.   이런저런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 선한 사람 틴데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경을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하여 고국의 단순하고도 평범한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려 하였다. 처음에 그는 독일의 함부르크로 갔다. 그러나 영국의 주교들과 사제들은 정탐꾼들을 고용하여 그의 일을 방해하였고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그가 성경을 인쇄하는 일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그는 신변에 큰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한편 쾰른에 인쇄소가 있었으므로 그는 그곳으로 가서 자기의 성경을 인쇄해 줄 인쇄공을 찾아냈다. 그는 영국의 주교들과 사제들이 이 작업이 끝난 것을 알면 자기를 체포해 갈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숨을 건지려면 빨리 도망가라는 제보가 그에게 들어왔다. 술에 취한 인쇄공으로부터 그의 신약 성경이 거의 인쇄될 단계에 있다는 것을 듣게 된 로마 카톨릭 사제가 그를 체포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간신히 원고들을 챙겨 루터가 살고 있던 보름스로 도망갔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주후 1525-1526년경에 자신의 영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였다. 그때 그는 두 종류의 성경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크기가 컸고 다른 하나는 작았다. 이렇게 한 이유는 영국의 성직자들이 큰 성경들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작은 것들은 찾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성경들을 영국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큰 통이나 짐짝에 옷가지나 밀가루 등과 함께 성경들을 숨겨 마치 다른 상품처럼 꾸며 영국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성경들이 영국에 들어와 판매되었는데 이를 알게 된 성직자들은 항구를 조사하여 성경을 찾아냈고 찾는 족족 불태워 버렸다. 한편 런던의 주교인 턴스탈과 모어 경(Thomas More, 1478-1535)은 너무나 화가 나서 틴데일의 영어 성경을 ‘거짓되고 실수가 많은 번역’이라고 폄하했으며 또한 그의 역본을 없앨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데 그 당시 포목상이던 패킹턴이라는 사람이 턴스탈 주교와 함께 앤트워프에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틴데일을 사랑하여 그 주교에게 반대로 말을 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던 주교는 어떻게 하면 틴데일의 신약 성경을 다 사들여 불태울 수 있을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패킹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주여! 주교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여기 있는 어떤 상인보다도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네덜란드 사람들과 틴데일에게서 성경을 사들여 여기에서 판매한 외국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교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그것들을 사들이기 위해 많은 돈을 쓸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교께서 지금까지 인쇄된 것 중에서 판매되지 않은 것을 다 차지할 수 있게 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 말을 들은 주교는 이제야말로 이 일을 끝장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패킹턴 선생, 부지런히 이 일을 수행하시오. 그 성경들을 구해 주시오. 비용이 얼마가 들든지 다 지불하리이다. 나는 그것들을 다 모아 성 바울 십자가 광장에서 불사를 것이오.”    이 일 뒤에 패킹턴은 틴데일에게 가서 이 모든 것을 알려 주고 서로 협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런던의 주교는 틴데일의 남은 성경을 모두 입수했고 패킹턴은 주교로부터 감사의 말을 들었으며 틴데일은 큰돈을 얻게 되었다.   그 뒤에 틴데일은 동일한 신약 성경을 한 번 더 수정한 뒤 다시 인쇄해서 이전의 세 배나 되는 양을 영국으로 보냈다. 런던의 주교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패킹턴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했다.    “외부에 그토록 신약 성경이 많이 돌아다닌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가 그것들을 다 사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 패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저는 그 당시 구할 수 있는 성경을 다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후에 더 많은 성경을 인쇄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활자와 인쇄기를 가지고 있는 한 이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쇄기까지 다 사들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 같 습니다.”    이 같은 대답에 주교는 웃고 말았고 그 문제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틴데일을 도와주던 콘스탄틴은 그 당시 영국의 종교법 고문이던 모어 경에 의해 특정 이단 교리에 대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모어 경은 그에게 물었다.    “콘스탄틴! 내가 묻는 질문에 솔직히 답변하기 바란다. 그러면 네가 고소당한 다른 모든 혐의에 대해 내가 호의를 베풀 것을 약속한다. 바다 너머에 틴데일과 조이와 다른 일당이 있는데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너는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니 돈의 출처를 알고 있을 것이다. 청하건대 그들을 돕는 자가 누구인지 내게 말하도록 해라.”   이에 대해 콘스탄틴이 대답했다.   “내 주여,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겠나이다. 우리를 도운 사람은 런던의 주교입니다. 그가 신약 성경을 불태우기 위해 우리에게 엄청난 돈을 주었습니다. 그 돈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유일한 후원금이며 위로금입니다.”    그러자 모어 경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역시 사실이군. 왜냐하면 주교가 그 일을 하기 전에 내가 주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말했으니까.”   영어 신약 성경을 6판까지 출간한 뒤에 틴데일은 계속해서 구약 성경 번역에 착수했으며 1530년에 모세오경 번역을 마쳤다. 이와 동시에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계속 읽어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매우 경건하고도 학문적인 서문을 작성했다.    한편 1535년에 커버데일은 틴데일의 신약 성경과 모세오경에 근거하여 자신의 번역본을 만들고 나머지는 스스로 번역하여 신구약 성경 전체를 담은 최초의 영어 성경전서를 앤트워프에서 인쇄했다. 이 성경전서가 영국에 들어갔을 때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온 영국 민족의 눈에 얼마나 큰 빛을 가져다주었는지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처음에 틴데일은 영국을 떠나 독일로 갔으며 거기에서 루터와 학식 있는 다른 사람들과 회의를 했다. 그 뒤 그는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다시 네덜란드로 가서 대부분의 시간을 앤트워프에서 보냈다. 틴데일의 경건한 책들 특히 그가 번역한 영어 신약 성경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해외로 퍼져나갔으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유익을 주었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사람들 곧 일반 백성들이 자기들보다 더 현명하게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진리의 빛으로 인해 자기들이 행한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적지 않은 동요를 일으켰다.     그때 틴데일은 이미 구약 성경의 신명기를 번역했으므로 독일 함부르크에서 이것을 인쇄하려는 생각을 품고 함부르크행 배를 탔다. 그러나 네덜란드 해변에서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그는 모든 책과 저작물과 필사본과 돈과 시간을 잃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배로 함부르크에 갔는데, 거기에는 약속한 대로 커버데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는 모세오경 전체를 번역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1529년 부활절에서부터 12월까지 경건한 과부인 엠머슨 부인의 집에 머물면서 이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당시 그 도시에 땀을 많이 흘리게 하는 병이 돌자 그는 함부르크에서의 일을 급히 끝내고는 다시 앤트워프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 보통 사람들의 말로 된 영어 신약 성경을 널리 퍼뜨리려고 하셨을 때 틴데일은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성경을 번역하면서 서문을 통해 만일 자신의 번역에서 잘못이 발견된다면 학식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수정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기록했다. 다시 말해 그는 지식이 있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자기의 번역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을 발견하면 예의를 갖추어 부드럽게 자기들의 학식을 반영하고 수정할 부분을 고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겸손하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그 책이 널리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 성경 안에 수천 개의 이단 교리가 있으며 따라서 그 책은 수정할 필요가 없고 완전히 파기해야만 한다고 큰소리로 주장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고, 어떤 이들은 평민들이 자기들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들은 성경이 평민들 모두를 이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상의 통치자들을 이용하면서 틴데일의 성경을 통해 사람들이 왕에게 반기를 들 것이라고 모함하기도 했다.   틴데일은 창세기 앞에 있는 서문에서 몇몇 사항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자기의 번역본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저 위대한 책인 성경을 번역할 수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기가 번역한 성경을 그런 억측으로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또한 그는, 그들이 자기가 번역한 성경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고 만일 인쇄상의 실수로 거기에 ‘i’ 라는 글자가 없는 구절을 발견하면, 무식한 사람들에게 이것이야말로 큰 이단 교리라고 당당하게 말했음을 보여 주었다.   보통 사람들에게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빼앗으려는 영국 성직자들의 악랄한 계략은 너무나도 지독했다. 사실 이들의 임무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틴데일이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이 같은 시도는 세상을 어둠 속에 가두어 둔 채 헛된 미신과 거짓 교리로 자기들의 야망과 탐욕을 만족시키며 또한 자기들의 명예를 왕이나 황제보다 더 높이면서 백성들의 양심 위에 올라앉아 사람들을 다스려 보려는 그들의 교만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침내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왕의 동의를 얻어 냈고 서둘러서 주후 1535년경에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 성경의 확산을 금한다는 선언문을 작성하여 포고했으며 이 일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더 나아가 틴데일을 자기들의 그물로 사로잡아 그의 생명까지 빼앗으려고 했다. 그들이 어떻게 이 악한 계획을 실행했는지 이제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런던의 등기소에 모인 주교들과 모어 경은 앤트워프에 있었던 것들을 다 가져다 놓고 틴데일에게 속한 모든 것을 열심히 찾아내어 조사했다. 그들은 틴데일이 어디에서 누구를 접대했는지, 그의 집은 어디에 있고 그는 키가 얼마이며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떻게 휴식을 취하는지 등을 조사했다. 부지런히 캐내어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뒤에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업적을 확고하게 할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앤트워프에 있던 틴데일은 한 영국 상인의 집을 지키는 일을 하던 포인츠라는 영국 사람의 집에서 거의 1년 동안 기거했다. 한편 1535년 5월, 그곳에 필립스라는 영국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아주 잘생긴 사람으로 신사처럼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이유로 그곳에 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때 틴데일은 상인들과 함께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이 기회를 통해 필립스는 그와 친숙해지게 되었고 틴데일은 곧바로 그를 크게 신뢰하게 되었으며 자기가 머무는 포인츠의 집으로 그를 데려가기도 했다. 또 그와 함께 한두 차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틴데일은 그와 깊은 친분을 맺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를 포인츠의 집에 거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한편 틴데일은 필립스에게 자신의 책들과 자신이 연구하는 것들 중 비밀에 속한 것들을 보여 주었다. 참으로 틴데일은 이 배신자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인츠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필립스와 알게 되었느냐고 틴데일에게 물었다. 그러자 틴데일은 그가 정직한 사람이며 매우 학식이 있고 유익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틴데일이 그에게 그처럼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본 포인츠는 아마도 필립스가 그의 친구들 중 하나의 소개로 틴데일과 가까워졌으리라 생각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필립스는 앤트워프에서 약 삼십이 킬로미터 떨어진 브뤼셀의 법정에 갔으며, 거기에서 다시 앤트워프로 오면서 황제의 변호사인 검사장과 다른 관리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때부터 삼사일 지난 뒤 포인츠는 앤트워프에서 약 이십구 킬로미터 떨어진 읍에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사업을 하게 되었다.    한편 포인츠가 없는 동안 필립스는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에게 틴데일이 안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 뒤 그는 다시 나가서 브뤼셀에서 자기가 데려온 장교들을 집 근처 거리와 문 근처에 배치했다. 정오쯤에 그는 다시 돌아와 틴데일에게 가서 사십 실링을 빌려 달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침에 이곳과 메클린 사이에 있는 통로를 지나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소.”    이에 틴데일은 사십 실링을 그에게 빌려주었다. 권모술수가 판치는 세상 속에서 틴데일은 참으로 쉽게 사람을 믿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이에 필립스는 틴데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틴데일, 오늘 저녁에 내 집에서 식사를 함께 합시다.”    그러자 틴데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마침 내가 저녁 먹으러 가는데 당신도 함께 갑시다. 그곳 사람들은 당신을 환영할 것입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틴데일은 필립스와 함께 나갔는데 포인츠의 집에 드나드는 길은 길고 입구가 좁아서 두 사람이 함께 지나갈 수가 없었다. 틴데일은 자기 앞에 필립스를 가게 하려 했으나 필립스는 자기의 배려심을 보이기 위해 틴데일을 자기 앞에 가게 했다. 그래서 그렇게 큰 키가 아닌 틴데일이 앞에 갔으며 키가 크고 잘생긴 필립스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는 이미 문 양쪽에 장교들을 배치해 놓았고 이들은 입구에서 누가 나오는지 볼 수 있었다. 틴데일 뒤에 선 필립스는 자기 손으로 틴데일의 머리를 가리켜서 장교들이 데려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었다. 틴데일을 감옥에 가둔 뒤에 장교들은 그처럼 단순한 틴데일을 보고 큰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고 포인츠에게 말했다. 그들은 틴데일을 황제의 변호사에게 데려갔으며 거기에서 그는 식사를 했다. 그 뒤 검사장이 포인츠의 집에 와서 틴데일의 소유물 곧 그의 책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가져갔다. 이로써 틴데일은 앤트워프에서 약 이십구 킬로미터 떨어진 브뤼셀 근처의 빌보르드 성(Castle of Vilvoorde)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홀로 남게 된 틴데일은 변호사와 검사를 제공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자기가 스스로 답변하겠다고 말하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또한 자기를 고소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복음을 선포했으며 성안에서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만일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겠느냐는 진술을 했다. 마침내 심문이 시작되었고 많은 변론이 있었지만 아무런 변호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죽을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칙령으로 아우그스부르크 집회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주후 1536년 10월 6일, 그는 빌보르드 성에서 사형 집행 장소로 끌려 나와 화형대에 손발이 묶인 채 화형을 당했다. 이들은 그를 화형시키면서 불로 인해 고통이 증가하기 시작할 때에 그의 목을 졸라매어 그가 사망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형대에서도 놀라운 열정을 가지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처형장의 틴데일      …제 물품들을 여기로 되돌려 보내 주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우선 따뜻한 모자가 필요합니다. 극심한 추위로 인해 저는 머리에 심한 고통을 겪고 있고, 계속되는 감기로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감옥에서 이 증세가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또한 따뜻한 웃옷이 필요합니다. 현재 제가 입고 있는 것은 너무 얇습니다. 또 제 각반을 기울 헝겊 조각이 필요합니다. 제 외투는 다 닳았고 셔츠 또한 그렇습니다.…또한 제가 바라는 것은 저녁에 초가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기가 너무나 지루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바라는 것은, 저의 히브리어 성경과 히브리어 문법책, 그리고 히브리어 사전을 가질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저의 시간을 히브리어 성경 연구로 보내기 위함입니다.…겨울을 나기 전에 제게 어떤 다른 결정이 내려진다 할지라도 저는 인내하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할 것입니다. 그분의 영께서 늘 각하의 마음을 인도하시길 기도하고 바라옵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한 죄로 체포되어 1535년 겨울 빌보르드 성에 감금되었던 틴데일이 라틴어로 써서 성주 앞으로 보낸 편지로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의 친필 기록>    감옥에 있었던 약 1년 반 동안에 그가 간수와 그의 딸과 그의 다른 가족들을 회심시킨 것을 보면, 그의 가르침이 얼마나 능력이 있었고 삶이 얼마나 성실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가 번역한 신약 성경이 이단 교리들로 가득 찼다며 대적들이 심하게 트집을 잡았으므로 틴데일은 친구 프리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그날에 하나님께서 증언해 주시기를 바라노니 나는 결코 내 양심을 거슬러 하나님 말씀의 단 한 음절도 바꾸지 않았으며, 땅 위에 있는 모든 것 즉 명예와 쾌락과 재산을 내게 준다 해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틴데일이 죽은 뒤 2년 만에 이 같은 그의 기도가 이루어져 1538년에 영국의 헨리 8세는 각 교구의 교회에 그레이트 성경을 비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 ‘커버데일 성경’, ‘로저스 성경’, ‘매튜 성경’, ‘태버너 성경’, ‘크랜머 성경’, ‘비숍 성경’ 등의 이름으로 여러 영어 성경이 출간되었으나 사실 그 내용은 틴데일이 번역한 것과 거의 같았다. 또한 그의 번역은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에 70-80% 이상 그대로 반영되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쥐여 주려 했던 틴데일의 숭고한 정신은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으로 이어졌고 18, 19세기 전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로도 이어져 우리 민족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구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부디 이 작은 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위클리프나 틴데일 그리고 롤러드파 사람들과 왈덴시아파 사람들 같은 선구자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올바른 성경을 지키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12-10-23 13:19:09 | 관리자
참고로 원어를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벤카임 사본을 구경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다가와서 원어로 장난을 치려 하면 그들이 구경도 못한 벤카임 사본을 보여 주며 이렇게 얘기하시기 바랍니다. “자네 원본을 보기라도 했나? 나는 원본이 있어. 줄 테니 가져가서 읽어 봐.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은 원본을 그대로 완벽하게 옮겨놓은 성경이야. 괜히보지도 읽지도 못하는 성경으로 성도들 믿음을 파괴하지 말고 자네 손에 있는 성경에 대한 믿음을 갖게나!”
2012-10-23 12:29:40 | 관리자
원어, 좋은 것이지만 정도를 벗어나면 독약이 된다!   30년 전 쯤 캐나다에서 유학할 때 옆방에 같이 공부하러 온 그리스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자 그는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을 아느냐고 말하면서 자기가 그리스 사람이라 누구보다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잘 읽고 알 수 있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물론 그는 교회도 전혀 가지 않았고 더더욱 성도는 아니었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은데 과연 그 말은 옳은 것이었을까요? 저도 그때는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단어들)을 지금까지 보존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그분의 말씀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행실에서 최종적인 권위로 작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실 그 말씀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중세 암흑시대에 천주교 사제(제사장)들이 라틴어로 미사를 드린 것과 똑 같습니다. 이 경우, 백성은 아무것도 모른 채 종교 의식만 행하는 것입니다.   원어 성경이 그와 비슷합니다. 히브리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원어 성경을 가져다주면 그것의 대부분을 읽지 못합니다. 학식을 자랑하는 원어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어 사전이 없이는 꼼짝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시대를 거치면서 말 자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어는 1850년대 문서를 가져다주어도 지금 그리스 사람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원어 성경의 덫에 걸리면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원어 성경 안에만 자신의 단어들을 가두어두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살펴보겠습니다.우선 말 자체가 변할 뿐 아니라 같은 단어가 여러 개의 뜻을 갖습니다. 그러면 원어를 읽고 어떤 것이 맞는 뜻인지 누가 어떻게 정할까요?   이사야서 40장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말하노라.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Comfort ye, comfort ye my people, saith your God.   여기서 ‘위로하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나함’입니다(스트롱 번호 5162).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한숨 쉬다’, 즉 강하게 ‘숨 쉬다’; 함축적으로 ‘뉘우치다’, 즉 (호의적인 의미로) ‘동정하다’, ‘위로하다’, 혹은 (재귀적으로) ‘후회하다’; 또는 (비호의적으로) ‘원수를 갚다’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동일한 단어가 삿21:15에서는 ‘뉘우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백성이 베냐민으로 인해 뉘우쳤으니 이는 {주}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한 지파를 깨뜨리셨기 때문이더라. And the people repented them for Benjamin, because that the LORD had made a breach in the tribes of Israel.   즉 동일한 히브리어가 영어로 comfort도 되고 repent도 됩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다른 것을 누가 최종적으로 구분해 줄까요?   이제 사사기 2장 18절을 봅시다.   {주}께서 그들을 위해 재판관들을 일으키실 때에 {주}께서 그 재판관과 함께하셨고 그 재판관이 사는 모든 날 동안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손에서 건지셨으니 이는 그들을 학대하고 괴롭게 하는 자들로 인하여 그들이 신음하였으므로 {주}께서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이더라.   여기에는 재판관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쇼파트’ 혹은 ‘솨파트(스트롱 번호 8199)’로서 ‘재판하다’ 즉 ‘판결을 선고하다’; 함축적으로 ‘정당함을 입증하다’, 또는 ‘벌주다’, ‘보복하다’ 등을 뜻합니다.   그래서 삼하18:19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원수를 갚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이제 내가 달려가서 {주}께서 왕의 원수들에게 원수 갚은 소식을 왕에게 전하게 하소서, 하니 Then said Ahimaaz the son of Zadok, Let me now run, and bear the king tidings, how that the LORD hath avenged him of his enemies.   한편 시82:3에서는 같은 단어가 ‘보호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아버지 없는 자들을 보호하고 고난 당하는 자들과 궁핍한 자들에게 정의를 베풀며Defend the poor and fatherless: do justice to the afflicted and needy.   자, 누가 최종적인 권위가 되어 히브리어 쇼파트의 뜻을 확정할까요?   이것은 그리스어도 동일합니다. 누가복음 16장 2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And in hell he lift up his eyes, being in torments, and seeth Abraham afar off, and Lazarus in his bosom.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하데스(스트롱 번호 86)’로서 본래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죽은 자의 거처’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총 11회 나옵니다(마11:2; 16:18; 눅10:15; 16:23; 행2:27; 2:31; 고전15:55; 계1:18; 6:8; 20:13; 20:14). 이 중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고린도전서 15장 55절은 이 단어를 무덤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O death, where [is] thy sting? O grave, where [is] thy victory?   자, 누가 그리스어 하데스를 지옥으로 혹은 무덤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요? 즉 누가 말씀의 최종 권위일까요? 하데스만으로 문제가 안 풀립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11군데의 하데스 중에서 고전15:55를 제외하고 나머지 10군데를 지옥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어 하데스의 뜻이 지옥 10번, 무덤 1번으로 확정되었다고 믿습니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은 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천주교 사본에서 나온 역본들은 거의 다 음부나 하데스로 애매모호하게 처리해 놨습니다(개역성경, NIV 등). 반면에 하나님께서 복 주신 킹제임스 성경은 확신 있게 10:1로 번역하였고 이 번역의 결과를 가지고 이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고 세상의 신학이 모두 정립되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학은 1611년 이후에 킹제임스 성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어느 분이 미국에 가서 신학을 하면서 잠시 히브리어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때 교수가 히브리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습니다. 잘 정리된 글이니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어와 영어는 속성상 구조가 다른 언어이다.  1. 히브리어는 자음(22)만으로 글자가 구성된다. (영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다)2. 히브리어는 관사(the)는 있지만 부정관사(a, an)가 없다. (영어는 정관사와 부정관사 모두 있다)3. 히브리어는 대문자 소문자 구별이 없다 (영어는 대문자와 소문자 구별이 아주 중요하다. 뜻이 달라진다. God와 god. 그러나 히브리의 ‘엘로힘’은 대소문자 구별이 없기 때문에 두 가지 뜻이 모두 포함된다) 4. 히브리어는 “be” 동사가 없다/ 단 “존재하다”는 특별 동사가 있다 (영어는 be 동사가 없이 문장을 구성할 수 없다. Ex) I am Ruth Be 동사가 없기 때문에 킹제임스 성경은 am, are, is를 이탤릭체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존재의 의미를 표현해야 할 때에는 그대로 사용했다. ex) I AM THAT I AM5. 히브리어에는 현재형이 없다. 오직 “완료”와 “미완료”밖에는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시제” 자체가 없다. 동작의 속성이나 성질에 따라서 완료와 미완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실제로 “I AM THAT I AM”은 현재형을 나타내는 “am”이 아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히브리어의 완료와 미완료를 영어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영어는 12가지 시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리되지만 히브리어의 시제는 동작의 상태나 속성에 따라 분류되기 때문이다.6. 히브리어는 소유(have) 동사가 없다. 그래서 항상 누구누구에게 속했다는 표현을 쓴다.7. 히브리어는 단어의 기본형은 항상 3인칭이다8. 히브리어의 명사에는 남성과 여성은 있지만 중성이 없다.9. 히브리어에는 복수대명사도 남성과 여성이 구별되어 있다. (영어로 they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르지만 히브리어로는 알 수 있다)10. 히브리어에는 하나의 접속사밖에 없다. 그 하나가 “and”도 되고 “but”도 되고 “therefore”도 된다. 문장의 상황에 따라서 접속사의 의미가 달라진다.11. 히브리어는 형용사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명사 안에 2차적인 뜻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ex) 코는 단순히 코가 아니라 분노를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원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사가 대단한 사람인 줄로 착각하게 됩니다. 요즘 서울에 서머나 교회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의 김성수 목사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를 다니고 미국에서 신학하고 목회하다가 들어와서 남들과 다르게 신선하게 하는 것 같으니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런데 그분은 설교와 원어 해설 시간을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가 설교 시간에 원어를 설교하면 이로써 자연스레 신분이 구분되고 성도들은 목사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즉 목사는 은근히 니골라당이 됩니다.   사실 히브리어 강의를 한 학기 듣거나 히브리어 문법책을 읽으면 누구라도 이런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교수나 혹은 그것을 들은 학생이 주장하려는 요점은 “영어와 히브리어가 이렇게 다르므로 언어적 한계가 있어서 히브리어가 아니고는 제대로 뜻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은 최종적인 권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수로부터 이런 강의를 들은 이후에 학생들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 성경이 최종 권위구나. 히브리어를 더 많이 공부해야겠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면 이제부터 그들의 최종 권위는 히브리어 혹은 그리스어 사전이 됩니다. 신학교에서 사용하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사전은 거의 불신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또 대부분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다수 사본을 배격하고 천주교 소수 사본을 옹호하는 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전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킹제임스 성경과는 거리가 먼 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학생은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부분을 많이 보면 볼수록 엄청난 금광을 발견했다는 희열을 점점 더 크게 느끼면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는 평생토록 ‘최종 권위의 말씀’이라는 기준이 없이 믿음 생활을 하고, 또 성경을 확고히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치부하며, 진리를 모르는 그 불쌍한 성도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겠다면서  자신감에 차서  다닙니다.   자, 이런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킹제임스 성경의 오류는 아모스 4장 4절 말씀에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 벧엘로 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고, 매일 아침 너희 희생제물을 가져오며, 삼년 후에 십일조를 가져오고   개역성경, NIV 등 : 벧엘에 들어가서 범죄하며 길갈에서 죄를 더하고 매일 아침 너희 희생제물을 가져오며, 삼일 후에 십일조를 가져오고   이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히브리 원문대로 ‘3일’이라 번역하지 않고 ‘3년’으로 의역했다는 주장합니다. 과연 이것이 맞을까요?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간단하게 조사를 해 봅시다.   먼저 「스트롱의 성구용어색인」에 가서 킹제임스 성경이 ‘3년’으로 번역한 단어를 찾아보면 색인 번호가 ‘구약 3117’로 되어 있고 이것의 정의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으며 킹제임스 성경의 용례도 나와 있습니다.   yowm (yome); from an unused root meaning to be hot; a day (as the warm hours), whether literal (from sunrise to sunset, or from one sunset to the next), or figurative (a space of time defined by an associated term), [often used adverb]:   KJV - age, + always, + chronicals, continually (-ance), daily, ([birth-], each, to) day, (now a, two) days (agone), + elder, X end, + evening, + (for) ever (-lasting, -more), X full, life, as (so) long as (… live), (even) now, + old, + outlived, + perpetually, presently, + remaineth, X required, season, X since, space, then, (process of) time, + as at other times, + in trouble, weather, (as) when, (a, the, within a) while (that), X whole (+age), (full) year (-ly), + younger.   이것을 통해 우리는 여기 쓰인 히브리 단어 ‘욤’이 주로 ‘날’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말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대부분의 단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며 이 히브리 단어 역시 ‘날’ 말고도 분명히 ‘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용례의 맨 마지막에서 두 번째를 보면 밑줄 친 것과 같이 ‘년’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단어가 ‘년’으로 번역된 곳을 찾아가 봅시다. 여러분이 「Englishman's Concordance」를 가지고 있으면 그 책에서 스트롱 번호 ‘구약 3117’을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약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그 단어가 쓰인 곳과 번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있으면 더더욱 편할 것입니다.   조사를 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 히브리 단어는 거의 대부분 ‘날’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끝나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25장 29절에 가보니 이 단어가 드디어 ‘년’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성벽을 두른 도시 안에 있는 집을 팔았으면 그 집을 판 지 한 해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만 한 해 안에 그것을 무르려니와   여기에도 분명히 동일한 히브리어 ‘욤’이 쓰였지만 그 단어를 ‘날’로 하면 안 되기에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그 단어의 또 다른 의미인 ‘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현대 역본들은 다르게 했을까요?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지 만 일 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한글개역성경, NIV, NASB 모두 ‘년’으로 되어 있음).   보시다시피 모든 현대 역본들도 여기에서 동일한 히브리어를 ‘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여기서 의역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그 히브리어의 뜻 가운데 ‘년’이 있음을 알았기에 여기서 정확하게 ‘년’이라 번역했습니다.   자, 더 확신을 갖기 위해 민수기 9장 22절을 봅시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그 위에 남아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장막에 거하고…(흠정역).   물론 NIV, NASV, 한글개역성경도 동일한 히브리어를 여기서 다 ‘일 년’으로 번역했습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한글개역성경, NIV, NASB)   이제 우리는 문제가 되었던 아모스 4장 4절의 히브리어 ‘욤’이 ‘하루’로도 번역되고 또 ‘일 년’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킹제임스 성경의 ‘3년’과 한글개역성경 등을 비롯한 현대역본들의 ‘3일’과 어느 것이 맞겠습니까? 성경에서 십일조가 언급된 구절을 살펴보면 ‘3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있어도 ‘3일’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너는 삼 년이 끝날 때에 그 해 소출의 십일조를 다 가져다가 네 성문 안에 저축하여(신14:28).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너는 네 모든 소출의 십일조 드리기를 다 마치고 그것을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이 네 성문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26:12).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아모스 4장 4절을 ‘3년’이라고 바르게 번역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항상 성경 문제를 포함한 모든 것에서 최종 권위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알게 된 지혜로운 성도들은 히브리어 강의를 듣거나 문법책을 읽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복잡한 원어의 모든 뜻을 일대 일 대응시켜가며 영어로 정확히 번역해서 킹제임스 성경에 보존해 주셨구나. is, am 등이 원어에 없으므로 말이 되게 넣으면서 이탤릭체로 표시하여 원어에 없었음을 알게 하시고 또 정관사, 부정관사, 접속사 하나까지, 대문자 God, 소문자 god 하나까지 하나님께서 크신 섭리로 바르게 인도해주셨구나. 이 완전한 성경이 내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내 손에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1611년 이후로 지금까지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다면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지금까지 만민의 공통어인 영어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들을 보존해 주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을 알려주는 성경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의 서신 원본을 가져다주어도 그들은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히브리어 성경이 최종 권위라고 주장하며 킹제임스 성경은 단지 역본에 지나지 않으므로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사람이 나타나면 첨부한 원본을 주고 읽고 해석해 보라고 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런 분들이 최종 권위라고 주장하는 ‘1524년 벤카임 마소라 본문의 여호수아기’입니다. 여호수아기도 가르쳐 주지 말고 일단 무슨 책이냐고 물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와 보라고 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들을 하늘에만 두었을까요?그러면 어떻게 다음의 말씀이 가능할까요?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없다면 살 수 없습니다.하나님은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그때나 지금이나 완전한 말씀을 주십니다. 저희는 그 완전한 성경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아무도 히브리어든 그리스어든 원본 자체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이 시간까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적인 잣대로 은혜롭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는 사람이 성경 신자입니다. 다시 요약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원어의 단어들을 보존하심을 믿습니다.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 성경을 향상시킨 특별 계시가 아닙니다. 만민이 보고 알 수 있게 정확하게 원어의 모든 단어를 일대 일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전혀 오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이 킹제임스 성경이 우리의 실질적인 최종 권위요, 유일한 최종 권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단어들 그대로가 만민의 공통 언어로 보존된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할렐루야!   샬롬   (*) 다음의 세 글도 같이 보시면 좋습니다.   흠정역 성경 개정 신화   딱정벌레 이야기   스크리브너의 TR 이야기          
2012-10-23 12:25:17 | 관리자
진리에 대한 오해와 역사의 진실: 영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개정 신화   1611년에 탄생된 「흠정역 성경」의 권위를 심하게 흔들려는 비평가들의 최후 배수진 가운데 하나는 소위 개정(改正)이라는 것으로 시비를 삼아 장난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대적들 곧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역사적 사실과 사본학적 증거와 성령님께서 이루신 명백한 증거들을 들이대며 자기들의 빈약한 주장을 뒤엎어 버리자 궁극적인 패배를 맛보지 않으려고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요새로 도피한다. 일단 이 요새 안에 들어서면 그들은 자기들의 대적들에 대해 자신만만해하고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러분은 어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십니까? 1611년 판입니까, 1629년 판입니까? 아니면 1769년 판입니까?”   이 같은 공격에 대해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충격을 받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면 그들은 이 혼란한 틈을 타서 재빨리 도망쳐 버린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들의 성안에 들어가 성문을 걸어 닫는 순간 그들은 자기들의 요새가 리건(David F. Reagan) 박사라는 사람에 의해 이미 조직적으로 파괴되어 완전히 허물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리건 박사는 미국 테네시주 낙스빌에 있는 트리니티 침례교회의 목사이다. 그는 「1611년 킹제임스 성경, 초기 개정 신화」(The King James Version of 1611, The Myth of Early Revisions)라는 책자를 저술하여 「킹제임스 성경」의 초기 수정판에 얽힌 신화 즉 꾸며 낸 이야기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폭로했다. 다시 말해 리건 박사는 「흠정역 성경」 비평가들의 마지막 피난처를 파괴시키는 일을 훌륭히 수행해 냈던 것이다. 이에 필자는 그가 발견한 것을 보다 개선시키려 애써야 할 이유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으므로 그의 허가를 얻어 그의 소책자 전편을 여기에 소개하는 바이다.   1611년흠정역 성경의 초기 개정 신화   마귀가 처음 이브에게 ‘속임수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방법’(고후4:2)을 가르쳐 준 이래로 사람들은 줄곧 이 방법을 사용해 왔다. 가인으로부터 발람에 이르기까지, 여후디로부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이르기까지, 중세 암흑시대 신학자들로부터 오늘날의 인본주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사람들의 부패한 손이 노리는 제1의 표적물이 되어 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격은 대개 세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첨가, 삭제, 그리고 바꿔치기가 바로 그것이다. 아담 시대로부터 컴퓨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전략은 변치 않고 동일하며 사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최근 들어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는 마귀의 공략 방법 중 하나는 영어로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 곧 1611년 판 「흠정역 성경」에 대한 정면 공격이다. 그 공격의 내용은 「흠정역 성경」이 이미 네 차례나 개정되었으므로 다른 개정 성경들에 대한 반대론은 타당치 않으며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믿을 수 없는 꾸며 낸 이야기 즉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신화는 1881년에 나온 「영국개역성경」 번역자들이 이미 사용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자신들의 최신 번역판 성경을 팔려는 근본주의 학자들의 불순한 동기에 의해 부활되었다. 이 소책자는 이러한 공격에 대한 답변을 담고 있다. 본 자료의 목적은 성경 보존을 부인하는 자들을 깨우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 있다.   이들의 집요한 공격에 답변할 때 늘 문제점이 하나 생긴다. “과연 비평가들에게 어떤 식으로 얼마만큼 대답해야만 하는가?”   만약 영어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한 천박한 질문들에 일일이 답하고자 한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어느 곳에서고 공정성(公正性)이 득세하기 마련이며 항상 그렇듯이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이다. 잠언 26장 4-5절은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을까 염려하노라.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서 그에게 대답하라.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염려하노라.”   분명한 것은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그것을 무시해야 할 때가 있고 그것에 답해야 할 때가 있다는 점이다. 어떤 공격에 대해 답변하는 것이 당신을 상대방과 동일하게 미련한 존재로 만든다면 그런 질문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최상의 답이 될 것이다. 가령,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는 아무개가 이혼을 했으므로 성경은 무오할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누가 해 온다면 이 경우에 여러분은 침묵이 최상의 답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사실 여부에 따라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문제나 질문이 제기될 경우 이것을 회피하거나 무시하게 되면 성경 공격자는 자기의 기만 속에서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고 우쭐하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매우 좋지 못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 나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의 개정 여부를 다루는 문제가 둘째 종류의 문제라고 믿는다. 만일 「킹제임스 성경」의 본문이 네 차례의 중대한 개정 작업을 거친 것이 사실이라면 기존의 영어 본문에 기초해서 진전되고 있는 성경 개정 작업에 반대하는 것은 실로 그릇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공격에 대해 진지하게 답변을 해야 한다.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답변을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독자께서는 본 부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흠정역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1. 1611년 당시의 인쇄술   만일 하나님께서 주후 1611년에 「흠정역 성경」을 통해 영어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셨다면(사실이 그렇다), 우리는 어떤 것에 근거해서 이 성경이 무오류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 근거가 번역자들의 필기 자료일까? 혹은 인쇄공들에게 보낸 교정쇄일까? 만약에 그런 것들이 근거가 된다면 이러한 종이 뭉치들은 이미 소실되고 없기 때문에 우리의 권위도 근거를 잃고 만다.   어떤 분은 인쇄기에서 맨 처음 찍혀 나온 책에 권위가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책 또한 분명히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다. 사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그 당시의 인쇄 작업 방식에 따라 인쇄되었더라면 맨 처음에 인쇄된 책은 인쇄 상태가 좋지 못했음에 틀림이 없으므로 폐기 처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첫 번째 인쇄할 때 만들어진 책들 중에서 남은 것들뿐이며, 사실 이렇게 남아 있는 책들은 다른 모든 「킹제임스 성경」을 비교하는 표준으로서 종종 지목되곤 한다. 그런데 정말로 이 책들이 표준이 될까? 초판을 찍어 냈던 초기의 인쇄공들이 인쇄 실수를 하지 않으리란 법이 있단 말인가?   이 문제를 분석하기 전에 처음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현재 손에 들고 있는 ‘보존된 영어 성경 본문’에 대한 권위는 ‘사람이 만든 그 무엇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점이다. 인쇄공들의 실수로 틀린 데나 고친 데가 있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본문이 망쳐진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앞으로도 사람들은 많은 실수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늘 틀리고 실수하기 쉬운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엄청난 능력과 사랑으로 확실하게 자신의 성경 본문을 보존하실 것이다.   자, 그러면 1611년 당시 인쇄공들의 고충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킹제임스 성경」을 처음으로 인쇄하기 161년 전인 1450년경에 독일의 요한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기는 했지만,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을 인쇄할 때 인쇄공들이 사용하던 장비는 인쇄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에 비해 거의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인쇄는 여전히 느리고 어려웠다. 모든 활자를 한 번에 한 글자씩 손으로 조판하였으니 - 성경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한 글자씩 조판했음 - 어떤 책에서도 인쇄공에 의한 실수들은 있을 수 있었다.   이런 어려움뿐만이 아니라 1611년에 「흠정역 성경」 첫 판을 인쇄했던 인쇄공들은 참조할 수 있는 이전 판조차 없었기 때문에 「흠정역 성경」 초판에는 여러 가지 인쇄상의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런 실수들은 결코 현대 성경 역본 편집자들이 자의적으로 행한 본문 교체와 같은 것이 아니며 단지 단순한 인쇄상의 실수들로서 심지어 현대화된 인쇄기의 이점을 모두 살려 만든 최근의 현대 성경 역본에서조차 이따금씩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쇄상의 실수였던 것이다. 비록 이런 실수들이 성경을 무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후기 판에서는 이런 것들을 마땅히 정정(訂定)해야 했다.   현존하는 두 개의 「흠정역 성경」 인쇄 원본은 1611년 당시에 인쇄상의 실수 없이 성경을 인쇄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 두 판본들은 옥스퍼드에서 인쇄되었고 둘 다 같은 해인 1611년에 인쇄되었다. 즉 같은 해에 두 번 출판되었던 것이다. 동일한 인쇄공들이 일을 했고 동일한 인쇄기로 인쇄를 했다. 그러나 이 두 판본을 엄밀히 비교해 보면 본문들 간에 대략 100여 개의 인쇄상 차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을 알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 비평가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출판되어 온 지난 400여 년 동안 소위 네 번의 개정 작업이 있었다고 억지 주장을 하며 그 결과 본문상의 변화로 간주할 수 있는 약 400여 군데의 단서를 발견했다고 억측을 부린다. 분명히 학자들이 거주하는 마을에는 무엇인가가 심히 부패되어 있다! 자, 이제부터 이들이 주장하는 소위 「킹제임스 성경」 본문상의 개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검토해 보자.   2. 1611년 판 KJV가 네 차례 개정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여기서 언급하는 자료의 상당 부분은 유명한 성경학자 스크리브너(F.H.A. Scrivener)가 「권위역 영어 성경(1611), 그 이후의 재판(再版)과 현대판들」(The Authorized Edition of the English Bible(1611), Its Subsequent Reprints and Modern Representatives)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책은 그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매우 학자 티를 내는 책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1884년에 이 책을 출판한 스크리브너가 1881년도 「영어개역성경」을 만든 위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는 「흠정역 성경」을 최종 권위로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의 책은 「흠정역 성경」을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흠정역 성경」의 개정’이라는 것을 다루고 있는 스크리브너 책의 첫 부분에 들어 있는 상세한 기록은 참으로 놀랄 만하다.   소위 처음에 「흠정역 성경」을 두 번이나 대거 개정했다는 것은 원판이 인쇄되고 난 뒤 27년 안에 일어났다. 독자께서 아셔야 할 것은 그 당시에 영어가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케임브리지에서 인쇄된 1629년 판 「흠정역 성경」이 첫째 개정판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개정’(revision)이 아니라 단순히 초기 인쇄상의 실수들을 정성껏 고친 ‘교정’(correction)이었을 뿐이다. 1629년 판은 「킹제임스 성경」 원판이 번역된 지 18년 후에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을 맡았던 워드 박사(Dr. Samuel Ward)와 보이스 박사(Dr. John Bois) 두 사람이 그 판의 인쇄에 직접 참여했다. 원래 번역을 맡았던 이 두 사람보다 더 초기의 실수들을 잘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로부터 9년이 지난 뒤에 다시 케임브리지에서 소위 ‘둘째 개정’이라 부르는 또 다른 판이 나왔다. 그 때까지 워드와 보이스 박사 모두 살아 있었지만 이때 그들이 그 일에 참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1881년의 「영어개역성경」 편집에 직접 참여했던 스크리브너조차 케임브리지 인쇄공들이 한 것은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이 처음으로 인쇄되었을 때 인쇄공들의 실수로 빠진 단어나 절을 원래대로 하고 명백한 인쇄상의 실수들을 교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시인하였다는 점이다.   뒤에 자세히 기술하게 되겠지만 그 연구에 따르면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서 약 400 여 군데 교정된 것 중 72%가 원판이 인쇄된 지 27년 만인 1638년의 케임브리지 판에서 완료되었다. 그러므로 소위 ‘처음 두 차례의 개정’이라 불리는 것은 사실 초기 인쇄상의 실수들을 정화하기 위한, 두 단계로 구성된 하나의 교정 공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위 ‘마지막 두 차례의 개정’이라 불리는 것들도 철자의 표준화에 필요한 두 단계로 구성된 또 다른 하나의 교정 공정이었다. 이 두 단계 교정 공정의 판들 중 처음 것은 1762년에 시작되어 7년의 기간을 거쳐 완성이 되었고 둘째 것은 1769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인본주의 학자들이 교정판에 번호를 매길 때 한 번보다는 두 번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둘째 공정에서는 본문 교정이 거의 필요치 않았다. 소위 ‘수천 개의 변화’(changes)라 불리는 것들은 이미 확립된 정확한 본문에다 철자가 변함에 따른 형태 맞추기 작업에 불과했다. 즉 철자상의 변화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철자상의 변화는 뒤에 논의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킹제임스 성경」이 ‘네 차례의 개정’을 거쳤다는 것이 한낱 기만행위요, 머릿속에서 지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기억해 두도록 하자.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많든 적든 간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 변화들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자, 이제부터 이런 변화들의 특성이 어떠한 것인지 함께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3. 소위 ‘수천 개의 변화’라는 것에 대하여   누군가가 「킹제임스 성경」의 최초 인쇄 원본을 보여 주기 위해 여러분을 박물관으로 데리고 갔다고 가정해 보자. 분명히 여러분은 성경이 전시되어 있는 유리 상자로 가서 유리를 통해 펼쳐져 있는 성경을 들여다볼 것이다. 비록 책장을 넘겨보지 않아도 여러분은 그 성경이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과 매우 많이 다르다는 것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의 단어들을 거의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낱말들조차도 아주 이상하게 쓰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여러분 이전의 관람객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1611년 원판이 인쇄된 이래로 「킹제임스 성경」도 수많은 변화를 겪었구나!”라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바란다! 여러분은 지금 단지 매우 교활한 책략에 의해 조롱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보았던 그 차이들은 실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 증거를 조사해 보도록 하자.   ● 인쇄상의 변화들(Printing Changes)   엄밀한 검토를 위해 변화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인쇄상의 변화들’, ‘철자상의 변화들’, ‘본문상의 변화들’. 먼저 ‘인쇄상의 변화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611년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사용했던 활자체는 고딕 활자체였다.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에 나오는 영어 단어들의 활자체는 아마도 로마체나 타임즈 로마체일 것이다. 고딕체는 때때로 그것이 독일에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에 독일체라고도 부른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인쇄기가 발명되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고딕체는 중세기에 손으로 작성한 필사본의 글씨체와 비슷하게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사용되었다. 로마체는 꽤 일찍 발명되기는 했지만 유럽 전역에 걸쳐 가장 유력한 인쇄체가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고딕체는 최근까지도 독일에서 계속 사용되어 왔다. 1611년 당시 영국에서는 로마체가 이미 대중화되었고 곧 고딕체를 앞지를 전망이었다. 그렇지만 원판 인쇄공들은 고딕체가 로마체보다 더 아름답고 표현 능력이 더 풍부하다고 생각했기에 고딕체를 선택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체로 바꾸어야 했고 마침내 1612년에 로마체를 사용한 첫 「킹제임스 성경」이 인쇄되어 나왔다. 그로부터 몇 년 내에 인쇄된 성경들은 모두 로마체를 사용했다. 활자체의 변화는 글씨의 형태나 크기를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성경의 본문을 고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바란다. 그렇지만 고딕체에 친숙하지 못한 현대 독자들은 그것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고딕체와 로마체 비교>     형태상의 일반적인 몇몇 변화 외에도 몇 개의 특별한 글자의 변화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고딕체 s는 대문자로 사용되거나 혹은 단어의 끝에 사용될 때 마치 로마체의 s처럼 보여 문제가 별로 없다. 그러나 단어의 첫머리나 단어의 중간에서 소문자 s로 쓰일 때는 마치 f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also는 alfo가 되고, set는 fet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변화는 독일체 v와 u에서 발견된다. 고딕체 u가 로마체 v처럼 보이는 반면에 고딕체 v는 로마체 u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w를 ‘더블브이’라 하지 않고 ‘더블유’라고 부르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좀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익숙해지면 괜찮다. 따라서 1611년 판을 보면 love는 loue로, us는 vs로, 그리고 ever는 euer로 쓰여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실 철자상의 변화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것은 단순히 활자체의 변화일 뿐이다.   또 다른 예로, 고딕체 j는 i처럼 보인다. 그래서 Jesus(예수)는 Iefus(중간의 s가 f로 변했음에 유의하라)가 되고, joy는 ioy가 된다. 심지어 고딕체 d의 굵은 종선이 뒤에서 원으로 굴려지면 그리스어 델타(δ)와 비슷하게 된다. 이런 철자상의 변화들이 소위 「킹제임스 성경」이 안고 있는 ‘수천 개의 변화’라고 불리는 것들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본문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다. 이것들은 킹제임스 영어 성경을 공격하는 자들이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두어두려고 사용하는 연막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 철자상의 변화들(Spelling Changes) 「흠정역 성경」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종류의 변화는 정서법(orthography) 또는 철자상의 변화이다. 대부분의 역사 학자들은 현대 영어가 15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611년경에는 현대 영어의 기본 단어들과 문법적 구조가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철자는 그 당시까지도 확립되지 않았다. 사실 1600년대의 철자는 매우 변덕스러웠다. 정확한 철자 같은 것은 아직 없었고 잘 확립된 어떤 철자 규정 같은 것도 없었다. 어떤 작가들은 종종 같은 책에서, 때로는 같은 페이지에서조차도 같은 단어를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고 모두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지금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1600년대가 철자 표기의 천국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단어들의 철자가 정해진 형태를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18세기 후반에 1611년 「흠정역 성경」의 철자도 표준화되었던 것이다. 현재 여러분이 갖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과 1611년의 인쇄본 사이에 어떤 종류의 철자 변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철자의 차이점을 목록화할 수는 없을지라도 몇 가지 특징은 상당히 공통성을 띠고 있다. 부가적으로 들어간 e들은 종종 feare, darke 그리고 beare 같이 단어들의 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중 모음은 오늘날보다도 더 일반적이었다. 여러분은 me, be 그리고 moved 대신에 mee, bee 그리고 mooued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 자음은 더욱 흔한 것이었다. ranne, euill 그리고 ftarres는 오늘날의 철자법에 따르면 어떤 단어가 될까? 여러분이 맞출 수 있는지 시도해 보기 바란다. 그것들은 오늘날 철자법에 따르자면, ran, evil 그리고 stars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인쇄상의 그리고 철자상의 변화들이야말로 「킹제임스 성경」 안에 있는 소위 ‘수천 개의 변화’라고 불리는 것들의 대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어떤 식으로도 결코 본문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솔직히 현시대에 천주교의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성경들에서 공공연하게 만들거나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본문 변경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다.   ● 본문상의 변화들(Textual Changes)「킹제임스 성경」도 개정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개정의 예로 제시하는 대부분의 변화들에 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해명을 했다. 이제부터 1611년 「흠정역 성경」의 본문과 현재 발간되고 있는 「흠정역 성경」 본문 사이에 실제로 본문 상의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물론 이 두 개의 본문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들은 결코 개정에 의한 변화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대개 초기의 인쇄 실수들을 정정한 것일 뿐이다. 이것이 사실임을 세 가지로 입증해 보일 수 있다:   (1) 변화들의 특성, (2) 성경 전체를 통한 변화들의 빈도, (3) 이런 변화들이 생긴 때.   먼저 영어 「흠정역 성경」이 처음으로 인쇄되던 때부터 생겨난 변화들의 특성을 알아보도록 하자. 1611년 판 본문으로부터의 변화들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은 이런 변화들의 특성들을 고려해 볼 때 분명히 인쇄상의 실수였다. 그것들은 절대로 성경 말씀의 해석을 바꾸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본문의 변화가 아니다. 처음 인쇄를 할 때 어떤 단어들은 때때로 뒤집어졌다. 때때로 복수가 단수로 쓰이기도 하고 단수가 복수로 쓰이기도 했다. 때로는 어떤 단어 대신에 그와 비슷한 다른 단어가 대신 들어가 잘못 쓰이기도 했다. 드물게는 한 단어 혹은 심지어 한 절이 삭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생략된 것들은 너무나 명백했으며 현대 번역판 성경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리적 차이는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진실로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서 인쇄상의 실수들을 정정한 것과 오늘날의 많은 인본주의 학자들이 정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스크리브너는 자신의 책의 부록에서 ‘1611년 KJV 판’과 ‘후기 인쇄본들’ 간의 변형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나는 다음의 표에 이렇게 정정된 것들의 예를 실었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예들은 스크리브너의 저서의 왼쪽 페이지에 나오는 첫째 정정 사항을 연속적으로 취한 것이다. 먼저 ‘1611년 원본’의 본문이 있고, 그 다음에 ‘현재의 본문’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처음 정정된 연도가 기록되어 있다. 지금 여러분은 지난 375년 동안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 생긴 변화들 중 5%를 보았다. 보아서 금방 판단하겠지만 이것들은 현대 역본들의 본문 변경(alterations)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사실상 인쇄상 실수들을 정정한 것이었고, 그래서 현대판 성경들의 본문 변경과 비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여러분 스스로 다음 표의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그러면 심각한 교리적 차이를 지닌 것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스크리브너의 부록 전체를 살펴볼 때 그것이야말로 그가 교리의 변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변경 사항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찾는’(Seek God)이라고 해야 할 곳에서 ‘선(善)을 찾는’(Seek good)이라고 한 1611년 판 「흠정역 성경」의 시편 69편 32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표의 10번). 그러나 이것조차도 정말로 인쇄상의 실수였음을 두 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첫째로, good과 God의 철자가 유사하다는 점은 피곤한 식자공이 교정쇄를 잘못 읽어 본문에 틀린 단어를 찍을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둘째로 이 실수는 너무도 명백해서 원판이 인쇄된 지 6년 후인 그리고 소위 ‘첫째 개정’이라 불리는 것이 나오기도 전인 1617년에 이미 제대로 수정되었다는 것이다. 1611년 「흠정역 성경」 본문에 여러 차례의 주요한 개정 작업이 있었다는 신화가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나, 아직도 조금 더 설명할 것이 남아 있다. 변화들의 특성은 이런 것들이 인쇄상의 실수들이었음을 보여 주며 또한 변화의 빈도 역시 이 사실을 입증한다. 인본주의 학자들은 1611년 판에 만들어진 수천 개의 개정 사항이 마치 최근의 현대 성경 역본들에서 발견되는 수천 개의 개정 사항과 동등한 것인 양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위 「킹제임스 성경」본문의 ‘수천 개의 개정’이라 불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활자체 또는 철자상의 변화였다. 그 밖의 것들은 분명히 지루했던 초기의 인쇄 공정에 따라 생긴 인쇄상의 실수들을 정정한 것이었다. 위에 제시한 목록의 표본은 스크리브너가 얼마나 꼼꼼하게 모든 변형들을 목록으로 만들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렇게 꼼꼼한 학자가 대단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1611년 「킹제임스 성경」과 현대 「킹제임스 성경」 간에는 단지 400여 개의 차이밖에 없음을 기억하기 바라며 또한 이런 차이점마저도 인쇄상의 실수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1611년에 인쇄된 두 개의 옥스퍼드 판 사이에도 인쇄상의 실수로 서로 100 여 개의 차이가 있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성경이 대략 1,200장으로 되어 있으므로, 1611년 판과 현재 여러분이 구할 수 있는 판과 비교하면 1장당 평균 변형은 0.33개로서 이는 3장 당 1개꼴로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런 것들은 ‘chief rulers’를 ‘chief ruler’로 ‘And Parbar’를 ‘At Parbar’로 고치는 것과 같은 변화들이었다.   이러한 변형들이 단순히 인쇄상의 실수들을 고친 것이라는 증거가 하나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것들을 인쇄한 후 매우 빠른 시기에 모두 정정했다는 점이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 변화상의 특성과 빈도는 현대 역본들의 본문 변경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변화들이 일어난 시기 자체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준다. 400여 개의 정정 사항 중 대다수는 원판이 인쇄되고 난 후 몇 년 내에 이루어졌다. 그 예로 위의 수정 사항 목록을 다시 한 번 보기 바란다. 20개의 정정 사항 중 1 개는 1613년에, 또 1 개는 1616년에, 또 1617년에, 8 개는 1629년에, 5 개는 1638년에, 1 개는 1743년에, 2 개는 1762년에, 1 개는 1769년에 정정되었다. 따라서 20 개의 정정 사항 중 16 개 즉 80%가 1611년의 초판 인쇄 후 27년 내에 정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이 여러분을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위 ‘킹제임스 성경 개정 작업’이란 것은 결코 오랫동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스크리브너 책의 부록의 다른 페이지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킹제임스 성경」 본문 정정 사항의 72%가 1638년경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더 이상 「킹제임스 성경」 개정에 대한 시비는 있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하지만 「킹제임스 성경」 본문 변화는 명백히 인쇄상의 실수에 대한 것뿐이다. 본문 변화의 빈도는 세 페이지당 한 번꼴로 드문드문 일어났으며 본문의 인쇄상 실수들의 75%가 처음 인쇄된 지 27년 내에 정정되었다. 이런 모든 세부 사항은 지난 400년간 「킹제임스 성경」에는 번역상의 오류를 바로잡거나 언어를 현대화시킨다는 의미의 진정한 개정 작업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개정판이 있었다면, 초기 식자 공정상의 오류를 바로잡아 준 판본이 있을 뿐이다.   1611년 「흠정역 성경」의 정확한 본문 - 단어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 에 대한 권위는 결코 현존하는 초판 원본에 있지 않다. 우리가 현재 손에 들고 있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정확한 본문에 대한 권위는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능력에 있다. 우리가 자필 원본이라는 것에 대해 입씨름하며 서로 다투게 될까 봐 자필 원본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번역본 성경의 교정쇄 원본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다. 우리의 권위는, 항상 그러하였듯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주님께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글의 목적은 결코 현대 역본 성경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진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킹제임스 성경」과 관련하여 근본주의 집단 내에 맴돌고 있는 그릇된 주장 즉 학자들이 부풀려 놓은 거짓 신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 신화는 다름이 아니라 「뉴킹제임스 역본」 및 기타 그와 유사한 역본들이 1611년 이래로 꾸준히 이루어진 「킹제임스 성경」 개정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 다른 개정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이론은 곧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고 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킹제임스 성경」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 같은 본문상의 개정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하지만,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네 차례의 주요 개정 작업을 거쳐 본문을 바꾼 적이 없다. 여러분은 이제 확신을 가져도 된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손에 있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결코 ‘개정된 것’이 아니라 ‘정화된 것’이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이 성경이 우리를 위해 ‘영어로 보존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정확성에 대한 권위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의 초판 인쇄본에 있지도 않고 제임스 1세의 인품에 놓여 있지도 않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문학의 뛰어난 업적에 있지도 않고 심지어 그리스어 「공인본문」에 있지도 않다. 영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KJV)이라는 절대 무오한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하신 약속과 그분의 능력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에 그분의 말씀이 있다.
2012-10-23 11:43:55 | 관리자